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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7 나의 노랑말들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일곱 번째 주인공은 엉뚱발랄한 상상력의 3인조 밴드 나의 노랑말들이다.

“난 누나의 노랫말들이 좋더라.”
“잉? 나의 노랑말들?”


베이스를 연주하는 러버맨과 보컬, 작사, 작곡을 겸하는 백노루양의 우연한 해프닝에서 출발한 그룹, 나의 노랑말들. 이들의 정체성은 백노루양의 가사, ‘누나의 노랫말들’에 있다. 밖으로 쉽게 표출할 수 없는 감정들의 일기장 < 행복회로 > 시리즈로 스스로 찌질한 노래라 규정할 만큼 키치한 매력을 발산한 이들은 차근히 작업을 이어가며 부산 인디 신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고 있었다.

듀오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보다 화려한 무대, 더욱 큰 인기를 갈구하는 이들은 올해 초 드러머 뚜드를 영입하며 3인조로 팀을 재편했고, 거처까지 인천 부평으로 옮겨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펼치고 있다. 고향 땅을 벗어나 중부의 또 다른 해양 도시로 올라온 세 청년. 홍대 인근 카페에서 열정과 현실이 공존하는 상경기를 나누며 훗날의 도약을 다짐했다.

▶ 왼쪽부터 뚜드(드럼), 백노루양(보컬, 작사, 작곡), 러버맨(베이스, 코러스 보컬)

나의 노랑말들은 어떻게 결성하게 된 팀인지.

러버맨 : 고등학생 때 부산에서 음향 스태프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 당시 노루(백노루양) 님이 행사팀으로 왔었다. 그 이후 몇 번 마주치면서 친해졌고 무대에 같이 서기도 했다. 그러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공연이 줄다 보니 그 대안으로 같이 곡을 써서 음악창작소 음반 제작 지원 사업에 신청해 보자고 제안했다. 덜컥 선정이 되면서 급히 팀을 꾸렸고 그렇게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다.

그룹의 근간이 되는 ‘누나의 노랫말들’, 작사를 비롯한 곡 작업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러버맨 : 노루 님이 써둔 가사로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려 놓으면 내가 기타랑 베이스를, 뚜드 님이 드럼을 얹으면서 악기를 배치하고 정렬한다. 그 위에 가이드 보컬이나 추가로 생각한 멜로디를 펼치면 대략적인 틀이 갖춰진 데모가 완성된다.

백노루양 : 평소에 생각나는 단어나 구절이 있으면 휴대폰에 적어놓고 적절히 조합하거나 완전히 비틀어서 만드는 편이다. 일상은 물론이고 만화에서도 영감을 많이 얻는다. 돈까지 내가면서 웹툰을 구독할 정도고 밴드 홍보를 위해서 직접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엔 바빠서 거의 못 올리고 있지만 말이다. (웃음)

그렇게 채워가고 있는 < 행복회로 > 시리즈,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음악인지.

백노루양 : 솔직히 말하면, 느낌 가는 대로 만든 곡들을 모아 발매한 시리즈라 원대한 무언가를 계획한 것은 아니다. 우리 색을 어떻게 잡아가야 할 지 고민하던 중에 초기의 ‘퉤퉤’나 ‘띠부띠부씰’과 비슷한 계열의 곡은 < 행복회로 터지는 중 >에, 조금은 어둡고 진지한 분위기를 곡들은 < 행복회로 불타는 중 >에 수록하여 두 개의 노선으로 나눠서 공개했다.

러버맨 : 팀 결성부터 첫 EP < 행복회로 돌리는 중 >까지의 과정이 매우 즉흥적이었다. 때문에 발매 당시엔 음악적인 무언가 다져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공개한 < 행복회로 터지는 중 >과 < 행복회로 불타는 중 >도 뼈대에 살을 덧대는 과도기 격의 작품에 가깝다. 처음부터 시리즈물을 기획한 건 아니다.

그래서일까,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백노루양 : 누구나 매일매일 기분이 달라지듯이 성장하면서 생각하는 것도 달라지지 않나. 나는 어떤 게 좋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금세 다른 게 좋아지는 사람인 것 같다. 어느 한 가지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계속 변하니까.

뚜드 : 소속 멤버가 아닐 때도 부산에서 알고 지내던 팀이어서 몇 번 공연을 봤었는데, ‘퉤퉤’의 가사는 정말 충격이었다. 속뜻이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단순히 외설적인 내용을 표방하는 게 아니더라. 심오한 의미 속에 기본적으로 우울한 기조가 있다. 밝은 노래를 쓰더라도 긍정보단 부정에 가까운 수식어들이 많이 등장한다. 탁한 배경에 여러 블록들을 쌓아올리는 느낌이다.

올해 초부터 정식으로 드러머 뚜드를 영입했다.

러버맨 : 둘이서 라이브 무대를 온전히 채우기 부족하다고 느꼈다. 여기에 드럼만 있어도 뭔가 더 많은 에너지를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합류를 부탁하게 됐다.

백노루양 : 둘 밖에 없었을 땐 어딜 가더라도 뭔가 기가 죽고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쪽수가 하나 더 생겨서 든든하다. 그리고 다른 밴드들처럼 여럿이서 우르르 몰려다녀보고 싶기도 했다.

3인조 재편 후 느낀 변화는.

러버맨 : 다가올 정규 앨범 작업을 하면서 느낀 건데 종전 음반들에 비해 록의 색채가 강해졌다. 기존 곡들처럼 유쾌한 기조도 유지하되 사운드는 록적인 면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싶다.

뚜드 : 러버맨이나 나나 록 사운드를 좋아하다 보니 음악 뒷부분으로 갈수록 고조되는 빌드업 구조를 더 탄탄히 이끌어 가려고 하게 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심벌 소리도 많이 들어가는 것 같다.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앨범을 꼽는다면.

백노루양 : 다프트 펑크와 고릴라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앨범 단위로 듣지는 않는다. 앞서 얘기했듯이 좋아하는 게 맨날 달라져서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듣는 편이다. 오늘은 미국 애니메이션 < 스티븐 유니버스 > OST 모음집을 들으면서 왔다.

뚜드 : 기본적으로 메탈 같은 강렬한 록이 취향에 가깝다. 밴드적으로는 미국 하드 록 그룹 얼터 브릿지의 ‘Poison in your veins’를 가장 좋아한다. 국내로 넘어오면 발라드도 굉장히 즐겨 듣는 편이다.

러버맨 : 러버맨이란 활동명은 내가 좋아하는 비틀스 < Rubber Soul >과 노엘 갤러거스 하이 플라잉 버즈 ‘River man’의 앞뒤를 합친 이름이다. 이외에도 폴 매카트니 앤 윙스의 < Band On The Run >, 그리고 메가데스의 < Rust In Peace >, 오아시스의 < Definitely Maybe > 정도를 말할 수 있겠다.

별도의 공연 없이 오직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 홈레코딩으로 제작한 솔로 앨범이 있는데 여기에도 그때그때 좋아했던 음악 취향을 녹여냈다. 첫 앨범인 < Nine Is Lucky Number >는 브릿팝이나 드림팝, 두 번째 작품 < Rubberland >는 스래시 메탈이나 하드코어 펑크의 느낌을 강하게 살렸다.

여담이지만 두 분 닉네임의 탄생 비화를 또 안 들어볼 수 없겠다.

백노루양 : 나의 경우에는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플라잉 노루’에서 따왔다. 말 그대로 날아다니면서 로켓을 쏘는 노루인데 그냥 멋있어 보였다. 그리고 노루들이 밤에 은근히 기행을 즐기는 모습 역시 어딘가 나와 닮아있는 것 같았고. (웃음)

뚜드 : 그냥 드럼을 두드리니까 ‘뚜드러’ 어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거기에서 ‘러’까지 뺀 ‘뚜드’가 입에 잘 달라붙어서 예명으로 정했다.

음악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러버맨 : 초등학교 5학년 즈음에 한 친구가 브릿팝을 소개해 줬다. 라디오헤드나 오아시스 같은 유명 팀들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찾아 들어보기 시작했고, 점점 깊이 들어가다 보니까 기타를 너무 치고 싶었다. 그래서 중학생 때 부모님을 졸라서 어쿠스틱 기타를 사게 됐고 이후에 다른 악기들과 화성학 교본을 독학으로 익히면서 지금처럼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뚜드 : 드럼 스틱을 처음 잡아본 건 대학생 때다. 동아리 가두 모집이 열렸을 때 친구가 옆에 있어 달라고만 해서 밴드 동아리 부스에 앉았는데 활발한 선배들의 입담에 넘어가 얼떨결에 신청하게 됐다. 신청서에 좋아하는 악기를 쓰는 칸이 있었고 막연히 드럼을 적어 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 밴드 래드윔프스의 드럼 소리를 좋아했는데 은연중에 떠올랐다. 그렇게 시작한 드럼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군 전역 후 아예 드럼 쪽으로 진로를 틀게 되었다.

백노루양 : 중학생 때 잠깐 플루트를 배운 것 말고는 음악과 연이 없었다. 그러다 취미로 알아봤던 밴드 활동을 하면서 재미를 붙였고 러버맨에게 미디를 배워서 음악을 직접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배움에 있어 꽤 소극적인 자세로 살아왔던 내겐 상상도 못 했었던 일이었는데 옆에서 러버맨이 알려주는 걸 조금씩 따라 하다 보니까 어떻게든 하게 되더라.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확실히 음악에 있어선 모두 독립적으로 성장한 느낌이다. 인디 뮤지션으로서 힘든 부분이 있다면.

