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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무비즘] 주디

코로나 기세가 조금씩 저물자 삭막했던 극장가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지구촌 곳곳에는 흥미로운 작품 소식들이 당차게 고개를 내미는 추세다. 이러한 스크린 흐름에 발맞춰 IZM이 무비(Movie)와 이즘(IZM)을 합한 특집 ‘무비즘’을 준비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의 명예를 재건하고 이름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매주 각 필자들이 음악가를 소재로 한 음악 영화를 선정해 소개한다. 여덟 번째는 너무 일찍 ‘Over the rainbow’로 떠난 주디 갈란드의 전기 영화 < 주디 >다.

무대 위에 서 있는 주디 갈란드를 사랑한다.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강렬한 삶을 살다 떠난 주디 갈란드. 영화 < 주디 >는 47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뜬 그의 마지막 1년을 다룬다. 5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 뮤지컬 영화 < 오즈의 마법사 >의 ‘도로시’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 이면 가해진 소속사의 착취는 오랜 세월 주디의 발목을 잡았다. < 주디 >는 위태롭지만 강해 지려했던, 삶을 버텨내고자 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다.

#1. 스타 탄생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즈의 나라로 날아간 소녀 도로시. 1939년 전 세계에 선풍적 인기를 끈 < 오즈의 마법사 >는 주디 갈라드를 만인의 ‘이웃집 소녀’로 위치시킨다. 영화 속 도로시는 특유의 맑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희망을 노래했지만 현실의 ‘도로시’는 반대의 상황에 살았다.

영화의 시작이 묘사하듯, 당시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스케줄과 강압적인 소속사(MGM)의 요구 아래 혹사당했다. 17살의 나이에 수면제와 각종 약물, 하루 80개비 이상의 담배에 손을 댄 것 역시 ‘어른들’의 계략 때문이었다. 마름을 강요 받고 외모 지적 및 비하 속 살던 어린 시절은 성인이 된 주디의 삶을 계속해서 뒤흔든다.

작품은 바로 그 어린시절과 1969년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어른이 된 주디의 모습을 교차해 보여준다. 즉, 소속사에서 방출되다시피 벗어난 뒤 1954년 자력으로 다시 한번 정산에 선 영화 < 스타 탄생 > 시절의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희’보다 ‘비’에 주목했다. 

#2. 무대

‘비’를 내세웠지만 작품에는 슬픔 이상의 감정이 번진다. 우여곡절 끝에 생애 마지막 런던 투어 길에 오른 그는 첫 번째 무대를 끝내고 말한다.

“다음엔 못 해내면 어쩌지”

무대에 오르기 전 항상 불안함과 두려움을 토했다. 마이크를 잡으면 변한다. 주디 갈란드로 분한 르네 젤위거는 영화 속 모든 무대를 직접 라이브로 소화했다. 그 덕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공연 장면은 생생하고 활기 넘치고 무엇보다 ‘희로애락’을 압축해 전달한다.

어린 시절 열연한 또 다른 뮤지컬 영화 < 세인트 루인스에서 만나요 >의 히트곡 ‘The Trolley Song’에서는 앙증맞은 춤사위를 뽐내고, 처연한 슬픔을 머금고 부르는 ‘Get Happy’는 행복에 닻을 내리지 못한 주디의 삶과 대비되며 마음을 울린다.

큰 장소의 변화 없이 무대, 그리고 런던 투어 중 머물던 호텔이 영화 속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그사이를 채우는 몇 차례의 공연은 주디의 삶을 집약해 확대한다. 무대 위의 그는 강하고 약했으며 청중을 휘어잡는 동시에 휘청거리며 존재했다.

#3. 희망 : 무지개 너머 어딘가

아이들을 양육할 경비와 파산 수준에 다다른 재정을 살피기 위해 선택한 런던 투어. 영화의 말미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 약물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무대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주디 갈란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진행한 공연의 마지막 날, 그는 위태롭던 정신을 부여잡고 무대에 오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부른 노래는 ’Over the rainbow’였다. 그는 곡을 ‘희망에 관한 노래’라고 소개한다.

“뭔가가 이뤄지는 노래는 아니에요. 늘 꿈꾸던 어떤 곳을 향해 걸어가는 그런 얘기죠. 어쩌면 그렇게 걸어가는 게 우리 매일의 삶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걸어가는 게 결국은 전부죠.”

무대 위의 주디는 언제나 찬란하게 빛났다. 받은 사랑 이상의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작품은 그럼에도 그가 피워낸 아름다운 노래들을 들여오고 맞서 싸운 강한 흔적들을 꺼내 삶을 다시 썼다. 절망 끝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던 뮤지션 주디 갈란드.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데워주는 ‘Over the rainbow’가 회자하는 한 주디가 전한 감동의 음악들 역시 계속 살아 찬란한 희망을 전한다. 주디 갈란드를 잊을 수 없다.

