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쿠마파크, 하헌진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시스터즈의 ‘오해하지 마세요’를 다시 부른 베테랑 인디 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다.

1980년대를 경험한 이들은 작곡가 이규대와 함께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를 부르던 앳된 다섯 살 소녀를 기억한다. 1984년 아버지의 ‘예솔이’로 음악을 시작한 이자람은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소리꾼의 길을 걸었다. 1997년 국악고 재학 시절 4시간에 걸쳐 ‘심청가’를 완창하였고 1999년에는 스무 살 나이로 8시간 동안 춘향가를 완창하며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소리꾼임과 동시에 그는 2004년부터 포크록 인디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기도 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송창식의 음악을, 팝을 즐겨 들으셨던 어머니로부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사이먼 앤 가펑클을 자주 들었노라 밝힌 이자람은 “1960~70년대 음악을 사랑하던 시기에는 김추자와 김정미의 열성 팬이었다. 송골매와 조용필 LP도 모두 내가 물려받았다.”라 이야기하며 그의 폭넓은 음악적 바탕을 즐겁게 소개했다. 그 광대한 취향이 아트 록, 포크, 일상의 언어를 바쁘게 오가는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연결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부평 프로젝트에서 이시스터즈의 김희선 님과 함께 ‘오해하지 마세요’ 녹음에 참여했다.
저희와 친분이 있는 더 보울스(The Bowls)의 서건호 씨가 프로젝트를 알려줬다. 재미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던 찰나 부평문화재단에서 연락을 받았다. 원곡을 듣는 순간 아이디어가 탁, 떠올랐다.
어떤 아이디어였나.
‘오해하지 마세요’의 원곡은 엄청 경쾌하게 들리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여성이 길에서 플러팅(Flirting)을 당하는 이야기다. 원곡의 분위기는 과거 여성분들이 집적대는 남자들에게 ‘그런 거 아니거든~’ 하는 내용이지만, 현재의 시선으로는 그렇게 웃어넘기기보다는 조금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원곡보다 느린 리듬에 더 무겁고 진지한 가사를 넣었다.
리메이크 된 곡을 처음 들어 봤을 때 김희선 선생님과 이자람의 보컬이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김희선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참여하시는 일정이었나.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을 때 부평에서 자리를 마련해 줬다. 처음에 같이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하고 갔다.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도중 협업 제안 비슷한 말씀을 하시길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 잡았다. 선생님이 참여하시면서 노래에 꽃이 피었다.
아마도이자람밴드에게도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대개 녹음실에 혼자 들어가서 노래를 부르곤 하는데, 김희선 선생님께서는 워낙 오랜만의 녹음이셔서 그런지 저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부탁을 하셨다. 같이 노래하고, 원하시는 ‘필’에 맞춰 먼저 부르기도 하고, 지휘도 하고 동료처럼 노래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녹음에 임했다. 저를 의지하고 믿어주시는 게 옆에서 느껴져서 엄청난 책임감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세요’를 원래 알고 있었나. 밴드 멤버들의 곡에 대한 첫인상도 궁금하다.
나도 그렇고 밴드 멤버들도 이 노래는 처음이었다. 흔히 말해 그 ‘뽕끼’를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더라. 다들 연주자들이니 반드시 ‘원곡의 맛’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오히려 나는 우리에게 없는 과거의 스타일을 굳이 흉내 내거나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르게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근데 또 막상 바꾸려고 하니 코드가 단순하고 특히 마지막 파트는 마이너 조로 가다 보니 편곡하기 까다롭더라. 그 안에서 전부 바꾸기는 어려워서 먼저 전체 멜로디부터 손봤다. 구조를 옮긴 다음 코드 워킹을 입혔다.
앞서 언급한대로 ‘오해하지 마세요’의 리메이크는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김희선 선생님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우려를 많이 하셨다. 그 곡을 몇십 년 부르셨으니 조금 낯설어하셨던 것 같다. 처음 이틀 정도 고민을 많이 하다가 선생님께 ‘이러한 해석에 의해서 곡이 이렇게 변주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유지하고 싶은데, 선생님께서 많이 불편하시면 재고해보겠습니다’고 문자를 드렸다. 다행히도 선생님께서 이해를 해주셨다. 녹음 당일에는 심지어 자꾸 듣다 보니 이것도 매력이 있다고 해주시더라. 본인 노래가 완전히 바뀌었을 때 생기는 낯섦은 당연한데, 이해해 주신 선생님이 너무 멋있었다. 게다가 연습도 정말 열심히 해오셨다. 감동이었다.