러버맨 :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크다. 올해는 대중음악 인력 분야 지원사업 덕분에 노루 님이랑 ‘랏도의 밴드뮤직’에서 6개월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운 좋게 정기적인 수입도 생기고 정규 앨범 제작도 할 수 있게 됐는데, 이런 수혜를 못 받고 완전 독립적으로 음악을 하려고 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것 같다. 인디 신에서 계신 분들이라면 모두 공감하실 거다.

백노루양 : 게다가 음악을 하면 정기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 일한다고 공연 하나를 놓칠 때마다 우리를 알리고 인지도를 끌어올릴 수 있는 상황을 놓치는 거나 다름이 없다. 지금이야 같은 음악 분야 회사라 이해해 주지만 지원 사업이 끝난 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물론 당장 돈 많이 못 번다고 후회는 없다. 음악 하는 죄로 돈을 못 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이런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소통 창구를 다각적으로 활용 중이다. 특히 매주 일요일마다 인디음악 플랫폼 ‘랏밴뮤’에서 진행하는 라디오 < 무지개 같은 선데이 나이트 >가 꽤 인기를 끌고 있다.

러버맨 : 이 역시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참여하게 된 경우다. 당시 랏밴뮤에서 지역 아티스트들을 모셔서 라디오 겸 라이브를 꾸미는 프로젝트 < 이상고온현상 >을 진행했었다. 그때 일일 DJ로 참여하며 연이 닿았다가 감사하게도 10월 즈음에 정규 DJ 제안을 주셔서 거의 1년 가까이 매주 일요일 밤 2시간을 책임지고 있다.

라디오 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러버맨 : 라디오도 라디오지만 플랫폼의 매력이 더 큰 것 같다. 랏밴뮤 청취자 중에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대중 사이에서 하위문화를 얘기하면 반응이 없을 수 있지만 그런 흐름에 익숙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어서 그런지 단합력이 매우 좋다.

뚜드 : 청취자 입장에서 볼 때 채팅 쳐주시는 분들이 밈을 굉장히 좋아한다. 매주 밈이 하나씩 생성되고 그게 쌓이니까 방송이 더 재밌어지는 것 같다. 직접 출연할 때도 이런 부분을 알고 참여해서 더욱 시너지가 난다.

백노루양 : 시답지 않은 헛소리도 유쾌하게 받아주는 친구들이랑 노는 기분이다. 잘게 쪼개진 나의 디지털 친구들. (웃음) 이제 벽이 사라져서 청취자분들이랑 채팅으로 서로 놀리고 그런다.

부산에서 활동하다 인천 부평으로 올라오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러버맨 : 작년 6월에 마포문화재단에서 진행한 인디음악 프로젝트 < 2021 인디열전 >에 출연했는데 그 이후에 부산보다 서울에서 자잘 자잘 한 접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오고 갈 때마다 시간과 경비가 많이 소모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거점을 옮겨서 활동을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인천 외에도 주변 도시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부평을 택한 이유는.

러버맨 : 우선 주요 공연 거점이나 랏밴뮤 사무실까지 이동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경제적인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도 중요했다. 서울은 너무 비싸다 보니까 그 주위로 찾아보게 되었고 음악 관련 지원이 많다고 느껴진 문화도시 부평으로 터를 옮기게 됐다. 실제로 곧 열릴 예정인 공연 < 페스티벌 륙 >도 인천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공연이다.

확실히 공연 횟수가 늘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백노루양 : 공연 때 노란색 옷이나 말 가면을 맞춰 입고 오시는 분들도 있다. 직접 슬로건을 제작해서 펼쳐주는 등 팬분들이 이벤트 준비도 많이 해주셨는데 그때마다 음악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뚜드 : 아무래도 팀 합류 이후에 처음으로 참여했던 공연이 제일 인상 깊다. 새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리는 일환으로 무대에 나올 때 포승줄에 묶여 백노루양에게 이끌려 나왔었다. (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러버맨 : 예정되어 있는 공연들을 소화하면서 다가올 정규 앨범 < 행복회로 고치는 중 > 작업에 힘을 쏟게 될 것 같다. 종전의 음악들과 상이한 부분도 있고 그만큼 가능성이 확장된 느낌을 많이 받아서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

러버맨 : 원래는 스타덤에 올라서 인기몰이를 하고 싶기도 했는데 라디오를 하면서 그런 욕심이 오히려 사라졌다. 지금 같은 생활을 오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백노루양 : 나는 여전히 스타가 되고 싶다. 음악으로 들어오는 돈이 개인당 한 달에 이백만 원만 됐으면 좋겠다. (웃음) 그리고 무엇보다 아프지 말고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다 가고 싶다.

뚜드 : 음악적인 활동으로 일정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만큼 행복한 게 있을까.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삶까지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인데 나도 그 축복을 받아보길 꿈꾼다.

진행: 정다열, 장준환, 정수민
정리: 정다열
사진: 정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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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5 오헬렌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다섯 번째 주인공은 시각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싱어송라이터 오헬렌이다.

부평문화재단의 지역 뮤지션 지원 사업 뮤즈컴 1기로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오헬렌은 개성 넘치는 가창과 사운드가 특징이지만 ‘가족들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곡도 꿈꾼다. 고유한 스타일과 보편성을 붙잡는다는 미션 앞에서도 미지의 영역에 대한 걱정보단 또 다른 여행을 준비하는 설렘이 커 보였다. 순간과 감정으로부터 영감을 얻는다는 그의 음악은 일상적 소재를 독특한 시선으로 이미지화한다. 후속작 작업과 단독 공연, 8월에 열리는 페스티벌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는 오헬렌의 하루를 잠시 빌려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안녕하세요, 오헬렌이라고 합니다. 어쿠스틱 곡으로 시작해서 점점 더 다양한 사운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만학도였는데 공부를 또 열심히 하지 않았다. 5학기 때쯤이었나. 동기가 밴드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때 퍼커션을 배우다가 홍대 놀이터에서 드럼 써클을 하곤 했다. 그때 만난 친구들과 처음으로 밴드를 했다.

오헬렌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할 수 있는 만큼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끝말잇기 하듯, 여러 기억의 조각들과 소리의 파편들을 이어 붙인다.

대학교 때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경력이 꽤 쌓였는데.
중간에 쉬는 기간이 무척 길었다. 뭔가를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를 찾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교하는 걸 싫어하지만 돌이켜보면 늘 남보다 느렸다.

따지고 보면 정식 데뷔가 조금 늦은 편이다.
데뷔라는 말이 조금은 거창한데 맞다. 느리게 가는 걸 좋아한다. 언젠가는 나만의 산봉우리에 올라가 있을 걸 아니까 그것이 낮든 높든 내 속도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요즘 더 많이 하게 된다. 조급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애를 쓰고 고민하고 밤을 지새워도 지금 당장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시간이라는 파도가 나를 해안가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잘 마모된 작은 돌멩이로. 지금도 항상 내가 가진 것보다 부족함을 많이 느끼고 그래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게으름이 적이다. 내가 주적이다 (웃음)

창법이 굉장히 독특하다. 툭툭 끊어지는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잘 이어지는 흐름이 보컬을 하나의 악기처럼 사용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내게 영감을 준 다양한 뮤지션의 창법이 녹아든 것 같다. 민요와 판소리, 아프리카, 브라질 음악도 좋아했고 랩, 힙합, 팝 장르 가리지 않고 듣는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돌려 들으며 까무러치게 놀라기도도 했고, 평범하게 컸다. 스스로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자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의 나를 기록하려고 노력한다.

여러가지 요소를 생각을 풀어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꼭 잘해야 하고 잘 갖춰진 상태에서만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더 깊은 곳에 닿으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점도 분명히 있지만, 내가 가지고 태어난 재료와 지금 내 손에 쥐어진 물감으로도 충분히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새 싱글 ‘수영장’을 재미있게 들었다. 오헬렌의 음악을 들으면 소재를 잡는 능력과 이를 시각화하는 능력이 돋보이는 것 같은데.
‘수영장’은 거의 10년 전에 스케치해 놓았던 곡인데 요즘 함께 작업하는 드러머 겸 프로듀서 조성준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든든한 지원군이자 동료다. 방향을 제시하고 않고 내가 움직이도록 만들어주고 내가 보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을 잘 끌어준다.내가 나를 믿도록 한다. 조성준 덕분에 ‘lookatmysweat’, ‘How beautiful’이라는 곡도 세상에 나왔다.

굉장히 다양한 악기가 사용되다 보니 대규모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가 떠오른다.
처음 발매한 EP앨범 <OH> 에서 다양한 퍼커션 악기들을 사용했다. 리듬악기들을 좋아하는데 한동안 잊고 있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예전의 나와 조우해보는 작업을 해봐야겠다. 다른 얘기로 보컬과 타악기만으로 된 미니멀한 구성은 지금도 좋아한다. ‘Don’t I Know (drift)’라는 곡도 드럼과 보컬만으로 구성된 곡인데, 죽음을 목격한 이의 얼굴에서 나와 같은 표정을 발견하고 나와 그 사람에 대한 위로를 담은 곡이다.