– 영화에 사용된 음악 목록 –
1. By myself
2. Get happy (duet with Sam Smith)
3. For once in my life
4. Zing went the strings
5. You made me love you
6. Talk of the town
7. Come rain or come shine
8.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duet with Rufus Wainwright)
9. The trolley song
10. The man that got away
11. San Francisco
12. Over the rainb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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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T Album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평가: 3/5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장철수 감독이 약 9년 만에 신작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를 발표했다. 주연은 연우진(신무광) 지안(류수련)과 조성하(사단장). 엄격한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쓴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장 감독이 직접 각색했다. 성애(性愛), 저항 등 여러 가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나 그 중심엔 인간주의가 있다. 소재와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파격적인 만큼 사운드트랙은 과하지 않게 영화를 받치고 있다.

<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의 영화 음악은 극의 맥락에 따른 분위기를 조성하지만, 인물 간의 내밀한 관계에 자리를 내준다. 음악이 흐를 때도 리얼 사운드와 공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도적 미니멀리즘이랄까. 무광과 수련의 첫 만남과 같은 중요한 사건조차 두 사람이 내뿜는 기운에 맡긴 채 음악이 들어서지 않는다. 첫 번째 정사 신에 흐르는 목관악기 위주의 기악곡이 예외에 해당한다.

전자 음향보다는 체온이 느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활용해 고전적이며 피아노와 현악기에 종종 관악기가 합류한다. 무광의 군 생활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오프닝 시퀀스에서 긴장을 조성하고 그를 바라보는 수련의 관음에 신비감을 부여한다. 이 밖에도 사단장과 무광이 스쳐 갈 때 시곗바늘 소리로 심박을 표현한 듯한 대목이나 쩔꺽대는 현악기로 무광과 수련의 악몽을 청각화한 장면이 돋보인다.

무광과 수련이 사택을 몰래 빠져나와 숲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 음악은 잠시 이완하며 부드러운 피아노와 현악 세션으로 애틋함을 드리운다. 공유한 악몽을 지나 두 사람이 요리 대결을 펼치고 아침 식사할 때 흐르는 업 템포 피아노 연주에도 희망이 어린다. 전체적으로 서늘한 톤 사이의 몇 안 되는 달콤한 순간이다.

영화 속에서 수련이 직접 부르는 선전 가요 이외엔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가 없다. 영화가 배경으로 한 1970년대의 가요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점이 의미심장하다. 무광이 수련의 뱃속 아기를 쓰다듬을 때 영화는 비가(悲歌) 대신 연주곡을 택했다. 감정의 전달 매체가 되는 가요 대신 기악 연주로 사실감을 유지했다.

아름다운 선율의 엔딩 곡은 이내 모든 긴장이 풀린 마지막 시퀀스를 응집한다. 고정된 카메라가 무광의 뒷모습을 잡아 영원한 이별을 암시하지만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로 흐르는 관현악 선율이 어느 때보다 포근하다. 그 순간 억눌린 서사 속 짧은 로맨스는 불멸의 무언가로 멈추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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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POP Album

테넷 (Tenet)

평가: 4.5/5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Chrisopher Nolan)은 자신의 영화에 현실을 배경으로 시간이라는 개념을 복합적으로 설계해내는데 전문가이다. 학문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게 해 관객들이 복잡다단한 스토리의 얼개를 풀어내게 만든다. 가히 군계일학,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는 선두주자다. 지난 2000년 그 시발점이 된 작품 <메멘토>(Memento)는 본질적으로 영화를 역순으로 실행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의 삶을 탐구했다. 이후 <프리스티지>(The Prestige)를 포함해 <인셉션>(Inception), <인터스텔라>(Interstellar)와 같은 영화에서 연달아 보여준 독보적 시각은 대부분은 꿈속에서 더 깊은 꿈으로, 그리고 블랙홀을 통한 행성 간 여행 중 발생하는 시간적 특성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주제에 대한 변형을 다루었다.

그의 최근작 <덩케르크>(Dunkirk)마저도 2차 세계대전 중 1940년 프랑스의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40만 명의 연합군을 탈출시키는 사상 최대의 작전을 세 가지 관점에서 보여주면서 시간적 전개의 순서를 모두 흩어 재편성했다. 모두 다른 시간적 관점에서 사건을 경험하게 한 것이다. <테넷>(Tenet)에 이르러 놀란 감독은 이전의 그 어떤 작품보다 시간과 현실이라는 이중적 개념을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영화 <테넷>은 주인공 존 데이비드 워싱턴(John David Washington)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발진시킨다.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한 후 “테넷”이라는 극비 스파이 조직에 채용된 익명의 주인공으로 출연한 그는 “007 제임스 본드”와도 같은 비밀 첩보요원으로 활약한다. 전직 CIA요원이었던 그는 “테넷”이 근본적으로 제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극비조직의 리더들은 총알, 차량, 심지어 사람과 같은 물리적 물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의 현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도 또는 반전'(Inversion)라는 기술의 존재를 발견한 상황.

이 기술은 러시아 무기상이자 과두군주 안드레이 사토르(Andrei Sator)의 손에 넘어간 상태다. 사토르 역은 영화감독이자 배우로 유명한 케네스 브레너(Kenneth Branagh)가 연기했다. 극비첩보조직 테넷은 사트로가 전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비밀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극의 주역은 “테넷”의 해결사인 닐(로버트 패틴슨 분)과 짝을 이뤄 사토르의 계획을 무산시킬 작전을 펼친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진 갑부권력자에게서 지구를 구할 구원자로서 둘의 협공은 영화에서 스펙터클한 장관과 함께 하는 관건.

