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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즘] 리스펙트

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열 두 번째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생애를 스크린으로 복각한 < 리스펙트 >다.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의 발자취를 좇는 < 리스펙트 >는 그의 사후 3년인 2021년 개봉한 전기영화다. 극적인 내용을 중점으로 구성하여 관객을 시종일관 긴장하게 만드는 작품은 연기와 음악이라는 정공법으로 힘을 토해낸다. 생전 자신의 배역을 맡을 이로 직접 지목한 제니퍼 허드슨의 강인한 연기력과 폭발적인 가창력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전설적인 가수를 되살린다. 그의 눈빛에 음악을 사랑하고 종교를 부르짖던, 흑인 여성 아레사 프랭클린이 그대로 들어있다.

음악을 사랑했던
천부적인 재능으로 ‘서른 살의 목소리를 가진’ 열 살의 아레사 프랭클린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인종차별과 정치적 이념 대립이 복잡하게 어우러진 1950년대 미국, ‘My baby likes to Be-Bop (And I like to Be-Bop too)’을 출중하게 소화해내는 노래 실력은 아이에게는 행운이었지만 동시에 괴로움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마자 잠에 들길 강요하는 아버지 클라렌스를 쳐다보는 어린 아이의 눈빛이 생애 내내 이어질 음악과의 복잡한 관계를 서두부터 암시한다. 포레스트 휘태커의 노련함에 지지 않는 아역배우 스카이 다코타 터너의 연기력에 압박감은 초반부터 팽팽해진다.

보는 사람마저 지치게 하는 극적인 플롯을 음악이 해소한다. 테드 화이트와의 연애 장면에서 나오는 ‘Nature boy’는 사랑의 당도를 가득 충전하고, 애틀랜틱 레코드에서의 첫 히트곡 ‘I never love a man (The way I love you)’의 뒤를 잇는 대표작 ‘Respect’의 공연 장면은 정상에 오른 가수의 커리어를 화려하게 선보이며 잠시 숨통을 틔워준다. 제니퍼 허드슨의 뛰어난 목소리가 그 중심을 꽉 지탱한다.

폭력적으로 변한 애인과의 본격적인 갈등 앞에 흘러나오는 ‘Chain of fools’, 그리고 그와의 결별로 해방되는 순간 나오는 ‘Think’ 등 적재적소에 울려 퍼지는 가사 덕분에 작품은 일종의 뮤지컬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후자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순간 어지럼증을 토하나 이내 활력을 되찾는 주인공의 모습은 가장 높은 몰입도를 자랑한다. 전기 영화에서 음악의 역할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를 부르짖은
자유의 땅인 미국에 역설적으로 노예가 되어 끌려온 흑인들이 기댈 곳은 교회였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에서만 허용된 노래는 가스펠을 비롯한 여러 흑인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아레사 프랭클린 또한 단상 위에서 찬양을 통해 말씀을 전달했다. 신앙의 줄기가 내내 이어진다는 점에서 < 리스펙트 >는 종교영화이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에게 잔인한 세상은 끊임없이 비극을 선사했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겪은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과 어머니 바바라의 급작스러운 사망, 그리고 이로 인한 실어증이 초반부에 빠르게 등장하며 주인공만이 아니라 관객까지 숨막히게 한다. 애인, 그리고 가족 간의 분쟁이 멈추지 않는 버거운 삶이지만 그는 끝까지 신을 향한 손길을 저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라이브 실황을 담은 1972년 음반 < Amazing Grace >를 녹음하는 내용이다. 마치 성경 속 ‘돌아온 탕아’처럼, 한때 히트곡을 갈망했던 가수는 레코드사의 만류를 단호하게 내치며 상업성과 거리가 먼 가스펠 음반을 제작한다. 신이 응답이라도 한 것일까, 앨범은 아레사 프랭클린의 커리어 사상 최대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 Amazing Grace >는 2018년에야 공개되었다)

흑인 여성이었던
인종차별이 지금보다 더욱 만연했던 시대, 흑인 인권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던 아레사 프랭클린의 행보 또한 스크린에 그대로 등장한다. 아버지 덕분에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도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백인들에 맞서 급진적인 항쟁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도 하고, 인권운동가 안젤라 데이비스의 체포 소식을 듣고 분개하기도 한다. 격렬했던 과거 미국을 보여주는 내용이자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 문제가 대두되었던 2020년대의 사회를 또한 관통한다.

