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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서울재즈페스티벌 2023, 최고의 순간들

어느덧 15회를 맞은 서울재즈페스티벌은 올림픽공원의 접근성 높은 위치와 팝과 장르 음악을 아우르는 라인업으로 국내를 대표하는 음악 축제가 되었다. 풍성한 시각적 요소와 활기 넘치는 브랜딩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MZ세대와 맞물려 파급력을 드러냈다. 토요일과 일요일의 폭우 속에서도 관중들은 아티스트들에게 열띤 환호를 보냈다. 팬데믹으로 쌓인 음악 갈증을 맘껏 푸는 시간이었다.

통통 튀는 팝으로 사랑받는 영국 싱어송라이터 미카와 ‘Mas que nada’의 브라질 음악 전설 세르지오 멘데스, ‘쌀 아저씨’의 애칭을 가진 ‘The blower’s daughter’의 데미안 라이스가 헤드라이너로 섰다. 에이제이알과 시그리드처럼 핫한 뮤지션들에 태양과 악동뮤지션의 대중성을 더했고, < 라라랜드 >의 음악 감독 저스틴 허위츠과 신동 조이 알렉산더의 참여로 재즈 팬들까지 만족시켰다. 다채로운 뮤지션들 가운데 이즘 에디터들이 꼽은 공연들로 서울재즈페스티벌 2023을 들여다본다.

그레고리 포터(금요일)
달빛 아래 야외 공연장을 채색하는 이색적인 그루브, 금요일 메이 포레스트(88 잔디마당)의 마무리는 푸근한 인상을 지닌 그레고리 포터 밴드의 웅대한 멜로디가 맡았다. 2017년 그래미 최우수 재즈 보컬 앨범 부문을 수상한 < Take Me To The Alley >의 타이틀 ‘Holding on’과 ‘Hey Laura’ 등의 히트곡이 그의 성대를 지나 한강 둔치를 따라 흘렀고, 관중들은 손뼉을 치고 흥얼거리며 각자의 방식으로 축제의 첫날 밤을 만끽했다. 덥수룩한 수염에 볼까지 덮는 모자를 어김없이 걸친 포터가 자기 인생을 처연하게 노래하면서도 걸출한 무대 매너로 초저녁의 흥을 충분히 돋운 덕분이다. 어릴적 영향받은 냇 킹 콜, 마빈 게이, 그리고 최근 별세한 티나 터너를 향해 존경을 표한 구간은 상승기류의 절정이었고, 한 시간 넘는 공연이 지루하지 않도록 콘트라베이스, 피아노, 오르간, 트럼펫 각 세션도 맛깔난 즉흥 연주로 그를 뒷받침했다. 그레고리 포터의 풍부한 노래들로 페스티벌의 여흥과 재즈의 즉흥적인 낭만까지 듬뿍 챙겼다. (손민현)

로버트 글래스퍼(토요일)
재즈와 힙합, 네오소울을 믹스한 2012년 작 < Black Radio >는 로버트 글래스퍼를 재즈 레이블 블루노트의 대표주자로 올려놓았다. 이 음반의 제55회 그래미 최우수 알앤비 앨범 수상을 두고 크리스 브라운은 “대체 로버트 글래스퍼가 누구야?” 실언했지만 글래스퍼는 ‘Who The Fuck Is Rober Glasper?’ 문구가 적힌 티셔츠 제작으로 받아쳤다. 이 일화처럼 유연한 그의 음악엔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 색채의 재즈 힙합과 하드 밥이 두루 녹아있고, 펜더 로즈와 목소리로 펼치는 블랙뮤직의 몽환계는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도 잘 어울렸다. 2022년에 발매한 < Black Radio 3 > 수록곡 ‘Black superhero’와 로버트 글래스퍼 익스페리먼트로 발매한 ‘Find you’를 비롯해 너바나 ‘Smells like teen spirit’와 라디오헤드 ‘Packt like Sardines in a crushed tin box’, 버트 바카락의 명곡 ‘The look of love’를 본인만의 방식으로 풀어냈다. 데릭 호지(베이스)와 마크 콜렌버그(드럼)의 기교 넘치는 연주도 경악스러웠다.(염동교)

