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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1 버텀라인X락캠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면, 이번에는 오랫동안 업력을 지켜오며 지금의 문화도시 인천을 만드는데 공헌한 장소의 이야기를 담는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인천의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과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이다.

버텀라인과 락캠프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부탁한다.
허정선 : 버텀라인은 1983년에 연 인천 최초의 재즈 클럽이자 대한민국 3대 재즈 클럽이다. 스무 살 때부터 10년 정도 손님으로 오다 너무 좋아서 단골이 되고, 그러다가 스물아홉 살 때 인수를 해서 지금 27년째 운영하고 있다. 옛날에는 라이브 공연을 보려면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시대였다. 왜 우리가 홍대에 가서만 봐야 하냐 생각이 들기도 했고, 이 곳을 둘러보다 공간의 크기와 분위기가 라이브 공간으로 훌륭하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

정유천 : 락캠프는 1997년 부평삼거리에서 시작한 인천 최초의 라이브 클럽이다. 사실 옛 세대의 밴드는 연주할 수 있는 곳이 나이트클럽이나 고고장 같은 밤업소뿐이었다. 거기선 내 음악이 아닌 손님을 위한 음악을 해야 하다 보니 거의 팝송이나 록 음악을 커버해서 연주해야만 한다. 그러던 이제 1990년대 중반부터 인디 문화가 태동하면서 홍대 쪽에 드럭, 프리버드, 롤링스톤즈, 빵 같은 라이브 클럽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남의 음악을 카피하는 것이 아니라 밴드 스스로가 창작한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자리 잡는 걸 보고 인천에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겠다 싶어 설립하게 되었다.

인천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

허정선 씨의 경우 버텀라인의 5대 대표로 알고 있다. 뒤의 빼곡한 LP는 초창기부터 보관해온 음반인지.
허정선 : 세어 보니 내가 5대더라. LP의 경우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양이 많이 늘었다. 거쳐 간 주인들이 다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인수 과정에서 개인이 애장하는 3분의 1은 가져가는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서로가 불문율이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가하면서 하나둘 모았고 지금 80% 정도가 내가 모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초창기와 비교해 봤을 때 다른 점이 있을까.
허정선 : 지금은 무대와 악기, 음향 장비가 구비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공연을 안 했기 때문에 무대가 없었다. 그리고 창문도 없었고. 한 10년 정도 운영하다 밖에 눈이 오는지 비가 오는지 보고싶어서 창문을 내었다. 그전까지는 캄캄한 창고 같았다. 처음에는 한쪽에 의자와 피아노를 두고 조그만 무대를 마련해 시작했다. 이후로 피아노는 그랜드피아노로 바꾸고, 테이블을 줄여 무대 공간을 조금씩 넓히고, 단을 올려 지금의 버텀라인을 만들게 되었다. 27년 동안 눈에 띌 만큼은 아니지만 꾸준히 고치고 다듬어 가고 있다.

버텀라인은 장소가 100년이 넘은 근대 건축물인 만큼, 특유의 빈티지한 분위기가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지.
허정선 : 깜짝 놀란다. 들어오는 입구라던지 바깥에서 외관만 볼 때는 이 공간이 크다는 생각이 안 든다고 한다. 막상 열고 들어왔을 때 뻥 뚫린 공간을 보면 다들 압도되는 분위기가 있다. 처음 여기 손님으로 왔을 때는 창문도 없었기에 아주 깜깜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음악은 아주 크게 나오는데 천장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으니까. 테이블에 촛불 하나씩 두고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점점 시야가 밝아지면서 눈에 하나씩 들어오는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오래된 건물에 천장을 높게 뚫어서 만든 공간이 많지 않았다.

인천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

락캠프라는 이름이 궁금하다.
정유천 : 1960년대 중후반, 정확히는 아홉 살 때부터 부평에서 자랐는데, 당시 부평에는 애스컴이란 미군 총괄 기지가 있었다. 그런데 보통 예하에 있는 부대들의 이름 앞에 거의 ‘캠프’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지금 남아있는 ‘캠프 마켓’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다 보니까 지역의 정체성을 담기 위해서 캠프라는 단어를 썼고, ‘락’이야 당연히 밴드들이 주로 하는 음악이 록이라서 붙이게 되었다. 포병 기지, 보병 기지가 있듯이 ‘락캠프’라는 이름엔 ‘록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기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처음 부평삼거리로 거점을 잡은 이유가 있을까.
정유천 : 과거엔 그 동네를 ‘신촌’이라고 불렀다. 보통 ‘신촌’이라고 하면 무언가가 들어오면서 새로 생긴 동네 정도로 해석이 되는데, 부평 신촌 역시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개발이 시작된 곳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20개가 넘는 클럽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지금은 일반화된 얘기지만 사실 이런 미군 부대와 클럽을 통해 서양식 음악이 점점 우리나라에 자리 잡았고, 당시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부평을 많이 거쳐 갔다. 어떻게 보면 대중음악의 뿌리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에 나 역시 명맥을 이어받아 부평의 지역 정체성을 확고히 다지고 싶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 같다.
정유천 : 물론 있다. 라이브 클럽이 이익을 바라고 하는 업종은 아니기도 하고, 일단 너무 비싸면 운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저렴하면서도 넓은 공간을 찾다가 그때만 해도 외진 동네였던 부평삼거리 쪽을 택하게 되었다. 처음에 자리 잡았던 공간이 한 80여 평 되니까 당시 클럽 중에선 아마 제일 컸을 거다. 웬만한 밴드들이 다 와서 자기는 이렇게 큰 공연장을 못 봤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좌) 버텀라인 전경 / (우) 락캠프 전경

버텀라인과 락캠프 두 곳은 모두 전문가와 중소벤처기업부의 심사를 거쳐 ‘백년가게’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어가게’는 인천시에서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한 점포에게 주는 명칭이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것과 더불어 손님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인천의 세월을 머금은 두 장소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랜 시간을 거쳐간 수많은 음악애호가의 발자국과 응원이 새겨져 있다.

