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Interview

라쿠나 인터뷰

먼저 라쿠나는 어떤 음악을 하는 팀인지, 이즘 독자분들께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꿈을 닮은 음악을 만드는 4인조 밴드 라쿠나고요.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장경민, 드럼을 맡고 있는 오이삭, 기타를 맡고 있는 정민혁, 베이스를 맡고 있는 김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근황이 궁금하다.
장경민 : 최근 싱글 ‘우주의 여름’과 ‘John’을 발매했다. 큰 계획을 말하자면 좀 더 큰 규모의 앨범을 만들어 보고자 곡을 만들어 조금씩 비축해 두고 있는 상태다.

신곡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해준다면.
장경민 : ‘우주의 여름’은 올봄에 만든 노래다. 처음에는 타이트한 기타 리프의 곡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합주를 하다 스케치가 괜찮게 잡혀서 최종 단계까지 만들게 된 곡이다. 새로 발매한 ‘John’은 파이팅 넘치는 강렬한 곡이다. 지금은 조금 희미해졌지만 예전에 라쿠나의 페르소나 격 캐릭터를 만들어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푸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 보자는 기획이 있었다. 어딘가 있을 법한 ‘존’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셈이다.

그러고 보니 라쿠나의 음악에는 계절이 많이 등장한다. 이번 싱글과 < Summer Tales >, ‘언제나 여름’이 있었고, < 정원 >에는 ‘오렌지의 계절’이라는 곡이 있었다. 혹시 각자 좋아하는 계절이 있을까.
장경민 : 뭔가 특정 계절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음악과 그 음악을 듣는 사람이 감정을 공유하는 매개체로 사용하는 편이다. 계절감이 녹아 있으면 들을 때 더 쉽게 공감할 수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 여름을 자주 이야기하는 건 여름이 가진 어떤 치열한 면 때문이다. 뒤돌아봤을 때 찬란했다는 느낌도 있고,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 우리가 하는 음악과 닮아서 애용하는 편이다.

김호 : 조금 더 말하자면 겨울에도 그런 치열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겨울에는 모두 죽어 있거나 말라 있다가도 봄이 오면 거짓말같이 다시 살아나니까. 물론 내가 겨울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다. 비보다 눈을 좋아하고, 더위보다는 추위를 좋아한다.

정민혁 : 나는 가을이 좋다. 먼저 정민혁의 민이 ‘가을하늘 민(旻)’이고, 가을이 또 서핑하기 좋은 계절이기도 하고. 최근에 취미 생활로 서핑을 시작했다.

오이삭 : 음, 이렇게 되면 분위기상 봄을 골라야 할 것 같은데. (웃음) 물론 봄도 좋아한다. 봄은 그 해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지 않나. 출발하는 느낌도 있고, 따스함이 가져다주는 설렘이 있다.

오이삭(드럼)

각자 특색이 다른 네 장의 EP를 발매했는데, EP별 제작 비화가 궁금하다.
장경민 : 스무 살 때부터 넷이서 같이 밴드 활동을 해오면서 매 순간 함께 변하고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마다 제일 잘하고, 좋아하던 게 무엇인지 나이테처럼 담겨 있는 EP들이라 보면 된다.

김호 : 첫 EP 이후로 다들 작업 스타일이나 성격, 좋아하는 음악들이 조금씩 바뀌었으니까. 어찌 보면 같이 지내며 새겨온 성장 과정이 담겨 있는 셈이다.

정민혁 : 멤버는 바뀌지 않아서 다행이다. (일동 웃음)

평소 작업하면서 마찰이 없는지.
김호 : 일단 주먹다짐 같은 마찰은 없고, (웃음) 사소한 의견 충돌은 늘 있다. 사실 충돌이라기보다도 의견 교환에 가깝다. 무엇보다 좋은 곡을 만들겠다는 하나의 목표가 있다 보니, 다들 개인의 감정보다도 팀에 이로운 말이라 생각하고 서로의 피드백을 곧잘 받아들인다.

정민혁 : 가족보다 오래 지내다 보니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전부 다 아는 사이지 않나. 이제 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동갑이라는 점이 또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김호 : 주변 밴드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이 차이가 조금 나게 되면 말할 때 살짝 부담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제 동갑이기도 하고 친한 친구이기도 해서 불편한 건 없다. 사실 그 전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거나, 싫어한다 싶으면 티가 나기 때문에 전부 눈치챈다. 알아보는 팁이 있다. (살짝 공개해 줄 수 있나) 일단 민혁이는 특유의 자세가 있다. 뭔가 막힌다 싶으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팔을 괴는 습관이 있다. 이삭이는 태평양 같은 친구라 그런 건 딱히 없고, 경민이는 잘 안 풀리면 바람을 쐬러 산책을 나간다.

노랫말에서 동화적인 스토리텔링이 돋보인다. 이러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는지.
장경민 : 형식적인 면에서 영감을 많이 받은 건 미셸 공드리. 그의 작품에는 현실을 살짝 비틀어 초현실적 분위기를 내는 특유의 연출이 많은데, 가사로 표현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에 좋은 그릇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정민혁(기타)

라쿠나의 음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명징하고 몽환적인 기타 사운드다. 영향을 받은 음악가가 있나.
정민혁 : 영향받은 뮤지션이 워낙 많아 굳이 한 명만 뽑기 어렵지만, 닮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정재일 음악가. 약간 남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그런 요소를 음악에 녹이는 점이 좋다. 어떻게 치면 특별하게 들릴지, 이 가사에는 어떤 소리가 더 맞을지 늘 고민하는 입장에서 존경의 대상이다. 밴드 음악은 원래 보컬 다음 주인공이 기타가 아닌가. 물론 이제는 라쿠나만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멤버들도 적극적으로 피드백하면서 같이 끌어줬고. 투 기타 체제로 간 덕분에 그런 몽환적인 질감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드럼은 평소 어떻게 연습하는지.
오이삭 : 사실 연습을 따로 하는 편은 아니다. 대신 합주나 공연을 할 때 최대한 많이 배워가려고 하고 있고, 그 외에는 유튜브에 드럼 커버 영상을 주로 올리고 있다. 아이돌 음악을 드럼으로 재해석하는 콘텐츠다. 피지컬적으로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어떻게 치면 재미있을지 연구하는 시간을 자주 가진다.

정민혁 : …우리는 그걸 연습이라 부르기로 했다.

그간 공연에서 배운 게 있다면.
오이삭 : 현장 분위기와 모니터링. 공간의 모양이나 크기에 따라 들리는 사운드가 다르니까. 예를 들어 작은 클럽 공연장 같은 곳에서 드럼을 크게 치게 되면 다른 악기가 묻히게 된다. 근데 또 작게 치면 퍼포먼스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전반적인 다이내믹을 조절하기 어렵지 않나. 그래도 18년도부터 2년간 많은 클럽과 공연장을 다니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경험치가 쌓인 것 같다.

<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에 출연했는데, 방송 출연은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김호 : 우리는 어떻게 보면 엠넷에서 방영한 < 밴드의 시대 > 세대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인데, <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이 그 당시 제작진분들이 참여했다고 하더라. 뭔가 중학생 때 보고 자란 프로그램에 우리가 그런 밴드로 나가게 됐다는 점이 감회가 새롭더라. 혹시 모르지 않나. 우리가 또 새로운 세대를 이끌지. 메이저 방송 출연보다도 그런 의지가 이어졌다는 의미가 컸다. 그리고 그런 존경하던 선배 밴드들과 현재 같은 소속사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도 영광이고.

경연 프로그램 특성상 포맷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정민혁 : 일단 경연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음악을 다 잘한다. 중요한 건 체력 싸움이다. 나는 이제 < 슈퍼밴드 >를 겪은 뒤 두 번째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몸이 망가진 상태여서 더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김호 : 그래도 경연 프로그램 경험자인 민혁이가 있어서 촬영 중간에 도움이 많이 됐다. 비타민이랑 홍삼, 초코바 같은 것도 챙겨주고, 핫식스랑 물도 필요하다고 조언 해주고. 정말 고마웠다.

탈락할 때 아쉽지는 않았나.
정민혁 : 그 당시에는 좀 아쉽긴 했다. 무엇보다 친한 동료 밴드가 많아서 조금 더 놀다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부분이나 배울 수 있는 부분은 모두 얻었다고 생각한다.