바우터 하멜(토요일)
한국인만큼 한국을 잘 아는 밴드가 무대에 설 때의 즐거움. 제3회 서울재즈페스티벌 2009로 첫 길을 튼 뒤 단독 콘서트와 각종 행사를 합해 합해 십여 년 동안 무려 스물네 번 한국을 방문했던 하멜이었다. 팬데믹이 아티스트와 한국 팬 사이의 오랜 연례행사를 지체시켰기에 3년 만에 재개된 이번 페스티벌은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재회였다. 곁을 떠난 사이 잠시 잊힌 재즈 뮤지션이란 정체성을 각인시키듯 느긋하고 묵직한 ‘In between’으로 공백을 깨더니 빈티지한 스윙 질감의 ‘Legendary’가 이어졌고 대표곡 ‘Breezy’는 즉흥적인 밴드 연주로 색다른 편곡을 선보였다. 공연의 달인답게 자유자재로 분위기를 교체하기도 했다. 서정적인 분위기의 ‘Finally getting closer’나 추억의 첫 자작곡 ‘Nobody’s tune’, 공명의 신비로움을 활용한 신곡 ‘The spell’ 모두 적절하고 아름다운 쉼표였다. 까다로운 운반 문제로 근 몇 년간 지참하지 않았던 콘트라베이스를 가져올 정도로 하멜과 밴드 전부 애정과 성의를 갖고 찾아온 무대였다. 비록 페스티벌 테마곡 ‘Rosy day with SJF’가 ‘Rainy day’로 바뀐 궂은 날씨였지만 비 오는 날의 컴백 또한 무수히 많은 추억 중 소중한 하나가 되지 않을까.(박태임)

250(일요일)
일요일의 서울재즈페스티벌은 뽕으로 시작되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공연을 시작한 250의 모습과 레트로한 비디오 아트와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그의 전신 영상이 대비되어 흥미를 더했다. 그는 시작부터 ’이창‘과 송대관의 ’네박자‘를 섞어 보였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워 보였던 사람들도 이내 트로트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으면서 비트는 점점 휴게소 뽕짝처럼 고조되었고, ‘내 나이가 어때서’가 공연의 정점을 찍었다. 마지막은 어김없이 그의 히트곡 ‘뱅버스’가 장식했다. 40여 분의 질주가 끝나자, 공연장 안의 모두가 그에게 박수와 탄성을 아낌없이 보냈다. 기성세대의 전유물로만 인식되어 온 뽕을 오랫동안 탐구한 그의 장인정신이 라이브에서도 빛나는 순간이었다.(김태훈)

에이제이알(일요일)
마지막 날의 헤드라이너 데미안 라이스만큼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모은 이들은 세 명의 멧으로 이루어진 형제 밴드 에이제이알이었다. 최근 애플 광고음악과 다양한 스낵 콘텐츠에서 이들의 음악이 활용되며 국내에서도 큰 화제를 모은 만큼 늦은 시간에도 이들을 반기기 위한 인파가 올림픽체조경기장을 채웠다. ‘Burn the house down’이나 ‘World’s smallest violin’ 등으로 끝까지 페스티벌의 자리를 지킨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한 것은 물론 세트리스트의 마지막인 ‘Bang!’으로 마지막날의 하이라이트를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나름의 스토리라인과 함께 시작한 무대는 이내 사람들의 환호와 떼창을 유도하며 쉽게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점이라면 태극기를 손수 준비해 온 정성. 노래하는 내내 무대 곳곳을 누비며 그날의 가장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이들은 비 오는 날씨에 메인 스테이지를 충분히 즐기지 못한 이들을 달래기에 충분했다.(백종권)

정리: 염동교
취재: 김태훈, 박태임, 백종권, 염동교, 손민현
사진: 프라이빗커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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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모던 재즈의 거장 웨인 쇼터(1933-2023)

지난 3월 2일 재즈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가 사망했다.1933년생이니 구십 가까운 노익장이었다. 선배인 찰리 파커나 존 콜트레인에 동년배인 소니 롤린스와 더불어 모던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색소포니스트로 꼽히는 쇼터는 밴드 리더와 조력자를 오가며, 하드 밥과 퓨전 재즈를 아우르며 원대한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웨인 쇼터의 역사는 곧 모던 재즈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력의 대표작 7곡을 소개한다.

