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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0 조유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대한민국 대표 록밴드 체리필터의 프론트우먼 조유진이다.

코로나로 주춤했던 공연계가 다시금 기지개를 켜면서 수많은 축제 마니아들이 각지의 스테이지로 몰려들고 있다. 특히 그 부활의 신호탄으로 작용한 <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은 무더운 날씨에도 엄청난 인파를 끌어모으며 억눌려있던 음악팬들의 갈증을 해소했다. 다채로운 라인업 가운데 가장 눈에 띈 팀은 단연 체리필터. 2000년 데뷔해 지금까지 멤버 변동 한번 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탄탄한 보컬로 그룹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조유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와 이즘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낭만고양이’로 대히트를 친 이후에도 가수로서 맹렬한 소신을 드러냈던 과거 인터뷰만 봐도 이번 만남은 예견된 재회였다. 위치는 달랐지만 음악 하나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가수 조유진과 평론가 임진모는 서로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며 회포를 풀었다. 호쾌한 웃음소리만 가득했던 그날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페스티벌 무대에서 정말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다.
희한하게 큰 규모의 록 페스티벌과는 연이 없었다. 한창 활동하던 때엔 주류 시장과 더 많이 엮여서 그쪽 공연이나 행사를 많이 뛰었다. 물론 1년에 1~2번씩은 계속 단독 공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와주셨던 분들에겐 익숙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체리필터 하면 떠오르는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이물질’, ‘오리 날다’, ‘피아니시모’, ‘Happy day’, ‘달빛소년’, ‘낭만고양이’. 이렇게 여섯 곡을 준비했다. 처음엔 리스트가 좀 달랐다. 비사이드도 조금씩 넣어서 하려다가 시간이 초과되면 안 되니까 다 걷어내고 단독 공연에서 자주 하는 엑기스들만 추렸다. ‘오리 날다’ 때는 관중분들이 다 정신없이 뛰셨는데 그 에너지에 압도 당해서 우리도 같이 광분하게 됐다.

열기가 엄청났나 보다. 체력적인 부담은 없었는지.
연출 분들이랑 몇 번 얘기했을 정도로 해가 쨍한 시간대에 공연하는 게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너무 뜨거워서 일사병으로 사망했다고 뉴스에 나오는 거 아닌가. (웃음) 뭔가 록밴드로서 낮에 하는 페스티벌 무대에 대한 로망이 있긴 했는데 막상 실제로 하려니까 살짝 겁이 났다.

무대에서 인천 출신이라 언급할 정도로 고향을 향한 애정이 큰 것 같다.
완전히 인천 토박이다. 지금의 차이나타운인 동인천 북성동, 송월동 쪽에서 나고 자랐고 초중고도 다 여기서 나왔다. 조부모님들께서 이북 분이셨는데 아버지 어릴 적에 인천 쪽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엄마는 서울 분이셔서 매번 서울로 이사 가기를 희망하시는데 아버지께선 인천에 살아온 세월도 있고 친구, 직장 동료분들도 많고 하셔서 벗어나기를 싫어하신다.

살아오면서 느낀 인천의 이미지는 어떤가.
록적인 인상이 굉장히 강하다. 한때 동인천, 주안 쪽은 완전 록의 메카였다. 당시에 콜라나 커피를 팔면서 록 음악만 틀어주는 음악 방 같은 데가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온종일 뮤직비디오만 봤었는데 그때 들었던 음악의 영향이 크다. 저녁 시간대는 DJ가 나와서 직접 노래도 틀어줬다고 하는데 어릴 땐 늦게까지 남을 수가 없어서 밤 분위기까진 잘 모른다.

일찍이 록의 세례를 받았다.
집에서 라디오로 팝송을 듣기보다 현장에서 앰프가 쏘아대는 울림을 온전히 몸으로 받아서 그런지 헤비메탈 같은 강렬한 음악도 굉장히 좋아했다. 사실 제대로 음악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1990년대 이전의 노래들은 거의 몰랐다. 한동안 얼터너티브 중심으로 메이저 성향만 듣다가 점점 폭을 넓혀갔다. 애초에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해서 일본 애니메이션 음악, 트로트 같은 장르들도 가리지 않고 듣는다.

조유진을 뮤지션으로 이끈 음악은 무엇인지.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멜로디의 팝 록이 1990년대에 꽃을 피웠다. 주류 시장에서도 성공한 세미소닉, 라디오헤드, 너바나를 좋아했고, 앨라니스 모리셋, 셰릴 크로우 같은 여성 로커들도 엄청 동경했다. 밴드적인 측면에선 셜리 맨슨이 프론트우먼으로 활약한 가비지의 ‘Push it’을 즐겨 들었다. 윤복희 선생님, 한영애 선생님, 이선희 선생님 같은 우리나라 대선배들도 너무 존경한다.

요즘엔 나이 들어서도 계속 무대에 서는 분들은 다 멋있어 보인다. 아직까지도 활동하는 하트의 앤 윌슨이 라이브 하는 걸 들으면 너무 잘해서 눈물이 난다. 사생활 다 배제하고 보면 에어로스미스의 스티븐 타일러가 제일 멋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로커 특유의 각이 살아있다. 미친 것 같다. (웃음) 나도 치밀하고 섬세하게 준비해서 더 나이 들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유지하고 싶다.

추구하는 음악 스타일은 어떤지.
특별히 무언가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단순하게 스트레이트를 꽂으려고 한다. 굳이 따지자면 복잡하지 않은 팝 얼터너티브를 추구하는 편이다. 점점 큰 시장에 몸담으면서 가사나 악곡 형태에 완급 조절을 가하긴 했지만 대중들과 멀어지는 걸 바라진 않았기 때문에 공연에서 다 같이 질러댈 수 있는 음악으로 초점을 맞췄다.

