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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2021 올해의 가요 앨범

2020년대의 추세가 희망차다. 코로나 급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황량한 대지 위에도 여전히 수많은 아티스트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앨범들은 장르와 작법, 하물며 가사의 필압조차 세세히 다르지만, 모두 기세에 꺾이지 않고 본인의 역량을 가감 없이 담아낸 단단한 작품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IZM 선정 2021년을 대표할 가요 앨범 10장을 소개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엔하이픈(ENHYPEN) < Border : Carnival >

아이랜드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는 하이브의 곡 스타일 분배와 CJ 이엔엠의 시각적 역동성이라는 우월적 합이다. 그걸 지반으로 몇 개월도 안 된 신인은 단숨에 ‘기득권’자로 폭발성장을 기했다. 팬덤 ‘엔진’의 가속 페달을 밟아 숨 가쁘게 올해의 신인, 음원 밀리언 셀링, 미 NBC 켈리 클락슨 쇼 출연 등을 이어가며 글로벌 팬들의 번식을 꾀한 결과. 이 두 번째 ‘미니’앨범이 초고속 하사된 4세대 아이돌 타이틀을 굳혀준 ‘맥시’펀치다.

음악의 승리라고 해야 한다. 인트로와 아웃트로에 떠들썩한 예술적 소란을 장벽으로 쌓고 중간에 ‘Drunk-dazed’, ‘별안간 (Mixed up)’ 등 대중그룹다운 들을만한 싱글 넷을 가지런히 배치해 제대로 곡 승부를 걸고 있다. 이를 위해 동원한 도구는 폭넓은 장르분산, 바로 다양성이다. 시대적 명령인 아이돌스런 음악패턴을 따르되 시도, 도전, 변화로 에워싸는 음악선동이 가상하다. 아이돌 수다, 그 상투적 어법 타파가 남았다. (임진모)

지올 팍(Zior Park) < Syndromize >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두운 방, 끊임없이 필름을 구동하는 영사기의 소음이 들렸다. 벽에 맺힌 원형의 무대 위로 그림자는 계속해서 모습을 바꾸며 서로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어딜 둘러봐도 환영뿐인 작은 공간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하게 섞였고 그렇게 탄생한 잔혹하고도 아름다운 장소를 < Syndromez >라고 명명했다. 창조주는 지올 팍. 경쾌하게 삶을 난도질하는 한 예술가의 보금자리였다.

각각의 주제에 맞게 꾸려진 놀이기구가 관람객을 맞이한다. 랩을 버렸다는 농담 섞인 인터뷰처럼 특정 장르에 매몰되지 않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상상력이 중성적 목소리, 음악, 영상 등 한계를 규정하지 않고 ‘지올 팍’이란 아티스트를 양분 삼아 유일한 형태로 조형된다. 그가 화려하게 꾸며낸 세상은 포장지를 뜯어낼수록 깊은 상처를 드러내지만 선홍빛을 띠는 속살마저 찬란하다. 완벽하게 제작된 극의 폐막이 어느 때보다 쓸쓸하기에, 이 포근한 악몽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손기호)

마인드 컴바인드(Mind Combined) < Circle >

힙합, 일렉트로니카처럼 비트 중심의 음악이 득세함에 따라 비트메이커들의 가치는 공고해졌다. 다양한 뮤지션의 리듬을 책임지며 베테랑 프로듀서가 된 피제이는 마인드 컴바인드라는 플랫폼에 올라 조금 더 자유롭게 역량을 펼쳤다. 단짝 진보는 피제이의 비트 위를 유영하며 농익은 기량을 선보였다. 11년 전 발표한 첫 번째 앨범 < The Combination >과 마찬가지로 과정의 즐거움이 양질의 결과물로 이어졌다.