재즈 메신저스 – A night in Tunisia / A Night In Tunisia(1960)
위대한 드러머 아트 블래키를 중심으로 색소포니스트 행크 모블리와 트럼페터 케니 도햄, 피아니스트 호레이스 실버 같은 명인들이 거쳐간 음악 집단 재즈 메신저스는 삼십 년 넘게 장르의 전파자 역할을 수행했다. 1961년, 쇼터가 재적할 당시 재즈 메신저스는 당시로선 드물게 일본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디지 길레스피가 작곡한 ‘A night in Tunisia’는 많은 재즈 연주자가 레퍼토리로 연주하는 ‘스탠더드’가 되었고 클리포드 브라운과 덱스터 고든 등 여러 음악가가 각자의 개성을 담아냈다. 재즈 메신저스의 버전은 블래키의 활화산 같은 드러밍에 스타일리스트 리 모건의 트럼펫이 색소폰과 대화하듯 가락을 주고받는다. 재즈 메신저스에서 쌓은 경험은 경력의 밑거름이 되었다.

웨인 쇼터 – Speak no evil / Speak No Evil(1964)
깊고 푸른 빛에 쇼터와 일본 여성 테루코 나카가미를 담은 앨범 재킷이 도회적이다. 포스트 밥, 모달 재즈의 명작으로 인정받는 1964년 앨범 < Speak No Evil >은 재즈 명가 블루노트 레코드에서 1964년 발매되었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두 번째 퀸텟에서 합을 맞춘 피아니스트 허비 핸콕과 콘트라베이시스트 론 카터에 트럼펫 연주자 프레디 허바드와 드러머 엘빈 존스의 드림팀을 구축했다. 코드 대신 모드를 사용하는 모달 재즈 ‘Speak no evil’은 인상적인 도입부를 매개로 하나둘 모드의 탑을 쌓아나간다. 사방팔방 흩어지는 대신 조금씩 공간을 확보하는 방식은 과유불급의 미학. 쇼터는 모던재즈의 핵심을 꿰뚫었다.

마일즈 데이비스 – Frelon brun / Filles De Kilimanjaro(1968 UK, 1969 US)
마일즈 데이비스 퀸텟은 재즈 역사상 가장 화려한 라인업으로 알려져 있다. 마일즈(트럼펫)를 중심으로 존 콜트레인(색소폰), 레드 갈란드(피아노), 폴 체임버스(베이스) 필리 조 존스(드러머)로 구성된 1기는 비밥 시대를 관통했고, 웨인 쇼터(섹소폰), 허비 핸콕(피아노), 론 카터(베이스), 토니 윌리엄스(드럼)의 2기로 포스트 밥과 재즈 록을 탐험했다.

쇼터는 < In A Silent Way >(1969), < Bitches Brew >(1969)와 같은 1960년대 말 재즈 혁명의 지원군이었다. 불어로 ‘킬리만자로의 소녀들’이라는 뜻의 1968년 음반 < Filles De Kilimanjaro >는 포스트 밥과 퓨전 재즈의 중간지대를 절묘하게 낚아챘고 ‘갈색 왕벌’을 의미하는 ‘Frelon brun’은 긴장감 넘치는 토니 윌리엄스의 리듬워크를 마일즈와 쇼터가 양분했다. 트럼펫과 색소폰의 소리 특질과 대조가 돋보인다.

웨인 쇼터 & 밀톤 나시멘토 – Tarde / Native Dancer(1975)
쇼터는 친구 허비 핸콕처럼 장르 탐험에 의욕적이었다. 존 맥러플린의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칙 코리아의 리턴 투 포에버와 함께 삼대 퓨전 재즈 그룹으로 꼽히는 웨더 리포트로 활동하는 틈틈이 솔로작을 발표했다. 브라질 팝의 걸작 < Clube Da Esquina >(1972)의 밀톤 나시멘토와 합작한 1975년 작 < Native Dancer >는 재즈와 펑크(Funk), 라틴을 아우른 음악성으로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모리스 화이트에게 영감을 주었다. 포르투갈어로 오후를 뜻하는 수록곡 ‘Tarde’는 포근한 색소폰 음색과 나시멘토의 입체적인 목소리가 조화롭다. 두 거장의 여유로운 산책 같은 곡이다.

