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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1 올해의 가요 앨범

2020년대의 추세가 희망차다. 코로나 급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황량한 대지 위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티스트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앨범들은 장르와 작법, 하물며 가사의 필압조차 세세히 다르지만, 모두 기세에 꺾이지 않고 본인의 역량을 가감 없이 담아낸 단단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IZM 선정 2021년을 대표할 가요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엔하이픈(ENHYPEN) < Border : Carnival >

아이랜드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는 하이브의 곡 스타일 분배와 CJ 이엔엠의 시각적 역동성이라는 우월적 합이다. 그걸 지반으로 몇 개월도 안 된 신인은 단숨에 ‘기득권’자로 폭발성장을 기했다. 팬덤 ‘엔진’의 가속 페달을 밟아 숨 가쁘게 올해의 신인, 음원 밀리언 셀링, 미 NBC 켈리 클락슨 쇼 출연 등을 이어가며 글로벌 팬들의 번식을 꾀한 결과. 이 두 번째 ‘미니’앨범이 초고속 하사된 4세대 아이돌 타이틀을 굳혀준 ‘맥시’펀치다.

음악의 승리라고 해야 한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떠들썩한 예술적 소란을 장벽으로 쌓고 중간에 ‘Drunk-dazed’, ‘별안간 (Mixed up)’ 등 대중그룹다운 들을만한 싱글 넷을 가지런히 배치해 제대로 곡 승부를 걸고 있다. 이를 위해 동원한 도구는 폭넓은 장르분산, 바로 다양성이다. 시대적 명령인 아이돌스런 음악패턴을 따르되 시도, 도전, 변화로 에워싸는 음악선동이 가상하다. 아이돌 수다, 그 상투적 어법 타파가 남았다. (임진모)

지올 팍(Zior Park) < Syndromize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끊임없이 필름을 구동하는 영사기의 소음이 들렸다. 벽에 맺힌 원형의 무대 위로 그림자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딜 둘러봐도 환영뿐인 작은 공간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섞였고 그렇게 탄생한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장소를 < Syndromez >라고 명명했다. 창조주는 지올 팍. 경쾌하게 삶을 난도질하는 한 예술가의 보금자리였다.

각각의 주제에 맞게 꾸려진 놀이기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랩을 버렸다는 농담 섞인 인터뷰처럼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상상력이 중성적 목소리, 음악, 영상 등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지올 팍’이란 아티스트를 양분 삼아 유일한 형태로 조형된다. 그가 화려하게 꾸며낸 세상은 포장지를 뜯어낼수록 깊은 상처를 드러내지만 선홍빛을 띠는 속살마저 찬란하다. 완벽하게 제작된 극의 폐막이 어느 때보다 쓸쓸하기에, 이 포근한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손기호)

마인드 컴바인드(Mind Combined) < Circle >

힙합, 일렉트로니카처럼 비트 중심의 음악이 득세함에 따라 비트메이커들의 가치는 공고해졌다. 다양한 뮤지션의 리듬을 책임지며 베테랑 프로듀서가 된 피제이는 마인드 컴바인드라는 플랫폼에 올라 조금 더 자유롭게 역량을 펼쳤다. 단짝 진보는 피제이의 비트 위를 유영하며 농익은 기량을 선보였다. 11년 전 발표한 첫 번째 앨범 < The Combination >과 마찬가지로 과정의 즐거움이 양질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그들의 소리엔 과거와 현재, FX와 리얼 밴드가 교묘하게 교차하며, 장기인 소울과 펑크(Funk)부터 록과 하우스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어우러진다. 변화가 잦은 곡조를 버텨내는 건 정교한 리듬 트랙이지만 섬세한 기타가 돋보이는 ‘Can you understand’와 라틴음악의 즉흥성을 포착한 ‘Purple sky’처럼 힙합 비트 이외의 미덕이 가득하다. 소리와 메시지에 지향점을 고스란히 반영한 ‘Singularity’(특이성)와 ‘Multiverse’(다중우주론)로 마인드 컴바인드의 인장을 단단히 새긴다. (염동교)

