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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First Of All'(2022)

평가: 2.5/5

< 슈퍼스타 K > 마지막 시즌 당차게 등장한 소녀는 감정에 북받쳐 열정의 한풀이를 토해냈다. 본인의 간절한 이야기를 투영한 ‘Stand up for you’와 ‘Higher’에 시청자는 매료되었고, 스스로 쟁취한 무대에 올라선 후에도 박혜원은 우직하게 재능을 갈고 닦으며 진정성을 재차 입증해왔다. 활동명을 변경한 흰(HYNN)은 마침내 ‘시든 꽃에 물을 주듯’을 차트 정상에 올려놓으며 손승연과 에일리를 잇는 차세대 보컬리스트로 우뚝 올라섰다.

큰 족적을 남긴 대표곡이 전력질주였다면, 대척점에 선 정규 1집 < First Of All >은 산뜻한 산책에 가깝다. 양파와 함께 포문을 연 ‘Sweet love’, 어린이 합창단이 코러스를 얹은 ‘기적’ 모두 성대에 힘을 빼며 편안한 환경을 조성하고, 카더가든과 발맞춘 ‘내 사랑’도 노래의 기술적인 측면보다 안정적인 듀엣에 초점을 맞춘다. 가창력의 진검승부 대신 잔잔한 흐름 속 여러 조력자와 함께 목소리의 합(合)에 집중하겠다는 의도다.

매끄러운 조화(調和)가 인상적인 ‘이별이란 어느 별에’는 이 전략의 실효성을 어느 정도 보증한다. 파열음으로 강한 타격감을 선사하는 래퍼 조광일과의 협업은 꽤나 난이도가 높은 작업이었을 테지만, 요점을 잘 짚었다. ‘처절한 분출’이라는 감정의 전달 방식을 공유한 둘은 밀려드는 현악기 선율 위 공존에 성공한다. 조광일만큼 독특한 색채를 지닌 인물과도 교집합을 그려낼 수 있다는 융합력,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성실한 태도를 증명한 순간이다.

앞선 전개와 달리 홀로 이끌어가는 후반부는 혼란스럽다. 앨범의 뜻을 한 데 모을 응집력있는 메시지가 부재하고, 서로 다른 분위기의 트랙들도 동상이몽 중인 탓이다. 단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긴박하게 치닫는 ‘결승선’은 대체로 부드러운 질감의 신보에 융화되지 못한다. 전반부와 유사한 방향을 그리고 있는 ‘그만할래, 이별하는 거’도 피아노 반주 위 독백하는 구조가 오디션 프로그램 예선과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일체감을 가로막는다.

군데군데 성과가 뚜렷함에도 잠재된 표현력과 가창력을 표출하기에 < First Of All >은 비좁고 무디다. 데뷔 후 4년간 꾸준히 발전한 모습을 보여온 흰(HYNN)의 정식 출사표치고 그렇다는 것. 타고난 재능과 자만하지 않는 치열한 연습량,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기량 상승의 흔적은 여전하다. 고군분투하며 형태를 잡아가는 원석의 제련 과정이 다소 투박해도 영롱히 빛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수록곡 –

  1. Sweet love (Feat. 양파)
  2. 기적 (You are my life)
  3. 내 사랑 (Duet. 카더가든)
  4. 이별이란 어느 별에 (Feat. 조광일)
  5. 결승선 (Run)
  6. 이별이란 어느 별에 (Sleepless night ver.)
  7. 끝나지 않은 이야기 (The story of us)
  8. 그만할래, 이별하는 거 (No more goodbyes)
  9. 기적 (You are my life) (Inst.)
  10. 이별이란 어느 별에 (Feat. 조광일) (Inst.)
  11. 결승선 (Run) (In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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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일 ‘깽값’ (Feat. 개코) (Prod. 슬롬) (2022)

평가: 3/5

파열음 가득한 특유의 쾌속 래핑엔 분노가 서려 있다. 지난해 힙합 경연 프로그램 < 쇼미더머니 10 >의 우승자 조광일은 여전히 빠르기에 초점을 맞춰 날을 세우고 있는 헤이터들의 시기 질투에 순응하지 않는다. 편협한 시각에 맞서 속사포로 쏟아낸 대답은 날카롭다. 래퍼라는 직함을 달고 얻어걸려 식의 돈벌이만을 쫓는 작금의 힙합 신을 매섭게 채찍질하며 자신을 향한 여론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되새긴다.