Tenet Actor Calls Christopher Nolan 'Mad Genius' in Method | Den of Geek

한편 사토르의 아내 캣(엘리자베스 데비키 분)과 삼각관계를 이루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극의 구성은 다소 드라마틱한 순간을 만들어내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긴장감 넘치는 강력한 액션과 팽팽한 극적 긴박감을 견제할 장치로 감정에 호소하는 인간적 관계에 또 다른 방점을 찍으면서 양동작전을 펼친 셈. 놀란이 디자인한 이 모든 극적 구성은 매우 매력적이고 잠재적으로 흥미진진한 상상력을 불러낸다.

거기엔 실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운 장면전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기술적 관점에서 “테넷”은 그야말로 걸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압도적이다. 프로덕션 디자인, 영화 촬영 및 편집 모두 최고 수준의 경지를 자랑한다. 전투 액션 시퀀스는 물론 스턴트 작업이 투입된 대규모의 시각충격은 대단하고, 특수효과는 놀랍다. 특히 전투병력, 헬리콥터, 차량, 폭발물 및 총알로 점철된 소대 전체가 시간에 따라 앞뒤로 동시에 달리는 최종 시퀀스에서 극에 달한다.

문제는 그런데, 이 모든 경이로움이 거의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언급한 놀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복잡다단한 각본을 제공해 관객들의 뇌리를 온통 휘젓는다.

순차와 역순, 역전과 역전되지 않은 장면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이야기는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전방으로 후방으로 그리고 다시 비순차적으로 보는 이의 기억을 밀었다 당겼다 뒤집었다 엎었다 갈팡질팡 중심을 못 잡게 유도한다. ‘테넷’ 소속 병사 편대가 총을 쏘고, 기갑차를 운전하고, 폭발물을 터뜨리는 장면의 연속적 전개, 소련의 ‘폐쇄된 폐허도시’에서의 전투에서 놀란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특히 압권이다. 기술과 과학에 대한 초 집착과 밀도를 헤아릴 수 없는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놀란 감독의 장인정신은 뭐라 단언해 설명할 방법이 없을 것만 같다.

How Ludwig Goransson Became Directors' Secret Musical Weapon - The New York  Times

놀란이 빚어낸 이 모든 혼란의 마지막 요소는 결국 영화의 사운드 믹스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타난다. 그간 압도적인 사운드 믹스를 영화에서 들려줬던 놀란은 이번 <테넷>에서 그 강도를 더욱 증폭시켰다. 효과음향과 음악이 뒤섞인 소리의 융합은 대사와 배경을 아우른 다양한 소리의 조합이자 영상에 맞게 재단된 사운드디자인이라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전자음이 회전하듯 순회하며 관객의 후두부를 강타하게 설계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각과 달리 주위는 산만해지기 마련. 스웨덴 출신 제작자 겸 작곡가 루드비히 괴란손(Ludwig Göransson)의 오리지널스코어는 시각적 절망에 덧붙여 청각적으로 못지않은 충격을 가한다. 엄청난 수의 데시벨에 합쳐진 난폭함과 함께 쿵쾅거리며 위압하는 소리의 융단폭격이라 할 만하다.

괴란손은 놀란과 정기적으로 협업해온 작곡가 한스 짐머(Hans Zimmer)가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최신작 <듄>(Dune)에 전념하게 되면서, 대신에 <테넷>에 합류했다. 마블 코믹스 시리즈 블랙 팬서(Black Panther)로 오스카상을 수상하고, 별칭 차일디시 갬비노(Childish Gambino) 도널그 글로버와 같은 아티스트와의 공작(Collaboration)을 통해 영화와 대중음악계의 주요 연주자로 터를 잡은 괴란손은 현재 이 마당에서 가장 핫한 유망주라는 점. 짐머의 대를 잇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재능의 소유자다.

놀란은 자신의 영화에 매우 구체적인 음악적 요구를 하는 걸로 유명한 제작자로서 짐머가 가장 확실한 단짝이라고 할 수 있지만, <테넷>은 <인셉션>, <인터스텔라>, <덩케르크>와 <다크 나이트> 삼부작과 연계해 음악적인 면에서 그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다. 시야를 조금 더 넓혀 보면 요한 요한손(Jóhann Jóhannsson)의 두 작품 <컨택트>(Arrival)와 <시카리오>(Sicario), 힐두르 구르나도티르(Hildur Guðnadóttir)의 <조커>(Joker)와 같은 일련의 명작들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

선율 즉 멜로디가 가벼운 한편 분위기가 무겁고, 주제가 되는 악상 즉 테마가 있고 이를 변주해내는 방식보다는 리듬에 집중하는 편이며, 소리의 크기 즉 볼륨과 저음 측면에서 수치를 강화하는 식이다. 주로 현악기와 금관악기, 타악기를 편성한 오케스트라와 전자음악 즉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이종 교배한 하이브리드 악보를 써냈다고 보면 무방할 것이다. 제작 후반에 키보드로 작업한 대량의 음향 조작이 최종적으로 가미되어 나온 결과물은 시각과 함께 소리의 충격으로 멍하게 마취되게 만드는 매력 포인트.

