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OST Album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평가: 3/5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장철수 감독이 약 9년 만에 신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를 발표했다. 주연은 연우진(신무광) 지안(류수련)과 조성하(사단장). 엄격한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장 감독이 직접 각색했다. 성애(性愛), 저항 등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중심엔 인간주의가 있다.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파격적인 만큼 사운드트랙은 과하지 않게 영화를 받치고 있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의 영화 음악은 극의 맥락에 따른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인물 간의 내밀한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음악이 흐를 때도 리얼 사운드와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도적 미니멀리즘이랄까. 무광과 수련의 첫 만남과 같은 중요한 사건조차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에 맡긴 채 음악이 들어서지 않는다. 첫 번째 정사 신에 흐르는 목관악기 위주의 기악곡이 예외에 해당한다.

전자 음향보다는 체온이 느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해 고전적이며 피아노와 현악기에 종종 관악기가 합류한다. 무광의 군 생활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그를 바라보는 수련의 관음에 신비감을 부여한다. 이 밖에도 사단장과 무광이 스쳐 갈 때 시곗바늘 소리로 심박을 표현한 듯한 대목이나 쩔꺽대는 현악기로 무광과 수련의 악몽을 청각화한 장면이 돋보인다.

무광과 수련이 사택을 몰래 빠져나와 숲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 음악은 잠시 이완하며 부드러운 피아노와 현악 세션으로 애틋함을 드리운다. 공유한 악몽을 지나 두 사람이 요리 대결을 펼치고 아침 식사할 때 흐르는 업 템포 피아노 연주에도 희망이 어린다. 전체적으로 서늘한 톤 사이의 몇 안 되는 달콤한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수련이 직접 부르는 선전 가요 이외엔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가 없다. 영화가 배경으로 한 1970년대의 가요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점이 의미심장하다. 무광이 수련의 뱃속 아기를 쓰다듬을 때 영화는 비가(悲歌) 대신 연주곡을 택했다. 감정의 전달 매체가 되는 가요 대신 기악 연주로 사실감을 유지했다.

아름다운 선율의 엔딩 곡은 이내 모든 긴장이 풀린 마지막 시퀀스를 응집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무광의 뒷모습을 잡아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지만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흐르는 관현악 선율이 어느 때보다 포근하다. 그 순간 억눌린 서사 속 짧은 로맨스는 불멸의 무언가로 멈추어 선다.

Categories
전찬일의 영화수다 Feature

<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 < 자산어보 >까지…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1편)

입춘(2월 4일)을 지나며 진짜 ‘검은 호랑이 해’(壬寅年)가 밝은지 한 달이 돼간다. 너무 때늦은 감은 있으나, 참고‧재미 삼아 이제라도 ‘2021년의 영화 베스트 10’을 엄선‧소개해보면 어떨까. 영화 보기 50여 년에 영화 스터디 40년 차, 영화 글쓰기 삼십 수년의 영화 비평가에게 그 어느 해보다 한층 더 크고 깊은 감흥‧자극을 안겨주고, 나아가 열광‧감탄시키기도 한 수‧걸작 10편을.

그간은 으레 한국과 외국 영화를 분리했으나, 이번에는 종합적으로 뽑았다. 최종적으로 2편 대 8편이다. 외국 영화 쪽으로 확연히 기울어졌다. 균형‧배분 차원에서 주목에 값하는 문제작 <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를 포함시키고 싶었으나, 끝내 선택하질 않았다. 선택하지 않은 외국 영화와의 형평성 등을 고려해서였다. 안소니 홉킨스에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안긴 <더 파더>(플로리안 젤러)나 비르지니 에프라, 다프네 파타키아, 샬롯 램플링 세 여걸들의 활약상이 단연 돋보였던 칸 경쟁작 <베네데타>(폴 버호벤), 지난해 서서히 빠져든 멕시코 태생 명장 미셸 프랑코의 2020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뉴 오더> 등이 그 몇몇 예들이다. 1위작도 그렇거니와 10편을 꼽는 데 이렇게 고심을 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기억하건대 없다.

일찍이 동료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치료 전문가인 심영섭의 유튜브 방송 ‘심교수의 15분’(https://www.youtube.com/watch?v=FBRYif75R9Y&t=6s)에서 영화계 결산을 하며 베스트 10을 밝혔었는데, 순위도 그렇거니와 그 목록과 다소 차이가 난다. 그때의 녹화 이후 일련의 영화들을 더 챙겨보고, 그들 중 2편을 새로 선정해서다. < 해피 아워 >와 < 램 >이 그들이다.