그들의 소리엔 과거와 현재, FX와 리얼 밴드가 교묘하게 교차하며, 장기인 소울과 펑크(Funk)부터 록과 하우스 등 다채로운 스타일이 어우러진다. 변화가 잦은 곡조를 버텨내는 건 정교한 리듬 트랙이지만 섬세한 기타가 돋보이는 ‘Can you understand’와 라틴음악의 즉흥성을 포착한 ‘Purple sky’처럼 힙합 비트 이외의 미덕이 가득하다. 소리와 메시지에 지향점을 고스란히 반영한 ‘Singularity’(특이성)와 ‘Multiverse’(다중우주론)로 마인드 컴바인드의 인장을 단단히 새긴다. (염동교)

이랑 < 늑대가 나타났다 >

한 해를 회고할 때 가장 뾰족하게 튀어나온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듯 요새 흐름에 영합하지 않았고 투명하게 ‘나’의 이야기를 썼다. 중요한 건 그의 시선이 비단 나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를 투영하고, 나를 지나 사회로 가닿는 ‘늑대가 나타났다’, ‘환란의 세대’와 같은 곡은 이 음반이 얼마나 현재를, 현대를, 지금을 찌르고 있는가를 증명한다.

동시에 과감한 터치가 돋보인다. ‘아는 언니들’이란 합창단과 손을 잡고 기이하고 기괴하게 덧붙인 ‘환란의 세대(Choir ver.)’의 코러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그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토해낸다. ‘대신’. ‘빵을 먹었어’에선 앞장서서 목청을 높이고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선 죽음과 삶을 툭툭 말한다. 거침없는 연대와 거리낌 없는 고백으로 올해를 끌어안았다. (박수진)

양진석 < Barn Orchestra >

양진석은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가 아니지만 작곡 능력과 편곡 실력은 그 미진한 보컬을 채우고도 남는다. 10년 만에 발표한 여섯 번째 에피소드 < Barn Orchestra >가 이 주관적인 가설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 각 곡에 맞는 보컬리스트의 초빙과 세미클래식부터 팝, 재즈까지 스며든 도회적인 컨템포러리 음악은 멜로디와 리듬, 화음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처럼 빛난다. 막대한 시간 투자, 소리에 대한 고집, 음악에 대한 그의 자신감은 이 앨범이 정갈하고 세련되게 태어날 수 있는 탄탄한 지반공사였다.

현대사회의 외로움을 여러 형식으로 변조한 수록곡들은 살아있는 생명체이면서 건물 구조물에 사용된 유기적인 원자재다. 양진석은 케이팝과 네오 트로트 열풍에 가려져 한동안 잊고 있었던, 젊은 세대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21세기 한국형 어덜트 컨템포러리 음악을 완공해냈다. (소승근)

최엘비 < 독립음악 >

힙합 오디션 < 쇼미더머니 5 >에서 비와이와 씨잼이 1,2등 자리에 나란히 설 때, 친구인 최엘비는 예선 탈락 후 TV로 결승 무대를 시청했다. 찬란히 빛나는 두 주연에 비해 음지가 익숙했던 조연은 슬퍼하지 않으려 애써 눈물을 감췄다. 그 반짝임에라도 묻어가야 크레디트 어딘가에 이름이 남는 걸 알았기 때문. 하지만 어느덧 20대의 마지막에 다다른 청년은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숨어 살 수 없다. 늘 배경으로 찍히기만 했던 엑스트라는 직접 조명과 카메라를 들여와 시점을 180도 전환시킨다. 주연과 조연의 역전으로 그간 묵혀두었던 응어리를 낱낱이 고백한다.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 깊은 곳을 아리게 찌른다. 스스로를 딸려오는 사은품이나 브랜드 이름을 뗀 무지 티에 비유할 정도로 완전히 내려놨다. 비교와 동정으로 물든 열등감의 서사는 부와 명예를 좇는 작금의 힙합 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같아지기를 포기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 독립음악 >의 주인공은 험난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최엘비이며 그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세대와의 교감을 넘어 시대와 공명하는 앨범, 그야말로 올해 최고의 ‘대중음악’이다. (정다열)