이랑 < 늑대가 나타났다 >

한 해를 회고할 때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 요새 흐름에 영합하지 않았고 투명하게 ‘나’의 이야기를 썼다.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이 비단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투영하고, 나를 지나 사회로 가닿는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와 같은 곡은 이 음반이 얼마나 현재를, 현대를, 지금을 찌르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동시에 과감한 터치가 돋보인다. ‘아는 언니들’이란 합창단과 손을 잡고 기이하고 기괴하게 덧붙인 ‘환란의 세대(Choir ver.)’의 코러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그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토해낸다. ‘대신’. ‘빵을 먹었어’에선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고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선 죽음과 삶을 툭툭 말한다. 거침없는 연대와 거리낌 없는 고백으로 올해를 끌어안았다. (박수진)

양진석 < Barn Orchestra >

양진석은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지만 작곡 능력과 편곡 실력은 그 미진한 보컬을 채우고도 남는다. 10년 만에 발표한 여섯 번째 에피소드 < Barn Orchestra >가 이 주관적인 가설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각 곡에 맞는 보컬리스트의 초빙과 세미클래식부터 팝, 재즈까지 스며든 도회적인 컨템포러리 음악은 멜로디와 리듬, 화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처럼 빛난다. 막대한 시간 투자, 소리에 대한 고집, 음악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이 앨범이 정갈하고 세련되게 태어날 수 있는 탄탄한 지반공사였다.

현대사회의 외로움을 여러 형식으로 변조한 수록곡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면서 건물 구조물에 사용된 유기적인 원자재다. 양진석은 케이팝과 네오 트로트 열풍에 가려져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세대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21세기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을 완공해냈다. (소승근)

최엘비 < 독립음악 >

힙합 오디션 < 쇼미더머니 5 >에서 비와이와 씨잼이 1,2등 자리에 나란히 설 때, 친구인 최엘비는 예선 탈락 후 TV로 결승 무대를 시청했다. 찬란히 빛나는 두 주연에 비해 음지가 익숙했던 조연은 슬퍼하지 않으려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 반짝임에라도 묻어가야 크레디트 어딘가에 이름이 남는 걸 알았기 때문. 하지만 어느덧 20대의 마지막에 다다른 청년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 늘 배경으로 찍히기만 했던 엑스트라는 직접 조명과 카메라를 들여와 시점을 180도 전환시킨다. 주연과 조연의 역전으로 그간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낱낱이 고백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아리게 찌른다. 스스로를 딸려오는 사은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뗀 무지 티에 비유할 정도로 완전히 내려놨다. 비교와 동정으로 물든 열등감의 서사는 부와 명예를 좇는 작금의 힙합 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같아지기를 포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 독립음악 >의 주인공은 험난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최엘비이며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세대와의 교감을 넘어 시대와 공명하는 앨범, 그야말로 올해 최고의 ‘대중음악’이다. (정다열)

파란노을(Parannoul)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신원미상의 음악가 파란노을이 일으킨 파급력은 거셌다. 잠룡의 일렁임을 일찍이 포착한 곳은 국내가 아닌 해외다. 순간이었지만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은 영미권 슈게이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어 미국의 음악 커뮤니티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올해 발매한 앨범 중 평점 1위를 기록했다. 소규모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밴드캠프에서부터 저명한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와 스테레오검의 각광을 받기까지 이 드라마틱한 실화는 언어의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파란노을의 패배주의 텍스처는 생생하다. 거친 노이즈와 투박한 가상 악기로 연출한 음압은 포스트 록과 이모코어(Emocore)를 난폭하게 품어내고, 열등감으로 뭉그러뜨린 보컬은 타오르는 화자의 내적 분노를 겨우 삼킨다. 우울감과 외로움으로 범벅된 어두운 터널에서도 끝끝내 탈출구를 발견하고자 한 원시적 울부짖음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한다. 2021년, ‘흰 천장’만을 바라보던 골방 외톨이가 주도한 ‘청춘 반란’의 실황. 이제는 더 이상 막연한 동경이 아닌 빛나는 ‘꿈의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 듯하다. (김성욱)

유라(youra) < Gaussian >

유라는 자신이 음악을 하며 지켜온 ‘개똥철학’을 잘라낸 것이 < Gaussian >이라고 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듯한 단어로 설명했지만, 그의 세계는 조금씩 덜어내지 못하고 한 번에 잘라내야 할 만큼 견고하다. 데뷔부터 지속해온 내면 탐구는 단단한 결정체로 거듭났고 싱어송라이터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부드럽고 흐리게 표현하는 효과를 뜻하는 앨범의 이름처럼 가사는 은유적이나 선율은 또렷하고 그가 전하는 감각은 선명하다. 간결하게 배치된 악기들은 범람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그 중심의 유라는 전자음을 가미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로 곡을 이끈다. 최소한의 의미만 전달하는 개인적인 음반에서도 헤이즈와 함께한 마지막 넘버 ‘하양’은 대중성을 드러내며 뮤지션의 넓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를 뒤덮은 연대와 위로의 물결 속에서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침잠의 미학이 돋보였던 앨범이다. (정수민)