Listen to Ludwig Göransson's Full Score for Tenet

더욱 흥미로운 것은 괴란손이 영화의 전반적인 시간 개념과 조작을 어떻게 파악하고 음악적으로 접근했느냐 일 것이다. 이는 악보에서 음악이 역방향으로 재생되게 물리적 특성을 가하는 연주로 나타나고, 다방면에서 실험적이고 매혹적인 방식으로 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때론 전통적인 방식으로 연주되다가 반전된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음악이 잘못된 방식으로 녹음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영화의 이야기 전개방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한편 처음부터 음을 거꾸로 연주하게 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나중에 반대로 되돌릴 때 올바른 순서로 연주한 것으로 들리면서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음질로 다가온다. 음의 동적인 방향을 왜곡하기도 하고,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해 괴란손은 때로 이 두 가지 유형의 조작된 음표를 서로 대위적으로 활용했다. 앞뒤로, 뒤에서 앞으로, 번갈아 교차해 쓰는 이러한 방식은 특히 ‘Rainy Night in Tallinn’, ‘Trucks in Place’, ‘The Algorithm’, ‘Inversion’과 같은 지시 악곡에서 두드러진다.

과거와 미래, 두 개의 서로 다르게 병존하는 주인공 주도자가 과거와 미래에서 자신과 싸울 때, 연속된 장면에 사용된 음악으로 인해 관객은 서로 다른 듯 같은 두 개의 시공간을 순간 이동하는 절묘한 경험을 음악과 음향의 총화인 괴란손의 사운드스코어를 통해 공유하게 된다.

괴란손은 또한 영화의 중요한 열쇠인 고대의 회문 사토르 광장(Sator Square)에 근거해 음악적 회문을 만들었다. ‘사토르'(sator), ‘아레포'(arepo), ‘테넷'(Tenet), 그리고 ‘오페라'(opera)와 ‘로타스'(rotas)가 바로 그것. 이 다섯 개의 라틴어는 사각형 대칭모양 내에서 2차원 회문으로 배열되는데, 이 다섯 단어는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토르’는 캐네스 브레너의 캐릭터, ‘아레포’는 두 개의 고야 그림을 모사한 스페인 위조 화가의 이름, ‘테넷’은 영화의 핵심 조직, 오페라는 오프닝 장면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로타스’는 영화의 주요 액션 시퀀스 중 두 가지가 발생하는 저장 장치를 운영하는 노르웨이 회사의 이름이다.

이러한 영화의 극적 구성에 기반, 괴란손은 본질적으로 원형이고 대칭적인 음악을 매우 섬세하게 직조했다. 미세한 음악의 세포들은 같은 지점에서 시작하고 끝나고, 크레셴도(crescendo)의 양 정점에서 같은 음표를 사용하여 같은 방식으로 상승 및 하강한 다음 반복하여 최면 리듬 펄스를 만들어낸다. 그의 악보에 대한 사고 과정은 이처럼 매혹적이고 탁월하고 지능적으로 작용하지만, 영화의 문맥에서 이 모든 것이 사운드 믹스로 인해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전자악기로 다양하게 조작해낸 음악은 명백히 들린다. 괴란손이 악기로 괴이한 소리를 만들어낸 순간들도 있다. 그러나 모든 소리의 섬세함과 복잡성은 겹겹이 세워진 사운드의 벽에서 완전히 길을 잃는다. 폭발, 총알, 헬리콥터 블레이드, 트럭 엔진 등, 놀란의 시나리오 내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볼륨과 주변 배경소음이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괴란손의 음악은 타악기의 강력한 리듬과 맥동하는 전자음이 영상을 반주한다. 실로 엄청난 폭음이 연달아 터져 나온다.

사운드트랙에 실린 괴란손의 음악은 영화의 장면전개와 함께 기억의 파편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하다. 2시간 반에 달하는 러닝 타임에 준해 1시간 반 동안 음악과 음향의 소리매김이 공존한다. 생생하게 혼합된 전자음, 멜로디를 희생하며 끊임없이 강타하는 타악기 리듬이 음악적 추상화를 그리고, 때로는 위압적인 소리의 크기로 다가온다.

음악의 대부분은 액션에 지배적으로 조응한다. 오페라 공연장에서 전개되는 도입부 장면을 반주하는 지시곡인 ‘Rainy Night in Tallinn’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영화가 오케스트라의 악기조율 소리로 시작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뒤틀리고 반전되어 자체적으로 붕괴되기 전에 오페라 하우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

괴란손의 액션음악 스타일은 전체적으로 무겁고 공격적이며, 엄청난 사운드의 폭발에 의존하고, 강력한 타악기 리듬, 순환하는 전자음 텍스처, 현악기와 금관악기, 강렬하게 반복하는 전기기타 연주 및 키보드 사운드를 겹겹이 결합한 일종의 사운드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나 <덩케르크>(Dunkirk)와 같은 스코어와 비견해도 좋을 만큼 흥미진진한 박진감을 동일하게 전해준다.