파란노을(Parannoul)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신원미상의 음악가 파란노을이 일으킨 파급력은 거셌다. 잠룡의 일렁임을 일찍이 포착한 곳은 국내가 아닌 해외다. 순간이었지만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은 영미권 슈게이즈 팬들의 큰 지지를 얻어 미국의 음악 커뮤니티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올해 발매한 앨범 중 평점 1위를 기록했다. 소규모 음악가들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플랫폼 밴드캠프에서부터 저명한 음악 비평 사이트 피치포크와 스테레오검의 각광을 받기까지 이 드라마틱한 실화는 언어의 장벽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스스로를 낮추며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파란노을의 패배주의 텍스처는 생생하다. 거친 노이즈와 투박한 가상 악기로 연출한 음압은 포스트 록과 이모코어(Emocore)를 난폭하게 품어내고, 열등감으로 뭉그러뜨린 보컬은 타오르는 화자의 내적 분노를 겨우 삼킨다. 우울감과 외로움으로 범벅된 어두운 터널에서도 끝끝내 탈출구를 발견하고자 한 원시적 울부짖음이 격변의 시대를 관통한다. 2021년, ‘흰 천장’만을 바라보던 골방 외톨이가 주도한 ‘청춘 반란’의 실황. 이제는 더 이상 막연한 동경이 아닌 빛나는 ‘꿈의 다음 부분’으로 넘어간 듯하다. (김성욱)

유라(youra) < Gaussian >

유라는 자신이 음악을 하며 지켜온 ‘개똥철학’을 잘라낸 것이 < Gaussian >이라고 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듯한 단어로 설명했지만, 그의 세계는 조금씩 덜어내지 못하고 한 번에 잘라내야 할 만큼 견고하다. 데뷔부터 지속해온 내면 탐구는 단단한 결정체로 거듭났고 싱어송라이터는 그것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며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부드럽고 흐리게 표현하는 효과를 뜻하는 앨범의 이름처럼 가사는 은유적이나 선율은 또렷하고 그가 전하는 감각은 선명하다. 간결하게 배치된 악기들은 범람하지 않고 제 위치에서 역할을 다하며 그 중심의 유라는 전자음을 가미한 듯한 독특한 목소리로 곡을 이끈다. 최소한의 의미만 전달하는 개인적인 음반에서도 헤이즈와 함께한 마지막 넘버 ‘하양’은 대중성을 드러내며 뮤지션의 넓은 가능성을 제시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를 뒤덮은 연대와 위로의 물결 속에서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침잠의 미학이 돋보였던 앨범이다. (정수민)

아이유(IU) < Lilac >

‘젊은 날의 기억’이란 꽃말처럼 < Lilac >은 아이유의 20대 마지막 순간을 장식한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그를 거쳐 간 모든 것들이 일련의 꽃잎처럼 곡 사이사이로 책갈피처럼 수놓아진다. 그만큼 앨범에는 유독 다양한 맛과 멋이 자유롭게 존재한다. 마치 대중음악가의 소명을 잠시 접어두고 30대를 앞둔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개인적인 염원과 열망을 한데 모아 전부 성취하는 것으로 다음 10년을 위한 에너지를 충전하려는 듯이 말이다.

명확한 선율로 대중성을 고려한 히트 메뉴 ‘라일락’ 사이로, 독특한 영감을 버무린 ‘Coin’이 도발 한 스푼을 첨가한다. 이에 재치 있는 비유를 가미한 ‘Flu’와 ‘어푸’가 각각 가벼운 에피타이저와 디저트를, 차분한 발라드 트랙 ‘봄 안녕 봄’과 ‘빈 컵’이 담백한 뒷맛을 담당한다. 아이유의 과거와 미래를 망라한 앨범이다. 오랜 전성기를 구가해온 아티스트가 여전히 과감함과 노련함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울 뿐. ‘Blueming’이 예고한 푸른 개화는 보랏빛 라일락으로 이제 막 피어난 듯하다. (장준환)

언오피셜보이 & 하이프하이프(unofficialboyy & HAIFHAIF) < 그물,덫,발사대기,포획 >

언오피셜보이는 각성한다. < 쇼미더머니 10 >에서 스스로 밝혔듯 ‘예능캐’로 가벼이 소비되던 과거와 선을 긋고, 진중한 태도로 음악가로서의 인정을 원한다. 그간 익살맞은 리액션이나 화끈한 패션,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스웨그로 더 주목받은 그였기에 솔직히 앨범의 빼어남은 의외였다. 프로듀서 하이프하이프(HAIFHAIF)의 철저한 지원이 빛을 발했고, 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으며, 그 결과 많은 장르 애호가를 자신의 편으로 포획했다.

