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 음악의 핵심은 두 대의 베이스 기타와 드럼이다. 담백한 드럼 연주와 합을 이룬 더블 베이스는 선율마저 창조하는 박자가 되어 리듬이 더 중요한 현재의 대중음악에서 국악을 흡수한 이 퓨전 밴드가 환영받을 수 있게 한다. ‘여보나리’는 애매모호하고, 복잡하며, 간단치 않다. 흥이 나는 체념, 민초들의 능구렁이 같은 해학과 유머는 관능적인 리듬을 장착한 채 갓을 쓰고 족두리를 두른 우리 선조가 사이키델릭하고 펑키(Funky)한 인디 음악에 맞춰 춤추는 실루엣을 형상화한다.
블루스와 컨트리가 만난 로큰롤, 포크와 록이 융합한 포크록, 팝과 오페라가 조우한 팝페라도 탄생 초기에는 순혈주의자들의 반대를 버텨내야 했다. 국악과 팝이 손을 잡은 이날치의 음악도 국악 전통주의자들로부터 평가절하당했지만 해외의 반응은 그 반대다. 이날치의 음악은 그래서 세계적이다.
범 내려온다. 이날치가 내려온다. 적막한 사회 속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한 < 네이버 온스테이지 > 무대 클립으로 처음 화제를 모았을 때 이들은 ‘힙한 크로스오버’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날치 열풍의 핵심은 흥미 요소보다 진정성에 있다. 2018년 음악극 ‘드라곤 킹’으로부터 밴드를 설계한 장영규의 한 마디가 이를 증명한다. “퓨전 팀 중에 전통의 요소가 살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이 그들을 일시 유행과 순간 재미로 기억되는 숱한 아티스트들과 구분 짓는다. 리듬 악기만을 배치해 판소리의 기본을 지키며, < 수궁가 > 속 대목을 엄선해 감각적인 얼터너티브 디스코 트랙을 완성한다.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이날치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마포구 빅퍼즐문화연구소로 이날치 감독 장영규, 소리꾼 안이호와 이나래가 내려오는데…
바쁜 와중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 장영규 : 지난 몇 달 동안 너무 바빴다. 11월엔 최대한 일정을 줄이자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쉽지 않더라. 안이호 : 작업도 하고 있다.
어떤 작업인가. 장영규 : < 수궁가 >에서 손을 안 댔던 대목 중에 두 개 정도를 뽑아서 보너스 싱글로 만들어보려 한다. < 수궁가 >가 나온 게 올해 6월인데 원래는 1년 이상 이 작품만 가지고 활동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계속 녹화, 방송이 이어지자 주변에서 계속 ‘새로운 건 언제 나와요?’라고 묻더라. (웃음) 결국 신곡을 만들고 있다. CD 발매도 준비 중이다. 처음에는 ‘만들면 팔리겠냐.’라는 생각에 찍지 않았는데, 신곡과 LP에 실리지 못한 세 곡 정도 합쳐 준비 중이다.
살짝 신곡을 예고해줄 수 있나. 장영규 : < 수궁가 >에 남은 대목이 별로 없어서 고민이었다. 어떤 대목을 정하느냐에 따라 음악 장르가 달라지는데, 다행히 이번에 한 곡을 만드니 듣기에 너무 쉽고 편안한 음악이 나왔다.
이나래 : 집에 가니까 자꾸 코러스가 귀에 맴돌더라. (웃음)
상술한 것처럼 2020년은 이날치에게 굉장히 바쁘고 또 중요한 해였다. 사실상 2020년의 현상 중 하나다. 인기를 체감하나. 장영규 : 뭐라고 얘기하기가(웃음). 사실 밖에서 하는 얘기만 듣고 있지 실감은 크지 않다. 이나래 : 일단 판소리만 가지고 밥을 벌어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이 처음이다. 완전히 100% 판소리만 불러서 먹고 싶은 거 고민 안 하고, 가격표 안 보고. 일단 오늘은 먹을 수 있는 거다. 안이호 : 우리가 다니는 식당엔 고가의 메뉴판이 없던데. (웃음) 맞다. 많이 달라졌다. 공연과 스케줄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있는 거구나 싶어서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전에는 주 1회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하루 걸러 촬영도 하고,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이런 게 가능하구나!’ 싶다.