공동 1위 : < 드라이브 마이 카 > & < 해피 아워 >(2015), 하마구치 류스케

2021년은 내게, 상기 미셸 프랑코와 더불어 일본이 낳은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이 두 감독은 1978년생으로 동갑내기다―에 푹 빠진 한해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작심하고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에서 관람한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작 < 우연과 상상 >과, 칸 각본상 수상작 < 드라이브 마이 카 >가 그 결정적 계기였다.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 어느 가족 >이 영예의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2018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첫선을 보인 < 아사코 >를 볼 때만 해도 사실, 이 ‘젊은 거장’에게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았었다. 칸에서 무관에 그쳐서는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의 문제적 걸작 < 버닝 >도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보다는 전작(前作)을 본 적이 없는 데다 감독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던 터라, 그저 ‘별난 러브스토리’쯤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던 것이다. 아사코 역 카라타 에리카―tvN 18부작 드라마 < 아사달 연대기 >(2019)에서도 조연으로 등장했던―의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에 혹하긴 했어도…

이 포스트-고레에다에게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영화가 아니라 그가 봉준호의 < 기생충 >(2019)에 대해 쓴 어떤 글의 일부를 읽고나서였다. 감독으로서 자신의 영화 인생은 그 걸작을 기점으로 나뉘며, 봉준호와 홍상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한국영화가 부럽다는 게 아닌가! 한-일 간의 고질적 갈등을 감안할 때, 전통 영화 강국 일본의 전도유망한 ‘미래의 거장’의 발언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그의 파격적 개방성‧수용성은 강렬한 인상을 넘어 일대 충격으로 다가섰다. 봉 감독과의 심층 인터뷰에서, 그의 견해를 굳이 전한 것도 그래서였다.

작년 3월 개봉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 스파이의 아내 >(2020)를 보고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은 한층 더 깊어졌다. 영화미학‧예술적 수준은 말한 것 없고 무엇보다 여타 일본 감독에게서는 (거의) 목격한 적 없었던 그 세계시민적(Cosmopolitan)적 시각(Perspective)이 감탄스러웠다. 기요시 감독의 출세작 < 큐어 >(1997)를 비롯해 < 카리스마 >(1999), < 밝은 미래 >(2003), < 산책하는 침략자 >(2017) 등 이전 영화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범세계적 무권력주의(Anarchism)적 아우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그 답은 각본에 하마구치가 참여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었다. 결국 영화의 메인 작가는 하마구치 류스케였던 셈이다. 판단컨대 하마구치는 코스모폴리탄적 아나키스트임이 분명하다.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이 ‘하마구치 월드’에 근접하기 위한 최우선적 첩경이(라는 것이 내 총평적 해석이)다.

< 천국은 아직 멀어(天国はまだ遠い) >(2016)는 하마구치를 향한 내 관심을 애정으로, 나아가 열광으로 비상시켰다. 2019년 제2회 짧고 굵은 아시아영화제에서 선보였던 그 단편을 보며 감독의 기발한, 너무나도 기발한 천재적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제 소갯글을 빌려보자.

AV 영화 모자이크 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인공 유조는 어느 날, 한 여인에게서 인터뷰 제안을 받는다. 그는 17세에 죽은 동급생 유령과 기이한 공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의뢰자는 다름 아닌 그녀의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죽은 언니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다 유조에게 언니가 빙의되었다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유조의 증언을 믿지 않지만, 그에게 빙의된 언니의 말에 반응하면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목이 암시하는 ‘천국과의 거리’는 유령과 신체에의 빙의,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스크린에 비치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접촉 불가, 증언의 불확실성의 테마를 보여준다.

그 외연에서는 적잖이 다르나 내포적 의미에서 < 천국은 아직 멀어 >는, 그 전후의 두 장편 < 해피 아워 >와 < 드라이브 마이 카 >를 잇는 가교로 손색없다. < 해피 아워 >는 모든 것을 공유하며 서로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해왔으나 실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있는, 30대 후반의 네 동창생을 축으로 펼쳐지는 여성 드라마다. 영화는 제 68회 로카르노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놀랍게도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 비직업적 초짜 배우 넷이 공동 수상을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영화의 상영시간이, 단일 영화로는 일본영화 사상 가장 긴 5시간 28분이라는 것이다. 대체 그렇게까지 길어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에 대해 감독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지금도 캐스팅이 가장 어려워요. 비직업 배우와 전문 배우와의 작업은 각각의 장점과 어려움이 있는데요…물론 제가 일부러 길게 찍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 해피 아워 >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걸 찍으려고 하면 길게 찍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8개월간 촬영했고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꽤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기본적으로 비직업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보니 대본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되게끔 계속 수정해야 했죠. 초고로는 2시간 30분 분량의 영화였는데 대본 수정을 거듭할수록 내용을 하나씩 풀어쓰다 보니 분량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네 명의 캐릭터가 일상에서 어떤지를 자세히 묘사했어요…길어진 대본 분량을 그대로 다 찍었어요. 2시간 정도로 편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다 만들어놓고 보니 5시간 36분―왓챠에서 볼 수 있는 국내 개봉은 5시간 28분―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출연한 분들이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이해했던 것이잖아요. 관객도 이 시간 동안 영화 속 캐릭터를 마주하다 보면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http://reversemedia.co.kr/article/189)

