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록 페스티벌의 마지막 보루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이 지난 4일 막을 올렸다. 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하는 등 행사 기간 불볕더위가 전국을 뒤덮었지만 이열치열 피서를 택한 약 15만 명의 인파가 한국의 록 명절을 위해 송도달빛축제공원으로 집결했다. 관객들은 기록적인 폭염에도 개의치 않고 언제나처럼 환희에 젖어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현장의 열기를 목격한 이즘 에디터들은 적어도 축제가 열린 3일간 록의 불모지란 자조적 별명을 말끔히 잊을 수 있었다. 얼음물과 시원한 맥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바라본 뜨거운 청춘의 향연, 2023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최고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김성욱 필자

엘르가든(금)
페스티벌의 축포는 엘르가든이 쏘아 올렸다. 지난 2008년 이후 15년 만에 다시 펜타포트 무대에 오른 베테랑 로커들은 과거 국내 CF에 삽입된 ‘Make A Wish’, ‘My Favorite Song’과 같은 히트 메들리와 지난해 신보 < The End of Yesterday >를 교차로 퍼부으며 금요일 밤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2008년부터 약 10년의 공백기를 가진 밴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노련한 무대였다. 지천명의 록스타는 80분의 러닝타임 동안 20곡 이상을 쏟아냈고, 세트리스트 중간 ‘감사합니다’란 인사를 잊지 않으며 관객과 호흡했다. 메인 스테이지를 가득 메운 군중들은 앵콜 타임에 울려퍼진 국내 애창곡 ‘Marry Me’를 끝까지 따라 부르며 최고의 연주를 선물한 헤드라이너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국 내 J팝 열풍을 체감한 엘르가든은 무대 직후 단독 내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이디오테잎(토)
과거 펜타포트는 하드록 밴드들을 라인업에 대거 포진시키며 ‘록 마니아’의 열렬한 지지를 획득했다. 현재는 대중성을 아울러 진입장벽을 허물었지만 특유의 관객 문화는 DNA처럼 계승됐다. 올해 역시 공연장 곳곳에 슬램 핏이 형성되고 그 사이로 수백의 관중이 부딪히며 슬램을 즐겼다. 페스티벌 기간 슬래머들의 활약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은 메탈 밴드도, 당일 헤드라이너인 스트록스도 아닌 국가대표 일렉트로닉 그룹 이디오테잎의 무대다.
둘째 날 저녁 깃발 부대의 도열 속 모습을 드러낸 트리오는 ‘Pluto’로 포문을 연 뒤 프로디지와 케미컬 브라더스, 그리고 다프트 펑크의 클래식 넘버를 고루 배치해 현장을 장악했다. 전주만으로 탄성이 터져 나온 비스티 보이즈의 ‘Sabotage’와 대표곡 ‘Melodie’를 포함해 세 멤버는 별다른 멘트 없이 한 시간 동안 명품 셋리스트를 몰아치며 구름 떼 인파를 지휘했다. 이디오테잎은 2주 전 영국 슈게이즈 밴드 라이드가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대체자로 급히 투입되었다. 이들은 구원투수이면서 동시에 토요일의 지배자였다.
염동교 필자

장기하(금)
전위적인 음악과 안무를 결합한 2022년 < 공중부양 > 콘서트를 펼쳤던 장기하가 록밴드 포맷으로 돌아왔다. 장기하와 얼굴들을 함께했던 드러머 전일준과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가 참여한 싱글 < 해 / 할건지 말건지 >로 록의 갈급을 털어낸 그는 지난 4월 600석 규모의 무신사 개러지에서 단독공연 < 해! >를 펼쳤다.
무신사 개러지에서 송도달빛공원으로 확대된 무대에서 데뷔 16년 차의 프론트퍼슨은 노련했고, 넥스트의 신해철을 연상하게 하는 조련에 관객들은 일사불란했다. ‘빠지기는 빠지더라’와 ‘그렇고 그런 사이’부터 < 공중부양 >의 ‘부럽지가 않아’의 ‘가만 있으면 되는데 자꾸만 뭘 그렇게 할라 그래’의 밴드 버전과 신곡 ‘해’까지 경력을 망라했다. 오래된 전우가 주는 안정감과 밴드 밴디지 출신 신현빈(기타)와 손도현(키보드) 등 젊은 연주자의 활기에 프론트퍼슨의 에너지 레벨도 유독 높아 보였다.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옮아간, 전이(轉移)의 시간이었다.

