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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9 쟈니 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아홉 번째 주인공은 부평의 애스컴(ASCOM)에서 첫 음악활동을 시작한 원로 뮤지션 ‘쟈니 리’다.

“나는 음악으로 살다가 음악으로 죽고 싶어요”
1938년생으로 올해 나이 84세. 원로 가수 쟈니 리는 여전히 음악을 즐긴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 회고는 역사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웠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 6.25 전쟁을 견디고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나게 된 일화, 박정희 정권 시대에 그의 노래 ‘내일은 해가 뜬다’가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 등…

우여곡절 끝에 1957, 8년도에 ‘배를 타고 노래한다’는 뜻의 극단 쇼보트(Showboat)의 일원이 된 그는 이후 1960년대 당시 유행한 극장쇼 무대를 사로잡으며 인기 가수가 된다. 부평에 자리했던 미 군수지원 사령부(애스컴)는 그런 쟈니 리의 시작을 함께했던 공간이다. 아직은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던 11월 말 종로의 한 라이브 공연장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있던 지방 공연을 끝내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 ‘전설’은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몇 달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해 3관왕 거며 쥔 일로 이날의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하셔서 3연승을 거두셨습니다.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2주에 한 번씩 나오는 유튜브 방송(쟈니 리 tv)을 하니까 아마 그걸 보고 연락이 온 것 같다. 3연승을 한 건 어리둥절했다.

섭외 연락이 왔을 때 한 번에 출연 결심을 하셨나요?
사실 고민 좀 했다. 내가 최고 고령자인데 떨어지면 가면을 벗어야 하니까 창피할까 봐. 그래서 처음 가왕이 됐을 때 깜짝 놀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노래를 참 잘하지 않나. 가창력도 풍부하고… 그런데 노래가 맛이 없어. 노래라는 건 ‘맛이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 창작력도 풍부해야 하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표곡인 ‘뜨거운 안녕’에 그 맛이 담겨 있어 계속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1966년도에 < 뜨거운 안녕 >이 나왔다. 그 앨범과 곡을 들어봐라. 지금 들으면 어떻게 이렇게 불렀나 싶다. 그때 대한민국 가수 중에서 노래를 눈물을 흘리며 부른 건 ‘뜨거운 안녕’ 뿐일 거다. 너무 ‘오버 필링’ 하니까 신세기 레코드에서 내지 말자고 했다. 가수들이 전부 노래를 정박자로 하고 깨끗하게 하고 이랬을 때니까. 근데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니다. 어린 나이에 피난 내려왔던 내가 이제 레코딩이라는 걸 하게 되니까 감동스럽고 앞으로 돈도 좀 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도 났던 거다. 그 감정을 음반에 그대로 옮겼다.

활동명을 ‘쟈니 리’라고 지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국인 양아버지가 ‘쟈니(Johnny)’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쟈니라는 건 외롭고 귀엽고 뭐 그런 뜻이었다. ‘Johnny is lonely boy(쟈니는 외로운 소년)’라는 말도 있던 것 같고. 쟈니는 외로운 거다. 내가 고아 출신이니까. 거기에 내 성인 ‘이’를 붙여서 쟈니 리가 됐다. 양아버지가 나를 ‘슈플라이’라고도 불렀다. 그 당시에 ‘슈사인(Shoe shine) 보이’가 많았다. 미군들 군화 코만 반짝반짝하게 닦아주는 꼬마들이다. 그곳만 반짝반짝하게 닦으니까 파리가 미끄러진다고 해서 만들어진 ‘슈 플라이’가 내 별명이었다.

양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생이었는데 당시 기생은 일부종사, 평생 한 남자만 만나야 했다. 기생학교에 다니면서 활도 잘 쏘고, 서예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장구도 잘 치는 요새 같으면 탤런트 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연극배우를 하던 중국 사람인데 금방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혼자서 나를 키우셨다. 그러다 1951년도 13살 때 피난 내려와서 1954년에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났다. 영어를 귀동냥으로 배우면서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시면서 노래하라면 노래도 하고 그랬다.

말씀은 조용조용하게 하시는데 노래하실 때는 정말 호랑이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습득한 거다. 옛날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좋아했다. 가수들이 박자에 맞춰서 노래해야 되지만 리듬 앤 블루스는 애드리브도 있고 가창력도 있어야 한다. 아주 헤비한 록 보이스도 많이 쓴다. 또 노래가 때로는 재즈에 가까울 만큼 굉장히 쿨하다. 음악 분야에서는 아무나 못 하는 거다. 마음을 울리는 것도 있고.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조지 벤슨, 마이클 볼튼 같은 사람들은 노래가 거의 애드리브다. 다른 사람 노래를 리메이크해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음악에 젖어서 노래하다 보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가창력이 나오고.

과거에 즐겨 부르셨던 노래도 궁금합니다.
냇 킹 콜, 토니 베넷 같은 스탠더드 노래를 많이 했다. 그런 고운 음악을 부르다가 록 블루스 쪽으로 마음이 가더라. 옛날에 우리가 노래할 때는 ‘극장쇼’라는 게 있었다. 고인이 됐지만 정원이란 가수와 나는 남들이 가만히 서서 노래할 때 우리는 청바지 입고 춤추면서 노래했다. 현재의 아이돌 같은 거였다.

그 시절은 여자들을 대학에 안 보낼 때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그분들이 거의 다 내 팬클럽이었다. 어른 앞에서 눈도 못 뜨고 그럴 때인데 우리를 소개하면 소리를 지르고 고무신 날라 오고 그랬다. (웃음)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아마 제일 처음일 거다. 한바탕 난리가 나서 공연이 끝나면 주인 잃은 고무신이 한 가마니가 됐다.

말씀만 들으면 정말 가수가 천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셨나요?
아니다. 우연히 가수가 됐다. 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꿔본 적도 없다. 옛날에 부산에 ‘하이야리아 부대’가 있었다. 내 양아버지가 별 세 개 달린 미군 장교였다. 그 부대에서 아버지가 피아노치고 내가 노래하고 그랬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수가 된 거다.

그러면서 미8군 무대에도 오르신 건가요?
양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시고 그 어린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던 게 없어서 미8군부대를 들락거렸다. 일반 단체하고 미8군 가수하고 다른 점이 뭐냐면 8군에서 노래하는 가수는 영어 발음이 좋지만 일반 단체는 영어가 엉터리다. 8군에서 공연하는 밴드들은 오디션을 보고 등급을 나눴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다.

스페셜 A를 받으면 한 달 정도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미8군에서 나온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접을 좀 해줬다. 등급이 높았던 거다. 난 13살부터 양자로 있었고 나름 언어에 소질도 있었다. 조실부모한 내가 학벌이 있었겠나? 언어부터 노래까지 전부 노력하고 직접 터득했다.

미8군에 활동하셨던 거는 그럼…
1957년이었다. 당시에 현미는 무용을 했고 한명숙 씨는 노래를 할 때다. (당시 얘기를 조금 더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한국 가수들이 8군에 들어가면 치즈 샌드위치, 햄버거를 줬다.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맛있었다. 디저트로 파인애플, 바나나도 줬는데 평생 보지도 못한 과일들이었다. 아이들을 주겠다고 이런 음식을 챙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작은 유리병에 담긴 콜라를 그때 누가 먹어봤겠나.

미8군 때 한 캠프에서만 있으셨던 건가요?
오산, 평택. 의정부에도 있었다. 그쪽은 전부 미군 기지니까. 8군 생활할 때는 그쪽을 오갔다.