감독이 역설한 ‘재미’는 빈말이 아니다.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는바, 5시간 반에 가까운 그 긴 시간이 마치 1시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면 수긍이 갈까. 그 느낌은 < 드라이브 마이 카 >에도 해당된다. 여느 영화치고는 결코 짧지 않은 3시간이 훌쩍 흘러가는 ‘경이의 영화!’ 2014년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집  《 여자 없는 남자들 》  에 실려 있는 7편 중 하나인 동명 단편을 영화화했다. < 버닝 >이 그랬듯 하루키 원작은 그러나 일종의 맥거핀(MacGuffin), 즉 속임수 내지 미끼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도 말하듯, “마음 한구석에 꾹 눌러둔 어둠과 외로움을 간직한 주인공을 그린다는 점에서 하루키 소설의 핵심을 담고 있으면서”도 하마구치 그가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그만의 내러티브‧연출 스타일로 압도적이면서도 독보적인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이뤄진다. 전체 3시간 가운데 몇십 분이 채 안 되는 전반부는 언뜻 남부러울 것 없는 멋진(Cool) 부부 사이의 사건‧사연이다. 인기 배우이자 연출가인 가후쿠와, 역시 인기 있는 TV 드라마 작가 오토다. 여자는 남편과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주는 버릇이 있는데, 그 이야기로 대본을 만들어 작가로서 성공을 일궈내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어느 날 우연찮게 아내의 외도를, 그것도 자신의 집에서 목격하나 그 자리를 회피한다. 그것도 모자라 끝내 그 이유를 묻지 않고, 그런 상태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가 죽은 지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연극제에 초청돼 안톤 체호프의 희곡 < 바냐 아저씨 >를 올릴 준비를 한다. 그곳에서 그에게는 주최 측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와 함께 하게 된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두 번째 파트는 또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 바냐 아저씨 >의 공연에 이르는 과정과, 가후쿠-미사키 간에 서서히 서로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다. 그 두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음은 물론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최종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한 < 바냐 아저씨 > 공연 연습을 통해 가후쿠는 자기 내면의 심연을 성찰할 기회를 맞는다. 일본어를 비롯해 러시아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침묵의 언어인 수화 등 다양한 언어로 소통하며,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해가는 연기자들을 통해 삶의 비밀에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고 할까. 그 과정에서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는 미사키와, 습관적으로 죽은 아내가 녹음한 < 바냐 아저씨 > 녹음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 연습을 하는 가후쿠 사이에 소통의 기회가 찾아오고, 마침내 둘 다 공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계맺음이 이뤄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2월 말 기준, 전 세계 영화제 및 영화상에서 62개 수상에 100개 부문에 후보지명돼 있다. 그 중 4개는 오는 3월 27일(일) 개최되는 제 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노미네이션이다.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이다. 미국의 로컬 영화상에서 영어가 아닌 영화로 작품상과 감독상 등에 후보로 지명되다니, < 기생충 >에 이은 일대 파란이라 평하지 않을 길 없다. 올 아카데미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 드라이브 마이 카 > 와, 11개 부문 12개 후보에 오른 < 파워 오브 도그>가 과연 어떤 상을 가져가냐 일 테며, 세 부문에서는 양파전이 될 공신이 크다. 수상 결과에 상관없이 < 드라이브 마이 카 >는 이미 ‘포스트-기생충’으로 일컬어질 만하다.

이렇듯 하마구치 영화들에서 중시되는 것은, 캐릭터와 캐릭터를 이어주는 어떤 ‘사이’요, 그 사이의 채움을 통해 드러나는 개별 캐릭터들의 어떤 존재감들이다. 캐릭터가 인간 자체로 바뀌어도 무방하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장, 단편 불문 그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이해, 즉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비교의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화‧제고시켜준다. 그에게 영화는 철저히 우리네 인류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느 영화광들처럼 그 반대가 아니라…

그 점에서 하마구치는 천상 휴머니스트다. 어느 모로는 작금의 포스트-휴먼, 트랜스-휴먼 시대, 달리 말해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아날로그적 고전주의자랄까. 그렇지 않다면, 스승 구로사와 기요시도 그렇거니와 프랑스 누벨바그의 돌연변이적 주자 에릭 로메르나 심심치 않게 그와 비교되곤 하는 홍상수, 그리고 선배 봉준호를 향해 어찌 그렇게 대놓고 크고 작은 오마주를 바칠 수 있겠는가. 난 정말이지 하마구치의 그 겸손한 자신감과, 자신감 어린 겸허함을 사랑한다.