곡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지.
살면서 조우하는 그 순간 순간의 감정이다. 어느 때는 폭발할 듯이 밀려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큰 변화 없을 정적인 화면, 오래 두고 보지 않을 순간들을 붙잡아 채집해서 저장하는 작업이다. 기억채집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파도처럼 휩쓰는 감정들을 조금은 덜어내고 거리 두고 볼 수 있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이렇게 말했지만 내일 또 꿀렁일 수도 있다.

사운드 시각화의 경우, 어떤 작업을 예로 들 수 있을까.
최근에 단편영화 음악을 작업했고 가사가 없는 음악을 만드는 재미를 느꼈다. 색이나 물감처럼 사운드라는 재료로 그림을 그리듯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만들었다. 영화음악을 위한 장비를 다 갖춘 상태는 아니라 아주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진행했지만, 이 또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만 정식 사운드트랙으로 발매되지 않은 스코어는 저작권 인정이 안 된다는 점은 아쉬웠다.

부평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싱글 < lookatmysweat >을 제작했는데.
나처럼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뮤지션들은 앨범을 내고 활동하는 데 있어 국가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음악지원사업이 큰 도움이 된다. 부평문화재단의 사업 공고를 보고 지원하게 되었다. 덕분에 좋은 음악 동료를 만났고 ‘lookatmysweat’ 이라는 곡에서 하고 싶었던 랩도 했다. 더블 싱글로 함께 발매한 ‘How beautiful’도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린다. ‘내 땀 좀 볼래? 얼마나 아름답니?’ 라는 질문과 답이다 (웃음) 이런 좋은 취지의 지원 사업이 앞으로도 쭉쭉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리애스컴의 컴필레이션 앨범에서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커버했다.
뮤즈컴(MUSCOM) 지원 프로그램 세부 내용 중에 리애스컴 음원 발매도 있었다. 이 곡은 피처링으로만 참여했다. (만약 직접 참여했다면 어떤 스타일의 곡이 나왔을 것 같은지) 멜로디나 가사를 조금씩 바꿔봤을 것 같다. 좀 더 미니멀한 사운드에 색다른 서사가 추가되지 않았을까 싶다.

작업을 하다 답답해지면 인천 아라뱃길 산책을 한다고 들었다.
근처에 친구가 살고 있어 종종 자전거를 타고 서로의 중간지점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수다를 떤다. 규칙적인 일상을 무한히 반복하는 어쩌면 밋밋하게 보일 수 있는 삶을 좋아한다. 몸과 마음은 하나라서 둘 다 건강해야 하는데 올해는 꼭 건강검진을 받아야겠다.

현재 거주하면서 느끼는 인천이라는 지역은 어떤 느낌인지.
인천도 바다를 끼고 있다 보니 고향인 구룡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로 갈 텐가 산으로 갈 텐가 정하라면 늘 산이라고 대답하곤 했는데 막상 바다 근처만 찾아다니며 터전을 잡는 느낌이다. 실은 물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최근 신포시장 근처 동인천역 쪽에 작업실이 생겼다.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에서 인천의 매력을 탐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렌다.

앞으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음악 장르가 있을까.
조카들이 따라 부르는 노래를 쓰고 싶다. 신나게 부르다가 ‘아니 이게 이모 노래야?’ 라고 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오늘도 곡을 쓴다.

정규 앨범 계획이 있을까.
정규 앨범도 내야 하는데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웃음) 초겨울 아니면 늦가을쯤에 네 곡가량의 EP를 발매할 예정인데 이 작업도 절대 만만치 않더라. 정규 앨범을 지속해서 작업하는 뮤지션들이 대단한 것 같다. 그런데 계속 목적지를 바라보고 있으면 언젠가는 가까워져 있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작업하려고 한다. 꾸준히 작업하고 싶다.

아티스트 오헬렌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팔 할이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앞으로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팬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다면.
그동안 변화된 모습을 잘 정돈해서 어떤 면은 자연스럽게 또 어떤 면은 흐트러진 채로 내 음악을 기다려온 그리고 처음으로 만날 미래의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앞으로는 무대를 통해 자주 만나 뵐 수 있으면 좋겠다.

인터뷰 : 장준환, 정다열, 염동교
정리 : 장준환, 염동교
사진/편집 : 최윤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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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2 강혜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두 번째 주인공은 K팝 아이돌과 트로트를 아우르는 뮤지션 강혜연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 내일은 미스트롯 >의 등장은 기성세대 위주의 트로트 신에 젊음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송가인, 임영웅을 비롯한 수많은 차세대 주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팬덤 문화가 형성된 덕분에 주요 음악 차트의 상위권에서도 트로트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긍정적 성과와 달리 대부분의 젊은 층은 여전히 트로트를 즐겨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 장르의 현주소를 받아들이고 세대 간극을 좁히기 위해 힘쓰는 이가 있다. 걸그룹 이엑스아이디(EXID)의 초기 멤버이자 베스티(BESTie)의 리더로 활약한 강혜연은 아이돌 활동을 마친 2018년 ‘왔다야’를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 변신을 꾀했다. 급격한 노선 변경이었지만 트로트를 향한 진심 하나로 시장이 필요로 하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잡아 나갔고 < 미스트롯 2 >를 기점으로 그 노력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아이돌과 트로트, 양분화된 두 흐름 사이를 넘나들었던 10여 년의 시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푸르른 여름의 기운을 몰고 나타난 강혜연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그의 음악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작년 정규 1집 < 선데이혜연 > 발매 이후 별다른 음악 행보는 없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 미스트롯 2 > 종영 이후 < 화요일은 밤이 좋아 >, < 6시 내고향 >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물론 음악 작업 또한 늘 생각하고 있다. 다만 아직 어떤 스타일의 곡을 내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 완성도를 위해서라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방송 출연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내가 트로트 한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많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케줄도 많아졌다. 그전까지는 고정 일정이 별로 없어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외가인 제주도에도 종종 다녀오고 했었는데 지금은 따로 시간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보내주시는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 미스트롯 2 >에는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는지.

사실 시즌 1 때 연락이 오긴 했었다. 근데 그때는 트로트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트로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나가봤자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에 시즌 2를 하게 된다면 나가겠다고 얘기를 했고 그전까지 트로트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준비하는 동안 국악도 배웠다고 들었다.

세미 트로트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통 창법을 익히기 위해서 민요를 한 2~3개월 정도 배웠었다. 하지만 원래 국악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가 성대 결절 조짐이 보였다. 프로그램 참가 대비는 물론이고 가수 생활도 계속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됐다.

기존에 익혔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정신없이 외우기 바빠서 뭐가 부족한지 느낄 새도 없었다. (웃음) 음계가 적힌 악보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편할 텐데 민요에선 선생님이 불러 주시는 멜로디와 리듬을 따라 하고 그걸 녹음해서 집에서 연습하는 게 최선이었다. 새삼 국악 하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 미스트롯 2 > 자기소개 당시 “아이돌 꼬리표는 싫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아이돌 출신 자체를 부정한 건 절대 아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방송 적응이 빨랐고 무대 매너도 금방 습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돌 활동이 큰 도움이 됐다. 다만 아이돌을 하다가 트로트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트로트만 좋아하시던 팬분들께서 경계를 많이 하셨다. 단순히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 때문에 트로트를 향한 내 진심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아이돌 연습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처음부터 아이돌을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발라드나 알앤비를 즐겨 들었기 때문에 마야, 임정희, 다비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심지어 춤도 아예 출 줄 몰랐던 몸치라서 아이돌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브라운아이드걸스 회사에서 연습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어 경험 삼아 한번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이 됐다. 대학보다 연습생 쪽으로 운이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연습생을 하면서도 입시 도전을 계속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연습생 트레이닝과 입시 준비가 결이 다르다 보니 꾸준히 문을 두들겼음에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4수 정도 한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항상 대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환상이 있었기 때문에, 휴학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학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룹 활동 중에도 종종 트로트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목회에서 어른분들이 ‘찰랑찰랑’이나 ‘남행열차’ 같은 노래를 부르시니까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 때 선생님께 장윤정 선배님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마침 ‘어머나’, ‘짠짜라’ 같은 곡들이 한창 대박을 터트리던 시기라서 자주 듣고 따라 불렀다. 기본적으로 트로트란 장르에 대해 친근감이나 애정이 어느 정도 있었다.

베스티 활동 당시에도 대표님이 내가 트로트 좋아하는 걸 아니까 엠넷에서 방영한 < 트로트 엑스 >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다. 그때부터 트로트를 많이 듣고 전문적인 레슨까지 받았었는데 알려주신 선생님께서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트로트 가수를 해보라고 하셨다. 실제로 받아 놓았던 곡들도 꽤 있었지만 회사 재정 문제로 앨범 제작은 무산되었다.

아이돌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사실 첫 팀이었던 이엑스아이디(EXID)에서 나오고 옮겼던 소속사 이사님께서도 트로트 솔로를 먼저 권유하셨다. 그런데 엄마랑 상의해 보면서 트로트는 나이가 들어서 해도 괜찮으니까 아이돌 활동을 더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고, 그렇게 재데뷔 하게 된 팀이 베스티였다.