김호(드럼)

최근 페스티벌에서 이름이 자주 보인다. 큰 무대에 섰을 때 다른 점이 있나.
김호 : 멤버마다 다른 편이지만 나는 긴장을 극도로 안 하는 편이다. 그래서 큰 차이는 없지만, 동선을 좀 더 과감하게 할 수 있고 감정이 더 벅차게 차오른다 정도랄까. 물론 한 번 설 수 있다면 썸머소닉이나 롤라팔루자 같은 역사 깊은 페스티벌이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해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렇다면 무대에서 제일 긴장하는 멤버는 누구인가.
일동 : 민혁이. (웃음)

김호 : 민혁이가 장난도 치고 말도 많다가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에는 완전 냉동 인간이 된다.

정민혁 : 그래도 관객 호응이 좋으면 긴장이 쉽게 풀리는 편이다. 수련회 교관처럼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셈이다.

장경민 : 그러고 보면 호와 이삭이는 정말 긴장이 없는 편이다.

오이삭 : 음, 큰 무대에서는 맞는데 오히려 작은 무대에서 긴장한다. 관객과 거리가 가깝다 보니 표정이나 행동 하나하나 전부 보이니까. 그러다 보면 계속 눈치를 보게 되고,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많아진달까.

무대 위에서 라쿠나가 가진 강점이 무엇인가.
김호 : 위기 대처 능력이 좋다. 2018년부터 클럽 공연을 자주 다니면서 여러 에피소드를 많이 겪었다. 장소마다 음향이 다르고, 시설이 노후화된 곳도 있다 보니 무조건 한 번은 이슈가 생기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수습하고 있는 걸 관객이 모르게끔 하는 게 아닐까. 백조가 물밑에서는 다리를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정민혁 : 최근 단독 공연 < Summer Noise >에서 내 기타 줄이 네 번이나 끊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어떻게 이런 억지스러운 상황이 있을 수 있나. 다행히 모두가 그 사이사이를 잘 채워줘서 무사히 해결됐다.

공연마다 셋리스트를 짜는 기준이 있을까.
김호 : 어디서 하는지가 중요하다. 단독 공연이면 되도록 다 보여주려 하고 있고, 축제에서는 신나게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셋리스트로 짠다. 클럽 공연이면 우리끼리 하는 말로 일명 ‘전투곡 셋리스트’를 들고 간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록킹하고 빡센 곡들로 채워 넣는 거다. 물론 같이 출연하는 라인업을 보고 그 분위기에 맞춰 바꾸는 것도 있다.

‘소년’은 재치 있는 공식 멤버 소개 곡이다. 어떻게 이런 구성을 취하게 된 건가.
장경민 : ‘소년’은 아직 데모곡인데 공연에서 자주 했던 곡이기도 하다. 멤버를 소개하는 구간에 마침 잘 어울리는 곡이었고, 한 번 붙였던 것이 오늘날 시그니처로 남게 되었다.

시도해 보고 싶은 퍼포먼스가 있다면.
김호 : 이거는 하늘이 도와야 하는 건데, 공연 중에 베이스 줄이 한 번 끊어졌으면 좋겠다. 항상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리곤 한다. 아무렇지 않게 연주를 쭉 이어 나가는 모습이 정말 멋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신이 도와주지 않아 그런 적이 없었다.

오이삭 : 나중에 규모가 좀 더 커지게 되면 드럼에 바퀴가 달려 앞으로 나가는 이동 장치를 달아 봤으면 좋겠다. 전진 드럼이랄까.

장경민(보컬, 기타)

장경민은 씨네필로 알려져 있다. 라쿠나의 이름도 영화 < 이터널 선샤인 >에서 따온 작명인데. 그 외 정말 좋아하는 영화나 최근에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나.
장경민 : 씨네필이라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던 건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가리지 않고 최대한 다양하게 보려 하고 있다. (영화에서 주로 영감을 얻는 편인가) 맞다. 영화에는 분명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심상이 있지 않나. 그런 뉘앙스나 분위기, 연출적인 아이디어를 음악에 옮겨올 수 있는 요소가 많다고 생각한다.

김호는 음악을 추천해 주는 ‘호크박스’로도 유명하다. 평소 어떤 음악을 듣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김호: 음, 기준은 딱히 없다. 중학생 때부터 음악을 다양하게 들어온 편이고, 들었을 때 딱 감기는 부분이 있으면 리스트에 담는 편이다. 린킨 파크로 시작해 너바나, 오아시스를 거쳐 점차 연도를 내려가 비틀즈에 도착하게 됐다. 그렇게 가지를 펼쳐 가면서 재즈도 듣게 되고, 케이팝도 듣게 되고. 그러고 보니 음악 입시를 준비할 즈음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스펙트럼이 넓어지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요즘 자주 듣는 음악이 있는지.
김호 : 오피셜히게단디즘(Official髭男dism)과 스틸리 댄. 특히 스틸리 댄은 화성이나 편곡 쪽으로 정말 배울 게 많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들의 음악을 녹여내려고 연구 중이다.

향후 정규 1집에 대한 계획이 있는지.
장경민 : 아직 곡을 쓰고 비축해 두는 단계라 어떤 앨범이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어떤 사람이라도 들었을 때 ‘아, 라쿠나라는 팀이 정말 많이 성장했고, 이렇게 멋진 사운드를 낼 줄 아는 팀이구나’라는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은 욕심이 있다.

정민혁 : 한 곡도 버릴 게 없는, 그 배치부터 모든 게 이어지는 완벽한 정규를 향한 욕심이 언제나 있다. 흔히 말하는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 싶은 앨범들. 지금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붓겠다. 2집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겠다.

이즘의 공식 마지막 질문이다. 자신의 인생 앨범을 꼽자면.
정민혁 : 잔나비의 < 전설 >을 뽑겠다.

오이삭 :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 Blood Sugar Sex Magik >. 뭐랄까. 모든 면에서 나를 바꾸게 해준 앨범이다. 좋아하는 곡은 ‘The greeting song’

장경민 : 아무래도 나는 검정치마의 < 201 >을 꼽을 수밖에 없다. 트랙은 ‘Fling; fig from France’.

김호 : 아무리 줄여도 두 개가 남는다. 우선 내게 음악적인 영감을 많이 선사해 준 비틀스의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연주적인 면에서 끌어 올려준 스나키 퍼피(Snarky Puppy)의 < GroundUP >. 특히 1번 트랙 ‘Thing of gold’를 좋아한다.

진행: 장준환, 염동교, 정다열, 한성현
정리: 장준환
사진: 정다열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1 박준형

개그맨이지만 DJ 활동으로 음악에 대한 감성과 식견을 드러내고 있다. 소위 “음악광”이지만 개그 분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을 사랑하지만 개그는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디오 세대로서 라디오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에 실제 어릴 때부터 라디오 DJ를 하고 싶다 생각을 품었다. 그런데 DJ를 아무나 시켜주는 것은 아니잖나. 그래서 개그맨으로 먼저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시기에 방송국에 DJ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보냈다. 그렇게 맡은 첫 프로그램이 ‘우비소녀’ 김다래와 함께했던 2000년대 초반 KBS의 < 천하무적 >이다.

개그맨 중에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감성과 공감 능력이 없으면 개그를 짜기 힘들다. 개그맨들이 그런 쪽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벌써 MBC에서 < 2시만세 >를 진행한 지 10년이 넘었다. 정말 긴 세월 동안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에 강하다는 사실을 많이 어필했는데, 그렇다면 어릴 적 롤모델로 삼은 DJ는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역시 우리 때는 < 별이 빛나는 밤에 > 인기가 대단했다. 이문세 DJ의 < 별밤 >을 들으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방송이 끝나고 확인하면 두 시간 동안 < 수학의 정석 >에서 푼 문제는 겨우 하나 정도였다.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다는 뜻이다. 당시 잼 콘서트나 보조 MC였던 이경규 선배가 맡은 코너 등이 기억에 남는다. 배우 박중훈 선배가 10시에 진행했던 < 밤을 잊은 그대에게 >나 < 인기가요 > 등도 많이 들었다.

음악에 대한 감수성의 원천은 어디인가?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신 영향도 있고, 주말에 < 오미희의 가요산책 >을 들으며 인기 있는 가요 20곡을 열심히 듣기도 했다. 정말 재밌게 들은 터라 공테이프로 열심히 녹음도 했고, 배터리가 아까워서 리와인드는 볼펜을 꽂아 수동으로 돌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음악 중간에 DJ 목소리가 들어가면 싫기도 했다.

21~22세 사이에는 영등포에서 리어카를 끌며 가요 테이프를 파는, 이른바 ‘길보드’ 아르바이트도 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하루는 어떤 아저씨가 리어카에 있는 테이프를 200만원에 전부 사면서 다시 오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길 건너 음악사 사장님으로 나 때문에 장사가 안되어서 그런 것이었다. 내 치기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은 바로 접었다. 재미도 있고 사회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한 경험이었다. 가요의 실제 인기를 체감하기는 정말 좋았다.