나는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별다른 액션도 없이 주고받는 인물들의 대사가 얼마나 역동적일 수 있는지 감탄하곤 한다. 그 어떤 액션 영화도 그렇게 다이나믹하지 않다. 뿐만 아니다. 그의 영화들은 소위 ‘예술영화’의 범주에 들어가야 마땅하나, 여느 예술영화들과는 달리 난해하긴커녕 접근 불가한 요소들이 거의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장 뤽 고다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 서구의 대표적 작가 감독들은 물론이거니와 여로모로 비교될 법한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등과도 판이하게 다른 자기만의 독자적 영화 세계를 구축해내는 데 성공했다. 고작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나는 확신한다. 머잖아 세계 영화사는 하마루치 류스케 이전과 그 이후로 나뉘게 될 거라고. 헛소리라고? 과장이라고? 그렇게 비칠 수 있다. 하지만 나부터 그 작업을 향해 나아갈 참이다. 긴 호흡으로, 멀리 내다보면서 말이다. < 드라이브 마이 카 >와 < 해피 아워 >, 이 두 역사적 걸작은 비단 2021년만이 아니라, 21세기 나아가 올해로 127년을 맞이한 공식 세계 영화역사의 손꼽히는 으뜸 문제작들로 평가돼 마땅하다.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 우연과 상상 >도 마찬가지고…

이어질 3위부터 10위작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계속)

3위.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리들리 스콧

4위. 퍼스트 카우, 켈리 라이카트

5위. 티탄, 쥘리아 뒤쿠르노

6위. 파워 오브 더 도그, 제인 캠피온

7위. 램, 발디마르 요한손

8위. 듄, 드니 빌뇌브

9위. 모가디슈, 류승완

10위. 자산어보, 이준익

Categories
특집 Feature

전찬일의 영화수다 – 왜 < 미나리 >인가!

스티븐 연, 한예리, 윤여정, 앨런 김, 노엘 케이트 조, 윌 패튼 등 주·조연에 40대 초반의 재미교포 감독 리 아이작 정(한국 이름 정이삭)이 연출한 네 번째 장편극영화 < 미나리 >는, 오는 26일(한국시간 기준) 개최될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과연 몇 개의 트로피를 거머쥘까?

1980년대 초반, 희망·구원을 찾아 이민을 간 미국 캘리포니아를 10년 만에 떠나 시골 마을 아칸소로 막 이주한 한국 가족을 축으로 펼쳐지는 휴먼 가족 드라마. 한국적 정서·감성 가득한 이 미국 영화는 총 6개 부문에 후보 지명돼 있다. 영예의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음악상이다. 노미네이션으로만 치자면 봉준호의 < 기생충 >을 압도한다. 그 역사적 걸작은 미술상, 편집상까지 역시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을 쥐었으나, 연기상으로는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윤여정의 수상 및 노미네이션 퍼레이드는 특히 눈이 부실 정도다. 그 여걸은 11일(현지 시간) 런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열린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상 여우조연상을 안으며 37번째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로써 오스카에 한 발 더 다가섰다. 후보만으로도 역사적 쾌거였는데, 이제는 상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 ‘이변’으로 회자될 상황이다. 70대 초반의 늦은 나이에 미국이라는 국제무대에서 ‘대세 배우’가 된 것. 당사자도 말했듯,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대체 왜 < 미나리 >일까?

곧 유튜브에 업로드돼 첫 방송될 ‘전찬일 이덕일의 종횡무진: 영화와 역사를 탐하다’ 등에서도 적시했듯, < 미나리 >의 주목할 만한 덕목‧화제성은 크게 서너 가지다. 우선은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안정적이면서도 단단한 연출력으로 자유롭게 극화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클라이맥스적 사건을 이민 가족으로 으레 겪을 수밖에 없을, 인종차별 같은 외부 요인이 아니라 가족 내 캐릭터―다름 아닌 윤여정이 분한 극 중 할머니 순자다!―의 불가항력적 선의의 실수로 구현‧처리한 선택은,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을 영화의 으뜸 미덕이다. 어느 모로는 의외이면서도 영화에 남다른 신선함‧수준을 안겨주기 모자람 없다고 할까.

정이삭 감독은 사실, 첫 장편 < 문유랑가보 >로 단연 주목할 만한 데뷔전을 치른 바 있다.  비록 수상은 못 했어도, 서른을 바라보던 지난 2007년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칸 영화제 공식 섹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됐고, 데뷔작인지라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황금카메라 상 후보에 올라 일찌감치 큰 화제 몰이를 했던 것. 당시 칸을 찾았던 필자는, 영화의 화제성도 그렇거니와 그 속내에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전 와중에 있던 아프리카 르완다 두 소년의 이야기를 르완다인들의 협조를 받아 가며 르완다 어로 찍었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 성취는 사상 최초였다. 두 영화 사이에는 13년이란 짧지 않은 세월이 놓여있긴 해도, < 미나리 >의 ‘영광’은 그때 이미 예고됐던 셈이다. 다소 성급한 진단일 수도 있어도, 그에게서 ‘포스트-봉준호’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그래서다.

두 번째 화제성은 더 이상 부연이 필요 없을 연기에서 연유한다. 윤여정을 필두로, 봉준호의 < 옥자 >(2017)와 이창동의 < 버닝 >(2018) 등을 통해 그 연기력을 공인받은 스티븐 연, 오스카 후보지명엔 실패했어도 인생 일대의 연기를 선보인 한예리,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건만 우리말 연기도 곧잘 해낸 앨런 김과 노엘 조 등이 구현한 앙상블 연기는 < 기생충 >에 비견되기 부족함 없다.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을 안긴 미국배우조합(SAG)상에서는 <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아론 소킨)에 영화 부문 앙상블상이 안기긴 했어도….

