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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가수유랑단, 시대를 관통하고 세대를 통합하다.

지난 5월 25일 tvN 새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의 막이 올랐다. 시작은 지난해 <서울 체크인>에서 던진 한마디에서 출발한다. “여가수 유랑단을 하면 어떻겠냐”는 이효리의 가벼운 제안이 현실이 됐다.

김완선, 엄정화, 이효리, 보아 그리고 화사가 모였다. “우리가 바라던 무대,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목표로 이들이 한데 뭉쳐 전국을 돈다. 해군사관학교의 작은 강당, 3천여 명의 인파가 모여든 진해군항제 폐막식, 대학가 축제 현장. 이들의 유랑 길이 그 규모를 가리지 않고 펼쳐진다.

여자, 댄스, 가수가 되기까지

대한민국에서 여자, 댄스, 가수로 살아남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은 그나마 시선이 나아졌지만 맏언니 김완선이 데뷔한 1980년대의 분위기는 달랐다. 몸을 흔드는 댄스. 육체에서 분리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퍼지며 작은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게 되었을 때,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물론 1960년대 ‘키다리 미스터 김’으로 큰 인기를 끈 이금희가 댄스 음악의 원조라 불리기는 하지만, 오늘날 ‘댄스 가수’란 호칭을 굳힌 건 명백히 김완선이다. 17살의 어린 나이에 <독집 제1집>이란 음반으로 데뷔했을 때부터 그가 내세운 건 ‘섹시한 분위기’였다. 트레이드 마크 격인 비음으로 “나 오늘 밤엔 어둠이 무서워요”라고 노래를 부르고, 신체를 적극 활용한 과감한 율동을 선보였다.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댄스. 비슷한 시기 소방차, 박남정 등이 댄스 가수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김완선이 불어온 반향에 미치지는 못했다. 폐쇄적이고, 엄숙한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김완선은 은근히 섹슈얼한 면모를 어필하고 이를 압도적 카리스마로 표출하며 그 빈틈을 파고든다. ‘나홀로 뜰앞에서’, ‘리듬 속의 그 춤을’, ‘나홀로 춤을 추긴 너무 외로워’,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로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댄스 가수임에도 산울림의 김창훈, 신중현, 이장희 등 거물급 록, 포크 뮤지션에게 곡을 받으며 장르의 다양성을 포용했고, 춤뿐만 아니라 노래 완성도에도 신경을 썼다.

섹시 가수 우상이 되다

1990년대 박진영이 남성 댄스 가수로 이름을 펼치기 전까지, 댄스 가수는 대부분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물론 박진영 이후에도 댄스는 대한민국에서 여성이 장르의 대표성을 장악한 몇 안 되는 분야다.

엄정화표 댄스 음악에는 스토리가 있었다. 1993년 고 신해철이 써준 ‘눈동자’로 음악계에 발을 디딘 그는 데뷔 초 가수보단 배우로 더 조명을 받는다. 분위기가 반전된 건 1997년 발매한 정규 3집 <후애>의 수록곡 ‘배반의 장미’부터였다. 노래 가사에 맞춰 특유의 표정 연기를 선보이고 몸매의 곡선을 그대로 부각한 의상 등은 대중에게 엄정화의 이름을 아로새긴다. Y2K 새천년의 시작과 종말을 앞둔 때에는 테크노 곡 ‘몰라’로 시대를 응축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엄정화는 ‘Poison’, ‘초대’ 등의 곡을 통해 이별 후의 감정,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사랑의 과정 등을 노래하며 제 영역을 구축한다. 반면 이효리는 시작부터 강했다. 요정 콘셉트의 그룹 핑클에서 솔로로 재도약한 2003년부터 그가 내세운 건 주도적이고 주체적이며 당당한 여성상이었다. 10분 만에 널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노래하는 ’10 MINUTES’가 그 시작. 당시 유행한 힙합 사운드를 바탕으로 카고 바지에 크롭탑을 입고 무대를 활보하던 이효리의 모습은 뭇남성은 물론 여성의 마음까지 훔친다.

몇 차례 표절 관련 문제로 몸살을 앓긴 했지만 이효리는 그야말로 꾸준히 내 것을 하며 길을 개척했다. ‘섹시함’에 집중되어 있던 노래들이 외적 이미지에서 개인 서사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보다 친근한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는데 ‘천하무적 이효리’, ‘이발소 집 딸’ 등의 노래가 꼭 그랬다.