활동을 이어가다가 베스티 계약도 생각보다 일찍 만료되고 나니 당장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혼자 음악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작곡도 배워보며 유튜브 개인 채널에 영상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는데, 지금 대표님께서 갑자기 연락을 주셨다. 베스티 때 라디오에 나가서 불렀던 트로트 커버 영상을 보고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계셨다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지금의 길로 잘 넘어올 수 있었다.

아이돌과 트로트 가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돌 때는 멤버들이 있어서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지만, 트로트는 혼자 모든 걸 이끌어야 하고 관객과의 소통도 온전히 내 몫이다. 물론 잘하면 내가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런 부담감 자체가 상당히 컸다. 그전에는 무대에서 긴장해 본 적이 없었는데 트로트 가수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땐 마이크가 덜덜 흔들릴 정도로 매우 떨렸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데뷔 직후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한 1년 동안 < 가요무대 >에 나가며 트로트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지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싶었는데 이 때 코로나가 터져서 뭘 할 수도 없었다. 행사도 못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유튜브에 트로트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 미스트롯 2 > 전에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트로트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선배들의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하게 된다. 원곡의 느낌을 살리려고 하는지 아니면 본인만의 스타일로 바꿔 부르는 편인지.

기존 트로트 팬층들은 보통 옛 노래를 그대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 가요무대 > 같은 프로그램의 PD님들은 오히려 나의 상큼하고 통통 튀는 모습을 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왜 내게 이런 곡을 추천하셨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다른 출연진의 스타일을 보고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과 소리가 필요했고, 그 후로는 선배님들의 무대를 마냥 따라 하기보단 나만의 장점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렇다면 트로트 가수 강혜연의 장단점은.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이 중요한 아이돌을 겪어봤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대 위 표정이나 동작은 기존 트로트 가수분들보다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소리 면에서 약점이 존재한다. 트로트를 오래 한 분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울림이 얕고, 다양하고 섬세함을 요구하는 기교 자체도 부족하다. 그래도 부단히 노력하면 자연스레 채워 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한창 브레이브걸스가 역주행으로 시끌벅적했을 때 유정 씨가 절친한 가수로 강혜연 씨를 언급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

KBS에서 방영한 아이돌 회생 프로그램 < 더 유닛 >에 같이 출연하면서 알게 됐다. 당시에 성격도 비슷하고 서로의 아픔을 너무 잘 아니까 금방 친해졌다.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자주 만나서 각자의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눴고,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그렇게 방황의 시기를 겪고 있다가 나는 < 미스트롯 2 >에 나가서 잘 풀리기 시작했고 브레이브걸스도 딱 그때 역주행을 하며 부활했다.

‘척하면 척’의 작곡을 맡은 투챔프랑 연이 닿은 것도 혹시 유정 덕분인지.

맞다. 사실 ‘척하면 척’은 투챔프와 함께 작곡에 참여한 내 남동생 디웨일의 노래이기도 하다. 동생이 작곡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유정이가 투챔프 오빠들과 연결을 시켜줬고 서로 음악적인 합이 잘 맞았는지 팀을 만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포인트나 어울리는 스타일도 잘 알아서 앞으로도 작업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반 대중가요 같은 느낌도 든다.

한동안 대중가요를 안 듣고 트로트만 들어서 그런지 처음 들었을 땐 확실히 낯설었다. 기존 트로트 곡들은 어른들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쉬운 편인데 ‘척하면 척’은 아이돌 음악처럼 리듬감도 넘치고 가사도 많아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단순한 방향으로 수정을 요청하려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서 그대로 가기로 했다.

물론 ‘트로트’라는 명칭과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즐겨듣지 않는다. 요즘 차트에 트로트도 많이 올라와 있어서 길거리에서도 간간이 트로트가 들려오는데 대부분 바로 넘기거나 플레이리스트에서 제외해버린다. 앞으로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세련된 트로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나서 해보고 싶은 음악 스타일이나 장르가 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발라드를 해보고 싶다. 특히 7080 시대를 겪은 어른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옛날 감성의 발라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포크도 해보고 싶다. 옛날에 많이 즐겨 듣기도 했고 베스티 때 기타를 독학으로 배워서 김광석 선배님의 곡들을 많이 연습했을 정도로 잔잔한 음악에 관심이 있다.

고향이 인천이다. 쭉 인천에서 살아온 만큼 인천에 얽힌 추억도 많을 것 같다.

예전에 살던 용현동 집이 인하대학교 후문이랑 가까워서 매년 학교 축제에 놀러 가곤 했었다. 2002년엔 초대 가수로 마야 선배님이 오셨는데,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발적인 가창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원래도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지만 그 무대를 보고 나서 나도 저런 멋있는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실용음악 학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꿈을 키워 나갔다.

무대에 서는 걸 워낙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에 지역 가요제를 정말 많이 나갔었다. 한창 다닐 때는 하루에 2개도 참가해 봤을 정도였다. 부평 청소년 가요제에서 상을 탔었고 화도진 청소년 가요제에서도 입상해서 신포 문화의 거리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받기도 했었다.

동생도 음악인의 길로 빠졌다. 집안에 음악 DNA가 흐르는 건가.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 아빠는 음악 듣는 건 정말 좋아해도 완전 음치에 박치다. (웃음) 다른 건 모르겠지만 피아노나 기타 같은 악기를 배우는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대신 춤만큼은 익히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바로 허락하셨는지.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지지해 주신 반면 아빠는 처음에 많이 반대했다. PD인 삼촌 친구분에게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으셔서 그런지, 방송 연예인보다는 뮤지컬 배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는 가수가 되길 바라셨다. 심지어 아이돌을 한창 하고 있을 때도 관두고 딴 거 해도 된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그래도 트로트 하고 나서부터는 유명해지고 용돈도 챙겨드려서 지금은 자랑을 하고 다니실 정도로 좋아하신다. (웃음)


확실히 수입이 늘어나긴 했는지.

늘었다기보단 생겼다고 하는 게 맞다. 가수로 데뷔하고 9년 동안 한 번도 정산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이돌은 TV에 자주 나오고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다 보니까 잘 버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은데 현실은 그게 아니다. 주변에선 직장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아서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돈을 타서 쓰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 미스트롯 2 >가 끝난 그해 가을에 처음으로 정산금이 들어왔다. 이제 내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가수 생활 중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강혜연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음악적인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한다. 아마 그 중심엔 기존 트로트의 질감을 계승하면서도 대중가요의 트렌드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세미 트로트’가 있을 것 같다. 장윤정, 홍진영 선배님의 뒤를 잇는 세미 트로트의 다음 주자는 물론이고, 아이돌 출신 트로트 가수의 선두에서 보다 더 젊은 후배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진행: 소승근, 장준환, 정다열
사진: 정다열
정리: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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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장호일 인터뷰

그룹 공일오비는 톡 쏘는 가사와 진보적인 사운드가 떠오르는 1990년대 X세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룹의 전신은 ‘그대에게’의 무한궤도로 신해철을 제외한 조형곤, 조현찬이 1990년에 데뷔한 공일오비에게 흡수되었으나 대중에겐 장호일과 정석원, 듀엣 포맷의 잔상이 강하다. 음악적 두뇌인 동생 정석원이 은둔자였다면 형 장호일은 연예인적 끼가 넘치는 인물로 두 사람의 묘한 시너지가 그룹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장호일 하면 동시다발적으로 공일오비가 떠오르지만, 이외의 경력도 다채롭다. 공일오비 이전의 첫 시작이었던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와 신성우와 함께한 프로젝트 밴드 지니 등 음악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최근엔 솔로 1집 < Retro >에 수록되어 있던 주곡 ‘Aneka’를 재발매했고, 장호일밴드를 결성했다.

하우스와 일레트로니카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공일오비지만, 장호일의 DNA엔 헤비메탈이 흐르고 특히 딥 퍼플과 밴 헤일런에 강한 자극을 받았다. 기타 연주가의 축제 < 골든기타핑거 기타페스티벌 >에 첫회부터 내리 5회 연속 참여할 정도로 기타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그는 기타만큼은 절대 질리지 않는다고 했다.

여전히 공일오비의 장호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근황은 어떠한가요.

요즘 저희가 윤종신의 < 월간 윤종신 >처럼 월간 싱글을 내고 있습니다. 곡마다 객원 가수를 선별하는 체계죠. 정석원은 그룹의 안 살림을 도맡는 메인 프로듀서 역할이고 저는 예전부터 그랬지만 팀의 대변인 역할들 하며 공연 및 방송을 도맡고 있습니다. 코로나19 떄때 급격히 줄어들었던 공연을 슬슬 다시 시작하게 될 것 같네요.

코로나가 완전히 해제된 건 아니지만 거리두기가 완화되었는데 공연 계획을 잡고 있나요? 라인업이나 공연 진행 방식도 궁금합니다.

당장의 단독 공연은 계획에 없지만 각 지방의 문화센터 등 다른 공연들은 많이 잡혀 있습니다. 따로 준비한다기보다는 상황에 맞춰서 공연하게 될 것 같습니다. 밴드 이젠(EZEN) 당시 보컬이었던 헥스와 하고 정석원은 단독 공연에만 출연합니다.