이날치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장영규 : 음악을 하다 보니 어느 시점부터 내 주변에 전통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본격적으로 판소리와 민요, 가곡 등 다양한 장르를 고민하게 된 것은 무용수 안은미와 함께 무용극을 꾸며 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분명히 좋은 지점이 있는데 왜 국악이란 이름 아래서 아무도 안 듣고, 버려지게 되는 걸까? 그렇게 작업을 하다 보니 2014년 국립극장에서 < 여우락 프로젝트 >의 일환으로 ‘제비. 여름. 민요 ’를 만들며 ‘우리가 록 페스티벌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신나는 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처음 가능성을 봤던 때였다.
본격적으로 이날치가 모습을 갖춘 것은 2018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의 음악극 ‘드라곤 킹’이다. 당시 장영규가 음악 감독을 맡았고 이나래와 안이호 역시 출연진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나래 : 처음 ‘드라곤 킹’을 할 때는 음악적인 부분보다도 게임 공연이 가진 융 ·복합적인 형식에 대한 기대가 더 컸다. 연기나 움직임, 합창과 같은 실험적인 소리를 경험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작업을 해나가면서 어느 정도 이날치의 기틀이 잡힌 것 같다. ‘드라곤 킹’에서 만든 형식을 밴드 음악으로 편곡한 게 이날치의 음악이라고 보시면 된다. 말하자면 인테리어를 먼저 하고 기초 공사를 한 느낌? (웃음)
한국관광공사에서 기획한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Feel the Rhythm of Korea)’ 시리즈로 이날치는 유튜브 세계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과 이름이 되었다. 한국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 촬영한 이 영상은 총 도합 3억 뷰 이상을 기록하며 국내외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호응을 얻었다.
이건 국악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센세이션이다. 안이호 : 여러 가지 흐름이 잘 맞아떨어졌다. 전에 한 번 장영규 선생님이 ‘이제는 사람들이 국악이든 뭐든 편견 없이 받아들일 세대가 도래한 거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전통적인 이미지에 얽매이지 않고 꾸준히 대중음악과 협업하며 활로를 모색하다 보니 이런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본다.
그 ‘전통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이날치에서 가장 음악적으로 역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장영규 : 전통, 판소리 혹은 어떤 악기가 나오냐 그런 거에 상관없는 국적 불문을 지향했다. ‘음악을 통해 몸을 움직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가 첫 번째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장영규 : 판소리를 들으며 느낀 점은 ‘판소리는 음악으로 출발하지 않았다.’였다. 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려다 보니 말의 리듬감, 혹은 재미있는 요소들을 넣게 되고 그게 음악적 형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걸 음악으로 어떻게 만들까 고민이 많았는데 오히려 판소리의 그 ‘비음악’ 성향이 대중에게 무국적으로 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형식으로 다듬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씽씽(SsingSsing) 같은 경우 민요를 바탕으로 한 팀인데, 물론 인기가 많았지만 전통을 꺼려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민요의 각 요소들이 이질적이기도 했다. 판소리는 그런 요소 없이 담백하다. 밴드 구성에서 기타를 제외하고, 리듬감 있는 비트를 지향한 것이 이런 고민에서부터 출발했다.