가게를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 뭔가.
허정선 : 비결은 따로 없다. 이건 락캠프 사장님도 마찬가지일거다. 뭐랄까, 정말 자기가 빠져있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못 한다. 사실상 바깥에서 벌어서 여기를 메꿔야 하는 상황이니까.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고 싶다. 살아있는 동안 사람들과 행복한 에너지를 나누는 게 인생 모토다. 내가 버텀라인을 운영한 것만 27년이지만, 제가 여기 손님으로 온 것까지 하면은 사실상 인생을 같이 보낸 거다. 이곳에는 음악이 항상 있다. 내가 인수하기 전부터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이 버텀라인을 운영해왔고, 담긴 추억과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오래 하지 못했을 거다.

정유천 : 지금은 책임감이 있다. 락캠프를 지켜야 나와 오랫 동안 함께 해온 후배들이 설 무대가 남는다는 사명감이 있다. 그리고 나 또한 락캠프가 없으면 어디 가서 내 노래로 공연하기 힘들다. 특히 젊은 층을 위한 록 위주의 클럽이 많다 보니까 블루스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곳이 많지가 않다. 그래서 내 음악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라도 락캠프가 꼭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한 지역적인 이유도 있다. 부평이 클럽의 도시였다는 정체성을 이어가고 있는 유일한 클럽마저 없어지면 부평은 음악도시도 아니고 문화도시도 아니게 되는 거다. 이런저런 이유가 있지만 결론적으론 내가 지킬 수 있는 데까지는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락캠프는 30년 이상의 업력을 충족하지 않음에도, 그 기준을 20년으로 완화시켜주는 국민추천제를 통해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정유천 : 좋아하는 분들이 계셔서 나라에서도 인정해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라이브 클럽은 업종이 따로 없고 법적으론 일반음식점과 동일하다. 일반 업종이 아니면 아예 유흥으로 받아야 한다. 근데 유흥은 손님이 노래하는 거니까 또 다르다. 그러다 보니까 운영에 관한 어려움을 공공기관에 얘기해도 다른 식당과 똑같이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 늘 아쉬움이 컸는데 백년가게에 선정되면서 24년 동안 이색적인 문화 공간으로 활동한 게 헛되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두 곳 다 정말 음악 자체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이 오는 곳 같다.
정유천 : 우선 기본적으로 부평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한테는 음악적인 DNA가 있는 것 같다. 최근에도 ‘에스컴 블루스 페스티벌’에 참여했었는데 공원을 둘러싼 관객 대부분이 50대 이상이더라. 잘 모르는 밴드는 이 사실에 의아해한다. 근데 부평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외국의 팝이나 록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진짜 좋아해서 오는 분들이다. 정말 순수하게 음악을 즐기는 분이 많기 때문에 락캠프도 꾸준히 찾아주시는 것 같다.

허정선 : 우리는 전문적인 재즈 마니아도 오고, 평범하게 음악 듣는 걸 좋아하는 분도 온다. 특히 버텀라인은 신청곡을 받고 있는데, 이 신청곡이란 말에는 본인도 듣고 싶지만 남한테 들려주고 싶은 설렘과 기분이 담겨있다. 나 또한 다른 곳에 손님으로 갈 때는 난해하고 그런 것보다 이런 분위기에서 다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은 음악들을 신청한다.

▶인천 재즈클럽 ‘버텀라인’ 대표 허정선

버텀라인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들으면 비단 재즈만 다루는 공간은 아닌 듯 하다.
허정선 : 최근에는 가요와 팝도 틀어드린다. 물론 모두 틀어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틀어드리려 하고 있다. 예전에는 내가 고집이 굉장히 세서 가요는 절대 틀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과 싸우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화를 내며 나가는 분도 있었다. 지금은 그때 왜 내가 자존심 세우며 그랬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한편 생각하면 여태까지 그런 소신과 고집으로 이 가게를 지켜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혹시 리스트를 살짝 볼 수 있을까.
허정선 : 여기 퓨전 재즈 허브 앨퍼트(Herb Alpert)의 ‘Rise’라는 곡이 있고, (장을 넘기며) 마일즈 데이비드, 쳇 베이커도 있고, 여기에는 콜드플레이와 에드 시런도 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니까 캐롤도 많이 신청한다. 휘트니 휴스턴도 있고, 이글스의 ‘Hotel California’는 아직도 유명하다.

손님에게 곡을 추천해줄 때도 있는지.
허정선 : 추천은 잘 안 한다. 그냥 틀어놓고, 누가 좋다고 하면 알려드린다. 막 들어보세요 하는 성격은 아니라. (웃음) 나는 장사 스타일은 아니다. 주변 친구나 나를 아는 분은 어떻게 이렇게 오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참 불가사의라고 말한다.

가게가 오래된 만큼 국내외를 막론한 뮤지션들이 많이 거쳐 갔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다거나 재밌던 에피소드가 있나.
정유천 : 지금은 해체했지만 포(POW)라는 밴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한 달에 1~2번 정도 청주에서 고속버스 타고 올라와서 홍대에서 한 번, 락캠프에서 한 번 공연하고 내려가던 친구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들이 자기들은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줬다. 일반 직장에서는 공연하게 되면 마음대로 빠질 수가 없으니까 현장에 나가 일을 일주일 동안 하고 그걸 여비로 하는 거다. 봄이나 가을처럼 날씨 좋을 때는 숙소 값도 아낄 겸 그냥 공원에서 노숙하고 오기도 한다고 말하더라. 열심히 하는 밴드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니까. 그런 열정적인 모습 때문에라도 잊히지 않는다.

허정선 : 한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와 트럼페티스트가 기억이 난다. 말은 안 통하더라도 몇 번 오가면서 보다 보니 서로 신뢰가 쌓여서 나중에는 호텔까지 대신 예약해주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끝나고 회식을 하러 근처 감자탕집을 가는데, 같이 갈 건지 물어보니 흔쾌히 좋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걱정했는데 막상 가니 막 뼈다귀를 잡고, 소주를 마시고. (웃음) 그리고 술에 취하면 말이 다 통한다. 처음에는 경직되니 섞이기 힘들어도 어느 순간 믿음이 생기면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다. 뮤지션들과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곳인 만큼 얻을 수 있는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손님뿐 아니라 뮤지션도 단골이 많은 듯하다.
허정선 : 그렇다. 가게 주인과 연주자도 코드가 맞아야 한다. 잘 맞는 뮤지션은 해마다 연락을 주고받는다. 예를 들어 봄에 한 번 했으면 가을에 한 번 하는 식으로.

