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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벡(1944-2023), 위대한 여정

2010년 제프 벡의 내한 공연에 한데 모인 국내 유명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끝내주게 잘 치더라’. 그렇다. 제프 벡은 말 그대로 기타를 잘 쳤고 후배 연주자들의 마음속엔 아득한 거리감과 경외심이 공존했다. 밴드 리더와 프로듀서 등 전방위를 아우르는 멀티 플레이어지만 기타 연주자로서의 업적이 첫 손에 꼽혀야 한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약 2년여간 야드버즈에서 재적한 벡은 일명 < Roger The Engineer >로 불리는 블루스/사이키델릭 록 명작 < The Yardbirds >를 끝으로 밴드를 떠나 이름을 내건 제프 벡 그룹을 결성했다. 로드 스튜어트가 보컬을 맡고 현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로니 우드가 베이스를 잡은 제프 벡 그룹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 ‘Beck’s bolero’가 실린 < Truth >(1968)와 < Beck-Ola >(1969)같은 블루스/하드 록 수작을 남겼다.

바닐라 퍼지의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와 의기투합한 슈퍼그룹 벡 보거트 어피스(Beck, Bogert & Appice)로 한 장의 정규작 < Beck, Bogert & Appice>(1973)를 남긴 후 1970년대 중반부터 퓨전 재즈에 경도했다. 로이 부캐넌 헌정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와 면도날 사운드의 ‘Scatterbrain’이 들어간 1975년 작 < Blow By Blow >가 경력상 하이라이트. 1980년대 미드 < 마이애미 바이스 >의 테마음악을 쓴 체코 출신 키보디스트 얀 해머의 조력으로 완성한 < Wired >(1976)와 < There & Back >(1980) 까지가 벡의 퓨전 재즈 시기였다.

피크 대신 엄지와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을 활용해 다채로운 톤을 구사했던 1980년대에는 뉴웨이브 시대에 감응해 쉭의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 Flash >(1985)와 기교파 드러머 테리 보지오(Terry Bozzio)와 직선적인 인스트루멘탈 록을 합작한 < Guitar Town>(1989)를 발표했다. 다음 정규작 사이 10년의 공백을 로커빌리의 재조명 < Crazy Legs >(1993)와 존 본 조비의 솔로 데뷔 앨범 < Blaze Of Glory >(1990)의 기타 연주 등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채웠다.

< Who Else? >(1999),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로 밀레니엄을 관통한 일레트로니카-기타 록은 늘 트렌드에 민감했던 그가 고안한 새로운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레드 제플린의 선장 지미 페이지에 비해 밴드 리더의 정체성은 약했고 에릭 클랩튼처럼 대중적 히트곡을 가지지 못했지만 음악성의 변화와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타 본연의 악기성을 끝없이 파고들었다.

작년 7월 배우 조니 뎁과 협업한 < 18 >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자 투어를 돌던 그이기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허망하나 수많은 동료,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추모와 회고는 왜 그가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며 유일무이한 존재였는지 증언했다.

에디터가 권하는 제프 벡 열 곡

1. Shape of things (1966)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튼, 키스 렐프(Keith Relf) 같은 명 뮤지션이 거쳐 간 야드버즈는 영국 록의 산실과도 같다. 앨범에 수록되지 않고 1966년 싱글로 발표된 ‘Shape of things’는 로큰롤의 골격 아래 덜컹대는 곡 구성과 비전형적 음향으로 비전형성을 도모했고 그 중심엔 제프 벡의 피드백 주법이 있다. 길게 늘어뜨린 음파의 공감각적 기운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원형을 확립했다. 이십 대 초에 이미 사운드 혁명을 불러온 벡은 솔로 1집 < Truth >(1968)의 첫 곡으로 ‘Shape of things’을 택했다. 하드 록의 프로토타입 격인 ‘The train kept rollin”과 더불어 야드버즈 시절 벡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곡이다.