사실 국악이라는 요소는 굉장히 강한 터라 조금만 섞여도 타 장르를 잡아먹는 경우가 많다. 장영규 : 한 번 동남아시아를 쭉 다닐 일이 있었는데 그쪽에도 각 국 전통음악과 섞인 ‘퓨전’ 장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은 주로 재즈를 기반으로 하여 쉬운 접근 방법을 택하더라. 하는 사람들은 재미있는데 듣는 나는 재미가 없었다. 이날치를 구상할 때 국악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나도 재미있지만 우선 듣는 사람들도 재미있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안이호 : 국악이 특별히 강렬해서 무언가 섞였을 때 도드라진다고 보진 않는다. 문제는 그 섞는 과정을 어색하게 진행하는 게 문제다. 재즈도, 클래식도 숱하게 크로스오버를 하는데 조화롭지 않나? 대중 입장에선 들었을 때 완성도가 높지 않고 이질적이니까 ‘도대체 저게 뭐야?’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설명만 들으면 이날치의 음악은 록 혹은 디스코의 느낌이 많이 나는데 막상 음악을 접하면 이건 완전한 국악이다. 특히 ‘좌우나졸’ 같은 곡은 정통이다. 장영규 : 수많은 퓨전 크로스오버를 보며 자랐는데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팀은 김덕수 사물놀이 & 레드선 그룹이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재미있는 퓨전 팀이 없었다. 수많은 음악을 들으면서 저게 정말 국악인가 싶었다. 전공자라서 퓨전인가? (웃음) 무대에 인도 옷을 맞춰 입고 나오며 국악이라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게 또 유행을 하더라. 퓨전 팀 중에 전통의 요소가 살아있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안이호 : 이날치는 정통을 잘해야 하는 팀이다. 가장 기본적인 기술과 완성도 차원에서의 접근이 없으면 완성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멤버들이 각자 영역에서 만듦새를 높였고 최선을 다해 퍼포먼스를 보였다. 그렇게 좋은 합을 보여준 것 같다. 이나래 : 대부분 퓨전 팀들이 각자 모여 100%를 만들려 한다. 우리는 개인이 100%를 다하고 이를 모아 하나의 음악으로 만든다. 이날치 음악에서 소리꾼 한 명, 연주자 한 명이 없다 해도 음악의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리로 말하자면 이날치에는 네 명의 소리꾼이 모여있고 남녀 혼성이며 주고받기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파트 배분이나 각자 소리꾼의 역할 구분이 필요했을 텐데. 장영규 : 작업을 하다 보니 다들 다른 목소리에 맞춰 역할이 생겨났다. ‘이런 부분에는 누가 제일 잘 어울린다’ 정도로. 멤버들이 알아서 시작하는 편이다. 이나래 : 예를 들어 센 부분은 내가 맡고, 가벼운 부분은 권송희가 맡는 식이다. 처음에 작업할 때는 자유롭게 정했다. 반주를 틀어놓고 ‘네가 먼저 해봐!’ 하며 뛰어드는 식으로. 장영규 : < 수궁가 >는 판소리 수궁가의 원래 대목 순서 그대로 가는 앨범이 아니다. 판소리 중 대목을 추출하여 있는 것들을 자르고, 편집하고, 혼자 부르고 나눠 부르고 같이 부르는 등 다양한 구조를 실험하여 풀어낸 음악이다. 그 연습을 통해 지금의 이날치가 자리 잡았다고 본다.
안이호는 이날치 소리꾼들 중 유일한 남성이다. 안이호 : 다른 멤버들이 허투루 하는 친구들이 아니라 ‘축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은 안 한다. 그런 것보다 나의 음색이 확실하게 나와야 하는 파트에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나왔을 때 다른 색깔을 확실히 보여줘야겠다, 그런 생각이다.
이날치 음악을 하며 어려운 점이 있나? 안이호 : 너무 신기한 게 지금까지 술술 잘 왔다. 소리꾼들은 원래 솔리스트 기질이 강한데, 지금 멤버들은 ‘드라곤 킹’ 시절부터 2년 정도 부대끼고 있는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친하고 관계가 매끄럽다. 이 정도로 길게 안 싸우고 가는 걸 본 적이 없다. 장영규 선생님이 조타수를 맡아 키를 잘 잡아 줬고, 서로서로 신뢰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고 본다. 물론 음악적으로도 만족했고. 음악이 별로면 실망하게 되는데 이날치는 음악 자체로도 너무 좋다. 하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니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거라 본다.