당시 가장 잘 팔린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기억의 습작’이 수록된 전람회의 데뷔 앨범 < Exhibition >이다. 실제 훗날 라디오 진행을 하다가 방송국에서 김동률을 만났을 때 덕분에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외 당시 서태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룰라의 음악이 함께 들어간 테이프나 ‘일과 이분의 일’을 부른 투투, 신승훈 등도 잘나갔다. 이런 독집뿐만 아니라 컴필레이션이나 클럽 댄스 메들리도 많이 팔렸고,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온 테이프 표지가 사실 구준엽의 작품이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전체적으로 가요가 막 살아나던 시기였다.

학창 시절 음악을 일깨워 준 가수와 노래도 알고 싶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당시 7~8살이었던 나에게 화성을 쌓아 만든 가성이 정말 인상 깊었다. 조용필을 너무 사랑해서 12월 31에 방송하는 MBC의 < 10대 가수제 >도 흥미진진하게 시청할 정도였다. 조용필이 아니라 이용이 상을 타는 바람에 1982년을 올바르게 시작하지 못한 것도 같다. (웃음)

이문세의 4집 < 사랑이 지나가면 >도 충격이었다.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女의 웃음소리뿐’ 등을 들으면서 음악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고, 당시 조하문의 음악도 많이 들었다. 두 번째 충격은 중학교 2학년 여름 평상에 누워 라디오를 들으면서 만난 유재하의 ‘지난날’이었다. 이듬해로 넘어가면서는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87년 서울’ 등이 실린 < 10집 Part. 1 >과 함께 조용필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서서히 조용필과 멀어졌지만 나는 꾸준히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에는 들국화의 ‘제발’을 정말 좋아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 들국화 II > 앨범을 들었다.

소위 ‘팝 세대’라 불릴 수 있는 1970~75년생에 속해 있지만 팝 음악은 잘 안 들은 것 같다.
가요만 파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히트곡 중심으로 들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A면 네 번째 곡까지 듣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팝 음악 중 내가 국내에 전파한 노래가 있는데, 바로 < 개그콘서트 > ‘패션 7080’ 코너의 오프닝 음악이었던 킨(Keane)의 ‘Everybody’s changing’이다. 나중에 밴드가 페스티벌로 내한 공연을 펼쳤을 때 관중들이 노래에 맞춰 원을 만든 채 코너 속 우리처럼 워킹을 하고 춤을 췄다더라. 보고 희열을 느꼈다.

음악을 좋아했으니 직접 음악을 제작하는 ‘갈프로젝트’도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갈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이유는.
‘대박을 쳐야지’ 하는 마음은 없고, 그저 창조적이고 싶다는 생각에 꾸준히 하고 있다. 실제 중학교 2~3학년 당시 기타를 열심히 피면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는 했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녹음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글 쓰는 일도 좋아해 원래는 작사를 꿈꿨는데 점차 음악을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작곡까지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첫 작곡 결과물은 무엇인가.
‘부킹협주곡 G단조 줄리아나 아리아’. 웃기려고 만든 4분짜리 노래로 클럽에서 여자들을 유혹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쓴 곡이다. (웃음) 노래를 만들면서 내가 웃겨도 정작 듣는 사람은 웃기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웠다. 과거 영화 < 챔피언 마빡이 >를 찍으면서도 그랬다. 나를 포함한 개그맨들이 코미디를 다 짜면서 재미있다 싶어도 정작 촬영된 영상을 보면 별로였던 것이다. ‘부킹 협주곡’도 나중에 들으니 웃기지 않더라. 영화에서 느낀 괴리감을 음악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그래서 코미디 요소는 처음에만 있고 요즘에는 잘 안 넣는 편이다. 내 노래가 사람들이 돈 내고 들을 만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을 떠나 음악 창작을 하지 않았으면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다.
그렇다. 노래는 사람의 흥을 돋우니까. 이것이 음악의 힘이라 생각한다.

라디오 시그널 음악도 많이 작곡한 것으로 안다. 제작에 있어서 주안점을 둔 것이 있다면.
히트를 거둔 MBC 시그널 음악을 비롯해 꽤 많이 만들었다. 라디오는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하니 신나게 갈 수밖에 없다. 빠른 템포에 맞춰 활기찬 가사로 ‘우리 다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넣는다. DJ가 직접 로고송을 만드니 PD도 정말 좋아했다.

‘갈프로젝트’에서도 ‘To… 쯔위’라는 나름의 히트곡이 있다.
원제는 학창 시절 책상 서랍 속, 시간표 등에 사진을 붙여 놓을 정도로 좋아했던 배우 ‘왕조현’이다. < 천녀유혼 >을 보고 반해, 그날 밤새 공부를 하면서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생이 되어 인터뷰에서 왕조현의 이름을 외치는 상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추억을 담아 만들었는데, 유통사 친구가 왕조현으로 하면 노래를 누가 듣겠냐 하면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트와이스(TWICE)의 쯔위로 제목을 바꿨다. 유튜브 조회수가 300만을 찍을 정도로 이슈가 되어서 쯔위도 노래를 알 것 같다. 가사를 보고 유부남이 왜 이러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트와이스의 팬 원스(ONCE)는 오히려 좋아해 줬던 기억이 난다. 다만 이슈만 만들어 주고 노래 흥행까지는 안 시켜주더라. (웃음)

음악과 관련해서 실현하고 싶은 목표가 있나?
로직이나 큐베이스 등의 쉬운 툴 덕분에 음악을 만드는 저변이 넓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옥석은 가려지는 시대다. 뭇 인디 밴드처럼 기막힌 음악을 내가 만들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꾸준히 하고 싶을 뿐이다.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하대 출신이다. 인천이 일명 ‘음악 도시’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인하대 후문 앞 용현동에서 자취했던 사람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물가가 아주 좋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술 마시러 가면 안주가 엄청나게 나오는 곳이 많았다. 풍요롭고 낭만 가득했던 모교 주변 풍경에 지금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학생 시절 자유공원, 수봉공원, 월미도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도 많이 넓혔다. 대학생 새내기 때 월미도로 데이트를 가게 되면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인 줄 알았던 월미도가 사실 택시 타고 가는 유원지임을 깨달은 에피소드도 있다. 공부만 하던 고등학생에서 막 대학생이 되었으니 아는 게 있었겠나. (웃음)
그리고 인천이 음악 다방도 많고, 하드 록과 메탈의 고장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음악이 강한 도시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박준형의 캠퍼스 생활도 들려줄 수 있나.
개그맨을 꿈꾸고 있던 당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그 동아리를 만들었다. 인하공전과 붙어있는 탓에 인하공전 학생들도 우리 학교 쪽으로 많이 다녔는데, 이를 보고 연합 개그 동아리를 만들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푸하하’라는 동아리를 만들고 전단지를 온갖 곳에 붙인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점차 그렇게 되면서 인원이 200명까지 모였다. 회장이었던 나 외에도 < 웃찾사 >의 ‘LTE 뉴스’로 알려진 김일희가 ‘푸하하’ 출신 개그맨이다. 지금도 가끔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밥을 사주고는 한다.

코미디 얘기로 들어가 보자. 박준형 코미디의 핵심은 무엇인가.
‘참신함’이다. 오래 연명하다 보니 진부해진 감도 있지만 그래도 파생 코너가 많이 나온 것은 내가 보여준 신선함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 요즘 유튜브에서 활약 중인 < 피식대학 > 채널의 ‘Daily Korean’ 시리즈도 내가 만들었던 ‘생활사투리’와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코미디에 대한 영향은 주로 어디서 받았나?
잡지와 신문을 많이 본 덕분에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웃긴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1998년도부터 4년 동안 대학로에서 매일 공연을 하는 극장 생활 덕분에 단련된 것에 가깝다. 극장 출신인 나와 갈갈이 패밀리 사단이 이렇게 경험이 쌓이면서 공개 코미디에 최적화된 호흡을 얻었다. ‘사랑의 가족’ 등의 코너에서 보여준, 한 템포 뒤에서 들어가는 개그도 이렇게 체득한 것이다.

