Categories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우상의 몰락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좋아했다.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외치며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하얀 분장의 프론트맨이 세상이 싫었던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 볼링 포 콜럼바인 >을 보고 나서는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록스타의 환상까지 더해졌다. < Antichrist Superstar >, < Mechanical Animals >, 1997년 MTV 어워드에서의 ‘The beautiful people’ 라이브, 베스트 앨범 < Lest We Forget > 등등. 많이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젠 어디서도 마릴린 맨슨을 좋아했노라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그는 추악한 성폭행 범죄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당시 19세 나이로 맨슨과 교제하던 배우 에반 레이첼 우드가 지난해부터 맨슨의 그루밍과 학대,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Heart shaped-glasses’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성폭행을 가했고, 하루 152번 이상 전화를 걸었다는 등 집착이 심했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인 내용도 아니다. < 왕좌의 게임 >에 출연한 배우 에스미 비앙코 역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마릴린 맨슨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맨슨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15명이다. 맨슨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레이블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맨슨은 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대중 앞에 섰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카니예 웨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다 ‘생일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래퍼, 악명 높은 강간범 빌 코스비의 무죄를 외치며 관심을 끌고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망언을 내뱉다 아내 킴 카다시안에게 버림받은 래퍼, 카니예 웨스트였다.

카니예 웨스트는 소문만 무성하던 앨범 < Donda >의 2차 리스닝 파티에 마릴린 맨슨을 초대했다. 시카고 솔져 필드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 세트장에서 난간에 기댄 채로 모습을 드러낸 맨슨은 수록곡 ‘Jail pt.2’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맨슨의 옆에는 래퍼 다베이비가 있었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메가 히트 싱글 ‘Rockstar’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레이션 ‘Levitatin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7월 마이애미의 힙합 페스티벌 공연 도중 “에이즈, 성병에 걸려 2~3주 안에 죽을 일 없는 사람들, 게이, 문란한 여자들 제외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라 발언하며 장내를 침묵에 빠트렸다.

논란이 된 후에도 다베이비는 소셜 미디어에 실언을 늘어놓고 조롱 격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고 엘튼 존, 마돈나, 릴 나스 엑스 등 아티스트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도 ‘Jail Pt.2’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릴린 맨슨과 다베이비가 참여한 < Donda >는 ‘인디펜던트’지에게 0점을 받았다. 불공정하다고? ‘인디펜던트’ 지를 제외하고도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에는 문제가 많았다. 2020년부터 작업을 알렸던 앨범은 수차례 발매 연기된 끝에 8월 29일 기습 공개됐고, 그마저도 미완성본이라 두 번의 추후 수정을 거쳐야 했다.

실망이 컸음에도 나는 < Donda >를 동정했다. < Jesus Is King >부터 의아한 행보만 보여준 칸예지만, 호불호를 떠나 지난 20년을 지배한 시대의 아이콘이 정신을 차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지난 1월 13일 사인을 요청한 남성 팬을 때려눕혀 LA 경찰에게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탕한 록스타들과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친숙했던 나는 예술가들의 경거망동에 관대한 편이었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 믿기도 했고, 대놓고 자랑할 순 없어도 일종의 길티 플레저처럼 아쉬움을 곱씹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내심이 낮아진 것일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물들어버렸나?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수의 노래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이 사실은 추악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다. 마릴린 맨슨, 카니예 웨스트, 다베이비의 음악을 좋아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된 허탈함이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논란 없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들이 있다. 우상은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다른 우상이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 The Nearer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 >를 발표한 블러, 고릴라즈의 데이먼 알반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며 논란을 자초했다. 평가 절하, 여성 간의 비교, 어이없는 변명까지 현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삼대 금기를 충족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기타 히어로에서 백신 반대 운동 투사로 직업을 변경한 에릭 클랩튼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했노라며 접종자들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희생자들이라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는 애써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의 권위는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Categories
특집 Feature