이나래 : 안이호가 말한 ‘솔리스트’ 기질에 덧붙이자면 소리꾼들은 대개 이중적인 삶을 갖는다. 국악계에서 꾸준히 활동하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퓨전 같은 시도도 더러 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건 또 따로 진행해야 하고. 이날치는 그 현실과 이상의 접점이라 마음에 든다. 억지로 변할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소리를 내고, 그 요소들이 무시되거나 국악 아래 편견으로 희석되지 않고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주 좋다. 내 나이 또래가 좋아하는 대중음악과 전통음악을 하는 나 사이에 간극이 이날치를 하면서 많이 좁혀졌다. ‘한 번 해볼까’ 하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팀 내에 있다. 다양한 음악을 시도해보고 싶다.
이나래의 대답처럼 이날치의 그 ‘교차로’ 지점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앰비규어스 댄스 컴퍼니와 함께하는 무대, 비주얼적인 요소도 빼놓을 수 없다. 노래하는 소리꾼 입장에서 어떤가. 이나래 : 나는 안 그러는 편인데 다른 세명의 소리꾼은 평소 자신의 모습처럼, 놔 버린다. (웃음) 원래 소리꾼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무대에 오른 모습은 편안해 보이지만 그것도 편해 보이는 소리꾼의 연기다. 그런데 이날치를 하면 소리꾼 누구누구가 아니라 인간 누구누구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온다. 그게 신선하다.
사전 동선이나 안무 같은 것도 없나. 이나래 : 안무는 없고 동선과 무대 연출은 장영규 선생님이 기획하는 편이다. 우리도 상황에 따라 재미있게 무언가 보여주자는 생각은 하는데 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웃음) 자기 자신을 놓기에 가능한 퍼포먼스로 봐주셨으면 한다.
대중음악과 동 떨어진 국악을 포옹하는 것도 이날치의 목표일 수 있는데. 장영규 : 원래 목표는 아니었지만 우리 음악으로 생기는 영향력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계속 그 모습을 원하고 있었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통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상황에서 이렇게라도 편견 없이 듣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계속 시도해야 하지 않을까.
소리 측면에서 잘 풀렸던 노래는? 이나래 : 사실 < 수궁가 >가 2017년부터 만들어진 거라 기억이 잘 안 나는데(웃음) 안이호 : 오히려 ‘범 내려온다’는 소리꾼들에게 어려운 편이다. 작업하면서 매끄러웠던 건 ‘좌우나졸 ‘아닌가? 이나래 : 무슨 소리야. 아이고를 몇 번이나 틀렸는데. 안이호 : 그러네. (웃음)
국민적인 인기인 ‘범 내려온다’를 제외하고 앨범 < 수궁가 >에서 주목해줬으면 하는 곡은? 이나래 :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여자 소리꾼들이 하이라이트를 표현할 때 솔로의 모습과 정통적인 부분이 살아 있는 곡이라 매력적이다. 알이 꽉 찬 느낌이 있다. (웃음) 상대적으로 느린 곡이라 무대에서 자주 선보이지는 못하지만…
국악 혹은 대중가요를 포함해서 이 사람 소리 좋다고 생각하는 분은? 안이호 : 김광석. 그리고 저의 스승님이셨던 김일구 선생님.
이날치와 관련돼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안이호 : 이날치가 이 정도 관심을 받는 것도 ‘얼레 재밌네?’로부터 출발한다고 본다. 일단 들었을 때 재밌는 거다. 이렇게 성공하고 나니 거꾸로 ‘우리 전통이 원래 이런 거였어.’라며 돌아가는 느낌인데, 그냥 평범하게 처음 이날치를 접했을 때처럼 편견 없이 우리의 음악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이날치라는 밴드가 앞으로 어떤 모양이 됐으면 좋겠나? 장영규 : 첫 번째 목표는 자급자족이었다. 오랜 시간 음악을 해온 밴드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지켜보기만 했다. 히트곡을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없지 않나. 그래서 이날치는 우선 인디 시장을 공략해보자는 목적으로부터 출발했다. 거기서 살아남아 2집과 3집을 만들 수 있게 버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는 게 제일의 목표였다. 앞으로도 계속 가져가야 할 목표기도 하고.