인디 음악가와 협업하며 댄스에 로큰롤, 포크 등의 소스를 이식하고 가장 최근 발매한 정규 음반 < Black >(2017)에서는 일렉트로니카, 트립합을 끌어오기도 했다. 셀프 프로듀싱 및 작사 작곡 비중도 상당하다. 음악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풀어나감에 있어, 대중과 호흡함에 있어 어떤 성숙이 이뤄졌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No.1’과 ‘Ending Credit’. 시대를 관통하고 세대를 통합하다

이러한 언니들이 ‘No.1’을 부르는 보아의 모습을 보며 눈물짓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다. 특히 보아는 대형 레이블 소속으로 데뷔부터 ‘기획형 아이돌’이란 반발 아닌 반심 속 활동을 이어왔던 아티스트가 아니던가. 활동 시기는 이효리와 비슷하지만, 워낙 어린 13살에 데뷔한 덕에 풍파도 많았고 변신과 성장의 폭도 컸다. 지금이야 외국 현지 맞춤의 프로덕션이 활성화되어 있지만 보아가 막 일본에 발을 들일 때는 그 어떤 것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2001년 일본 데뷔 당시 부족한 라이브 실력을 지적받고 악착같이 연습을 이어 나갔다는 일화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 데뷔 초 립싱크를 하며 퍼포먼스 위주 공연을 선보이던 보아가 라이브, 댄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까지 흘린 땀방울은 쉽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더욱이 ‘Valenti’, ‘아틀란티스 소녀’, ‘Girls On Top’ 등 히트곡이 있었음에도 어느 정도 회사가 만든 메시지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그가 정규 7집 < Only One >(2012)을 기점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는 모습들은 아시아의 별 보아의 가치를 더욱 드높게 치켜세운다.

김완선으로 시작해, 엄정화, 이효리, 보아를 거쳐 2014년 그룹 마마무를 통해 데뷔한 화사가 힘을 합친 댄스가수 유랑단. 막내 화사가 대표하는 것은 앞선 언니들의 호흡에 맞닿은 ‘섹시함’과 주도적인 ‘자유로움’, 그리고 ‘댄스’다. 몇 차례 화제를 일으킨 자유분방한 화사의 퍼포먼스는 앞선 언니들이 겪었듯 ‘논란’이란 꼬리표가 되어 잡음을 만들었다. 데뷔부터 가창력을 인정받은 화사였고 인기 반열에 오른 후에는 선정적인 옷차림, 댄스에 관심이 집중되며 화사를 막아서는 듯했지만, 솔로 곡 ‘멍청이’, ‘마리아’가 연이어 흥행하며 그는 그 자체로 트렌드가 됐다.

이 여성 댄스 가수들의 유랑이 반가운 건 이 같은 이들의 스토리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대의 관심이 각 아티스트를 조명하든 조명하지 않든 이들이 꾸준히 자신의 자리에서 내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방송이 전하는 감동에 불을 지핀다.

이 대목에서 보아의 ‘No.1’과 사랑의 마지막, 혹은 인생의 크레딧이 올라간 후의 감정을 그린 엄정화의 ‘Ending Credit’를 소환하고자 한다. 언제고 넘버 원이기도 하며 또 언젠가 가수로서의 엔딩 크레딧을 조심스레 상상하는 댄스가수들의 유쾌한 공연 방랑기. 5명의 ‘여성’ ‘댄스’ ‘가수’가 모여 시대를 관통하고 세대를 통합하며 우리를 다시 춤추게 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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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KPOP Album

이상순 ‘Leesangsoon’ (2021)

평가: 3/5

지난해 < 놀면 뭐하니? >의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는 여름날의 추억을 노래하며 인기를 끌었다. 싱어송라이터 이상순이 작곡에 참여한 ‘다시 여기 바닷가’는 이효리 남편이란 수식어에 가려져 있던 그의 음악적 면모와 대중적 감각을 상기하게 만든 계기였다. 20년이 넘는 경력에도 ‘이상순’ 세 글자를 내건 작품이 없었던 만큼 첫 솔로 앨범 < Leesangsoon >은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는 기회지만 이 중견의 아티스트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앨범 단위로는 2010년 김동률과 함께 한 베란다 프로젝트의 < Day Off >가 가장 최근 작업이었다. 바쁜 일상을 벗어나 네덜란드에서 재회했던 두 친구가 베란다에서 모던 록을 즐겼다면 불혹을 넘긴 베테랑 이상순은 보사노바가 넘실거리는 해변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다. 나른한 목소리와 어울리는 것은 물론 간결한 구성으로 공백기 동안 무르익은 감수성을 담기에도 최적이다.