지금까지의 작업물 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은.
직접 곡을 쓴 사람에겐 다 소중한 작품들이다. 전체적인 완성도로 봤을 땐 ‘Happy day’가 실린 4집 < Peace N’Rock N’Roll >을 가장 아낀다.

차기작은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지.
곧 나올 거다. 노래는 산더미처럼 있어서 빨리 내보려고 발악 중이다. 이제는 음악, 앨범 하나하나에 성격을 규정하기 보다 그냥 체리필터의 노래를 남긴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다.

많은 후배들이 체리필터의 뒤를 이어 열심히 활동 중이다. 선배 입장에서 현재 우리나라 음악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을 지향하면서 확실히 곡 쓰기가 편해졌다. 드래그 앤 드롭으로 보컬, 랩 녹음은 물론이고 각종 효과들까지 자유자재로 배치할 수 있게 되면서 모두가 쉽게 음악을 만들고 있다. 접근성이 좋아진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런 싱어송라이팅의 세계는 굉장히 절망적이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표절 의혹들도 어느 정도 유사한 맥락에서 발발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비전 자체는 굉장히 좋다고 본다. 인디 뮤지션들이 대기업의 자본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신만의 색깔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아졌다. 풀 렝스 앨범이 아닌 싱글로 자주 소통하고, 아예 외국 기업과 계약해서 해외 중심으로 활동하는 등 가수 생활의 반경이 확실히 넓어졌다.

세월이 흐르면서 달라진 게 있는 걸까.
옛날에는 좀 까칠하고 성격도 모난 구석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자취를 감췄다. 먹고살기 괜찮고 남들처럼 살면 확실히 음악을 오래 하기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어려울 필요는 없으니까 남들과는 다르게 사고할 수 있는 사람들, 철없는 사람들이 하는 게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조유진에게 음악은 무엇인지.
이제는 되게 ‘치사한 것’. 뭔가 친구 같다가도 자꾸 삐져서 안 풀리고,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불친절하고 그러더라. 옛날에 이때쯤 되면 호텔에 살면서 월드 투어하자고 했었는데 맘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음악 하는 사람은 남한테 굳이 안 들려주고 본인이 만든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성취감이 엄청나다. 그런 면에서 예나 지금이나 항상 진심으로 임했다는 건 자부할 수 있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정다열
사진: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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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9 권인하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아홉 번째 주인공은 우렁찬 목소리로 가슴 깊은 곳까지 울리는 파워 보컬리스트 권인하다.

천둥 같은 포효로 좌중을 압도하는 뮤지션 권인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언더그라운드 스타다. 1984년 이광조 ‘사랑을 잃어버린 나’의 작사·작곡을 맡아 우리나라 다운타운 카페 시대를 화려히 열어젖혔고, 음악이 흐르던 그 카페엔 프로젝트 그룹 마로니에의 ‘동숭로에서'(1989), 강인원, 김현식과 함께 한 ‘비 오는 날의 수채화'(1989), 솔로 곡으로 발매한 ‘계절처럼 음악이 흐를 때'(1990) 같은 노래들이 나긋이 전해졌다.

시대를 풍미한 명곡만 지금까지 울려 퍼지는 건 아니다. 라디오 DJ부터 연기자, 교수까지 넘나들던 엔터테이너 권인하는 나아가 가요계 동료들의 작품을 본인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음악이란 캔버스에 꾸준히 덧칠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그와 조우한 9월의 어느 날, ‘천둥호랑이’의 방문을 알리듯 하늘은 비를 쏟아냈다. 40년 가까운 그의 음악 인생을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에 풀어 또 한 편의 수채화를 조심스레 구상해 봤다.

권인하만큼 젊은 세대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베테랑 가수가 없는 것 같다.
20여 년 전 TV 라이브 콘서트에서 (박)효신이랑 ‘그것만이 내 세상’을 부른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 영상을 편집해서 SNS에 공유해 줬고 주변 분들이 젊은 세대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댓글을 봤더니 목소리가 천둥소리 같다, 호랑이 같다는 반응이 많더라. 그때부터 ‘천둥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겼고 다른 무대들도 회자되면서 내 이름을 아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태연의 ‘만약에’를 비롯해서 정말 많은 후배들의 곡을 커버했다.
50대 초까지만 해도 가수라면 자기 노래를 불러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그런데 2011년 컬러스(the Colors)라는 팀을 하면서 보니까 가수가 노래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전설들도 리메이크 곡으로 활동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한심한 생각하며 살았구나 뉘우쳤고 무슨 노래든 내 스타일로 표현할 때 가수로 살아있음을 느끼고 있다.

남의 노래를 부르며 배운 점은 없는지.
젊었을 때는 강약의 밸런스, 특히 약(弱)에 대한 조절이 잘 안됐는데 세월이 흘러 감정적인 측면에서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젊은 후배들의 여린 감성도 조금씩 흡수하다 보니 같은 노래를 불러도 그들의 강약과 내가 표현하는 강약의 깊이가 다르다는 걸 많이 체감한다.

기억에 남는 커버가 있다면.
닐로의 ‘지나오다’는 아들이 추천해 줘서 부르게 됐다. 발매한 지 조금 지난 노랜데 요즘 차트에서 역주행하고 있다면서 1위 올라가기 전에 빨리 불러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차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촬영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는데 반응이 꽤 좋았다.