이 악상은 이어서 장면을 지시하는 곡에서 계속된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일어나는 장면을 강조하는 ‘Freeport’와 ‘Inversion’은 공히 긴장과 기대감을 준다. 독특하게 윙윙거리는 모티프를 가지고 있다. 산만하게 반복되는 전자음의 융화와 육중한 베이스음이 주도하는 한편 드라마틱한 현의 울림이 주제악상을 되새긴다. ‘747’의 전반부 대부분은 영화 <인셉션>(Inception)의 ‘Dream is Collapsing’을 명확하게 리모델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두운 호른의 반주가 그러한데, 후반부는 매우 실험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이어지는 ‘Foils’는 이중 선체 쌍동선이 물살을 가르며 질주하는 바다 장면을 강조하는 음악이다. 율동적으로 반복하는 전자음과 함께 건반의 극적인 선율이 전개되는 곡의 구성은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의 영화음악을 연상케 하는 대목. 에스토니아의 도로에서 쫓고 쫓기는 서사적 차량 추격전을 강조하는 ‘Trucks in Place’는 긴박하게 반복하는 리듬과 신디사이저에 의해 생성된 전자음, 보코더에 의해 최면 처리된 가창, 전기기타에 의한 굉음이 순차적으로 혼융돼 매우 남성적이고 공격적인 장면연출을 뒤받친다.

모든 액션장면의 배경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대규모 사운드스코어링은 피아노와 스트링 협연이 극의 감성적인 주제의식을 대변하는 ‘Windmills’, 윙윙거리는 전자음으로 강약을 반복해 들려주는 ‘Meeting Neil’, ‘Priya’과 ‘Betrayal’과 같이 더 조용한 자기성찰의 순간에 의해 균형을 이룬다. 느리고 방황하듯 떠도는 화음과 더 미묘한 리듬 톤을 사용한 이상의 네 곡은 조용한 불확실성의 분위기를 창출한다. 톤의 변화와 약간의 맥동하는 리듬이 혼재할 뿐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다른 상황에서 가차 없이 잠시 중단된다. 아마도 가장 좋은 예는 ‘뭄바이에서 아말피까지’일 것이다. 등장인물 캣이 처한 상황과 그녀의 내면을 반영하듯 혼란스럽고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아들과의 격리, 사토르와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불행, 그리고 주인공 주도자가 제공하는 평화와 자유의 잠재력이 괴란손이 쓴 매우 차분하고 뉴 에이지(New Age)적인 사운드로 표출된다.

영화를 위한 악보에서 가장 불안한 악상은 케네스 브레너의 사토르 캐릭터와 관련해 나타난다. ‘Sator’와 ‘Red Room Blue Room’, 그리고 ‘747’과 같은 지시적 악곡에서 괴란손은 놀란 감독이 마이크에 대고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소리 샘플을 가져와 쌕쌕거리는 목소리로 조작해냈다. 이는 개념적으로 한스 짐머가 놀란의 할아버지 회중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를 샘플링해 <덩케르크>의 스코어에 활용한 것과 유사하다.

숨 쉬는 소리는 브레너의 캐릭터가 어떤 형태로든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나타나는데, 거꾸로 된 사람들은 정상적인 공기를 폐로 흡수 할 수 없고 마스크와 인공호흡기를 통해 호흡해야한다는 영화의 개념과 직접 연관된다. 사토르의 성격과 관련하여 사용하면 그가 더 무섭고 더 위협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요점이었을 것이고, 그 쓰임은 절묘하게 작동한다. 스코어의 나머지는 대부분 낮은 음조(key)로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조성하고, 비명을 지르는 전자 사운드가 산재해 있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영화의 피날레와 스코어는 오래된 방사성 광산 위의 사용되지 않은 구 소련의 ‘폐쇄 된 도시’에서 진행된다. 사토르는 전도(Inversion)를 가능케 할 주요장치를 배치하고 여차하면 폭발시켜 세계를 파괴할 수 있게 했다. 주도자, 닐과 함께 수백 명의 군 병력이 역전 및 비 역전을 통해 지상공격을 감행하고 사토르의 계획을 방해한다.

극의 마무리를 구성하는 네 가지 악상은 ‘Retrieving the Case’, 더 고전적인 느낌의 ‘The Algorithm’, ‘Posterity’, ‘The Protagonist’이며, 대부분 그 이전에 기세 등등 거센 음악들이 등장한다. 대부분의 음악은 한스 짐머의 <인셉션>에 사용된 사운드트랙 ‘Time’의 서사적인 품질을 원하지만 그 경지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종영인물자막(End Credit)과 함께 대미를 장식한 사운드트랙은 트레비스 스콧(Travis Scott)으로 유명한 힙합가수 자크 웹스터(Jacques Webster), 완다걸(Ebony Oshunrinde)과 함께 괴란손이 공동으로 작곡하고 웹스터가 노래한 ‘The Plan’이다. ‘Rainy Night in Tallinn’의 강렬한 천둥 같은 베이스라인과 ‘Trucks in Place’에서 보코더로 처리된 보컬 악상을 포함해 괴란손이 쓴 악보의 샘플을 사용해 뛰어난 효과를 낸다. 영화의 주제를 담은 테마음악에 근거해 제작된 노래는 별도가 아닌 필수요소. 스콧의 보컬이 내는 강렬한 분위기는 괴란손의 몽환적인 사운드질감과 조화를 이루며 매력을 품어낸다.