작년 < 쇼미더머니 10 >에서 인연을 맺은 든든한 지원군이 힘을 보탰다. 스산한 분위기를 조성한 슬롬의 맞춤 프로듀싱이 훅 없이 랩으로 채운 곡 구성에 팽팽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개코의 피처링 합류는 또렷한 발음을 지닌 두 래퍼의 시너지를 촉발한다. 그 어느 때보다 타격감 넘치는 랩이 ‘속도만 빠른 래퍼’라는 의심을 거듭 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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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일 ‘이인증’ (2021)

평가: 3/5

어둡고 짙고 기괴하다. 내가 낯설게 느껴지는 자아의식장애란 뜻을 가진 ‘이인증’을 통해 삶을 둘러싼 고통을 토로한다. 자신의 무기인 속사포 래핑과 파열음을 터트리며 내뱉는 단어들이 단숨에 곡의 집중도를 높인다. 노래가 주는 불안함이 어쩌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조광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서사 속에서 크게 이질감은 없다. 본인의 재료를 가지고 내면을 깊게 파고든다. 흔들림 없는 강렬함, 망설임 없는 나아감. 음악적 정체성을 선명히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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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IZM 연말 결산 특집 Feature

2020 올해의 가요 싱글

전대미문의 ‘거리두기’ 현실에서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이 위협받는 가운데 가요계도 잠시 숨을 고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결코 멈추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대중가요는 삶을 위로하고 웃음을 선사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IZM 선정 2020년을 대표할 가요 싱글 10곡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오마이걸(OH MY GIRL) ‘Dolphin’

식상한 패턴을 비켜가면서도 트렌드를 붙잡으려 애쓴 음악적 성의가 끝내 형통했다. 댄스 퍼포먼스 혹은 비주얼의 개가, 화제성의 산물, 마케팅의 성과 등등을 들먹이기 전에 음악 정확히는 곡의 승리였다. 듣기에 따라 건조할 수도 있고 습할 수도 있는, 조금은 우기듯 기분 좋게 반복하는 ‘다 다 다..’ 리듬에 바로 이어지는 ‘또 물보라를 일으켜’까지의 대목은 2020년 가장 중독화에 성공한, 나른하지만 무감각을 찍어 누르는 매혹의 코러스다. 

짧지만 돌아가면서 부르는 멤버 모두의 수준급 보컬도 승리를 거들었다. 이 때문에 로맨틱한 가사가 살고 실종된 청순과 설렘이 복권된다. 노래에서 화자가 좋아하는 하트 상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오마이걸 자신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돌핀으로 팬들 마음에 새겨진다. 여성 팬이 찾고, 어른도 반응하고, 놀랍게도 헤비메탈 광이 호감을 내비친다. 고질적 성, 세대, 장르 분리의 유쾌한 은폐. 오마이걸에게 ‘걸 그룹의 걸 그룹’이란 수식을 제공해준 2020년의 러브 송! (임진모)


이날치 ‘범 내려온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올라온 영상이 시작이었다. 간결한 베이스가 도입부를 알리자 한복과 정장을 장착한 춤꾼들이 리듬에 맞춰 조금씩 전진하고, 그 위로 구수한 판소리가 힘차게 탑승한다. 다들 태연하게 제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분명 동서양의 문화가 한 데 뒤엉키는 혼란스러운 상황. 밴드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협업으로 탄생한 기상천외한 공존, ‘범 내려온다’ 속에는 조선시대 놀이판의 오색찬란한 광경이 다시금 호출되고 있었다.

아방가르드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혹은 퓨전 국악을 지향한 씽씽과 불교음악을 다룬 대형 연주단 비빙과 같이, 이날치 역시 수많은 분야를 탐험해온 장영규의 잠시 스쳐 가는 연장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곡이 지닌 기세 속에는 최근 국악계의 진보적 흐름에 단순 동참하는 의의를 넘어, 도리어 앞장설 수 있을 만큼의 우수한 포용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역사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원재료를 가지고도 젊은 세대를 스스로 들썩이게 만들지 않았는가. (장준환)


조정석 ‘아로하’ 

가수의 조건 중에서 사람들은 가창력에 비해 발성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지만 가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곡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전달도 애를 먹는다. 또 작사가에게도 미안하고. 배우 조정석은 초등학생이 듣고 받아쓰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뚜렷한 발성을 구사한다. 이것만으로도 조정석의 ‘아로하’는 2020년에 가장 평가받아야 할 노래 중 하나다. 