정유천 : 사실 라이브 클럽이 뮤지션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우리만 봐도 기타, 키보드, 베이스만 들고 오면 사시사철 공연이 되지 않나. 밴드에는 음악 생활의 산소 같은 곳인 셈이다.

혹시 지금의 단골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허정선 : 물론 오래된 공간이다 보니 옛날 단골은 오랜만에 와도 단골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통해 찾아왔는데, 요즘은 관광화가 잘 되어 있고 SNS도 활성화돼서 주말에는 젊은 친구들이나 먼 지방에서 새로운 손님이 찾아오곤 한다. 사실 주말에 와서 월미도 갔다가 짜장면만 먹고 가기 너무 아쉽지 않나. 중간에 공연까지 하나 보고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들리는 것 같다.

허정선 씨와 정유천 씨 두 분 다 부평 출생으로 알고 있다. 부평의 지역적 특성이 삶과 음악에 미친 영향이 있을까.
허정선 : 정말 많다. 내가 막내인데, 언니 오빠까지만 해도 우리 집이 한참 고생을 하다가 나 때부터 조금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집에 전축이 있었고, 또 미군 부대가 바로 옆에 있어서 LP판을 많이 살 수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음악을 끊임없이 듣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바로 옆에 ‘유니버셜클럽’이라는 클럽이 있었는데, 낮에는 밴드 연습 소리가 들려서 쉬는 시간에 계단에 앉아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했다. (웃음) 그냥 음악이 삶에 같이 버무려져 생각지도 않게 늘 같이 있던 것 같다.

인천 라이브 클럽 ‘락캠프’ 대표 정유천

실제로 정유천 씨는 ‘정유천블루스밴드’의 이름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정유천 : 시작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를 하면서 관심을 가졌지만, 음악이 삶이 되어버린 결정적 계기는 군대다. 밴드 활동을 이어가던 도중 군대에 가야 하는 시기가 왔는데 그때 친구가 해군 군악대에서 기타리스트를 뽑는다는 소식을 알려줬다. 그렇게 합격을 해서 기타리스트로 입대를 하게 됐다. 당시에 복무 기간이 35개월, 거의 3년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군대에서 기타만 치다 나왔다. 그러다 보니 음악하고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작년부터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많은 공연 공간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운영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정유천 : 라이브 클럽들은 커 보여도 사실 굉장히 영세하다. 일단 길 가다가 우연히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락캠프의 경우 주로 방문하는 분들이 소수의 마니아라 영업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게 이익을 보는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24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장 컸고, 락캠프가 장소를 계속 이전한 것도 어떻게 보면 그때마다 망해서 상황에 맞춰 장소를 옮긴 것뿐이다. 더군다나 장소 이전 사실을 많은 단골분들이 모르기 때문에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허정선 : 백년가게와 이어가게에 선정되긴 했지만, 코로나 시국에서 문을 닫는 거는 한순간이다. 내가 닫고자 해서 닫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늘 조마조마하다. 사실 지금도 현실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버틸 때까지 버티며 이어갈테지만, 음악도시 인천에 맞게 현실적이고 꾸준한 지원등의 대안이 절실하다.

이런 상황이 참 안타깝다.
정유천 : 일단 코로나 이전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예전 같지가 않다. 어쨌든 관객 수도 많이 줄었고.

허정선 : 그래도 한편으로는 만약 문을 닫게 되면 ‘그래 오래 했다’ 하면서 웃으며 갈 것 같다. 별수없지 않나. (씁쓸한 웃음)

작년과 올해 버텀라인과 락캠프에서 인천 펜타포트 라이브 클럽 파티가 있었는데, 이런 비대면 공연에 대해서 각자의 생각이 듣고 싶다.
정유천 : 솔직히 말하면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다. 관객은 공연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다. 관객이 많지 않더라도 눈앞에 있어야 서로 교감이 생기는데, 없으면 분위기가 하나도 안 난다. 솔직히 공연자로서도 재미없고 공간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도 재미가 하나도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영상을 남기지만 실제 연주가 주는 울림에 비교하면 10분의 1도 전달이 안 된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 밴드나 클럽 둘 다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인다. 대면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취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본다.

허정선 : 사실 공연비나 대관비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버텀라인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공간인데, 사람이 10명이라도 피드백을 주고받아야 한다. 사실 백신 패스나 PCR 검사를 도입하면 되지 않나. 문화예술 방면은 유동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너무 확고한 면이 있다. 눈앞에서 뮤지션과 호흡할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봐야 한다.

더욱이나 정유천 씨의 경우에는 공연 경험이 많으니 크게 다가올 것 같다.
정유천 : 일단 라이브는 사람이 적어도 너무 재밌다. 공연을 보러 오는 분이라면 무조건 반응이 보이니까 그런 재미가 있는 것 같다. 라이브는 라이브다.

최근 코로나 방역 수칙에 따라 영업 시간이 21시로 제한됐다. 소상공인의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허정선 : 공연이 있던 없던 영업시간에 제약을 받으니 너무 힘들다. 평일은 손님을 받을 시간이 안돼서 힘들고, 9시에 문을 닫으니 7시나 7시 반에 공연을 시작하는데 재즈는 거의 7~80분을 진행하니, 공연이 끝나면 다들 정리하고 가느라 바쁘다. 뮤지션들과는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다. 공연은 끝나고 그 느낌을 주고받는 피드벡과 여운을 느끼는 게 중요한데 말이다.