웨더 리포트 – Black market / Black Market(1976)
마일즈 데이비스의 재즈 록 걸작 < In A Silent Way >(1969)와 < Bitches Brew >(1969)에서 합을 맞춘 오스트리아 출신 건반 연주자 조 자비눌과 웨인 쇼터는 1971년 웨더 리포트를 결성했다. 여타 퓨전 재즈 밴드처럼 체코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투오스와 브라질의 퍼커셔니스트 에알토 모레이라 등 수많은 멤버들이 이합집산했으나 자비눌과 쇼터의 중심은 굳건했다. 재즈 베이스 계의 혁명아 자코 파스토리우스가 처음 참여한 1976년 작 < Black Market >은 빌보드 200 42위와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 2위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동양적 선율을 가미한 ‘Black market’은 중후반부 색소폰으로 응축해 온 긴장감을 터뜨렸다.

스틸리 댄 – Aja / Aja(1977)
세련된 록 음악의 대명사와도 같은 스틸리 댄은 1972년 < Can’t Buy A Thrill >을 시작으로 1970년대 내내 수작을 배출했다. 페이건과 월터 베커 2인조에 다양한 스튜디오 뮤지션들을 초빙한 형태로 제작된 1977년 작 < Aja >는 ‘Peg’과 ‘Deacon blues’, ‘Josie’같은 팝적인 곡들로 빌보드 200 3위를 성취했다. 페이건의 지인이었던 한국인 ‘애자’에서 음반 명을 따온 재밌는 일화도 있다. 8분의 러닝타임에 스티브 개드의 드럼과 래리 칼튼 기타, 조 샘플의 키보드 연주를 담은 ‘Aja’는 쇼터의 테너 색소폰 솔로로 곡의 격조를 높였다. 쇼터가 참여한 앨범의 유일한 곡이기도 하다.

조니 미첼- The dry cleaner from Des Moines / Mingus(1979)
작가주의 포크 음악으로 알려진 조니 미첼의 촉각은 재즈로 향했다. 1972년 작 < For Your Roses >로 시작해 1976년 작 < Hejira >에 이르러 결실을 보았다. 독보적 포크-재즈 음반이었다. < Mingus Ah Um >(1959)을 남긴 재즈 사의 거인 찰스 밍거스와 협업한 1979년 앨범 < Mingus >는 밍거스의 마지막 흔적을 담았다. < Native Dancer > 이후 오랜만에 조우한 쇼터와 허비 핸콕, 자코 파스토리우스와 콩가 연주자 돈 앨리어스가 세션으로 참여했다. 자코의 베이스 연주와 직접 설계한 관악기 편곡이 두드러진 ‘The dry cleaner from Des Moines’는 웨더 리포트에서의 환상 하모니를 재현했다.

이미지 작업: 백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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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당신을 위한 퓨전 재즈 입문곡 10선

“아이고… 재즈는 어려워요” 음악 좋아하는 친구들도 혀를 내두르곤 한다. 3~4분 내외의 규격화된 팝송에 익숙한 이들에게 작곡과 연주가 즉흥적인 이 장르가 당혹스럽다. 하지만 재즈만큼 해방감을 주는 음악이 있을까? 무궁무진한 음악적 아이디어가 담쟁이덩굴처럼 뻗어 나간다. 재즈의 다른 이름은 자유다.

퓨전 재즈는 1960년대 말 재즈가 소울과 펑크(Funk), 록과 손잡아 탄생한 음악 장르다. 1980년대에 들어 점점 정통 재즈와 거리가 먼 아리송한 음악이 되어 순혈주의자들의 지탄을 받았으나 대중 친화성으로 진입 장벽을 낮추는 순기능도 수행했다.

초기 스타일부터 시간순으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한 아티스트를 중심으로 갈래를 펼치는 등 재즈 입문의 경로는 다양하지만 처음부터 난해한 비밥이나 프리재즈를 들으면 좌절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 재즈의 향취를 드리우면서도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가 있다. 당신을 위해 엄선한 퓨전 재즈 열 곡을 들으며 재즈의 대양에 발을 담가 보는 건 어떨까?