소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며 연습한 사람들이니까 다른 코너보다 앞설 수 있었다. 정종철이 잘 살려준 ‘마빡이’도 극장 시절부터 ‘건들건들 건달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만든 아이디어였다. 우리의 성공을 보고 이후 < 웃찾사 > 개그맨들이 벤치마킹하여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 개그 콘서트 >는 우리나라의 새천년 웃음의 동의어와 다름없다. 본인이 여태 아이디어를 낸 코너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정말 많지만 그래도 ‘갈갈이 삼형제’다. 내가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코너가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잘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 같아 ‘갈갈이 삼형제’에게 고맙다.

박준형을 포함한 여러 개그맨에 힘입어 < 개그콘서트 >가 정점을 찍었지만 지금은 코미디가 거의 사장된 시기다.
사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니까. 관객을 앞에 둔 당시 코미디 문화가 나와 잘 맞아 성공할 수 있던 것이고, 지금은 또 다른 형식의 코미디가 흥행을 하고 있다. 나한테는 크게 먹히지는 않고, TV 포맷에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애초에 요즘 사람들이 TV를 거의 안 보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런 변화를 따르는 것이다.

박준형도 이제 나이가 50을 앞두고 있다. 중장년층에 돌입한 시점에서 박준형의 앞으로의 목표를 묻고 싶다.
선배들을 보면 50세에 들어서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30대 초반에 성공하고 이후에는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계가 있나 하는 생각도 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바둑이나 게임도 경험이 많은 50세보다 젊은 20세의 실력이 더 뛰어나지 않나. 전성기가 지나가면 이제 남은 게 없는 것인지, 초기에 비해 내가 무뎌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이런 의심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더 노력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한다. 50대만의 ‘촉’으로 계속 뻗어 나가고 싶다.

진행: 임진모, 장준환, 정다열, 한성현
정리: 한성현
사진: 정다열

Categories
Interview

한로로 인터뷰

데뷔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첫 싱글 ‘입춘’이 주목을 받고 그 여파로 한국대중음악상 두 부문에 후보로 지정되는 등 알찬 성과를 보였는데, 먼저 이에 대한 소회를 듣고 싶다.
회사와 함께 열심히 달려온 성과를 빠르게 이루고 있는 것 같아 신기하고, 당연히 기분도 좋다. 물론 운이 따라준 것도 있으니 지금의 이 행운을 그대로 가져가고 싶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하고자 한다.

실제 데뷔곡 ‘입춘’은 방탄소년단 멤버 RM의 SNS에 공유되기도 했다.
DM(다이렉트 메시지)에 외국인 사용자가 보낸 영어 메시지가 많이 들어와서 처음에는 해킹이라도 당했나 싶었다. 그런데 찬찬히 보니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곡이 올라왔다”, “노래 잘 듣고 있다” 등의 내용이라 SNS에 공유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다 보니 힘듦을 토로하는 노래도 “내가 잘해야지” 식의 가사가 많다. 후렴에서 “도와줘요”를 외치는 ‘입춘’이 더 와닿은 이유였다. 노래의 배경을 소개해 줄 수 있나?
제목처럼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쓰인 곡이다. 계절도 그렇지만 현실도 차갑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냉혹함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생각했다. 청춘이 아프고 시들다가도 다시 꽃을 피우고 싶어 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도와달라”는 가사도 특정한 대상보다는 살아가는 세상에 시원하게 외치고 싶은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넘어지더라도 꽃을 피우고 싶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달라는 의도를 담았다.

사실 가장 처음 쓴 노래는 ‘비틀비틀 짝짜꿍’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힘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기보다는, 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나와 회사의 공통적인 생각에 ‘입춘’을 쓰게 되었다.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 낸 노래 중에 가장 아끼는 곡이기도 하다.

현재 국어국문과에 재학 중인 영향인지 가사를 보고 있으면 표현이 참 세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나?
보통 세상을 둘러보다가, 또는 주변 사람들과 평범하게 대화하다가 가사가 시작된다. 거창한 소재보다는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가지는 생각을 꾸밈없이 표현한다. 취업에 대한 청춘의 걱정이나 흉흉한 세상 등 여러 소재를 어떻게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보면 ‘따뜻한 세상을 함께 만들고 싶다’는 메시지로 귀결된다. 두 번째 싱글인 ‘거울’도 친구와 술을 마시다가 깨달은 생각을 집에 가져가서 가사로 만든 곡이다.

문학 작품에서 가사의 영감을 받은 적도 있는지.
소설보다는 시를 좋아하는 편이다. 내가 다루는 주제에 어울리는 문체에 대해 많이 연구하고 있다. 특히 허연 시인의 시집 < 불온한 검은 피 >를 정말 좋아한다. 날카롭고 어두운 문체가 내가 쓰고자 하는 분위기와 맞는다 생각한다.

노래 제작 과정은 어떻게 되나? 작사와 작곡 모두 본인이 다 하는 것으로 아는데.
글을 먼저 쓴 다음 가사를 추출하고, 이후 어울리는 멜로디를 붙인다. 편곡은 얼마 전에 데뷔한 같은 어센틱 레이블 소속 가수 이새(Jesse)가 담당한다. 추구하고자 하는 음악의 결이 나와 비슷해서 같이 작업을 하게 되었다. 내가 레퍼런스를 제시하거나 사운드 측면에서 의견을 내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작업해 준다.

결이 비슷하다는 것은 록 장르를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다. 둘 다 록 사운드와 장르 특유의 기승전결을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을지도 함께 연구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록이 매니아는 있어도 대중적으로 잘 소비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럼에도 록으로 가닥을 잡은 이유가 궁금하다.
평소에 의견을 직설적으로 표출하는 성격은 아니고, 오히려 남의 의견을 많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나 음악을 할 때만큼은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답답하더라도 록을 들으면 해소가 되곤 하는데, 이처럼 내가 받은 영향을 남에게 다시 주는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록에는 외치는 듯한 그런 울림이 있지 않나. 나도 세상에 소리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연스럽게 록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그렇다면 영향을 받은 뮤지션이나 음악은 어떻게 되나.
장르는 대체로 다양한데 가사에 울림이 있어 몰입할 수 있는 곡을 좋아한다. 선배 뮤지션으로는 이소라와 자우림을 정말 좋아하고, 해외 가수 중에서는 코난 그레이를 꼽고 싶다. 세상을 따뜻하게 표현하는 가수다.

노래 자체도 좋지만 라이브 무대에서 보여주는 실력도 뛰어나다. 원래 좀 노래를 했는지, 아니면 피나는 연습의 산물인지.
내 경우는 확실히 후자다. (웃음) 아무것도 없이 회사에 연습생으로 들어온 후 지금까지도 꾸준히 레슨을 받고 있다. 연습을 계속하면서 점차 구실을 갖추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느껴서 미래를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회사에 다짜고짜 음악을 배우고 싶다는 메일을 먼저 보낸 후 계약했다고 알고 있다.
원래 음악에 대한 직업적인 생각이 딱히 있지는 않았는데, 어느 순간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연락을 보냈다.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조금 더 노력하면 충분히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그때 치기 어린 내가 있어서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참 신기하다.

인디 레이블에서의 연습생 시스템은 다소 생소하다. 어떻게 돌아갔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
프론트맨으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배우는 시기였다. 앞서 말했듯 보컬 레슨도 받았고 미디(MIDI)도 배웠으며 가장 중요하게는 ‘한로로’라는 아티스트의 브랜드를 어떻게 구축할지 함께 고민했다. 처음에는 귀여워 보이는 팝 쪽으로 갈까도 했지만 아무래도 내게 맞는 옷이 아니라 판단했고, 차근차근 과정을 거치면서 록으로 방향을 잡았다.

전반적으로 노래가 어둡고 서정적인 느낌이 있다 보니 듣고 있으면 어떤 삶을 살아왔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학창 시절은 사실 생각보다 활발한 편으로, 오히려 친구들을 웃겨주거나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 같이 입시로 힘든 상황에서 터놓고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레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친구들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인 뮤지션이지만 드라마 < 나의 해방일지 > 사운드트랙 ‘다이아몬드’에 작사가로 참여했다. 신인 가수에게 작사 의뢰가 가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닐 텐데.
마침 같은 소속사의 가수 최기덕의 곡이었다. 원래 작사 작곡 능력이 뛰어난 분이지만 내 작사 역량을 좋게 보고 기회를 먼저 주셨다. 다행히 드라마 측에서도 좋게 봐주셨다.