연인 테드 화이트의 폭력성이 드러나는 계기도 인종차별이다. 흑인들이 아직도 목화 농장에서 일하던 1967년 앨라배마, 흑인 가수를 달가워하지 않던 세션 음악가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내색을 비췄다. 색소폰 연주자가 치근덕대는 모습을 본 테드는 애꿎게도 아레사에게 격렬한 분노를 토하고, 사과하러 온 스튜디오의 주인 릭 홀과 주먹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한 아레사 프랭클린의 대답은 간단했다. 음악이다. 편곡을 이끌며 곡의 방향성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불만 가득했던 세션들을 침묵하게 했던 그는 댄스 음악에 영합하지 않은 자신만의 음악으로 백인들에게도 사랑을 얻어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사후 인권 운동에 대한 스트레스가 코러스 싱어로 활동했던 자매들과의 갈등, 그리고 공연 스케쥴에 대한 강박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이 모든, 아레사 프랭클린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영화는 아레사 프랭클린의 실제 공연 모습을 함께 띄워준다. 감동적인 무대 장면부터 심적 부담으로 인해 알코올에 잔뜩 취해 관객 앞에서 쓰러지는 모습까지, 온갖 산전수전을 자신의 삶인 양 소화해낸 제니퍼 허드슨의 뛰어난 연기가 작품을 아우르나 결국 그 주인공은 아레사 프랭클린인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돋보이고, 종교적인 색채 또한 강하며, 시대를 초월한 흑인들의 정신도 함께 담겨있는 영화는 이 모든 것을 제치고 ‘소울의 여왕’에게 바쳐지는 헌사로 자리한다. < 리스펙트 >, 제목처럼 그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한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My baby likes to Be-Bop (And I like to Be-Bop too)
2.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3. I’ll be seeing you
4. We’re marching to Zion
5. Ain’t that just like a woman
6. How far am I from Canaan
7.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8. There is a fountain filled with blood
9. Go where my baby lives
10. Lonely teardrops
11. Honey
12. Think
13. Ac-cent-tchu-ate the positive
14. This better earth
15. Groovin’ the Blues
16. Rufus
17. Nature boy
18. Hey Joe
19. Anyway you wannta
20. Respect
21. Do right woman, do right man
22. Dr. Feelgood
23. Sweet sweet baby (Since you’ve been gone)
24. (You make me feel like a) Natural woman
25. Drinks at the Ritz
26. Chain of fools
27. My one and only love
28. Puffin’ on down the track
29. Take my hand, precious lord
30. Blues to Elvin
31. Spanish Harlem
32. To be you, gifted and black
33. I say a little prayer
34. Amazing grace
35. Precious memories
36. Here I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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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무비즘] 아임 낫 데어

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열 아홉 번째는 7개의 서로 다른 자아 및 캐릭터로 밥 딜런의 음악 여정을 그린 < 아임 낫 데어 >다.

시대의 음유시인 밥 딜런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난해한 가사, 쉬이 멜로디를 캐치하기 어려운 노래들, 별다른 설명과 해석을 달지 않는 밥 딜런 본인의 성격까지 그의 음악 앞에 자리한 장벽은 공고하다. 그럼에도 밥 딜런은 활동명(실제 이름은 ‘로버트 짐머만’이다)을 제목으로 내세운 첫 번째 정규 음반 < Bob Dylan >(1962) 이후 2022년 현재까지 끝없이 회자하고, 소환되는 음악가다. 그 이유가 바로 오늘 소개할 영화 < 아임 낫 데어 >에 담겨있다.

그저, 감각(Sense)할 것
1970년대 화려한 글램 록의 시기를 담은 영화 < 벨벳 골드마인 >(1999)을 거쳐 오늘날 영화 < 캐롤 >(2016)로 국내에 많은 골수팬을 거느린 감독 토드 헤인즈가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밥 딜런의 전기를 거칠게 풀어낸다. 6명의 배우, 7명의 캐릭터가 각기 다른 모습의 밥 딜런을 연기한다. 영화 속 각 주인공은 인종과 성향이, 사는 시대가 모두 다르다. 이를테면, ‘우디’라는 이름의 흑인 소년과 은퇴한 총잡이 ‘빌리’, 저항 음악으로 사랑받는 포크 가수 ‘잭’, 시인 ‘아서’가 한 화면 안에 담기는 식이다.