정유천 : 최근 코로나 때문에 1년 가까이 영업을 못 했다. 보통 사람들이 저녁 먹고 공연을 보러 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일찍 시작할 수가 없는 환경인데 영업시간까지 9시로 제한해버리니 정상적인 운영이 불가능하다. 지금 장소로 이전한 건 6월인데 11월까지는 영업도 못하고 임대료와 가게 운영비만 계속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버텀라인과 락캠프를 찾아올 이들에게 가게를 즐길 수 있는 팁을 준다면.
허정선 : 평상시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 오셔서 편하게 음악을 신청하시면 된다. 없는 음악은 틀어줄 수 없지만, 되도록 다 들려드리려고 한다. 서로 소통하면 저 또한 기분이 좋으니까. 요즘에는 CD 없이 음원으로만 발매하는 것도 많아 태블릿을 설치했다. 좀 앉아서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음악을 듣고 또 말을 걸어주시면 음악 이야기나 동네 이야기등을 같이 나눌 수 있다. 주말 공연에는 전국적으로 훌륭한 팀들의 공연이 있다. 또한 공연 소식은 SNS에 늘 올려놓으니 미리미리 예약하시면 된다. 아, 그리고 우리는 철저하게 예매를 기준으로 한다. 예약을 안 해서 오셨다가 그냥 돌아가시는 분들도 계시니 참고해 주시길 바란다.

정유천 : 락캠프는 일단 어떠한 장르에도 제한이 없다. 이름은 록이지만 포크, 블루스, 재즈는 물론이고 전에는 국악 공연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상호에 얽매여서 한 장르만을 고집하진 않기 때문에 다채로운 진짜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MR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옮긴 장소는 관객석하고 무대가 아주 가깝다. 거의 무대가 없다시피 해서 공연자와 관객이 쉽게 교감할 수 있는 장소다. 멀리서 볼 땐 공연을 관람한다는 느낌이 들지만, 가까우면 관객도 같이 공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공간이 작아지면서 생긴 변화도 있어서 이게 현 락캠프 만의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터뷰 :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장준환, 정다열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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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9 쟈니 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아홉 번째 주인공은 부평의 애스컴(ASCOM)에서 첫 음악활동을 시작한 원로 뮤지션 ‘쟈니 리’다.

“나는 음악으로 살다가 음악으로 죽고 싶어요”
1938년생으로 올해 나이 84세. 원로 가수 쟈니 리는 여전히 음악을 즐긴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 회고는 역사를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놀라웠다.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한국에 오게 된 계기, 6.25 전쟁을 견디고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나게 된 일화, 박정희 정권 시대에 그의 노래 ‘내일은 해가 뜬다’가 금지곡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 등…

우여곡절 끝에 1957, 8년도에 ‘배를 타고 노래한다’는 뜻의 극단 쇼보트(Showboat)의 일원이 된 그는 이후 1960년대 당시 유행한 극장쇼 무대를 사로잡으며 인기 가수가 된다. 부평에 자리했던 미 군수지원 사령부(애스컴)는 그런 쟈니 리의 시작을 함께했던 공간이다. 아직은 찬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던 11월 말 종로의 한 라이브 공연장에서 그를 만났다. 전날 있던 지방 공연을 끝내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온 ‘전설’은 어디 하나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이었다. 몇 달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해 3관왕 거며 쥔 일로 이날의 대화를 시작했다.

얼마 전 < 복면가왕 >에 출연하셔서 3연승을 거두셨습니다.
가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2주에 한 번씩 나오는 유튜브 방송(쟈니 리 tv)을 하니까 아마 그걸 보고 연락이 온 것 같다. 3연승을 한 건 어리둥절했다.

섭외 연락이 왔을 때 한 번에 출연 결심을 하셨나요?
사실 고민 좀 했다. 내가 최고 고령자인데 떨어지면 가면을 벗어야 하니까 창피할까 봐. 그래서 처음 가왕이 됐을 때 깜짝 놀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노래를 참 잘하지 않나. 가창력도 풍부하고… 그런데 노래가 맛이 없어. 노래라는 건 ‘맛이 있다’는 게 제일 중요하다. 창작력도 풍부해야 하고.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표곡인 ‘뜨거운 안녕’에 그 맛이 담겨 있어 계속 사랑받는 것 같습니다.
1966년도에 < 뜨거운 안녕 >이 나왔다. 그 앨범과 곡을 들어봐라. 지금 들으면 어떻게 이렇게 불렀나 싶다. 그때 대한민국 가수 중에서 노래를 눈물을 흘리며 부른 건 ‘뜨거운 안녕’ 뿐일 거다. 너무 ‘오버 필링’ 하니까 신세기 레코드에서 내지 말자고 했다. 가수들이 전부 노래를 정박자로 하고 깨끗하게 하고 이랬을 때니까. 근데 나는 그 느낌을 ‘표현’한 게 아니다. 어린 나이에 피난 내려왔던 내가 이제 레코딩이라는 걸 하게 되니까 감동스럽고 앞으로 돈도 좀 번다고 생각하니까 눈물도 났던 거다. 그 감정을 음반에 그대로 옮겼다.

활동명을 ‘쟈니 리’라고 지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국인 양아버지가 ‘쟈니(Johnny)’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쟈니라는 건 외롭고 귀엽고 뭐 그런 뜻이었다. ‘Johnny is lonely boy(쟈니는 외로운 소년)’라는 말도 있던 것 같고. 쟈니는 외로운 거다. 내가 고아 출신이니까. 거기에 내 성인 ‘이’를 붙여서 쟈니 리가 됐다. 양아버지가 나를 ‘슈플라이’라고도 불렀다. 그 당시에 ‘슈사인(Shoe shine) 보이’가 많았다. 미군들 군화 코만 반짝반짝하게 닦아주는 꼬마들이다. 그곳만 반짝반짝하게 닦으니까 파리가 미끄러진다고 해서 만들어진 ‘슈 플라이’가 내 별명이었다.

양아버지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기생이었는데 당시 기생은 일부종사, 평생 한 남자만 만나야 했다. 기생학교에 다니면서 활도 잘 쏘고, 서예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장구도 잘 치는 요새 같으면 탤런트 같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연극배우를 하던 중국 사람인데 금방 집을 떠났다. 어머니가 혼자서 나를 키우셨다. 그러다 1951년도 13살 때 피난 내려와서 1954년에 미국인 양아버지를 만났다. 영어를 귀동냥으로 배우면서 아버지가 피아노를 치시면서 노래하라면 노래도 하고 그랬다.