부평 애스컴에도 자주 들리셨나요?
1957년에 연예계에 입문해서 1959, 1960년쯤에 다녔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곳이 애스컴이다. 개인적으로 미8군부 무대에 많이 서진 않았다. 따로 오디션을 보지도 않았고. 양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쟈니? 싱!”하면 내가 노래를 불렀다. 워낙 어릴 때니까 그 사람들의 귀여운 장난감이었다. (웃음)

공연료가 꽤 높으셨을 것 같아요.
몇 푼 안 됐다. 당시에 단장이 지금의 기획사나 다름없다. 그가 모든 걸 주관했고 공연해서 받은 돈을 자기가 거의 다 챙겼다. 얼마 안 줘도 투덜거릴 수 없었다. 얘기하면 그냥 잘리니까. 피곤하고 살기 어려울 때였다. 어디 가서 밥 한 그릇 먹을 수도 없었고 누구나 돈 돈 돈 했다. 딱히 돈을 못 받아도 그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그 힘으로 노래 불렀던 시기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가수가 됐다.

1960년대에는 ‘극장쇼의 황제’라고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에 간판만 붙여놓으면 정말 소동이 났다. 내가 1960년도에 도요타의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알랑 드롱처럼. 넝마주이 같이 낡은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무대에 올랐다. 핸드마이크가 없을 때라 스탠드 마이크를 썼는데 그걸 그대로 들고 객석 앞까지 나가고 그랬다.

오랜 기간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로 알려져 있던 전인권의 ‘사노라면’이 선생님의 노래였습니다. 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히지 않으셨나요?
원제는 ‘내일은 해가 뜬다’이다. < 뜨거운 안녕 > 음반에 같이 있다. 1966년 즈음 방송국에서도 많이 틀고 꽤 알려졌던 곡이다. 그런데 갑자기 금지곡이 됐다. 그때는 툭하면 금지곡이 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절에 내가 ‘해가 뜬다’고 노래를 하니까 역적모의로 비쳤나 보다. 뭐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 먹고 살라고 그런 거겠지만.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다가 미국에서 돌아오니 민중가요로 불리고 있더라.

공식적으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힌 게 2000년대 초쯤이었나요?
KBS에서 내 음반 < 뜨거운 안녕 >을 가지고 집에 왔다. 피디가 “여기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노래가 누구 노래예요?”라고 묻길래 전인권 노래가 아니라 내가 1966년에 많이 불렀던 노래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2004년 가요평론가 박성서가 소장해 오던 < 쟈니 리 가요앨범 >을 공개하며 주목받았다. 이 음반에 ‘내일은 해가 뜬다’가 실려 있었고 이 곡의 원작자가 쟈니 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편집자)

인터뷰는 종로 3가에 위치한 ‘청춘극장’에서 이뤄졌다. 쟈니 리는 이곳의 전속 뮤지션이다. 극장쇼를 많이 했던 그가 지인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5개월 전쯤 이 공간을 차렸다. LP판이 가득했고 음악을 틀 수 있는 디제이 부스도 있었다. 아, 반짝거리는 일명 ‘사이키 조명’이 화려하게 무대를 비추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장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장년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형님”, “선생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몇 달 전 ‘바보 사랑’이라는 싱글을 낸 쟈니 리는 여전히 청춘이며 늘 그랬듯 잘 나가는 가수였다.

요즘 한국 가수들이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창 활동하실 때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때는 미국 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90%는 뻥이었다. 옛날에 < 삼손과 델릴라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 내용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쇼로 만들어 공연하는데 영화에서처럼 건물이 무너지고 조명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놀라운 곳이 미국이었으니까 당시에 미국에 진출하는 건 꿈도 못 꾸었다. ‘내 음악에 버터 냄새가 좀 난다’라는 걸로 만족했다.

그럼 현재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손자뻘 되는 젊은 친구들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걸 보시면 어떠세요?
대단하다.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영어도 엄청나게 잘하더라. 자기들이 텔레비전 보고 배운 영어라고 하는 데 정말 천재구나 싶다. 지금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게 아이돌 가수들이다. 방탄소년단이나 다른 아이돌 가수를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홍보가 된 거 아닌가.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에서 가수 인순이가 선생님의 ‘뜨거운 안녕’을 리메이크한다고 합니다.
인순이 노래를 좋아한다. 가창도 좋고 무엇보다 소울이 남다르다. 약간 재지하게 리듬도 조금 바꾸고 하면 곡의 맛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음반을 발매하면 내게도 꼭 보내 달라. 인순이에게는 기대한다고 전해주고. (웃음)

60년 이상 노래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음악이란 무엇일까요?
음악으로 죽고 음악으로 살고 싶다. 보통 가수들이 은퇴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왜 하고 싶은 음악을 안 하고 중간에 나이 먹었다고 멈추는지. 조금 더 노력하면 되는데. 나는 평생 노래하고 싶다.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즐겁다. 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노래 덕분이다.

젊은 노장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빛이 바랬을 법한 기억들도 연도를 포함해 정확하게 들려줬고 필요할 땐 서슴없이 노래를 불렀다. 단단하고 탄탄한 경험을 간직한 쟈니 리의 이야기에선 꼿꼿한 기세가 느껴졌다. 공연장을 떠나려 하자 몇 번이나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싶다던 쟈니 리. 이 따뜻한 말의 건넴을 받으며 이것이 어쩌면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가수 쟈니 리와의 만남은 뜨겁고도 뜨거웠다.

인터뷰 : 소승근, 박수진, 정다열, 장준환
사진 : 정다열
정리 : 박수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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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8 김삼순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덟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인천 최초의 걸 밴드 ‘레이디버즈’의 드러머 김삼순이다.

올해 브레이브걸스 ‘롤린(Rollin’)’ 역주행은 위문 열차 공연 영상으로부터 시작했다. 특히 병사들이 의자 위로 올라가서 가오리 춤을 따라 출 만큼 흥겨워하는 모습은 군 생활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전폭적인 지지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도 걸그룹의 공연은 많은 병사들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인천 출신 여성들로 결성된 5인조 걸 밴드 레이디버즈는 전국의 미군 부대 클럽을 누비며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양손에 쥔 드럼 스틱, 숏컷 헤어스타일, 몸에 딱 맞춰 떨어지는 근사한 옷. 지금 봐도 세련된 모습으로 공연하던 사진을 보여주는 레이디버즈의 드러머 김삼순은 그때와 다름없이 생기가 넘쳤다. 타지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이 부평이니 애스컴 역시 내 고향이다’라며 밴드 활동 시절의 추억과 애스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도 인천 그린 실버 악단,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 김삼순을 만났다. 

우선 인천 최초의 걸밴드, 레이디버즈 데뷔에 얽힌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레이디버즈는 여자들끼리 시작한 그룹이다. 그룹명도 숙녀를 뜻하는 ‘레이디’와 새들이 조잘거리는 모습을 연상한  ‘버드’가 합쳐진 단어다. 근데 ‘레이디버드’(Ladybird)를 검색하니 무당벌레가 나오더라. 55년 전 그때만 해도 단장님이나 우리 멤버들이나, 다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일차원적인 뜻만 생각하고 만든 셈이다. (웃음)

정확하게 활동을 개시한 건 몇 년일까요.
당시에 오디션을 본 게 있었으니, 아마 1968년도일 거다. 신중현도 바로 옆에서 본 기억이 있고 이미자나 최희준이 쇼를 열면 펄 시스터즈와 같이 서기도 했으니. 처음에는 여자 여섯 명이 함께 연습하며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그러다 미 8군 오디션이 다가올 때쯤 퍼스트 기타가 사정이 생겨 밴드에서 나가게 됐고, 단장님이 데려온 남자 한 명과 몇 개월을 다시 연습한 뒤 미8군 오디션에 나갔다. 그때 서파리스(Surfaris) ‘Wipe out’의 드럼 솔로로 B+ 등급을 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국내 가요 무대에서의 인상에 남는 기억이 있을까요.
한 미8군 사단에 가면 한 달 정도 머물며 공연을 하는데, 그동안에도 틈틈이 국내 가요 무대에 출연했다. 그때 배호의 마지막 공연에도 나갔고, KBS 사옥이 남산에 있을 때 김상희와 함께 녹화를 하기도 했다.

