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6 윤항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 록 밴드의 레전드 ‘키보이스’ 출신의 톱가수 윤항기다.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이 말해주듯 국내 초창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밴드 ‘키보이스’는 1960년대 부평의 미군수지원사령부 애스컴(ASCOM) 등 미군 부대의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키보이스하면 떠오르는 이름 윤항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활동, 솔로 히트 넘버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는 어떡하라고’‘장밋빛 스카프’ 등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동생 윤복희가 불러 국민 위로곡이 된 ‘여러분’의 작곡자도 바로 윤항기다. 선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작사, 작곡, 노래, 연기 뿐 < 춤추는 함대 > 등의 뮤지컬 기획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위상도 구축했다. 한국 록의 씨앗을 뿌린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는 정부가 주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윤항기는 애스컴을 가리켜 팝음악에 꿈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우리 대중음악을 일궈낸 ‘K팝의 중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 미군 클럽무대를 선회하며 뿌린 당대 뮤지션들의 열정을 현 대중음악의 씨앗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패기 넘치던 당대의 가수 생활과 목회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여러분’을 포함해 장대한 60년 음악 인생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이번‘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옛날에 장관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훈장은 처음이다. 요즘 활동을 많이 안 하다 보니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이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추천했다고 한다. 고맙다. 수상자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된 역사적 공로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날 수상 소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데뷔 60년 차고 처음 1959년에 미8군에서 김희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 나는 남석훈이라는 가수하고 로큰롤 가수로 활동했다. 남석훈은 나중 완전히 빅스타가 되었고. 그때 미8군에서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드럼도 배우면서 1963년에 한국의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그걸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우리가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록의 전성기가 생기고. 그게 공로이자 자랑거린 것 같다.

키보이스 결성과정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키보이스가 1963년에 데뷔해서 1964년에 ‘정든 배’가 나왔다. 그게 나왔을 무렵이 한창 비틀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때다. 우리도 악기를 다루는 팀인데 비틀스도 그러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처음 우리가 그룹을 만들었을 때는 비틀스를 모방한 게 아니라 실은 비치 보이스(Beach Boys)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비치 보이스를 보고 한국에서도 저런 그룹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그룹이 키보이스다.

선생님은 나중 솔로 활동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장밋빛 스카프’‘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등 잊을 수 없는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요. 그런데 왜 그룹 활동을 할 때는 자작곡을 안 만드신 거예요?
좀 전 얘기한 것처럼 내가 데뷔했을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위대한 작곡가이신 이봉조 선배님 등이 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실 때였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분들도 작곡 활동을 안 하셨다. 나중에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부터 이봉조 선생님도 작곡을 하셨고 김희갑 선생님도 뒤에 시작하셨다.

그 시절 작곡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1964년에 낸 키보이스의 ‘정든 배’라는 노래를 쓴 것도 김영광이라는 작곡가다. 그 친구가 우리랑 친구다 보니 우리한테 이 노래 같이해보자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덕분에 앨범도 내게 됐다. 물론 당시 김영광이라는 친구가 작사 작곡을 할 때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든 곡은 1969년에 쓴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이어서 나온 곡이 ‘목이 메어’였고… 같이 1969년에 나왔다.

자작곡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요?
사실 한국 뮤지션을 보고 작곡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도 번안 가요를 많이 할 때였다. 우리도 김영광 곡을 빼면 다 번안곡이었고. 그래서 차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우리 곡을 조금 해야 하지 않나’, ‘외국 곡 못지않은 우리 곡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 왜냐하면 나는 또 시작이 외국 노래를 부른 팝 싱어였고 록 가수였으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목이 메어’는 그런 외국 밴드의 곡을 많이 커버하면서 이제는 번안곡에서 벗어나 우리 곡을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쓴 곡이었다.

키보이스 활동하실 때도 이미 솔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솔로로 나온 게 몇 년도였나요?
키보이스에서 1969년에 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룹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키보이스로 할 때는 내 이름을 많이 알리지 못해서. 또 그 당시는 월남으로 가는 게 붐이었는데, 나한테도 월남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쇼를 하기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다.

그 팀이랑 함께 1년간 월남에 갔다가 한국 들어와서는 팀으로 처음 발표한 곡이 ‘고고 춤을 춥시다’였다. 그게 1971년이었다. 그게 나중에 희귀음반으로까지 올라갔다. 완전한 로큰롤 송이었다. 한 곡을 가지고 끊지 않고 계속 연결, 연결해서 라이브를 30분인가 연주를 했다. 그게 음반으로 나온 거다.

선생님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때는 1973년의 ‘나는 어떡하라고’였어요. 그 곡도 그렇고 이후 ‘장밋빛 스카프’도 그렇고 분명 록을 하셨는데 당대의 트렌드인 포크송을 의식하셨는지 ‘록 + 포크’ 스타일이었어요. 록을 중심으로 주변 장르와의 퓨전을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다. 거기에 추가로 트로트도. ‘장밋빛 스카프’가 그렇지 않나. 사실 그때는 본래 윤항기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빨리 대중화할 수 있는 걸 원했다. 키브라더스를 하면서 발매한 ‘목이 메어도’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경우에는 마니아들 사이에 알려졌다. 돌아가신 DJ 이종환 선생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라디오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시기도 했고 아예 지금도 살아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윤항기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종회관인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도 했다. 그게 방송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오픈 기념 축하 공연이었을 거다. 그 덕에 윤항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키보이스 때부터 인연이 있던 신세계 레코드 간부가 와서 우리가 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그룹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솔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73년에 ‘나는 어떡하라고’가 나오고 그 후 1975년에 나온 곡이 ‘장밋빛 스카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키보이스 활동할 때 썼던 곡인가요?
그건 키보이스 때 나온 게 아니라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만들고 월남에 가서 만든 곡이다. 월남에서 만들고 한국 와서 키브라더스 음반이 나오기 전에 그걸 고고클럽에서 연주했다. 그 후에 키브라더스 데뷔 앨범, 아까 말한 1971년의 < 고고 춤을 춥시다 >에 수록됐다. 그리고 그 곡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작업하던 분이 나에게 와서 펄 시스터스가 그 노래를 취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음반이 나오기 전에 펄 시스터즈 버전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먼저 나왔다.

‘장밋빛 스카프’는 어떻게 쓴 곡인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이 서울 스튜디오에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앨범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앨범에 수록할 곡 수(數)가 딱 한 곡이 모자랐다. 그날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한 노래가 모자랐던 거다. 가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멜로디가 아닌 가사가. 그게 또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인데, 1960년도 후반에 내가 좋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썼다. 당시에 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그 여인을 찾아서 전국을 미친 듯이 헤매 돌아다니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스케줄도 펑크 내고 그랬던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갑자기 홍콩으로 사라졌다고 기사가 나고. 당시 스캔들이 많았다. (웃음) 어쨌든 불현듯 그 생각이 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앞에 그 테마가 잡혔다. 그래서 그냥 부랴부랴 도착하자마자 멤버들은 스탠바이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막 썼다. 그래서 그 곡이 가사가 짧다. 그다음은 이제 멜로디를 써야 하는데, 어떤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안 나오고, 그냥 급하게 되는대로 가사에다가 써 붙인 멜로디가 그 뽕짝 스타일의 멜로디였다. ‘쿵짜작∼ 쿵짝’. 사실 그 멜로디의 영감을 받은 건 조영남 노래의 ‘불 꺼진 창’(이장희 작사 작곡)이었다. 나중 금지된 곡이다. 그 멜로디랑 리듬이 생각나더니 이 가사에 그런 스타일의 선율을 입혔다. 그게 또 운율에 딱딱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스카프’는 한때 노래방 애창곡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있지만 부르기 좋은 곡조이기도 해서인 것 같아요.
아주 쉽다. 키브라더스 앨범으로 나온 곡인데 그 노래가 처음 수록됐을 때는 타이틀이 아니고 밑에 깔려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라디오 쪽으로 갔는데, 라디오 측에서 앨범 전체를 들어보더니 타이틀곡보다는 밑에 있던 ‘장밋빛 스카프’가 더 좋다는 거였다. 동아방송(DBS)의 이해성 PD가 찾아내 거기서 틀기 시작하면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라고’는 KBS 가수왕상의 영예를 준 곡이죠?
맞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화로도 나왔었다. 내가 주연을 맡았었고. 그래서 내 경력에 보면 영화배우라고도 나온다. (웃음)

이후 실세를 장악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가 나왔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을 무렵이라 ‘전두환 송’이라고도 불렸지요?
그렇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신군부가 그런 밝은 노래, 희망적인 노래가 아니면 다 금지시켰다. ‘장밋빛 스카프’도 한때 금지가 됐었으니. 가사가 ‘오지 않을 사람을…’ 막 그러니깐 전(前) 정권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말도 있었고.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1983년 히트곡 ‘이거야 정말’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가사도 심상치 않았고.
엄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가사를 사계절에 빗대서 참 잘 만든 노래였다. 