2. Beck’s bolero / < Truth >(1968)
프랑스의 고전 음악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살랑살랑 춤을 추다 기타 이펙트로 환각의 탑을 쌓고 이내 굉음으로 응축했던 기운을 터트린다. 오랜 친구 지미 페이지와 레드 제플린의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 더 후의 드러머 키스 문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곡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으로 남았다. 싱글의 A면으로 함께 붙어 있던 ‘Hi ho silver lining’도 벡이 라이브에서 즐겨 연주한 하드 록 넘버다.

3. All shook up / < Beck-Ola >(1969)
제프 벡 그룹의 명의로 발표한 1972년 작 < Beck-Ola >의 인트로 곡이다. 흑인 블루스 뮤지션 오티스 블랙웰(Otis Blackwell)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준 산뜻한 로큰롤이 거친 부기 록으로 재탄생했다. 로드 스튜어트(보컬)과 로니 우드(베이스),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뮤지션과 협업한 건반 연주자 니키 홉킨스의 드림팀이 탄탄한 연주를 들려줬다. 미국 회사 록올라 주크박스에서 이름을 따온 < Beck-Ola >에는 ‘All shook up’이외에도 ‘Spanish boots’나 ‘Plynth(water down the drain)’처럼 당대 최고 연주자들의 기량을 만끽할 수 있는 곡들로 가득하다.

4. Definitely maybe / < Jeff Beck Group >(1972)
테네시 주 멤피스의 녹음 장소와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출신의 기타연주자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의 프로듀서 기용 등 제프 벡 그룹의 세 번째 스튜디오 음반 < Jeff Beck Group >은 블루스의 뿌리에 다가서려는 흔적이다. 흑인 보컬리스트 바비 텐치(Bobby Tench)의 목소리도 유독 소울풀하게 들린다. 하나 백미는 벡이 작곡한 마지막 트랙 ‘Definitely maybe’로 마치 우는듯한 기타 톤과 후반부 맥스 미들턴의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가 처연함을 드리웠다. 밴드에 처음 가입한 파워 드러머 코지 파웰은 ‘Ice cream cakes’에서 견실한 기본기를 드러냈다.

5. Cause we’ve ended as lovers / < Blow By Blow >(1975)
Blow By Blow >는 제프 벡의 솔로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제작한 1975년 걸작 덕에 제프 벡은 퓨전 재즈의 역사에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목소리 없이 악기 연주로만 이뤄진 인스트루멘탈 음반임에도 유기적 구성과 개별곡의 마력 덕에 빌보드 200에서도 4위까지 올랐다. ‘Constipated duck’과 ‘Freeway jam’처럼 펑키(Funky)한 넘버들 사이로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은 곡은 벡이 또 한 명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에게 헌정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다.

6. Led boots / < Wired >(1976)
걸작 < Blow By Blow > 후 1년 만에 나온 1976년 작 < Wired >는 당시 벡의 창작력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한다. 얀 해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음반으로 < Blow By Blow >의 키보디스트 맥스 미들턴(Max Middleton)의 아날로그 연주와 해머의 신시사이저가 고루 활약하며 벡의 기타를 보좌했다. 재야의 강자 나라다 마이클 왈든(Narada Michael Walden)과 윌버 배스컴(Wilbur Bascomb)의 리듬 섹션도 탄탄한 흠 잡을 데 없는 퓨전 재즈/인스트루멘탈 록 앨범에서 ‘Led boots’는 상기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압축했다.

7. You never know / < There & Back >(1980)
데이비드 보위의 < Lodger >(1979)가 베를린 트릴로지에서 지니는 지위처럼 퓨전 재즈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인 < There & Back >도 앞의 두 음반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나 영혼의 파트너 얀 해머와 토니 하이마스(Tony Hymas), 1990년대 토토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특급 연주는 가사 없이 소리만으로 즐겁다. 벡은 타이틀 곡 ‘You never know’에서 해머가 깔아준 판 위로 유영하며 찰떡궁합을 뽐냈다. 반복적인 전자음을 파고드는 기타 연주는 1980년대 이후 줄곧 채택해온 소리 문법이기도 하다.