< 미나리 >가 누리고 있는 작금의 연기를 향한 상찬들은 물론, 연기도 연기거니와 성격화(Characterization)에 기인한다. 당장 할머니이면서도 손주에게 화투를 가르쳐 함께 치고, 상소리들이 두루 섞인 거친 입담을 과시하며, 천연덕스럽게 요리를 못한다면서도 미안해하지 않고 엉뚱(?)하게 미나리의 질긴 근성을 설파하는 등의 순자부터가 얼마나 ‘별난’ 캐릭터인가. 그야말로 역대급 캐릭터의 완승이다.

흥미로운 점은 < 미나리 >가 자신의 연기 최고작이 아니라는 것을 윤여정 본인이 잊지 않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그녀는 영화 데뷔작 < 화녀 >(김기영, 1971)―그 ‘청불 영화’를 필자는 초등학교 4년 적 청량리에 있었던 동일 극장에서 관람했다!―에서부터 이미 발군의 연기력을 과시했으며, < 꽃피는 봄이 오면 >(유장하, 2004), < 죽여주는 여자 >(이재용, 2016) 등을 통해 최상의 연기력을 선보인 ‘연기의 달인’ 아닌가. 그럴 법한데도 전혀 우쭐대지 않고 늘 겸허한 수상 소감을 피력하는 윤여정의 모습이야말로, 연기를 넘어 후배 배우들이 배우고 벤치마킹해야 할 진정한 그 무엇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상기 덕목들보다 더 아름다운 < 미나리 >의 (영화) 역사적 의의는, 자발적이든 타의적이든 강압적이든 간에 상관없이, 우리네 한국인들의 이민 역사‧현실, 다시 말해 무려 750만에 달한다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에 대해 비로소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는 데서 나는 찾고 있다. 영화적 수준에서는 다소 못 미칠지언정, < 미나리 >의 영화사적 의미가 < 기생충 >을 능가한다고 평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일전에 다른 지면에서 밝혔던 내 진단을 여기에 옮기며, 이 글을 마치련다.

“나는 < 미나리 >의 가장 큰 의의를 다른 지점에서 찾는다. 영화는 이른바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 문제를 전격적으로 소환·환기·각인시키는데 전환점(Turning Point)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위성에서는 그래선 안 되나, 조국 대한민국조차도 거의 잊다시피 주변부화시켜온 대한민국 현대사의 가슴 아픈 주요 현실 중 하나….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배창호와 이장호, 김호선, 조정래 등이 각각 < 깊고 푸른 밤 >(1985)과 < 명자 아끼꼬 쏘냐 >(1992), < 애니깽 >(Henequen; 1996), < 귀향 >(2016) 등을 통해 일찍이 다룬 바 있는 주요 이슈다.

< 미나리 >는 문화예술과 오락이 얼마나 밀접하게 (현실) 정치와 연관돼 있는가를, 영화가 얼마나 인상적으로 정치 사회적 이슈를 문화 콘텐츠·스토리텔링으로 극화시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가를 새삼 증거한다. < 기생충 >이 가족 희비극을 통해 이 세상의 비정한 신자유주의를 향해 통렬한 화살을 날렸듯. 그럼으로써 < 미나리 >는, 비평가로서 필자가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온 영화의 공론장(Public Sphere)적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 얼마나 위대한 성취들인가!”

 전찬일(영화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Categories
특집 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경이로운 ‘소울’의 음악세계

< 소울(Soul) >이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최고 작품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음악 영화임은 분명하다.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 분),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티나 페이 분)의 하루를 그린 이 작품은 반복되는 일상 속 삶의 가치를 다시 묻고, 모든 것의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세계 속 개인을 곱씹게 만든다. 그 핵심 가치의 은유 도구가 음악이다. 영화는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영적인 즉흥을 거쳐, 존재 자체로 빛날 수 있는 황홀경을 향해 나아간다.

 < 인사이드 아웃 >에 이어 다시 메가폰을 잡은 감독 피트 닥터는 유년기 음악을 가르쳤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 아마추어 재즈 뮤지션이었다. 자연히 재즈의 팬으로 자란 그는 제작 회의 중 우연히 누군가가 언급한 허비 행콕의 온라인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시청한 후 주인공 조의 직업을 결정했다. 영상 속에서 허비 행콕은 투어 중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합동 공연을 회상하는데, 워낙 큰 무대에 긴장한 나머지 연주 중 그만 음을 틀려버렸음에도 마일스가 곧바로 흐름을 이어 즉흥으로 연주를 진행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거장의 유연한 대처 일화는 삶의 지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주제로 이어졌다.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하며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 집안의 반대와 경제적 사정에 부딪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 학교 밴드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조는 어린 시절 그를 매료시킨 클럽에서 밴드의 일원으로 공연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조 가드너의 아이디어, 악기, 연주, 노래가 될 아티스트로 < 소울 > 제작진은 1986년생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Jon Batiste)를 낙점했다. 존은 젊은 나이에도 그래미 어워드 3회 노미네이트 된 실력자이며 현재 ‘더 애틀랜틱’과 뉴욕 할렘 재즈 박물관의 음악 디렉터, 미국 CBS의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 쇼 음악 감독을 맡은 대세 뮤지션이다. “영적인 장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며 조화롭고 멜로디가 살아있는, 리듬감 있는 음악”을 생각하며 존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알앤비, 소울, 클래식 사운드트랙을 자유로이 선보였다. 