불친절하다. 하나의 줄기를 가지고 천천히 이야기를 쌓고 끝내 이를 터트리며 어떤 주제를 전하는 ‘기승전결’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진득하게 말에 주목하고, 규칙 없이 각 캐릭터를 오고 간다. 시인 ‘아서’가 소심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동시에 은퇴한 총잡이 ‘빌리’는 한 발짝 뒤에서 사회를 따뜻하게 포용한다. 날뛰고, 널 뛰는 시선과 분위기의 교차 속에서 밥 딜런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혹자는 당황을 넘어 당혹스러운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그저, 감각(Sense)할 것을 권한다. 이해하지 말고 느낄 것. 토드 헤인즈가 포착한 7개의 가면 아래 선 밥 딜런을 그저 감각하다 보면 실체가 선명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모두가 밥 딜런의 자아 : 케이트 블란쳇의 ‘쥬드’, 히스 레저의 ‘로비’
1966년 오토바이 사고 이후 긴 시간의 잠적, 마약, 1970년대 말 갑작스런 기독교인으로서의 선언 등 밥 딜런의 음악 여정에는 다양한 사건이 동행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그가 겪은(혹은 행한) 이러한 실제 사건을 중심으로 약간의 상상력을 덧대 창조됐다. 그중 눈여겨볼 캐릭터는 케이트 블란쳇이 열연한 ‘쥬드’와 히스 레저가 분한 ‘로비’다.

‘쥬드’의 등장은 1965년 뉴포트포크페스티벌(작품에서는 ‘뉴 잉글랜드 JAZZ & FOLK FESTIVAL’로 지칭된다)에서 시작된다. 무대에 오른 쥬드는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진한 블루스의 ‘Maggie’s farm’을 연주한다. 같은 날 연주한 ‘Like a rollingstone’이 빌보드 싱글차트 2위까지 오르며 ‘포크 록’의 선구자, 밥 딜런을 대표하지만 영화는 되레 조금은 덜 익숙한 ‘Maggie’s farm’을 소환해 포크와 시대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지탄을 받던 시절의 그를 묘사한다. 명곡 ‘Ballad of a thin man’에 맞춰 언론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은 ‘쥬드’의 정수이니 눈여겨봐도 좋겠다.

히스 레저가 맡은 ‘로비’는 밥 딜런의 실제 연인이었던 수즈 로틀로와 아내 사라 로운즈를 뒤섞은 듯한 인물 ‘클레어’를 통해 완성된다. 클레어와 사랑이 시작될 땐 사라 로운즈와의 웨딩 앨범으로 이해되곤 하는 < Blonde on Blonde >(1966)의 수록곡 ‘I want you’가 흘러나오고, 이별의 징조가 진해질 땐 실제 사랑의 끝을 달리고 있던 시기 발매한 < Blood on the Tracks >(1975)의 ‘Simple twist of fate’가 스피커를 채운다. 완전한 헤어짐 이후 절절한 비(悲)음으로 부르는 ‘Idiot wind’ 또한 밥 딜런의 인생을 이해하기에 적절한 트랙이다.

I’m not there, 나는 거기에 없다.
영화의 제목인 ‘I’m not there’은 밥 딜런의 곡에서 가져왔다. 오토바이 사고 이후 칩거할 당시 만든 노래이며 1975년 발매된 < The Basement Tapes >에 실릴 예정이었지만 실제 발표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해적판으로 떠돌다가 < The Genuine Basement Tapes, Vol2 >(1992)에 실렸고 이 작품의 사운드트랙으로 다시 한번 정식 발매됐다. 투박한 노이즈를 잘 살린 후배 그룹 소닉 유스의 재해석으로 밥 딜런의 생애를 음악으로 ‘정조준’한다.