제프 벡(Jeff Beck) ‘You know what I mean’ (1975)

퓨전 재즈 입문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동네 백화점 꼭대기 층에서 구매했던 제프 벡의 1975년 작 < Blow By Blow > 시작이 아닐까 싶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와 함께 그를 ‘세계 3대 기타리스트’ 에 올려놓았고 세 명의 기타 영웅 중에서도 벡의 경력은 특히 변화무쌍하다. 블루스 록과 퓨전 재즈를 거쳐서 테크노까지 시도하는 다변적 음악색의 정점에 < Blow By Blow >가 있다. 스티비 원더가 벡에게 주려고 했던 ‘Superstition’을 불가피하게 먼저 발표해 그 부채감으로 선물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는 신성함을 품고, 초절정 기교가 빛나는 ‘Scatterbrain’이 면도날 연주를 들려준다.

앨범의 문을 여는 ‘You know what I mean’은 제프 벡 펑키(Funky) 기타의 진수를 보여준다. 두 대의 기타가 각각 선율과 리듬을 연주하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그 밑을 맥스 미들턴의 간결한 건반 연주가 받쳐 주었다. 놀랍도록 정교한 프로덕션은 비틀스의 영광을 공유했던 조지 마틴의 솜씨. 국내에서는 <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 >의 오프닝 BGM으로 사용된 바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 ‘Black satin’ (1972)

재즈의 개척자 마일즈 데이비스는 < Birth Of The Cool >로 쿨재즈의 시작을 알렸고 < Kind Of Blue >로 모달 재즈의 이정표를 세웠다. 누구보다도 시대에 민감하게 감응했던 그는 1960년대 말부터 퓨전 재즈를 시도했고 < Bitches Brew >란 금자탑으로 넘보기 힘든 아성을 구축했다.

어느 장르가 그렇듯 퓨전 재즈도 아티스트별로 색채가 다르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곡들은 특히 전위성이 강해서 포플레이류의 편안한 음악을 예상한 이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준다. 다만 마일즈도 마커스 밀러와 손을 잡은 1980년대부터 힘을 뺀 대중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펑크(Funk)와 아방가르드를 섞은 1972년 작 < On The Corner >의 수록곡 ‘Black satin’은 마일즈의 고유색을 칠하되 상대적으로 곡 길이가 짧고 멜로디가 명확해 잊지 못할 잔상을 남겼다.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Sorceress’ (1976)

2021년 2월 세상을 떠난 칙 코리아는 방대한 경력으로 현대 재즈를 대표하던 피아니스트다. 19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72년 ‘영원으로의 회귀’라는 멋들어진 이름의 밴드를 조직해 총 8장의 정규 앨범을 남겼다. 그 기간 정통 재즈 스타일의 앨범들도 발표했으나 리턴 투 포에버의 인상이 강렬했던지 퓨전 재즈를 대표하는 건반 연주자로 인식되고 있다. 후에 스티비 원더와 알 재로가 커버한 인스트루멘탈 명곡 ‘Spain’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리턴 투 포에버의 경력 중후반기에 발표된 1976년 작 < Romantic Warrior >는 갑옷 기사의 앨범 커버와 수록곡 ‘Medieval overture’처럼 중세의 숨결을 담고 있다. ‘여자 마법사’라는 뜻의 ‘Sorceress’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구조를 탈피한 채 하나의 테마에 조금씩 변주를 주며 긴장감을 쌓아가고 이러한 곡 구성은 칙 코리아(키보드)-알 디 메올라(기타)-스탠리 클락(베이스)-레니 화이트(드럼)로 이뤄진 황금 라인업의 연주력으로 가능했다.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 ‘Birdland’ (1977)

1932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조 자비눌은 이십 대 후반이 되어서야 미국에 당도한다. 알토 색소폰 연주자 캐논볼 애덜리의 음반에 참여하며 1960년대를 보낸 그에게 전기를 마련해준 건 마일즈 데이비스의 걸작 < In A Silent Way >와 < Bitches Brew >. 퓨전 재즈의 청사진을 제시한 두 장의 앨범에서 칙 코리아와 함께 건반 연주를 맡은 자비눌은 추진력을 얻어 1970년 불세출의 퓨전 재즈 밴드 웨더 리포트를 조직하게 된다.