국악을 하다 갑자기 밴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때 홍대의 태권V(더블 듀스의 후신, 스팽글의 전신)에 놀러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밴드가 너무 멋있고,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었다. 매주 재머스(Jammers)에 가고, 한음파의 전신 심고사(심장병을 고친 사람들)가 펄 잼(Pearl Jam)을 카피하는 것도 봤다. 대학에 가자마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선이,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들으면서 꿈을 키우던 도중 자연스럽게 음악 동아리 ‘메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가 붕가붕가 레코드가 만들어지는 시기였지. 자연스레 밴드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흐름 한가운데에 편승해서 같이 흘러간 셈이다. 초창기에는 같은 동아리 출신이었던 ‘청년실업’의 이기타와 밴드를 했다. 지금 기타 치는 이민기는 내 후배다.
본인은 밴드의 스타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9월 27일 공개한 싱글 ‘시간’과 2월에 발매한 ‘오소리 꽃신’을 들으며 느낀 점인데 좀 괴랄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어둡고 우울한 쪽의 괴랄함보다는, 유쾌하고 건강한 쪽의 괴랄함 말이다.
약간 오밀조밀한 괴랄함을 뜻하는 건가.
싱글 ‘시간’에 담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이 곡이 가사가 엄청 진지하고 시적인데, 처음 친구에게 글을 보내줬더니 룸메이트와 같이 보고 울었다고 한다. 자기 마음을 너무 건드린다, 노래로 꼭 써 달라. 그래서 노래를 만들어 보내줬더니, “이 가사에 이런 음악을 붙이다니 미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 그때 제 습관을 알았고 괴랄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는 어떤 가사를 읽었을 때 자연스레 연상되는 음악을 피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내용일수록 어울리지 않는 악기를 가져와 붙이고, 상상 가능한 음악적 어법을 최대한 피해서 다닌다. 나도 다들 좋아하는 발라드 한번 써보고 싶지만, 본성이 그걸 허용 못 한다.
그 비트는 느낌이 또 매력 아닌가.
뭐, 아주 소수의 팬만 있는 걸 보면 좋은 매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아해 주시니 계속하고 있다. (웃음)
판소리 작업의 경우도 일반적이진 않다. 외국의 희곡과 문학작품을 우리의 소리로 옮기는 독특한 작업을 보면 알 수 있다.
평균보다 조금 책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여러 작품을 읽다 하고 싶은 느낌이 오면 그때 작업에들어간다. 한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 경도됐던 시기에 읽은 희곡 < 사천의 선인’을 옮긴 ‘사천가’, <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을 새로 만든 ‘억척가’가 그렇다. 헤밍웨이의 < 노인과 바다 >도 마찬가지다. 너무 매력적이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판소리로 부른다.
천상병 시인의 ‘달빛’, ‘노래’, ‘나무’ 등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2014년 EP < 크레이지 배가본드 >도 그런 시각으로부터 출발한 건지.
아, 그건 의정부에서 열리는 ‘천상병 예술제’에서 의뢰를 받았다. 천상병 시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해서 첫해에는 고사했다. 그런데 이후 시인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읽어보니 너무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다음 해 예술제에 바로 참여했다.
‘밴드’ 이자람과 ‘국악’ 이자람의 페르소나가 다를까.
음, 다른 것 같다. 스위치를 켜듯이 성격이 달라진다. 우선 판소리를 할 때는 앞서 말한 ‘괴랄함’이 없다. 소리꾼 이자람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잘 나눌 것 같은 동네 언니 이미지라면, 밴드에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캐릭터로 변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건데 어쩔 거야’ 같은, 아마도 그게 양립되는 건 아닐까.