가창력도 기대 이상이다. 이재훈과 유리가 부른 쿨의 원곡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부른 조정석은 남자와 여자의 키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또박또박한 가사를 통해 사랑스런 노랫말을 더욱 아름답게 격상시킨다. 배우로서 발음이 좋은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조정석은 ‘슬기롭게’ 잘 불렀고 듣는 사람들은 그 점을 충분히 ‘납득’한다. (소승근)


창모 ‘Meteor’

올해를 대표하는 가요 싱글들을 보고 한 해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면 ‘Meteor’를 빼놓고 2020년을 논할 수 없다. 힙합이 팝이 된 시대에, 특히 ‘그’ 오디션에서가 아닌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노래하는 이 래퍼에게 세상은 손을 들어줬다. 피아노 연주부터 비트 메이킹, 프로듀싱, 랩 스킬까지 탄탄한 실력을 겸비한 음악가에게 무시 못 할 히트곡까지 터졌으니 그 누가 의심하랴.

2019년 12월 하늘에서 떨어진 ‘Meteor’로 ‘마에스트로 (Maestro)’를 밀어내며 대표곡 자리를 갈아엎은 그는 피아노 치는 래퍼 대신 카니예 웨스트식 작법과 자전적 가사, 그리고 보컬 이펙트의 이상적인 조합으로 익숙한 새 개성을 손에 넣었다. ‘덕소의 아들’에서 ‘랩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덕분에 한 단계 발전해 ‘팝스타’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위치까지 올랐다. (임동엽)


아이유(IU) ‘에잇 (Prod. & Feat. SUGA of BTS)’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개성이 뚜렷한 두 명의 28살이 만났는데, 각자의 질감을 유지하다가 융합하기도 하면서 또 서로에게 새로운 시도였을 장르를 말끔히 소화한다. 거기에 여러 차례 곱씹게 되는 언어의 힘까지. 시원하게 뻗어 나아가 카타르시스에 닿는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와 달리 오직 기억 속에 머물러있는 노랫말은 너무나도 시리기에, 어느새 우리도 ‘한 뼘짜리 추억’을 함께 거닐고 있다.     

지극히 본인의 이야기임에도 저마다 가슴 깊이 눌러 담았던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함을 떠오르게 한다. 들춰내는 것도 아니고 헤집어 놓는 것도 아닌, 슬그머니 ‘서로를 베고 누워’ 그리움을 어루만진다. 아이유는 스물여덟의 반복되는 무력감과 무기력함을 고백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 보다 힘겨웠던 2020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그야말로 ‘올해의 힐링 곡’. (임선희)    


가호 ‘시작’ 

긍정적인 힘이 필요한 한해였다. 코로나 19시대에 갇혀 움츠러든 대중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시작이란 단어는 잊혀가는 일상 중 하나였다. < 이태원 클라쓰 >로 발현된 화제성이지만, 올해 2월 발매된 가호의 ‘시작’이 드라마가 종영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곁에 머물며 시대와 호흡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희망을 원했고, 그곳에서 위로를 찾았다.

무엇보다 순수하다. 밝은 내일이라는 목표가 직선적인 록 사운드로 표현된 곡은 ‘워’와 같은 추임새 등 영상 음악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살리며 새 출발의 설렘을 담아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청자에 다가선다. 사람의 체온과 닮은 ‘시작’의 온도에 무명 가수의 목소리는 서서히 퍼져나가며 멜론 차트 1위, 소리바다 어워즈 OST 부문 수상 등 확실한 기록 또한 남겼다. 특정한 지지층 없이 음악으로만 이뤄낸 의미 있는 결과다. 너무 뜨겁지 않게. 하지만 따뜻하게 2020년을 감싸 안았다. (손기호)


DAY6(데이식스) ‘Zombie’

반복되는 일상 속 무력해진 자신을 ‘머리와 심장이 텅 빈’ 좀비에 빗댄다. 괜찮다는 위로나, 애써 고통의 실타래를 벗어나라는 긍정의 메시지도 없다. 데이식스의 여섯 번째 미니 앨범 < The Book of Us : The Demon >의 타이틀곡 ‘Zombie’는 밴드의 작품 중 가장 어둡고 비관적이다. 벌스(Verse)와 후렴의 멜로디를 일치시킨 간소한 구성이 자연스럽게 보컬에 귀 기울이게 하고, 영케이와 원필이 직접 쓴 노랫말의 음울한 정서를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마음을 찢어놓는다.