고전과 현실을 오가는 활기찬 연주가 ‘누구도 걷다가 멈추지 않는 도시’ 뉴욕의 조 가드너를 숨 쉬게 한다. 극 초반부터 화려한 연주로 재즈 클럽에서의 오디션과 들뜬 마음을 표현하더니, 중후반부부터는 ‘뉴욕 영화’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도시의 소음과 일상의 사물과 함께 일상의 경이로움을 발굴하는 데 앞장선다.

pixar soul 이미지 검색결과

허비 행콕부터 테리 린 캐링턴, 퀘스트러브 등 신을 이끄는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문을 더하며 고전에 대한 경의도 잊지 않았다.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Blue rondo a la turk’, 월터 노리스의 ‘Space maker’, 듀크 피어슨의 ‘Cristo Redentor’ 등 과거의 명곡이 사운드트랙 곳곳에서 변주된다.

“우리 밴드의 음악 연령대는 95세부터 19세까지다!”. 존 바티스트의 자랑스러운 선언대로 < 소울 >의 음악은 세대 무관이다. 올드 재즈 팬부터 신세대 베드룸 알앤비 싱어송라이터까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아지경의 세계 속 자유로이 발걸음을 옮기는 연주의 즐거움과 쾌감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자연스레 옮기는 것은 덤.

1963년 커티스 메이필드가 작곡한 임프레션스의 고전 ‘It’s all right’ 역시 존의 손 끝에서 극의 마지막을 잔잔하게 빛낸다. 정말로 ‘손 끝’이다. 실제로 영화 속 조의 연주 장면은 존의 실황을 촬영해 모션 캡처로 옮긴 결과물이니까.

그토록 바라던 재즈 밴드의 일원이 된 조. 벅찬 감정에 발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다가 그만 하수구에 빠져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고 만다.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닮은 형이상학적 존재 ‘관리자’들과 무한한 영혼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이루는 이 곳에서 음악의 문법도 빠르게 전환된다. 리얼 세션 재즈에서 영롱하고 광활한 앰비언트가 장엄한 소리의 안개를 펼친다. 

이 세계의 설계자들이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다. 음악 팬들에게는 나인 인치 네일스로 유명한 이름이다.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인간의 음울과 고통을 절규하듯 토해내던 인더스트리얼 밴드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지 이들의 참여 소식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였다. 정작 트렌트 레즈너는 “픽사만큼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곳은 없다”며 반가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21세기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는 나인 인치 네일스보다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더욱 유명하다. < 소셜 네트워크 >, < 나를 찾아줘 >, < 버드 박스 >, < 맹크 >까지 유수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담당했고 특히 2010년 < 소셜 네트워크 >로는 2010년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검증된 아티스트다. 그럼에도 < 소울 >은 듀오의 첫 애니메이션 작업이고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과는 꽤 거리가 있는 전자 음악을 선보여왔다.

pixar soul 이미지 검색결과

존 바티스트가 즉흥의 붓질이라면 트렌트와 애티커스는 아티스트의 캔버스 같은 존재다. 장대한 가상공간 곳곳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듀오의 음악은 야심 가득하면서도 포근하며 천진한 디즈니의 성격에 정확히 부합한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부터 가상 악기, 사운드 합성을 통해 제작한 소리는 < 인사이드 아웃 >의 감정, < 토이 스토리 >의 포근한 무생물 세계와 닮았으면서도 분명히 구분된다. 사후세계 ‘머나먼 저 세상’부터 어린 영혼들을 교육하는 ‘유 세미나’까지 유연하게 찰랑이는 청각의 물결이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영화처럼 두 ‘음악 관리자’ 들의 연주도 자유로이 교차된다. 하이라이트는 가상 세계 관리자 테리(레이첼 하우스 분)가 존과 22를 뉴욕으로부터 가상 세계로 영혼을 데려갈 때다. 재즈 밴드 연주가 왜곡된 사운드 벽을 거쳐 긴박한 앰비언트 파편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긴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충돌의 순간을 그린다. 친절하게도 트렌트 레즈너는 곧이어 온화한 피아노 뉴에이지로 긴장을 낮추며, 존 바티스트가 바통을 이어 화려한 고전의 세계를 전개한다. 아름다운 앙상블, 화려한 하모니다.

trent reznor soul 이미지 검색결과

근사한 사운드트랙 덕에 < 소울 > 은 한 편의 영화임과 동시에 영화의 형태로 비유된 음악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은 곧 삶과 동의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 거대한 ‘불꽃’ 같은 순간을 바라며 삶을 무의미하다 비관할 수 있지만, 관리자 제리(리처드 아이오아이 분)의 말처럼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에게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음악, 그 몰입의 과정 속 선물처럼 내려오는 아름다운 순간, 그것이 곧 삶일지니. 훌륭한 작품의 드넓은 저편에 경이로운 음악이 있다. 

