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왔다. 웰컴 투 2000년! 얼마 뒤 발매할 정규 7집의 선 싱글인 ‘Bite me’는 데뷔 초 에이브릴 라빈의 모습 그대로를 복각한다. 팝 펑크. 달려 나가는 드럼과 에너지 넘치는 사운드가 그때 그 시절을 소환, 향수 가득한 멜로디를 들려준다. ‘Sk8er boi’, ‘My happy ending’, ‘Girlfriend’ 등 비슷한 질감을 가진 곡들이 연이어 떠오르는 와중 이 귀환이 유독 반갑게 느껴진다. 이별, 섹스를 논하는 가사는 어설프게 사랑을 논하지 않고 강하고 세게 이 만남의 주도권이 내게 있음을 말한다. 늘 그랬듯 끌려가지 않고 영합하지 않고 내 것을 하는 팝스타의 행보가 반갑다.
영국의 뉴 웨이브/신스팝 신생 밴드 페일 웨이브스가 돌연 미국의 2000년대 팝 록 시장을 탐미하기 시작했다. 더티 히트 레이블에서 1975를 이을 차기 그룹으로 부상하던 이들이 북미 대륙으로, 정확히는 캐나다 출신의 펑크 키드 에이브릴 라빈에게로 눈을 돌린 데는 리더 헤더의 영향이 크다.
1995년생 헤더 바론 그레이시는 ‘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히어로였던 에이브릴 라빈을 소환한다. 첫 번째 트랙 ‘Change’부터 펑크 프린세스의 목소리를 빌려온 그는 ‘My happy ending’에 < Let Go >의 어쿠스틱 기타, 퍼커션 조합을 덧대 에이브릴 라빈이 걸어온 약 10년까지의 종적을 크게 훑는다. 라빈을 ‘갓빈’으로 묘사한 ‘She’s my religion’이나 원작과 노래 제목이 정확히 일치하는 트랙 ‘Tomorrow’와 ‘Wish u were here’가 연이어 배치된 점은 말해 무엇하랴. 게다가 앨범 커버를 보라. 무심하게 지나치는 멤버들 사이에서 고고히 서 있는 헤더의 모습은 에이브릴 라빈 그 자체가 아닌가!
앨범은 에이브릴 라빈을 필두로 2000년대 팝 록 스타일의 틴 팝 계보를 차례로 소환한다. 힐러리 더프의 앳된 목소리가 당장이라도 ‘어제처럼!’을 외칠 것만 같은 ‘Fall to pieces’의 도입부나 미셸 브런치의 직관적인 멜로디와 하이틴 감성이 담긴 팝 펑크 트랙 ‘Tomorrow’는 20년 전 아이팟에서나 흘러나올 법하다. 디즈니 채널을 즐겨봤던 90년대생 어른이들이라면 ‘You don’t own me’에서 조 조나스를 뒤돌아보게 만든 데미 로바토의 열창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정말로.
그렇다 해도 페일 웨이브스는 어쩔 수 없는 영국 출신 밴드다. ‘Easy’가 아무리 헤더의 에이브릴 라빈 모창과 어쿠스틱 기타, 파워 발라드 스타일의 드럼 키트가 연주하는 < Let Go >의 10대 감성으로 점철되어 있더라도, 신스팝 밴드의 훅 메이킹 센스는 그대로 드러난다. ‘She’s my religion’ 역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팝 시장을 장악한 영국의 모던록/브릿팝 밴드들의 여린 기타 리프 라인과 마이너한 멜로디가 코러스에 녹아있다.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약 20년의 장르적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었음에도 < Who Am I? >가 단순 모작이 아닌 밴드의 정규 앨범일 수 있는 데는 프로듀서 리치 코스티의 공이 크다. 뮤즈, 푸 파이터스, 포스터 더 피플 등과 작업해온 그는 밴드의 전작 < My Mind Makes Noises >이 주는 육중한 비트감과 흩뿌려지는 듯한 공간감을 보존하면서 신시사이저의 비중을 줄이고 장르적 특색을 위해 드럼의 쇳소리를 강화했다. ‘진짜’ (팝)펑크 앨범처럼 보이게끔 말이다.
지난 몇 년간 틴 팝과 이모, 팝 펑크가 짧게 타오르고 소멸한 그 시대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나, 대부분 단발성이었다. 이모 힙합은 여전히 메인스트림으로 자리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유의미한 성과로는 머신 건 켈리의 앨범 차트 1위 성적뿐이다. 신의 리바이벌이 적극적으로 도모되지 않는 환경엔 아마도 ‘저항정신’과 ‘마초이즘’을 대표하는 펑크(Punk)와 록을 10대 애들이나 듣는 말랑한 틴 팝 따위로 ‘변질’ 시킨 아티스트들에 대한 평론계의 은근한 적개심도 작용했으리라. 그러나 페일 웨이브스는 이 시대를 전면에 내걸고 앨범 한 장을 만들어냈다. 단순히 흐름에 부합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 Who Am I? >는 1975의 그늘에서 벗어나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 뿌리를 발견해나가는 과정, 즉 밴드의 성장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헤더의 선언에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이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히어로 또한 ‘가짜’ 펑크 키드 에이브릴 라빈이라고.