타이틀 ‘너와 너의’부터 장르적 강점이 돋보인다. 브라질 전통악기인 카바키뇨에 은은한 더블베이스와 어쿠스틱 기타를 덧대어 길이가 다른 현들이 감미로운 하모니를 이룬다. 재즈에 강점을 보이는 보컬 선우정아가 가창과 작사에 참여한 ‘네가 종일 내려’는 시적인 노랫말과 함께 이상순이 활동했던 애시드 재즈 그룹 롤러코스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플루트를 비롯한 여러 관악기가 합세한 ‘안부를 묻진 않아도’는 정통과는 다른 세련됨으로 뮤지션의 역량을 드러낸다.

록으로 출발했던 기타리스트의 연주에 더 이상 전자 장비는 없다. 클래식한 악기와 차분한 어투로 그려낸 작품에는 보사노바의 본고장 브라질과 신혼을 보냈던 제주도의 풍광이 아른거린다. 오랜 세월에 거쳐 탄생한 소곡집은 이국적인 정취와 함께 가수 이상순의 관록을 입증한다.

– 수록곡 –
1. 너와 너의
2. 안부를 묻진 않아도
3. 다시 계절이
4. 네가 종일 내려 (with 선우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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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차트 역주행 특집 VOL 1. 가요 10곡

역주행의 역사는 되풀이 된다. 방송, SNS 등 다양한 매체와 더불어 밈(Meme), 추억, 감성 등 그 의미 또한 가지각색인 이 현상에 음원 시장과 유행이 급변한다. 대중의 취향과 기호가 과거만 맴돌며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는 씁쓸한 실정이지만, 기억 속으로 사라질 뮤지션에게 생명을 불어넣거나 몰랐던 노래의 진가를 발견한다는 장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옛 노래가 굽이치는 물결을 타고 지금 우리의 곁으로 몰려온다. < 슈퍼스타 K >, < 나는 가수다 >, < 복면 가왕 >, <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을 찾아서 > 등의 TV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스럽게 과거의 음악과 추억을 되새김질했지만, ‘역주행’이라는 이름으로 살아 돌아온 곡은 인터넷을 떠도는 ‘작은 영상 하나’에서 비롯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MZ세대가 만든 디지털 문화가 그 중심에 있음을 뜻한다.

2021년 상반기만 해도 벌써 브레이브 걸스와 SG워너비 두 팀이 어떤 연어보다 힘차게 차트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왔다. 매년 찾아오는 연금과 시즌 송처럼 연례행사에 가까운 이 현상을 이즘에서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차선을 반대로 달리는 노래가 다시 나오기 전에 이즘 필자들이 대표곡 10개를 선정했다.

EXID ‘위아래'(2014)
아이돌 역주행의 역사를 새로 쓴 브레이브걸스의 ‘롤린’이 등장하기 이전, 전국을 위아래로 들썩이게 했던 원조 역주행 걸그룹이 있다. 팬 한 명이 촬영한 직캠의 파급력은 놀라웠다. ‘위아래’는 2년의 공백을 가진 무명 걸그룹이 존폐를 논의하던 시점에 사활을 내걸었던 곡이다. 활동 당시의 반응은 미진했으나 발매 3개월이 지난 후 SNS를 통해 멤버 하니의 안무 직캠이 입소문을 타면서 뒤늦게 대중의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의 역주행 열차는 쾌속으로 질주하며 그해 연말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우연히 영상 하나에서 시작된 이 드라마는 해체 위기의 걸그룹을 완연한 대세로 탈바꿈해 주었다.