아이유(IU) < Lilac >

‘젊은 날의 기억’이란 꽃말처럼 < Lilac >은 아이유의 20대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를 거쳐 간 모든 것들이 일련의 꽃잎처럼 곡 사이사이로 책갈피처럼 수놓아진다. 그만큼 앨범에는 유독 다양한 맛과 멋이 자유롭게 존재한다. 마치 대중음악가의 소명을 잠시 접어두고 30대를 앞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염원과 열망을 한데 모아 전부 성취하는 것으로 다음 10년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듯이 말이다.

명확한 선율로 대중성을 고려한 히트 메뉴 ‘라일락’ 사이로, 독특한 영감을 버무린 ‘Coin’이 도발 한 스푼을 첨가한다. 이에 재치 있는 비유를 가미한 ‘Flu’와 ‘어푸’가 각각 가벼운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를, 차분한 발라드 트랙 ‘봄 안녕 봄’과 ‘빈 컵’이 담백한 뒷맛을 담당한다. 아이유의 과거와 미래를 망라한 앨범이다. 오랜 전성기를 구가해온 아티스트가 여전히 과감함과 노련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 ‘Blueming’이 예고한 푸른 개화는 보랏빛 라일락으로 이제 막 피어난 듯하다. (장준환)

언오피셜보이 & 하이프하이프(unofficialboyy & HAIFHAIF) < 그물,덫,발사대기,포획 >

언오피셜보이는 각성한다. < 쇼미더머니 10 >에서 스스로 밝혔듯 ‘예능캐’로 가벼이 소비되던 과거와 선을 긋고, 진중한 태도로 음악가로서의 인정을 원한다. 그간 익살맞은 리액션이나 화끈한 패션,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스웨그로 더 주목받은 그였기에 솔직히 앨범의 빼어남은 의외였다. 프로듀서 하이프하이프(HAIFHAIF)의 철저한 지원이 빛을 발했고, 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많은 장르 애호가를 자신의 편으로 포획했다.

진가는 다양성과 치밀함에서 비롯한다. 2000년대 힙합의 계승 의지로 낳은 ‘돈내’와 ‘누가왔게’, 화끈한 댄스플로어의 ‘Unofficialboyy pt.2′, 최신 팝 문법의 ‘Mmm’ 등을 한데 엮어내는데 그 흐름은 유려하다. 신예답게 신선하고 동시에 높은 장르적 유연성을 보여준 셈이다. 풋내기 티가 나지 않는 탄탄한 플로우와 중독성 강한 훅(Hook)은 흡인력을 극대화했으며, 재치 있는 입담과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슴 시큰한 메시지는 작가적 성취를 담당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앨범이다. (이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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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랑 인터뷰

이랑은 어디에나 있다. 인터넷상에는 그가 쓴 많은 글이 넘실거리고 그를 주목한 기사도 한가득하다. 심심찮게 이랑이 그린 그림과 그가 작업한 영상 작업물을 만나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나왔다고 해도 다 몰라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라는 그의 말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랑은 때때로 쉽게 가려진다. 솔직한 그의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궁금한 것을 거침없이 질문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가감 없이 목청을 높인다. 동시에 그로 인해 파생되는 두려움, 공포, 부담감을 숨기지 않는다. 다수가 마침표를 찍고 그저 멈춰 있을 때 그는 그 위에 갈고리를 걸어 물음표를 만든다. 정규 3집 < 늑대가 나타났다 >에는 그런 그가 사회를 향해 던진 커다란 의문 부호들이 가득하다. 본명이자 외자인 ‘이랑’ 대신 더 다정하게 ‘랑’으로 불리고 싶어 하는 그를 만났다. 10월 중순 치른 수술 이후 별다른 휴식 없이 연일 일정을 소화했다는 랑에게서 투명한 피로가 스쳐 갔다.