Categories
특집 Feature

김진성의 영화음악 – #2 접속(The Contact, 1997)

이즘은 개설 20주년을 맞아 특집 가운데 하나로 < 김진성의 영화음악(Historical Cinema Music) >을 연재합니다. 영화 역사를 수놓은 작품들 중에서 영화 자체는 물론 특히 영화음악으로 역사와 대중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30개의 작품을 골라 음악을 집중 분석합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기대합니다. 두 번째 편은 < 접속 >입니다.

1997년 9월13일 추석시즌부터 겨울 12월까지 장기상영에 들어가 서울에서만 67만 관객을 동원, 그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작이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사용된 노래와 연주곡을 묶어낸 OST(오리지널 사운드트랙)앨범이 80만장 이상 판매되며 영화의 흥행기록에 버금가는 명성을 획득했다. 그야말로 쌍끌이 히트, 겹경사였다. 한석규와 전도연, 두 남녀주연배우의 호연이 물론 영화의 흥행에 중대한 견인차 역할을 했지만, 영화음악의 영향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화제의 명화.

폴라로이드 즉석카메라와 PC통신을 주요 소품으로 활용해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 <접속>은 동시대의 낭만적 사랑이야기 속으로 관객을 초대했다. 극에서 차지하는 음악의 지분도 마찬가지, 로맨틱한 무드로 사랑의 감정을 불러내는 노래들이 적재적소에 사용되었다. 그렇게 영화의 장면에 유효 적절히 조응하도록 삽입된 노래들은 연이어 인기를 누리면서 영화팬과 음악애청자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X세대 남녀의 러브스토리에 음악은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충만했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구관이 명관임을 다시금 인지하게 만든 셈. 얼터너티브 록(Alternative Rock)과 테크노(Techno) 음악이 최신 유행하던 1990년대 후반, CD가 음반시장을 재편하던 그 대세 안에서 “길보드” 차트를 점령할 만큼 그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사라 본(Sarah Vaughan)의 ‘A Lover’s concerto’와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는 그중에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곡으로, 이후 라디오 신청곡으로도 꾸준히 애청되면서, 영화의 주제가처럼 각인되었다.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피카디리 극장 앞 광장에서의 종영장면과 함께 울려 퍼진 ‘연인들의 협주곡’과 카페에서 읊조리듯 흘러나온 ‘연푸른 눈동자’는 우리에게 그렇게 영화음악으로 기억에 새겨졌다.

영화는 한석규가 출연한 라디오 심야프로그램 PD 동현과 전도연이 분한 홈쇼핑 콜센터 상담사 수현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동현과 친구의 애인을 남몰래 짝사랑하는 수현은 각각 “해피엔드”와 “여인 2”라는 대화명으로 인터넷 PC통신에서 만나 서로에게 점점 빠져든다. 사랑의 아픔을 지닌 둘은 모두 상실과 외로움 속에 사이버 채팅을 통해 마음 속 비밀까지 공유하는 사이로 발전하고, 음악은 두 남과 여의 관계에서 중요한 매개역할로 작용한다.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속 깊은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인터넷에서 둘은 자유롭게 대화하지만, 실상 현실에서는 모순되게도 서로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스치듯 지나가고, 둘의 엇갈림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 연출되는 장소가 레코드가게 좁은 계단이라는 점도 음악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는 대목. 신인 감독 장윤현의 섬세한 연출력과 더불어, 영화 장면 속에서 주인공의 심리에 접속해 공감할 수 있게 한 선곡이 특출하다. 우선 영화에 주제곡처럼 쓰였을 뿐만 아니라, 동현과 수현의 만남을 가능케 했던 곡이 바로 벨벳 언더그라운드(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다.

동현의 옛 연인 영혜가 즐겨듣던 이 곡을 수현이 방송에서 우연히 듣게 되고, 다음날 “여인 2”라는 아이디로 이 곡을 신청하면서 동현과의 연인이 시작된다. 루 리드(Lou Reed)가 소곤거리듯 낮게 읊조리는 가창이 조용히 가슴에 와 닿는 이 곡은 한석규의 동현을 위한 곡이다. 이 노래로 관객은 떠나간 옛 사랑에 대한 동현의 그리움과 다가오는 새로운 연인을 향한 기다림의 정서를 미리 짐작하게 된다. 특히 영화의 인물설정 상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PD인 남자주인공의 이 곡에 대한 애정은 진정한 애호가가 아니면 잘 몰랐던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대중적으로 알렸다는데 의미가 남다르다.

