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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aespa) ‘Savage’ (2021)

평가: 3.5/5

차세대 SMP의 이상향

SM 엔터테인먼트의 역사는 실재하는 우주의 변천사와 평행을 달린다.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하고 소멸했지만 그들의 파편은 지금까지도 가요계를 수놓고 있다. 허공에 흩뿌려진 유산은 팽창의 자양분이 되어 2020년 마침내 일원화된 신세계 SMCU(SM Culture Universe)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태어난 거대 세계관의 주인공이 바로 걸그룹 에스파다.

팀 이름부터 방향성은 명확했다. 인간 멤버들이 자신의 데이터에 기반한 아바타 ‘아이(æ)’를 만나 경험하게 될 메타버스 스토리. 미래 기술과 음악의 접목이란 사실만으로 등장 전부터 이목이 쏠렸다. 낯익은 이미지로 점철된 데뷔곡 ‘Black mamba’가 그 기대에 미치진 못했으나 올해 손목을 꺾는 디귿 춤과 쫀득한 발음을 곁들인 ‘Next level’이 인기를 끌며 에스파는 단숨에 대세로 우뚝 섰다. 산업 간의 융합으로 호기심을 자아내긴 했지만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힌 건 결국 음악이었다.

유행의 본질을 파악하고 돌아온 이들의 음조는 더욱 맹렬해졌다. 강렬한 비트와 찢어 늘인 신시사이저 그리고 극적인 고음 애드리브까지, ‘Savage’의 기틀은 보아와 동방신기가 프로듀서 유영진과 함께 주도했던 2000년대 중반 SMP다. 물론 그 시절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후렴구는 엔시티 127의 대표곡 ‘Cherry bomb’처럼 짧은 호흡으로 받아치며 중독성을 배가하고, 브릿지는 엑소의 알앤비 발라드 ‘What is love’를 들여와 보컬 기량을 발산한다. 더불어 둔탁한 타격의 틈엔 영국 일렉트로닉 레이블 PC 뮤직의 시그니처 샘플들을 분절시켜 입체감을 높인다. 기획사의 노하우를 집약하고 하이퍼 팝까지 이식한 K팝 트랙은 혁신적 관점으로 시대를 매끈하게 앞서간다.

뒤이은 ‘I’ll make you cry’까지 야성적인 자세로 일관한 데 비해 후반부는 톤을 낮추며 캐주얼한 면모를 드러낸다. 몽롱한 멜로디의 ‘자각몽’은 이달의 소녀나 레드벨벳의 드림 팝이 스치고, 자존감이 충만한 ‘Yeppi yeppi’는 있지의 ‘달라달라’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비교적 친숙한 질감이 자칫 독보적인 매력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채로운 전자음과 목소리의 블렌딩은 음악적 친밀감을 제고하며 타이틀곡의 접근법이 낯선 이들마저 새로운 차원으로 빨아들인다.

음악 외의 콘텐츠도 흡인력을 강화한다. 어린이 만화에 나올 법한 ‘ænergy’의 대사나 ‘Savage’ 뮤직비디오 속 2D 애니메이션은 키치한 즐길 거리다. 막연한 연출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훗날을 위한 면밀한 설계로 짐작된다. 현실의 ‘나’와 가상의 또 다른 자아 ‘아이’는 익명에 가려진 시스템의 양면이고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빌런 ‘블랙 맘바’는 딥페이크를 비롯한 기술 범죄의 초상이다. 허구의 이야기 속 투쟁은 디지털 사회의 실태고 이를 조영하는 비주류 매체는 유머 섞인 지적질을 날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서브컬처의 상승으로 근래 보기 드문 아이돌식 풍자를 완성했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메타버스는 점점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여전히 흐릿하다. 엉성한 3D 모델링과 각종 표절 논란만 봐도 생소한 개념은 그저 키워드 마케팅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네 명의 소녀와 네 개의 홀로그램이 그려갈 문화 행보는 근시안적 태도의 불손함을 상쇄한다. 탄탄한 가창력과 과거의 질료로 구축한 세련된 사운드 그리고 다각적인 고발과 비판의 메시지. < Savage >는 미디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며 가장 이상적인 SMP를 주조했다. 시대가 공증할 수 있는 ‘Iconic’한 존재, 선구자의 발걸음에 신세기의 성패가 달렸다.