혹시 안경의 차이는 아닌지. 클라크 켄트는 안경을 벗고 슈퍼맨이 되는데, 이자람은 밴드 활동할 때 반드시 안경을 쓰고 있다.
맞다! 밴드 할 때는 안경을 낀다. (웃음)

아마도이자람밴드는 밴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라이브를 꾸준히 해온 밴드다. 2019년도 코로나 사태 이후로 공연이 전부 취소되거나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연을 못 하니 힘들다. 그래도 멤버들에게 고마운 게 있다면 내가 무언가를 제시하면 같이 가준다는 점이다. 지금은 싱글이라도 많이 내자는 마음으로 밴드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다. 딴 데 돈 쓰면서 녹음하기보다 우리 밴드 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음질을 뽑아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최근에 마이크도 사고 나름 홈 레코딩 시스템을 구축해서 녹음을 시작했다. 완전 만족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모습이다.
우선 원할 때 녹음할 수 있고, 무엇보다 지출을 많이 안 해도 된다. 예전에는 노래 한 곡을 낼 때 대략 백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지금은 마스터링만 맡기면 되는 수준이니까 자부심이 많이 생기더라. 시스템도 갖추고 싱글도 발매 중이다. 11월 발매 예정인 다른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했다. 2020년에 곡 작업을 굉장히 많이 했다.
2019년 4월 두 번째 정규 앨범 < FACE > 이후 왕성한 활동이다.
드러머 김온유랑 베이스 김정민이 합류하게 되면서 밸런스가 너무 좋아졌다. 어떤 팬분께서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밴드 특유의 하모니가 있어서 처음에는 멤버 변동이 싫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지금 물오른 것 같으니 라이브로 볼 사람은 지금 빨리 공연을 봐야 한다’고 쓴 글을 읽었다. 정말 고마웠다. 실제로 2집부터 지금 나오는 싱글까지 안 멈추고 합주와 편곡을 해오고 있다. 뭐, 이것도 언젠가 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이 확 붙은 것 같다. 한번 타올라 보겠다. (웃음)
밴드 활동을 오래 하면서도 화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원동력이 있나.
맛있는 거 먹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밴드가 깨지는 건 돈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 밴드는 일단 돈이 그렇게 많아 본 적이 없고, 먹는 걸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유지된다. (웃음) 그러면서 다른 일들도 잘 굴러가고, 유대감도 생기고.
앞서 말했듯 밴드가 스트레스 해소의 창구도 되고, 제2의 정체성도 될 수 있는데, 이자람에게 밴드의 의미란.
내게 밴드는 도화지 같다. 뭔가 그려낼 수 있고, 또 그릴 수 있게 하는.

올해 5월에는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아닌 이자람의 솔로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 이방인의 노래 >의 내용을 담은 싱글 ‘Lázara theme’이다.
솔로 싱글도 약간 코로나가 준 전화위복 중 하나다. 판소리하는 이자람의 기록물은 많이 없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홈레코딩을 해보면서 녹음하고 발매하는 게 그렇게 엄청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해서, 약간 아카이빙의 개념으로 시작했다. 어쩌면 공연을 못 오는 관객들에게는 또 조그만 갈증 해소가 되지 않을까.
올해 초에는 MBC 예능 < 놀면 뭐하니 >의 ‘방구석 콘서트’ 출연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김태호 PD님이 뮤지컬 < 서편제 > 때부터 제 작업을 관심 있게 보신 걸로 알고 있다. 얼핏 무한도전 출연 의사를 확인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체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 따로 응하지 않았다. 마침 이번 < 놀면 뭐하니 >의 경우에는 정확히 코로나로 공연을 하지 못하는 예술인들을 섭외하는 콘셉트였고, 김태호 PD님이 “이제야 어울리는 곳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다.”라며 직접 전화를 주셨기에,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TV 출연 후 반응은 어땠나.
코로나 시기다 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건 딱히 없는 것 같다. 방송도 패널들이 해주는 리액션을 제외하면, 객석의 반응이 없기도 하고. 하루빨리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
밴드 라이브와 판소리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송출하는 데 차이점이 있을까.