드럼을 시작할 때 영향을 준 노래나 뮤지션은 누구였나요.
우리 맏언니와 결혼한 형부가 한국 최초의 드러머 김윤옥 선생이다. 당시 음악하는 사람은 일명 ‘딴따라’라는 편견이 있었는데도, 우리 형부가 워낙 인물도 잘나고 인간성도 좋았던 터라 아버지와 맏언니도 형부에게 드럼을 배우는 것을 허락해주더라. 그때가 17살이었다. 마침 오빠도 아코디언을 연주해서 ‘음악하는 남매’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다.

당시 레이디버즈의 연주 실력은 어땠나요.
아우, 별로였다. 히식스나 키보이스같이 실력이 뛰어난 밴드에 비교하면 말도 못 한다. 우리는 여자로서 덕을 본 셈이다.

미8군에서 연주했던 레퍼토리를 소개해주세요.
당시 우리 밴드의 단골 곡은 아까도 말했듯 서파리스(The Surfaris)의 ‘Wipe out’이다. 벤처스(The Ventures)의 ‘Shanghied’나 ‘Django’도 자주 연주했고, 비틀스 곡은 거의 다 했던 것 같은데 특히 ‘I’m so tired’를 많이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미8군 중 어디에서 주로 공연하셨는지.
전국의 부대란 부대는 다 돌았다. 미8군에는 밴드 비 클래스와 에이 클래스가 나뉘어 있는가 하면 패키지, 쇼 프로 형식으로 들어가는 게 있다. 우리 밴드가 속한 쇼 클래스는 가격이 더 비쌌다. 저녁 9시, 10시, 11시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공연을 하는데, 애스컴에서 공연할 때는 다른 밴드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대가 있을까요.
일단 반응이 좋은 부대가 가장 재미있다. 당시 무대는 사병 클럽, 중상사 클럽, 장교 클럽으로 세 개로 나뉘는데, 장교 클럽은 다들 점잖게 앉아 경청만 하니 조금만 틀려도 티가 나서 주눅이 들 정도다. 근데 또 사병 클럽으로 가면 함성이나 반응이 너무 좋다. 몇몇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밴드 멤버들을 보려고 바로 앞까지 무릎으로 기어오기도 하고. (웃음) 중상사 클럽은 다들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공연에 온다. 어느 날 한 군인이 즉석카메라를 가져와 그 자리에서 한 장 찍어 건네준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나라는 카메라가 워낙 귀할 때라 정말 놀랐다.

애스컴은 고향이니까 더 반가웠겠어요.
그렇다. 어디를 가든 대우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고향과도 같은 애스컴이 가장 반가웠다. 우리가 공연에 가면 미군 장교들이 커피도 권하고 토마토 주스도 줬다. 그때 토마토 주스를 처음 먹어봤는데 먹어보지 않았던 것이라 내 입에는 안 맞더라.

그러면 레이디버즈 이름으로는 활동을 몇 년 정도 하셨는지.
정확하게 2년 활동했다. 미8군은 2년 활동을 하면 다시 오디션을 봐야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1968년에 시작하여 1970년에 활동을 마쳤다. 그리고 그때는 여자가 스물셋만 넘어가도 올드미스라 하던 시절이라 고등학생 때부터 5년간 펜팔을 주고받던 군인과 결혼했다. 이후에는 내 자리를 장미화가 채운 것 같다. 다시 미8군 오디션을 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장미화와 임정임이 레이디버즈로 활동하며 동남아에 진출한 것을 보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레이디버즈로 활동할 때 돈은 얼마 정도 받으셨나요.
그 당시 월급 3만 3천 원에서 세금 10퍼센트를 떼고 3만 원을 받은 것 같다. 집에 1만 원 정도 드리고, 1만 원은 저금하고, 나머지 1만원은 용돈으로 쓰면서 좋은 의상과 신발을 맞췄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군 상사였던 남편의 월급이 8천원인걸 알게 됐을 때 정말 놀랐다.

레이디버즈로 활동하며 전국을 다니던 때를 어떤 시절로 기억하시나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이자 행복한 시절이었고, 그렇기에 빨리 그만둔 것에 서운할 때도 있었다. 중간에 후회를 많이 하기도 했고. 그래도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서 지금의 부군을 만나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비가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거고, 무엇보다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당당하다. 물론 젊을 때는 지금은 사별한 남편이 이상하게 볼까 미8군에서 공연한 사실을 말 못 하기도 했었다. 근데 후에 말하고 난 뒤에는 내가 음악 활동을 한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화를 내주기도 했다.

지금 많은 걸그룹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다들 너무 실력도 좋고 여러 방면에서 완벽하게 잘하는 친구들이다. (웃음)

레이디버즈 활동 이후 언제 다시 음악을 시작하셨나요.
우선 부모나 형제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음악이 정말 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35년간 식당을 영업하느라 도저히 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50살이 되었는데 정말 음악이 미치게 하고 싶어 식당을 병행하며 여유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첫 시작은 부평에 있는 인천여성문화회관에서 장구를 배웠는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날 보고 혹시 예전에 악기를 다룬 적이 있는지 너무 익숙하게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시더라. 오래전에 드럼을 좀 쳤다고 말씀드리니 그때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에 드럼 자리가 비었다고 소개해주셨다.

인천시와 여성가족부가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원하다가 지금은 인천가족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인천가족재단 고문 자리에 앉아 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까지 정기 연주에 참여했다. 항상 나가는 것은 아니고 오케스트라에 타악기 연주자가 5명 정도 필요한데 징, 카우벨 같은 타악기 연주자 자리가 비면 채우고 있다. 15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시간 여유가 더 생겨서 인천 그린 실버 악단에서도 활동했다. < 가요무대 >를 진행하시던 김정도 선생님이 운영하던 오케스트라인데 김정도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함께 활동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미국 진출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최근 많은 K팝 가수들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고 정상을 따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K팝 가수들 정말 뛰어나고 훌륭하지만, 그래도 우리 시대에는 나름대로 우리가 최고였다. 특히 애스컴은 우리나라 음악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다들 악보를 보기는커녕, 악기조차 제대로 배울 수 없던 환경에서도 선배들은 부대 앞에 있는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나 미군들이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듣고 음악을 독학했으니까. 물론 흉내 내는 것을 시작으로 만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오늘날 K팝이 발전한 것이라 본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장준환, 정수민
사진 : 임동엽
정리 : 장준환, 정수민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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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7 김홍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보이스’와 ‘히식스’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홍탁이다.

멋스럽게 샌 백발에 딱 붙는 청바지. 선글라스 속 눈동자는 호롱불처럼 빛났다. 차분한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지만, 스타와 뮤지션을 단호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로커 특유의 애티튜드와 예술가의 자의식이 충만한 그는 ‘평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성격처럼 과거의 반추를 뒤로 한 채 미래의 목표에 골몰해 있었다.