윤항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전 국민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러분’이지요. 윤복희 노래로 남매의 완벽한 협업을 선사했는데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나요?
사실‘여러분’을 만들고 난 후였다. 그전에는 그냥 동생이랑 집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믿음 없이 약간 강제적으로 믿은 거고..  

‘여러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신앙에 들어가셨던 거군요. ‘여러분’은 역사적인 명곡입니다. 선생님은 그 곡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는 곡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저런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그 이전에서부터 내가 닦아온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74년에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 제1회 한국 가요제 >에서부터 곡을 출품했었다. 그게 한국 최초로 열린 국내 가요제였는데 그때 곡이 ‘외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때 대상을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대상을 받고 내 곡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가요제가 유행이 되면서 매년 가요제가 있었다. MBC 가요제, TBC 가요제 등등. 모든 가요제에 빠짐없이 출전 곡을 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라는 곡도 나오고 ‘바늘과 실’도 나오고, 정은희가 부른 ‘누구 없소’까지. 다 가요제 참가곡이다. 결론해서 내 나름의 내공을 쌓아왔다고 할까. 1979년 ‘여러분’이 그냥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라 그 이전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약간 가스펠적인 터치가 있었어요.
멜로디는 그냥 팝 발라드인데 아무래도 가사 때문일 거다. 그 곡은 내가 동생의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쓴 곡이기도 했다. 오빠로서 동생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그때 윤복희가 광신자라고 할 정도로 신앙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모티브를 미리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아주 좋아했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가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2011년 임재범이 < 나는 가수다 >에서 불러 ‘여러분’이 재(再)유행했지요. 그 곡을 듣고 어떠셨는지?
그 곡이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30년 만에 ‘여러분’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었다. 윤복희가 부른 것과는 또 달랐다. 한창 ‘여러분’ 터지면서 인기를 얻을 때 임재범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와서 나한테 간증을, 신앙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한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인데 그때 많이 소개된 것처럼 정말 말을 더듬으셨어요?
엄청 더듬었다. 나중에 커서 활동하면서도 더듬었다. 물론 희한한 게 노래를 할 때는 말을 안 더듬었다. (웃음) 말더듬이가 고쳐진 게 성직자가 되면서부터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나아진 거로 생각한다.

한때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한창 화제였던 < 춤추는 함대 >도 선생님이 기획하셨죠?
그렇다. 그때 내가 키보이스로 미8군에서 패키지 쇼를 할 때는 코미디도 하고 다 했다.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뮤지컬 기획도 했으니 ‘만능’이란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으신다면.
한 곡으로 압축하자면 역시 ‘여러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윤항기를 만든, ‘여러분’ 같은 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다. 내가 처음 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윤항기다운’ 곡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거야 정말’ 등등 다른 곡도 많지만 진짜 내 본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목이 메어’, ‘장밋빛 스카프’ 같은 노래들이다. 

키보이스 때부터 전국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셨는데, 부평 애스컴에 대한 기억은 어떠세요?
미 8군 쇼하는 분들에게 애스컴은 가장 큰 무대였다. 가장 클럽이 많은 데이기도 했고. 서울하고도 가까운 데다가 그 당시에 미 8군 기지 보급창이다 보니 거기서 쇼를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거는 아주 풍족했다. 그때가 한국에는 콜라도 모르고 햄버거도 없을 때인데 애스컴에서는 물자가 풍부하니 쇼 단체에게 미군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줬다. 그러니까 다른 부대 가는 거보다 애스컴 스케줄 잡히는 게 좋았다. 그날은 이제 가방 들고 가는 거였다. 먹을 거 챙기러. (웃음)

한창 애스컴 클럽무대에 서셨을 때가 1964~1966년 즈음일 텐데요.. 당시 멤버가 윤항기, 옥성빈,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이었죠. 그때 선생님은 드럼을 치셨는데 노래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그때는 거의 다 같이 했다. 혼자 솔로로 하는 거는 (차)중락이가 한 ‘Mr. Tambourine man’ 정도고 그거 말고 나머지는 다 함께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드럼 치면서 노래한 사람이 나다. 그거를 우리가 ‘쎄시봉’에서 하는 걸 보고 나중에 또 드럼 치면서 노래를 한 가수가 배호다.  

키보이스 때 가장 기억나는 곡은요.
역시‘정든 배’다. 또 아이러니한 게 키보이스는 분명 록 그룹인데 그 곡은 또 완전 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게 뽕이 아니었으면 히트 못 쳤을 거다. 작곡가 김영광이 그걸 노렸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도 같은 앨범 수록곡이었는데 실은 그게 타이틀곡이었다. ‘정든 배’는 밑에 깔린 노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취입해서 ‘정든 배는 떠난다’로 내기도 했고.  

애스컴 클럽 공연에서 미군들 앞에 노래할 때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나요?
다 팝송이었다. 비틀스 초기 곡들은 거의 다 연주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A hard day’s night’ 등등. 비치 보이스도 했고.. 

미군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그때‘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미국 가수들 모창을 많이 했었다. 그때 내가 레이 찰스(Ray Charles)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모창을 하고,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 차도균이 팻 분을 했다. 특히 내가 레이 찰스랑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할 때는 미군들이 자지러졌다. 거의 졸도 수준이었다. (웃음) 일어나서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랑 ‘Hello, Dolly’였는데 다 까무러쳤다.

부평 애스컴의 우리 음악계에 남긴 의미는 뭘까요?
애스컴은 우리 키보이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록 음악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모이고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동두천 문산은 멀었고 부평은 서울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K팝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팝음악을 시도했던 곳이고 그 음악들이 우리 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선생님에게 음악은 뭐였을까요, 대중에게 윤항기의 음악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나는 팝 음악을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거다 보니. 그래서 그냥 음악을 죽기 살기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오다 보니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앞으로 내가 음악인으로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바를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곡을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윤항기의 곡은 거의 다 그 당시 나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라이프 뮤직(Life Music)’이 아닐까. 그걸 또 대중이 동의를 해주셨다. 그 삶을 인정해주셔서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해준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신현태,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5 신지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여름 댄스음악의 전설이자 현재진행형 코요태의 메인 보컬 신지다.

1998년 데뷔 이래 코요태는 마이너 댄스음악이란 확고한 정체성으로 나이트클럽과 길거리를 수놓았다. “차가 있었던 분들이라면 우리의 테이프가 꼭 있었다.” ‘순정’, ‘만남’, ‘시련’, ‘Passion’, ‘디스코왕’ 등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히트곡이 줄지어 터지면서 그들은 댄스음악 전문팀의 롱런 가능성을 시범했다. 그때 만해도 가수가 댄스음악을 가지고 10년 이상 장수하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중심엔 노래하는 신지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익숙해진 목소리는 이제 댄스음악, 발라드, 트로트 등으로 멀티 스타일로 발현되어 대중을 찾았고, 가수는 기꺼이 노래 부를 수 있는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 모두가 ‘인복’ 때문이라며 반복적으로 주변인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표한 현한 신지를 지난 10월25일 홍대 빅퍼즐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대화에 거침이 없었다.