음악 같은 경우에는 눈으로 보는 뮤직비디오도 있고 무엇보다 귀로 꽂는 음악의 정체성이 크니까 온라인으로 만들어서 결과물을 남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 세계에 이미 생긴 문화다. 그런데 공연 예술은 조금 다르다. 한 공간에서 겪는 실시간 경험의 영역이 공연 예술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판소리 혹은 창작 연극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송출되는 것은 사실 아쉽다. 함께한다는 공간의 경험이 삭제된 형태다.
대중음악 같은 경우에도 이번 추석 나훈아 씨가 여는 <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 콘서트는 실시간 스트리밍 외에 다시 보기나 재방송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아마 본인의 공연이 하나의 공연 예술의 폼으로 만들어진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 같다. 이를테면 벡(Beck)의 공연은 매 공연이 모두 다르다. 그냥 있는 곡 리스트를 쭉 부르는 공연이 아니라 하나의 테마를 짜서 한다는 거다. 스토리보드가 있어서 공연 예술의 형태로 다가가는 콘서트를 스트리밍으로만 송출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보기 클립은 지원하지 않는 게 좋아 보인다.
단독 공연이 올해 두 번 취소가 됐는데, 이후 계획이 있다면.
10월에 합정동에 위치한 폼텍 웍스홀에서 띄어 앉기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공연을 진행한다. 지금까지 발표한 싱글들을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 같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팬들은 음원만큼 밴드의 공연과 라이브를 사랑한다. 실제로 음원으로 들을 때와 다르게 라이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잘 들리는 느낌이다.
판소리꾼 이자람과 밴드 이자람 모두 전하는 말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빚어 놓은 말로 무대에 서기에 그 말들이 매번 어떻게 발화되는가에 집중하다. 발음과 발성의 경우는 소리꾼의 기본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라이브의 매력은 이런 거다. 어느 날은 옛 애인에게 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하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매력을 느끼신 게 아닐까.

활동 분야가 굉장히 다양하다. 음악 감독도 겸임하고, 희곡을 판소리로 각색도 하고, 직접 퍼포먼스도 하고, 밴드에서는 기타와 보컬을 한다. 이런 멀티플레이어적 행보가 가끔 힘들지는 않나.
힘들지는 않다. 근데 가끔 길에서 술 먹고 노는 무리의 사람들이 종종 부럽기는 하다. 많은 일을 택하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모자라다. 그래서 일생에 친구들과 노는 일이 잘 없었다. 나한테는 없는 문화인 셈이다. 그래도 판소리 작업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밴드 음악으로 잘 해소된다. 내가 멤버들과 합주할 때 자주 하는 게 “아, 진짜 좋다”라는 말이다.
어린 나이부터 쉴 틈 없이 달려오시면서 번아웃이 온 적은 없는지 궁금하다.
물론 있다. 크게 번아웃이 와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하던 일들을 강제로 멈춘 적이 있다. 이때 이자람의 가장 큰 정체성인 퍼포머로서의 활동은 멈추고 의뢰받은 일만 작업했는데, 그때 음악감독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의 타이틀이 생긴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의 왕성한 활동으로 극복하게 된 계기는.
일단은 밥과 잠이다. 늘 강조하는 건데 밥과 잠이 잘 굴러가면 기본은 가는 것 같다. 마음가짐 면에서는 사명감을 좀 떨쳐내려고 했다. 팀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마인드는 번아웃을 부르는 최적의 마음이다.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남이 나를 채찍질하기에도 허울이 좋은 명제 아닌가. 그런 걸 다 벗어던지고 2년 딱 지내봤더니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차오른 것 같다. 이득봉이라는 사람이 최근에 사명감에 대한 글을 썼다. 아, 이득봉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내 작가 필명이다. 후후. 한참 손 푸는 중이다. (웃음)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앞으로 어떤 팀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나.
10년 후에도 하고 있는 밴드였으면 좋겠다. 그것밖에 바랄 게 없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음악 세계에 있어 결정적인 아티스트나 노래가 있다면.
아마츄어증폭기. 그분이 노래를 하는 태도나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에 정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즘에는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를 레퍼런스로 두고 있는데, 특히 ‘Marrow’라는 곡을 좋아한다.
인터뷰 : 김도헌,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