‘나는 거기에 없다.’ 밥 딜런을 해석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문장이 있을까? 결국 영화가 ‘밥 딜런’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누군가의 시선을 묘사하며 비전형적으로 나아가듯, ‘I’m not there’라는 문장은 해석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부르고 쓰는 것을 반복한 밥 딜런과 닮아있다. 나는 거기에 없다. 늘 사회와 시대 속에서 노래했지만 결코 대표하기를 원치 않았던 밥 딜런. 그를 이해하는 7개의 캐릭터 사이 실체 없는 밥 딜런이 짙고 연하게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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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즘] 조지 해리슨: 물질 세계에서의 삶

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의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열일곱 번째는 비틀스의 정신(Spirit) 조지 해리슨의 삶과 철학을 그린 영화 < 조지 해리슨: 물질 세계에서의 삶 >이다.

그는 영적인 인물이었다.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로 칭송받는 비틀스의 일원이며 그 이후로도 솔로 뮤지션의 경력을 이어간 조지 해리슨은 한평생 실존성에 골몰했다. 막대한 부와 명성으로 물질세계의 최전선에 있었으나 궁극적 삶의 목표가 아님을 깨달았다. 힌두교 사상이 대변하는 영적 세계의 탐구와 그것의 예술화는 해리슨의 삶을 관통했고 그 성찰을 음악 예술에 담아 대중에 전파했다. 마틴 스코세이지 연출의 2011년 작 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 조지 해리슨: 물질 세계에서의 삶 >은 신과의 만남을 소망하며 끊임없이 문 두드렸던 한 뮤지션을 들여다본다.

영화는 비틀스의 결성부터 조지 해리슨의 마지막에 이르는 장대한 타임라인을 아우른다. 루츠 록의 전설 더 밴드를 다룬 < 라스트 왈츠 >(1978)과 밥 딜런 삶의 궤적을 그린 < 노 디렉션 홈: 밥 딜런 >을 연출한 마틴 스코세이지는 극영화에서 보여준 완벽주의적 디테일을 어김없이 나타냈다. 애플사의 전 대표 닐 아스피날과 미국의 드러머 짐 켈트너, 독일 출신 베이시스트 클라우스 부어만 등 관련 인물의 증언과 상세한 역사적 정보가 이야기의 총체성을 확보했다.

따스한 성품을 가졌지만 가끔은 지독하게 솔직하고 반항적이었고 이단아 혹은 외골수 성향은 종교, 음악과 만나 본인만의 인장을 새겼다. 존 레논과 폴 매카트니의 압도적 존재감을 비집고 음악적 부피를 늘려가던 조지 해리슨은 < Rubber Soul >(1965)의 ‘If I needed someone’ < Revolver >(1966)의 ‘Taxman’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의 ‘Within you without you’ < The Beatles >(1968)의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 Abbey Road >(1969)의 ‘Something’ 같은 명곡을 써냈다. 슬라이드 기타와 시타르로 표현한 환각적인 음악 세계는 후대 사이키델릭 록과 징글 쟁글 사운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인도음악을 실험적으로 표현한 동명 영화의 사운드트랙 < Wonderwall >(1968)과 무그 신시사이저를 채색한 전자음악 앨범 < Electronic Sound >(1969)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1970년에 나온 < All Things Must Pass >로 트리플 엘피의 양적 거대함과 ‘All things must pass’, ‘What is life’ ‘My sweet lord’ 같은 명곡들을 배출한 야심작이다.

직접 연주한 슬라이드 기타가 빛나는 빌보드 1위 곡 ‘Give me love (peace on earth)’가 들어간 < Living In The Material World >(1973)와 밥 딜런, 리온 러셀, 빌리 프레스턴 등이 참여한 라이브 앨범 < The Concert For Bangladesh >(1971)도 해리슨을 대표하는 수작이다. 특히 필 스펙터의 독보적 음향 기술인 월 오브 사운드로 록과 가스펠, 힌두 음악을 망라한 < The Concert For Bangladesh >는 전쟁 피해 복구를 위해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해리슨의 인도주의를 반영했다.

덜 익숙한 경력도 드러난다. 영국의 희극 그룹 몬티 파이튼의 팬이었던 그는 직접 설립한 영화사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s)으로 <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이라는 컬트 영화에 3백만 달러 제작비를 댔다. 이후로도 SF 코미디 걸작 < 브라질 >(1985) 을 감독한 테리 길리엄, 에릭 아이들 같은 파이튼 멤버와 어울리며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사람을 좋아하고 협업을 즐겼던 성향은 로이 오비슨, 톰 페티, 밥 딜런, 제프 린과 함께한 슈퍼그룹 트래블링 윌버리스(The Traveling Wilburys)로도 연결되며 네 사람이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가는 유쾌한 장면이 그려진다. 영화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1988년 열한 번째 정규 앨범 < Cloud Nine >에 수록된 미국의 알앤비 뮤지션 제임스 레이(James Ray) 원곡의 ‘Got my mind set on you’로 세 번째 빌보드 넘버원을 기록하기도 한다.