권인하 음악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계절이 음악처럼 흐를 때’나 마로니에로 발표한 ‘동숭로에서’도 제법 히트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비 오는 날의 수채화’가 아닐까. 결혼 후에 아이까지 가졌을 때라 가족 부양을 위해 음악을 그만두고 큰 형의 사업체를 맡아 운영했었다. 그러다 강인원 씨가 동명의 영화를 제작하는데 같이 OST를 불러보자고 제안했고 거기에 (김)현식이도 참여한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웠다. 노래를 다시 부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도 행복했는데 그게 내가 가수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가수가 아닌 작곡가로 먼저 데뷔했다. 이광조의 ‘사랑을 잃어버린 나’는 어떤 곡인지.
군 제대 후 훗날 그룹 위(WE)에서 함께 몸담은 정수연의 소개로 포크 트리오 풍선의 엄인호 형이 작업하던 스튜디오에 같이 드나들며 연습하게 됐다. 얼마 뒤엔 피아노를 치던 이영훈도 들어왔는데 옆에서 영훈이가 부지런히 작곡하는 걸 보고 나도 곡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는 인호 형의 동료인 광조 형이 방문하셔서 우리 둘이 써둔 곡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사랑을 잃어버린 나’와 ‘상처’를 들려드렸는데 바로 본인이 가져가서 부르겠다고 하셨다. 당시 음악 하던 사람들끼리도 노래로 알아주는 형이 불러준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많은 분들이 로커로 기억하지만 차분한 팝이나 리듬감 있는 재즈에도 강점이 있다.
비틀스의 ‘Yesterday’를 초등학교 때 라디오에서 처음 접했는데, 중학교 때 레이 찰스의 리메이크를 접하고 ‘이렇게도 부를 수 있구나’하며 감탄했다. 그리고 또 20대에는 마이클 볼튼이 부른 걸 들었는데 현대적인 편곡 덕분에 세련된 질감이 느껴졌다. 세 개 버전에서 각기 다른 감상이 떠오르는 걸 보고 30대부터는 여러 스타일을 권인하화 시키려고 노력했다. 코드까지는 못 바꾸더라도 리듬 패턴을 만져가며 다양한 장르적 접근을 도모했다.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면.
학교에서 강의하다 보면 우리나라 음악사가 김정호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존재는 위대하다. 과거엔 장르 구분할 것 없이 대부분 카피 음악에 가까웠는데 1970년대 김정호와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등장 이후 드디어 한국적인 발라드의 기본 틀이 짜였다. 뒤따라 쏟아져 나온 해바라기, 이영훈, 유재하가 발라드를 완성한 것도 다 그의 영향이라고 본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 치고 인천을 거쳐가지 않은 이가 없다. 당시 인천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1960년대에는 미8군 부대 주변, 특히 동두천 쪽에서 많은 그룹들이 인근 창고를 아지트 삼아 연습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는 서울하고 가까운 부천, 소사, 부평으로 몰리게 됐고 그때부터 인천의 음악적 수준이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학창 시절을 더듬어 보면 지방에서 싼 하숙집이 많은 오류동 근처로 유학 오는 애들도 많았다.

인천이 파고다 공원 쪽만큼이나 록이 셌던 지역이지 않았나.
확실히 서울과 가깝고 클럽 문화가 발달되어 있어서 근처 지방 도시보다도 음악을 흡수하는 빠르기 자체가 남달랐다. 다른 지역에선 트로트 같은 음악을 불러야 호응이 좋고 다소 무거운 록에는 밋밋한 반응을 보였다. 인천 객석의 느낌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록을 중심으로 팝에 친숙한 지역이라 선곡할 때도 음악의 폭을 다채롭게 구사할 수 있었다.

주로 불렀던 팝송 레퍼토리엔 어떤 곡들이 있었는지.
저니(Journey)의 ‘Separate ways’나 ‘Open arms’, 시카고(Chicago)의 ‘Hard to say I’m sorry’ 같은 곡들을 즐겨 불렀다. 그때는 로큰롤을 부르면 다들 좋아할 시기라 로드 스튜어트의 ‘Da ya think I’m sexy?’, ‘Sailing’ 같은 곡들도 인기를 끌었다.

오래 활동한 만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다.
1991년 < 가요톱텐 >에서 10개 분야를 대표하는 가수들을 초청하는 특집을 기획했는데 나도 여기에 언더그라운드 대표로 섭외됐었다. 밴드로 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라이브로 하면 참여하겠다 협의했고 이색지대라는 팀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당일 현장에서 멀티 오케스트라를 다 따다 보니까 채널이 부족해 MR로 가야 한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약속과 달랐기 때문에 안 한다고 했지만 우리 사무실 직원들이 하도 사정해서 어쩔 수 없이 무대에 오르기로 했다.

기분이 많이 상했을 텐데 무대는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그러고 말았으면 다행인데 관계자들이 끝내 불을 키웠다. 당시에 남북 고위급 회담이 열렸는데 북한의 연형묵 총리가 KBS에 시찰을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국에서 그분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 리허설을 돌렸다. 어디쯤 왔다는 연락을 받고 맞춰서 해도 될 텐데 참 답답했다. 어쨌든 연 총리가 내 앞 순서에 도착해서 내 차례 즈음 나갔는데, 내가 한창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반주가 끊겼다. 무슨 멘트라도 해줄 줄 알고 기다리다 저 위를 봤는데 VIP 떠났다고 자기들끼리 수고했다며 박수 터지고 난리가 났더라. 그 자리에서 욕하면서 마이크를 바닥에 메다꽂고 나왔다.

그때만 해도 PD의 권력이 세던 시절이라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
나가는 걸 스태프 한 명이 붙잡긴 했는데 이런 홀대받으면서 가수할 바엔 출연 안 하면 그만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얘기를 해야 동료들은 물론이고 후배들도 편해지지 않겠는가. 그 후에 회의가 열렸다는데 주변에서 내가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1년 출연 정지로 일단락됐다. 그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해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나도 사건·사고는 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잘못을 부인하거나 인정하는 시기를 미룬 적은 없다. 전부 내 책임이고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올렸다. 이렇게 해야 기자들도 물어볼 게 없고 뒷말이 안 생겨서 듣는 분들도 비교적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 뭐든 그렇겠지만 음악만큼은 머리가 아닌 가슴, 자존심 하나로 해야 한다.