랑이가 나타났다!”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쉴 겨를 없이 복귀한 거 같은데.
이미 10월 일정이 다 차 있는 상태에서 수술할 날짜를 어렵게 뺐다. 소화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나도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계속 메일이 온다. SNS 같은 데를 보면 ‘바쁘다고 하더니 다 하네’ 싶기도 할 거다. 그래서인지 연락이 계속 오고 있다. 난감하다.

거절을 잘 못 하는 걸까?
거절도 많이 하는 편이다. 거절한 메일을 따로 모아두는 메일함 폴더가 있을 정도다.

거절의 기준이 있을지.
기준이 있어도 거절을 할 수 있게 된 건 얼마 안 됐다. 나를 알리는 일을 계속해야 하니까 무조건 많이 했다. 길에서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무료로 자주 하고. 지금은 경력이 쌓였으니까 이래저래 해서 못하겠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래도 프리랜서라는 특성상 거절이 굉장히 두렵다. 거절하는 순간 다시는 내게 일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랑의 음악이 가진 메시지가 때로는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경매에 부친 일 등 해석하기에 따라 제도권에 반하는 길을 가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트로피 사건’ 이후로 지금도 욕 댓글이 달린다. 제일 재미있었던 댓글은 ‘이번만 듣고 다시는 안 듣겠다’는 글이다. 싫어하기로 마음을 다잡는 건데 솔직히 좀 귀여웠다. (웃음)

악플에 의연해 보인다.
당연히 상처 입는다. 다만, 익명성을 가지고 공격은 쉽게 하는데 본인의 이름을 내걸고 지지하는 게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어떤 논란으로 인해 공격을 받고 있으면 실명을 드러낸 분들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해준다. 문화가 그렇다. 나를 직접 알고 있는 사람들은 시끄러운 상황이 있어도 믿고 지지해준다. ‘프라우드(자긍심)’를 갖게 된다. 특히 트로피 때는 욕을 많이 먹었는데 예정된 일이 하나도 끊기지 않았다. 신뢰를 주고 있음을 느낀다.

앞에서 어떤 목소리를 시원하게 내기도 하고 동시에 내면의 힘듦, 불안함을 솔직하게 보여주기도 한다.인간이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데 매체에 노출이 되면 쉽게 ‘캐릭터’가 생긴다. 그걸 유지하기 위한 강박에 시달린다. 나아가 캐릭터가 밈으로 소비되기 시작하면 그 외의 수많은 면을 눈치껏 숨기고 자기 조절을 해야 한다.

내 캐릭터는 좀 시끄럽고, 그러니까 말을 자꾸 하고 의견을 내는 사람일 거다. ‘세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말을 하고 싶을 때 할 뿐이다. 그로 인해서 공격받으면 슬프고 무섭고 그런 걸 동시에 다 느낀다. ‘저 사람은 강하고 세니까 상처를 안 받겠지’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설리가 죽은 게 큰 충격이었다. 사람들이 부여한 캐릭터 때문에 특히 ‘노브라’를 가지고 정말 많은 얘기가 오갔고 그걸로 그를 괴롭혔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 그가 얼마나 다양한 면을 혼자 끙끙대면서 감추고 외로웠을지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랑이를 너머 사회로, 그러니까 이랑

정규 3집 < 늑대가 나타났다 >는 유독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소리친다.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됐다. 1집 < 욘욘슨 >(2012)는 기존에 써뒀던 노래가 나왔던 거라 가수라는 직업의식도 없었다. 1집을 만들 때 20여 곡이 있었는데 실물 앨범에 12곡만 담겼다. ‘그냥 있는 노래를 다 넣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할 정도였다.

1집에 안 넣은 곡들과 새로 쓴 노래를 집합해 2집 < 신의 놀이 >(2016)을 만들었다. 그때부터 실물 연주자들과 함께했다. 그런 식으로 경험들이 쌓이고 또 누군가 듣고 반응하고 있음을 느끼면서 책임 의식이 생겼다. 가장 듣는 사람을 고려하며 쓴 게 < 늑대가 나타났다 >다. 아티스트로서의 책임 의식, 프라이드를 반영했다.