체코 출신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투오스가 떠난 이후로 웨더 리포트의 음악은 더욱 펑키(Funky)해지고 대중적으로 변모했다.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의 정상을 차지하며 가장 큰 상업적 성과를 기록한 1977년 작 < Heavy Weather >는 그 두 가지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며 아이디어 고갈에 시달리던 퓨전 재즈 장르를 되살렸다. 동명의 뉴욕 재즈 클럽에 헌사를 바치는 ‘Birdland’는 웨인 쇼터의 상쾌한 테너 색소폰과 일렉트릭 베이스의 혁명아 자코 파스토리우스의 프렛리스 베이스 사운드가 빛난다. 후에 보컬 그룹 맨하탄 트랜스퍼와 거장 퀸시 존스가 색다른 커버 버전을 들려주기도 했다.

허비 행콕(Herbie Hancock) ‘Chameleon’ (1973)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의 음악 여정은 저 위대한 마일즈 데이비스만큼이나 복잡하고 장대하다. 연미복을 빼입고 모달재즈를 연주하던 청년은 약 20여 년 후 브레이크 댄서들과 좌우로 몸을 흔드는 ‘Rockit’ 의 퍼포먼스로 마이클 잭슨의 박수갈채를 끌어냈다. 정(靜)에서 동(動)으로, 그의 음악은 늘 꿈틀댔다. 1970년대를 오롯이 퓨전 재즈에 바친 행콕이 1973년에 발표한 < Head Hunters >는 빌보드 앨범 차트 13위를 기록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인정 받았다.

15분에 달하는 오프닝 트랙 ‘Chameleon’에서 행콕은 펜더 로즈, 클라비넷 등 다양한 건반 악기를 활용하여 펑키(Funky) 사운드의 극대치를 기록한다. 베니 모핀의 테너 색소폰 솔로는 행콕 못지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현란한 선율을 보좌하는 폴 잭슨과 하비 메이슨의 리듬 섹션도 탄탄하다. 근래의 많은 하우스 디제이들이 이 곡의 감각적인 소리샘을 추출해 퍼포먼스에 활용하고 있다.

스파이로 자이라(Spyro Gyra) ‘Morning dance’ (1979)

대중음악사에 한 줄이라도 언급될만한 위의 팀들에 비해 스파이로 자이라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하나 ‘깊이가 덜한 음악’이란 마니아들의 평가를 감내한 이들은 1974년 조직된 이래 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활동하며 퓨전 재즈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 중심엔 밴드의 창립자이자 건반 주자인 제이 베켄스타인이 있고 ‘녹조류의 일종’인 Spirogyra에서 따온 독특한 밴드명도 그의 작품이다.

싱그러운 마림바 연주와 베켄스타인의 아늑한 알토 색소폰 등 각 악기의 매력을 충실히 뽐내는  ‘Morning dance’는 빌보더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위, 싱글 차트 24위에 오른 밴드의 명실상부 최고 히트곡. 남아메리카 국가 트리니다드토바고가 고안한 타악기 스틸팬이 이국적 향취를 드러내기도 한다. 왠지 미용실 그림처럼 키치적인 느낌이지만 바꿔 말하면 그만큼 편하게 다가오는 퓨전 재즈 곡이다. 이목을 끄는 도입부 덕에 국내의 다양한 광고가 이 곡을 지목했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라디오 방송에서 애청되고 있다.  

리 릿나워(Lee Ritenour) ‘Rio funk’ (1979)

1980년대를 대표하는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리 릿나워는 귀공자같이 곱상한 외모와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연주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솔로 활동 이외에도 퓨전 재즈의 올스타 밴드 포플레이의 초대 기타리스트로 석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고 조지 벤슨의 명곡 ‘Give me the night’와 패티 오스틴의 ‘Through the test of the time’에서 기타 연주를 들려줬다.

그가 1979년에 발표한 7번째 정규 앨범 < Rio >는 막강한 지원사격을 자랑한다. 퓨전 재즈 전문 레이블 GRP를 대표하는 데이브, 돈 그루신 형제가 건반 선율을 제공했고 < Heavy Weather >의 드러머 알렉스 아쿠나가 6, 7번 트랙에서 드럼 스틱을 쥐었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이름은 마커스 밀러. 오프닝 트랙 ‘Rio funk’에서 훗날 퓨전 재즈의 대표 베이시스트가 되는 밀러와 릿나워가 합을 주고받으며 주도권 다툼을 벌인다. MBC 라디오 프로그램 < 배철수의 음악캠프 >의 일요일 코너 < Sunday Special >의 시그널이기도 하다.