정석원과 친동생인데 왠지 모르게 공식적으로,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거리감이 있어 보입니다.

정서적으로는 거리감은 전혀 없습니다. 워낙 팀을 오래 해오다보니 화해의 과정에서 생긴 규칙 혹은 묵계가 딱 정해져 있고, 그 선은 안 넘어가기 때문에 아마 그렇게 느끼실 것 같습니다.

혹시 그 묵계 중에 하나만 공개해주신다면?

음악에 대한 전권은 정석원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가끔 기타 연주를 요청하거나 ‘이 곡 모니터링 한번 해줘’해줘’라고할 때는 제 의견을 얘기하얘기하지만, 일반적으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음악과 예술적인 측면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군요.

간섭하지 않는 거죠. 대신에 공일오비가 바깥으로 공연하러 다니거나 외부 활동을 할 때도 정석원이 전혀 관여하지 않습니다. 딱 선이 정해져 있어요. 그래도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인생의 파트너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형은 외부로, 그다음에 동생은 내부로 딱 나눠지는군요. 그래도 정석원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원래 정석원과 공일오비의 베이시스트 조형곤이 방송과 외부 활동을 기피하는 아웃사이더적인 성격이고 공일오비 당시에 단독 공연도 몇 번 안 했습니다. 그래서 정석원은 프로듀싱만 하고 외부 활동은 제가 하겠다고 공언한 거죠.

드물긴 하지만 단독공연을 하면 정석원이 나오기 때문에 팬들이 반가워합니다. 단독 공연과 행사성 공연과의 차별화라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는 헥스가 보컬을 맡지만, 지방에 다닐 때는 가끔 원년 객원 가수 중 한 명인 이장우가 동행해서 향수를 채우기도 합니다.

*이장우: 공일오비 2집 < Second Episode >의 수록곡 ‘떠나간 후에’에 참여한 객원 가수.

< 장호일 음악 인생의 세 가지 순간 >

장호일의 음악 인생에 가장 결정적이었던 세 가지 모멘트가 있었다면, 언제입니까?

공일오비의 결성입니다. 결성 당시엔 동아리 모임처럼 기념만 하고 흩어지는 일회성 프로젝트로 여겼거든요. 저희가 프로 뮤지션이 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는데 이렇게 30년을 넘게 음악을 하다니 운명인가 봅니다.

사실 동물원 같은 팀엔 대학생들의 풋풋한 느낌과 아마추어리즘이 있었는데 공일오비의 음악은 그렇게 아마추어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시 출현한 악기의 영향이 큽니다. 2집 때는 시퀀서가 등장하고 저희가 30대쯤 되면 샘플러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 리얼 밴드로만 녹음한 1집은 저희가 들어도 어설플 수밖에 없었지만, 미디가 나오면서 프로그램으로 기본적인 틀을 잡고 가니 연주의 빈틈을 보완할 수 있었죠.

*시퀀서: 연주 데이터를 재생하여 자동 연주하는 프로그램 장비
샘플러: 음을 디지털화하거나 저장하며, 그 음을 소리 신호로 바꾸는 장비.

2집에서 시퀀서가 등장하면서 프로그래밍과 리얼 밴드가 공존하는 상황이 되었군요.

사실은 모든 앨범에 걸쳐 공존을 하죠. 기본 틀을 미디로 설계하고 그 위에 건반이나 색소폰 같은 실제 악기들이 같이 더해지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음악 스타일이 이미지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요즘 레트로가 유행인 것과 달리 당시에는 디지털이 트렌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죠. 대학생 오빠들이 최첨단 미디 프로그램으로 찍은 음악에서 미국 음악에서나 듣던 톤 메이킹과 편곡이 나오니까 요즘 말로 ‘너무 힙한 거 아니야?’ 약간 이런 느낌을 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순간은?

음악에 대한 마인드가 바뀐 카투사 시절입니다. 당시 국내 대중음악계엔 ‘이건 안되고 저건 되’라는 자기들만의 이상한 법칙이 있었고 그게 창의성을 저해했습니다. 미군들과 연주하며 ‘이렇게 하면 왜안되?’ 라는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미군들하고 밴드를 같이 했던 건데 거기서 얻은 건 무엇입니까?

음악에는 틀이 없다는 걸 배웠고 늘 관습에 반기를 들었던 공일오비의 음악적 마인드와도 통하는 지점입니다. 한 가지 특별한 기억이 있습니다. 흑인 친구가 펑키(Funky)한 키보드 치는데 거 너무 잘 치더라구요. 연주에 감동 받아 몇 년이나 쳤냐고 물어보니 일주일이라고 답하더군요. 타고난 리듬감으로 소리를 느껴가며 연주하는 거죠.이후에 ‘음악은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느끼는 대로 하는 게 음악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모멘트는 무엇인가요.

1999년 말 장호일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1집 < Retro >를 냈던 것입니다. 직접 노래를 부르는 것의 어려움을 비롯해 벽을 많이 느꼈습니다.

장호일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마음가짐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차피 가야 할 길이 아니냐는 생각을 좀 했었어요. 이미 그전에 신성우와 지니를 조직한 경험도 있고, 대부분의 밴드가 영원히 함께 가기엔 쉽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혼자 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컬 능력의 부족을 느끼며 차라리 방송이나 아니면 연기 쪽으로 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1집 외에도 솔로 앨범 몇 장 내셨나요?

제 명의로 된 솔로 앨범은 1999년에 나온 1집 < Retro > 한 장입니다. 공일오비 때 각 멤버가 한 장씩 솔로 앨범을 냈고 저는 < Kloma >를 발표했는데 정확하게 장호일 이름을 걸고 발매한 것은 그 한 장이에요.

< 객원 가수 체제의 배경 >

공일오비의 두 축 정석원과 장호일은 정통 보컬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석원 씨 같은 경우는 아마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같은 경우를 보고 음악에 대한 희망을 얻었을까요?

그것은 아까 얘기했던 ‘Why not?’ 정신과 통합니다. 내가 노래를 못하는데 음악을 해야 하겠고, 작곡에는 자신이 있다면 말씀하신 대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라든지, 아니면 이레이저(Erasure)처럼 멤버가 2명인데 프로듀싱만 하는 그런 모양새를 그대로 저희가 닮아간 거죠.

객원 가수의 아이디어는 정석원이, 아니면 장호일이 제시했나요?

아무래도 정석원 씨 같습니다. 그는 무한궤도 정식 멤버였고 저는 초기엔 세션 멤버에 가까웠기 때문에 발언 기회가 적었습니다.

결국 공일오비는 정석원의 음악과 장호일의 퍼스널리티가 융화되는 팀이라고 볼 수 있는데, 지금 돌이켜 봤을 때 강조하고 싶은 장호일의 공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일오비의 미싱 링크(전체를 이해하거나 완성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장호일이 없었으면 공일오비도 그저 음악 잘하는 여러 팀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장호일이라는 멤버가 들어오면서 아이돌 적인 특성을 부여했기 때문에 음악성 중심의 팀들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준 것 같아요. 약간 날라리 오빠들 같은 모습을 좋아해 주신 것 같습니다.

< 기타를 잡게된 계기 >

두 형제는 계산된 음악, 머리로 하는 음악 같지는 않았고 약간 몸적인 음악을 한 것 같아요. 음악을 오랫동안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데, 음악을 향한 관심이 형성되었을 어린 시절 풍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잠깐 피아노를 배우다가 접었는데 대타로 간 정석원 씨가 재능을 발견한 거죠. 어차피 전공할 건 아니니까 당시 유행이었던 팝 피아노를 몇 개월 배우다가 선생님께서 더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쯤에 록 음악에 눈을 뜨게 되었고 기타라는 악기에 푹 빠졌습니다. 대구 MBC에 계셨던 아버님의 엘피를 통해 음악을 쉽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제 인생이 이제 바뀌게 되는 순간은 딥 퍼플의 베스트 앨범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을 들었을 때입니다. 딥 퍼플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은 앨범인데 첫 곡에 ‘Highway star’가 나왔어요. 곡 중간 전설의 기타 솔로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그렇게 기타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월간 팝송을 읽고 딥 퍼플과 레드 제플린이라는 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타를 쳐야 하겠다 결심하게 된 순간인 거죠.

*월간팝송: 1971년 창간한 국내 최초 팝 음악 잡지

그렇게 기타 연습을 시작하셨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어를 번역해 놓은 엉터리 타브 악보로 기타를 배웠습니다. 일렉트릭 기타가 주요 악기인 록을 보고, 용돈 받아서 기타도 사면서 점점 기타에 빠져들게 된 거죠. 그렇게 정석원과 다른 길을 가게 된 거예요.

음악을 평생 직업으로 삼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카투사 복무를 마치고 그는 나라기획이라는 광고 회사에 몸담기도 했다.) 무한궤도에서 다른 밴드가 파생되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함께하게 되었고 정신 차려보니까 어느덧 공일오비의 30주년이 되었습니다.

무한궤도와의 인연은 어떻게 되나요?

제대하고 나니 정석원은 무한궤도에 들어가 있었고 신해철도 집에도 자주 놀러 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제 라이브 세션으로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신해철이 기타를 쳤지만, 라이브 할 때는 노래를 해야하니 기타 세션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 장호일이 뽑는 공일오비 베스트 5 >

7집 정규 앨범 < Lucky 7 >까지 했으니까 일곱 장에 다 참여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서 장호일이 꼽는 공일오비 베스트 다섯 곡은 무엇입니까?