뒤숭숭한 한 해였다.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에 사람들은 고립됐고, 설상가상으로 국내에는 태풍의 악재까지 겹치며 일상을 빼앗겼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들을 흘려보내며 몸도 마음도 지쳐간 이들이 많았을 터. 이 노래가 그 시대성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Zombie’는 묘하게 그런 시대의 모습과 맞아떨어지며 어두운 시기를 걷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나은 일상이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이홍현)


지코 ‘아무노래’ 

이 노래의 히트는, 이미 영미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챌린지’ 프로모션이 국내에도 정착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초반 30초에 모든 곡의 매력을 집대성하고, 여기에 따라 하기 쉬운 안무를 장착. 다양한 분야의 셀럽을 참여 시켜 진행한 SNS 홍보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트렌드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체화한 지코 본인의 프로듀싱 역량.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그루브한 싱잉-랩, 비트 위에 자연스레 스며있는 보사노바의 기운, 구성을 완벽히 다르게 가져가며 곡에 몰입을 유도하는 인트로와 아웃트로 등. 남들이 조금씩 흉내만 낼 때, 그는 본인의 음악적 매력을 적확하게 녹여내며 승기를 잡았다. 트렌드에 대한 이해와 음악적 역량이 빚어낸 전략이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하느냐에 대한 그 예제, 지코가 확실히 보여준 셈. (황선업)


조광일 ‘곡예사’ 

이해되는 광기, 소화되는 분노다. 빽빽하다 못해 뾰족하게 쏟아지는 속사포 래핑과 열에 받쳐 토해내는 서사들은 흐트러짐이 없다. 더하여 확실하게 들리는 발음은 더욱 강한 주목 및 집중을 끌어낸다. 2019년의 끝에 발매한 싱글 ‘Grow back’을 출발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조광일은 올해 이 노래를 통해 확실한 자국을 남겼다.

자신을 줄을 타는 곡예사에 비유한다. 아니 그보단 아찔한 줄타기처럼 짜릿한 랩을 탄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시작과 동시에 정신을 쏙 빼놓는 그의 소리침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과 거친 포부로 읽힌다. 랩 스킬, 데뷔를 각인시킬 가사, 호흡. 무엇하나 빠짐없이 날카롭다. 튕기듯 쏘아내는 랩과 그 안에 담긴 생생한 래퍼로서의 자신감. 돋보이는 신예다. (박수진)  


블랙핑크(BLACKPINK) ‘Lovesick Girls’ 

블랙핑크는 케이팝 스타에서 팝 스타가 되어가는 올바른 선례를 보여줬다. 셀레나 고메즈(Selena Gomez)와 함께한 ‘Ice cream’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3위에 데뷔했고, 세계적인 팝 스타 레이디 가가(Lady Gaga), 카디 비(Cardi B)와의 작업으로 팝 시장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단계를 거듭하는 전술 끝에 < The Album >이 빌보드 앨범차트 2위의 쾌거를 이루며 인기의 정점을 증명했다.

‘Lovesick girls’는 팝스타의 위치를 선점하면서도 케이팝의 보존을 꾀하기에 더욱 의미 있다. 2000년대 미국의 틴 팝(teen pop)을 떠오르게 하는 에너제틱한 청량함과, 블랙핑크 특유의 마이너한 색깔을 적절히 배합한다. 여기에 케이팝의 성질을 주조하는 직관적인 신시사이저 리프와 촘촘하게 짜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짜릿한 쾌감의 원천! 비로소 국내외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유다. (조지현)


IZM 2020 연말 결산 페이지

IZM 2020 올해의 팝 싱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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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일 ‘암순응’ (2020)

평가: 4/5

어둠 속에서 더욱 또렷이 보인다. ‘곡예사’로 2020년 한국 힙합 신의 모든 이들을 입 열게 만들었던 조광일은 깊은 심연 속에서 시장의 타락과 재물 숭앙 행태를 목격하며 분노를 씹어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폐관수련 도중 ‘BB 바른 어떤 래퍼’의 충고를 트리거 삼아 큰 한 판으로 경종을 울린 그는 이제 도전적인 앨범 단위의 결과물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더 많은 이들의 입에 올리고자 한다. 