Tenet' Review: Christopher Nolan's Time-Bending Take on James Bond - The  New York Times

<테넷>의 음악은 테마와 멜로디보다 소리의 질감, 리듬, 볼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인셉션>, <덩케르크>, <컨택트>와 공통점이 많다. 윙윙거리며 선회하는 드론 사운드와 전자악기에 의해 조작 및 왜곡되고 샘플링된 사운드를 하이브리드적 관점에서 클래식 오케스트라와 이종 교배한 사운드스코어이다. 영화의 텍스트 내에서 반응정도는 관객들이 느끼는 그대로일 것이다.

하지만 음악만 독립적으로 들을수록 상당히 다르고, 꽤 흥미롭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전자악기 조작, 선율 반전 및 회문에 의거한 작곡은 영화가 탐구하는 개념과 직접 관련된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괴란손의 악보를 사용하면 뮤지컬 커튼 뒤를 들여다보고 그 뒤에 숨은 뉘앙스를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 사운드트랙에 실린 곡 목록
    01.Rainy Night in Tallinn(탈린의 비오는 밤)(8:01)
    02.Windmills(풍차)(5:16)
    03.Meeting Neil(닐과의 만남)(2:16)
    04.Priya(프리야)(3:24)
    05.Betrayal(배신)(3:56)
    06.Freeport(프리포트)(3:39)
    07.747(7:05)
    08.From Mumbai to Amalfi(뭄바이에서 아말피까지)(4:26)
    09.Foil(포일/뒤엎다, 저지하다)(3:11)
    10.Sator(사토르)(2:51)
    11.Trucks in Place(제자리에 있는 트럭)(5:32)
    12.Red Room, Blue Room(빨간 방, 파란 방)(3:29)
    13.Inversion(도치, 반전, 역위)(3:32)
    14.Retrieving the Case(가방을 되찾다)(3:20)
    15.The Algorithm(알고리즘)(5:58)
    16.Posterity(후세)(12:42)
    17.The Protagonist(주인공, 주역, 주도자)(4:48)
    18.The Plan(계획)(3:05)

글 : 김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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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청 엔니오 모리꼬네

1928년 이태리 로마태생의 엔니오 모리꼬네는 산타 시칠리아 예술학교에서 트럼펫과 작곡을 수학하며 영화음악에 투신했다. 본격적인 영화음악활동을 시작하기 전 모리꼬네는 다양한 실험적 음악을 작곡하고 다수의 팝 레코드들을 편곡했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과시했다.

대학동문인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과의 기념비적 명작창출을 통해 그는 영화음악가로서 명성을 확고히 했다. <황야의 무법자>를 시작으로 속편 <석양의 무법자>와 <속 석양의 무법자>로 이어지는 ‘스파게티 웨스턴’ 삼부작으로 두 필생의 콤비는 기존의 할리우드 서부극에 반하는 새 장을 열었다. 당시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계가 정석으로 여겼던 할리우드 심포닉 사운드방식에서 벗어나 휘파람 소리를 비롯해 차임, 전기기타, 하모니카 등 다양한 악기들을 채용해 서부 영화음악스타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 것.

특히 지금까지 웨스턴무비의 걸작으로 추앙받는 <옛날 옛적 서부에서>와 금주령이 내려졌던 1960년대 미국의 유태인 갱스터 사회를 그린 서사극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보여준 장인의 음악적 역량은 감히 범접을 금할 정도다. 그는 또한 영국 아카데미를 수상한 <미션>을 필두로 국내 영화팬들의 기억 속에 영원으로 자리한 <언터쳐블> <시네마천국> <말레나>까지 그만의 가슴 찡한 선율로 전 세계 영화음악팬들의 변함없는 애정과 찬사를 받았다.

1.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

이전 레오네의 영화음악을 특징짓던 가극 풍의 스코어에서 벗어난 모리코네의 새로운 스타일은 실제 그 이후에 발표된 <언터처블>이나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신호탄에 가까운 것이었다.

특히 게오르그 잠피엘(Gheorghe Zamfir)과의 조우는 각별했다. 벨기에 출신의 팬 플루트(팬파이프)의 대가로 세계적 명성을 소유한 잠피엘의 연주는 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뚜렷이 추억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부한 영감을 담아낸 것이었다.

관객들은 비틀스의 ‘Yesterday’ 하나만으로도 잠피엘의 연주가 오리지널 선율을 얼마나 처연하게 재해석해내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Childhood memories’와 ‘Cockey’s theme’에서 들을 수 있는 그의 연주를 접하는 순간 사람들은 1930년대 뉴욕의 뒷골목에서 펼쳐지던 주인공들의 사랑, 우정, 욕망, 배신의 성장기를 그리고 관객들 자신들의 과거를 아련히 떠올린다. 그만큼 그의 팬 플루트가 품어내는 사운드는 영화의 리얼리티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뛰어난 현악 앙상블로 조율된 ‘Amapola’와 허밍으로 읊조리는 멜로디가 일품인 ‘Deborah’s Theme’ 역시 이 영화에서 널리 사랑받는 곡이다.