포화한 아이돌 시장에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와 같고 일찍이 기회를 잡지 못한 팀들에게 성공의 벽은 높기만 하다. 3년이 꼬박 걸렸던 EXID의 역전은 새로운 성공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이들의 역주행 공식에는 방송 출연도, 유명인의 홍보도 없다. 오로지 팬이 만든 2차 창작물의 힘으로 일어섰다. 이는 아이돌 그룹이 주목받을 수 있는 제 3의 경로가 되었으며 아직 빛을 보지 못한 후배 그룹들에게는 포기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희망을 주었다. 아이돌 최초의 역주행을 이뤄낸 EXID의 발자취는 새로운 역주행 스타들이 탄생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영향력이 닿고 있다. (김성엽)

볼빨간사춘기 ‘우주를 줄게'(2016)
‘하늘만큼 땅만큼’은 사랑의 척도에서 가장 유구한 관용어지만 볼빨간사춘기는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며 우주를 안겨줬다. ‘난 그대 품에 별빛을 쏟아 내리고 / 은하수를 만들어 어디든 날아가게 할 거야’라는 귀여운 고백은 모두의 공감을 이끌어냈고 ‘고막 여친’ 안지영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대학 축제를 비롯한 많은 공연에서 보여준 사랑스러운 모습이 대중을 사로잡았다.

< 유희열의 스케치북 > 출연을 계기로 SNS에서 입소문을 타며 1개월 만에 10위권에 진입한 ‘우주를 줄게’ 뿐만 아니라 이 곡이 수록된 < Red Planet >의 전곡이 한 해 동안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다. 특히 사춘기의 우울하고 의기소침한 면에 주목한 ‘나만 안되는 연애’나 ‘X Song’은 폭넓은 감정선을 드러냈다. 볼빨간사춘기는 역주행의 수혜를 받은 원 히트 원더에 머무르지 않고 여전히 ‘썸 탈꺼야’, ‘여행’으로 20대 청춘의 찰나를 포착하고 있다. (정수민)

신현희와김루트 ‘오빠야'(2015)
시작은 인터넷 방송가다. ‘오빠야’를 배경음으로 차용한 한 리액션 영상이 우연히 화제를 끌어 각종 SNS의 파고에 탑승하고,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젊은 층을 상대로 급속도로 퍼져 나간 것이 열풍의 시초다. 전파 과정만 본다면 다른 이유가 컸을지 모르지만 영상에 대한 관심은 곧 음악으로 이어지기 마련. 결국 그 기세는 영상의 업로드 일자 기준 16일 만에 차트 정상이라는 가시적인 기록으로 환산되었다.

반등의 기회는 생각보다 많이 찾아오지만 정작 제대로 거머쥐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빠야’의 성공 요인은 단박에 꽂히는 강렬한 인트로다. 한번 들으면 도통 잊기 힘든 신현희의 이 한 마디는 영상 너머 노래에도 관심을 가지게 했고, 뒤이어 등장하는 ‘썸’의 관계를 재치 있는 랩으로 풀어낸 코러스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노래방 애창곡 파트로 부상하며 상승 곡선에 박차를 가했다. ‘오빠야’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까지 걸린 시간, 인트로의 첫 2초였다. (장준환)

마크툽, 구윤회 ‘Marry me'(2014)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는 차 안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사랑 노래가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바로 옆에서 불러 주는 듯 가공하지 않은 음원, 이게 승부수였다. 이 영상이 페이스북의 인기 페이지 < 일반인들의 소름 돋는 라이브 >에 올라왔고 일명 ‘신호대기남’이 큰 관심을 일으키며 영상 속의 곡도 덩달아 주목받았다.

노래의 인기를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던 곳은 결혼식장 안이었다. 음원 순위 상위권을 차지했을 당시 예식장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원곡 가수의 음원보다 말 그대로 ‘일반인들의 소름 돋는 라이브’를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축가 타이밍엔 어김없이 ‘Marry me’가 흘러나왔고 한동근의 ‘그대라는 사치’와 함께 결혼식의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다. 프러포즈 대표곡으로 안착한 노래는 역주행시점 음원 시장에서 일위를 달성한 베스트셀러였고 결혼 시장에서는 스테디셀러가 되면서 그때나 지금에나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김도연)