1. 텅 빈 거리에서

그 곡이 없었으면 지금의 공일오비도 없었을 겁니다. 밴드 역사의 시작점이라서 지금도 연주할 때마다 가슴이 약간 짠한 느낌이 있어요. 원래 타이틀 곡도 아니었고 노래를 한 윤종신도 다른 곡들의 녹음을 마치고 마지막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초판에는 아마 B면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가 인기에 힘입어 나중에 나온 판들에는 타이틀로 올라옵니다. 9개월~10개월가량 역주행한 곡이라 어떻게 보면 팔자를 스스로 개척한 곡이라고도 할 수도 있습니다.

‘텅 빈 거리에서’는 공일오비가 일회성 프로젝트라는 느낌을 사라지게 했죠. ‘이젠 안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2. 이젠 안녕

그래서 노래도 팔자가 있다고 합니다. 정규 2집 < Second Episode >에 들어있는 ‘이젠 안녕’도 알아서 잘 팔자를 개척했는데 원래 이게 제목 그대로 밴드 활동에 작별을 고하는 노래였습니다. 정규 1집 < 공·일·오·비 >를 내고 멤버들이 흩어졌다가 앨범이 잘 팔리는 바람에 사장님의 부름을 받고 낸 2집이거든요. 우리는 각자 취직하고 복학해야 하니 그래 여기까지 ‘이젠 안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노래 인기가 높아져 한동안 노래방 보너스 타임의 단골이 되고 이제는 졸업식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습니다.

이게 왜 졸업 노래가 됐나를 유래를 좀 살펴보니까 저희 팬 중 선생님이 되신 분들께서 졸업 노래로 ‘이젠 안녕’을 골랐고 그게 마치 구전 가요처럼 퍼지고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3.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애증의 곡입니다. 유재학 대영 AV 사장님께서는 소속 뮤지션들에 큰 간섭은 안 하셨는데 이 곡만큼은 ‘랩을 해보자’라고 제안하셨죠. 저희 입장에서는 서태지를 비롯한 몇몇 뮤지션이 빠른 랩을 구사했으니 반대로 느린 랩을 시도해보려고 했지만, 사장님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그래서 리듬 없는 내레이션을 해봤는데 이번엔 저희 마음에 안 와닿았고 원래 의도대로 진행했죠. 내정된 2집의 타이틀 곡은 ‘4210301’이었는데 팬 음 감회에서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의 불호가 많아서 청개구리처럼 이 곡을 선택했죠.


*대영 AV: 1990년대의 대표적인 레이블로 김동률, 신해철과 공일오비가 소속되어 있었다.

4. 아주 오래된 연인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데모가 참 좋았는데 1차 녹음이 생각대로 안 나왔죠. 보컬도 따로 없는 상태였다가 윤종신의 친구였던 김태우가 급작스럽게 투입되었어요. 다행히 김태우의 목소리 톤이 너무 좋아서 정석원도 바로 녹음에 들어가자고 했죠. 다만 첫 녹음은 생각 밖으로 별로여서 비상 회의 끝에 새벽 4시까지 숙소에 모여서 결국 멜로디를 바꾸고 수정된 버전을 내게 되었습니다. 그 곡으로 덕분에 언더그라운드에 있던 공일오비가 오버그라운드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김태우: 1969년 출생으로 그룹 뮤턴트 및 솔로로 활동

이 곡에 힘입어 후속곡들도 인기를 얻었는데 타이밍 좋게 < 내일은 늦으리 > 콘서트에 나가게 되었죠. TV 출연 한 번도 안 하다가 방송에 나오게 된 셈인데 사람들은 공일오비 하면 서울대 출신 모범생을 예상하였나 봐요. 그런데 김태우가 야생마처럼 무대를 휘젓고 무슨 날라리 같은 애들이 나와서 폴짝폴짝 뛰어다니니까 약간 문화적 충격을 줬던 것 같습니다. 소위 말하는 오버 나잇 센세이션이라고 하룻밤 만에 스타가 되었죠. 마니아에서 대중으로 팬의 범위가 넓어진 거죠.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늘 김태우를 기준으로 다른 보컬들을 판단하는 것 같아요. 그 정도의 가창력과 무대 장악력을 가지고 있긴 쉽지 않습니다.

*내일은 늦으리: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

5. 신인류의 사랑

원래 정규 4집 < The Fourth Movement >의 타이틀 후보곡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 영화사에서 X세대 남녀 간의 사랑에 관한 음악을 요청해왔고, 감독님께서 모던한 스타일을 원한다고 하셔서 ‘신(新)인류의 사랑’을 가지고 갔더니 거절당했죠. 욱하는 마음에 이 곡을 타이틀로 밀었는데 대박이 나서 전체 앨범 판매량은 4집이 가장 높았습니다. < 응답하라 1994 >에 나왔던 가요 톱텐 연속 5주 1위와 골든컵 수상의 영예를 안겨준 곡이죠.

*KBS 가요 순위 프로그램 < 가요톱텐 >에서 5주 연속으로 1위를 하면 골든컵이라는 명예 졸업 제도가 있었다.

가사가 상당히 화제 되었습니다.

여성단체에서 최악의 가사 중 하나로 뽑을 만큼 당시에도 논란의 여지가 있었죠. 조금 억울한 게 전체적으로 찌질한 정서의 남자 얘기고 ‘신(新)인류의 사랑’이라고 한 것 자체가 이미 비꼬는 제목이거든요. 논란이 있었지만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처럼 다들 속으로 말 못하는 데 공감하는 그런 내용들을 담았죠.

정석원이 기본적으로 소심한 마인드기 때문에 가사도 억지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본인에게서 나오는 소심남의 정서를 표현하는 거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속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너를 생각하며 집 앞에서 기다린다.’ 이런 심상들이 공일오비 발라드에 공통으로 흐르는 거죠. 여기에 약간 기술적인 방식이 추가되는 건데 구체적 날짜나 장소명을 가사에 넣어서 대중의 공감을 끌어냅니다.

정규 5집 < Big 5 >에서는 리메이크 곡인 ‘슬픈 인연’과 ‘단발 머리’가 히트했습니다. 유재학 사장이 이전에 조용필의 매니저였기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단발머리’를 고른 이유는 무엇인가요?

‘슬픈 인연’은 소리의 완성도가 높은 곡이고 ‘단발머리’는 저희가 항상 꾸준하게 추구해온 복고 사운드의 완성형입니다. 사실 지금의 복고 유행이 저희들 시선에서 재밌고 신기합니다. 옜날에 우리도 복고를 추구했는데, 2~30년 후의 대중음악도 복고를 지향한다는 지점에서요.

원래는 앨범 전체를 리메이크 곡으로 만드려고 했는데 사장님께서 결사 반대를 했죠. 한국에서는 그건 안 된다. 의견을 절충해서 두 곡을 만들기로 했고 저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조용필 선배님을 빼놓을 수 없었죠. 선배님의 여러 곡 중 ‘단발머리’로 낙점했고 힘들게 허락 받다보니 부담감이 커져 녹음을 약 10차례 진행했습니다. 타이틀 곡으로 밀었는데 인기는 ‘슬픈 인연’이 더 많았죠.

돌이켜 보면 5집 < Big 5 >를 정점으로 공일오비가 하향세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레트로로 가는 선택은 지혜로웠으나 창작곡으로 승부를 겨뤘다면 앨범 두어 장은 더 발표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개념이 공일오비의 음악 인생을 관통하는 모토군요.

말씀처럼 뮤지션은 본인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잘 되는 게 너무 뻔하게 보이는 거죠. 밴드 초기에는 이것저것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는 많이 경험이 쌓였으니 ‘가고 싶은 데로 가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 장호일 기타 연주의 핵심- 범용성 >

장호일의 기타 연주의 핵심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범용성이라고나 할까요. 록밴드 갤럭시로 시작한 만큼 하드락이나 헤비메탈 DNA가 있지만 공일오비는 정반대의 발라드를 했거든요. 저한텐 제일 어려운 장르가 발라드예요. 발라드 편곡법이 굉장히 어려운데 반강제로 연습하다 보니 실력이 쌓이고 스펙트럼이 되게 넓어진 거죠. 그래서 웬만한 장르는 이제 자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덕에 한국 힙합의 시조새이기도 합니다. 힙합책에도 적혀 있어요. 신성우와 한 프로젝트 그룹 지니의 1집 < Cool World >가 한국 펑크(Punk)의 시조가 되더라고요. 1995년 작이니 크라잉 넛보다 1년 먼저 나왔거든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도움이 됐던 일이 하나 있어요. 서울대학교 밴드 갤럭시에 2기로 들어가 선배들에게 사랑과 평화 스타일의 펑크(Funk) 음악을 사사하였죠. 소위 말하는 ‘쨉쨉이’ 연주 스타일을 반강제로 주입받게 되었는데 나중에 엄청난 도움을 준 거죠. 장기간 수련이 돼 있기 때문에 또 제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이 펑크 장르입니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 같은 경우도 피아노가 워낙 분리해서 잘 일이지만 사실은 펑키 기타가 꽤 많이 들려요. 