2.언터쳐블(The Untouchables)

이 영화는 몽타주와 화면분할기법 등 기술적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Palma)의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숀 코너리, 캐빈 코스트너, 앤디 가르시아 등의 명배우들이 출연해 갱스터영화의 걸작 <대부>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 몽타주 기법의 효시로 대대손손 회자되는 <전함 포템킨>의 계단장면을 차용한 유니언 기차 역에서의 총격씬과 노 경찰 짐 말론(숀 코너리 분)이 저격수의 총탄에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영화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추억의 명장면으로 기억할 것이다.

아울러 그 장면에 잊을 수 없는 절정의 감동을 선사한 영화음악을 절대 빼고 생각할 수 없다. 서스펜스와 스릴을 쿵쾅거리는 단조의 피아노, 저음의 스타카토 스트링, 냉랭한 목관악기, 정박의 타악 비트, 위협적인 관악 사운드 앙상블로 연주한 메인타이틀테마와 액션과 승리의 환희를 장쾌한 오케스트라로 표현한 타이틀테마가 전해준 흥분과 전율은 영화 <언터쳐블>과 함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했다.

3.러브 어페어(Love Affair)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운명의 날, 급히 길을 재촉해 건너던 테리 맥케이(아네트 베닝 분)은 불운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걸을 수 없게 된다. 그 후 테리는 연인 마이크 갬브릴(워렌 비티 분)에게 불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은거하게 된다. 하지만 운명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길을 돌아 다시 찾아오고, 두 필생의 연인은 사랑을 이루게 된다. 마이크가 우연히 그림을 발견하고 테리의 은신처로 찾아가 재회하기까지의 마음조리는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엔니오 모리꼬네는 피아노와 현악의 유려한 선율로 마법을 부려 관객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한다. 피아노 솔로의 재현을 통해 ‘연속성의 서정미’를 느끼게 하는 장인의 음악은 그 단조로운 아름다움 속에서 그들의 사랑을 더욱 고귀하게 그리는 듯하다. 여성허밍보컬이 더해져 포근하고 애틋한 감정을 한층 더 견고히 하는 테마음악과 더불어 비틀즈의 ‘I will’, 레이 찰스의 ‘The Christmas song’을 들을 수 있는 것 또한 <러브 어페어>에서만 전유할 수 있는 미덕이다.

4.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 시네마천국 >의 사운드트랙은 피아노로 시작 애련한 현악과 간간이 심금을 울리는 색소폰이 가미된 메인 테마가 주도하고 있으며, 화려한 화성을 자랑하는 대 편성 오케스트레이션이 아닌 부드럽고 정감 어린 소품형식의 스코어로 이루어졌다. 건반, 스트링, 목관악기를 주 악기로 하는 매혹적인 감상스코어는 관객을 주인공의 회한과 슬픔의 감성으로 온통 물들인다.

엔니오 모리꼬네의 아들 안드레아가 작곡한 ‘러브테마’는 이보다 더 이상 낭만적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세기의 명곡으로 남을만하다. 주선율 안에서 되풀이되는 명징(明澄)한 몇몇 멜로디의 유연한 흐름과 반복 변주로 청중을 사로잡는 데는 누구도 그를 따를 수가 없다.

영화 전반에 걸쳐 클로즈업되는 등장인물의 표정과 감정선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을 잔잔하고 낭만적으로 따라가는 음악은 그래서 더욱 가슴을 움켜쥐게 만든다. <시네마천국>은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엔니오 모리코네의 끊임없는 변신과 영상의 흐름을 사운드로 다스릴 줄 아는 장인의 혼이 녹아있기에 명작으로서 가치가 더 빛나는 진품이라 할 수 있다.

5.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

풍랑을 만나 격심하게 흔들리는 대형여객선 안. 주인공 대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러드 1900(팀 로스 분)이 피아노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3/4박자 ‘매직 왈츠’의 신나는 리듬과 선율이 주조해내는 연주음악으로 우울한 동료를 진정시키는 장면은 가히 환상적이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깥의 험난한 풍경과 위협적 분위기에도 아랑곳없이, 88개의 건반 위에서 신나게 펼쳐지는 음악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시네마천국>과 <말레나>에 이어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의 견고한 파트너십을 보여준 이 영화에서 엔니오 모리꼬네는 자신의 목가적 신고전주의 작풍 안에서 초기 미국의 재즈, 랙타임, 클래식음악을 균일하게 배합해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신세기 초입부터 1930년대까지의 미국음악을 재조명한 스코어에는 미국의 음악 혼을 대변하는 조지 거쉰 풍의 피아노연주와 더불어 <언터쳐블>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등 모리꼬네의 과거작품들을 향수하게 만드는 오케스트라편성과 테마음악이 아름답게 응축되어있다.