진가는 다양성과 치밀함에서 비롯한다. 2000년대 힙합의 계승 의지로 낳은 ‘돈내’와 ‘누가왔게’, 화끈한 댄스플로어의 ‘Unofficialboyy pt.2′, 최신 팝 문법의 ‘Mmm’ 등을 한데 엮어내는데 그 흐름은 유려하다. 신예답게 신선하고 동시에 높은 장르적 유연성을 보여준 셈이다. 풋내기 티가 나지 않는 탄탄한 플로우와 중독성 강한 훅(Hook)은 흡인력을 극대화했으며, 재치 있는 입담과 인간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는 가슴 시큰한 메시지는 작가적 성취를 담당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앨범이다. (이홍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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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양진석 인터뷰

과거 MBC 예능 프로그램 < 러브 하우스 >에 출연했던 양진석은 건축가이기 전에 가수다. 1988년 ‘노래그림’이란 4인조 그룹으로 데뷔했던 그는 건축 유학을 위해 팀을 그만두게 됐지만 귀국 후 1995년부터 다시 개인 앨범을 발표하며 음악 생활을 이어갔다. 작품의 성패와 상관없이 꾸준히 작업을 이어오던 그가 10년 만에 정규 앨범 < Barn Orchestra >로 돌아왔다.

양진석이란 이름으로 앨범을 낸 건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6집에선 그의 목소리가 빠져있다. 대중가요에서 가장 중요한 가창을 배제한 작품이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음에도 후배들의 목소리로 채워 넣은 것이다. ‘건축을 음악 하는’ 사람답게 회사 건물 지하에 마련된 작은 공연 공간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다양성 주의자 양진석을 만나 신보의 새로운 접근 방식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송라이터 보다 싱어의 이미지가 강한 분인데 본인의 목소리를 완전히 없애는 파격적인 결정을 어떻게 내리게 되었나요?

몇 년 전부터 음악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음악과 원래 좋았던 음악에 대해 심사위원의 마음으로 나름 정의를 내렸어요. 그 기준을 두고 저를 돌아보는데 제가 작사, 작곡에 노래까지 해버리면 정말 트렌드에서 빗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하루는 < 7080콘서트 >를 보는데 당장 저부터 동의하기 어려웠어요. 저에겐 여전히 스타이신 분들이지만 창법이나 연주, 편곡에서 이미 기성들 외에는 좋아할 수가 없는 구성이었요. 근데 음악은 그런 게 아니잖아요. 혁신적이고 진보적이어야 하는데. 자칫 나도 이 함정에 빠질 수 있겠다 싶었죠.

그래서 처음 들었을 때 ‘컨템포러리’라는 말이 바로 떠올랐거든요. 시대의 호흡, 숨결, 그리고 문법에 맞춰서 이 앨범이 더욱 돋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음악만 했다면 이런 부분을 인지하지 못했을 텐데 건축을 같이 하다 보니까 놓치지 않을 수 있었어요. 내가 혹시 올드하지 않나? 시대의 소리를 못 담고 있지 않나? 크리에이터로서 이런 부분에 대한 강박이 좀 있어요. 최근에 리조트 설계를 맡았는데 리조트는 분양이 안 되면 정말 끝이에요. 소비자는 20대부터 60•7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한데 부모 세대들이 회원권을 사도 아들, 딸들이 안 써주면 리조트는 유지가 안 됩니다. 그래서 모든 걸 만족시키기 위해서 컨템포러리하게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자연스레 음악도 비슷한 관점으로 보게 된 거죠.

노력을 많이 한다고 해도 어린 친구들의 음악을 맞춰 간다는 게 쉽진 않은데 그런 점에서 이번 앨범이 컨템포러리한 감성을 갖게 되는 데 도움을 준 분이 있을까요?