이번 ‘Aneka’의 재발매도 기타리스트로서의 장호일은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기타 축제 <골든핑거기타페스티벌>에도 수년째 참여하고 있구요.

보컬 멤버가 그룹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공일오비의 앨범에는 항상 연주곡이 하나씩 들어 있었고, 그 전통이 제 솔로 앨범에도 이어져 1번 트랙은 기타 연주곡 ‘Aneka’입니다. <골등핑거기타페스티벌>에서 제 곡을 들려드리면 의미가 더 깊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좋아해주시더라구요.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의미가 있는 곡이고 대중들로 하여금 기타리스트로서 장호일을 생각해보게 만들어주는 곡이라서 뿌듯합니다.

< 장호일 인생의 결정적인 앨범 >

오늘날 장호일을 만든 결정적인 앨범은 무엇이 있나요? 

1. <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 – 딥 퍼플

2. < 한동안 뜸했었지 > – 사랑과 평화

1번은 앞서 언급한 < Deepest Purple >입니다. 가장 중요한 ‘인생 기타리스트’는 리치 블랙모어고 가장 결정적인 곡은 ‘Highway star’겠죠. 기타라는 악기를 잡게 된 터닝 포인트가 되었으니까요. 국내 앨범은 사 ‘한동안 뜸했었지’ 들어간 사랑과 평화의 1집 < 한동안 뜸했었지 >입니다. 이 앨범을 들으며 펑크(Funk) 음악을 수련했죠.

3. < Van Halen > – 밴 헤일런

리치 블랙모어 때문에 기타를 잡았지만 가장 많이 좋아하고 따라했던 기타리스트는 에드워드 밴 헤일런입니다. 최근 우연히 밴 헤일런 음악을 쭉 듣다 보니 제가 그들의 리프를 거의 다 칠 줄 알더라구요. 옛날에 연습했던 감각이 남아있는거죠. 태핑 주법을 대중화한 ‘Eruption’은 일대 충격이었습니다.

4. < Are You Experienced > – 지미 헨드릭스 익스피리언스

오히려 최근 한 10년 사이에 지미 헨드릭스를 되게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한참 기타를 배울 1980년대에는 밴 헤일런과 잉베이 맘스틴 같은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다보니 지미 헨드릭스는 올드한 스타일이다라고 인식했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기타를 완성한 사람이구나’라는 걸 깨달은 건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만약 1970년대 사람이고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본다면 ‘저 사람은 진짜 외계인으로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전에는 엘피로 소리만 접했는데 요즘은 수많은 라이브 영상들을 보다보니 느낌이 새로워요.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고 공연 사진들 보면 옛날 흑인들 무시당하던 시대에 관객이 전부 백인이에요. 지미 헨드릭스는 기타의 조상신이죠. 

최근에 주목한 뮤지션이 있습니까?

잔나비. 대중들에게 많이 뜨기 전부터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는데 취향 저격입니다 반복해서 듣는 음악이 몇 없는데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가 수록된 < 전설 > 앨범이 무척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어요. 혁오도 좋아하는 밴드입니다.

진행: 임진모, 손민현, 염동교
사진: 염동교
정리: 손민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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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250(이오공) 인터뷰

뽕, 가까우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한 글자에 대한 탐구는 몇 년 전만 해도 분명 유행에 반하는 흐름이었다. 하지만 이 미지의 기운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에서 틈틈이 한자리씩 차지하며 시대 전체를 관통했다. 뽕짝 또는 트로트라는 이름만으로, 통속적인 멜로디나 구성진 창법이란 특징만으로 ‘뽕’을 정의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돌고 돌아 뽕은 무엇인가? 2017년 돌연 뽕을 찾아 떠나겠다고 선언한 댄스 음악 프로듀서 250(이오공) 역시 그에 대한 해답을 바로 내리지 못했다. 물론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이박사를 비롯한 뽕짝 음악의 전설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특유의 분위기를 체화했고 지난 3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문제작 < 뽕 >을 내던졌다. 기나긴 고민과 노력 끝에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5년, 그간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며 한국적인 사운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눴다.

생소할 법한 ‘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예전부터 전형적인 EDM 공식에 맞춘 음악들을 즐겨 들었고 그런 사운드를 만들고 싶어 했다. 특히 직접 녹음한 목소리보다 전혀 관계없는 장르의 기존 보컬 소스들을 미디 프로그램으로 편집해서 만드는 샘플링 방식이 멋있어 보였다. 그러던 중에 어디에서 소재를 가져올지 찾아보게 되었고 탐색 끝에 내린 결론이 ‘뽕짝’이었다. 뽕짝을 원재료로 한 노래는 들어본 적도 없었고 아카이브 자체가 무궁무진해서 그야말로 노다지에 가까운 분야였다.

가끔씩이라도 듣던 음악이긴 했는지.

일부러 찾아 들은 적은 없었다. 작업을 위해 고른 뽕짝이 막상 음악적으로 어떤 요소가 있는지 하나도 몰라서 한 2년 정도는 진지하게 뽕짝만 들으면서 지냈다. 그래서 당시에 사운드클라우드도 완전히 끊었다. 플랫폼을 사용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최신 노래들이 뜨는데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쫓기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당장은 세련되고 멋있는 소리지만 한편으로는 잠시 스쳐 지나가는 스타일일 수 있다. 유행어처럼 짧게 소비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고 견뎠다.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이후부터 스티비 원더나 마이클 잭슨처럼 의식적으로 찾아 들어야 하는 음악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정립한 나만의 기준이 있었는데 그것들을 전부 걷어내고 그 이전의 기억으로 돌아가서 뽕을 만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 뽕 >을 제작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는지.

일단 회사 사람들 외에는 음악적인 피드백을 주고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만들었고 회사도 그걸 존중해 주었기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에서 믹스셋을 틀었을 때는 반응이 달랐다. 전에 클럽 케이크샵에서 요즘 떠오르는 힙합 뮤지션들을 모아서 하는 힙합 파티가 있었다. 내가 선곡한 음악들이 행사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힙합만 틀기는 싫었기 때문에 순수하게 뽕짝으로만 1시간을 채웠다. 웬만하면 나를 앞으로 이런 애매한 환경에 놓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다. 그때 카메라가 나를 향해 있어서 영상에 담기지 않았지만 관객들이 한 명도 안 빠지고 다 나갔었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단어 자체가 주는 은근한 반감도 무시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실제로 앨범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섭외에 응해주지 않은 분도 계셨다. 꼭 해주셨으면 하는 분이었어서 편지를 써서 설득해 보려 했는데 막상 쓰려고 하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떤 의미에서 < 뽕 >이라는 제목을 싫어하는지 알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지금 하려는 뽕은 그렇게 뻔하고 통속적인 뽕짝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쉽지만 어설프게 설명하려다 앞뒤가 안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포기했다. 뽕이라고 하는 단어에 누군가는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까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앨범을 제작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앨범 전체의 레퍼런스 같은 곡이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딩된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 음악적으로 분석하면서 들었을 때 시대와 관계없이 너무 완벽한 노래다. 진보적이면서도 세련된 사운드, 애절함이 느껴지는 가사, 중간에 기술적인 부분을 과시할 수 있는 구간까지 모든 요소가 적절히 녹아 있는 곡이라서 그 노래 같은 앨범을 만들고 싶은 게 내 바람이었다.

레퍼런스가 뽕짝이 아니라는 점은 의외다.

이은하 씨가 원래 절창인데다가 꼬아가면서 부르는 편인데 그 곡에선 확 튀는 순간 없이 차분하게 눌러서 절제한다. 알고 보니 이 곡의 작곡 겸 프로듀싱을 맡은 장덕 씨가 주문한 방식이었다고 한다. 노래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오히려 참고 부르면 더 슬프게 들릴 거라고 디렉팅을 해서 그런 노래가 나왔다고 한다. 항상 능력을 최대치로 쏟아내는 게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만 그 감정을 정제해서 표현하는 느낌, 이런 부분이 여러모로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했다.

뽕짝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음악적 요소는 무엇인지.

반주의 메커니즘 자체가 매우 개인적이다. 연주자 한 명이 키보드 한 대로 모든 걸 해결한다. 자동 반주 기능을 켜고 왼손으로 베이스, 오른손으로 코드를 연주하면서 바탕을 먼저 쌓아두고 후에 여기저기서 리드 악기를 덧붙이며 멜로디를 쌓아가는 방식이다. ‘사랑 이야기’만 봐도 이박사님이 불렀던 멜로디를 찢어지는 신스 사운드로 바꾸고 거기에 모듈레이션을 걸었다. 뽕짝 연주자들이 현장에서 손으로 직접 하는 걸 나는 마우스로 하나하나 조절했다. 절대 밴드 음악은 아니다.

실제로 사운드에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현존하는 뽕짝 음악 중에서는 최고의 소리를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적으로 촌스러워자는 건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과거의 질료를 들여와 만든 작업물인 만큼 기본적으로 사운드만큼은 타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감정적인 공감으로 호평을 듣는 것도 좋겠지만 나에겐 사운드가 좋다는 말만 한 칭찬이 없는 것 같다.