음악 하면서 가장 어려웠을 때는 언제인가.
그룹 음반을 준비할 때 돈이 넉넉하지 못해서 아버지께 용돈을 받아 생활하곤 했다. 그러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복학하게 됐는데 등록금을 학교에 납부하지 않고 개인 생활비와 밴드 운영비로 돌려썼다. 학교에서 등록하라고 계속 고지서가 왔는데 그때마다 거짓말을 해가면서 돈을 받았다. 세 번째 되니까 등록 안 하면 제적된다는 최후통첩이 날라왔다.

인생 삼세번이라지만 너무하긴 했다. (웃음)
아버지가 ‘뭐 하고 다니냐’며 엄청 꾸짖었지만 그 세 번째 돈마저도 다 썼다. (웃음) 결국 제적되었다가 1990년대 중반 구제 기간에 맞춰 재입학했고 근 17~18년 만에 졸업하게 됐다. 다행히 학제가 바뀌면서 이수해야 할 학점이 크게 줄어 큰 부담 없이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음악가로 이끈 아티스트나 노래를 꼽는다면.
앞서 얘기했듯이 레이 찰스의 ‘Yesterday’를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던 원곡과 너무 달라서 충격을 먹었던 게 음악에 발을 내디딘 첫 계기라고 본다. 그리고 한 번은 고등학교 채플 시간에 어떤 흑인 여성 소울 가수가 정동교회에서 피아노 하나에 마이크도 없이 ‘Amazing grace’를 불러준 적이 있었다. 덩치가 큰 아주머니께서 건물 전체를 울려대는데 완전히 멜로디 라인에 쇼크를 먹고 나중에 꼭 저런 음악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졸업하고 나서 가스펠이라는 걸 알았지 그때는 그냥 찬양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두 번의 소울 음악이 나한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진행: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정다열
사진: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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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8 채제민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여덟 번째 주인공은 록밴드 부활의 버팀목인 드러머 채제민이다.

호인(好人). 35년 경력의 베테랑 드러머 채제민이 준 인상이다. 따스한 언행과 호탕한 웃음에 분위기가 밝아졌고 이야기도 술술 풀려나갔다. 1987년 강변가요제 수상작 ‘매일 매일 기다려’의 주인공 티삼스로 데뷔한 이후 신승훈과 김건모의 세션 드러머로 활약해온 그는 1998년 동경했던 록밴드 부활에 가입했다. 1년간의 짧은 활동과 안타까운 이별. 하지만 명곡 ‘Never ending story’가 수록된 여덟 번째 앨범 < 새, 벽 >에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째 부활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채제민에게 인천은 어떤 의미일까? 나고 자라며 막대한 음악적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십여 년간 드럼 학원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한 곳. 배움과 가르침이 공존했던 인천은 음악 인생의 터전이자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재능형이 아닌 철저한 노력형’이며 ‘가늘고 길게 음악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땀 흘린 자의 무게감과 겸손이 묻어 나왔다. 올해 각종 페스티벌에서 펼쳐질 부활의 공연에 흥분된다는 그는 현재 대학교 겸임 교수와 인터넷 라디오 디제이 등 다방면에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이즘과의 인터뷰를 기억하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2005년이니 벌써 17년이 지났다.

원래 인천에 거주하시는지?
인천 토박이다. 태어난 곳은 율목동이고 지금은 청라에 산다.

부활 활동은 몇 년째인가?
1998년에 들어와서 6집 < 理想 시선 >부터 활동하고 있으니 25년째이다. 리더 겸 기타리스트 김태원 다음으로 오래된 멤버이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활의 드러머로 활약하고 계시는데 롱런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어렸을 적 헤비메탈을 들을 때도 멜로디컬한 음악을 선호했고 자연스레 부활의 팬이 되었다. 부활 특유의 서정성에 매혹되었달까? 이승철 밴드에서 세션 활동을 하던 시기 키보디스트 최승찬이 부활을 소개해 준 계기로 가입하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흠모해왔던 분들이라 따로 굳은 마음을 먹지 않아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7집 < Color > 은 참여하지 않았다. 재합류 이후 8집 < 새, 벽 >에 수록한 ‘Never ending story’가 성공하며 완전한 멤버십을 확립했다고 보이는데 그동안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인가?
뻔한 답변이 될 수도 있지만 역시 2002년 ‘Never ending story’의 성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처음에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 윤도현의 러브레터 >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다가 보컬 이승철이 감정에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렸는데 아마 뮤지션으로서 승패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시험대로 여긴 것 같다. 이 일을 기점으로 봐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곡과 앨범에 대한 인기가 대폭 상승해 50여 개의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했다. 얼핏 듣기론 곡이 교과서에도 수록됐다고 들었다. 감사한 일이다.

일찍이 부활을 좋아하셨다고 했는데 언제부터였는가?
부활의 인천 시민회관에서 공연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당시 티삼스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부활을 흠모했던 것 같다. 시나위도 그렇고 백두산도 좋아했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부활의 음악을 선호했다.
*티삼스: 1987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매일 매일 기다려’로 동상을 수상한 캠퍼스 밴드

부활 활동과 후학 양성을 병행했다. 새로운 활동 분야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데 계기는 무엇인가?
‘필 음악학원’이라는 드럼 교습소를 1990년대 초중반에도 운영했다. 인천 출신 뮤지션들이 꽤 많이 거쳐 간 곳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보람을 느꼈다.

레슨할 때 주요 포인트는 무엇인가?
기본적인 루디먼트(Rudiment)을 가르친다. 각 친구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해 그쪽을 특화하려 한다. 모든 노래를 잘 소화하기는 어렵기에 빠른 곡을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라면 그 장점을 살리도록 도와준다.
*드럼 루디먼트(Drum Rudiment): 더욱 확장되고 복잡한 드럼 패턴의 기초를 형성하는 비교적 작은 패턴들의 모음

여전히 강의하고 있는지?
백석 예술대학교의 겸임 교수다.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하면서 밴드 앙상블과 합주를 지도한다. 강의를 열심히 하면서도 밴드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는지?
마음속 행복을 가장 강조한다. 음악을 비롯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즐겁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공부 등 떠밀면 더 잘 안 하게 되듯 음악도 마찬가지다.