척 맨지오니(Chuck Mangione) ‘Give it all you got’ (1979)

트럼펫 사촌 동생 격인 금관악기 플루겔호른. 이름도 어려운 이 금관악기를 대중에게 알린 공은 이탈리아계 미국 음악가 척 맨지오니에게 있다. 1960년대부터 아트 블래키 앤 더 재즈 메신저스와 더 내셔널 갤러리 같은 밴드에서 활약했지만, 전성기는 명실상부 1970년대 후반. 국내 라디오 프로에서 숱하게 나온 1977년 작 ‘Feel so good’로 시대에 회자할 선율을 남겼고, 다음 해에 발표한 앨범 < Children Of Sanchez >가 1979년 제21회 그래미 시상식의 < Best Pop Instrumental Performance >를 수상하며 정점을 찍었다.

‘네 전부를 걸어봐’라는 제목처럼 도전적인 분위기의 이 곡은 6분이 넘어가는 러닝타임에도 지루할 새 없다. 곡의 주인공은 맨지오니지만 쉴 새 없이 여백을 채우는 찰스 믹스의 베이스 연주와 그랜트 가이스만의 감칠맛 나는 리듬 기타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80년 미국 레이크 플래시드 동계 올림픽의 공식 주제곡으로 특유의 역동성을 맘껏 뽐냈던 이 곡은 1980년대를 주름잡던 KBS 2FM 라디오 프로그램 < 황인용의 영팝스 >의 시그널로 사용되어 국내 청취자들에게 추억의 멜로디로 남아있다.

카시오페아(Casiopea) ‘Fight man’ (1991)

어쿠스틱 기타에 푹 빠진 학생들이 일본의 기타리스트 코타로 오시오의 ‘Fight’, ‘Wind song’에 도전하는 것처럼 ‘연주 꽤나 한다는’ 실용음악과 학생들은 ‘Fight man’으로 합주 실력을 검증하곤 한다. 3분 약간 넘는 짧은 곡이지만 쫀득한 베이스라인과 기타 키보드의 더블링 등 속이 알차다. 곡의 중반부 복싱 경기처럼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베이스와 펑키(Funky) 기타가 용호상박의 자웅을 겨룬다.

티스퀘어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퓨전 재즈 밴드 카시오페아는 1979년 셀프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한 이래 장장 40년 넘게 현역으로 활약 중이다. 밴드의 주축은 기타리스트이자 메인 작곡가 노로 잇세이. 3기로 나뉘는 밴드의 타임라인에서 유일하게 밴드를 떠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카시오페아 2기에 나온 1991년 작 < Full Colors >의 오프닝 트랙인 ‘Fight man’ 속 화려한 기타 솔로로 일본 최고의 퓨전 재즈 기타리스트 지위를 공고히 했다.

빛과 소금 ‘오래된 친구’ (1994)

MBC 예능 프로그램 < 나는 가수다 > 의 진행자로 활약했던 장기호와 김현식의 명곡 ‘비처럼 음악처럼’을 작곡한 박성식이 의기투합한 2인조 그룹 빛과 소금은 지난 몇 년간 시티팝 붐이 일면서 김현철, 윤수일과 함께 ‘한국 시티팝의 원류’로 재조명되었다. 이들은 동시대의 봄 여름 가을 겨울보다 인지도는 약했지만 1990년대 가요의 세련미를 책임지며 마니아를 결집했다. 후대에 다양한 후배 뮤지션들이 리메이크한 ‘샴푸의 요정’과 감정에 충실한 발라드 넘버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가 대표곡.

이들의 정규 4집 < 오래된 친구 >의 타이틀곡인 ‘오래된 친구’는 빛과 소금의 곡 중에서도 특출나게 펑키(Funky)하다. 초반부 재치 있는 보코더의 사용은 장기호 특유의 감미로운 음성으로 이어지고, 간결과 화려를 넘나드는 박성식의 건반 연주가 곡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 결혼식 입장곡을 연상하게 하는 오르간 소리와 통통 튀는 베이스 슬랩으로 간주도 빈틈없이 채웠다. 기교를 뽐내면서도 대중적 감각을 포용한 한국 퓨전 재즈의 보석 같은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