대중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자아 성찰을 중시했던 그는 노라 존스의 아버지이기도 한 인도 음악의 전설 라비 샹카와 지속적으로 교류했고 영적, 물리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구절을 뜻하는 만트라를 3일 내내 암송하기도 했으며 줄곧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토록 종교에 깊이 빠진 그였지만 영적 체험에 정해진 틀이 없음을 깨닫고 대중 음악가로서 창작과 음악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세상이 씌운 형이하학적 수사들에 염증을 느끼곤 했지만, 결코 사람과 사랑을 놓지 않았다. 내세를 믿었던 그에게 현세는 다음 단계를 위한 밑 작업이었고 육신과 영혼이 들러붙은 58년을 인간애로 채웠다. 주변 사람들을 향한 따스한 마음과 베풂, 음악으로 전파한 사랑은 많은 이들이 현세의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다. 위대한 대중 음악가 조지 해리슨은 그렇게 물질세계를 초월한 구도자로 남았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All things must pass
2. George Formby ‘Count your blessings and smile’
3. Bill Justice & His Orchestra ‘Raunchy’
4. The Light That Has Lighted the World
5. The Beatles ‘Wildcat’
6. The Beatles ‘Nothin’ shakin’ (but the leaves on the trees)’
7. Beware of darkness
8. The Beatles ‘I wish I could shimmy like my sister Kate’
9. Chuck Berry ‘Roll over Beethoven’
10. The Beatles ‘A taste of honey’
11. The Beatles ‘This boy’
12. The Beatles ‘I saw her standing there’
13. The Beatles ‘You can’t do that’
14. The Beatles ‘Money (that’s what I want)’
15. The Beatles ‘Don’t bother me’
16. The Beatles ‘And I love her’
17. The Yardbirds ‘A certain girl’
18. The Beatles ‘If I needed someone’
19. Ravi Shankar ‘Prabhujee’
20. Ravi Shankar ‘Dhun (Dadra and fast Teental)’
21. The Beatles ‘Love you to’
22. The Beatles ‘Strawberry fields forever’
23. The Beatles ‘Within you without you’
24. The Beatles ‘The inner light’
25. The Beatles ‘Savoy truffle’
26. Ski-ing
27. Party Seacombe
28. The Beatles ‘Revolution #9’
29. The Beatles ‘Yer blues’
30. The Beatles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31. The Beatles ‘Something’
32. The Beatles ‘Here comes the sun’
33. What is life
34. Mukunda Goswami ‘Hare krishna mantra’
35. Wah wah
36. Awaiting on you all
37. My sweet lord
38. Isn’t it a pity
39. Ravi Shankar ‘Bangla dhun’
40. Give me love (give me peace on earth)
41. Dark horse
42. I’d have you anytime
43. Run of the mill
44. Let it me me
45. Give peace a chance
46. Between the devil and the deep blue sea
47. Ringo Starr ‘I’ll be fine anywhere’
48. The Traveling Wilburys ‘Riders in the sky (a cowboy legend)
49. The Traveling Wilburys ‘Handle with care’
50. The Traveling Wilburys ‘Margarita’
51. The Traveling Wilburys ‘Dirty world’
52. Marwa blues
53. Brainwashed
54. Tip-toe thru the tulips with me
55. The Beatles ‘Long long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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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 Album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평가: 3/5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장철수 감독이 약 9년 만에 신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를 발표했다. 주연은 연우진(신무광) 지안(류수련)과 조성하(사단장). 엄격한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장 감독이 직접 각색했다. 성애(性愛), 저항 등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중심엔 인간주의가 있다.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파격적인 만큼 사운드트랙은 과하지 않게 영화를 받치고 있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의 영화 음악은 극의 맥락에 따른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인물 간의 내밀한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음악이 흐를 때도 리얼 사운드와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도적 미니멀리즘이랄까. 무광과 수련의 첫 만남과 같은 중요한 사건조차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에 맡긴 채 음악이 들어서지 않는다. 첫 번째 정사 신에 흐르는 목관악기 위주의 기악곡이 예외에 해당한다.