말씀은 조용조용하게 하시는데 노래하실 때는 정말 호랑이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습득한 거다. 옛날부터 리듬 앤 블루스를 좋아했다. 가수들이 박자에 맞춰서 노래해야 되지만 리듬 앤 블루스는 애드리브도 있고 가창력도 있어야 한다. 아주 헤비한 록 보이스도 많이 쓴다. 또 노래가 때로는 재즈에 가까울 만큼 굉장히 쿨하다. 음악 분야에서는 아무나 못 하는 거다. 마음을 울리는 것도 있고.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조지 벤슨, 마이클 볼튼 같은 사람들은 노래가 거의 애드리브다. 다른 사람 노래를 리메이크해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 음악에 젖어서 노래하다 보면 이성을 잃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가창력이 나오고.

과거에 즐겨 부르셨던 노래도 궁금합니다.
냇 킹 콜, 토니 베넷 같은 스탠더드 노래를 많이 했다. 그런 고운 음악을 부르다가 록 블루스 쪽으로 마음이 가더라. 옛날에 우리가 노래할 때는 ‘극장쇼’라는 게 있었다. 고인이 됐지만 정원이란 가수와 나는 남들이 가만히 서서 노래할 때 우리는 청바지 입고 춤추면서 노래했다. 현재의 아이돌 같은 거였다.

그 시절은 여자들을 대학에 안 보낼 때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공장에 취직해야 했다. 그분들이 거의 다 내 팬클럽이었다. 어른 앞에서 눈도 못 뜨고 그럴 때인데 우리를 소개하면 소리를 지르고 고무신 날라 오고 그랬다. (웃음) 그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아마 제일 처음일 거다. 한바탕 난리가 나서 공연이 끝나면 주인 잃은 고무신이 한 가마니가 됐다.

말씀만 들으면 정말 가수가 천직이셨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꿈이셨나요?
아니다. 우연히 가수가 됐다. 난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꿔본 적도 없다. 옛날에 부산에 ‘하이야리아 부대’가 있었다. 내 양아버지가 별 세 개 달린 미군 장교였다. 그 부대에서 아버지가 피아노치고 내가 노래하고 그랬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수가 된 거다.

그러면서 미8군 무대에도 오르신 건가요?
양아버지가 금방 돌아가시고 그 어린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던 게 없어서 미8군부대를 들락거렸다. 일반 단체하고 미8군 가수하고 다른 점이 뭐냐면 8군에서 노래하는 가수는 영어 발음이 좋지만 일반 단체는 영어가 엉터리다. 8군에서 공연하는 밴드들은 오디션을 보고 등급을 나눴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다.

스페셜 A를 받으면 한 달 정도 공연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미8군에서 나온 사람들은 사회에서 대접을 좀 해줬다. 등급이 높았던 거다. 난 13살부터 양자로 있었고 나름 언어에 소질도 있었다. 조실부모한 내가 학벌이 있었겠나? 언어부터 노래까지 전부 노력하고 직접 터득했다.

미8군에 활동하셨던 거는 그럼…
1957년이었다. 당시에 현미는 무용을 했고 한명숙 씨는 노래를 할 때다. (당시 얘기를 조금 더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한국 가수들이 8군에 들어가면 치즈 샌드위치, 햄버거를 줬다.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맛있었다. 디저트로 파인애플, 바나나도 줬는데 평생 보지도 못한 과일들이었다. 아이들을 주겠다고 이런 음식을 챙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작은 유리병에 담긴 콜라를 그때 누가 먹어봤겠나.

미8군 때 한 캠프에서만 있으셨던 건가요?
오산, 평택. 의정부에도 있었다. 그쪽은 전부 미군 기지니까. 8군 생활할 때는 그쪽을 오갔다.

부평 애스컴에도 자주 들리셨나요?
1957년에 연예계에 입문해서 1959, 1960년쯤에 다녔다. 내가 처음으로 갔던 곳이 애스컴이다. 개인적으로 미8군부 무대에 많이 서진 않았다. 따로 오디션을 보지도 않았고. 양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쟈니? 싱!”하면 내가 노래를 불렀다. 워낙 어릴 때니까 그 사람들의 귀여운 장난감이었다. (웃음)

공연료가 꽤 높으셨을 것 같아요.
몇 푼 안 됐다. 당시에 단장이 지금의 기획사나 다름없다. 그가 모든 걸 주관했고 공연해서 받은 돈을 자기가 거의 다 챙겼다. 얼마 안 줘도 투덜거릴 수 없었다. 얘기하면 그냥 잘리니까. 피곤하고 살기 어려울 때였다. 어디 가서 밥 한 그릇 먹을 수도 없었고 누구나 돈 돈 돈 했다. 딱히 돈을 못 받아도 그저 밥 한 그릇 얻어먹고 그 힘으로 노래 불렀던 시기다. 내가 그렇게 힘들게 가수가 됐다.

1960년대에는 ‘극장쇼의 황제’라고 불릴 만큼 큰 인기를 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극장에 간판만 붙여놓으면 정말 소동이 났다. 내가 1960년도에 도요타의 빨간색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알랑 드롱처럼. 넝마주이 같이 낡은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무대에 올랐다. 핸드마이크가 없을 때라 스탠드 마이크를 썼는데 그걸 그대로 들고 객석 앞까지 나가고 그랬다.

오랜 기간 작자 미상의 민중가요로 알려져 있던 전인권의 ‘사노라면’이 선생님의 노래였습니다. 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히지 않으셨나요?
원제는 ‘내일은 해가 뜬다’이다. < 뜨거운 안녕 > 음반에 같이 있다. 1966년 즈음 방송국에서도 많이 틀고 꽤 알려졌던 곡이다. 그런데 갑자기 금지곡이 됐다. 그때는 툭하면 금지곡이 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절에 내가 ‘해가 뜬다’고 노래를 하니까 역적모의로 비쳤나 보다. 뭐 밑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 먹고 살라고 그런 거겠지만.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다가 미국에서 돌아오니 민중가요로 불리고 있더라.