전대미문의 ‘거리두기’ 현실에서 음악도 예외가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이 위협받는 가운데 가요계도 잠시 숨을 고를 때가 있었다. 하지만 결코 멈추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대중가요는 삶을 위로하고 웃음을 선사하며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IZM 선정 2020년을 대표할 가요 싱글 10곡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오마이걸(OH MY GIRL) ‘Dolphin’
식상한 패턴을 비켜가면서도 트렌드를 붙잡으려 애쓴 음악적 성의가 끝내 형통했다. 댄스 퍼포먼스 혹은 비주얼의 개가, 화제성의 산물, 마케팅의 성과 등등을 들먹이기 전에 음악 정확히는 곡의 승리였다. 듣기에 따라 건조할 수도 있고 습할 수도 있는, 조금은 우기듯 기분 좋게 반복하는 ‘다 다 다..’ 리듬에 바로 이어지는 ‘또 물보라를 일으켜’까지의 대목은 2020년 가장 중독화에 성공한, 나른하지만 무감각을 찍어 누르는 매혹의 코러스다.
짧지만 돌아가면서 부르는 멤버 모두의 수준급 보컬도 승리를 거들었다. 이 때문에 로맨틱한 가사가 살고 실종된 청순과 설렘이 복권된다. 노래에서 화자가 좋아하는 하트 상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오마이걸 자신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돌핀으로 팬들 마음에 새겨진다. 여성 팬이 찾고, 어른도 반응하고, 놀랍게도 헤비메탈 광이 호감을 내비친다. 고질적 성, 세대, 장르 분리의 유쾌한 은폐. 오마이걸에게 ‘걸 그룹의 걸 그룹’이란 수식을 제공해준 2020년의 러브 송! (임진모)
이날치 ‘범 내려온다’
네이버 온스테이지에 올라온 영상이 시작이었다. 간결한 베이스가 도입부를 알리자 한복과 정장을 장착한 춤꾼들이 리듬에 맞춰 조금씩 전진하고, 그 위로 구수한 판소리가 힘차게 탑승한다. 다들 태연하게 제 의무를 다하고 있지만, 분명 동서양의 문화가 한 데 뒤엉키는 혼란스러운 상황. 밴드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협업으로 탄생한 기상천외한 공존, ‘범 내려온다’ 속에는 조선시대 놀이판의 오색찬란한 광경이 다시금 호출되고 있었다.
아방가르드 밴드 어어부 프로젝트, 혹은 퓨전 국악을 지향한 씽씽과 불교음악을 다룬 대형 연주단 비빙과 같이, 이날치 역시 수많은 분야를 탐험해온 장영규의 잠시 스쳐 가는 연장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곡이 지닌 기세 속에는 최근 국악계의 진보적 흐름에 단순 동참하는 의의를 넘어, 도리어 앞장설 수 있을 만큼의 우수한 포용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역사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원재료를 가지고도 젊은 세대를 스스로 들썩이게 만들지 않았는가. (장준환)
조정석 ‘아로하’
가수의 조건 중에서 사람들은 가창력에 비해 발성을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하지만 가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곡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감정전달도 애를 먹는다. 또 작사가에게도 미안하고. 배우 조정석은 초등학생이 듣고 받아쓰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발음과 뚜렷한 발성을 구사한다. 이것만으로도 조정석의 ‘아로하’는 2020년에 가장 평가받아야 할 노래 중 하나다.