반대로 다른 사람이 쓴 곡을 부르는 경우도 있다. 악뮤 이찬혁이 진행하는 이찬혁비디오 프로젝트의 < 우산 > 앨범 수록곡 ‘Romantico'(TETE 원곡)도 그렇고, 이외 다른 사운드트랙도 다른 작곡/작사가의 노래에 보컬로 참여했다. 본인의 곡을 직접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의 입장에서 이런 경우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는지 궁금하다.
작곡가나 원곡자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보컬을 연습한다. 아무래도 내가 쓴 곡이 아니다 보니 원작자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최대한 화자의 이야기에 몰입해서 녹음하려 한다. ‘Romantico’의 경우도 녹음하면서 이찬혁에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부르면 되는지 솔직하게 질문했다.

< 우산 > 앨범 참여는 어떻게 이뤄진 것인가?
구체적인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이찬혁 측에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곡을 고르고, 이에 어울리는 보컬을 찾다 나를 발견해서 연락을 줬다고 알고 있다. 내가 가진 무드가 음반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그 후로도 간혹가다 SNS에서 재밌는 영상을 보내거나 하는 그런 식으로 말을 주고받고 있다. (웃음)

폭발적인 전개를 보여준 ‘입춘’과 ‘거울’ 이후 발표한 ‘비틀비틀 짝짜꿍’은 다소 발랄했고, ‘당신의 밤은 나와 같습니까’와 ‘정류장’은 잔잔한 편이었다. 그런데 데뷔 1년을 넘기고 발매한 ‘자처’는 처음 두 곡과 편곡 면에서 느낌이 비슷해서, 이를 듣고 한 바퀴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비틀비틀 짝짜꿍’을 제외하면 나머지 곡은 당시 느끼는 감정을 순차적으로 담아서 바로 발표했다. 따라서 순서에 특별한 의도가 담기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내 생각이 돌고 도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파했다가도 힘을 내며 열심히 살고, 그러다 후회가 들기도 하는 그런 그림. 그런데 이것이 그저 내 이야기가 아니라 세상을 살아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민이 아닐까 한다. 앞으로도 그때마다의 감정에 따라서 곡을 쓰고 공개할 것 같다.

가수 전에는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다고 했는데, 이렇게 보니 음악에도 느슨하게 서사가 있는 것 같다. 나중에 콘셉트 앨범을 낼 수도 있지 않나 싶은데.
구체적으로 주제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욕심은 있다. 조금 더 살아봐야 생각이 구체화되지 않을까 싶다.

▶ 좌 : 디지털 앨범 커버 / 우 : 실물 음반

마침 8월 29일 공개한 신보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제목은 < 이상비행 >, 여섯 곡이 담긴 EP로 4월에 발매한 ‘자처’와 라이브 공연에서 부른 ‘해초’를 수록했다. “이상”이라는 단어 자체가 동음이의어잖나. 현실에서 벗어나 꿈과 ‘이상(理想)’을 좇는 이들을 ‘이상(異常)’하게 보는 사람들이 특히 요즘 늘어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 나의 ‘이상(理想)’을 찾아 비행하겠다는 뜻을 담았다. 사운드 면에서는 발매 시기인 여름에 맞게 조금 더 청량하고 과감해졌다. ‘입춘’보다 밝고, ‘비틀비틀 짝짜꿍’보다는 강하게. 여름에 들을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그전까지는 다 싱글만 발매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틀을 먼저 다지고 싶었다. 음반을 서두르게 내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대신 싱글을 하나씩 내면서 입지도 다지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알고 싶었다.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아서 EP를 발매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싱글 단위로 내다보니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뚝 끊어지는 느낌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 이상비행 >이라는 제목 아래에서 한 편의 영화 같은 느낌을 내고 싶었다. 나 또한 메시지에 집중하고 몰입해서 EP를 작업할 수 있었다.

가장 마음에 들거나 열심히 작업한 곡을 꼽는다면?
아무래도 타이틀곡인 ‘금붕어’다. 음반 제목을 가장 잘 표현한 곡이라 생각해서 타이틀로 결정하게 되었고, 어항 속에 살다가 자유로워지고 싶어 바다로 나간 금붕어의 이야기를 다룬 곡이다. 막상 나가보니 바다는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가득했고, 다시 생각한 끝에 자신이 원했던 것이 공기가 있는 푸른 지상과 맑은 하늘이라고 깨닫게 된다. 사실 금붕어는 공기에 닿으면 숨을 못 쉬어 죽지 않나. 그렇지만 죽음을 무릅쓰고도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겠다는 당당한 포부를 표현하는 곡이다. ‘입춘’에서 새싹에 우리를 비유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금붕어에 나를 대입해서, 여러 시선을 다 제치고 도전하고 싶다는 용기를 담아봤다.

EP니까 언젠가 정규 앨범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다. 일단 지금은 이번 < 이상비행 > EP에 집중하고 있고, 발매하자마자 본격적으로 다음 단계를 밟아가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쉬면 오히려 불안한 스타일이다.

목표로 삼은 무대가 있나? 코첼라 이런 것도 좋다.
딱히 없지만 그렇다면 코첼라로 하겠다. (웃음) 사실 특정한 목표를 잡고 이를 성취했을 때 노력했던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 좀 이상하다. 개인적으로 네이버 온스테이지를 정말 나가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서게 된 것이 기쁘면서도 다음 목표를 어디로 두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서 차라리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는 대신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넓게 보려 한다. 무대에 건강하게 오를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는 생각의 결과다.

이즘의 공통 질문이다. 한로로를 음악으로 이끌었거나, 또는 계속 음악을 하게 만드는 인생 음악/음반 또는 아티스트는?
바네사 칼튼(Vanessa Carlton)의 ‘A thousand miles’를 정말 꾸준히 들었다. 중학교 시절 우연히 곡을 처음 듣고 이후 앨범 < Be Not Nobody >도 즐겨 들었다. 지금도 기분 전환이 필요하거나 슬플 때, 산책할 때 등 기분 가리지 않고 종종 찾는다. 어떻게 보면 이 노래를 처음 들으면서 음악에 대한 매력을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로로가 생각하는 한로로의 음악을 설명해달라.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과 아픔을 최대한 솔직하게 풀어내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용기와 살아갈 의지를 주려 노력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해주는 것 아닐까.

진행: 한성현, 장준환, 정다열, 김태훈
정리: 한성현
사진 제공: 어센틱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0 장미화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 번째 주인공은 우리 일상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었던 가수 장미화다.

1960년대 미8군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그룹사운드 ‘레이디버드’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장미화는 일찍이 해외 각지를 순회하며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체계화된 공연 시스템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 전반을 접하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에 화사함을 불어 넣은 게 바로 1973년 솔로 데뷔곡 ‘안녕하세요’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라며 해맑게 건넨 인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긍정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남양주 인근으로 찾아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장미화는 여전히 밝음 그 자체를 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쾌한 웃음과 함께 풀어낸 그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전 기억임에도 근래의 일처럼 선명했다. 동시대를 함께 했던 어른들에겐 재미난 회고록으로, 당대를 살지 못했던 젊은 친구들에겐 간접적인 과거 체험기로 남길 바란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근엔 TV 프로그램 녹화를 많이 하고 있다. < 스타다큐 마이웨이 >도 촬영 중이고. 얼마 전에 <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에도 나갔는데 시청률이 대박 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 내가 녹화해 놓고 내가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다. (웃음)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 1세대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모여 있는 예우회 분들과 용산에 다녀왔다. 일부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에 최근 공원을 조성했는데, 거기 우리 세대 얼굴들을 다 전시해 놓은 기록관을 만들었더라. 옛날에 노래하던 자리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감회가 깊었다.