드러머로서, 또 교육자로서 영화 < 위플래시 >를 보았는가? 감상이 궁금하다.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외국의 뮤지션은 물론이고 영화 및 각종 예술 작품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 위플래시 >같은 음악영화들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일대기를 그린 외국 영화들을 보면 배우와 실존 인물 간 싱크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연습했으리라 생각한다. 가혹한 가르침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스틱을 들 만한 힘이 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채제민 드럼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레이드 백(Laid Back)이다. 같은 리듬을 쳐도 약간 뒤로 밀어 안정감을 준다. 정박의 템포에서 약간씩 빨라지는 습성의 드러머도 있고 느려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야 한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연주자는 신나는 곡에 강하지만 발라드를 연주할 때는 깊이가 부족하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약간 뒤쪽에 붙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부활 음악에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 신나는 음악에서는 부족한 면도 있다.
레이드 백(Laid Back): 리듬을 정박보다 조금 뒤로 밀며 그루브를 만드는 것.

최근 감명 깊게 본 드럼 연주가 있는지?
시베리아노(Estepario Siberiano)라는 사람이다. 결코 세계적인 드러머는 아니지만, 구독자가 60만이 넘는 유튜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드럼을 연주하다 하나의 스타일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시베리아노라는 두 가지 모두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의 일과를 영상으로 봤는데 종일 연습만 하더라. 굉장한 연습량을 통한 결실이라고 느꼈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다면 연주자로서 훌륭한 뮤지션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타고난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연습형이다. 타고난 재능이 하나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이자 밴드 사라하의 기타리스트 인재홍의 합주실에 따라갔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이 너무 좋았다. 당시에는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다.

부활 25주년을 한번 정리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17년 전 인터뷰했을 때는 주로 어려움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버티는 것’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예전만 해도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올인하는 문화였다. 요즘은 좀 바뀌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원을 운영했던 것도 음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워낙에 인생의 모토가 ‘가늘고 길게’이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드러머로서 음악 인생에 영향을 많이 준 앨범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내가 하는 음악과 느낌이 다르지만, 토토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제프 포카로는 리듬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다.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을 가진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도 들고 싶다. 기본기가 좋을 뿐 아니라 퍼포먼스가 정말 멋있었다. 밴 헤일런의 음악도 많이 들었고 ‘음악을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게 해준 밴드는 저니다.

언급한 밴드 중에서 채제민의 인생곡을 뽑자면?
머틀리 크루의 ‘Looks that kill’과 ‘Too young to fall in love’를 들겠다.

진행: 임진모, 염동교
정리: 염동교
사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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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7 나의 노랑말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일곱 번째 주인공은 엉뚱발랄한 상상력의 3인조 밴드 나의 노랑말들이다.

“난 누나의 노랫말들이 좋더라.”
“잉? 나의 노랑말들?”


베이스를 연주하는 러버맨과 보컬, 작사, 작곡을 겸하는 백노루양의 우연한 해프닝에서 출발한 그룹, 나의 노랑말들. 이들의 정체성은 백노루양의 가사, ‘누나의 노랫말들’에 있다. 밖으로 쉽게 표출할 수 없는 감정들의 일기장 < 행복회로 > 시리즈로 스스로 찌질한 노래라 규정할 만큼 키치한 매력을 발산한 이들은 차근히 작업을 이어가며 부산 인디 신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고 있었다.

듀오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화려한 무대, 더욱 큰 인기를 갈구하는 이들은 올해 초 드러머 뚜드를 영입하며 3인조로 팀을 재편했고, 거처까지 인천 부평으로 옮겨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향 땅을 벗어나 중부의 또 다른 해양 도시로 올라온 세 청년. 홍대 인근 카페에서 열정과 현실이 공존하는 상경기를 나누며 훗날의 도약을 다짐했다.

▶ 왼쪽부터 뚜드(드럼), 백노루양(보컬, 작사, 작곡), 러버맨(베이스, 코러스 보컬)

나의 노랑말들은 어떻게 결성하게 된 팀인지.

러버맨 : 고등학생 때 부산에서 음향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당시 노루(백노루양) 님이 행사팀으로 왔었다. 그 이후 몇 번 마주치면서 친해졌고 무대에 같이 서기도 했다. 그러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공연이 줄다 보니 그 대안으로 같이 곡을 써서 음악창작소 음반 제작 지원 사업에 신청해 보자고 제안했다. 덜컥 선정이 되면서 급히 팀을 꾸렸고 그렇게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다.

그룹의 근간이 되는 ‘누나의 노랫말들’, 작사를 비롯한 곡 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러버맨 : 노루 님이 써둔 가사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 놓으면 내가 기타랑 베이스를, 뚜드 님이 드럼을 얹으면서 악기를 배치하고 정렬한다. 그 위에 가이드 보컬이나 추가로 생각한 멜로디를 펼치면 대략적인 틀이 갖춰진 데모가 완성된다.

백노루양 : 평소에 생각나는 단어나 구절이 있으면 휴대폰에 적어놓고 적절히 조합하거나 완전히 비틀어서 만드는 편이다. 일상은 물론이고 만화에서도 영감을 많이 얻는다. 돈까지 내가면서 웹툰을 구독할 정도고 밴드 홍보를 위해서 직접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엔 바빠서 거의 못 올리고 있지만 말이다. (웃음)

그렇게 채워가고 있는 < 행복회로 > 시리즈,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음악인지.

백노루양 : 솔직히 말하면, 느낌 가는 대로 만든 곡들을 모아 발매한 시리즈라 원대한 무언가를 계획한 것은 아니다. 우리 색을 어떻게 잡아가야 할 지 고민하던 중에 초기의 ‘퉤퉤’나 ‘띠부띠부씰’과 비슷한 계열의 곡은 < 행복회로 터지는 중 >에, 조금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곡들은 < 행복회로 불타는 중 >에 수록하여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눠서 공개했다.