잠비나이(토)
유일무이. 잠비나이가 생성한 활자다. 짧고 굵은 첫 곡 ‘소멸의 시간’에 마비된 감각은 순서가 끝날 때까지 풀릴 줄 몰랐다. 잠비나이 사운드가 신체 한 바퀴를 크게 훑고 갔달까. 탑에 벽돌을 올리듯 쌓아가는 소리 탑엔 ‘국악 프로그레시브 록’, ‘국악 포스트 록’ 등의 명명이 부질 없었다. 그저 잠비나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리더 이일우의 절규와 국악기와 양악기의 일합이 에어포트 스테이지의 대기를 채웠다. 해금이 신비로움을 발산하다 후반부 기타 굉음과 주문에 가까운 보컬이 오컬트적 색채를 자아내는 ‘온다’와 반복적인 거문고 리듬에 급작스런 메탈 사운드를 끼얹는 ‘그들은 말이 없다’처럼 잠비나이의 음악은 다변적이고 도식화를 거부했다.

스트록스(토)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의 핵심, 새천년 가장 스타일리시한 밴드라는 상징성은 더 스트록스를 ‘꼭 한번 라이브 보고싶은 밴드’에 올려놓았다. 2006년 펜타포트에서 첫 내한을 펼쳤으니 여러모로 이 축제와 인연이 깊은 스트록스는 건반이 두드러진 신스팝 ‘The adults are talking’ 2020년 근작 < The New Abnormal >의 ‘Bad decisions’ 이 20년 역사를 가로질렀지만 역시 데뷔작 < Is This It >에서 커다란 호응이 터져 나왔다. 명징한 베이스라인의 ‘Someday’와 ‘Is this it’이 소환한 < Is This It >과의 첫 기억, 그 흥분감은 ‘Last nite’에서 절정에 달했다.
호불호가 갈렸다. 나사 풀린 듯한 줄리안 카사블랑카스의 퍼포먼스(술에 취했다는 루머가 있다)와 앙코르 포함 14곡의 적은 숫자도 아쉬움을 남겼지만, 후지 록과 펜타포트를 함께 다녀온 이에 의하면 줄리안의 컨디션 자체는 후자가 나았다고. 여러 가지 결함에도 기타리스트 알버트 해먼드 주니어의 톤 메이킹을 위시한 다채로운 음악색과 포스트 펑크와 뉴웨이브를 가로지르는 스펙트럼이 돋보였다.

진저 루트(GINGER ROOT)(일)
펑키(Funky) 리듬에 눈이 번뜩 뜨였다. 맷 카니(드럼)와 딜런 호비스(베이스), 카메론 류(보컬, 키보드)로 이뤄진 미국 인디밴드 진저 루트는 베이퍼웨이브와 퓨처 펑크 류의 복고 음향으로 송도달빛공원의 밤하늘을 채색했다. 일렉트릭 라이트 오케스트라와 버글스를 반추하는 오토튠과 각종 디바이스가 연결된 포터블 신시사이저는 듣는 재미를 배가했다. 일본 시티팝 풍 무대 영상은 ‘Loneliness’의 낭만성을 부각했고 ‘Everything’s alright (meet you in the galaxy ending theme)’엔 공상과학물과 소녀만화의 심상이 공존했다.
두 곡을 비롯해 2022년에 발매한 EP < Nisemono > 수록곡을 셋리스트 대부분으로 꾸린 진저루트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사카모토 류이치와 그가 소속했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트리뷰트 메들리도 준비했다. ‘Tong Poo’와 ‘Firecracker’, ‘Rydeen’의 재해석은 아시아계 중국인을 프론트퍼슨으로 둔 밴드의 음악 원천과 지향성을 가리켰다.

김창완밴드(일)
상투적 표현이나 ‘살아있는 전설’보다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 산울림의 맏형 김창완을 주축으로 한 김창완밴드는 3일 축제의 대미를 장식했다. ‘아니벌써’ 와 ‘너의 의미’ 등 산울림 클래식부터 김창완밴드의 ‘중2’까지 40여 년 타임라인을 80분에 농축했다. ‘내 마음의 주단을 깔고’의 전주의 주술에 걸린 듯 몸을 비틀어 댔고, ‘개구쟁이’에선 모두 함께 하늘 위로 솟았다. 베테랑 멤버들은 산울림의 아마추어리즘과는 또 다른 질감의 음악성을 드러냈고 어쩌면 산울림보다는 김창완밴드가 펜타포트 같은 대형 축제엔 더 잘 어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옆 소녀 “새소년 보고 집에 돌아가려고 했는데 미안해요. 아저씨”를 외쳤다. 그는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의 신비로움에 감화되었고, ‘기타로 오토바이타자’의 진보성에 충격받았을 테다. 한국적 가락과 사이키델릭이 뭉쳤던 1977년 곡 ‘청자’는 46년이 흐른 현재의 무대에서 국악인 안은경의 태평소를 곁들인 ‘아리랑’으로 현신했다. 마지막까지, 김창완다웠고, 산울림다웠다.
리드 글 : 김성욱
글 : 김성욱, 염동교
사진 : 예스컴이엔티 제공, 염동교(스트록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