– 수록곡 –
1. ænergy
2. Savage
3. I’ll make you cry
4. Yeppi yeppi
5. Iconic

6. 자각몽 (Lucid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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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시티 127(NCT 127) ‘Sticker’ (2021)

평가: 3/5

물음표 섞인 갸우뚱거림이 서서히 리듬을 타는 순간, 다국적 보이그룹 엔시티의 핵심 가치인 ‘네오(Neo)’가 뇌리에 박힌다. 생소한 감각에 대한 정의는 여전히 불명확해 거리감이 느껴지나 지난해 엔시티 127이 < NCT #127 Neo Zone >으로 대중에 한 발짝 다가서며 그 간격을 좁혔다. 기세를 이어 엔시티는 시대를 넘나드는 음악으로 두 번째 단합 대회 < NCT Resonance >를 개최했고 행사에 참석했던 23명의 청년들은 올해 다시 각자의 위치에서 교감을 이어가고 있다.

거대한 반향에 공명하는 엔시티 127의 악기는 피리다. 동양풍 사운드와 탄탄한 베이스의 순환은 타이틀곡 ‘Sticker’에서 이들의 오묘한 정체성을 꾸며내는 최적의 요소로, 맹렬한 외침을 담은 ‘영웅’의 프로듀싱과 결을 같이 하면서도 가창에 대비를 두어 또 하나의 실험 데이터를 쌓는다. 랩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들여온 알앤비 보컬은 성대를 긁고 꺾어가며 리드미컬한 멜로디를 주도한다.

단편적인 기교로만 맛을 돋우다 보니 본연의 멋을 상실했다. 단출한 기악 구성에 이렇다 할 변주마저 없는 ‘Sticker’는 태용과 마크의 래핑을 그저 보컬진의 유려함을 견인하는 정도로 활용한다. 단순 파트 배분의 문제를 넘어 엔시티 세계관의 근원인 힙합이 중심에 위치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형국은 앨범 전반으로 뻗어가 피아노가 잔잔히 흐르는 ‘내일의 나에게’ 같은 발라드 트랙의 몰입까지 저해한다. 결과적으로 앨범 커버처럼 멤버 모두가 색을 잃고 만 것이다.

벌어진 이음새를 다시 쫀쫀하게 붙이는 건 냉소를 머금은 메시지다. 데뷔곡 ‘소방차’부터 최근의 ‘Punch’까지 진취적이고 저돌적인 태도로 일관한 이들은 이번 작품에서도 기조를 유지하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한다. 달콤 쌉싸름한 ‘Lemonade’는 세상의 잡음을 시큼한 레몬에 비유해 쿨하게 들이키면서도, 직진 본능에 충실한 ‘Bring the noize’의 질주는 사회를 향해 역으로 노이즈를 발산하며 선명한 스키드 마크를 찍는다. 특히 위 두 곡에서 보컬리스트 재현이 낮은 톤으로 읊조린 랩 파트는 본작의 주요 퍼포먼스로 자리하며 팀의 운용 반경을 넓힌다.

이제 앨범 제목 앞에 항상 붙어있던 ‘NCT #127’이란 스티커는 필요 없다. 1년 반만의 복귀지만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본다는 자신감의 표출이다. 지난 5년간의 활동을 통해 청년들의 평판은 물론 상업적 성과까지 꾸준한 상승세를 타고 있다. 그럼에도 새로움을 갈망하는 문화 기술은 흥행이 아닌 유행을 이끌기 위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개방과 확장으로 영생을 꿈꾸는 그들에게 < Sticker > 역시 먼 미래를 위한 빅데이터에 불과하다.

– 수록곡 –
1. Sticker
2. Lemonade
3. Breakfast
4. 같은 시선 (Focus)
5. 내일의 나에게 (The rainy night)
6. Far
7. Bring the noize
8. Magic carpet ride
9. Road trip
10. Dreamer
11. 다시 만나는 날 (Promis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