물론 한국 대중음악사의 발자취인 그의 경력을 생략하기는 어렵다. 최고의 인기 록 밴드 ‘키보이스’로 데뷔했고 ‘히파이브’와 ‘히식스’를 통해 독자적 음악영지를 건설했다. 전성기 무렵인 1972년부터 14년간 이어진 미국 체류기는 오인된 것처럼 음악적 공백기가 아닌 새로운 도전의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에는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 집 위층에 살던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우리말처럼 원활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어떤 식으로 익혀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던 시점에 기타에 빠진 게 큰 행운이었다. 당시 ‘목포의 눈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처럼 부드러운 곡들밖에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군 병사를 만나 현지 스타일을 체득할 수 있었고 오래 배우진 못했지만 커다란 수확이 되었다. 의사소통은 말이 안 통하다 보니 바디 랭기지를 주로 활용했다.

1964년 키보이스 데뷔 때 얘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다 함께 모인 건 1963년으로 기억하고, 1964년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우리의 음반이 비틀스보다 먼저 나왔던 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비틀스의 데뷔 앨범 < Please Please Me >는 1963년 3월 22일에 나왔다) 당시 키 보이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비틀스의 곡들과 김영광이 작곡한 ‘그녀 입술은 너무나 달콤해’ 였다. (원년 멤버는 김홍탁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 옥성빈이었다)

키보이스 1집의 대표곡은 ‘정든 배는 떠난다’였죠.
그 당시엔 멤버들의 자작곡이 아닌 기성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부르는 시절이었다. 김영광 선생이 작곡한 ‘정든 배는 떠난다’는 애초 트로트 선율이 완연해 우리가 추구한 록 풍으로 편곡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 샤우팅 창법을 도입했고(첫 소절의 ‘달그림자에’를 들어보라) 6도, 7도 코드를 첨가해 화성학적으로 더욱 풍성한 편곡을 완성했다. 그래도 ‘정든 배는 떠난다’가 뜬 데는 복합적인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키보이스 시절 차중락의 죽음은 안타까웠던 기억이겠어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매일같이 함께 생활했던 차중락은 순정파 로맨티스트였다. 그렇기에 그의 사망과 관련 가짜 뉴스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미8군 무대에서의 키보이스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당시 미8군 쇼에서 ‘컨템포러리 뮤직’의 최고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달랑 다섯 명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비틀스로부터 점화한 록 밴드의 전성시대와 키보이스의 등장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키보이스의 음악에서 김홍탁이 갖는 의미는요.
우선 모든 게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데뷔한 그룹에서 좋은 처우를 받았고, 무엇보다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송창식, 윤형주의 무대로 잘 알려진 쎄시봉에서 가장 먼저 공연한 것도 우리며 방송국, 지방공연과 극장 쇼를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중현과 애드포(Add4)는 키보이스와 달랐다.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키보이스는 명백히 비틀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차중락이라는 뛰어난 보컬이 있었음에도 하모니의 비중을 매우 높게 가져갔다. 반면 신중현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처럼 거친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뤘다. 신중현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음악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을 닦은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키보이스를 떠나 히파이브를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 꽂힌 상태였다. 헨드릭스의 우드스톡 공연을 보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그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하드록을 향한 음악적 야망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했을 뿐이지 키보이스 멤버와의 어떠한 불화로 떠난 것은 아니다.

키보이스와 히파이브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히파이브는 최헌이 가세하면서 히식스로 바뀐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 컵 쟁탈’이라는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열렸다. 1969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1회 대회에서는 키보이스가 대상을 받았고, 2회와 3회 연속으로 히식스가 수상했다. 대중성에 초점을 둔 심사위원은 키보이스에 좋은 점수를 줄었지만 히파이브와 히식스의 음악적 시도를 높게 평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히파이브 다음인 히식스에선 더욱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 보였다. 히식스와 키보이스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히식스 활동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창의성을 맘껏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미국 음악에서 탈피해 사이키델릭 록 그룹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를 재해석해서 연주하는 등 틀에 구속되지 않았다. 한번은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원래 약 17분 정도인 이 곡을 45분으로 늘려 잼(즉흥 변주) 형식으로 연주했다. 기타 솔로만 15분 정도 했던 것 같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을 연주하다 중간에 돌연 6명의 멤버가 동시에 드럼 연주를 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이기도 했다. 사이키델릭과 젊음의 코드가 일치했던 때라 관객 반응도 좋았다. 키보이스 시절에 비해 자작곡 비중을 높인 점도 구별점으로 꼽고 싶다.

히파이브와 히식스 시절, ‘초원’,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초원 시리즈’는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노래의 소재가 조금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자연의 소재를 활용해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초원’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그게 대박이 나서 서울 곳곳에 ‘초원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초원 세탁소’가 생겨날 정도였다. 사운드 적으로는 트로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히식스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다.

이어서 김홍탁의 부평 애스컴 회고담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통해 속된 말로 ‘그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느꼈다. 인천 출신의 그는 애스컴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키보이스의 일원으로 애스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는 순간 과거 여행을 다녀온 듯 우수에 젖었다.

미8군 무대는 당대의 K-뮤지션들에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제공해주었고 숙련을 통해 쌓은 음악적 자양분은 한국에 소울, 펑크, 재즈 등 장르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조용필과 ‘사랑과 평화’ 또한 미8군 출신임을 아시는지. 김홍탁의 증언은 ‘과거 없이 현재 없다’는 간명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부평애스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애스컴은 미군 총괄 기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뭐랄까 부유한 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 가장 많은 공연을 펼쳤던 곳이라 마음의 고향 같다. 고향이 인천이다 보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처럼 인천 또한 항구도시, 개화 도시이다 보니 당시 외국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인천 출신 뮤지션 혹은 밴드가 유독 많다.

K팝과 연결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애스컴에서 활동했던 많은 뮤지션들의 음악과 활동이 작금의 K팝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극히 한정된 인물들만 기억할 뿐이다.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서 세월 속에 잊힌 이들과 그들의 음악을 반추하고자 한다.

김홍탁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최헌이 부른 히식스의 ‘당신은 몰라’겠지만 음악적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곡은 1970년에 발표한 히식스 1집 < HE6 Vol. 1 >의 수록곡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이다.

1972년이면 전성기였는데요. 그런데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번 결심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행동한다. 엉뚱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본토 격인 미국에 부딪혀 보고픈 마음이 컸다. 떠난 뒤 약 14년 6개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운 점, 좋았던 점은 공존할 수밖에 없기에 후회는 없다.

미국으로 떠난 후 음악관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세상과 나 자신이 변함에 따라 추구하는 음악 또한 자연스레 변화해왔다. 미국 생활 초기에 일류 호텔에서 스탠더드 재즈를 연주했다. 본성이 로커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점차 적응해나갔다. 후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박인수가 부른 1980년 작 ‘너처럼 예쁠수야’의 펑키(Funky)한 사운드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미래 대중음악의 중심엔 재즈가 있다고 보았고 실용 음악학원이라는 말 대신 서울재즈아카데미란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홍탁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원장으로 계시면서 얻은 보람은 무엇인가요.
축구 경기서 스타플레이어만큼이나 경기 전반을 조율하는 미드필더가 중요한 것처럼 곡 제작의 전체적인 과정을 조율하는 뮤지션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이러한 뮤지션들의 산실 역할을 해서 기쁘다. 현재 BTS의 곡 녹음에 참여하는 뮤지션, 테크니션 중 아카데미 출신이 더러 있는 거로 안다.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록은 힙합이나 EDM에 밀려 침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생을 록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물론 안타깝다. 역시나 좋은 곡이 발표되어야 록이 다시 살 수 있다고 본다. 신중현 선배님이 ‘빗속의 여인’을 비롯한 많은 명곡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음악 뮤지션이기 때문에 대중이 사랑하는 음악, 좋은 곡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생님께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 혹은 밴드를 다섯 팀만 소개해주세요.
‘Rock around the clock’으로 로큰롤의 시작을 알렸던 빌 헤일리 & 히스 코메츠(Bill Haley And His Comets)와 비틀스(Beatles), 앞서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산타나(Santana, 그의 휴대폰 벨 소리는 ‘Samba pa ti’였다.) 그리고 조금 의외로 들리겠지만 시카고(Chicago). 재즈 록 퓨전 밴드 아닌가.