가창력도 기대 이상이다. 이재훈과 유리가 부른 쿨의 원곡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부른 조정석은 남자와 여자의 키를 무리 없이 소화하며 또박또박한 가사를 통해 사랑스런 노랫말을 더욱 아름답게 격상시킨다. 배우로서 발음이 좋은 그의 진가가 발휘되는 순간이다. 조정석은 ‘슬기롭게’ 잘 불렀고 듣는 사람들은 그 점을 충분히 ‘납득’한다. (소승근)
창모 ‘Meteor’
올해를 대표하는 가요 싱글들을 보고 한 해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면 ‘Meteor’를 빼놓고 2020년을 논할 수 없다. 힙합이 팝이 된 시대에, 특히 ‘그’ 오디션에서가 아닌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노래하는 이 래퍼에게 세상은 손을 들어줬다. 피아노 연주부터 비트 메이킹, 프로듀싱, 랩 스킬까지 탄탄한 실력을 겸비한 음악가에게 무시 못 할 히트곡까지 터졌으니 그 누가 의심하랴.
2019년 12월 하늘에서 떨어진 ‘Meteor’로 ‘마에스트로 (Maestro)’를 밀어내며 대표곡 자리를 갈아엎은 그는 피아노 치는 래퍼 대신 카니예 웨스트식 작법과 자전적 가사, 그리고 보컬 이펙트의 이상적인 조합으로 익숙한 새 개성을 손에 넣었다. ‘덕소의 아들’에서 ‘랩스타’로 떠올랐던 그는 덕분에 한 단계 발전해 ‘팝스타’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위치까지 올랐다. (임동엽)
아이유(IU) ‘에잇 (Prod. & Feat. SUGA of BTS)’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개성이 뚜렷한 두 명의 28살이 만났는데, 각자의 질감을 유지하다가 융합하기도 하면서 또 서로에게 새로운 시도였을 장르를 말끔히 소화한다. 거기에 여러 차례 곱씹게 되는 언어의 힘까지. 시원하게 뻗어 나아가 카타르시스에 닿는 얼터너티브 록 사운드와 달리 오직 기억 속에 머물러있는 노랫말은 너무나도 시리기에, 어느새 우리도 ‘한 뼘짜리 추억’을 함께 거닐고 있다.
지극히 본인의 이야기임에도 저마다 가슴 깊이 눌러 담았던 형언할 수 없는 먹먹함을 떠오르게 한다. 들춰내는 것도 아니고 헤집어 놓는 것도 아닌, 슬그머니 ‘서로를 베고 누워’ 그리움을 어루만진다. 아이유는 스물여덟의 반복되는 무력감과 무기력함을 고백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 보다 힘겨웠던 2020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는다. 그야말로 ‘올해의 힐링 곡’. (임선희)
가호 ‘시작’
긍정적인 힘이 필요한 한해였다. 코로나 19시대에 갇혀 움츠러든 대중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웠고, 시작이란 단어는 잊혀가는 일상 중 하나였다. < 이태원 클라쓰 >로 발현된 화제성이지만, 올해 2월 발매된 가호의 ‘시작’이 드라마가 종영된 지 한참 지난 지금까지 곁에 머물며 시대와 호흡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는 가공되지 않은 희망을 원했고, 그곳에서 위로를 찾았다.
무엇보다 순수하다. 밝은 내일이라는 목표가 직선적인 록 사운드로 표현된 곡은 ‘워’와 같은 추임새 등 영상 음악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살리며 새 출발의 설렘을 담아내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청자에 다가선다. 사람의 체온과 닮은 ‘시작’의 온도에 무명 가수의 목소리는 서서히 퍼져나가며 멜론 차트 1위, 소리바다 어워즈 OST 부문 수상 등 확실한 기록 또한 남겼다. 특정한 지지층 없이 음악으로만 이뤄낸 의미 있는 결과다. 너무 뜨겁지 않게. 하지만 따뜻하게 2020년을 감싸 안았다. (손기호)
DAY6(데이식스) ‘Zombie’
반복되는 일상 속 무력해진 자신을 ‘머리와 심장이 텅 빈’ 좀비에 빗댄다. 괜찮다는 위로나, 애써 고통의 실타래를 벗어나라는 긍정의 메시지도 없다. 데이식스의 여섯 번째 미니 앨범 < The Book of Us : The Demon >의 타이틀곡 ‘Zombie’는 밴드의 작품 중 가장 어둡고 비관적이다. 벌스(Verse)와 후렴의 멜로디를 일치시킨 간소한 구성이 자연스럽게 보컬에 귀 기울이게 하고, 영케이와 원필이 직접 쓴 노랫말의 음울한 정서를 격정적으로 토해내는 멤버들의 목소리가 마음을 찢어놓는다.