1998년 데뷔한 코요태가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이름을 지킨 동력이 무엇일까?
크게 튀지 않았지만, 멤버 개개인이 방송을 통해 꾸준하게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코요태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김종민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김종민은 (코요태 핵심은)신지의 목소리라고 말하지만, 앨범과 노래에 한정할 때만이 그럴 것이다. 내가 메인 보컬이니까.. (웃음) 그것도 많은 분이 들어주실 때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코요태의 시작부터 원년 멤버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인복이 많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많이 얘기했지만 코요태를 그만두지 않은 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김종민이 군 생활을 하기 전과 후에도 많은 예능 활동을 소화하고 있다.
응원한다. 코요태는 원래 애초 예능을 많이 하는 그룹이었고, 사랑받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김종민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주 예능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는 나름 청순하게 생긴 여자가수가, 솔직하게 말하는 콘셉 자체가 신선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웃음)

코요태에서 신지의 정체성을 본인은 어떻게 보는지..
내가 지금 마흔이다. 열여덟 살 데뷔 이후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이지선이란 본명보단 신지로 살았다. 이름보다 예명이 익숙한 만큼, 많은 분께 나를 알릴 수 있었던 계기 역시 코요태였다. 만약 솔로나 걸 그룹으로 나왔으면 이만큼 빛을 봤을까. (웃음) 코요태로 시작을 안 했다면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있었을까?

그 당시 여성 보컬을 중심으로 한 3인조 혼성그룹의 조합은 흔하지 않았다.
맞다. 3인조 혼성은 많이 있었지만, 여자 보컬을 메인으로 세운 댄스 그룹은 우리가 처음이라 생각한다. 사실 데뷔 때만 해도 많은 분이 그룹의 축인 차승민한테 스포트라이트가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인천에서 가요제나 쫓아다니던 촌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외모도 아이돌보다 못했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어린 애가 누구한테도 안 지려고 했다. 당차다 못해 되바라져 보이기도 했을 거다.

‘순정’이 히트했을 땐 어떤 기분이었나. 1999년이다.
잘 몰랐다. 나이트클럽을 갈 수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였으니 체감을 할 수 없었다. 코요태 음악 중 애증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순정’이다. 신지를 있게 해준 곡이고, 아직 무대의 엔딩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순정’을 먼저 부르면 다른 노래가 다 죽으니까 세트 리스트 무조건 마지막 순서에 배치한다.

‘파란’, ‘비상’ 등 새 곡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신지의 어떤 형태든 특별한  안무 동작이 있었다. 팬들이 많이 따라했던 부분이다. 본인 아이디어의 산물인가?
내가 요청하는 건 딱 하나다. 라이브 하면서 안무를 보여드려야 하니까 발보단 팔과 손을 이용하는 동작을 부탁드렸고, 실제로 그런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쉽고. 나부터가 어려운 춤은 못 춘다. (웃음) 어려운 부분이 없으니 많은 분이 디스코 클럽 같은 곳에서 편하게 따라 한 것 같다.

코요태 혹은 솔로를 통틀어서 제일 자랑스럽거나 만족스러운 앨범 혹은 곡은?
뭐가 더 좋고 나쁘다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코요태의 가장 단단한 결과물은 1집 < 고요태(高耀太) >, 2집 < 실연 >, 6집 < Koyote 6 >라고 생각한다. 다른 앨범도 마찬가지지만, ‘디스코왕’이 있던 6집은 열일곱 곡으로 꽉 채워 발매했고 그중에서도 버릴 게 없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신지는 항상 ‘기’가 세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 무대 공포증이 있다는 얘기에 놀랐다.
아무도 안 믿더라.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어릴 때는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철이 든 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솔로 활동을 하게 됐다. 김종민이 갑자기 군 대체 복무 판정을 받아 가게 됐고, 빽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요태란 그룹 안에서 애초 가졌던 ‘각자 해보고 싶은 음악을 혼자 해보자’가 아니라 마지못해 한 거고. 2008년부터 10년까지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만약 그때 코요태를, 가수 신지를 포기를 했다면 지금 이렇게 인터뷰도 못 했을 거다.

혹시 코요태로 모든 걸 일구고 난 다음, 일종의 허탈감은 아니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멤버들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컸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당시 리얼한 상황을 듣고 싶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카메라 리허설까진 아무렇지 않게 잘했다. 그런데 본방송에 들어가고, 시작해야 되는 데 뭔가 어색하더라.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부터 떨림은 있었는데 < 음악중심 >하던 날이 최악이었다. 생방송, MC를 많이 했던 터라 라이브와 녹화 방송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온 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갑자기 닥치니.. 미치겠더라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대인기피증, 무대 울렁증, 공황장애, 그리고 우울증이라고 했다. 약은 먹지 않았다. 평소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병이지만, 사실 대외적으로 비추었던 센 이미지는 ‘자기방어’적이었던 내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뛰어난 것도 없다 느끼며 연예인을 시작했고, 활동하면서도 ‘무슨 복이 많아서 사랑을 받을까?’란 생각을 했다. 너무 잘 될 때는 기계처럼 움직이기도 했고.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됐는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 흥미를 느낄 시간도 없었다.

지금도 혼자 무대는 힘든가?
당시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지만, 아직 발라드는 혼자 하기 힘들다. 그때는 녹음하면서도 떨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녹음실에 작곡가와 나만 남아 불도 끄고, 가사도 외워 노래 불렀는데, 목소리가 바들바들 흔들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좋으련만. 불안을 겪고 난 뒤엔 조금만 인지해도 더 떨게 되더라.

신지는 출생(부평구 청천동)은 물론 초중고를 부평에서 졸업한 오리지널 부평인이다. 청천 초등학교, 북인천여중(계양구 소재), 부평구 부개동의 부개여고를 다녔다. 그에게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가수의 꿈을 품게 한 공간’이다. 자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가요제에 출전하면서 데뷔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는 다른 인천 아티스트처럼 인천이란 출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부평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곳이었다. 나한테 부평역 앞 지하상가는 놀이터였다. 가수를 하기 전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데뷔하고도 우리 음악이 얼마나 나오는지, 반응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주 갔다. 길보드 차트라고 하지 않나? 리어카에서 노래가 나오고 했던 때에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향으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부모님이 한 번도 인천을 떠나신 적이 없었고, 나만 서울에 나와 있던 터라 워낙 자주 다녀온다. 떠났다든가 다시 간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도 마음  속에는 부평이 있는 것 같다. 가끔 스케줄 때문에 경인 고속도로를 지나가면, 예전에 살았던 무지개 아파트가 보인다. 그때는 어릴 때 생각이 나 뭉클하다. 따로 숙소는 있긴 했지만 3집을 시작하고도 집은 부평이었다.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가수 혹은 음악은?
박미경의 노래로 가요제에 많이 나가기도 했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는 인천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다. 여자 가수가 솔로로 무대 위 그렇게 멋진 모습은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심지어 고음을 너무 잘 올리더라. 그런 강렬한 모습 때문에 박미경을 동경했다. 남자가수의 경우 무조건 ‘모두 잠든 후에’의 김원준이다. 김원준의 인천 팬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웃음)

박미경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시원했고, 멋있었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여자한테 저런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박미경이 처음이었으니까. 노래 자체를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나였으니까, 저렇게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연락도 하고 지낸다.  신기하다. (웃음)

곧 코요태 앨범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레인 10월 27일에 이효리(린다G)와 함께 한 ‘삭제’가 나온다. 6월부터 매달 노래를 한 곡씩 내고 있었고, 이번이 네 번째이다.  11월엔 신지의 솔로 음원을 거쳐 12월에 남은 두 곡을 더 포함해 코요태의 미니앨범으로 나올 계획이다.