프로듀싱에 함께 참여한 이주원의 힘이 컸죠. 91년생 친구인데 저랑 형 동생 하면서 요즘 음악에 대해 서슴없이 얘기하거든요. 그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주고받고 다시 그 생각들을 바탕으로 같이 작업도 많이 했어요. 제가 멜로디를 만들고 포리듬 편곡 틀을 짜서 지정을 해주면 주원이가 그걸 듣고 요즘 음악으로 해석하는 시스템이죠. 근데 주원이가 이렇게 조미료를 쳐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정말 예술이에요. 어쨌든 저에게 상대적으로 부족한 그들만의 감성을 주원이가 충분히 채워준 거죠.

이번 앨범은 전체적으로 어떤 스타일을 구현하고 싶었나요?

특별한 스타일을 두기보다는 각자에게 맞는 옷을 입혀주고 싶었어요. 그동안 댄스나 발라드를 비롯해서 어린 뮤지션들이 선호하는 곡들을 많이 써줬는데 그때마다 그 친구들의 목소리에 맞게끔 작업을 했어요. 사실 6집에 실린 ‘Late love’는 이미 10년 전에 만들었던 노래입니다. 그때 가이드 녹음을 했던 가수가 토미어인데 이 노래는 아무리 다른 친구들한테 줘도 토미어 외에는 소화를 못 하더라고요.

그런 관점으로 볼 때 작업하면서 가장 잘 풀렸던 곡과 어려웠던 곡은?

별일 없이 진행됐던 건 타이틀곡 ‘고로(孤路)’에요. 80년대 신스팝의 정서를 요즘 사운드로 구현하는 잔나비나 혁오의 음악을 좋게 듣고 있는데 이런 음악을 내가 부르면 너무 촌스러운 느낌이 들어서 어린 친구들을 찾게 됐죠. 사실 탐내는 사람 중에 유명한 분들도 계셨는데 김웅 대표가 기성 가수는 절대 안 된다고, 무조건 새로운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극구 반대를 했어요. 그런데 우연히 가이드 보컬로 참여한 강효준(샴)이 부른 걸 들었는데 딱 이 친구 음악 같은 거예요. 물론 그때는 가이드다 보니까 바로 도장은 안 찍었는데 다른 기성 가수들의 목소리로는 요즘 아이들의 느낌이 안 나와서 결국 효준이가 부르게 됐죠.

반면에 ‘Run run run’은 좀 까다로웠어요. 원래는 제목도 다르고 저를 포함해서 6명 정도가 같이 가창을 한 곡이었는데 하루는 강제규 영화감독님이 오셔서 들어 보시더니 부담스럽다고 하시면서 노래는 아닌 것 같다고 그러셨어요. 그래서 보컬은 빼고 색소폰을 넣어서 녹음을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감독님도 다시 듣고는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주제로 한 차기작에 어울리는 노래라고 하시면서 상의해보고 이 곡을 꼭 쓰고 싶다고 하셨어요.

다른 곡들의 작업기도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앨범에서 가장 와닿는 곡이기도 한 ‘All of us love’는 제가 아내한테 써줬다가 까인 곡이에요. 대중음악을 안 하는 클래식 아티스트이기도 하고 지금은 딸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남편은 밖에서 한가롭게 곡을 만들어 와서 대뜸 연주를 해달라고 하니 기가 차지 않겠어요. 사실 아내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엔니오 모르꼬네의 ‘넬라 판타지아’ 바이올린 연주를 허락받은 연주자예요. 근데 제가 밥 먹으면서 이 얘기를 꺼냈거든요. 아무리 남편이었어도 제가 정중하게 부탁을 했어야 했는데 아내도 슬쩍 한 번 보고는 답을 안 하길래 까였구나 싶었죠. 근데 또 섭외하다 보니까 첼리스트 임은진 씨가 와이프 고등학교 동기였어요. 나중에 물어보니까 따로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크리스 보티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할 수 있는 나팔을 찾다 보니까 유나팔을 섭외하게 되었어요.

‘Second choice’는 사랑과 평화의 ‘장미’를 오마주한 곡인데 제가 펑키(Funky) 한 음악을 듣고 자란 세대라서 제 음악에도 이런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곡에 참여한 커먼그라운드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룹이에요. 연락은 퍼커션을 맡고 있는 조재범 군을 통해서 했지만 주원이가 키보드를 맡고 있기도 해서 섭외가 더 쉬웠죠.