공식적으로 오리지널 가수라고 밝힌 게 2000년대 초쯤이었나요?
KBS에서 내 음반 < 뜨거운 안녕 >을 가지고 집에 왔다. 피디가 “여기 ‘내일은 해가 뜬다’라는 노래가 누구 노래예요?”라고 묻길래 전인권 노래가 아니라 내가 1966년에 많이 불렀던 노래라고 말했다. (정확히는 2004년 가요평론가 박성서가 소장해 오던 < 쟈니 리 가요앨범 >을 공개하며 주목받았다. 이 음반에 ‘내일은 해가 뜬다’가 실려 있었고 이 곡의 원작자가 쟈니 리라는 것이 밝혀졌다 -편집자)

인터뷰는 종로 3가에 위치한 ‘청춘극장’에서 이뤄졌다. 쟈니 리는 이곳의 전속 뮤지션이다. 극장쇼를 많이 했던 그가 지인과 직접 머리를 맞대고 5개월 전쯤 이 공간을 차렸다. LP판이 가득했고 음악을 틀 수 있는 디제이 부스도 있었다. 아, 반짝거리는 일명 ‘사이키 조명’이 화려하게 무대를 비추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연장에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중장년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형님”, “선생님”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몇 달 전 ‘바보 사랑’이라는 싱글을 낸 쟈니 리는 여전히 청춘이며 늘 그랬듯 잘 나가는 가수였다.

요즘 한국 가수들이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한창 활동하실 때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셨나요?
그때는 미국 가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왔다고 하는 사람들의 90%는 뻥이었다. 옛날에 < 삼손과 델릴라 >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 내용을 라스베이거스에서 쇼로 만들어 공연하는데 영화에서처럼 건물이 무너지고 조명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놀라운 곳이 미국이었으니까 당시에 미국에 진출하는 건 꿈도 못 꾸었다. ‘내 음악에 버터 냄새가 좀 난다’라는 걸로 만족했다.

그럼 현재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 같은 손자뻘 되는 젊은 친구들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걸 보시면 어떠세요?
대단하다. 인터뷰하는 걸 봤는데 영어도 엄청나게 잘하더라. 자기들이 텔레비전 보고 배운 영어라고 하는 데 정말 천재구나 싶다. 지금 우리나라를 세계적으로 알린 게 아이돌 가수들이다. 방탄소년단이나 다른 아이돌 가수를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홍보가 된 거 아닌가.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에서 가수 인순이가 선생님의 ‘뜨거운 안녕’을 리메이크한다고 합니다.
인순이 노래를 좋아한다. 가창도 좋고 무엇보다 소울이 남다르다. 약간 재지하게 리듬도 조금 바꾸고 하면 곡의 맛을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음반을 발매하면 내게도 꼭 보내 달라. 인순이에게는 기대한다고 전해주고. (웃음)

60년 이상 노래를 하셨습니다. 선생님께 음악이란 무엇일까요?
음악으로 죽고 음악으로 살고 싶다. 보통 가수들이 은퇴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는 생각이 다르다. 왜 하고 싶은 음악을 안 하고 중간에 나이 먹었다고 멈추는지. 조금 더 노력하면 되는데. 나는 평생 노래하고 싶다.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고 즐겁다. 내가 여든이 넘었는데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고? 노래 덕분이다.

젊은 노장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빛이 바랬을 법한 기억들도 연도를 포함해 정확하게 들려줬고 필요할 땐 서슴없이 노래를 불렀다. 단단하고 탄탄한 경험을 간직한 쟈니 리의 이야기에선 꼿꼿한 기세가 느껴졌다. 공연장을 떠나려 하자 몇 번이나 식사 한 끼를 대접하고 싶다던 쟈니 리. 이 따뜻한 말의 건넴을 받으며 이것이 어쩌면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일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영원한 가수 쟈니 리와의 만남은 뜨겁고도 뜨거웠다.

인터뷰 : 소승근, 박수진, 정다열, 장준환
사진 : 정다열
정리 : 박수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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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6 윤항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 록 밴드의 레전드 ‘키보이스’ 출신의 톱가수 윤항기다.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이 말해주듯 국내 초창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밴드 ‘키보이스’는 1960년대 부평의 미군수지원사령부 애스컴(ASCOM) 등 미군 부대의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키보이스하면 떠오르는 이름 윤항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활동, 솔로 히트 넘버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는 어떡하라고’‘장밋빛 스카프’ 등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동생 윤복희가 불러 국민 위로곡이 된 ‘여러분’의 작곡자도 바로 윤항기다. 선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작사, 작곡, 노래, 연기 뿐 < 춤추는 함대 > 등의 뮤지컬 기획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위상도 구축했다. 한국 록의 씨앗을 뿌린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는 정부가 주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윤항기는 애스컴을 가리켜 팝음악에 꿈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우리 대중음악을 일궈낸 ‘K팝의 중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 미군 클럽무대를 선회하며 뿌린 당대 뮤지션들의 열정을 현 대중음악의 씨앗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패기 넘치던 당대의 가수 생활과 목회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여러분’을 포함해 장대한 60년 음악 인생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이번‘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옛날에 장관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훈장은 처음이다. 요즘 활동을 많이 안 하다 보니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이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추천했다고 한다. 고맙다. 수상자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된 역사적 공로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날 수상 소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데뷔 60년 차고 처음 1959년에 미8군에서 김희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 나는 남석훈이라는 가수하고 로큰롤 가수로 활동했다. 남석훈은 나중 완전히 빅스타가 되었고. 그때 미8군에서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드럼도 배우면서 1963년에 한국의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그걸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우리가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록의 전성기가 생기고. 그게 공로이자 자랑거린 것 같다.

키보이스 결성과정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키보이스가 1963년에 데뷔해서 1964년에 ‘정든 배’가 나왔다. 그게 나왔을 무렵이 한창 비틀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때다. 우리도 악기를 다루는 팀인데 비틀스도 그러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처음 우리가 그룹을 만들었을 때는 비틀스를 모방한 게 아니라 실은 비치 보이스(Beach Boys)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비치 보이스를 보고 한국에서도 저런 그룹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그룹이 키보이스다.

선생님은 나중 솔로 활동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장밋빛 스카프’‘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등 잊을 수 없는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요. 그런데 왜 그룹 활동을 할 때는 자작곡을 안 만드신 거예요?
좀 전 얘기한 것처럼 내가 데뷔했을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위대한 작곡가이신 이봉조 선배님 등이 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실 때였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분들도 작곡 활동을 안 하셨다. 나중에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부터 이봉조 선생님도 작곡을 하셨고 김희갑 선생님도 뒤에 시작하셨다.