‘삭제’은 어떤 스타일인가?
전형적인 코요태의 댄스곡이다.

11월에 나올 본인의 곡은? 어떤 스타일인가?
아마 11월 20일에 발매될 것 같다. 제목은 ‘세 번 잊어요’다. 6월에 발매한 ‘히트다 히트’의 프로듀서 ‘알고보니혼수상태’가 만들었고, 얼마 전 선물로 받은 곡이다. 처음 들었을 땐 너무 트로트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정통에 가까운 장르를 표현할 정도의 깊이는 없었으니까. 작곡가에게 말하니 내 원래 스타일로만 불러 달라고 했고, 녹음한 뒤 나온 결과물에 생각보다 너무 만족해했다.

2008년 정규 1집 < 1stAlbum > 이후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본인의 솔로 정규 앨범 준비 계획은?
신곡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내 음악 때문에 그룹의 작업을 뒤로할 순 없다. 일단 코요태가 우선이니까.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김종민도 빽가도 솔로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내 활동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코요태는 두 분의 약간은 무신경한 점으로(웃음)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작게는 커버 디자인부터 사진을 고르고 뮤직비디오 수정하는 것까지. 그래서 멤버들이 나를 총 프로듀서라고 불러준다. 내가 해서 분란이 없다고. (웃음)

앞으로 어떻게 코요태를 유지해 갈 것인가?
2012년부터 직접 기획사를 만들어서 우리끼리 코요태를 꾸려가고 있는데 쉽지 않더라. 감사하게도 공연이 많은 그룹이었지만, 이번 코로나 19로 사무실 재정이 좀 힘들다.

코요태의 음악도 이제는 옛날 노래다. 요즘 분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알아봐 주시고 반가워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어떤 가수든 신경 써서 만들어낸 음악을 소개할 때 모두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원한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우리의 목표는 해체하지 말고 디너쇼까지 해보는 것이다. 코요태가 40주년 일 때 김종민이 환갑이다. (웃음) 잔치 겸 디너쇼를 해보는 게 어떨까? 혼성 그룹으론 유일무이할 거 같다. 평론가님도 그 디너쇼에 꼭 와 달라.

감사해야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꽤 길다면 긴 시간을 활동했다. 중간 중간 무너지는 순간과 힘든 시기가 있었고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술에 의지할 때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론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서 방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그래서 항상 나는 전생에 나라보다 더 큰 우주를 구한 것만큼의 인복이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많은 분께서 코요태의 음악을 예전처럼 부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일일이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많다. 너무 감사하다.

인터뷰 : 임진모, 손기호, 임동엽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8 쿠마파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덟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실험적인 재즈 힙합 밴드 쿠마파크다.

이들을 장르라는 단어로 국한할 수 있을까. 재즈와 힙합을 오가는 쿠마파크(Kumapark)는 색소포니스트 한승민(LAZYKUMA)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6인조 밴드로, 2013년 셀프 타이틀 정규 앨범과 2017년 < NEW TYPE > EP 등 흥미로운 작업물을 발표하며 재즈를 기반으로 구축한 단단하고도 오묘한 크로스오버를 선보였다. 여러 악기를 이용해 힙합, 소울, 디스코와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요소를 가미한 그들의 복합적인 음악은 타 아티스트들 가운데서도 단연 독보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다.

쿠마파크는 본인의 음악을 떠올릴 때 하나의 장르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느 한 곳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색다른 ‘멋’과 화려한 라인업에서 우러나오는 듣는 ‘맛’을 낳은 셈이다. 러브존스 레코드의 수장이자 재즈 힙합의 개척자, 쿠마파크를 만나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10월 공개 예정인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녹음에 참여했다. 작업 과정에서 중점에 둔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재즈와 힙합, 일렉트로닉을 하는 밴드다 보니 사운드가 어쿠스틱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흔히 말하는 트로트의 ‘뽕끼’를 좀 덜어내고 멜로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를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에 녹여낼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밴드의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이질감이 생길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색소폰뿐만 아니라 전자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신시사이저 피아노가 인상적이다.
색소폰이 멜로디 한 부분을 연주하면 다음 파트를 건반이 받는 식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도록 만들었다. 색소폰이 연주를 혼자 다 하게 되면 경음악 느낌이 강해질 것 같으니 이를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장치를 심어 놓았다.

원곡에 비애나 그리움의 무드가 있다면, 쿠마파크 버전의 ‘연안부두’는 낭만적인 밤바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유명한 노래다 보니 작업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더더욱 틀어서 가기로 한 것 같다. 원곡이 안 떠오를 정도로 최대한 다르게 가고 싶었다. 작업하면서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바꿔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다행히 부평 측에서 온전히 저희에게 일임한 덕에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천-부평에 대해서 남는 기억이나 추억들이 있다면.
작년 10월 부평에서 열린 ‘뮤직게더링 2019’에 참가한 적이 있다. 솔직히 섭외가 들어오고 무대 직전까지도 인천이나 부평이 문화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는 사실을 그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올라가고 보니 그 거대한 규모에 그때 부평이 뭔가 풀어나가려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처음 작업 제안을 받으셨을 때 프로젝트에 대한 인상이 어땠는지.
엄청 좋았다, 참신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공공 단체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아닌가. 우리나라의 문화 투자는 국악이나 클래식이나 다르게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는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제안해준 것 자체가 언더그라운드와 상생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되게 재밌는 경험이었다. 급하게 연락이 온 것만 빼면. (웃음)

지자체나 문화재단 등에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많다.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서 의견이 혹시 있다면.
이게 소문이 잘 퍼져서 기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은데 조금 편향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일을 관장하시는 분들이 직접적인 관계자를 고용해야 이 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실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다소 엉뚱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좀 있는 것 같다. 아티스트와 지자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이 있다면 좀 더 많은 뮤지션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까.

2013년 정규 앨범과 2017년 EP 이후로 공백 기간이 꽤 길다.
일단 멤버들이 이 밴드만 하는게 아니고, 다들 바쁘게 세션맨으로 활동하다 보니 한번 만나기도 힘들다. 작업은 거의 저랑 키보드 치는 친구가 곡을 같이 만들고 파일을 보내면 각자 집에서 받는 방식인데, 이게 빨리 될 수도 있는 방식이지만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방식이다.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곡이 지겨워져서 버리기도 하고, 중간중간 지향점이 조금씩 변경되기도 하고. 물론 시간이 좀 걸려도 작업은 계속 해오고 있다.

오래 기다린 팬들에게 요즘 근황을 간략하게 말해주신다면.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올스톱 됐다. 원래 클럽에서 연주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모든 게 멈춘 데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태다.

그 말에 동감이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프로젝트가 많았을 텐데.
최근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 때 광진구 문화센터 쪽에서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라이브 셋’이라는 야외 공연의 제안이 왔다. 선우정아를 포함한 몇 팀이 공연하기로 했는데, 이 것도 지금은 바로 취소가 됐다.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경우 코로나 사태를 대비해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혹시 온라인 공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서 재미없다. 합주실에서 우리끼리 연습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원래 라이브는 좀 틀리고 부정확하더라도 분위기나 무드에 맞춰가며 와일드 하게 연주하는 맛이 있는데, 아무래도 관중의 반응이 없으니 좀처럼 흥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연습하듯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쿠마파크의 음악은 미국 힙합 프로듀서에 대한 존경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다. 힙합 마니아들에게는 힙합 쪽으로, 또 재즈 팬들에게는 또 재즈 쪽으로 각인되는 것 같다.
우리가 참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이,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힙합으로 보기도 하고 반대로 힙합 페스티벌에서는 재즈 밴드로 보는 경우가 있다. 첫 작품은 따로 정의한 건 없었는데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스타일의 재즈가 많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고, 두 번째 EP는 재즈 요소를 많이 뺀 인스트루멘탈 힙합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부평문화단체 LP에서 수록되는 음원은 좀 더 일렉트로닉한 느낌이다. 요즘에는 일렉트로닉한 성향의 신시사이저를 많이 활용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리더다 보니 최근 듣는 음악에 따라 스타일이 오가는 편이다.