음원 사이트에는 다프트 펑크 앨범 작업을 맡았던 프랑스의 CHAB가, 한정반으로 발매한 CD에는 류이치 사카모토와 협업했던 코테츠 토루가 마스터링에 참여했다. 두 가지 버전으로 공개한 이유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꼽을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도 느껴졌고 차이도 컸다. 아마 들어보면 확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마스터링 때문에 스피커를 하나 새로 장만했다. (웃음)

앨범에 실린 11개의 곡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곡은.

< 뽕 >의 전반적인 흐름을 고려했을 땐 ‘모든 것이 꿈이었네’다. 이박사님과 함께 김수일 선생님을 만나 뵈었을 때 불러주신 곡 중 하나인데 당시 현장에 있던 모두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바로 투트랙으로 반주랑 가창을 녹음 받아서 어떻게 활용할지 많이 고민했었는데 그 순간의 감동을 담는 게 더 의미 있는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어 처음 부른 파일 그대로 실었다.

앨범을 완성하고 1~2달 정도 안 듣고 있다가 마스터도 맡기고 믹스도 최종 수정을 해야 해서 ‘모든 것이 꿈이었네’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덜컥 내가 죽기 전까지 이거보다 좋은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박사와 김수일, 두 콤비와의 작업기는 다큐멘터리 < 뽕을 찾아서 >를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어떻게 기획하게 된 영상 콘텐츠인지.

온전히 회사의 아이디어다. 나는 그냥 앨범을 빨리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회사에서 먼저 앨범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보자고 제안을 했다.

사실 비트메이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뒤에서 어떤 면으로는 아티스트보다 더 큰 존재로 활동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에 매체에 내 얼굴을 드러낸다는 그림이 없었다. 단지 내 음악을 듣고 누가 만든 건지 찾아봐주고 알아줄 때, 프로듀서와 리스너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번 앨범을 통해 그 고정관념이 많이 사라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앞서 언급했던 두 분과의 만남 당시 직접 사용하시는 악기도 보여주실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쭤봤고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때 들고 나오신 악기는 평생 사용하신 장비였는데 플로피 디스크를 꽂아서 저장해 둔 데이터를 로딩하는 방식이었다. 그 속엔 ‘YMCA’나 ‘몽키 매직’ 같은 옛날 노래들이 원본으로 담겨 있었고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키보드 자체에서 소리가 웅장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스피커나 이어폰으로 듣던 음악들이 내 눈앞에 있는 악기, 연주자, 즉석 시퀀싱에 의해 물리적으로 실존할 수 있다는 걸 느꼈고 음악을 듣는다는 기준 개념 자체가 흔들렸다. 음악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임팩트가 센 순간이었다. 어차피 혼자 집에서 마우스로 비트를 만들던 사람이니까 다큐멘터리를 찍는 게 큰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서울로 돌아올 때 내가 찍는 영상이 어쩌면 의미가 있는 기록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뱅버스’의 뮤직비디오도 화제가 많이 됐다.

뮤직비디오 역시 아이디어를 제공해 줬을 때 가볍게 의견 정도만 첨언하는 식이고 크게 물어보지 않는다. 기왕이면 나도 완성본이 떴을 때 직접 클릭해서 보고 싶다. 결과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스태프분께서 현장 사진을 찍어서 보내줬는데 난데없이 모텔 벽에 어떤 사람이 매달려 있었다. 마치 스파이더맨 촬영장을 보는 것 같았다. 뽕에서 시작했는데 긴 와이어를 달고 액션을 펼치는 스턴트맨이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그 사진 보고 엄청 웃었다.

근 5년이란 작업 기간을 가졌다. 앨범 공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1년 정도 지연된 것도 있지만 그 사이에 ‘휘날레’와 ‘춤을 추어요’가 추가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밀렸다기보단 앨범이 완성되지 않았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애초에 이런 결과물을 만드는 데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긴 시간 끝에 체득한 ‘뽕’은 도대체 무엇인가.

누군가는 뽕짝을 생각하고 어떤 이는 트로트를 떠올린다. 누구나 자조적인 해석으로 한 마디씩 거들 수 있는 건 맞지만 ‘뽕’이라는 한 글자에 기본적으로 ‘촌스러움’이란 공통분모가 내재되어 있다. 나는 그걸 인정하고 시작했다. “나는 촌스러워. 난 촌스러운 게 좋아” 하면서 말이다. 물론 음악을 만들면서 너무 올드한 감성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고민하기도 했는데 세련돼 보이기 위해서 억지로 꾸며대는 것이야말로 제일 촌스러운 행동 같았다. 차라리 이 촌스러움을 정말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는 이유 있는 촌스러움, 즉 나의 온전한 취향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트랙 ‘휘날레’가 유독 튀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지.

그렇다. 사운드 자체만 볼 때 뽕짝이라고 할 이유는 없지만 나를 슬프게 만들고 향수를 자극하는 소리야말로 나에겐 뽕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만화 주제가는 나에게 노스탤지어 그 자체였다. 특히 < 아기공룡 둘리 >는 엄마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아이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유독 아련하게 남아있다. 계속 슬프게 기억되는 어린 시절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앨범 마지막에 ‘휘날레’라는 곡을 넣게 되었고 이왕이면 원곡을 부른 오승원 씨가 서사를 아름답게 마무리 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유튜브에서 오승원 씨가 비교적 최근에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신 영상을 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비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음색엔 변함이 없었고 동심으로 돌아간 관객들은 모두 탄성을 자아내며 무대에 깊이 빠져 있었다. 댓글들도 다 똑같은 얘기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게 그대로인데 그 사이에 흘러버린 시간을 체감하면서 복잡함 감정을 느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음원 사이트에서는 누락된 ‘춤을 추어요’는 어떤 곡인가.

원곡 자체는 장은숙의 ‘춤을 추어요’지만 사실 故 신해철의 기일에 맞춰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리려고 했던 일종의 헌정곡이다. 앞부분에 나오는 드럼은 넥스트 ‘인형의 기사 Part Ⅱ’에 나오는 드럼을 샘플링했고 중간중간 허밍이나 보컬 소스들도 조금씩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매한 앨범이 신해철 2집인 만큼 신해철은 나에게 각별한 뮤지션이다. 여러 이유로 앨범에 실리진 못했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만든 앨범은 아니지만 듣는 입장에선 이날치처럼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를 이식하는 작업으로 느껴져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분명 있었어야 하는 시도인 건 맞지만 < 뽕 > 은 어디까지나 나 250의 사운드를 담은 작품일 뿐이다. 나는 태어나서 외국을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평생을 한국에서 먹고 자며 자랐기 때문에 뭘 해도 난 결국 한국인이다. 애초에 정체성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DNA를 고민해 본다면 그 답이 결코 국악이 될 수는 없었다. ‘국악’이라고 하면 가끔 TV에서 보여주는 민요 공연이나 국립국악원 정도의 이미지만 떠오른다. 내 삶과는 조금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운드 자체에서 뭔가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에 비해 뽕짝은 왠지 모르게 친숙하고 서글프다. 다들 뽕짝 음악을 어디서 맨 처음으로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어렸을 때 고속도로 위를 운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화장실 가려고 잠깐 들린 휴게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소리, 언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음악이다. 의식하고 들은 것이 아니라 살아가다 보니 우리 삶의 배경 속에 슬그머니 스며들어 있던 음악이었고 내 음악에도 이런 정체성을 억지로 어필하기 보다 자연스럽게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

해외 매체에서도 이런 한국적인 질감에 신선함을 느껴 주목하는 분위기다.

뽕이라는 화두가 있어서 다뤄준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외국인들에게도 전혀 진입 장벽이 없이 신선하고 재미있는 사운드로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앞으로도 비슷한 맥락으로 밀어붙일 생각인지.

무슨 대단한 업적을 세운 것처럼 그다음에 뭔가를 하려는 것도 좀 그렇고, 이미 한 번 했다고 똑같은 거 두 번 안 한다는 것도 이상한 것 같다. 이번 앨범을 만들 때도 전부 내 마음대로 했듯이 그때그때의 내 감정에 충실하면서 적당한 그릇에 담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래서 당장은 큰 변화 없이 똑같이 가려고 하고 있다.

힙합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제작할 계획은 없는지.

사실 힙합 앨범도 생각은 하고 있다. 살면서 가장 좋아했던 음악 중 하나인데 그걸 한 번도 안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맨날 노스탤지어만 뒤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꼭 만들 생각이다. 다만 지금 시점에 힙합을 한다고 하면 어떤 사운드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 같아 구체화된 건 없다.

향후 공연 계획도 궁금하다.

최대한 많은 곳에서 이 곡들을 라이브로 들려드릴 수 있게끔 준비하고 있다. 일반 힙합 클럽에서 공연하기 위해서 다른 음악들과 뽕짝 음악의 접점을 찾아야 하고, 어떤 식으로 섞어서 틀지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해야 하는 단계다.

답사 차원으로 다녀온 콜라텍 같은 무대에서 공연할 생각도 있는지.

물론이다. 콜라텍이 생각보다 놀기 좋은 공간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는 클럽들이랑 차원이 다르다. 사운드도 빵빵하고 반짝이 같은 조명도 막상 켜놓으면 은은하게 분위기가 산다. 술 마시고 춤추면서 논다고 볼 때 웬만한 클럽보다 쾌적함이 훨씬 높은 것 같다.

진행: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사진: BANA 제공
정리: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