영상감독, 작가, 만화가 외에 ‘가수’라는 직업 정체성도 받아드린 걸까?
딱 부여받은 정체성만 보여주소서 하는 분위기를 못 참는다. 공연할 때도 ‘지금 무섭다’, ‘객석이 안 보여서 무섭다’라고 자주 말한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무대 위에서 찬양받는 존재가 되는 걸 못 참는다. 객석에 불을 밝혀서 어떤 사람들이랑 만나고 있는지 알고 들어가면 좀 편안한데 쥐 죽은 듯 고요하고 껌껌한 곳에서 다수가 나만 본다고 생각하면 너무 부담스럽고, 무섭다.

이유는?
실수했을 때 돌이킬 수 없지 않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부담이 제일 크다.

지난 2집 < 신의 놀이 >와 달리 이번 음반은 실물 CD를 제작했다.
사실 한국판은 CD 없이 (지난 음반처럼) 다운로드 코드만 있어도 된다. 일본 활동을 하고 있으니까 문화적 차이를 생각했다. 일본은 아직 아날로그를 지향하기 때문에 CD가 없으면 안 사려고 한다. 다운로드 코드만 있는 앨범을 낯설어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노래마다 곡이 쓰인 배경이 확실하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2집처럼 에세이를 포함한 앨범을 기대했고.
따로 책 계약을 해놨다. (웃음) 경향신문에 연재했던 ‘이랑의 가사-말’과 새로 쓴 분량을 합쳐서 책을 만들고 있다. (언제 발매되느냐 물으니) 내년에 내야 하는데 아직 원고를.. 다음 달에 책이 나올 게 있고, 그다음에 또 나올 게 있고 막 이래서…

바쁘다, 쉬고 싶다, 너무 바쁘다는 말을 자주 했지만 올해 이미 5권의 책을 계약했다. 코로나 19란 상상 불가의 팬데믹이 불어 닥치며 일감이 줄어든 탓이다.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 올라 그는 “1월 수입이 42만 원”이었음을 밝히며 트로피를 즉석에서 팔았다. 한 달 치 월세였던 50만 원을 벌었, 아니 받았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랑의 활동은 계속됐다. 나름 이름도 알렸다.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 타이틀 ‘늑대가 나타났다’의 한 가사가 그리 녹록지 않은 현실을 대변해주는 듯하다.

듣고 나누며 계속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사람

전작보다 목소리를 긁고 강하게 표현하는 식의 창법 변화도 느껴졌다.
목소리가 어떤지에 대한 생각은 안 했었다. 어떻게 부르겠다 의도하지 않았으니까 듣는이가 동요 같이 부른다, 담백하게 부른다고 얘기 해주면 그냥 그렇구나 했다. 점점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게 되고 그들과 이야기 나누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악기처럼 사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그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멜로디에 얹어서 부르는 정도였는데… 목소리를 진짜 악기처럼 생각하고 작업하는 분들을 보니까 완전히 접근 방식이 달랐다. 나는 가사가 제일 중요한데 이들은 소리가 가장 중요하고. 아직은 어떻게 접근해야 목소리를 악기로 쓰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여기서는 좀 더 크게 부르고, 더 긁으며 부르고 이런 것을 조금씩 시도 중이다.

음반의 시선이 나에게서 사회로보다 넓어졌지만 음악을 채우는 핵심 질료들은 전과 같다. 첼로의 혜지, 코러스의 혜미 등이 특히 각별할 것 같다.
혼자 있는 걸 너무 싫어하는 내게 늘 힘을 주는 조력자들이다. 대학생 때부터 기타 치고 노래를 불렀다. 학교 게시판에 음악 할 사람을 찾는 글을 올렸는데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훌륭히 활동하고 있는 이길보라 감독만 답을 줬다. 둘이 한참 공연을 하다가 우연히 혜미가 내 공연을 보러 왔다. 이길보라가 떠났던 차여서 혜미를 막 꼬셨다. 코러스라도 해달라고. 본격적으로 앨범 작업을 하면서 드러머를 만났고 혜지를 만났고 프로듀서인 대봉이도 만났다. 그렇게 꾸려졌다.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에 힘을 보탠 합창단 ‘아는 언니들’은 어떤가?
음악을 가르치면서 다 같이 노래하고 소리 지르는 일들이 많았다. 항상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언젠가 이런 합창팀을 꾸리는 게 나의 원대한 목표였다. 그러다 우연히 아는 언니들 쪽에서 워크숍을 진행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사랑스러움이 넘쳤다. 아마추어 합창단이어서 더 매력적이기도 했고. 앨범 작업에 참여해달라고 먼저 제안했다.

