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속 문물을 재가공해 전하는 보부상들이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왔다. 소리꾼 이희문을 중심으로 결성한 민요 프로젝트 오방신과가 1년 만에 나타나 판을 벌인 무대는 장(場), 시장이다. 먼 옛날 계급 사회의 하층인 상인들이 물건을 팔며 불렀던 장타령을 각색한 만큼 노랫말의 의미는 중요치 않다. 강원도 곳곳의 지명을 언급하며 재치를 더한 언어유희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음절을 분하며 오로지 리듬감을 돋우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독특한 장단을 보조하는 건 북이나 장구가 아닌 외국 악기다. 밴드 허송세월의 베이시스트이자 오방신과의 프로듀싱을 담당하고 있는 노선택은 퍼커션과 기타로 기초 비트를 만들고 트럼펫과 색소폰으로 빈 음역대를 채우며 다시 한번 전통 음악에 특유의 레게 스타일을 이식했다. 이국적인 질감이 강한 탓에 뽕끼를 극대화했던 ‘허송세월말어라’ 이상의 흥이 차오르진 않지만 여전히 장터 관객들의 소비욕을 자극하기 충분한 퍼포먼스다.
‘허송세월말어라’ 한 곡으로 모든 편견을 무장해제시킨다. 흥겨운 디스코 리듬에 ‘뽕필’ 나는 신스 멜로디와 신민요 ‘사발가’의 가락진 구성, 펑크(Funk) 비트에 펠라 쿠티(Fela Kuti)를 연상케 하는 아프로비트의 색소폰 솔로까지 더해진 노래는 꽉 차있으나 번잡하지 않고, 흥겨우나 가볍지 않다. 화려하고 독특한 복장의 경기 민요 전수자 이희문의 새 프로젝트 OBSG (오방신과)의 멋진 출사표다.
2017년 미국 NPR 음악 프로그램 ‘타이니 데스크’에 밴드 씽씽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모은 이희문은 팀 해체 이후 홍대 앞 클럽 공연과 ‘프로젝트 날’ 등 다양한 활동을 거쳐, 2015년 결성된 루츠 레게 팀 노선택과 소울소스와 손을 잡았다. ‘허송세월말어라’ 이후 다수 수록곡들이 빠른 템포보다 느릿한 그루브의 레게 음악으로 주를 이루는 이유다. 토킹 헤즈(Talking Heads)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던 씽씽의 1980년대 뉴웨이브 지향과 분명한 차이를 둔다.
노선택과 소울소스의 완숙하고도 탄탄한 연주는 두 소리꾼 추다혜와 신승태가 빠져나간 보컬 라인의 공백을 최소화한다. 언뜻 단조로워 보이나 고도의 숙련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끌어나갈 수 없는 바이브다. 여유로운 흐름 속 기승전결을 명확히 두는 ‘건드렁’과 ‘긴 난봉’, 훅 파트에서의 화려한 변주로 확실한 포인트를 짚는 ‘노래, 가락’과 강렬한 기타 연주의 ‘사설난봉’ 등 각 곡마다 확실한 개성이 살아있다.
이는 지난해 또 다른 소리꾼 김율희와 함께한 < Version > 앨범과도 공통점이 있으나 < 오방神과 >를 독립적인 작품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이희문의 세속성이다. < Version >이 판소리의 한 부분을 현대 음악으로 옮긴 앨범인 데 반해 < 오방神과 >는 개화기 이후 창작된 신민요 가락이 주를 이룬다. 현대적인 ‘어랑브루지’와 ‘개소리말아라’, 대중에게 익숙한 ‘바람이 분다’ 등 오방신과의 음악은 국악의 범주를 강요하지 않는다. 일찍이 내려놓음의 미학을 깨친 ‘이단아’ 이희문다운 탁월한 선택이다.
‘조선 아이돌’ 놈놈, 허송세월 밴드와 함께하는 이희문은 고고한 예술인의 길 대신 거리의 악사와 광대를 자처한다. 사방팔방의 온 신들을 받아들여 민중의 번뇌를 씻겨 내리고,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목소리와 의례를 품는 박수의 음악이 < 오방神과 >에 집약되어있다. ‘들을 음악이 없다’는 ‘허송세월’ 말고 이 음악을 들어야 한다.
– 수록곡 – 1. 허송세월말어라 2. 나리소사 3. 건드렁 4. 긴 난봉 5. 나나나나 6. 노래, 가락 7. 사설방아 8. 어랑브루지 9. 사설난봉 10. 타령 11. 개소리말아라 12. 바람이 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