‘잠이 오질 않아’는 처음에 결혼 축가 곡으로 만들었던 노래인데 만들고 나니까 정작 헤어지는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웃음) 서울예대에서 제2의 임재범으로 불리던 동하가 이 곡을 불러서 그런지 애절한 감정이 더 깊어진 느낌도 들고요.

음악과 건축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50세 전에는 거의 이론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은데 최근 들어서 절실히 느낀 건 건축과 음악 모두 철저하게 외로운 작업이라는 거예요. 물론 중간이나 마지막엔 팀워크에 의해서 완성이 되지만 둘 다 스타트를 끊는 건 무조건 혼자 해야 하는 일이죠. 그래서 제가 한 달에 20일 정도는 팀 단위로 움직이고 나머지 열흘은 혼자 있어요. 일주일에 48시간은 가족과도 떨어져서 연락이 안 되는데 이때 책을 보거나 스케치, 음악 작업을 하는 편이죠. 감성과 이성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게 쉽진 않아요. 그야말로 외로운 투쟁이죠.

얘기를 들어보니까 외로움이 덕지덕지 붙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고로’도 외로운 길이란 뜻이고 ‘토요일 오후’엔 혼자, 혼술 같은 단어도 나오잖아요.

말씀해 주시기 전엔 잘 몰랐는데 듣고 보니까 진짜 그러네요. (웃음)

이 음반을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줬으면 하는지?

가장 욕심을 냈던 부분은 가사예요. 개인적으로 요즘 노랫말이 시적인 표현이나 인문학적인 표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이번 작품에선 되씹을 만한 가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멜로디나 편곡 구성이 현대적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긴 힘들겠지만 팝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올드하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진석의 이름과 나이를 모르고 들어도 케이팝에 이런 음악도 있구나 정도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막상 결과물을 본 이후에 본인의 판단이 괜찮았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100% 만족은 있을 수 없죠. 대중적으로나 평단에서 인정받는 문제와는 별개로 어느 정도 제 음악 인생에 있어서 의미 있는 시도는 한 것 같아요. ‘양진석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자체적으로 의의를 두고 있어요.

현대적인 작업을 시도한 만큼 현시대 음악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네요.

매우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BTS만 하더라도 이제는 외국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또 협업하는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악뮤, 아이유, 잔나비, 혁오 같은 팀들은 굉장히 관심 있게 보고 한편으론 존경하기도 해요. 특히 아이유는 더 기억에 남는 게 제가 2010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할 때 게스트로 왔었거든요. ‘좋은 날’ 3단 고음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할 때였는데 그때만 해도 공연 전에 와서 ‘저희 엄마가 양진석 씨 팬이에요’라면서 수줍게 인사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멋진 아티스트로 성장했죠.

이번 앨범 이후에 계획 중인 곡 작업이나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7집에 들어갈 노래를 벌써 8곡 정도 작업해 놨어요. 아마 DJ 리믹스 앨범으로 선보이게 될 것 같은데 2집 < Summer Dream > 때부터 이런 음악을 선호했던 사람이라 어떻게 보면 자아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죠. 코로나가 종식되면 록 페스티벌이 열릴 텐데 그때 꼭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서고 싶어요. 무대에 오르는 것을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울렁증이 있는 건 아니에요. 가면은 그냥 제가 올드 하단 소리를 들을까 봐 단지 외적인 부분을 가리고 싶어서 쓰려는 겁니다.

과거 활동했던 밴드 ‘노래그림’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요?

여전히 너무 좋죠. 얼마 전에도 (한)동준이가 와서 같이 술 한잔했죠. 옛날에도 둘이 술 많이 먹고 그러면 제가 등에 업고 가다가 잔디밭에 쓰러져서 누워 자고 그러기도 했었죠.

1988년 5월에 저희 첫 앨범이 나왔을 때 (이)수만이 형이 MBC 라디오 DJ를 하셨는데 저희 노래가 맘에 드셨는지 수소문을 해서 자리를 마련하셨어요. 모아놓고 찬찬히 보시더니 수만이 형이 저희 제작을 맡겠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싫어요!” (웃음) 수만이 형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런 거죠. 저는 유학 중이라 어려웠고 나머지 멤버들도 애매했어요. 그런데 동준이는 울림통이 좋기도 하고 군 제대를 앞두고 있어서 유일하게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죠.