뒤숭숭한 한 해였다. 세계적 전염병의 창궐에 사람들은 고립됐고, 설상가상으로 국내에는 태풍의 악재까지 겹치며 일상을 빼앗겼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들을 흘려보내며 몸도 마음도 지쳐간 이들이 많았을 터. 이 노래가 그 시대성을 의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Zombie’는 묘하게 그런 시대의 모습과 맞아떨어지며 어두운 시기를 걷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그들에게도 나은 일상이 돌아오기를 바라본다. (이홍현)
지코 ‘아무노래’
이 노래의 히트는, 이미 영미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챌린지’ 프로모션이 국내에도 정착했음을 알린 사건이었다. 초반 30초에 모든 곡의 매력을 집대성하고, 여기에 따라 하기 쉬운 안무를 장착. 다양한 분야의 셀럽을 참여 시켜 진행한 SNS 홍보는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트렌드를 자신의 것으로 완벽하게 체화한 지코 본인의 프로듀싱 역량.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그루브한 싱잉-랩, 비트 위에 자연스레 스며있는 보사노바의 기운, 구성을 완벽히 다르게 가져가며 곡에 몰입을 유도하는 인트로와 아웃트로 등. 남들이 조금씩 흉내만 낼 때, 그는 본인의 음악적 매력을 적확하게 녹여내며 승기를 잡았다. 트렌드에 대한 이해와 음악적 역량이 빚어낸 전략이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하느냐에 대한 그 예제, 지코가 확실히 보여준 셈. (황선업)
조광일 ‘곡예사’
이해되는 광기, 소화되는 분노다. 빽빽하다 못해 뾰족하게 쏟아지는 속사포 래핑과 열에 받쳐 토해내는 서사들은 흐트러짐이 없다. 더하여 확실하게 들리는 발음은 더욱 강한 주목 및 집중을 끌어낸다. 2019년의 끝에 발매한 싱글 ‘Grow back’을 출발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조광일은 올해 이 노래를 통해 확실한 자국을 남겼다.
자신을 줄을 타는 곡예사에 비유한다. 아니 그보단 아찔한 줄타기처럼 짜릿한 랩을 탄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시작과 동시에 정신을 쏙 빼놓는 그의 소리침은 어디서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과 거친 포부로 읽힌다. 랩 스킬, 데뷔를 각인시킬 가사, 호흡. 무엇하나 빠짐없이 날카롭다. 튕기듯 쏘아내는 랩과 그 안에 담긴 생생한 래퍼로서의 자신감. 돋보이는 신예다. (박수진)
블랙핑크(BLACKPINK) ‘Lovesick Girls’
블랙핑크는 케이팝 스타에서 팝 스타가 되어가는 올바른 선례를 보여줬다. 셀레나 고메즈(Selena Gomez)와 함께한 ‘Ice cream’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3위에 데뷔했고, 세계적인 팝 스타 레이디 가가(Lady Gaga), 카디 비(Cardi B)와의 작업으로 팝 시장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단계를 거듭하는 전술 끝에 < The Album >이 빌보드 앨범차트 2위의 쾌거를 이루며 인기의 정점을 증명했다.