러버맨 : 팀 결성부터 첫 EP < 행복회로 돌리는 중 >까지의 과정이 매우 즉흥적이었다. 때문에 발매 당시엔 음악적인 무언가 다져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공개한 < 행복회로 터지는 중 >과 < 행복회로 불타는 중 >도 뼈대에 살을 덧대는 과도기 격의 작품에 가깝다. 처음부터 시리즈물을 기획한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백노루양 : 누구나 매일매일 기분이 달라지듯이 성장하면서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나. 나는 어떤 게 좋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다른 게 좋아지는 사람인 것 같다. 어느 한 가지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속 변하니까.

뚜드 : 소속 멤버가 아닐 때도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팀이어서 몇 번 공연을 봤었는데, ‘퉤퉤’의 가사는 정말 충격이었다. 속뜻이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단순히 외설적인 내용을 표방하는 게 아니더라. 심오한 의미 속에 기본적으로 우울한 기조가 있다. 밝은 노래를 쓰더라도 긍정보단 부정에 가까운 수식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탁한 배경에 여러 블록들을 쌓아올리는 느낌이다.

올해 초부터 정식으로 드러머 뚜드를 영입했다.

러버맨 : 둘이서 라이브 무대를 온전히 채우기 부족하다고 느꼈다. 여기에 드럼만 있어도 뭔가 더 많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합류를 부탁하게 됐다.

백노루양 : 둘 밖에 없었을 땐 어딜 가더라도 뭔가 기가 죽고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쪽수가 하나 더 생겨서 든든하다. 그리고 다른 밴드들처럼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다녀보고 싶기도 했다.

3인조 재편 후 느낀 변화는.

러버맨 : 다가올 정규 앨범 작업을 하면서 느낀 건데 종전 음반들에 비해 록의 색채가 강해졌다. 기존 곡들처럼 유쾌한 기조도 유지하되 사운드는 록적인 면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뚜드 : 러버맨이나 나나 록 사운드를 좋아하다 보니 음악 뒷부분으로 갈수록 고조되는 빌드업 구조를 더 탄탄히 이끌어 가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심벌 소리도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앨범을 꼽는다면.

백노루양 : 다프트 펑크와 고릴라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앨범 단위로 듣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좋아하는 게 맨날 달라져서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듣는 편이다. 오늘은 미국 애니메이션 < 스티븐 유니버스 > OST 모음집을 들으면서 왔다.

뚜드 : 기본적으로 메탈 같은 강렬한 록이 취향에 가깝다. 밴드적으로는 미국 하드 록 그룹 얼터 브릿지의 ‘Poison in your veins’를 가장 좋아한다. 국내로 넘어오면 발라드도 굉장히 즐겨 듣는 편이다.

러버맨 : 러버맨이란 활동명은 내가 좋아하는 비틀스 < Rubber Soul >과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River man’의 앞뒤를 합친 이름이다. 이외에도 폴 매카트니 앤 윙스의 < Band On The Run >, 그리고 메가데스의 < Rust In Peace >, 오아시스의 < Definitely Maybe > 정도를 말할 수 있겠다.

별도의 공연 없이 오직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홈레코딩으로 제작한 솔로 앨범이 있는데 여기에도 그때그때 좋아했던 음악 취향을 녹여냈다. 첫 앨범인 < Nine Is Lucky Number >는 브릿팝이나 드림팝, 두 번째 작품 < Rubberland >는 스래시 메탈이나 하드코어 펑크의 느낌을 강하게 살렸다.

여담이지만 두 분 닉네임의 탄생 비화를 또 안 들어볼 수 없겠다.

백노루양 : 나의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플라잉 노루’에서 따왔다. 말 그대로 날아다니면서 로켓을 쏘는 노루인데 그냥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노루들이 밤에 은근히 기행을 즐기는 모습 역시 어딘가 나와 닮아있는 것 같았고. (웃음)

뚜드 : 그냥 드럼을 두드리니까 ‘뚜드러’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에서 ‘러’까지 뺀 ‘뚜드’가 입에 잘 달라붙어서 예명으로 정했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러버맨 :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한 친구가 브릿팝을 소개해 줬다. 라디오헤드나 오아시스 같은 유명 팀들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찾아 들어보기 시작했고, 점점 깊이 들어가다 보니까 기타를 너무 치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생 때 부모님을 졸라서 어쿠스틱 기타를 사게 됐고 이후에 다른 악기들과 화성학 교본을 독학으로 익히면서 지금처럼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뚜드 : 드럼 스틱을 처음 잡아본 건 대학생 때다. 동아리 가두 모집이 열렸을 때 친구가 옆에 있어 달라고만 해서 밴드 동아리 부스에 앉았는데 활발한 선배들의 입담에 넘어가 얼떨결에 신청하게 됐다. 신청서에 좋아하는 악기를 쓰는 칸이 있었고 막연히 드럼을 적어 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 밴드 래드윔프스의 드럼 소리를 좋아했는데 은연중에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한 드럼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군 전역 후 아예 드럼 쪽으로 진로를 틀게 되었다.

백노루양 : 중학생 때 잠깐 플루트를 배운 것 말고는 음악과 연이 없었다. 그러다 취미로 알아봤던 밴드 활동을 하면서 재미를 붙였고 러버맨에게 미디를 배워서 음악을 직접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배움에 있어 꽤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왔던 내겐 상상도 못 했었던 일이었는데 옆에서 러버맨이 알려주는 걸 조금씩 따라 하다 보니까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확실히 음악에 있어선 모두 독립적으로 성장한 느낌이다. 인디 뮤지션으로서 힘든 부분이 있다면.