합창단을 꿈꿨다고?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 때 합창대회에 딱 한 번 나가 봤다. 가난한 축에 속했던 우리 학교만 빼고 모든 팀이 다 옷을 맞춰서, 그것도 화려한 성가대복 같은 가운을 입고 나왔더라. 우리는 각자 알아서 흰색 상의에 빨간 하의를 맞춰 입고 오는 거였다. 진빨강, 핑크에 가까운 빨강, 쿨톤, 웜톤 등 온갖 색이 다 섞인 옷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느낀 어떤 부끄러운 감정이 생생하다. 이런 팀이 1등 하면 진짜 멋있는 건데. 우리가 노래를 잘 못 불렀나?

합창대회가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몰랐나 보다.
그래서 이번 ‘뮤즈스(MUZES)’ 영상을 찍을 때 까만색 졸업가운 제일 싼 거를 빌려서 다 같이 입었다. 한 벌에 5천 원 정도 줬다. (기분이 어땠냐 물으니) 하하하. 예전에 옷을 맞추지 못했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다. (웃음)

방금의 일화처럼 아픔을 끌어다가 작품을 만든다. 이런 식의 창작이 자신을 소모하게 하진 않는지.
전혀. 내가 바라는 유일한 것은 내 얘기를 계속 들어주는 것뿐이다. 할 얘기가 너무 많고 살면 살수록 많은 걸 배우고 알게 되니까 어떻게 작품으로 낼지 정리가 안 될 정도다. 언젠가 어떤 이유로 내 이야기를 더 안 듣고 싶어 하면 어쩌지 하는 공포를 느낀다. 어릴 때부터 내가 있는 곳에 누군가가 얘기하러, 얘기 들으러 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렇게 넓은 작업실을 쓰는 것 역시 지금처럼 이야기를 듣고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뮤지션 이랑으로 활동한 지 이제 10년 정도 됐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을까?
너무 어려운 질문인데… ‘늑대가 나타났다’를 만들게 된 계기를 꼽고 싶다. 강남역 살인 사건 관련한 여성 집회에 초대돼서 노래를 부르게 됐다. 공연 의뢰가 왔을 때 엄청 겁이 났다. 집회를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당시 개인적인 일로 인해 일절 밖으로 나오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무대에 올라 다수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면 나중에 나를 도와줄 몇백 명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 줄 수 있겠구나. 그날 기억이 좀 강렬하다. ‘신의 놀이’를 부르러 간 거였는데 그 곡을 따라 부르기 어려우니까 다 같이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노래가 주는 연대의 힘을 느낀 것 같다.
자기 노래를 가지고 어떤 시위나, 집회 혹은 행사에 나와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인물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한테는 ‘신의 놀이’ 정도가 전부였을 땐데 그 곡은 한번 듣고 기억하기 어려우니까. 모두 싶게 따라부를 수 있는 노래를 써야겠다 한 거지. 후렴 정도는 따라부를 수 있으니 내게는 큰 성취다. (웃음)

랑은 어디서 쉼과 위로를 얻는지.
나는 쉴 줄 모른다. 그걸 못 배우고 못 해본 사람인 거다. 쉬는 날도 일정이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미리 약속을 잡아 둔다. 조금만 시간이 떠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서 하는 성격이다. 영원히 못 할 것 같은 게 명상일 정도로. 말없이 조용히 생각을 비우고 이런 건 너무 괴롭다. 소용돌이치는 이야기 속에서 그냥, 살고 있다.

힘을 한 번에 모아 태우는 별똥별이 떠오른다.
언니가 맨날 ‘너 일찍 죽을 거 같다’고 한다. (웃음) 내일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자살은 최대한 참으면서… 후회 없이 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걸 보고 경험하고 싶은데 또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니까. 이를테면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펴야 하니까 피고…

인터뷰 후 곧장 최소한의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는, 그러니 (거절해도) 양해를 부탁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아니나 달라, 며칠 뒤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자신을 태우고 스스로 타고 있는 건 아닐지 흠칫 손끝이 저릿했다. 랑이 만들고 나아가는 길에 사랑과 따뜻함만 놓여있기를 바란다. 상처를 덮고 하하하하 웃으며 해해해해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룰 여유를 가질 수 있기를. 별똥별 말고 계속 반짝이는 별이 되기를. 그가 써내는 작품들처럼 랑도 에너지를 잃지 않고 신의 놀이를 이어가기를 염원한다.