그렇다면 최근 즐겨 듣는 아티스트는.
플로팅 포인츠(Floating Points)와 톰 요크(Thom Yorke) 솔로 앨범. 약간 미니멀한 쪽의 신시사이저가 들어간 그런 일렉트로니카를 자주 듣는다. 다음 차기작에 접목해볼까도 생각 중인데, 아무래도 밴드 성향이 흑인음악 쪽이다 보니 어떻게 ‘조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은 밴드가 재즈와 힙합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표현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하이브리드의 개념이 아닐까.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인스트루멘탈 힙합 밴드에 대해 낯설어 하는 감이 있다. MC가 없고 비트만 있는 힙합은 인기가 조금 없지 않나 싶다.

러브존스 레코드(Luv Jones Records)라는 레이블을 독립적으로 설립해 활동 중이다.
어릴 때는 음악을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 레이블이나 크루 같이 음악을 직접 하지 않아도 음악 관련 일을 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점차 그 쪽 관련 지인도 만나게 되면서 하기로 마음을 먹고, 에반스 사장님과 함께 만든 것이 러브존스 레코드의 시작이었다. 도중에 사장님이 다른 일로 옮기게 되면서 우리끼리 남아 해보겠다 말씀드렸다.

레퍼런스로 둔 곳이 있다면.
레이블보다는 오케이 플레이어(Okayplayer) 같은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한 밴드나 네오 소울 같이, 요즘 유행하는 힙합보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시대의 힙합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큰 움직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2010년대 말, 힙합 신에서 커뮤니티의 개념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확실히 선조격인 느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쿠마파크는 게스트 협업을 굉장히 많이 한 케이스기도 하다. 기억에 남는 협업이나 아티스트가 있는지.
누구 하나 기억에 안 남는 사람은 없는데, 처음 같이 작업하기도 했고 제일 접점도 많았던 팔로알토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다른 분들은 발매 공연까지만 같이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팔로알토는 저희 첫 앨범부터 EP까지 같이 한데다 케미도 잘 맞는 편이라 그 친구 곡을 저희가 연주하기도 하고, 하이라이트 공연에는 아예 저희가 게스트 밴드로도 참여도 했었다.

팔로알토 뿐만 아니라 김아일, 가리온, 소울다이브, 지투, 저스디스 등과 함께 작업했고, 크러시와는 ‘밥맛이야’에서 호흡을 맞췄다. 확실히 힙합으로 단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다.
앨범 내에도 보컬과 연주 트랙이 나뉘어질 만큼 어느 하나에 주력하기보다 개개인에게 분산되는 팀이라 협업에 있어 수월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작년까지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올해는 레이블 단위 활동은 줄어든 모습이다.
원래 소속 아티스트가 많이 있었는데 수민처럼 다른 곳으로 가거나, 군대나 시집을 가는 식으로 전부 흩어지는 바람에 지금 레이블에 있는 실질적인 아티스트는 쿠마파크 뿐이다. 앨범을 내고 그 후에 다시 레이블을 움직일 생각이다. 코로나 때문에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밴드는 서로 의견이 엇갈리거나 여러 이유에서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쿠마파크는 2017년 활동 멤버 그대로 팀이 유지가 잘 되는 편이다. 팀워크에 따로 비결이 있는지.
오히려 맨날 붙어 있으면 싸우게 되는데, 오랜만에 한 번씩 보고 하니까 팀이 안 깨진다. (웃음) 사실 말도 안되는 밴드인게 보컬(김혜미)은 지금 재즈만 하고 있고, 베이스(구본암)는 세션맨이지만 자기 음악을 따로 하는 친구다. 건반(황득경)은 싱어송라이팅을 하는 데다, 드럼(김영진)은 지금 ‘윤석철 트리오’에서 활동 중인데, 재즈 신의 제일 바쁜 드러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와서는 힙합을 하고 있다.

물론 밴드를 만들 당시 재즈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힙합음악을 연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만든 거지만,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다른 팀들하고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거기서 오는 시너지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내 욕심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지 고민도 했지만, 근데 또 다들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 깔려 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쿠마파크는 팀이기도 하지만 브랜드이기도 한데, 어떤 음악을 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일단 재즈 밴드다. 힙합도 하지만 재즈를 기반으로 한 다른 장르를 그때 그때 가지고 와서 변용을 한다. 물론 흑인 음악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여러 재밌는 시도를 많이 하려고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국악인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생황이라는 악기를 처음 봤는데,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 악기로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쿠마파크를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했으면 하나.
쿠마파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장르가 아닌 이미지나 그림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는데 얘네 음악은 이런 ‘느낌’이더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음악에는 어떻게 빠지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음악을 하기 전에 힙합 리스너였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주말에는 빌보드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 곡을 틀어주는 날이 있었는데, 그 때 맨 위에 차트들이 힙합이었던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반이었기에 미국에 사시는 어머니 친구분께 부탁드려 닥터 드레와 투팍, 스눕독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의 앨범을 소포로 받아 듣곤 했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음악을 찾아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즈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그렇다. 서울대입구 쪽 제가 자주 다니던 사계 레코드라고 아트록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 이였는데, 가게에 들어가면 청바지 쫙 달라붙고 느끼하게 머리를 기른 형이 음악을 추천해주곤 했다. 중3 이었나, 거기서 계속 힙합, 소울, 알앤비만 듣고 있으니까 주인 아저씨께서 그럴거면 재즈도 들어야 된다면서 한 음반을 알려줬다. 그 앨범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였는데, 집에 사 들고 오게 되면서 재즈에 빠지게 됐다.

재즈하면 색소폰이지만, 많고 많은 악기 중 색소폰을 하게 된 경위가 있는지.
색소폰은 정말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원래 미대를 가려고 미술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실용음악과가 가고 싶은 거다. 그 때 꿈이 힙합음악을 하는 토이였다. 힙합 프로듀싱을 내가 직접 해서 래퍼와 보컬을 초빙해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엄마한테 미술 다 때려 치고 음악하겠다 했을 때는 엄청 혼났다. 갑자기 무슨 음악이냐고.

그렇게 작곡 공부와 레슨을 받으면서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시험을 보려고 했다. 근데 서울은 작곡가 시험을 보려면 악기가 필요하다는 거다. 당시 나는 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고, 컴퓨터 미디나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작곡을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야, 색소폰 하는 사람이 없어. 기타는 쌔고 쌔서 잘 쳐야 되는데 색소폰은 좀만 불면 합격이야.”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웃음)

마지막 질문, 지금의 나를 만든 베스트 앨범을 뽑는다면.
재즈 중에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 ‘Round About Midnight >, 그리고 힙합에서 가장 좋아했던 앨범은 피트 락과 씨엘 스무스(Pete Rock & CL Smooth)의 < The Main Ingredient >다. 웨스트 코스트의 지훵크(G-Funk)나 이스트 코스트의 붐뱁만 듣다가 처음으로 재지한 샘플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접하게 된 순간이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7 이정선 X 윤병주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일곱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포크의 대부 이정선과 블루스 대표 주자 윤병주다.

정확한 수식인지 모르지만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로 음악인구에 회자되는 이정선 그리고 블루스 하면 떠오르는 뮤지션 윤병주를 함께 만났다. 근래 윤병주가 이끄는 프로젝트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은 막 ‘항구의 밤’이라는 곡을 원곡의 주인공 이정선과 함께 녹음했다. 10월에 발표할 음원을 미리 들어봤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귀를 잡아끈다.