김홍탁 선생님의 향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유튜브를 꾸준히 할 계획이다. 키보이스를 계승하는 해피 밴드와 히식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567Nll과 함께 유튜브를 통한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계획 중이다. 좀 더 크게 보자면 아까도 말했지만,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처럼 <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 >을 설립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양평, 인천, 서울, 샌프란시스코의 네 도시에서 < K All-Star Group >이란 이름으로 자선 공연을 펼치고도 싶다.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

인터뷰 : 임진모, 김성욱, 염동교,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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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모 인터뷰 : < Underground Rockstar >로부터

‘마에스트로’, ‘빌었어’, ‘아름다워’, ‘아이야’ 등 그를 대표하는 곡들은 많지만 < Boyhood >에 담겼던 ‘Meteor’를 빼놓을 수는 없다. 그 후 약 2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 나온 2번째 정규 앨범 < Underground Rockstar >는 어떤 작품일까, 그리고 어떤 기록과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이번 인터뷰는 그에 대한 해답이라기보다 신보를 듣고 각자가 느꼈던 바를 이해하고 정리해 넥스트 레벨로 나아갈 기회를 마련하고자 준비했다.

창모와의 인터뷰는 2021년에만 벌써 2번째다. 올봄 이후 여름과 가을을 뛰어넘어 다시 찾아온 겨울에 들려온 기쁜 소식이 랩스타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만남의 간격이 짧고, 바쁜 일정을 배려해 이번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하였으며 평소에 중심적으로 다루던 근황이나, 음악세계를 돌아보기보다 그가 새로 취입한 음반에 집중하려 한다.

앨범 발매로 굉장히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을 텐데 그래도 이즘 독자들과 팬들을 위해 간단하게 인사 나누고 시작할까 한다.
반갑습니다. 잘 듣고 계신가요? 이즘IZM 독자분들도 반갑습니다.
음악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솔직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아 보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들어가서 < Underground Rockstar >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나? 그리고 이번 앨범을 만들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온전히 내 마음속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앨범의 첫 스케치가 시작된 것 같다. 그리고 작년 즈음부터 ‘미움받을 용기’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아니오” 같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살 즈음 세워놨던 목표를 대부분 이룬 상태였다. 그 순간 내 마음은 나 자신에게 안전한 길에서 벗어나라고 말했고 그 마음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내 마음, 내 본능을 따르는 것, 그게 제일 중요했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 음악 안에서 그런 도전을 한다면 한 사람의 구창모로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게 될 것이라 믿었다.

첫 곡부터 웅장한 현악기가 등장하며 영화 사운드 트랙 같은 압도적인 스케일을 선보인다. 사운드적으로 많은 심혈을 기울인 것 같은데 노고가 상당했을 것 같다.
무명 때 돈을 많이 버는 음악가가 되면 진짜 오케스트라 세션을 받고 싶단 생각을 했었다. 무엇보다 이번 앨범엔 내 만족을 위해 돈을 아끼고 싶지 않았다. 몇십만 원밖에 안 하는 가상 악기 대신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몇백만 원짜리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를 사서 직접 연주하는 방식처럼 말이다.

내가 음악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자본은 힙합계에서도 손에 꼽힐 수준이지만, 음악을 만들 땐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모드였다. 감이 확 꽂히는 아이디어를 최상의 퀄리티로 실현하는 것, 그게 ‘언더그라운드 록스타’다.

‘Beretta’와 ‘Vivienne’은 느낌이 다르다. 작년의 ‘Swoosh flow’에 이은 또 하나의 UK 드릴 장르 곡인데, 플루트와 현악기, 안다영의 보컬로 차분하면서도 은은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난 영국 아티스트들을 좋아한다. 예를 들면 음악적으로 ‘1+1’이라는 정답이 뻔한 문제가 영국에 들어가면 “답이 2긴 한데 2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해봤는데 내 답은 11이야 물론 숫자 발음은 내 동네 발음으로”라는 답으로 나오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답은 설득력이 있다.

반도에 사는 사람으로서, 다이내믹하고 트렌디한 나라에 사는 아티스트로서 그게 내가 지녀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했다. 난 내 속에서 아이디어를 찾는 동시에 전 세계 예술가들에게서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환경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특히 ‘Vivienne’에서는 목소리가 유독 처절하다. 가사 중에서는 ‘ㄱ, ㄴ, ㄷ, ㄹ 하나씩 해낸 후 만나게 되는 챕터는 미움이니’라는 구절도 있지 않나. 마치 성공 후 받는 헤이팅이나, 따가운 눈초리에 대한 넋두리 같다. 노래의 의미가 궁금하다.
질문대로가 맞다. 난 항상 안될 거야, 별로야라는 얘기를 들어온 동시에 가장 성공적인 경력을 꾸준하게 이어온 래퍼 중 한 명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쁘고 쿨한 모습으로 365일을 굴지는 않는다. 나는 인간이고 나름의 고통과 개성을 갖고 있다. 난 지금 내 정도 커리어의 뮤지션이 됐을 때 더는 나처럼 고뇌하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나는 그걸 노래에 반영했다.

피처링은 아니지만 ‘태지’에서는 ‘Come back home’을 샘플링하며 서태지와 협업에 성공했다. 과거 여래 매체를 통해 서태지를 향한 존경을 표했는데 어떤 식으로 작업하게 되었나?
난 이 노래를 통해 ‘서태지’란 거대한 존재에 대해 존경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분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그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큰 영광이다. 시대의 아이콘이지 않나. 게다가 나는 내 삶의 첫 집을 그가 살던 평창동에 장만했다.

‘No regret’은 언더그라운드 ‘록’스타의 콘셉트와 가장 부합하는 곡이 아닐까 싶다. 참고한 노래들이 있었을 것 같다. 이 곡이 아니더라도 이번 앨범을 만들면서 많이 듣고 참고한 아티스트나 음반이 있다면?
이 노래 작업 당시 나와 조레인(Joe Layne) 형은 한마음으로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바이브(Vibe)를 담아보자는 얘기를 나눴다.

대표적으로는 카니예 웨스트의 < 808s & Heartbreak >, 스트록스의 < Is This It >, 오아시스의 < Definitely Maybe >, 이 세 앨범을 많이 들었었다.

Boyhood >가 소년의 ‘성장 스토리’였다면, < Underground Rockstar >는 창모의 ‘지금’을 담고 있는 느낌이다. 이 틀을 중심으로 3가지 질문을 이어서 드린다.

Boyhood > ‘Hotel Walkerhill’에서는 성공을 갈망했다면, 이번 앨범의 ‘Hotel room’에는 외로움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호텔이란 공간이 창모에게 어떤 의미인가.

호텔에서의 하루는 체크인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 끝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하루는 체크아웃과 동시에 성냥팔이 소녀가 보았던 환상처럼 사라진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삐딱하게’의 가사처럼 말이다. 난 그게 스타의 인생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체크인을 했을 때부터 체크아웃을 생각하며 우울해 해야 할까? 아니다. 난 그 시간을 누릴 거다. 한 마디로 ‘호텔’은 내가 갈망했던 라이프스타일을 담고 있는 공간이다.

‘Beretta’부터 ‘Little brothers’로 이어지는 중반부에서는 그 내면이 불안정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이다.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삶이다. 난 늘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속을 태운다. 그런 동시에 해야겠다 싶은 일은 포기하지 않고 진행하며 나의 꿈을 믿게 하고 힘을 준다. 어떠한 심경 변화라기보다 거기서 느껴졌던 그 자체가 그냥 ‘나’인 것이다.