인터뷰: 박수진, 장준환, 정다열
정리: 박수진
사진: 정멜멜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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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랑 ‘늑대가 나타났다'(2021)

평가: 4/5

뜨겁고도 차가운 맑은 것들의 힘

이 음반은 많은 것을 묻게 한다. 무엇 때문에 앨범의 지휘자 이랑은 이런 이야기들을 담게 되었는가. 2012년 첫 정규 < 욘욘슨 >,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 수상을 안긴 소포모어 < 신의 놀이 >(2016)에 이어 5년 만에 발매된 세 번째 풀 랭스는 전례 없이 강하고, 세고 어둡다. 늘 그가 손에 쥐고 사용하던 작법들, 어쿠스틱 기타와 첼로를 중심으로 곡을 쌓고 서로 다른 가사를 한 곡에 동시에 넣는 등의 구성은 비슷하지만 그 안에 적힌 메시지의 촉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다. ‘나’를 뚫고 지나 ‘사회’에 닿으려는 듯 갖은 비유를 넣어 목소리를 낸다.

이는 작품과 동명의 타이틀 ‘늑대가 나타났다’부터 선명히 드러난다. ‘이른 아침 가난한 여인이 굶어 죽은 자식의 시체를 안고 /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울며 지나간다’는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 노래는 합창단의 웅장한 코러스와 만나며 어떤 뜨거움을 전한다. ‘내 친구들은 모두 가난합니다 / 이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여기에는 명백히 개인을 넘어 세상을 향한 소리침이 담겨있다. 쿵쿵 울리는 드럼과 거기에 맞춘 여러 사람의 호흡은 힘을 주어 ‘우린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요’라며 분노를 토한다.

좁게 자신 주변의 것들을 다뤘던 데뷔작을 지나 < 신의 놀이 >가 적나라하게 가족과 죽음 등을 소재로 다뤘다면 이번 작품은 그 자체로 사회를 본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앨범에는 솔직한 분노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울분이 가득하다. ‘환란의 세대’는 지금껏 발표한 곡 중 가장 굵고 거친 이랑의 보컬이 담겨있다. ‘목도 안 메도 되고, 불에 안 타도 되고, 손목도 안 그어도 되고’란 가사가 연이어 펼쳐지는 와중 몇몇 사람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애써 고개 돌린 누군가의 삶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 곡은 코러스 버전으로도 실렸는데 노래의 끝, 두텁게 중첩된 기괴한 합창단의 울림이 마치 인생의 고통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하나 돋보이는 변화는 독백의 적극 활용.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등에 사용된 감정 없이 내뱉는 독백들은 음반에 가득 채워진 ‘말하고자 하는 욕망’ 혹은 ‘전하고자 하는 욕망’들과 다름없다. 그만큼 앨범은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는 적확하게 우리에게 온다. 영화감독으로, 에세이 작가로, 또 음악인으로 존재하며 그가 풀어낸 ‘내 얘기’들은 산재한다. 누구든 그를 볼 수 있다. 아니 누구든 그를 ‘온전히’ 볼 수 있다. 이랑의 서사는 언제나 티끌 없이 맑고, 거짓 없이 온전하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번 앨범의, 나아가 ‘이랑’이란 아티스트의 핵심이다. 끊임없이 토해내는 그의 이야기들은 솔직함을 타고 더할 나위 없이 온전하게 다가온다. 삶에 밀착해 회고하는 친구, 가족, 죽음, 가난, 사랑, 일 따위의 것들이 이랑을 통해 순수하게 투영된다. 끝없이 그의 음악이 환호받는 것은 이 정제되지 않은 고백에서 시작될 것이다. 하나하나 곡이 쓰인 배경을 묻고, 듣고 싶게 한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래서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음반. 착실하게 두 땅에 발을 붙여 올곧게 ‘나’를 외쳤고 되돌아 울려 퍼지는 메아리는 그렇게 ‘우리의 것’이 된다.

  • – 수록곡 –
    1. 늑대가 나타났다 
    2. 대화
    3. 잘 듣고 있어요
    4. 환란의 세대
    5. 빵을 먹었어
    6.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 
    7. 그 아무런 길
    8. 박강아름
    9.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 
    10. 환란의 세대(Choir 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