8. People get ready / < Flash >(1985)
디스코/펑크(Funk) 그룹 쉭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한 1985년 작 < Flash >는 그간의 인스트루멘탈 경향에서 벗어나 지미 홀(Jimmy Hall), 카렌 로렌스(Karen Lawrence) 등 다양한 보컬을 세웠고 벡 본인도 노래했다. 수록곡 ‘Escape’가 1986년 제28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했으나 죽마고우 로드 스튜어트가 목소리를 더한 ‘People get ready’가 더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원곡은 소울의 거목 커티스 메이필드가 이끈 임프레션스가 1965년에 발매했다.

9. Nadia / < You Had It Coming >(2001)
< Wired >와 < Flash >에서 신시사이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벡은 1990년대 말부터 일렉트로니카와 기타 록의 융합을 시도했다. 예순을 향해 가던 거장은 < Who Else? >(1999)과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 세 작품으로 당대의 경향성을 포착했다. 저명한 여성 기타리스트 제니퍼 배튼(Jennifer Batten)이 참여한 2001년 작 < You Had It Coming >은 2002년 제 44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Dirty mind’와 머디 워터스의 블루스를 재해석한 ‘Rollin’ and tumblin”을 담았고 영국 뮤지션 니틴 소니(Nitin Sawhney)의 다운템포 원곡에 기타를 덧댄 ‘Nadia’는 신비로운 선율로 제프 벡의 21세기 수작이 되었다.

10. So what / < Jeff >(2003)
일렉트로니카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2003년 작 < Jeff >는 테크노와 기타 인스트루멘탈을 엮었다. 리버풀 출신 빅비트 그룹 아폴로 440(Apollo 440)과 벨기에의 전자 음악 프로젝트 테크노트로닉 소속의 미 원(Me One)을 프로듀서로 영입, 장르의 전문성을 높였다. 벡이 얼터너티브 록 듀어 커브(Curve)의 딘 가르시아(Dean Garcia)와 합작한 ‘So what’은 전자 음향과 기타 연주가 강력한 사운드를 형성했다. 2004년 제46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Plan b’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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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퓨전 재즈 입문곡 10선

“아이고… 재즈는 어려워요”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도 혀를 내두르곤 한다. 3~4분 내외의 규격화된 팝송에 익숙한 이들에게 작곡과 연주가 즉흥적인 이 장르가 당혹스럽다. 하지만 재즈만큼 해방감을 주는 음악이 있을까? 무궁무진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담쟁이덩굴처럼 뻗어 나간다. 재즈의 다른 이름은 자유다.

퓨전 재즈는 1960년대 말 재즈가 소울과 펑크(Funk), 록과 손잡아 탄생한 음악 장르다. 1980년대에 들어 점점 정통 재즈와 거리가 먼 아리송한 음악이 되어 순혈주의자들의 지탄을 받았으나 대중 친화성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순기능도 수행했다.

초기 스타일부터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갈래를 펼치는 등 재즈 입문의 경로는 다양하지만 처음부터 난해한 비밥이나 프리재즈를 들으면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 재즈의 향취를 드리우면서도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가 있다. 당신을 위해 엄선한 퓨전 재즈 열 곡을 들으며 재즈의 대양에 발을 담가 보는 건 어떨까?