PC통신으로만 얘기를 나누던 남여주인공이 서로 만나게 되는 엔딩장면에 쓰인 곡은 1966년 재즈 가수 사라 본(Sarah Vaughan)이 다시 불러 히트한 재즈 풍의 노래, 원래 바흐(Johann Sebastian Bach)가 두 번째 아내 안나 막달레나를 위해 작곡한 춤곡(Minuet)을 1965년 흑인 여성 3인조 그룹 토이즈(The Toys)가 노래해 빌보드 핫100차트 2위까지 올려놓은 ‘A lover‘s concerto'(연인들의 협주곡)다. 밝고 경쾌하게 박진하는 리듬과 호소력 짙은 그녀의 보컬은 행복한 결말과 함께 빛나면서 이 곡을 최고의 라디오 애청곡 목록에 올려놓았다.

“저는 눈물이 안나요… 정말 바보 같죠.”란 독백에서 전해지는 것처럼 수현의 아픔을 온유하게 보듬어 주는 곡은 ‘The look of love’(사랑의 모습), 영국이 낳은 위대한 소울 여가수 더스티 스프링필드(Dusty Springfield)가 라틴 룸바 리듬을 실은 재즈 반주에 맞춰 불렀다. 작곡가 버트 바카락(Burt Bacharach)과 작사가 할 데이비드(Hall David) 명콤비가 공작해낸 사랑의 발라드로, 이 노래 역시 많은 팝송 팬들의 심금을 울리며 애청되었다.

이외에도 탐 웨이츠(Tom Waits)의 작별과 회한을 노래한 ‘Yesterday is here'(어제는 여기에)와 록 밴드인 트록스(Troggs)의 1966년 발표 히트곡 ‘With a girl like you'(당신 같은 여인과 함께)까지, 다양한 팝의 클래식들이 수현과 동현의 내면을 대변하는 한편, 송지예와 방대식이 두 남녀주인공이 되어 대화하듯 부른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는 ‘The look of love’와 유사한 라틴 재즈풍의 곡으로 영화에 일관된 기조의 분위기를 유지해준다.

별도의 사운드트랙앨범으로 발매된 음반에서도 파악할 수 있듯 영화 <접속>의 분위기를 아우르는 음악은 재즈, 엄밀히 퓨전 재즈적 감성으로 충만하다.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 드럼과 베이스를 기본 악기구성으로 ‘연인들의 협주곡(A lover’s concerto)’과 바흐의 클래식원곡의 느낌을 함유한 연주곡 ‘사랑의 송가’는 그 대표적 증거. 이 곡을 필두로 ‘거리에서’, ‘해피엔드&여인 2’, ‘방황’로 이어지는 Cucina Acoustica(쿠치나 어쿠스티카)의 연주가 때론 밝게 때론 차분한 사색조로 화면을 채워준다. 이들 곡에서 느껴지는 감성적 터치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나 <사랑의 행로>(The Fabulous Baker Boys)의 음악처럼 영화에 대한 시각적 인상을 도회적 세련미로 물들이는 한편, 극적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안한 로맨스 스토리를 관통한다.

사실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실린 스무드 재즈(Smooth Jazz) 스타일의 반주와 숨은 명곡들을 선정해 결합해낸 음악감독 조영욱의 뛰어난 감각과 노고가 아니었다면 영화 <접속>을 지금까지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색깔에 어울리게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개인적인 느낌을 주는 음악을 고른 것이 젊은 관객들의 감성과 맞아떨어진 것 같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 영화의 성공의 반은 국내최초 영화음악 프로듀서로 공인된 조영욱의 공이 컸다.

추억에 매달리는 주인공들의 인물됨과 취향에 맞춰 옛 노래이면서도 당시 젊은이들에게는 새롭게 가닿을 수 있는 노래를 주로 선택한 사운드트랙 구성이 주효했던 것이다. 또한 노래에 대한 ‘저작인접권’이나 원곡 작곡가가 지닌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당시, 빈약한 영화음악예산으로 영화의 질과 음악의 상업성을 모두 만족시키려한 노고의 결실이었다. 그렇게 영화 <접속>은 만인들의 마음에 음악으로 접속했다.

– 수록곡 –
01. Prologue
02. Cucina Acoustica – 사랑의 송가
03. 수현의 독백
04. Dusty Springfield – The Look of Love
05. Cucina Acoustica – 거리에서
06. Cucina Acoustica – 해피엔드 & 여인2
07. 폴라로이드
08. The Troggs – With A Girl Like You
09. 운명의 반전
10. The Velvet Underground – Pale Blue Eyes
11. Tom Waits – Yesterday is Here
12. 손지예, 방대식 – 나보다 더 외로운 사람에게
13. Cucina Acoustica – 방황
14. 수현의 전화
15. Sarah Vaughan – A Lover’s Concerto6.
16. J.S.Bach – 2 Minuet G Major & g minor BWV 114 & BWV 115
17. Cucina Acoustica – 방황(Take 2)
18. Title (Instrument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