이정선이 오래전 내놓은 곡을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을 위해 새로이 편곡해 레코딩한 것이다. 이 기획은 대중음악의 발상지라고 할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동시에 인천 부평 지역 뮤지션들을 찾아 음원제작으로 연결하는 ‘글로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밴드 ‘지인들’의 멤버 중 한 명도 이곳 인천 출신이다.

이들의 조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윤병주와 지인들은 전에도 이정선의 곡 ‘거리’와 ‘우연히’를 리메이크해 싱글로 낸 바 있다. 얼핏 음악적 관련성이 떨어져 보이는 둘의 연(緣)이 어떻게 맺어진 건지 궁금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재미있게’ 음악을 하려는, 어쩌면 음악가의 기본을 강조하며 음악 녹음의 즐거움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이정선의 곡인 ‘항구의 밤’을 녹음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정선이 직접 노래까지 했는데… 그 많은 곡들 가운데 왜 하필 ‘항구의 밤’을 고른 건가?
윤병주: 사실 애초 (이)정선 형의 곡들 중에서 딱 그 곡을 원했던 건 아니다. ‘바닷가의 선들’도 있고 기존에 내가 해오던 블루스, 록적인 색채를 잘 살릴 수 있는 형 노래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색다른 도전이었다고 할까. 안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도 직접 해보면 결국 우리 음악의 맛이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다고 본다. 부평구문화재단 기획대로 인천이 항구라는 점도 생각했고…

‘항구의 밤’이 어떤 곡인지 알려 달라.
이정선 : 이 곡은 1990년에 나온 앨범 < 雨 >에 수록되어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단출하게 어쿠스틱 기타 하나 가지고 만든 노래였다. 이번에는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과 함께 하는 만큼 더 리얼하게 항구의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다. 시끄러운 선술집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복작복작한 느낌?…

원곡이 슬픈 감정을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번 음원의 보컬은 상대적으로 밝게 느껴진다.
이정선 :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원래 즐거울 때가 더 슬픈 거 모르나? (웃음) 원래 ‘항구의 밤’이 그렇게 슬픈 노래는 아니다.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을 담고 있다.

윤병주 : 오랫동안 이정선 음악을 들어 왔다. 어릴 때 들은 정선이 형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근래 공연에서 받은 느낌은 또 다르더라. ‘항구의 밤’에서의 보컬은 뭐랄까… 또, 또 다른 제3의 보이스컬러였다. 확실히 정선이 형 연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깊이가 존재한다. 젊을 때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있었다면 나이가 쌓인 지금 옛 노래를 부르니 맛이 또 다를 수밖에…

‘항구의 밤’에 블루스의 터치가 강하게 느껴져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얼핏 윤병주와 이정선 간에 음악적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한국에서 블루스를 밴드 명으로 내세우며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표방한 게 바로 엄인호와 정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촌 블루스’ 아닌가?
이정선 : 1970년대 초에 음악을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다. 시작은 그렇게  재미였는데 한 10년 쯤 음악계에 있다 보니 바로 그 재미가 사라졌다. 다 돈과 연결되니까 즐거움을 좇으며 활동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엄)인호를 만나서 그냥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재밌게 음악 한번 해보자’ 하면서 음악 동호회 느낌으로 ‘신촌 블루스’를 만든 것이다.

그래도 당시 블루스를 내걸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정선 : 공연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카페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주로 놀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 관심 있는 장르도 다르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좁히고 좁히다 보니 블루스만 남더라. 그래서 블루스를 했다. (웃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게 블루스는 늘 편한 음악이다. 어렵게 만들고 싶으면 어렵게 만들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쉽게 만드는. 어떻게 해도 내 음악적 뿌리는 늘 블루스에 닿아있다. 많은 분들이 나를 포크로 연관 짓지만 실은 블루스다.

윤병주는 이름만 들어도 즉각적으로 블루스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윤병주 : 블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음악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젼 시기, 그러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 음악이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블루스에 영향받은 록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연주를 하면 블루스적인 게 늘 풍겨 나온다. 그만큼 내 몸에 블루스가 배어 있다.

‘노이즈가든’을 거쳐 ‘로다운 30’ 그리고 새 프로젝트인 ‘윤병주와 지인들’ 역시 블루스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윤병주 : 물론 멤버 변동이 있긴 했지만 ‘로다운 30’은 함께 모여 작업을 시작한 게 2000년이다. 반면 ‘지인들’은 멤버들 각자 밴드들인 ‘소울트레인’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관계가 조금 더 느슨하다. 그룹의 모태는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다. 1960년대 활동한 미국 밴든데 그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한다. 블루스도 하고 잼도 계속한다. 요즘 미국 쪽을 보면 결국 다 잼과 루츠(Roots)록 쪽 음악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우리도 비슷하다. 다 내려놓고 실컷 연주나 해보자 싶었다. 정선이 형 곡 하나로 무대에서 십 분씩 연주하고 그랬다.

‘지인들’을 통해 꼭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윤병주 : ‘로다운 30’은 당연 창작 곡이라면 ‘지인들’은 커버(Cover). 즉 기성곡을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원래 커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커버를 녹음해서 발표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안 해본 거라는 것에 끌렸다고 할까. ‘항구의 밤’(10월에 발매 예정)도 그렇고 올해 초 제작한 ‘거리’, ‘우연히’가 모두 이정선 선생님의 곡이다.

윤병주가 리메이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땠나?
이정선 : 뭐 좋았다. (웃음) 근데 ‘거리’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나 싶긴 했다. 이게 내 정규 1집 < 이정선 1집 >(1974)에 수록된 곡인데 그 음반이 나오자마자 딱 금지가 됐다. 11곡 중에서 9곡인가가 금지됐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한데…
이정선 : 병주가 참 맛있게 기타를 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노이즈가든 때의 윤병주가 회상될 만큼 ‘윤병주스러운’ 기타 톤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노이즈가든을 알았느냐 물으니)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부터 음악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윤병주 : ‘거리’를 녹음할 때 정선이 형이 피처링에 참여해주지 않으실 걸 대비해 다른 버전의 연주까지 다 맞춰 뒀었다. 이 곡을 커버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형이 함께해주길 바랐는데 다행히 흔쾌하게 승낙해주셔서 고마웠다. 늘 외국 팝을 듣던 내게 국내 블루스 음악의 강렬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니까 여러모로 뜻깊기도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윤병주 : 2011년 즈음, 한 레이블의 축하 연주를 ‘로다운 30’하고 정선이 형이 같이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만나서 ‘건널 수 없는 강’, ‘우리네 인생’, ‘우연히’, ‘오늘 같은 밤’을 포함해서 네 다섯 곡 정도를 함께 했다.

함께 작업하는데 음악적 트러블은 없었는지?
이정선 : 합을 많이 맞추려고 하면 더 틀려진다. (웃음) 요즘 시대는 어지간한 비트가지고서는 세다고 느끼지 않지 않나. 그래서 나는 윤병주와 지인들이 기타나 리듬을 더 강하게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엔지니어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안 싸우려고 그냥 뒀다. (일동 웃음)

윤병주는 이정선과의 작업이 주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윤병주 : 내가 처음 팝을 들은 게 초등학교 때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 롤링스톤 >같은 외국 록 잡지를 보셨고 그 영향으로 나도 < 월간 팝송 >을 끼고 살았다. 그랬으니 우리나라 밴드 음악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겠나. 그러다 우연히 정선이 형의 최신 음반을 사서 듣게 됐는데 형이 자주 하는 말처럼 한국적인 ‘뽕’스러움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다. 지미 페이지 연주에서나 나오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블루스가 솟아 나왔다. 그 이후로 정선이 형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다.