김연자 ‘아모르 파티'(2013)
수 없이 겪어낸 고난에도 김연자는 제 운명을 사랑했다. 4년의 시간이 흘러 재조명된 윤일상표 EDM으로 기존의 트로트 작법을 과감히 탈피한 이 ‘인생 찬가’는 실로 위력적이었다. ‘연애는 필수 / 결혼은 선택’이 형성한 공감의 힘은 가벼운 세대 통합을 일궈냈고 대학가 축제에 출연한 최초의 트로트 가수라는 이변을 낳았다. BTS, 엑소, 트와이스 등 최정상 위치의 글로벌 케이팝 스타들이 백댄서를 자처한 2018년 KBS가요대축제 엔딩 무대는 이 곡의 위치를 상징하는 장면이다.

젊은 감성과 화려한 후렴구 멜로디는 역주행의 존재감을 높이는데 빼놓을 수 없는 조연이다. 진가는 시대를 꿰뚫은 노랫말에 담겨있다. ‘작사의 신’ 이건우의 역작으로 가사 한 줄, 한 마디가 우리의 근원적 스트레스에 구원자 역할을 자처한다. ‘자신에게 실망 하지마 / 모든 걸 잘할 순 없어’라며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고 ‘나이는 숫자 / 마음이 진짜 / 가슴이 뛰는 대로 가면 돼’는 용기를 북돋으며 스스로 실현한 김연자식 명언에 방점을 찍는다. 찰나의 반짝임으로 끝나지 않을 주옥같은 격언들이 시대를 대변한다. 어쩌면 ‘아모르 파티’의 역주행은 당연한 절차였다.(김성욱)

윤종신 ‘좋니'(2017)
역주행 신화를 쓰기 가장 유리한 장르는 역시 발라드일 것이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범대중적인 장르인 데다 노래방에서 부르기도 좋으며, SNS에 올라오는 보컬 실력자들의 커버 영상을 통해서도 인기가 쉽게 번지기 때문이다. 2017년 미스틱엔터테인먼트의 음악 플랫폼 ‘리슨'(LISTEN)을 통해 발매된 ‘좋니’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부를 노래가 없다’는 젊은 세대의 수요를 공략한 아티스트는 유튜브 음악채널 ‘딩고 뮤직’의 ‘세로라이브’로 신세대와 교류를 형성했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라이브 영상이 성공을 판가름하며 노래는 가장 많이 들리고, 가장 많이 불리는 곡이 됐다. ‘애청’과 ‘애창’의 동시 포획이었다.

차이는 ‘깊이’였다. 꼭 모은 두 손, 잔뜩 찌푸린 미간으로 열창하는 베테랑 가수의 라이브는 대중의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있던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했고, 이별한 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현실적인 노랫말은 결정적이었다. 원곡을 리메이크한 민서의 ‘좋아’로 차트 정상을 다시 꿰차며 발라드계 ‘답가 유행’을 일으키기도 했다. 음악인으로서 그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각인한 제2의 전성기의 서막이었다. (이홍현)

비 ‘깡 (GANG)'(2017)
허세와 거리가 멀다면서도 ‘백 달러 지폐(Hundred dollar bills)’, ’30 sexy 오빠’를 흥얼대며 여전히 9년 전 ‘레이니즘(Rainism)’에 도취되어 있었다. 향수에 젖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2000년대 슈퍼스타는 이후 영화 < 자전차왕 엄복동 >까지 혹평을 받으며 ‘비’급 연예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이미지 타격에 쐐기를 박았던 이 실패작이 컬트적인 역행을 일으킨 ‘나.비 효과’였다.

작품이 별로일 수 있다는 주연의 취중진담과 그를 뒷받침하는 누적 관객 수. 성적은 처참했지만 놀림거리로 이만한 흥행도 없었다. 망작에서 비롯한 각종 패러디는 과거를 들추기에 이르렀고 발매 당시에도 잡음이 많았던 ‘깡’이 그 중심을 차지했다. 비록 조롱이 만들어낸 관심이지만 본인도 밈의 인기를 즐겼고 오히려 광대를 자처하며 열풍에 불을 지폈다. 비주류의 인터넷 유행을 대중의 영역으로 견인한 40대 꾸러기의 깡다구는 급변한 콘텐츠 시장을 대변하는 희귀한 역주행 사례다. (정다열)

블루 ‘Downtown baby'(2017)
음과 음 사이의 작은 낙차로 덤덤하게 흐르다가도 ‘너는 나의 다운타운 베이비야’란 훅을 던지는 모습은 과장보다 쿨함을 견지하는 Z세대의 사랑법과 닮아있다. 어쿠스틱 기타가 주도하는 감미로운 소리는 연인과의 추억을 환기하고 ‘너의 눈은 밤하늘에 별이야’란 구절은 라라랜드(로스앤젤레스)의 푸른 밤을 형상화하며 낭만성을 확보한다.