< Underground Rockstar >와 < Boyhood >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특히, ‘Meteor‘의 성공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Meteor‘의 흥행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여유를 주었다. 덕분에 창작에 몰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춘 환경을 만들 수 있었다. 모든 환경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좁은 작업실에서 < M o t o w n >을 한창 만들던 2015년이 생각이 나곤 했다.

“새로운 사운드, 내 한계를 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담을 것”

그때와 비슷한 목표를 두고 이 앨범을 만들었다.

음반의 진행은 그야말로 유기적이다. 정리해보면, 과시적인 초반부에서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중반부를 지나 결국 삶을 긍정하는 밝은 기운의 후반부로 이어진다. 흡사 ‘이 인생이 힘든 면도 있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워’라는 메시지를 내비치는 것 같다. 앨범에 담겨있듯 창모의 현재가 늘 유쾌하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에도 ‘언더그라운드 록스타’의 삶을 만족하게 하는 게 있다면? 성공 후 무엇이 지금 자신을 가장 흡족하게 하는가?
여전히 본능적이면서도 열망과 분노를 갖고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내 모습에 만족한다. 내 돈, 내 동네 친구들을 모두 지킬 수 있는 능력도 날 기분 좋게 만든다!

언더그라운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연’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콘서트에 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 있나?
아마 힘들지 않을까? 오지게 취해 홍대 헨즈(The Henz Club)에서 ‘Hyperstar’를 부르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마지막으로 이번 앨범에 관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중에 자신의 자식이 이 앨범을 들어봤냐 했을 때 들어봤다고 말할 수 있도록 미리 지금 내가 활동하고 있는 이 시즌에 앨범 전체를 돌려보길 바란다.

인터뷰 : 이홍현, 정다열, 염동교, 손기호
정리 : 임동엽
사진 : 앰비션뮤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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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트레인 인터뷰

죽음은 정해진 형태가 없다. 때로 우리와는 상관없는 막연한 동화 같다가도, 어느 날 불쑥 다가와 조용히 곁을 맴돌곤 한다. 종교에는 철학과 교리의 대상이지만, 과학에는 학술적 탐구의 대상으로 비친다. 동시에 모든 인간에게는 두려움과 겸손을 깨닫게 하는 절대적 존재이기도 하다. 이러한 죽음이 가진 초월성과 다변성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구미를 당기는 매력적인 소재로 여겨져 왔다. 오늘날까지도 죽음에 관한 각자의 해석을 다룬 작품이 세상에 등장하는 이유다.

그리고 여기, 국내에도 그 어려운 소재를 과감하게 담아낸 한 명의 야망가가 있다. 2020년 < PAINGREEN >을 발표하며 평단의 반향을 끌어낸 에이트레인이 그 주인공이다. 포크와 일렉트로니카,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감각적 잉크를 자욱하게 풀어낸 초록빛 앨범은 초현실적 배경과 부드러운 은유를 양분 삼아 울창한 사운드스케이프의 숲을 일궈내며, 국내 대중음악이 취할 수 있는 표현의 차원을 한층 올려놓는다. 홍대 이즘 사무실에서 그와 만나 음악 세계, 그리고 작품에 대한 심층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만큼이나 사무실로 걸어 들어오는 그의 발걸음에서는 사뭇 초연함이 묻어났다.

작년 < PAINGREEN > 앨범을 발표한 이후로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외적으로라면, 나도 모르는 새에 신에서 이름 있는 사람이 됐다. 늘 그런 사람들을 보며 시기 어린 시선으로 내 미래가 저랬으면 하는 꿈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 남들이 내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있더라. 개인적으로는 외압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속해 있었다 보니 현대 알앤비는 이래야 하고 기존의 것은 촌스럽다 같은 천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내 취향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그리고 음악가로 인정을 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감이 좀 찬 상태다. 온스테이지도 나가고, 섭외를 받아 공연도 많이 서게 되었고. 아무래도 동경하던 멋있는 인디 뮤지션들의 바닥으로 한 발자국 선을 넘어본 것 같다.

외부의 시선이 부담보다는 자신감으로 작용한건지.
그런 셈이다. 얼마 전에 가수 오소영님의 공연을 다녀왔다. 활동한 20년의 세월과 음악 모두 너무 훌륭하고 대단한 분이다. 나는 약간 명분파인데, 만약 내 20년을 꿈꾼다면 이제는 그냥 ‘원해서’라는 명분은 좀 부족하다. 혼자 만든 작품이 한대음(한국대중음악상)의 후보였다는 배지가 달렸으니 내가 그런 명분에 있어 자신감이 생기더라. 앞으로도 혼자 하고 싶고, 혼자 잘해보고 싶고, 그러다 보면 또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까. 내 명분을 더해줄 사람들 말이다.

< PAINGREEN >은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 어찌 보면 다루기 무겁고 어려운 주제일 텐데, 이를 택하게 된 어떤 이유나 계기가 있을까.
사실 죽음은 쉽게 겪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기 때문에 워낙 멀게 느끼기 쉽지만, 굉장히 일상적이다. 나조차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죽고, 어릴 때 선택을 한 친구도 있고, 사고를 당한 친구도 있다. 우리 역시 그런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나는 이제 꿈을 좇고,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것을 더디게 만든 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니까. 그러다 보니 괴리감이 많이 들기도 했다. < PAINGREEN >은 마지막으로 이거라도 다 해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든 작품이다. 죽음이라는 표현이 되게 은유처럼 담겨있지만, 어떻게 보면 내게는 직설이었던 셈이다. 주목을 받고 살아있는 지금의 내가 “그때 죽고 싶었다”고 말하면 굉장히 모순적이겠지만, 물론 희망을 꿈꾸면서 만들던 시절이 있으니까. 공연장에서 이런 말들을 웃으면서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내가 그랬고 이런 노래를 썼지만 지금의 나는 여러분 앞에서 행복하게 노래하며 얘기하고 있으니, 그러면 살아봐도 괜찮지 않냐는 희망을 주는 거다.

어찌 보면 죽음으로부터 치유나 생존의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닌, 오히려 그대로를 담아내기 위함이었나.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걸 말하지 못하면 속에 병이 난다. 나에게는 음악이 노래를 한다 보다는 말을 한다의 개념이었기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담았다. 얼마나 힘들고 절망이 많은 세상 아닌가. 비단 나만 죽고 싶은 건 아닐 테니까. 물론 ‘다 괜찮아질 거다’ 혹은 ‘힘내라’ 이런 무드가 아니어도 그냥 이런 나의 모습을 담아낼 테니, 당신도 외롭지 않겠네라는 메시지를 담았던 것 같다.

고통을 의미하는 ‘Pain’과 재생을 의미하는 ‘Green’의 조합을 앨범의 제목으로 삼았다. 상충하는 두 표현을 합한 이유가 궁금하다.
‘PAINGREEN’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일단 개인적인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고, 실제로 내가 식물을 좋아하는 이유였다. ‘CORK’를 썼던 2018년 겨울 즈음, 식물을 병적으로 많이 키우던 때가 있었다. 비록 현실의 나는 죽고 싶더라도 식물은 명확히 살아있지 않나. 심지어 죽어가는 애를 가지를 잘라 물꽂이를 해놓으면 뿌리가 나와서 잘 산다. 식물은 초록색이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나를 둘러싼 건 모두 초록색이었던 것 같다. 흔히 초록은 자연의 색이고,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색이라고 하지 않나.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는 작업실을 전부 초록색으로 꾸미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집착이 심해진 것도 있고. (웃음) 일단 앨범 아트만 봐도 밝은 노란색이 많이 낀 연두색도 있고, 검정이 많이 껴있는 암녹색이 있는 것처럼,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초록색들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느끼는 고통들에 대해 각각 어떠한 초록색을 부여한다면 이것처럼 이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 ‘PAINGREEN’이라는 제목을 짓게 되었다. 작업 마지막 즈음에는 만약 이 음악을 듣고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초록색만 봐도 희망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더라.