1960년대 미8군과 여성 밴드 ‘레이디버드’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65년 KBS < 아마추어 톱 싱어 선발대회 >에서 대상은 물론 연말 대상까지 받았고, 신중현 선생님이 나를 픽업해서 1966년 미8군 막내 싱어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상태였는데 맨날 레슨 받고 무대 한다고 밤새니까 학교 갈 틈이 없었다. 그러다 김시스터즈 매니저였던 맥맥퀸(Bob McMackin)이 나를 중심으로 여성 그룹사운드를 만들고 싶다 했고, 보컬 로지(장미화), 메인기타 앤젤라, 베이스 리사, 드러머 루비, 오르간 애니로 구성된 ‘레이디버드’가 탄생했다.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미8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노래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게끔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때는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눈만 뜨면 연습했었다. 또한 외국 노래에 대해서 몸이 익어갔던 장소였다. 한국 노래를 안 부르고 전부 팝송만 부르니까. 팝송 속에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외국 사람들과 사는 것 같고 그랬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배들보다 조금 나은 때에 들어갔다. 윤항기 오빠 때는 50년도 후반, 그러니까 막 6.25 전쟁을 겪고 그야말로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미8군에 딱 들어가면 식사부터 미국식으로 주곤 했는데 오빠들은 가족들과 나눠 먹기 위해 그걸 싸 갔다더라. 집에 있는 식구들이 생각나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간다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미8군 출신 가수들에 의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격이 올라갔다는 평이 많습니다.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당연하다. 가요계를 봤을 때 미8군 출신과 일반 가수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더블 A 등급을 받아야만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를 한다 했을 때 싱어는 가사를 다 영어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공연을 위해 무조건 외웠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을 했으니 난 자부심을 가진다. 음악적으로 봐도 그룹 출신은 솔로와 창법부터 다르고, 노래할 때의 감정 표현이나 무대 매너가 확실히 세련됐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먼저 무대를 가졌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레이디버드 5명이 연습해서 처음 진출한 곳은 LA다. LA에 도착해서 한복을 입고 맥맥퀸을 기다렸는데 이 사람이 공항에 안 나왔더라. 근처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는데 전부 영어로 말하니까 우린 다 못 알아듣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영사님을 만나게 돼서 맥맥퀸하고 대신 통화를 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영사님 댁에서 잠시 머무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맥맥퀸은 우리를 픽업해서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당시 선생님과 레이디버드는 어떤 캐릭터였나요.
외적으로는 굉장히 예쁘장했다. 가랑머리 한 여자애들이 미니스커트랑 롱부츠 신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했다. 그들 눈에는 열네다섯 정도 되는 아이들로 보였을 거다.

그보다 대부분 오리지널 팝을 하던 때에 흑인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중현 선생님이 내 목소리가 다이애나 로스랑 너무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노래를 주로 부르라고 하셨다. 중간에 페툴라 클라크 ‘Downtown’, 앤 마그렛 ‘Slowly’ 같이 섹시한 곡도 했는데 그때마다 난리가 났었다.

한 번은 내가 슈프림스의 히트곡 ‘Stop! in the name of love’를 불렀는데 맥 맥퀸이 나더러 다이애나 로스 노래를 할 때 목소리를 너무 똑같이 내지 말라고 하더라. 아무리 닮았다 해도 자연적으로 나오는 본인 목소리 그대로 해라. 똑같아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때부터 본연의 내 목소리를 따라 노래 부르게 됐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인기가 괜찮았나요.
당시 센스 호텔이라고 있었는데 그 호텔 카지노에서 쇼를 열곤 했다. 홀 중앙에 원형 스테이지가 있는데 벽으로 반을 갈라서 두 팀이 동시에 공연을 펼쳤고 한 타임이 지나면 무대가 회전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우리 레이디버드와 같이 무대에 올랐던 게 바로 라이처스 브라더스였다. 얼굴이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표곡인 ‘Unchained melody’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공연을 보고 싶었고, 막간을 활용해서 잠시 관람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대가 두 명이 깨지기 전에 가진 마지막 무대라더라. 카메라가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미국 다음으로 떠난 곳은 어디였나요.
라스베가스 이후엔 캐나다랑 동남아도 돌았다. 베트남 구정 공세가 일어났던 시기에 현지에 머물렀었는데 그때 공항이 완전 봉쇄됐다. 노래하던 클럽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는데 그 집이 문을 닫으니까 밥도 잘 못 먹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맹호부대에 도움을 요청하란 소리를 들었고 바로 연락을 취해 부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베트남이 다시 문을 연 이후에 싱가포르, 태국, 홍콩 등 마저 공연을 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미8군을 거쳐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오긴 했지만 1973년 ‘안녕하세요’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웠다. 장미화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건 ‘안녕하세요’ 덕이 크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분들 말로는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미8군 때야 그냥 철모르고 노래할 때라 막연한 재미였지만, 솔로 데뷔 직후엔 인기는 물론 돈도 많이 벌며 진정한 전성기를 맞았다.

말씀하신 데뷔곡 ‘안녕하세요’는 물론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어떻게 말할까’ 등 수많은 노래가 우리 사회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들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싸우다가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안녕하세요’가 인기를 끌었을 때 “좀 웃고 삽시다. 안녕하시죠?” 내가 막 그러면 사람들이 웃더라. 그다음에 낸 노래가 ‘웃으면서 말해요’였는데 그때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를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택시 같은 데 붙이고 그랬었다. 다 같이 웃고 살자고. 참 좋은 노래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런 노래 좀 불러줘야 하는데 부를 데가 없다.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말해요’ 모두 MBC 악단장을 맡았던 여대영 선생님의 곡입니다.
그런데 나는 막상 MBC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던 사람이다. 활동 당시에 집시 스타일의 옷을 많이 입었는데 등을 너무 팠다고 1년 정지를 시키더라. 같은 날 출연한 여가수 중에 가슴 쪽을 판 사람도 있었는데 거긴 정지를 안 당했다. 너무 열받아서 내가 직접 사장실에 올라가서 엄청 따졌다. 지금이야 다 품고 사는데 그때는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소위 성깔이 좀 있었다.

실제로는 TBC에 더 많이 출연했다. < 쇼쇼쇼 >에서 무지 키워줬다. 매일 같이 나갔으니까.

TV에 나올 때마다 항상 춤을 추셨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어였나요.
내 아이디어다. 무슨 노래를 하라 그러면 내가 집에서 거울을 보고 이 노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무대를 떠올리며 안무를 구상했다.

가수로도 최고지만 예능 스타로 활동했어도 최고였을 것 같아요.
코미디언 구봉서 씨, 서영주 씨 이런 분들이 너는 이쪽에 종사했어도 잘 됐을 거라고 하셨다.

1973년부터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긴 공백을 가지기도 하셨습니다.
1983년에 컴백을 했는데 이 시기가 꽤 마음에 남는다. 이혼하고 난 다음이니까. 아픈 엄마와 3살 난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살 때 통 허무했었다. ‘내 인생 바람에 실어’라는 노래 속에 그 가슴앓이가 다 들어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야간 업소뿐이었다. 미국의 큰 호텔에서 체계적인 공연을 하다가 이상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려 하니 적응이 안 됐다. 현미 언니 같은 선배들도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돈을 버는 건 좋았다. 다만 꼭 술 먹고 무대로 음식을 던지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원래는 누가 뭐라 그러거나 욕을 들으면 무서워하면서 울고 그랬었는데 이 엉망인 분위기에 동화되면서 굉장히 사나워졌다. 나중엔 도저히 못 참고 뛰어 내려가서 그대로 얼굴에 던져주기도 했었다. 이런 게 내 가치관하고 너무 안 맞으니까 그냥 이럴 때 결혼이나 해서 가정집 안에 들어앉아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전 남편이었다. 처음엔 매너도 너무 좋고 뭐 하나를 해도 고급스러운 젠틀맨이었다. 그래서 식을 올렸는데 결혼 첫날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이 사람은 내 사람, 그러면서 딱 날 잡기 시작하더라. 내 기가 눌려 기분이 영 찜찜했지만 우리 엄마 말을 듣고 그냥 참으며 지냈는데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 그래도 큰아들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 모든 재산과 우리 아들을 바꿨다. 아이가 내 보물이다.

복귀 이후에도 많은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수놓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간단히 짚어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1973) / ‘웃으면서 말해요’ (1974) / ‘그 누가 뭐래도’ (1976) / ‘어떻게 말할까’, ‘푸른처녀’, ‘해뜰날’ (1977) / ‘애상’ (1985) /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 날’ (1988)

그런데 인기에 비해 상복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7대 가수상처럼 돈 주고 받는 상 이런 거는 맨날 받았다. 그런데 정작 가수왕 상같이 큰 상들은 탈 법한데도 못 탔다. 그때는 매니저들이 다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래서 난 맨날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뽑는 장미화의 베스트 트랙은 무엇인가요.
옛날엔 ‘여름의 훈장’이었다가 ‘쓸쓸한 연가’로 제목을 바꾼 곡이 있다. 동아방송 드라마 주제가로도 썼다. ‘안녕하세요’보다 더 히트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때 분위기와는 안 맞는 노래였던 것 같다. 최고로 맘에 드는 노래다. ‘사랑, 그 그리움’이란 곡도 정말 아끼는데 주목받지 못해 너무 아깝다.

장미화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신중현 선생님이 나의 길을 열어줬다. 창법이나 매너도 그렇지만 연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추운 겨울날 선생님 댁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겸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덜덜 떨면서 걸어온 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에 들어가 기타 연습을 하시더라. 선생님처럼 일 없는 날에도 매일같이 연습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신중현 선생님 외에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을까요.
선배 중에선 패티김 언니가 제일 멋있었다. 후배는 같은 그룹사운드 출신인 조항조나 김상배가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우리 K팝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우리가 예전에 해외로 다닐 때 그런 무대를 원했었다. 왜 우리는 세계적으로 나가서 노래를 못 부르나. 우리는 뭐가 모자라서 이게 안 되나. 그런데 요즘 우리 후배들이 나가서 당당하게 1위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참 감사하다.