제프 벡(Jeff Beck) ‘You know what I mean’ (1975)

퓨전 재즈 입문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동네 백화점 꼭대기 층에서 구매했던 제프 벡의 1975년 작 < Blow By Blow > 시작이 아닐까 싶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함께 그를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에 올려놓았고 세 명의 기타 영웅 중에서도 벡의 경력은 특히 변화무쌍하다. 블루스 록과 퓨전 재즈를 거쳐서 테크노까지 시도하는 다변적 음악색의 정점에 < Blow By Blow >가 있다. 스티비 원더가 벡에게 주려고 했던 ‘Superstition’을 불가피하게 먼저 발표해 그 부채감으로 선물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는 신성함을 품고, 초절정 기교가 빛나는 ‘Scatterbrain’이 면도날 연주를 들려준다.

앨범의 문을 여는 ‘You know what I mean’은 제프 벡 펑키(Funky) 기타의 진수를 보여준다. 두 대의 기타가 각각 선율과 리듬을 연주하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그 밑을 맥스 미들턴의 간결한 건반 연주가 받쳐 주었다. 놀랍도록 정교한 프로덕션은 비틀스의 영광을 공유했던 조지 마틴의 솜씨. 국내에서는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의 오프닝 BGM으로 사용된 바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Black satin’ (1972)

재즈의 개척자 마일즈 데이비스는 < Birth Of The Cool >로 쿨재즈의 시작을 알렸고 < Kind Of Blue >로 모달 재즈의 이정표를 세웠다. 누구보다도 시대에 민감하게 감응했던 그는 1960년대 말부터 퓨전 재즈를 시도했고 < Bitches Brew >란 금자탑으로 넘보기 힘든 아성을 구축했다.

어느 장르가 그렇듯 퓨전 재즈도 아티스트별로 색채가 다르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들은 특히 전위성이 강해서 포플레이류의 편안한 음악을 예상한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다만 마일즈도 마커스 밀러와 손을 잡은 1980년대부터 힘을 뺀 대중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펑크(Funk)와 아방가르드를 섞은 1972년 작 < On The Corner >의 수록곡 ‘Black satin’은 마일즈의 고유색을 칠하되 상대적으로 곡 길이가 짧고 멜로디가 명확해 잊지 못할 잔상을 남겼다.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Sorceress’ (1976)

2021년 2월 세상을 떠난 칙 코리아는 방대한 경력으로 현대 재즈를 대표하던 피아니스트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2년 ‘영원으로의 회귀’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밴드를 조직해 총 8장의 정규 앨범을 남겼다. 그 기간 정통 재즈 스타일의 앨범들도 발표했으나 리턴 투 포에버의 인상이 강렬했던지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건반 연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후에 스티비 원더와 알 재로가 커버한 인스트루멘탈 명곡 ‘Spain’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리턴 투 포에버의 경력 중후반기에 발표된 1976년 작 < Romantic Warrior >는 갑옷 기사의 앨범 커버와 수록곡 ‘Medieval overture’처럼 중세의 숨결을 담고 있다. ‘여자 마법사’라는 뜻의 ‘Sorceress’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구조를 탈피한 채 하나의 테마에 조금씩 변주를 주며 긴장감을 쌓아가고 이러한 곡 구성은 칙 코리아(키보드)-알 디 메올라(기타)-스탠리 클락(베이스)-레니 화이트(드럼)로 이뤄진 황금 라인업의 연주력으로 가능했다.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Birdland’ (1977)

193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조 자비눌은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미국에 당도한다. 알토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애덜리의 음반에 참여하며 1960년대를 보낸 그에게 전기를 마련해준 건 마일즈 데이비스의 걸작 < In A Silent Way >와 < Bitches Brew >. 퓨전 재즈의 청사진을 제시한 두 장의 앨범에서 칙 코리아와 함께 건반 연주를 맡은 자비눌은 추진력을 얻어 1970년 불세출의 퓨전 재즈 밴드 웨더 리포트를 조직하게 된다.