– 수록곡 – 1. Change 2. Fall to Pieces 3. She’s My Religion 4. Easy 5. Wish U Were Here 6. Tomorrow 7. You Don’t Own Me 8. I Just Needed You 9. Odd Ones Out 10. Run To 11. Who Am I?
싱어송라이터 에이브릴 라빈은 약 20년간 활동하면서 10대의 방황과 성장통을 그린 데뷔 앨범 < Let Go >, 소포모어 < Under My Skin > 이후로 뚜렷한 음악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첫 번째 남편이자 팝 펑크 밴드 섬 41의 프론트 맨 데릭 위블리와의 결혼 후 돌연 치기 어린 젊음을 찬양하면서 팝과 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더니, 그 기조는 니켈백(Nickelback)의 채드 크로거를 만나 더욱 괴이해졌다. 데릭 위블리와 만나던 시절 발표한 ‘Girlfriend’는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다. ‘Hello kitty’를 연신 외치던 다섯 번째 앨범이자 셀프 타이틀 앨범 < Avril Lavigne >은 그야말로 늙지 않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2013년에 발표한 5집 이후 약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에이브릴 라빈은 채드 크로거와 이혼했고, 2015년부터 라임병에 맞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그는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가 20대를 지나 처음 발매하는 정규 6집 < Head Above Water >에 영원히 젊음을 숭배할 것만 같았던 스모키 악동은 없다. 물 속에서 버둥거리며 겨우 고개만 빼꼼 내민, 인생의 굴곡을 마주한 여인만이 자리 잡았을 뿐.
틴 팝 소녀는 투정 대신 투쟁을 택했다.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Head above water‘와 생존의 힘을 내면에서 구한 ‘It was in me’, 결국 살아남았음을 외치는 ‘Warrior’는 각각 앨범의 처음, 중간, 끝을 차지하는 굵직한 트랙이다. 음반 전체를 감싸는 이지리스닝 스타일의 웅장한 오케스트레이션 반주는 모든 고난을 이겨낸 34세 베테랑 팝 아티스트의 ‘생애의 의지’를 십분 드러낸다.
< Head Above Water >는 그가 더 이상 철없는 10대 소녀가 아님을 공식화한다. 앞서 언급한 세 곡은 말 그대로 성인의 취향이 담긴 어덜트 컨템포러리 편곡이다. 특히 ‘It was in me’는 영화 <에라곤> 테마곡이었던 파워 발라드 ‘Keep holding on’의 연장선에서 1집 < Let Go >의 감성과 차분한 스트링을 덧입혀 더욱 성숙한 사운드를 들려준다. 그 밖에 ‘Tell me it’s over’는 블루스 리듬과 트랩 비트가 어우러진 컨트리 블루스 트랙이며, ‘Crush’는 소프트 록(AOR) 장르다. 쉽게 말해 거슬리는 부분 없이 귀에 감기는 편안한 멜로디와 느린 드럼 비트가 앨범을 꽉 채우고 있다는 뜻이다.
라빈의 노래는 이미 과거에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에서 꽤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데뷔하자마자 빌보드 싱글 차트 2위에 올랐던 ‘Complicated’는 어덜트 컨템포러리 차트 13위에 올랐고 같은 앨범 수록곡 ‘I’m with you’는 18위, 세 번째 앨범 < The Best Damn Thing >의 ‘When you’re gone’과 ‘Keep holding on’은 모두 30위권에 올랐다. 세대를 막론하고 즐길 수 있는 에이브릴 라빈 특유의 직관적인 어쿠스틱 기타 팝 멜로디 덕분에, 그의 반항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기성 세대 역시 라빈의 노래를 즐길 수 있었다.
문제는 전작과의 사운드 스펙트럼을 공유하는 몇 트랙이 앨범의 모난 돌이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래퍼 니키 미나즈와 함께한 ‘Dumb Blonde’는 치어리더용 응원가나 다름없는 ‘Girlfriend’와 ‘Hello Kitty’의 훅을 계승하는 팝 넘버다. ‘젊음’과 ‘치기’ 대신 ‘편견’과 ‘차별’을 이야기하기는 하지만, 조악한 팝 사운드는 < Head Above Water >의 결을 해친다. ‘Birdie’ 역시 마찬가지.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은 이해하나 3집의 ‘Runaway’처럼 쨍한 고음 때문에 모종의 힘이 느껴지기는커녕 피로함이 누적된다.
너무 직설적인 가사도 민망하다. “난 무너지지 않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을 거야. 난 강한 전사니까.” 전혀 의역하지 않은 ‘Warrior’의 가사다. 한 줌의 은유와 상징 없는 직선적인 표현에 다소 공감하기 힘들다. ‘Dumb blonde’를 통해 (주로 여성에게 적용되는) 외적 선입견을 지적하지만, 평가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점도 아쉽다.
이번 정규 6집은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에이브릴 라빈의 인생이 담긴 작품이다.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젊은 시절을 향한 미련이 있는듯하나, 그는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를 음악으로 풀어낼만큼 내적으로 단단해졌다. < Head Above Water >는 끝없는 사투의 흔적을 용감하게 담아낸 ‘어른’의 이야기다.
-수록곡- 1. Head above water 2. Birdie 3. I fell in love with the devil 4. Tell me it’s over 5. Dumb blonde (featuring Nicki Minaj) 6. It was in me 7. Souvenir 8. Crush 9. Goddess 10. Bigger wow 11. Love me insane 12. Warri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