시작부터 ‘내가 성장하기 위해 평가해줘 이 앨범’(‘피드백’)이라 호기롭게 선언하는 조광일은 사회가 낙인찍은 패배의 프레임을 뒤집고자 한다. ‘스펙트럼을 넓히는 게 나쁘단 게 아니야 / 적어도 걸음마는 떼고 뛰는 것이 맞지 않냐?’(‘암순응’)라는 원칙이 통하지 않고 ‘진짜로 영감이 들어올 자리가 없고 다 감으로 만들어’(‘한국’) 버리는 랩이 통하는 시장에서 그는 실패한 ‘언더그라운드 락스타’다. 처절한 ‘회상록’의 고해성사처럼 랩보다 인맥, 냉철한 평가보다 합리화를 중시해야 하는 시장에 ‘아주 신물이 나버린’ 그는 가감 없이 본인을 각인하고자 파열음 가득한 거칠고 빠른 랩, 악에 받친 목소리를 택했다. 

‘곡예사’의 성공이 그에게 ‘속사포 래퍼’라는 타이틀을 가져다줬지만 실제로 그의 랩은 테크닉과 속도의 쾌감보다는 억눌린 울분의 분출과 메시지에 가깝다. ‘피드백’이나 ‘자소서’처럼 스토리텔링에 중심을 두는 곡의 경우 완급 조절을 통해 서사를 구성하는 반면 ‘언더그라운드 락스타’, ‘한국’처럼 쉴 새 없이 압박을 가하는 곡에선 피치를 끌어올리는 식이다. ‘DNA’ 뮤직비디오가 연상되는 ‘한국’에서 보듯 그는 버스타 라임스, 아웃사이더보다 켄드릭 라마와 닮고자 한다. 이것이 ‘곡예사 Remix’에서 속도전에 치중하는 몇 래퍼들과 그를 구분 짓는 중요한 요소다. 

따라서 우리는 쏟아지는 문장과 단어 아래 조광일의 의도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바로 반골 기질이다. < 암순응 >은 의도적으로 트렌드를 거부하며 잊혔던 요소를 대거 활용한다. 스페이스 원, 늘보, 마인드182, AHWU 등 프로듀서들이 만든 리얼 세션 기반의 블루스 및 붐뱁이 앨범 뼈대를 이루고 영어 가사도 드물다. 트랩 비트 위 ‘암순응’에서는 훅을 없애고 내용의 폭격을 가하며 ‘회상록’에서는 공격적인 베이스와 쓸쓸한 기타 리프에 이어 스트링 세션을 가미해 극적인 연출을 지향한다. 7분 30초에 달하는 ‘곡예사 Remix’ 역시 최근 한국 힙합 신의 단체곡보다는 2000년대 중반의 아우라와 닮았다. 

신인의 패기로 꽉 찬 앨범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빈틈없이 쏟아내는 언어와 강성 기조로 일견 피로하게 들릴 위험을 품고 있다. 화자 역시 이를 감안해 ’88’, ‘이유’처럼 차분히 가라앉는 순간을 만들어두었으나 작품 초반부 강렬한 인상과 전체적으로 드리운 긴장감에 쉬이 마음을 놓기가 어렵다. 하지만 할 말 많은 신인에겐 유려한 운영보다 약간 미숙하더라도 가차 없이 달려드는 태도가 더욱 어울린다. 오히려 앨범을 들으며 모처럼 드는 두려움과 초조함이 작금의 음악 시장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거세당해 온순해졌다는 사실을 넌지시 암시하기도 한다.

결국 조광일은 드라마틱하고 탄탄한 정규 앨범으로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보여준 게 없다 말해’(‘암순응’)라는 의문에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길들여지지 않은 곡예사의 춤사위는 우리에게 하여금 많은 것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은 화려한 조명과 쏟아지는 지폐 아래 잊고 있던, 혹은 알고 있어도 ‘큰돈 벌어야’ 하기에 모른 척하고 있던, 잘 만든 음악과 바람직한 예술가의 태도다. 어둠 속에서의 날카로운 시선, 용감한 포효가 안이한 현실의 정중앙을 관통한다. 

-수록곡-
1. 피드백
2. 자소서
3. 언더그라운드 락스타
4. 암순응
5. 88
6. 한국 (Remastered Ver.)
7. 역류
8. 회상록
9. 이유
10. 곡예사 Remix (Feat. Basick & P-TYPE & Skull & SIKBOY & Olltii & MINOS & Brown Tigger & JAZZM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