러버맨 :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올해는 대중음악 인력 분야 지원사업 덕분에 노루 님이랑 ‘랏도의 밴드뮤직’에서 6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운 좋게 정기적인 수입도 생기고 정규 앨범 제작도 할 수 있게 됐는데, 이런 수혜를 못 받고 완전 독립적으로 음악을 하려고 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인디 신에서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하실 거다.

백노루양 : 게다가 음악을 하면 정기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일한다고 공연 하나를 놓칠 때마다 우리를 알리고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상황을 놓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지금이야 같은 음악 분야 회사라 이해해 주지만 지원 사업이 끝난 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당장 돈 많이 못 번다고 후회는 없다. 음악 하는 죄로 돈을 못 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이런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소통 창구를 다각적으로 활용 중이다. 특히 매주 일요일마다 인디음악 플랫폼 ‘랏밴뮤’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 무지개 같은 선데이 나이트 >가 꽤 인기를 끌고 있다.

러버맨 : 이 역시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참여하게 된 경우다. 당시 랏밴뮤에서 지역 아티스트들을 모셔서 라디오 겸 라이브를 꾸미는 프로젝트 < 이상고온현상 >을 진행했었다. 그때 일일 DJ로 참여하며 연이 닿았다가 감사하게도 10월 즈음에 정규 DJ 제안을 주셔서 거의 1년 가까이 매주 일요일 밤 2시간을 책임지고 있다.

라디오 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러버맨 : 라디오도 라디오지만 플랫폼의 매력이 더 큰 것 같다. 랏밴뮤 청취자 중에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대중 사이에서 하위문화를 얘기하면 반응이 없을 수 있지만 그런 흐름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서 그런지 단합력이 매우 좋다.

뚜드 : 청취자 입장에서 볼 때 채팅 쳐주시는 분들이 밈을 굉장히 좋아한다. 매주 밈이 하나씩 생성되고 그게 쌓이니까 방송이 더 재밌어지는 것 같다. 직접 출연할 때도 이런 부분을 알고 참여해서 더욱 시너지가 난다.

백노루양 : 시답지 않은 헛소리도 유쾌하게 받아주는 친구들이랑 노는 기분이다. 잘게 쪼개진 나의 디지털 친구들. (웃음) 이제 벽이 사라져서 청취자분들이랑 채팅으로 서로 놀리고 그런다.

부산에서 활동하다 인천 부평으로 올라오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러버맨 : 작년 6월에 마포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인디음악 프로젝트 < 2021 인디열전 >에 출연했는데 그 이후에 부산보다 서울에서 자잘 자잘 한 접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고 갈 때마다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모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거점을 옮겨서 활동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인천 외에도 주변 도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부평을 택한 이유는.

러버맨 : 우선 주요 공연 거점이나 랏밴뮤 사무실까지 이동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했다. 서울은 너무 비싸다 보니까 그 주위로 찾아보게 되었고 음악 관련 지원이 많다고 느껴진 문화도시 부평으로 터를 옮기게 됐다. 실제로 곧 열릴 예정인 공연 < 페스티벌 륙 >도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공연이다.

확실히 공연 횟수가 늘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백노루양 : 공연 때 노란색 옷이나 말 가면을 맞춰 입고 오시는 분들도 있다. 직접 슬로건을 제작해서 펼쳐주는 등 팬분들이 이벤트 준비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때마다 음악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뚜드 : 아무래도 팀 합류 이후에 처음으로 참여했던 공연이 제일 인상 깊다.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일환으로 무대에 나올 때 포승줄에 묶여 백노루양에게 이끌려 나왔었다. (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러버맨 : 예정되어 있는 공연들을 소화하면서 다가올 정규 앨범 < 행복회로 고치는 중 > 작업에 힘을 쏟게 될 것 같다. 종전의 음악들과 상이한 부분도 있고 그만큼 가능성이 확장된 느낌을 많이 받아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러버맨 : 원래는 스타덤에 올라서 인기몰이를 하고 싶기도 했는데 라디오를 하면서 그런 욕심이 오히려 사라졌다. 지금 같은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백노루양 : 나는 여전히 스타가 되고 싶다. 음악으로 들어오는 돈이 개인당 한 달에 이백만 원만 됐으면 좋겠다.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지 말고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다.

뚜드 : 음악적인 활동으로 일정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삶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인데 나도 그 축복을 받아보길 꿈꾼다.

진행: 정다열, 장준환, 정수민
정리: 정다열
사진: 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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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5 오헬렌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다섯 번째 주인공은 시각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싱어송라이터 오헬렌이다.

부평문화재단의 지역 뮤지션 지원 사업 뮤즈컴 1기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오헬렌은 개성 넘치는 가창과 사운드가 특징이지만 ‘가족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곡도 꿈꾼다. 고유한 스타일과 보편성을 붙잡는다는 미션 앞에서도 미지의 영역에 대한 걱정보단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설렘이 커 보였다. 순간과 감정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그의 음악은 일상적 소재를 독특한 시선으로 이미지화한다. 후속작 작업과 단독 공연, 8월에 열리는 페스티벌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오헬렌의 하루를 잠시 빌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안녕하세요, 오헬렌이라고 합니다. 어쿠스틱 곡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다양한 사운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만학도였는데 공부를 또 열심히 하지 않았다. 5학기 때쯤이었나. 동기가 밴드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 퍼커션을 배우다가 홍대 놀이터에서 드럼 써클을 하곤 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처음으로 밴드를 했다.

오헬렌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할 수 있는 만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끝말잇기 하듯, 여러 기억의 조각들과 소리의 파편들을 이어 붙인다.

대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경력이 꽤 쌓였는데.
중간에 쉬는 기간이 무척 길었다. 뭔가를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찾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교하는 걸 싫어하지만 돌이켜보면 늘 남보다 느렸다.