그 시절 작곡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1964년에 낸 키보이스의 ‘정든 배’라는 노래를 쓴 것도 김영광이라는 작곡가다. 그 친구가 우리랑 친구다 보니 우리한테 이 노래 같이해보자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덕분에 앨범도 내게 됐다. 물론 당시 김영광이라는 친구가 작사 작곡을 할 때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든 곡은 1969년에 쓴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이어서 나온 곡이 ‘목이 메어’였고… 같이 1969년에 나왔다.

자작곡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요?
사실 한국 뮤지션을 보고 작곡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도 번안 가요를 많이 할 때였다. 우리도 김영광 곡을 빼면 다 번안곡이었고. 그래서 차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우리 곡을 조금 해야 하지 않나’, ‘외국 곡 못지않은 우리 곡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 왜냐하면 나는 또 시작이 외국 노래를 부른 팝 싱어였고 록 가수였으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목이 메어’는 그런 외국 밴드의 곡을 많이 커버하면서 이제는 번안곡에서 벗어나 우리 곡을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쓴 곡이었다.

키보이스 활동하실 때도 이미 솔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솔로로 나온 게 몇 년도였나요?
키보이스에서 1969년에 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룹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키보이스로 할 때는 내 이름을 많이 알리지 못해서. 또 그 당시는 월남으로 가는 게 붐이었는데, 나한테도 월남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쇼를 하기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다.

그 팀이랑 함께 1년간 월남에 갔다가 한국 들어와서는 팀으로 처음 발표한 곡이 ‘고고 춤을 춥시다’였다. 그게 1971년이었다. 그게 나중에 희귀음반으로까지 올라갔다. 완전한 로큰롤 송이었다. 한 곡을 가지고 끊지 않고 계속 연결, 연결해서 라이브를 30분인가 연주를 했다. 그게 음반으로 나온 거다.

선생님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때는 1973년의 ‘나는 어떡하라고’였어요. 그 곡도 그렇고 이후 ‘장밋빛 스카프’도 그렇고 분명 록을 하셨는데 당대의 트렌드인 포크송을 의식하셨는지 ‘록 + 포크’ 스타일이었어요. 록을 중심으로 주변 장르와의 퓨전을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다. 거기에 추가로 트로트도. ‘장밋빛 스카프’가 그렇지 않나. 사실 그때는 본래 윤항기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빨리 대중화할 수 있는 걸 원했다. 키브라더스를 하면서 발매한 ‘목이 메어도’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경우에는 마니아들 사이에 알려졌다. 돌아가신 DJ 이종환 선생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라디오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시기도 했고 아예 지금도 살아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윤항기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종회관인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도 했다. 그게 방송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오픈 기념 축하 공연이었을 거다. 그 덕에 윤항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키보이스 때부터 인연이 있던 신세계 레코드 간부가 와서 우리가 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그룹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솔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73년에 ‘나는 어떡하라고’가 나오고 그 후 1975년에 나온 곡이 ‘장밋빛 스카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키보이스 활동할 때 썼던 곡인가요?
그건 키보이스 때 나온 게 아니라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만들고 월남에 가서 만든 곡이다. 월남에서 만들고 한국 와서 키브라더스 음반이 나오기 전에 그걸 고고클럽에서 연주했다. 그 후에 키브라더스 데뷔 앨범, 아까 말한 1971년의 < 고고 춤을 춥시다 >에 수록됐다. 그리고 그 곡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작업하던 분이 나에게 와서 펄 시스터스가 그 노래를 취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음반이 나오기 전에 펄 시스터즈 버전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먼저 나왔다.

‘장밋빛 스카프’는 어떻게 쓴 곡인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이 서울 스튜디오에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앨범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앨범에 수록할 곡 수(數)가 딱 한 곡이 모자랐다. 그날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한 노래가 모자랐던 거다. 가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멜로디가 아닌 가사가. 그게 또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인데, 1960년도 후반에 내가 좋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썼다. 당시에 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그 여인을 찾아서 전국을 미친 듯이 헤매 돌아다니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스케줄도 펑크 내고 그랬던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갑자기 홍콩으로 사라졌다고 기사가 나고. 당시 스캔들이 많았다. (웃음) 어쨌든 불현듯 그 생각이 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앞에 그 테마가 잡혔다. 그래서 그냥 부랴부랴 도착하자마자 멤버들은 스탠바이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막 썼다. 그래서 그 곡이 가사가 짧다. 그다음은 이제 멜로디를 써야 하는데, 어떤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안 나오고, 그냥 급하게 되는대로 가사에다가 써 붙인 멜로디가 그 뽕짝 스타일의 멜로디였다. ‘쿵짜작∼ 쿵짝’. 사실 그 멜로디의 영감을 받은 건 조영남 노래의 ‘불 꺼진 창’(이장희 작사 작곡)이었다. 나중 금지된 곡이다. 그 멜로디랑 리듬이 생각나더니 이 가사에 그런 스타일의 선율을 입혔다. 그게 또 운율에 딱딱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스카프’는 한때 노래방 애창곡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있지만 부르기 좋은 곡조이기도 해서인 것 같아요.
아주 쉽다. 키브라더스 앨범으로 나온 곡인데 그 노래가 처음 수록됐을 때는 타이틀이 아니고 밑에 깔려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라디오 쪽으로 갔는데, 라디오 측에서 앨범 전체를 들어보더니 타이틀곡보다는 밑에 있던 ‘장밋빛 스카프’가 더 좋다는 거였다. 동아방송(DBS)의 이해성 PD가 찾아내 거기서 틀기 시작하면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라고’는 KBS 가수왕상의 영예를 준 곡이죠?
맞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화로도 나왔었다. 내가 주연을 맡았었고. 그래서 내 경력에 보면 영화배우라고도 나온다. (웃음)

이후 실세를 장악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가 나왔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을 무렵이라 ‘전두환 송’이라고도 불렸지요?
그렇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신군부가 그런 밝은 노래, 희망적인 노래가 아니면 다 금지시켰다. ‘장밋빛 스카프’도 한때 금지가 됐었으니. 가사가 ‘오지 않을 사람을…’ 막 그러니깐 전(前) 정권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말도 있었고.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1983년 히트곡 ‘이거야 정말’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가사도 심상치 않았고.
엄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가사를 사계절에 빗대서 참 잘 만든 노래였다. 