[특별 기획 ‘미국’] 6. 케이팝 팬덤이 사회정의를 부르짖는 이유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아무도 없다고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와 담을 쌓은 케이팝이 되려 미국 정치에 휘말리는 아이러니를 예측한 케이팝 기획자가 있을까. 케이팝 팬덤은 올해 6월 오클라호마 털사(Tulsa)에서 개최된 트럼프 대통령의 유세에서 백만 건이 가까이 이루어진 가짜 참석 신청의 배후가 자신들임을 주장했고, 그 이전에도 백인우월주의나 극우 이념에 관련된 해시태그를 케이팝 이미지와 영상으로 도배하는 등 정치적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고 있다. 예상치 못한 전개지만 케이팝 팬덤과 정치의 결합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연결고리를 들여다보면 앞으로 케이팝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단서도 찾을 수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인기에서 유념할 점은, 그 시작점이 주변부였다는 사실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차트 1, 2위를 한 번에 차지하는 나날이 있기 전에도 케이팝 팬들은 존재했으나, 이들은 멸시나 조롱, 혹은 무시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일종의 마니아 문화로 시작한 탓도 있겠지만, 문화의 생산자나 소비자들에 대한 편견도 분명하게 작용했다. 클래식 음악이나 커피, 와인처럼 소수가 몰입해서 소비하는 문화가 무조건 천대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팝의 ‘성공’이 완성하는 언더독 서사는 이런 배제의 역사에서 설득력을 얻고 팬들을 결집시킨다.

미국 케이팝 팬덤은 크게 보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같은 긱(geek)들의 문화와 그 뿌리를 공유한다. 단적인 예시로 케이콘(KCON)이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을 사랑하는 수만 명의 팬들이 로스앤젤레스나 뉴욕으로 몰려드는 이 축제는 미국 케이팝 팬덤의 주요 행사 중 하나다. 만화 팬들의 코믹콘(Comic-Con)이나 게임회사 블리자드의 블리즈컨(BlizzCon) 같은 박람회와 비슷한 양상이다. 한류는 서브컬쳐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활동 영역에 들어와 있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는 게임과 만화, 케이팝 같은 서브컬쳐 커뮤니티의 큰 축이다. 생각해보면 케이팝 팬들이 트위터나 틱톡을 통해 활동하는 것은 한국 케이팝 팬덤의 특성을 떠나서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케이팝이 정치나 사회정의(social justice)와 어느 지점에서 교차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케이팝을 논할 때 그 음악이 가진 소구력의 실체를 부정한 채 인기를 괴현상 보듯 하는 시선들이나, ‘진보 성향의 요즘 애들이 이상하게도 한국의 음악을 좋아하더라’는 미국 보수진영의 해석이 이 수준에서 멈춰있다.

케이팝이 미국에서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한 공감대를 이끌어낸 이유는 일종의 문화적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뻔하고 지루한 음악에 질린 미국 대중들에게 새로운 재미를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그런 이유로 케이팝을 소비하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그 반대다. 케이팝 팬들은 미국 음악계, 연예계의 자극적이고 저질인(trashy) 논란으로 가득한 모습에 대한 대안으로 ‘착한'(wholesome) 한류 뮤지션을 소비한다.

칸예 웨스트는 2009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는 테일러 스위프트의 마이크를 뺏었고, 저스틴 비버는 아이돌로 활동하던 2013년 식당의 걸레통에 소변을 봤다. 2015년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도넛에 침을 발랐는가 하면, 도자 캣(Doja Cat)은 백인우월주의 채팅방에서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 영상이 올해 공개됐다. 미국에서 차트 1위를 하는 슈퍼스타 뮤지션들에 대한 소식은 이들의 실력 못지않게 비대한 자아와, 이를 연료 삼아 끊임없이 논란에 불을 지피는 티엠지(TMZ)같은 가십 전문지가 내뱉는 황색 저널리즘의 온상이다.

아이돌을 필두로 한 한국의 대중음악이 미국에 알려지는 과정에서는 뮤지션의 비대한 자아도, 미국 유사 언론의 관심도 부재했다. 미국의 케이팝 팬들 중 주류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소수자들, 사회정의나 정치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의 실마리가 여기서 풀리기 시작한다. 자신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의 폭력적인 구조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미국의 주류문화에 염증을 느낀 이 사람들은, 타인을 깔보거나 하대하기는커녕 예의와 존중으로 무장한 한국 아이돌들의 페르소나를 보고 공론장을 정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투사한다. 이 ‘착함’의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말이다.

출발점이 어디였든 케이팝이 지금 미국 팬들에게 받는 기대는 선함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케이팝 팬덤이 커지면서, 기획사들이 팔고 있는 이미지와 그 뒤에 숨겨진 ‘본질’ 사이의 간극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이젠 들려오고 있다. 문화전유나 뮤지션, 연습생의 인권에 대한 지적은 모두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기준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점점 소수가 되어가고 있다. 케이팝이 영미권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두려면 멋진 음악과 영상 이상의 섬세함이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