그러고 나서 곡을 모으는데 그때 김광진이 나타났죠. 당시에 투자 자문 회사를 다니다가 저희랑 연락이 닿았는데 자기가 이대 가요제 나가서 받은 대상 곡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를 들려주는데 곡이 죽이더라고요. 그렇게 광진이도 작업에 참여해서 한동준 1집을 발표했는데 반응은 거의 없었죠. 사실상 한동준과 김광진이 SM 1호, 2호 가수였어요.

변진섭 씨의 ‘새들처럼’을 작곡한 지근식 씨도 빼놓을 수 없죠.

이것도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어요. 어느 날 제가 기타를 치고 있었는데 근식이가 옆에 와서 무슨 코드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듣고는 다음날 갑자기 ‘새들처럼’을 만들어 온 거예요. 처음에는 너무 동요스럽지 않냐면서 살짝 무시를 했는데 화성을 쌓아서 불러보니까 이글스 같은 분위기가 나면서 제법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신촌 크리스탈 무대에서 이 곡을 동준이랑 듀엣으로 불렀는데 그날 진섭이가 온 거죠.

진섭이는 87년에 가요제에서 상을 받고 앨범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그때 들은 저희 노래가 맘에 들었는지 술 마시다가 너네는 판 낼 계획이 없으니까 자기한테 주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고요. 저희도 그냥 알았다고 하면서 가져가라고 했죠. (웃음) 그 당시엔 뭐 저작권 이런 거 잘 신경 안 썼으니까요. 그래서 그때 근식이가 작곡한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같은 곡들을 가져갔었죠.

더 웃긴 건 그 이후에 엄용섭 사장님이 스튜디오로 놀러 오라고 하셔서 갔는데 갑자기 저희 보고 녹음실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야, 너희 코러스 해.” (웃음) ‘새들처럼’ 뒤에 깔리는 코러스가 저랑 동준이 목소리에요. 3도 올려서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 했는데 정작 세션비로 순댓국 한 그릇 먹었어요. (웃음)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그게 100만장이 팔리면서 근식이는 대박이 났죠. 그래서 지금도 ‘새들처럼’ 들을 때마다 ‘어, 저거 내 목소린데.’ 하면서 듣고 그래요.

오늘날의 양진석을 만든 음악은?

어릴 때 들었던 스틸리 댄의 음악은 정말 충격이었어요. 특히 미디엄 템포에 베이스를 둔 록을 좋아하는데 이번 앨범에 수록된 ‘토요일 오후’ 같은 경우도 스틸리 댄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아서 만든 곡입니다. 그리고 비틀스의 퍼포먼스도 크게 와닿았어요. ‘록을 거칠게 하면서 음악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 위대한 밴드였죠. 조금 더 커서는 퀸의 음악을 많이 접했죠. 특유의 동양적인 멜로디는 물론이고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프레디 머큐리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죠.

앞서 이글스도 얘기하셨는데.

이글스도 맞죠. 세션맨 계보에선 정말 리스펙트 하는 팀이 이글스랑 ELO, 토토 정도가 있습니다. 이 세 팀한테 세션에 의한 록 사운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

양진석의 음악은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나요?

제 일기라고 생각해요. 영화 < 원더풀 라이프 >를 보면 주인공이 세상을 떠나고 저승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요. 제가 굳이 이 영화를 언급을 하는 이유는 현시대에 발표한 내 작품이 인기를 얻고 말고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의 노래가 누군가에겐 위로가 되고, 메시지가 되고, 큰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어요. 미디어에 남는다는 얘기는 거의 평생 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양진석이란 이름으로 어떤 앨범을 냈는데 언제 들어도 ‘그 당시에 이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거죠. 건축이 보통 100년, 200년 안에 무너지는 데 비하면 음악은 훨씬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절대 질 낮은 타협을 하면 안 되겠다고 항상 다짐하죠.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정다열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