‘HURT’라는 타이틀이 인상 깊다. 곡에 등장하는 ‘상처’의 의미가 다양해 보인다. 연인 간의 사소한 알력 다툼이라거나, 혹은 전작부터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인 ‘불안정함’이 관계에서 가져오는 상처라던가.
어느 순간 내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후로는 그 불안정함을 받아들이는 앨범을 계속 만들어 온 것 같다. < HELLO, MY NAME IS INSECURE. >, < PRAY ON MY INSECURITY > 그리고 < PAINGREEN >에는 또 ‘Pray on our insecurity’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계속 나의 불안정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그걸 말하는 의도에는 나를 둘러싼 연인이나, 가족이나, 친구, 동료에게 나의 불안정함을 안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사실 불안정한 삶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렇게 살겠다는 얘기다. 그러면 주변에는 굉장히 많은 상처를 주게 된다.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나. 돈도 벌 만큼 벌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좋은 것만 보고 좋은 생각만 하며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근데 내가 그러지 못하는건,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음악을 하는 건 그 삶을 받아줘야 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일이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포기는 할 수 없다 보니,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는데 상처는 줄 거야 하는 말이 되는거다. 이 곡은 내 오랜 연인에게, 그리고 아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뜻이 곧으면 가지가 너무 제멋대로 자라버린다. 못 자르게 막더라도 자라긴 자란다. 가지가 자라면 내 곧아지는 것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주변 사람들을 찌르고 아프게 한다. 그래서 ‘상처’라는 표현을 썼다. 이렇게 자라버린 가지 내지는 가시를 내 손으로 자를 수 없으니, 이런 나를 받아주면 내가 너를 상처를 줄 테지만, 그만큼 내가 널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대체로 의도적으로 표현을 흐리는듯하다. 듣는 이마다 다르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 건지.
조금은 뭉뚱그려지게끔 들리도록 했다. 개인적인 것을 얘기하고 있지만, 그게 보편적으로 들린다고 하면 좋은 거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들어준 것 같다.

어쩌면 방금 본인이 언급한 안정적인 삶을 살다가, 음악을 하기 위해 ‘불안정함(Insecure)’으로 뛰어든 이유가 있을까.
모르는 삶을 향해 뛰어든 것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였다. 나중에 책을 덮을 때 선택을 한 쪽을 후회할까, 하지 않은 쪽을 후회할까의 문제인 거다. 옛날에 한 만화책에서 이런 대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삶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답변자가 담담하게 ‘후회가 적은 쪽의 선택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게 삶 자체가 아닐까’라고 답하는 장면이었다. 만화 상으로는 건조하게 넘어가는 부분이었지만,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 와닿았고 그런 삶을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이건 아직도 어떤 선택을 해나감에 있어 크게 작용하고 있는 진리다. 물론 당시에는 그 불안정함이 5~6년 정도면 괜찮아질거라 생각했다. 아니어서 유감이지만, 어쩄든 그 덕분에 음악도 하고 있고, 과분한 영광도 얻을 수 있었고. 그렇다면 선택은 틀리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작중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다. 앨범의 주요 오브제로 물을 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일단 내가 물을 많이 마신다. 거의 연가시다. (웃음) 우선 식물은 수분이 없으면 뿌리를 못 내린다. 어떻게 보면 식물에게는 물이 생명 그 자체인 셈이다. 어느 날 로즈마리 잎 사이로 뿌리가 삐져나오는 게 조금 보이길래, 뿌리가 좀 더 커지지 않을까 싶어 가지를 좀 깊게 담가놓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냥 순식간에 썩어서 죽어버리더라. 어쩌면 나에게도 물은 삶 그 자체이자, 죽음으로 이르게 할 수 있는 신 같은 존재다.

요약하자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존재지만,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의미인지.
그렇다. 그래서 이 앨범에서도 물은 그런 생명의 베이스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도 사용된다. 이를테면 되게 죽고 싶을 때 썼던 ‘CROSS THE RIVER’라는 곡에서 강을 건넌다는 표현은 사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스틱스 강을 의미히기도 하지만, 하지만 이런 음악가의 삶으로 뛰어들기 위했던 어떤 나의 과감한 결심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강 건너로 간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배를 부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니까.

‘불속에 놓고 온 것들’에서는 물과 대립되는 불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기도 한다.
‘불속에 놓고 온 것들’에 부여한 불의 의미는 소실이다. 예를 들어 화장을 하고, 유품을 정리할 때의 불이다. 누구나 아픔을 계속 안거나, 집착과 미련을 가지고는 제대로 살 수 없다. 그곳에 놓고 와야지만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물론 피처링으로 참여한 버둥이 2절에서 남녀관계를 다뤄준 덕에 조금 캐주얼해지고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졌다. 이건 되게 해피 액시던트라고 생각한다.

‘Pity’ 때부터 에이트레인의 창법은 절제하듯 부르지만, 한 문장마다 사력을 다해 부른다는 감상을 많이 받는다. 차분하고 정확한 전달법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을까.
나는 사실 완전 컨템포러리 알앤비 키드다. 애초에 뮤지끄 소울차일드(Musiq Soulchild), 맥스웰(Maxwell), 탱크(Tank), 보이즈 투 맨(Boyz II Men),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의 음악을 계기로 자라기도 했고. 그러다 보니 호흡이 긴 보컬 라인을 좋아한다. < 시스터 액트 >에 삽입된 로린 힐(Lauryn Hill)의 노래만 봐도 한 프레이즈가 엄청 길지 않나. 근데 지금은 조금 나쁘게 말하면, 그런 표현의 미학들이 촌스러운 게 되버렸다. 시대가 바뀐 거다. 사람들이 멋있게 느끼는 지점이 바뀌었고, 신세대들이 그 이상의 멋을 제안했으니까. 조금 오만할지 모르지만, 그들을 선배라고 칭한다면 그 선배들의 몰락을 보며 존속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똑똑하고 민첩하게 받아들인 이들만 여전히 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안 나오더라.