체코 출신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투오스가 떠난 이후로 웨더 리포트의 음악은 더욱 펑키(Funky)해지고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과를 기록한 1977년 작 < Heavy Weather >는 그 두 가지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던 퓨전 재즈 장르를 되살렸다. 동명의 뉴욕 재즈 클럽에 헌사를 바치는 ‘Birdland’는 웨인 쇼터의 상쾌한 테너 색소폰과 일렉트릭 베이스의 혁명아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프렛리스 베이스 사운드가 빛난다. 후에 보컬 그룹 맨하탄 트랜스퍼와 거장 퀸시 존스가 색다른 커버 버전을 들려주기도 했다.

허비 행콕(Herbie Hancock) ‘Chameleon’ (1973)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의 음악 여정은 저 위대한 마일즈 데이비스만큼이나 복잡하고 장대하다. 연미복을 빼입고 모달재즈를 연주하던 청년은 약 20여 년 후 브레이크 댄서들과 좌우로 몸을 흔드는 ‘Rockit’ 의 퍼포먼스로 마이클 잭슨의 박수갈채를 끌어냈다. 정(靜)에서 동(動)으로, 그의 음악은 늘 꿈틀댔다. 1970년대를 오롯이 퓨전 재즈에 바친 행콕이 1973년에 발표한 < Head Hunters >는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를 기록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인정 받았다.

15분에 달하는 오프닝 트랙 ‘Chameleon’에서 행콕은 펜더 로즈, 클라비넷 등 다양한 건반 악기를 활용하여 펑키(Funky) 사운드의 극대치를 기록한다. 베니 모핀의 테너 색소폰 솔로는 행콕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현란한 선율을 보좌하는 폴 잭슨과 하비 메이슨의 리듬 섹션도 탄탄하다. 근래의 많은 하우스 디제이들이 이 곡의 감각적인 소리샘을 추출해 퍼포먼스에 활용하고 있다.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Morning dance’ (1979)

대중음악사에 한 줄이라도 언급될만한 위의 팀들에 비해 스파이로 자이라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하나 ‘깊이가 덜한 음악’이란 마니아들의 평가를 감내한 이들은 1974년 조직된 이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활동하며 퓨전 재즈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 중심엔 밴드의 창립자이자 건반 주자인 제이 베켄스타인이 있고 ‘녹조류의 일종’인 Spirogyra에서 따온 독특한 밴드명도 그의 작품이다.

싱그러운 마림바 연주와 베켄스타인의 아늑한 알토 색소폰 등 각 악기의 매력을 충실히 뽐내는  ‘Morning dance’는 빌보더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위, 싱글 차트 24위에 오른 밴드의 명실상부 최고 히트곡. 남아메리카 국가 트리니다드토바고가 고안한 타악기 스틸팬이 이국적 향취를 드러내기도 한다. 왠지 미용실 그림처럼 키치적인 느낌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편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 곡이다. 이목을 끄는 도입부 덕에 국내의 다양한 광고가 이 곡을 지목했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디오 방송에서 애청되고 있다.  

리 릿나워(Lee Ritenour) ‘Rio funk’ (1979)

1980년대를 대표하는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는 귀공자같이 곱상한 외모와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연주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솔로 활동 이외에도 퓨전 재즈의 올스타 밴드 포플레이의 초대 기타리스트로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조지 벤슨의 명곡 ‘Give me the night’와 패티 오스틴의 ‘Through the test of the time’에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그가 1979년에 발표한 7번째 정규 앨범 < Rio >는 막강한 지원사격을 자랑한다. 퓨전 재즈 전문 레이블 GRP를 대표하는 데이브, 돈 그루신 형제가 건반 선율을 제공했고 < Heavy Weather >의 드러머 알렉스 아쿠나가 6, 7번 트랙에서 드럼 스틱을 쥐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이름은 마커스 밀러. 오프닝 트랙 ‘Rio funk’에서 훗날 퓨전 재즈의 대표 베이시스트가 되는 밀러와 릿나워가 합을 주고받으며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MBC 라디오 프로그램 < 배철수의 음악캠프 >의 일요일 코너 < Sunday Special >의 시그널이기도 하다.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 ‘Give it all you got’ (1979)