그 친구들이 우리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미8군 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탕이 되고,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그 부대 안에서 힘들게 고생하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했던 무대 경험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K팝이 되었다는 걸 인지해 주면 좋겠다. 더욱더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항상 뒤에서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끝으로 장미화 선생님은 우리 가요계에서 어떤 가수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참 착하고 활달하고,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정다열, 이승원
정리 : 정다열
사진 : 이승원

Categories
Interview

블랙스완 인터뷰

활발한 글로벌 시장 진출의 노력 끝에 케이팝(K-Pop)은 팝(Pop), 즉 대중음악의 지위를 쟁취했다. 세계 각지에 팬덤을 구축하며 한국의 아이돌 문화는 이제 로컬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다. 해외 음악 트렌드를 수입하는 속도는 더욱 빨라졌고 스튜디오에서는 영어 가사가 심심찮게 녹음되고 있다. 다국적 멤버 구성과 해외 로케이션을 통해 촬영되는 이국적인 뮤직비디오까지 가세해 무국적성은 케이팝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이렇게 케이팝에서 점차 K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가운데 ‘한국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업그레이드한 팀이 탄생했다. 라니아를 전신으로 하여 멤버 교체를 겪은 끝에 지금은 전원 외국인으로만 구성된 걸그룹 블랙스완(Blackswan)이다. 다문화보다는 아직 단일문화 사회에 가까운 한국에서 이들의 존재는 낯설지만 한국어 노래를 부르고 한국식 시스템을 따르는 이들은 케이팝 아이돌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과연 블랙스완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이며 케이팝은 무엇일까? 네 멤버 앤비, 파투, 스리야, 가비와 이즘이 대화를 나눴다.

먼저 각자 국적을 소개해 달라.
앤비 : 미국 워싱턴 D.C.에서 왔다. 흑인과 백인 혼혈이다.
파투 : 벨기에 출신이다.
스리야 : 인도에서 왔다.
가비 : 브라질 출신이고 부모님은 독일분이다.

한국에서 아이돌 연습생으로 보낸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파투는 2020년 10월, 나머지 멤버는 2022년 5월에 데뷔했다)
앤비 : 6개월 동안 연습생 생활을 했다.
파투, 스리야 : 연습생으로 1년을 보냈다.
가비 : 연습생은 1년, 한국말을 배운 지는 2년이 됐다.

다른 그룹에 비하면 연습생 기간이 짧다. 이렇게 빨리 데뷔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파투 : 우리가 지금까지 잘하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웃음)
스리야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성격도 잘 맞고 멤버 간 소통이 잘 됐다. 연습도 열심히 했다.
파투 언니가 리더로서 모르는 게 많은 우리를 도와줬고 우리도 그런 파투 언니를 잘 따랐다.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덕분에 실력이 금방 늘었으니 언니에게 고맙다. 밤에는 다 같이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각자의 힘듦을 토로하면서 울고 웃었다.

한국에 오기 전 팬으로서 느끼는 케이팝과, 실제 아티스트가 되고 난 후 케이팝에 대한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파투 : 벨기에에서 알고 있던 케이팝은 밝고 행복하고 자신감 넘치는 음악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해보니 많이 힘들긴 하다. 특히 연습생 생활이 힘들어서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지만 지금은 괜찮다.
앤비 : 오기 전 연습생 생활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알아본 것과 실제가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더 힘들었다.

일부, 또는 해외에서는 케이팝을 공장제 시스템이라 표현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스리야 : 인도에서 한국으로 오기 전에 시스템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몰랐다. 가까운 편의점 외출까지 일일이 보고하니까. 매니저와 회사에 이것저것 다 물어봐야 했다.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이러한 통제를 받으니까 적응이 힘들었을 것 같다.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하다.
파투 : 처음에는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케이팝 아이돌이 되고 싶었기에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한국 시스템 내에서 내가 잘해야 무대에 올라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현재 블랙스완은 멤버가 전원 외국인임에도 한국어로 노래를 부른다. 영어 가사가 부르기도 쉽고 해외 차트 진입이 좀 더 수월했을 텐데 한국어로 녹음한 이유는 무엇인가?
앤비 : 우리는 케이팝 아이돌이니까. 케이팝은 한국의 대중음악이고 케이팝에서 한국적인 것을 들어내면 그냥 팝이 될 뿐이다. 한국인 멤버가 없는 블랙스완이 케이팝 아이돌이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오리지널리티를 담아야 했고 그것이 한국어 가사라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

‘Karma’는 사운드 면에서 인도 스타일이 느껴지고 뮤직비디오도 실제 인도에서 촬영했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벨기에에서 공연했다. 각각 스리야와 파투의 고향을 거쳤으니 다음은 미국이나 브라질인가?
파투 : 다음 컴백은 내 출생지인 세네갈에서 찍을 것도 같다. 음악 스타일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가비 : 우리 음악에 브라질의 삼바나 보사노바 느낌이 섞이면 좋겠다.

타이틀곡 ‘Karma’는 가사가 쉽지만 ‘Cat & mouse’에는 ‘심미적, 안달 난, 새침하고 도도하지, 발그레, 질척거려’처럼 외국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가 많다. 모두 의미를 알고 녹음한 것인가?
파투 : 의미를 다 이해한 후에 녹음했지만 그 중에서 알고 있었던 단어는 ‘발그레’ 정도였다. 뜻은 통역 애플리케이션이 설명해줬다.

노래 가사에서 특히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가 있었나?
앤비 : ‘Cat & mouse’ 가사 중에서 ‘뜨거워’가 어려웠다. 한국어 선생님의 교정을 따르며 발음이 정확할 때까지 계속 연습했다.
가비 : 숫자 18을 자꾸 말하다 보면 욕설과 발음이 비슷해져서 어려웠다. (웃음) 숫자를 말하려고 해도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너무 웃겨서 대표님 앞에서 그 상황을 재현했는데 그때도 잘못 발음해서 대표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투 : ‘촬영’ 발음이 제일 어렵다. 계속 연습해도 잘 안 된다.
스리야 : ‘을/를’ 그리고 ‘Cat & mouse’ 가사에서는 ‘심미적’이라는 표현이 어려웠다. 역시 통역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타이틀곡 ‘Karma’도 좋지만 ‘Cat & mouse’도 좋다. 더 대중적이라 수록곡으로만 묻히기 아까운데 혹시 ‘Cat & mouse’로 활동할 계획은 없나?
파투 : 실제로 컴백 팀이 많은 7월 지나서 8월에 후속곡으로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한국어 가사고 안무도 준비 중이다.

멤버 별로 선호하는 음악 스타일이나 장르는 무엇이고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앤비 : 알앤비와 클래식을 좋아한다. 실제 미국에서 클래식은 2년 정도 피아노를 배웠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앨리샤 키스, 케이팝 아이돌 중에서는 원어스(ONEUS)다. 그룹의 곡 중에서는 ‘Come back home’, ‘가자 (Lit)’을 가장 좋아한다.
파투 : 힙합, 특히 드릴 그리고 재즈를 좋아한다. 아티스트는 래퍼 켄드릭 라마, 조이 배드애스(Joey Badass), 비욘세, 리한나, 케이팝에서는 샤이니를 좋아한다. 음악, 보컬, 춤 모두 완벽한 그룹이다. 노래 중에서는 ‘누난 너무 예뻐(Replay)’를 가장 좋아한다. 벨기에에서 멤버 종현이 세상을 떠났단 소식을 접했을 땐 울었다.
스리야 : 알앤비와 힙합이지만 대체로 핫한 스타일이면 다 좋아한다. 리한나와 엑소를 좋아하고 특히 엑소의 ‘으르렁’을 보고 케이팝 아이돌의 꿈을 품었다.
가비 : 뮤지컬 음악과 2010년대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티 페리 등 팝 음악을 좋아한다. 케이팝 아티스트는 트와이스고 노래는 ‘TT’를 가장 좋아한다.

스리야는 블랙스완에서 메인 댄서를 맡고 있다. 메인 댄서 입장에서 케이팝 최고의 댄서를 뽑는다면?
스리야 : 카이(엑소), 제이홉(방탄소년단), 호시(세븐틴), 태민(샤이니)에게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 춤추는 스타일과 느낌, 심지어 쉬는 동작까지 각기 다르다. 격한 안무에도 힙하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 가볍게 보인다. 요즘에는 태민의 안무 영상을 많이 보는데 정말 다르다. 어떻게 저렇게 출 수 있는지 모르겠다.