전자 음향보다는 체온이 느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해 고전적이며 피아노와 현악기에 종종 관악기가 합류한다. 무광의 군 생활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그를 바라보는 수련의 관음에 신비감을 부여한다. 이 밖에도 사단장과 무광이 스쳐 갈 때 시곗바늘 소리로 심박을 표현한 듯한 대목이나 쩔꺽대는 현악기로 무광과 수련의 악몽을 청각화한 장면이 돋보인다.

무광과 수련이 사택을 몰래 빠져나와 숲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 음악은 잠시 이완하며 부드러운 피아노와 현악 세션으로 애틋함을 드리운다. 공유한 악몽을 지나 두 사람이 요리 대결을 펼치고 아침 식사할 때 흐르는 업 템포 피아노 연주에도 희망이 어린다. 전체적으로 서늘한 톤 사이의 몇 안 되는 달콤한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수련이 직접 부르는 선전 가요 이외엔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가 없다. 영화가 배경으로 한 1970년대의 가요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점이 의미심장하다. 무광이 수련의 뱃속 아기를 쓰다듬을 때 영화는 비가(悲歌) 대신 연주곡을 택했다. 감정의 전달 매체가 되는 가요 대신 기악 연주로 사실감을 유지했다.

아름다운 선율의 엔딩 곡은 이내 모든 긴장이 풀린 마지막 시퀀스를 응집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무광의 뒷모습을 잡아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지만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흐르는 관현악 선율이 어느 때보다 포근하다. 그 순간 억눌린 서사 속 짧은 로맨스는 불멸의 무언가로 멈추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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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일의 영화수다 Feature

<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1편)

입춘(2월 4일)을 지나며 진짜 ‘검은 호랑이 해’(壬寅年)가 밝은지 한 달이 돼간다. 너무 때늦은 감은 있으나, 참고‧재미 삼아 이제라도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을 엄선‧소개해보면 어떨까. 영화 보기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0년 차, 영화 글쓰기 삼십 수년의 영화 비평가에게 그 어느 해보다 한층 더 크고 깊은 감흥‧자극을 안겨주고, 나아가 열광‧감탄시키기도 한 수‧걸작 10편을.

그간은 으레 한국과 외국 영화를 분리했으나, 이번에는 종합적으로 뽑았다. 최종적으로 2편 대 8편이다. 외국 영화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균형‧배분 차원에서 주목에 값하는 문제작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를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끝내 선택하질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외국 영화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서였다. 안소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나 비르지니 에프라, 다프네 파타키아, 샬롯 램플링 세 여걸들의 활약상이 단연 돋보였던 칸 경쟁작 <베네데타>(폴 버호벤), 지난해 서서히 빠져든 멕시코 태생 명장 미셸 프랑코의 2020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뉴 오더> 등이 그 몇몇 예들이다. 1위작도 그렇거니와 10편을 꼽는 데 이렇게 고심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기억하건대 없다.

일찍이 동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치료 전문가인 심영섭의 유튜브 방송 ‘심교수의 15분’(https://www.youtube.com/watch?v=FBRYif75R9Y&t=6s)에서 영화계 결산을 하며 베스트 10을 밝혔었는데, 순위도 그렇거니와 그 목록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때의 녹화 이후 일련의 영화들을 더 챙겨보고, 그들 중 2편을 새로 선정해서다. < 해피 아워 >와 < 램 >이 그들이다.

공동 1위 : < 드라이브 마이 카 > & < 해피 아워 >(2015), 하마구치 류스케

2021년은 내게, 상기 미셸 프랑코와 더불어 일본이 낳은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이 두 감독은 1978년생으로 동갑내기다―에 푹 빠진 한해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작심하고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관람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작 < 우연과 상상 >과, 칸 각본상 수상작 < 드라이브 마이 카 >가 그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어느 가족 >이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2018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첫선을 보인 < 아사코 >를 볼 때만 해도 사실, 이 ‘젊은 거장’에게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칸에서 무관에 그쳐서는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문제적 걸작 < 버닝 >도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보다는 전작(前作)을 본 적이 없는 데다 감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터라, 그저 ‘별난 러브스토리’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아사코 역 카라타 에리카―tvN 18부작 드라마 < 아사달 연대기 >(2019)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했던―의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에 혹하긴 했어도…