‘Lovesick girls’는 팝스타의 위치를 선점하면서도 케이팝의 보존을 꾀하기에 더욱 의미 있다. 2000년대 미국의 틴 팝(teen pop)을 떠오르게 하는 에너제틱한 청량함과, 블랙핑크 특유의 마이너한 색깔을 적절히 배합한다. 여기에 케이팝의 성질을 주조하는 직관적인 신시사이저 리프와 촘촘하게 짜인 일렉트로닉 사운드는 짜릿한 쾌감의 원천! 비로소 국내외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는 이유다. (조지현)
퓨전 국악 팀 씽씽의 주축은 소리꾼 이희문과 어어부 프로젝트 출신의 음악 감독 장영규였다. 팀 해체 후 이희문은 민요와 잡가를 주축으로 하여 재즈, 레게 및 펑크(Funk)를 결합하며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는 가운데, 장영규는 2018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의 음악극 ‘드라곤 킹’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다. 이윽고 각기 다른 개성의 다섯 소리꾼, 드러머 이철희, 베이스 정중엽이 한 데 모였다.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수궁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들은 조선의 판소리 명창 이날치의 이름을 빌려 신명 나는 한 판을 벌인다.
유튜브 조회수 100만을 넘기며 순항 중인 ‘범 내려온다’를 통해 신세대 소리꾼의 스타일을 살펴보자. 기타 주자 대신 한 명의 베이스 주자를 더 두며 멜로디보다 리듬에 강점을 두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간결한 리프 아래 잘게 쪼개진 드럼 비트는 국악 장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얼트 디스코와 신스팝의 비트를 이식한다. 문화재청보다 댄스 플로어와 클럽이 가까운 신세대 소리꾼들의 취향과 장영규의 현대적인 감각이 화려한 비주얼과 대비되는 정제된 형태의 판소리를 만들었고 이 전략은 대단히 성공적이다.
사운드가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가운데 중추를 맡아야 할 소리꾼들은 물 만난 별주부, 뭍으로 나온 토끼처럼 신나게 뛰어논다. ‘범 내려온다’의 혼성 교차 코러스가 반복 구조를 지루하지 않게 하고 ‘좌우나졸’에서 속사포처럼 상황을 묘사하며 앞다투어 앞으로 나서는 모습에는 자유롭되 엄격한 질서와 흐름이 있다. 사이키델릭 풍의 ‘어류도감’과 느린 템포의 ‘약성가’에서 여성 소리꾼들과 남성 소리꾼들이 번갈아 중심을 맡으며 감각을 일깨우고, ‘호랑이 뒷다리’와 ‘별주부가 울며 여짜오되’의 재치와 섬세한 감정 표현 역시 판소리의 매력을 전달하기에 손색이 없다.
이처럼 낯선 것들의 조화로운 공존 지대를 구축한 이날치의 세계가 묘하게 아웃사이더적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Another brick in the wall pt.2’의 핑크 플로이드보다 그 앨범 < The Wall >의 ‘Comfortably numb’을 경박한 디스코로 리메이크한 시저 시스터스(Scissor Sisters), ‘Groove is in the heart’의 이방인 3인조 디라이트(Deee-lite)와 닮았다. 지배층을 조롱하고 기지를 발휘해 살아 돌아온 토끼의 이야기를 흥겹게 노래하는 이날치의 모습은 신나지만 그 아래에는 전통의 보이지 않는 굴레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젊은 음악인들의 현실적 고민이 도사리고 있다.
언더그라운드로부터 출발한 디스코 비트 위에서 이날치는 현세대와의 소통을 원한다. ‘수궁가’의 원래 이야기 흐름을 따르지 않고 주요 장면만을 포착해 앨범 단위 소리의 유기성을 강화한 요소 역시 판소리의 틀에 연연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결과다. 무거운 국악 보존의 사명 대신 해체와 재조립으로 ‘힙’의 칭호를 얻어낸 2020년의 ‘수궁가’는 과감히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생존과 계승의 첫 단계임을 증명하고 있다.
– 수록곡 – 1. 범 내려온다 2. 좌우나졸 3. 어류도감 4. 약성가 5. 말을 허라니, 허오리다 6. 신의 고향 7. 호랑이 뒷다리 8. 일개 한퇴 9. 별주부가 울며 여짜오되 10. 의사줌치 11. 약일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