트럼펫 사촌 동생 격인 금관악기 플루겔호른. 이름도 어려운 이 금관악기를 대중에게 알린 공은 이탈리아계 미국 음악가 척 맨지오니에게 있다. 1960년대부터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와 더 내셔널 갤러리 같은 밴드에서 활약했지만, 전성기는 명실상부 1970년대 후반. 국내 라디오 프로에서 숱하게 나온 1977년 작 ‘Feel so good’로 시대에 회자할 선율을 남겼고, 다음 해에 발표한 앨범 < Children Of Sanchez >가 1979년 제21회 그래미 시상식의 < Best Pop Instrumental Performance >를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다.

‘네 전부를 걸어봐’라는 제목처럼 도전적인 분위기의 이 곡은 6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지루할 새 없다. 곡의 주인공은 맨지오니지만 쉴 새 없이 여백을 채우는 찰스 믹스의 베이스 연주와 그랜트 가이스만의 감칠맛 나는 리듬 기타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80년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의 공식 주제곡으로 특유의 역동성을 맘껏 뽐냈던 이 곡은 1980년대를 주름잡던 KBS 2FM 라디오 프로그램 < 황인용의 영팝스 >의 시그널로 사용되어 국내 청취자들에게 추억의 멜로디로 남아있다.

카시오페아(Casiopea) ‘Fight man’ (1991)

어쿠스틱 기타에 푹 빠진 학생들이 일본의 기타리스트 코타로 오시오의 ‘Fight’, ‘Wind song’에 도전하는 것처럼 ‘연주 꽤나 한다는’ 실용음악과 학생들은 ‘Fight man’으로 합주 실력을 검증하곤 한다. 3분 약간 넘는 짧은 곡이지만 쫀득한 베이스라인과 기타 키보드의 더블링 등 속이 알차다. 곡의 중반부 복싱 경기처럼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베이스와 펑키(Funky) 기타가 용호상박의 자웅을 겨룬다.

티스퀘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퓨전 재즈 밴드 카시오페아는 1979년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래 장장 40년 넘게 현역으로 활약 중이다. 밴드의 주축은 기타리스트이자 메인 작곡가 노로 잇세이. 3기로 나뉘는 밴드의 타임라인에서 유일하게 밴드를 떠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카시오페아 2기에 나온 1991년 작 < Full Colors >의 오프닝 트랙인 ‘Fight man’ 속 화려한 기타 솔로로 일본 최고의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빛과 소금 ‘오래된 친구’ (1994)

MBC 예능 프로그램 < 나는 가수다 > 의 진행자로 활약했던 장기호와 김현식의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작곡한 박성식이 의기투합한 2인조 그룹 빛과 소금은 지난 몇 년간 시티팝 붐이 일면서 김현철, 윤수일과 함께 ‘한국 시티팝의 원류’로 재조명되었다. 이들은 동시대의 봄 여름 가을 겨울보다 인지도는 약했지만 1990년대 가요의 세련미를 책임지며 마니아를 결집했다. 후대에 다양한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샴푸의 요정’과 감정에 충실한 발라드 넘버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가 대표곡.

이들의 정규 4집 < 오래된 친구 >의 타이틀곡인 ‘오래된 친구’는 빛과 소금의 곡 중에서도 특출나게 펑키(Funky)하다. 초반부 재치 있는 보코더의 사용은 장기호 특유의 감미로운 음성으로 이어지고, 간결과 화려를 넘나드는 박성식의 건반 연주가 곡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 결혼식 입장곡을 연상하게 하는 오르간 소리와 통통 튀는 베이스 슬랩으로 간주도 빈틈없이 채웠다. 기교를 뽐내면서도 대중적 감각을 포용한 한국 퓨전 재즈의 보석 같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