따지고 보면 정식 데뷔가 조금 늦은 편이다.
데뷔라는 말이 조금은 거창한데 맞다. 느리게 가는 걸 좋아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산봉우리에 올라가 있을 걸 아니까 그것이 낮든 높든 내 속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하게 된다. 조급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고민하고 밤을 지새워도 지금 당장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시간이라는 파도가 나를 해안가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잘 마모된 작은 돌멩이로. 지금도 항상 내가 가진 것보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그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게으름이 적이다. 내가 주적이다 (웃음)

창법이 굉장히 독특하다. 툭툭 끊어지는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잘 이어지는 흐름이 보컬을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내게 영감을 준 다양한 뮤지션의 창법이 녹아든 것 같다. 민요와 판소리, 아프리카, 브라질 음악도 좋아했고 랩, 힙합, 팝 장르 가리지 않고 듣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돌려 들으며 까무러치게 놀라기도도 했고, 평범하게 컸다. 스스로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나를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여러가지 요소를 생각을 풀어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꼭 잘해야 하고 잘 갖춰진 상태에서만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더 깊은 곳에 닿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재료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물감으로도 충분히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새 싱글 ‘수영장’을 재미있게 들었다. 오헬렌의 음악을 들으면 소재를 잡는 능력과 이를 시각화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것 같은데.
‘수영장’은 거의 10년 전에 스케치해 놓았던 곡인데 요즘 함께 작업하는 드러머 겸 프로듀서 조성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료다. 방향을 제시하고 않고 내가 움직이도록 만들어주고 내가 보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잘 끌어준다.내가 나를 믿도록 한다. 조성준 덕분에 ‘lookatmysweat’, ‘How beautiful’이라는 곡도 세상에 나왔다.

굉장히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다 보니 대규모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가 떠오른다.
처음 발매한 EP앨범 <OH> 에서 다양한 퍼커션 악기들을 사용했다. 리듬악기들을 좋아하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예전의 나와 조우해보는 작업을 해봐야겠다. 다른 얘기로 보컬과 타악기만으로 된 미니멀한 구성은 지금도 좋아한다. ‘Don’t I Know (drift)’라는 곡도 드럼과 보컬만으로 구성된 곡인데, 죽음을 목격한 이의 얼굴에서 나와 같은 표정을 발견하고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위로를 담은 곡이다.

곡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지.
살면서 조우하는 그 순간 순간의 감정이다. 어느 때는 폭발할 듯이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큰 변화 없을 정적인 화면, 오래 두고 보지 않을 순간들을 붙잡아 채집해서 저장하는 작업이다. 기억채집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파도처럼 휩쓰는 감정들을 조금은 덜어내고 거리 두고 볼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말했지만 내일 또 꿀렁일 수도 있다.

사운드 시각화의 경우, 어떤 작업을 예로 들 수 있을까.
최근에 단편영화 음악을 작업했고 가사가 없는 음악을 만드는 재미를 느꼈다. 색이나 물감처럼 사운드라는 재료로 그림을 그리듯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만들었다. 영화음악을 위한 장비를 다 갖춘 상태는 아니라 아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진행했지만,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만 정식 사운드트랙으로 발매되지 않은 스코어는 저작권 인정이 안 된다는 점은 아쉬웠다.

부평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싱글 < lookatmysweat >을 제작했는데.
나처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들은 앨범을 내고 활동하는 데 있어 국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음악지원사업이 큰 도움이 된다. 부평문화재단의 사업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덕분에 좋은 음악 동료를 만났고 ‘lookatmysweat’ 이라는 곡에서 하고 싶었던 랩도 했다. 더블 싱글로 함께 발매한 ‘How beautiful’도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내 땀 좀 볼래? 얼마나 아름답니?’ 라는 질문과 답이다 (웃음) 이런 좋은 취지의 지원 사업이 앞으로도 쭉쭉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애스컴의 컴필레이션 앨범에서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커버했다.
뮤즈컴(MUSCOM) 지원 프로그램 세부 내용 중에 리애스컴 음원 발매도 있었다. 이 곡은 피처링으로만 참여했다. (만약 직접 참여했다면 어떤 스타일의 곡이 나왔을 것 같은지) 멜로디나 가사를 조금씩 바꿔봤을 것 같다. 좀 더 미니멀한 사운드에 색다른 서사가 추가되지 않았을까 싶다.

작업을 하다 답답해지면 인천 아라뱃길 산책을 한다고 들었다.
근처에 친구가 살고 있어 종종 자전거를 타고 서로의 중간지점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떤다. 규칙적인 일상을 무한히 반복하는 어쩌면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삶을 좋아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서 둘 다 건강해야 하는데 올해는 꼭 건강검진을 받아야겠다.

현재 거주하면서 느끼는 인천이라는 지역은 어떤 느낌인지.
인천도 바다를 끼고 있다 보니 고향인 구룡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로 갈 텐가 산으로 갈 텐가 정하라면 늘 산이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막상 바다 근처만 찾아다니며 터전을 잡는 느낌이다. 실은 물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최근 신포시장 근처 동인천역 쪽에 작업실이 생겼다.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인천의 매력을 탐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앞으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음악 장르가 있을까.
조카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를 쓰고 싶다. 신나게 부르다가 ‘아니 이게 이모 노래야?’ 라고 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오늘도 곡을 쓴다.

정규 앨범 계획이 있을까.
정규 앨범도 내야 하는데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웃음) 초겨울 아니면 늦가을쯤에 네 곡가량의 EP를 발매할 예정인데 이 작업도 절대 만만치 않더라. 정규 앨범을 지속해서 작업하는 뮤지션들이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계속 목적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가까워져 있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작업하려고 한다. 꾸준히 작업하고 싶다.

아티스트 오헬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팔 할이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앞으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팬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그동안 변화된 모습을 잘 정돈해서 어떤 면은 자연스럽게 또 어떤 면은 흐트러진 채로 내 음악을 기다려온 그리고 처음으로 만날 미래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앞으로는 무대를 통해 자주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 장준환, 정다열, 염동교
정리 : 장준환, 염동교
사진/편집 : 최윤석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