이 포스트-고레에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가 봉준호의 < 기생충 >(2019)에 대해 쓴 어떤 글의 일부를 읽고나서였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 인생은 그 걸작을 기점으로 나뉘며, 봉준호와 홍상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가 부럽다는 게 아닌가! 한-일 간의 고질적 갈등을 감안할 때, 전통 영화 강국 일본의 전도유망한 ‘미래의 거장’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의 파격적 개방성‧수용성은 강렬한 인상을 넘어 일대 충격으로 다가섰다. 봉 감독과의 심층 인터뷰에서, 그의 견해를 굳이 전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년 3월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 스파이의 아내 >(2020)를 보고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영화미학‧예술적 수준은 말한 것 없고 무엇보다 여타 일본 감독에게서는 (거의) 목격한 적 없었던 그 세계시민적(Cosmopolitan)적 시각(Perspective)이 감탄스러웠다. 기요시 감독의 출세작 < 큐어 >(1997)를 비롯해 < 카리스마 >(1999), < 밝은 미래 >(2003), < 산책하는 침략자 >(2017) 등 이전 영화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범세계적 무권력주의(Anarchism)적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 답은 각본에 하마구치가 참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의 메인 작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였던 셈이다. 판단컨대 하마구치는 코스모폴리탄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하마구치 월드’에 근접하기 위한 최우선적 첩경이(라는 것이 내 총평적 해석이)다.

< 천국은 아직 멀어(天国はまだ遠い) >(2016)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을 애정으로, 나아가 열광으로 비상시켰다. 2019년 제2회 짧고 굵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선보였던 그 단편을 보며 감독의 기발한, 너무나도 기발한 천재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제 소갯글을 빌려보자.

AV 영화 모자이크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 유조는 어느 날, 한 여인에게서 인터뷰 제안을 받는다. 그는 17세에 죽은 동급생 유령과 기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의뢰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죽은 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유조에게 언니가 빙의되었다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조의 증언을 믿지 않지만, 그에게 빙의된 언니의 말에 반응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천국과의 거리’는 유령과 신체에의 빙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스크린에 비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접촉 불가, 증언의 불확실성의 테마를 보여준다.

그 외연에서는 적잖이 다르나 내포적 의미에서 < 천국은 아직 멀어 >는, 그 전후의 두 장편 < 해피 아워 >와 < 드라이브 마이 카 >를 잇는 가교로 손색없다. < 해피 아워 >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으나 실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네 동창생을 축으로 펼쳐지는 여성 드라마다. 영화는 제 68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놀랍게도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 비직업적 초짜 배우 넷이 공동 수상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화의 상영시간이, 단일 영화로는 일본영화 사상 가장 긴 5시간 28분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렇게까지 길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에 대해 감독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지금도 캐스팅이 가장 어려워요. 비직업 배우와 전문 배우와의 작업은 각각의 장점과 어려움이 있는데요…물론 제가 일부러 길게 찍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 해피 아워 >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걸 찍으려고 하면 길게 찍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8개월간 촬영했고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꽤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기본적으로 비직업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보니 대본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되게끔 계속 수정해야 했죠. 초고로는 2시간 30분 분량의 영화였는데 대본 수정을 거듭할수록 내용을 하나씩 풀어쓰다 보니 분량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네 명의 캐릭터가 일상에서 어떤지를 자세히 묘사했어요…길어진 대본 분량을 그대로 다 찍었어요. 2시간 정도로 편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다 만들어놓고 보니 5시간 36분―왓챠에서 볼 수 있는 국내 개봉은 5시간 28분―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출연한 분들이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이해했던 것이잖아요. 관객도 이 시간 동안 영화 속 캐릭터를 마주하다 보면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http://reversemedia.co.kr/article/189)