편곡 과정은 수월했나?
병주 : ‘항구의 밤’은 형이 무대에서 종종 연주하기도 하는 곡이다. 특히 < EBS 스페이스 공감 >이나 < 온스테이지 > 영상이 좋다. 그 질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녹음도 빨리 끝난 편이다.

이번 음원제작은 부평구문화재단 기획의 일환이다. 많은 지자체나 문화재단들이 공공재원으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할 건 없는지 말해 달라.
이정선 : 좋은 기획이고 재밌는 프로젝트다. 나는 공공 재원으로 음악 신을 지원하는 사업을 좋게 보고 있다. 다만 음악에 대한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늘 최선을 다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색을 잃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간섭이 전혀 없어서 좋았다. (웃음)

함께 작업하면서 선배에게 배운 것이 있었을 텐데…
윤병주 : 정선이 형은 항상 음악을 “재밌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곁에 있으면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또 하고 싶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내 음악이 지금 이 시대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안절부절 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늘 지금에 행복할 수 있는 마음. 20, 30년 후에 정선이 형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갖고 싶을 만큼 많은 걸 배웠고 또 영향을 받았다.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선희
사진 : 임선희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Categories
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6 리듬파워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자·타칭 ‘인천의 아들’ 리듬파워다.

안주하지 않는 자세와 자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끈끈한 우애가 돋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힙합이란 꿈을 함께 좇은 리듬파워의 시작은 탄탄대로였다. 처음 쓴 자작곡으로 굵직한 오디션을 한 번에 통과하는가 하면 200:1의 경쟁률을 뚫고 다이나믹 듀오가 수장으로 있던 < 아메바 컬쳐 >에 들어갔다. 이후 이들이 세상에 확실한 카운터펀치를 날리기까지 자그마치 7년의 시간이 걸렸다. 특유의 재치 있는 가사와 에너지를 쏟아냈지만 대중의 너른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29. 멤버 보이비의 입대까지 겹치며 리듬파워는 정체기를 마주한다.

3년에 걸쳐 매회 출연한 < 쇼미더머니 >는 멤버 행주의 말에 따르면 애초 퇴로가 없는 ‘유일한 선택’이지만 결국은 회심의 일격이 됐다. “우린 놀러 나간 게 아니었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 얼마 전 오랜 시간 함께한 < 아메바 컬쳐 >를 나와 < 팀플레이 뮤직 >을 직접 설립한 그들에게 지난날의 소회 그리고 앞으로 밟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막 2막을 연 리듬파워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얼마 전 10년간 함께한 소속사 ‘아메바 컬쳐’에서 독립했다.
행주 : 설렘 반, 아쉬움 반이다. 소속사를 나오면서 멤버들끼리 ‘팀플레이 뮤직’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옛날에는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니 설레는 마음이 들더라. 반면, 아메바 컬쳐에서 10년, 무려 10년간 있으며 쌓인 어마어마한 정 때문에 아쉬움도 컸다.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마음이 좀 이상했다.

회사 설립은 오래전부터 꿈꿨던 건가?
보이비 :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다. 우리들끼리 뭔가 해보는 것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스텝 중 하나가 회사였다. 장기적인 커리어를 봤을 때 계속해서 형들(아메바 컬쳐의 설립자이기도 한 다이나믹 듀오)과 함께하는 게 좋을까 자립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해왔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쯤 의견을 확실히 모았고.

팀플레이 뮤직에서의 활동은 아무래도 과거와는 다를 것 같다.
지구인 : 아메바 컬쳐에 있을 때는 회사의 규모도 크고 색이 뚜렷하다 보니 즉각적인 아이디어 실현에 제약이 있었다. 우리끼리 해보려한 이유들 중 아이디어를 흐름대로 속도 있게 가져가 보자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행주 : 대중들 입장에서는 ‘쟤네가 왜 나왔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냥 우리 곡을 들려주고 싶다. ‘아 이런 음악을 하고 싶어서 나왔구나’ 알 수 있을 거다. (웃음)

음악 스타일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는 건가?
보이비 : 따지고 보면 예전에도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어떤 대중적인 노선이 고려됐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달려졌지 않나. 우리도 이제 막 시작해서 예측에 머물긴 하지만 곡 단위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 같다. 어떤 곡은 엄청 대중적이고 또 어떤 곡은 엄첨 비대중적이고. 중간노선은 잘 안 걸을 것 같다.

행주 : 때마침 오늘 ‘팀플레이 뮤직’의 첫 싱글들이 발매된다. ‘Anycall’과 ‘T3AMPLAY’. 우리의 첫 출사표이자 자영업자의 포부를 담았다. 우선은 이 곡들을 즐겨 달라. (웃음)

싱글에 대한 소개를 조금 더 해준다면?
보이비 : ‘T3AMPLAY’는 회사 이름과 동명이다. 대찬 포부를 선전포고하는 느낌? 이 곡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Anycall’은 과거다. 10대 후반부터 20대에 겪은 것들이 한 사람의 취향에 많은 부분 영향 미친다. 그 시절이 우리에게는 넵튠스(The Neptunes)다. 항상 넵튠스의 클럽튠이 가슴 속에 남아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아 이 스타일은 아직 아무도 안 했지 싶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사운드에 더 중점을 둬 작업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다. 각자가 기억하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있을 것 같은데.
지구인 : 처음 공연했던 2008년. 우리끼리 그냥 인천 술집에서 언젠가 공연해보자는 말만 하다가 처음으로 UMF(Underground Microphon Federation) 오디션에 나갔다. 팔로알토, 피타입, 슈프림팀 등이 거쳐 간 나름 큰 공연 브랜드다. 23살쯤이었는데 긴장해서 어떻게 무대를 끝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웃음) 홍대의 수 노래방 쪽을 걸어가다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기뻤다. 돈이나 명예는 지금 훨씬 많이 가졌지만 ‘기쁨’의 크기는 그때가 제일 컸던 것 같다.

행주 : 곡을 만든 것도 처음이었고 셋이 합을 맞춰서 무대에 선 것도 처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경으로, 젊음의 패기로 무작정 공연했다.

보이비 : 데모 파일명을 그대로 노래 제목으로 썼다. ‘빅바운스’. 내 첫 소절은 ‘Make it rain(돈을 뿌리다)’ 였다. (일동 웃음)

행주 : 난 아메바 컬쳐와 첫 도장 찍었을 때다. 그전까지는 그저 방구석에서 곡 만들고 이유 없는 자신감만 있었다. 그때 회사 오디션 경쟁률이 200:1 정도라고 들었다. 그냥 무작정 부딪혔고 바로 뽑혔다. 솔직히 왠지 모르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긴 했다. (웃음) 다이나믹 듀오 형들은 힙합 신에서 최고의 우상 같은 존재인데 그 사람들이랑 계약하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홍대 멀티샵에 가서 각자 티 하나, 모자 하나씩 사고 부모님한테 돈을 보내드렸다. 만화의 한순간이지 않나.

높은 경쟁률을 뚫을 수 있던 이유가 뭘까?
지구인 : 형들이 군대에서 국군 방송 라디오를 진행했다. 당시 우리는 EP 하나를 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슬슬 이름이 알려질 때였는데 형들이 우리를 게스트로 초대했다. 목이 터져라 라이브를 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보이비가 꼽는 변곡점은?
보이비 : 군 입대. 솔직히 기존에 냈던 EP 두 장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음악적인 성과도 미비하지 대학 졸업도 못 했지 나이는 29이지. 팀을 그만두거나 해체할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한 명이 군대를 가야 하는 거니까 여러모로 각성이 많이 됐다.

행주 : 보이비가 군대를 갔을 때 처음으로 < 쇼미더머니 > 출연을 생각했다. 절실함을 넘어서서 다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컸는데 그걸 나도 그렇고 보이비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 계기 및 발판이 보이비의 입대다.

지구인 : 친구 관계는 계속 가겠지만 어쩌면 리듬파워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보이비 군대 들어갈 때 셋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 쇼미더머니 >로 변화를 좀 만들어보자 했는데 결론적으로 좋은 한방이었다.