린다G(이효리)가 < 놀면 뭐하니? >에서 불러 스트리밍 차트 정상까지 도달한 ‘다운타운 베이비’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래퍼 블루가 2017년 말에 발매한 곡으로 2년 6개월 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효리의 허스키한 저음은 멜로디의 좁은 폭을 구원하고 기교보다 감각으로 노래하는 가창이 곡에 잘 달라붙는다. “결국 뜰 곡은 뜬다.”는 운명론으로 접근할 수 있지만 실은 대중을 아는 이효리의 감과 공중파 프로그램의 위력이 작용한 결과다. (염동교)

브레이브걸스 ‘롤린 (Rollin’)'(2017)
역주행의 힘을 여실히 증명한 곡. 수익이 거의 없음에도 자식 키우는 심정으로 군부대 공연을 보낸 프로듀서 용감한 형제부터 “음악을 떠나 평범하게 살자고 이야기를 나눴다.”던 유정의 인터뷰처럼 팀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멤버들까지 해체를 앞두고 터진 대박 뒤에는 감동 실화가 숨어있다. 2021년을 뒤집은 이 흥행의 시작은 유튜브 알고리즘이었지만, 실질적 원인은 전심으로 아이돌 그룹을 응원하며 군통령, 군인픽, 밀보드라는 신조어까지 만든 ‘군인들’에게 있었다. 힘든 군 생활 중의 위문에 대한 보답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들의 성공 형태에서는 특이하게도 영상을 통한 현시대의 홍보 방식과 소자본 인디 뮤지션의 활동 양식이 함께 보인다. 무명의 독립 뮤지션이 길거리와 홍대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하는 모습이 군부대를 도는 브레이브 걸스의 모습과 닮았다. 이는 대형 미디어도, 유명인의 언급도 없이 멤버들 스스로가 일궈낸 노력의 결과임을 증명한다. 이엑스아이디가 팬들에 의한 2차 창작물의 중요성을 알렸다면 브레이브 걸스는 무대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운, 사실상 역주행이 아닌 ‘정주행’인 셈이다. (임동엽)

SG워너비 ‘Timeless'(2004)
역시 < 놀면 뭐하니? >는 강력했다. 프로그램에서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 또 다수 음원차트의 정상에 올랐다. SG워너비가 출연한 이번 방송은 영향력이 더 셌다. ‘Timeless’, ‘내사람: Partner for life’, ‘라라라’, ‘살다가’ 등 여러 곡이 동시에 차트를 휩쓸었다. 톱스타 아이유, 대세 걸 그룹으로 등극한 브레이브걸스도 MBC 예능 < 놀면 뭐하니? >의 정기를 받은 노래들 앞에서 추풍낙엽이 됐다. 특히 ‘Timeless’는 SBS < 인기가요 > 1위 후보로 오르기까지 했다. < 놀면 뭐하니? >는 십수 년 전 나온 노래에 새 생명을 안겨 줬다.

전적으로 방송에 의해 다시 히트가 이뤄진 것은 아니다. 차트에 들어선 노래들은 모두 발매 당시에 큰 사랑을 받았다. 2000년대를 경험하고, 그 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세대로서는 SG워너비와 그들의 노래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보컬 그룹이 요즘 얼마 없는 현실도 SG워너비를 돋보이게끔 했다. 가창력이 뛰어난 멤버들이 서로 눈을 맞춰 가며 하모니를 만드는 모습은 많은 시청자에게 근사하고 살갑게 다가갔다. 인기 미디어, 과거를 향한 대중의 향수, 희소한 체제, 번듯한 가창이 합쳐진 힘이 ‘Timeless’를 비롯한 노래들을 한 번 더 유행의 궤도에 들여놨다. (한동윤)

정리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