6.석양의 건맨(For A Few Dollars More)

입에 끼고 줄을 튕겨 공명 기관으로 삼는 구금(Jew’s Harp)이라는 독특한 악기와 인상적인 휘파람소리, 종소리, 전기기타의 낭랑한 울림 그리고 타악기 리듬과 현악, 합창 앙상블이 영화에 특유의 박진감을 불어넣는다. <황야의 무법자>(1964)에 연이어 돌아온 속편 <석양의 건맨>(1965)에서는 리반 클리프(육군 대령 몰티머)라는 필생의 숙적 캐릭터가 마침내 등장해 멕시코 식 망토를 두르고 시거를 질겅질겅 씹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이름 없는 자)와 함께 한층 더 비열하고 추악한 서부의 총잡이들 내면세계를 강렬하게 보여주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전담작곡가 엔니오 모레꼬네의 음악 또한 더욱 풍성하면서도 예리한 사운드로 영화의 감동과 전율을 배가시켰다. 특히 숨 막히는 결투의 결정적 순간에 고요를 뚫고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회중시계의 차임(chime)소리와 함께 가슴을 옥죄는 테마음악의 긴박감은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백미다.

7.미션(The Mission)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원주민들의 가슴을 파고든 천상의 소리.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분)신부의 오보에 선율은 어린 양들을 돌보는 신의 손길처럼 따스한 온기를 전하며 대자연을 부드럽게 감싼다.

영화의 마지막 대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소녀가 칼 대신 바이올린을 손에 쥐는 장면과 함께 마음 속 깊은 곳에 여운의 상처를 남긴 영화음악. 마음을 울리는 현악반주와 오보에 솔로의 완벽한 앙상블, 영화 <미션>의 테마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가 주는 그 벅차오름을 영상 안에서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건 반절의 감동에 불과할 것이다.

영화의 스코어를 작곡한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는 놀랍게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제레미 아이언스를 보면서 받은 영감을 바로 악보에 옮겨 적었다고 한다. 토속적인 인디언 플루트와 가브리엘 신부가 웅장한 폭포의 정상에 올라섰을 때 절정으로 솟아오르는 스트링선율로 연주된 타이틀 테마에 펼쳐지는 ‘소리의 장관’을 반드시 눈으로 확인하기 바란다.

8.말레나(Malena)

세르지오 레오네 이후 새 파트너 쥬세페 토르나토레와의 탁이한 조화를 <시네마천국>에서 보여준 엔니오 모리꼬네는 연이은 또 한편의 성장드라마에 인간적 감정의 깊이와 시공간적 배경을 다잡는 스코어로 영화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태리의 태생적 감수성과 오랜 관록에서 나온 음악적 영감이 배어있는 소품형식의 오케스트라는 유로피언 재즈와 단아한 선율, 리듬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어르고 달랜다.

전반적으로 치우침 없이 잔잔한 감동과 비장미 그리고 애절함이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바이올린의 애절함과 클라리넷의 고요함 그리고 첼로의 중후한 저음 현이 여주인공 말레나의 희비극 적 결말을 예시하는 말레나의 타이틀테마를 비롯해 이태리 전통악기와 클래식 기타를 포함한 엔니오 특유의 관현악 편성에 힘입은 영화음악은 관객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9.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

질(클로디아 카디날 분)이 처음 기차역에 도착하는 장면에 삽입된 주제선율은 역 너머의 분주한 도시 전경을 비치는 카메라 앵글과 함께 점점 고조되며 울려 퍼진다. 보기 드문 감동과 전율의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에다 델’오르소(Edda Dell’orso)의 솔로소프라노와 관현악의 화음이 만들어낸 서사적 비장미의 메인테마는 영화음악을 오페라적 경지까지 끌어올렸다는 최고의 찬사를 얻어냈다. 그만큼 고혹적 아름다움이 영혼을 울린다.

이러한 영화음악은 촬영에 들어가기 이전에 곡을 완성해 영화의 진행과 속도, 배우들의 동작에 맞게 편성되었다. 음악에 맞춰 등장인물들의 액션과 내면이 표출될 수 있게 설정하고,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테마의 변주곡을 삽입해 각 장면을 구체화하면서 전반적인 분위기의 흐름을 하나로 엮는 방식으로 극적 감흥을 극대화한 것이다. DVD의 제작 다큐멘터리는 모리꼬네의 테마음악이 서로 다른 극중 인물의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10.황야의 무법자(A Fistful of Dollars)

스파게티 웨스턴의 성공적 서막을 가슴 찡하게 안겨준 대표작. 만리타향 아메리카에 발을 들여놓은 두 이방인 세르지오 레오네(감독)와 엔니오 모리꼬네(작곡가)는 이 한편의 명작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미국의 서부개척사를 심히 예리한 눈초리로 바라봤던 레오네의 냉랭한 시선도 특이했지만, 거기에 덧붙여 음악적 일침을 가한 모리꼬네의 테마음악 또한 참으로 독특한 것이었다. 바그너 식의 장쾌한 오케스트라로 좍좍 뽑아대며 말 달리던 미국풍 서부영화 음악 사운드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던 그의 음악에는 이국적 타인의 취향과 서민적인 소박함이 깊숙이 뿌리내려있었다.

고독의 향기를 진하게 풍기며 울어대는 멕시칸 풍 트럼펫사운드가 압권인 메인테마, 그리고 스페인풍의 말발굽 기타리듬반주와 방랑의 휘파람소리를 시그널사운드로 종소리, 채찍소리, 로큰롤적인 전기기타리프 등의 원색적이고도 상징적인 사운드스코어와 함께 멋들어진 모습을 드러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와 함께 역사가 되었다.

필자 : 김진성
20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