< 쇼미더머니 >가 리듬파워 성장에 큰 활력을 줬다.
보이비 : 군 제대 하고 나는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뒤도 보지 않고 올라갈 길만 남았다 그렇게 믿고 했다.

행주 : 개개인으로 봐도 팀으로도 봐도 < 쇼미더머니 > 출연은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래퍼들이 ‘놀러 나왔다’ 이렇게 인터뷰를 종종 했는데 우리는 아니었다. 그런 거와는 달랐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구인 : 쿨한 척 하고 싶지 않았고 매 방송에 진지하게 임했다. 방송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봤을 때도 래퍼를 내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행사를 가면 불특정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었다면 이제는 아니다. 어딜 가든 우리를 아는 사람들 앞에 선다. < 쇼미더머니 >가 확실히 우리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줬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은 각별하다. 그들 스스로 몇몇 인터뷰에서 ‘인천의 아들’이라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고 실제로 2년 간 인천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특히나 그들은 한국 힙합에서 그간 지양되어 온 지역 색을 음악에 반영하는 이른바, ‘샤라웃(Shout out)’을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선도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을 회상하는 ‘바보언덕’, 동성로에서의 일탈을 그리는 ‘동성로’, ‘인천 출신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 노래하며 래퍼로서의 자부심을 다지는 ‘인천공항’ 등에서 그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행주와 지구인은 중학교, 보이비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걸로 안다. 어렸을 때부터 다 같이 힙합을 들었던 건가?
지구인 : 중학교 때 서태지에 엄청 빠져있었다. 서태지가 랩 메탈을 우리나라에 가져오지 않았나. 그 노래들을 듣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고 이후 림프 비즈킷, 린킨 파크의 음악을 밤새 팠다. 그러다 고2때 린킨 파크가 내한을 왔는데 힙합을 좋아하던 보이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거기에 행주까지 합류하게 됐고.

행주 : 힙합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건 거의 전부 이 친구들의 영향이다. 나는 그냥 음악을 듣고 부르기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남들이 쭈뼛쭈뼛할 때 제일 먼저 손들고 앞에 나가서 소리 내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우리 때는 힙합이 제일 비주류였는데 옆에 힙합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들이 나서길 좋아하는 나와 자연스레 맞아떨어졌다.

지구인 : 20살이 돼서는 행주가 학교를 빠지고 내가 있던 신촌으로 넘어오면 다 같이 향뮤직에 출근하다시피 갔다. 한두 시간 동안 거기서 음악 듣고 고르고 고른 CD 한두 장 사서 인천에 오고 그랬다. 인천이 방이 되게 싸다. 연습실이 없으니까 한 명이 CDP를 들고 오고 인천에 방 하나 잡아서 랩하고 가사 쓰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진짜 좋지 않을까 얘기도 자주 나눴다. (웃음)

가사나 뮤직비디오에 인천이 자주 등장한다.
보이비 : 어린 시절 우리가 듣고 자란 힙합은 늘 자기의 지역색을 반영했다. 자기가 살아온 곳을 샤라웃하는 거다. 래퍼들이 자수성가해서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게 자연스러운 특성이었다면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었다. 그걸 거의 우리가 처음 했을 거다.

행주 : 2010년에 EP < 리듬파워 >를 냈다. 거기 보면 ‘인천상륙 작전’이라는 곡이 있는데 그걸 쓸 때쯤 아 우리나라 래퍼들은 자기 지역 얘기를 잘 안 하네 깨달았다. 힙합하면 홍대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자연스레 씬들도 홍대에 집결돼 있었다. 우리가 먼저 아이덴티티를 꺼내야겠다는 본능이 있었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이란?
지구인 : 요즘은 힙합씬에서 자기 출신을 밝히는 게 많아졌다. 창모도 그렇고 제이통도 그렇고. 동료 뮤지션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우리의 샤라웃에 영향 많이 받았다고 말할 때 자부심이 든다. ‘바보언덕’, ‘인천공항’, ‘동성로’ 등 인천에 관한 곡들도 많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이 인천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큰 음악적 영감이 된 건 확실하다.

행주 : 사실 한국에서 음악에 지역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곳으로 부산을 종종 떠올리는데 인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뱃사공이나 슬리피도 다 인천 출신이다. 2017년부터 2년간 리듬파워가 인천 홍보대사를 했다. 이거 한다고 해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엄청 큰 뿌듯함을 느낀다. 현실적으로 보면 누군가에게 혹은 인천에게 멋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홍보대사를 맡긴 게 아닌가. 10년 뒤에도 인천 홍보대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만의 커리어를 밀고 나가고 싶다.

10년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지금 위치에 만족하는 편인가?
보이비 : 전혀 아니다. 아직도 올라갈 곳이 엄청 많이 남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지만 불과 재작년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재정적인 여유도 있고 삶에 안정감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거기서 나왔다. 조금 더 바깥세상에 발 디딤으로써 시쳇말로 올라가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로 가보자 했다. 전 회사에 계속 남았다면 안정적으로 오래 머물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가진 못했을 거다.

지구인 : 돌이켜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환경의 변화가 컸다. 늘 어떤 공간에 우리를 밀어 넣었다. 큰 성공을 하면서 말년병장의 나태함이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딱 좋을 시기였는데 이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2막을 열어서 치고 올라가야 한다. 또 보니까 딱딱 계획 세운 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얼추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 더 높은 정점을 꿈꾸고 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일단 해보려 한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지구인 : 우리가 떼창을 진짜 잘 뽑아낸다. 그걸 보여줄 수 있게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꽉 채운 단독 콘서트를 열고 싶다. 아님 DJ DOC 형들이나 싸이 형이 한 것처럼 풀 파티도 해보고 싶고.

보이비 : (왜 풀 파티냐고 묻자) 그 시대에서 제일 신나는 음악을 하는 팀이 되고 싶다.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도 풀 파티를 했었다. 베이스는 힙합이지만 여기 가면 제일 신나게 놀 수 있는 파티 넘버원 콘서트.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좀 다르지만 합쳐지면 터지는 어떤 시너지가 있다. 유쾌하고 강한 에너지라고나 할까. 그걸 한껏 보여주고 싶다. (웃음)

각자의 베스트 음반도 궁금하다.
행주 : 팔로알토 형의 언더그라운드 시절 앨범들을 다 좋아한다. 처음으로 돈 주고 산 외국 앨범은 에미넴의 < Curtain Call >. 그의 히트곡만 모아 놓은 음반이다. 래퍼로서 색을 잡게 도움 준 뮤지션은 푸샤 T고 또 요즘은 윤종신 선배님의 행보를 롤 모델 삼고 있다.

보이비 : 2003년에 MBC < 음악캠프 >에서 렉시의 ‘Let me dance’ 무대를 봤다. 그때 테디(Teddy)가 피처링이었는데 그 모습에 홀딱 반했다. 톤이며 랩이며 퍼포먼스며 다 그냥 아주 끝내줬다. 또 꼽자면 대학교 때 힙합 동아리 방에서 나스(Nas) 곡에 피처링으로 등장하는 루다크리스를 우연히 보고 그의 플로우 디자인과 발성을 따라 하다 목이 맨날 쉬기도 했다. (웃음) 인간적 매력이나 가사 쓰는 스타일에는 제이 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구인 :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자면 린킨 파크 1집 < Hybrid Theory >, 림프 비즈킷 2집 < Significant Other >가 있고.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 싱크, 웨스트 라이프도 되게 좋아했다. 맥스 마틴 특유의 그 팝스러운 곡들이 취향에 맞았다. 힙합은 다이나믹 듀오의 < Taxi Driver >, 제이 지의 < The Black Album >, < The Blueprint >…. 여기 까지만 할까요? (일동 웃음)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동엽, 조지현, 장준환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