윤항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전 국민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러분’이지요. 윤복희 노래로 남매의 완벽한 협업을 선사했는데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나요?
사실‘여러분’을 만들고 난 후였다. 그전에는 그냥 동생이랑 집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믿음 없이 약간 강제적으로 믿은 거고..  

‘여러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신앙에 들어가셨던 거군요. ‘여러분’은 역사적인 명곡입니다. 선생님은 그 곡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는 곡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저런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그 이전에서부터 내가 닦아온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74년에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 제1회 한국 가요제 >에서부터 곡을 출품했었다. 그게 한국 최초로 열린 국내 가요제였는데 그때 곡이 ‘외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때 대상을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대상을 받고 내 곡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가요제가 유행이 되면서 매년 가요제가 있었다. MBC 가요제, TBC 가요제 등등. 모든 가요제에 빠짐없이 출전 곡을 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라는 곡도 나오고 ‘바늘과 실’도 나오고, 정은희가 부른 ‘누구 없소’까지. 다 가요제 참가곡이다. 결론해서 내 나름의 내공을 쌓아왔다고 할까. 1979년 ‘여러분’이 그냥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라 그 이전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약간 가스펠적인 터치가 있었어요.
멜로디는 그냥 팝 발라드인데 아무래도 가사 때문일 거다. 그 곡은 내가 동생의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쓴 곡이기도 했다. 오빠로서 동생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그때 윤복희가 광신자라고 할 정도로 신앙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모티브를 미리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아주 좋아했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가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2011년 임재범이 < 나는 가수다 >에서 불러 ‘여러분’이 재(再)유행했지요. 그 곡을 듣고 어떠셨는지?
그 곡이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30년 만에 ‘여러분’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었다. 윤복희가 부른 것과는 또 달랐다. 한창 ‘여러분’ 터지면서 인기를 얻을 때 임재범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와서 나한테 간증을, 신앙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한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인데 그때 많이 소개된 것처럼 정말 말을 더듬으셨어요?
엄청 더듬었다. 나중에 커서 활동하면서도 더듬었다. 물론 희한한 게 노래를 할 때는 말을 안 더듬었다. (웃음) 말더듬이가 고쳐진 게 성직자가 되면서부터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나아진 거로 생각한다.

한때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한창 화제였던 < 춤추는 함대 >도 선생님이 기획하셨죠?
그렇다. 그때 내가 키보이스로 미8군에서 패키지 쇼를 할 때는 코미디도 하고 다 했다.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뮤지컬 기획도 했으니 ‘만능’이란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으신다면.
한 곡으로 압축하자면 역시 ‘여러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윤항기를 만든, ‘여러분’ 같은 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다. 내가 처음 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윤항기다운’ 곡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거야 정말’ 등등 다른 곡도 많지만 진짜 내 본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목이 메어’, ‘장밋빛 스카프’ 같은 노래들이다. 

키보이스 때부터 전국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셨는데, 부평 애스컴에 대한 기억은 어떠세요?
미 8군 쇼하는 분들에게 애스컴은 가장 큰 무대였다. 가장 클럽이 많은 데이기도 했고. 서울하고도 가까운 데다가 그 당시에 미 8군 기지 보급창이다 보니 거기서 쇼를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거는 아주 풍족했다. 그때가 한국에는 콜라도 모르고 햄버거도 없을 때인데 애스컴에서는 물자가 풍부하니 쇼 단체에게 미군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줬다. 그러니까 다른 부대 가는 거보다 애스컴 스케줄 잡히는 게 좋았다. 그날은 이제 가방 들고 가는 거였다. 먹을 거 챙기러. (웃음)

한창 애스컴 클럽무대에 서셨을 때가 1964~1966년 즈음일 텐데요.. 당시 멤버가 윤항기, 옥성빈,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이었죠. 그때 선생님은 드럼을 치셨는데 노래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그때는 거의 다 같이 했다. 혼자 솔로로 하는 거는 (차)중락이가 한 ‘Mr. Tambourine man’ 정도고 그거 말고 나머지는 다 함께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드럼 치면서 노래한 사람이 나다. 그거를 우리가 ‘쎄시봉’에서 하는 걸 보고 나중에 또 드럼 치면서 노래를 한 가수가 배호다.  

키보이스 때 가장 기억나는 곡은요.
역시‘정든 배’다. 또 아이러니한 게 키보이스는 분명 록 그룹인데 그 곡은 또 완전 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게 뽕이 아니었으면 히트 못 쳤을 거다. 작곡가 김영광이 그걸 노렸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도 같은 앨범 수록곡이었는데 실은 그게 타이틀곡이었다. ‘정든 배’는 밑에 깔린 노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취입해서 ‘정든 배는 떠난다’로 내기도 했고.  

애스컴 클럽 공연에서 미군들 앞에 노래할 때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나요?
다 팝송이었다. 비틀스 초기 곡들은 거의 다 연주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A hard day’s night’ 등등. 비치 보이스도 했고.. 

미군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그때‘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미국 가수들 모창을 많이 했었다. 그때 내가 레이 찰스(Ray Charles)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모창을 하고,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 차도균이 팻 분을 했다. 특히 내가 레이 찰스랑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할 때는 미군들이 자지러졌다. 거의 졸도 수준이었다. (웃음) 일어나서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랑 ‘Hello, Dolly’였는데 다 까무러쳤다.

부평 애스컴의 우리 음악계에 남긴 의미는 뭘까요?
애스컴은 우리 키보이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록 음악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모이고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동두천 문산은 멀었고 부평은 서울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K팝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팝음악을 시도했던 곳이고 그 음악들이 우리 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선생님에게 음악은 뭐였을까요, 대중에게 윤항기의 음악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나는 팝 음악을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거다 보니. 그래서 그냥 음악을 죽기 살기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오다 보니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앞으로 내가 음악인으로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바를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곡을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윤항기의 곡은 거의 다 그 당시 나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라이프 뮤직(Life Music)’이 아닐까. 그걸 또 대중이 동의를 해주셨다. 그 삶을 인정해주셔서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해준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신현태,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