메인 댄서로서 자신 춤의 장단점을 뽑는다면?
스리야 : 단점으로는 춤을 추면 무릎과 허리가 아프다. 장점은 춤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그 행복한 감정과 느낌이 춤을 통해 전달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도 춤추고 싶게 만드는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메인보컬 앤비가 숙소에서 노래 부르는 영상을 봤다. 스타일도 다양하고 보컬에도 힘이 있는데 노래 부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앤비 : 호흡이다. 공기를 들이마셔서 알맞은 곳에 내보내야 한다. 클래식 음악을 예전에 배웠던 것이 기반이고 현재 가수로서도 그 시절 배움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

가비는 학창 시절 당시 케이팝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도 했다. 지금 케이팝 아이돌이 된 것에 그런 경험의 영향이 있을까?
가비 : 사실 케이팝 이전부터 노래, 연기 등 예술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괴롭힘을 당했다. 그리고 내가 학생 시절에는 같은 반 학생들에게 케이팝이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더 그랬다. 지금은 그들에게 그 당시 내가 노력했던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증명한 기분이다.

동아시아 여성의 목소리는 대부분 톤이 높고 가늘다. 따라서 케이팝 걸그룹 노래도 톤이 높은 편이며 가성도 많다. 블랙스완의 멤버들은 신체적으로 목소리 특성이 다를 텐데도 다른 걸그룹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음색인지, 프로듀서의 지시를 따른 것인지 궁금하다.
앤비 : 내 목소리가 원래도 가벼운 편이고 두성에도 익숙했다. 반면 내가 알기로 케이팝은 목소리가 가볍지만 흉성을 많이 사용한다. 보다 힘이 있게 들리기 위해서 보컬 코치와 프로듀서가 흉성 교육을 해줬다.
가비 : 나는 역으로 코치가 개성적인 음색을 찾아내기 위해 평소 많이 사용하는 흉성 대신 두성 등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보라고 조언해 줬다.
스리야 : 인도에서 클래식 음악을 잠시 배웠는데 인도는 흉성을 주로 사용해서 편했다. 케이팝은 리듬부터 다르고 단어를 딱딱 끊어내는 것도 어려웠다. 두성과 높고 힘 있는 발성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래퍼를 맡고 있는 파투는 보컬 욕심은 없나? 보컬로서 레퍼런스로 삼고 싶은 인물은?
파투 : 실제로 보컬에 관심이 있다. 요즘 ‘다음 컴백 때 보컬 파트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연습을 하고 있다. 레퍼런스로 삼고 싶은 가수는 리한나다.

멤버들의 출신 국가에서 현재 블랙스완의 인지도는 어떤 편인가?
가비 : 브라질에서 블랙스완을 아냐고 물어보면 케이팝 팬들이 멤버 이름까지는 몰라도 ‘아, 그 외국인 그룹!’하고 대답한다.
스리야 : 인도에서도 하키 월드컵 무대에도 오르는 등 점차 인기가 늘어나는 것 같다.
파투 : 벨기에 케이팝 팬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 같다.
앤비 : 미국 케이팝 팬덤 내에서도 차츰 인지도를 높여가는 중이다.

다른 친한 케이팝 그룹이나 멤버가 있나?
스리야 : 아일리원(ILY:1)의 리리카 언니와 친하다. 최근 에이디야(ADYA)에도 친구가 하나 있다. 아이리스(IRRIS)의 멤버 두 명과도 잘 지낸다. 유튜브 콘텐츠로 알게 되었다.
가비 : 라니아의 기존 멤버였던 알렉사와 조금 이야기를 나눴다.
파투 : 아직은 없다. 음악방송 가면 인사드릴 때 빼고는 대기실을 잘 안 나간다. (웃음)

그렇다면 친해지고 싶은 케이팝 가수는?
파투 : MBTI 첫 글자가 I, 즉 내향형이라 친해지기가 좀 어렵다. (웃음)
스리야 : 2003년생 동갑 친구가 조금 있으면 좋겠다.
가비 : 내 우상인 트와이스, 특히 정연과 친해지고 싶다.

다른 케이팝 그룹 노래 중에서 탐이 나는 노래도 있었을 것 같다.
파투 : 샤이니의 이번 신곡인 ‘Hard’와 ‘Juice’를 꼽고 싶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힙합 스타일이다.
앤비 : 레드벨벳의 ‘행복(Happiness)’.
스리야 : 꽤 많은데, 스트레이키즈의 ‘神메뉴’가 생각난다.
가비 : 프로미스나인의 ‘DM’.

만약 솔로 곡을 발표할 수 있다면 각자 어떤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고 싶은가?
파투 : 앞서 언급한 켄드릭 라마 스타일. 켄드릭 라마는 가사를 정말 잘 쓴다. 스토리텔링이 뛰어난 그런 래퍼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좋은 가사를 쓰기 위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파투 :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은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되는 것 같다.

파투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
파투 : 작년 9~11월이다.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벨기에 집으로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떻게 버텼나 싶은데 다 이겨낸 지금은 뿌듯하다. 개인적으로도 기분이 왔다 갔다 했고. 가수로서 느끼는 그룹의 미래도 불안했다. 나머지 멤버들의 연습 기간도 길지 않아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년 공백을 가지면서 컴백을 할 수 있을지, 무대에 다시 설 수 있을지 등에 대해 걱정했다.

과거에는 한국인 멤버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원 외국인인 데다 파투는 리더에 최연장자라 부담감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파투 : 우리 ‘애기들’이 있어서 괜찮다. (웃음) 그래도 가끔 인터뷰나 무대에 오르기 전에 부담이 있지만 내가 상대적인 경력자로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자신감이 없는 상태에서 무대에 서면 나머지 멤버들도 다 느끼니까. 항상 잘해야 한다. 생활적인 면보다는 무대와 음악에 대한 부담감이 많았던 것 같다.

블랙스완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 때와 제일 행복할 때는 언제인지 묻고 싶다.
가비 : 연습생 시절, 운동과 안무 연습 시간이 힘들었다. 브라질에서 배구선수로 활동했지만 2년 정도 공백이 있어서 그동안 근육이 다 빠졌다. 연습 후에는 근육통 때문에 아파서 울기도 했다. 행복한 시간은 팬들이 무대에 선 우리를 바라볼 때다. 멤버들도 다 같은 생각일 것이다.
스리야 : 아무래도 연습생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 왔고 더군다나 한국은 내가 처음으로 방문하는 외국이었다. 어머니의 허락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다른 나라에 있으니 부모님도 보고 싶고, 음식도 맞지 않을 때가 많았다. 매일 운동과 노래 연습도 해야 하니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나는 원래 실수하면 스스로 많이 다그치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지금은 밖에 나가서 닭갈비처럼 맛있는 음식도 먹는다.
행복했던 순간은 인도 하키 월드컵 무대에서 관객으로 부모님이 오셨을 때다.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특히 내가 살던 지역은 작은 마을이라 꿈만 같았다. 평생 내가 무대에 서기를 바라며 내 꿈을 도와주신 할아버지는 아쉽게도 그전에 돌아가셔서 무대를 못 보셨지만 부모님과 할머니 앞에서 무대를 선보이니 할아버지가 늘 함께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투 :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작년이 정말 힘들었다. 다른 멤버들처럼 우리 팬 루미나 앞에서 무대에 오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이외에도 가사를 쓰거나 음악을 만들 때도 좋다.
앤비 :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도 한국말이 어렵다. 말로 잘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도 모르는 게 많아서 표현이 쉽지 않다. 그래도 계속 열심히 할 것이다.

고향과 가족 떠나 한국에 온 블랙스완의 1차 목표인 데뷔는 달성했다. 최종적인 블랙스완으로서의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은가.
파투 : 계속해서 좋은 음악을 내는 팀이 되고 싶고 멤버들이 작곡과 작사에도 참여하면 좋겠다. 멋진 음악과 무대를 보여주는, 믿고 들을 수 있는 블랙스완이 되고 싶다.
가비 :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우리를 보면서 스스로를 발견하길 희망한다.
앤비 : 편견을 깨서 다른 그룹이 시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고 시야를 넓히는 팀으로 기억되고 싶다.
스리야 :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우리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블랙스완을 보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면 좋겠다. 우리가 했으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진행: 소승근, 장준환, 신하영, 김태훈, 한성현
정리: 한성현
사진: 박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