그렇다면 본인은 현대식으로 해석을 한 케이스인 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믹스테입 때는 BPM이 빠른 트랩 소울 음악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런 거에는 긴 프레이즈를 할 수가 없으니 조금씩 호흡을 짧게 내며 툭툭 던지는 방식이 멋있게 다가오더라. 그리고 문어체 가사를 정말 좋아한다. 나는 내가 개성이 많이 부여된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하기에, 말할 때도 특별한 지점을 살리기 위해 신경 써서 좋은 단어를 선택하고, 일상적이지 않은 얘기를 꺼내려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려면 너무 문장형이지 않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놓을 가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번 호흡을 뱉고, 다시 삼키는 방식을 택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특히 ‘추모’부터 ‘SWEET SIDE’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듣는 사람조차 침울해지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몰입감이 뛰어나다.
그게 죽음이 가진 힘인 것 같다. 영화나 문학도 그렇듯이, 죽음이 가지는 무게감이나 압도감이 있다. 그런 게 잘 표현이 됐다니 다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 PAINGREEN >의 뒤를 이을 후속작 소식이 궁금하다.
사실 보통 앨범을 내면 후속 카드로 싱글을 남겨뒀다가 조금씩 풀면서 굳히기에 들어가는 게 보통인데, 나는 1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것 같다. 정확히는 앨범에 관한 모든 일을 혼자 도맡아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노래도 하고, 작곡도 하고, 편곡, 엔지니어링 전부. 게다가 주목을 받으니 해야 되는 것들이 많아졌다. 이를테면 온스테이지에서 연락이 왔을 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무대적인 연출을 구상해야 했고, 또 공연이 잡혔을 때는 한 시간 가량으로 셋리스트를 꾸려야 했으니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게 있었나.
우선 남들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음악가들이 레슨을 돈벌이 수단으로 가져가지 않나. 그러나 만약 자기 발표물이 없는데 레슨을 계속한다면 그건 음악가가 아니라 튜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능력이 좋은 튜터라면 삶은 평화로워질 수 있다. 근무 시간이 만들어지고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일단 의식주가 해결이 되니까. 근데 그러다 보면 또 간절한 음악이 나오지 않기도 한다. 일종의 선순환이자 악순환에 가까운 고리가 생기는 거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돈벌이를 안하고 음악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 PAINGREEN > 이후로는 내가 홈레코딩 수준에서 음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이고 이러한 지향점을 갖고 있으면 누군가는 배우고 싶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르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 최근에는 서울문화재단의 문래예술공장에서 기획하여 유망 창작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비넥스트(BENXT) 프로젝트에 당선되어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레슨과 여러 가지 일을 시작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작품에 몰두할 시간이 많이 줄었다. 조금은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곧 한대음 시즌이 돌아오지 않나.
사실 후보에는 한번 올라봤으니 언젠가는 수상을 해보고 싶다. 그 때만 해도 음악을 그만두고 다른 삶을 살아볼까 하는 마음도 있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끌려 올라가 보니 욕심이 좀 나더라. 아, 최근 에피소드가 떠올라 하나 말하자면, 백신 2차를 맞고 집에 쉬던 날이었다. 2차 접종 후 고통이 따른다고 하니 걱정이 되면서도 궁금하기도 한 위험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창가에 앉아 3~4시간 동안 들어오는 직사광선을 맞고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건반을 잡고 시도하거나 어떤 워딩을 떠올리며 쓰곤 하지만 그날은 막 써졌던 것 같다. 아마 그 곡들이 후속작으로 나가게 될 것 같다.

후속작에서 다루고자 하는 메시지나 원하는 방향이 있을까.
음, 우선 내가 꿈꾸는 음악의 지붕은 ‘추모’라는 곡이 가까운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고, 왜 이런 소리를 썼을까 싶은 시도가 많은 곡이다.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전작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쓰고 있는 노래들이 윤곽이 잡혀가고 있는 와중에 이게 전작의 ‘HURT’만큼 맛있을지, 아니면 과감하고 독창적인 선에서 끝날지는 모른다. 무릇 아티스트들이 그렇듯 2집에서 쇠퇴하는 소포모어 증후군을 겪을지, 아니면 다시 주목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후속작에 실릴 음악들은 나 스스로를 감동케 하는 노래들이다. < PAINGREEN > 이후로 많은 심적 평화를 얻었기 때문에 전작만큼 날이 서있거나 어떤 짓눌리는 죽음의 온도를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선택한 음악인 만큼 ‘이 정도면 됐다’하고 내는 앨범은 아니다. 마음이 아플 만큼 솔직한 노랫말들이 많지만 굉장히 희망을 담아내려 노력하고 있고, 듣는 이들의 개인적인 절망을 응원하는 앨범이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서사적으로도 연결이 되는 건가. 죽기 직전의 감정에서 삶을 선택한 이가 다르게 직면하는 문제들 같이.
죽음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문학적으로 멋있으려면 < PAINGREEN >을 내고 죽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후속작은 살아 있는 내가 하는 얘기로 연결된다. 나는 살아있고, 살아있으니 음악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잘 살아내려면 이제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또 있다.

발매 시점은 언제로 생각하고 있나.
내년 가을쯤으로 예상 중이다.

에이트레인의 음악 세계에 영향을 준 아티스트와, 그 아티스트의 베스트 앨범이 있을까.
우선 첫 번째는 제임스 블레이크(James Blake)다. 최근에도 앨범을 냈는데, 내가 좋아하는 앨범은 그전 작품인 < Assume Form >이다. < Overgrown >은 굉장히 좋아하지만 이해는 잘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그런 소스를 선택하고 강박적으로 그루브를 제거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천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굳이 뽑자면 최애는 아니다. < Assume Form >는 희망을 주는 앨범이다. < Overgrown >이 자신의 우울을 담아놓았다면, 이 앨범은 그런 시간을 지내보고 문을 열어 나왔더니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고 얘기한다. 어떻게 보면 사는 방향에도 영향을 준 앨범이다.

두 번째는 본 이베어(Bon Iver)다. 특히 < Bon Iver >는 교과서 같은 앨범이다. 프런트맨인 저스틴 버논(Justin Vernon)이 굉장히 개인적인 우울과 상실을 겪고, 오두막으로 들어가 만든 음악으로 알고 있다. 컨트리한 분위기도 너무 좋다. 이건 개인적인 일이지만, 어느 날 히스 레저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크레딧에 ‘Perth’가 나오더라. 알고 보니 그가 살았던 호주의 해변 마을 이름이었다. 히스 레저는 많은 걸 느끼고 행동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겪은 약물 의존이나 불면증에 내가 이입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앨범을 너무 좋아한다. 내가 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기에 질투도 안 나는 정도다.

세 번째는 아우스게일의 데뷔작 < In The Silence >다. 흔히 우리가 아이슬란드 음악이라 하면 제일 유명한 게 시규어 로스, 비요크지만 조금은 난해한 부분이 있지 않나. < In The Silence >는 그런 요소를 망라하여 잘 정리한 아이슬란딕 팝이다. 이 앨범은 내가 믿은 어떤 음악의 지향점이 대중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앨범이다. 7년 전 앨범인데 엔지니어링이 요즘보다도 좋다.

제임스 블레이크나 본 이베어, 그리고 초두에 언급한 오소영 모두 초기작부터 여러 음악적 변화를 거쳐온 뮤지션이다. 혹시 에이트레인 본인도 언제든지 변화의 시기가 찾아올지, 또한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생각이 있나.
만약 능력만 된다면 포크를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이 되보고 싶다. 요즘은 어쿠스틱만 존재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질투도 안 날 만큼 멋진 뮤지션은 전부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더라. 전자 악기를 다루더라도 자기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다면 특별한 일렉트로니카를 만들 수 있으니, 나도 그런 음악가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만약 콜라보 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있을까.
개인적인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빈지노님을 한 번 더 만나고 싶다. 서로의 삶이 흘러가는 와중에 어떤 계기로 군대 가기 전 그가 작업실에 온 적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해줬다. “하고 싶은 음악과 말을 중학생 때부터 원 없이 해왔더니, 어느 순간 회사가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오더라. 그러나 그때까지는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계속해봐야만 자기 색깔이 나온다. 지금 유행하는 음악이나 나이는 신경 쓰지 말고 너만의 음악을 찾을 때까지 해봐라.” 그가 떠나고 나서 회사 사람들은 내게 ‘아니다, 지름길로 가야 한다’고 말하더라. 나도 그때는 맞는 말이지만 상황이 조금 다르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가 빈지노님보다는 늦게 음악을 시작하기도 했고. 근데 이제는 알겠더라. 하고 싶은 걸 다 해봐야 그제서야 오는 게 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그때 우리가 짧게 겪은 일화에 대해 음악으로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존경과 감사를 담아.

인터뷰 : 손기호, 장준환, 정다열
정리 : 장준환
촬영 :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