감독이 역설한 ‘재미’는 빈말이 아니다.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바, 5시간 반에 가까운 그 긴 시간이 마치 1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수긍이 갈까. 그 느낌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에도 해당된다. 여느 영화치고는 결코 짧지 않은 3시간이 훌쩍 흘러가는 ‘경이의 영화!’ 2014년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 여자 없는 남자들 》  에 실려 있는 7편 중 하나인 동명 단편을 영화화했다. < 버닝 >이 그랬듯 하루키 원작은 그러나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즉 속임수 내지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도 말하듯, “마음 한구석에 꾹 눌러둔 어둠과 외로움을 간직한 주인공을 그린다는 점에서 하루키 소설의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하마구치 그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그만의 내러티브‧연출 스타일로 압도적이면서도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이뤄진다. 전체 3시간 가운데 몇십 분이 채 안 되는 전반부는 언뜻 남부러울 것 없는 멋진(Cool) 부부 사이의 사건‧사연이다. 인기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역시 인기 있는 TV 드라마 작가 오토다. 여자는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로 대본을 만들어 작가로서 성공을 일궈내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어느 날 우연찮게 아내의 외도를,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목격하나 그 자리를 회피한다. 그것도 모자라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런 상태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연극제에 초청돼 안톤 체호프의 희곡 < 바냐 아저씨 >를 올릴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그에게는 주최 측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와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두 번째 파트는 또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 바냐 아저씨 >의 공연에 이르는 과정과, 가후쿠-미사키 간에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 두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음은 물론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최종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한 < 바냐 아저씨 > 공연 연습을 통해 가후쿠는 자기 내면의 심연을 성찰할 기회를 맞는다. 일본어를 비롯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침묵의 언어인 수화 등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해가는 연기자들을 통해 삶의 비밀에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고 할까. 그 과정에서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는 미사키와, 습관적으로 죽은 아내가 녹음한 < 바냐 아저씨 >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 연습을 하는 가후쿠 사이에 소통의 기회가 찾아오고, 마침내 둘 다 공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2월 말 기준, 전 세계 영화제 및 영화상에서 62개 수상에 100개 부문에 후보지명돼 있다. 그 중 4개는 오는 3월 27일(일) 개최되는 제 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션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이다. 미국의 로컬 영화상에서 영어가 아닌 영화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후보로 지명되다니, < 기생충 >에 이은 일대 파란이라 평하지 않을 길 없다. 올 아카데미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 드라이브 마이 카 > 와, 11개 부문 12개 후보에 오른 < 파워 오브 도그>가 과연 어떤 상을 가져가냐 일 테며, 세 부문에서는 양파전이 될 공신이 크다. 수상 결과에 상관없이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이미 ‘포스트-기생충’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이렇듯 하마구치 영화들에서 중시되는 것은, 캐릭터와 캐릭터를 이어주는 어떤 ‘사이’요, 그 사이의 채움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 캐릭터들의 어떤 존재감들이다. 캐릭터가 인간 자체로 바뀌어도 무방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 단편 불문 그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비교의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제고시켜준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히 우리네 인류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느 영화광들처럼 그 반대가 아니라…

그 점에서 하마구치는 천상 휴머니스트다. 어느 모로는 작금의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시대, 달리 말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 고전주의자랄까. 그렇지 않다면,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도 그렇거니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돌연변이적 주자 에릭 로메르나 심심치 않게 그와 비교되곤 하는 홍상수, 그리고 선배 봉준호를 향해 어찌 그렇게 대놓고 크고 작은 오마주를 바칠 수 있겠는가. 난 정말이지 하마구치의 그 겸손한 자신감과, 자신감 어린 겸허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별다른 액션도 없이 주고받는 인물들의 대사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감탄하곤 한다. 그 어떤 액션 영화도 그렇게 다이나믹하지 않다. 뿐만 아니다. 그의 영화들은 소위 ‘예술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야 마땅하나, 여느 예술영화들과는 달리 난해하긴커녕 접근 불가한 요소들이 거의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 서구의 대표적 작가 감독들은 물론이거니와 여로모로 비교될 법한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도 판이하게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고작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나는 확신한다. 머잖아 세계 영화사는 하마루치 류스케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될 거라고. 헛소리라고? 과장이라고? 그렇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나부터 그 작업을 향해 나아갈 참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말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와 < 해피 아워 >, 이 두 역사적 걸작은 비단 2021년만이 아니라, 21세기 나아가 올해로 127년을 맞이한 공식 세계 영화역사의 손꼽히는 으뜸 문제작들로 평가돼 마땅하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 우연과 상상 >도 마찬가지고…

이어질 3위부터 10위작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계속)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6위. 파워 오브 더 도그, 제인 캠피온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