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이 꾸준히 ‘내 것’을 선보인다. 데뷔 이래로 명확히 자기 구역으로 끌어온 아니, 자신의 것으로 장르화한 사극풍의 노래를 이번에도 들고나왔다. 강한 힘을 지닌 피아노, 곡의 진행에 박진감을 불어넣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풍부한 감정의 보컬, 매력적인 서사가 뒤엉켜 매끈한 싱글이 탄생했다. ‘호랑이에게 해를 입어 죽은 귀신’이란 다소 섬뜩한 ‘창귀’ 설화를 재밌고 탄탄하게 풀었다. 안예은의 사극풍 노래는 여전히 건재하다. 익숙한 것의 반복보다는 깊고 구체적인 서사가 그의 음악적 감각을 대변한다. 젊고도 고전적인 이 노래에 ‘안예은’의 이름이 또 한 번 신선하게 걸린다.
케이팝 스타로 눈도장을 찍고 2017년에 방송된 드라마 < 역적 > OST 수록곡 ‘홍연’과 ‘상사화’로 알려진 안예은은 개성이 뚜렷한 목소리와 재능 있는 프로듀싱으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싱어송라이터이다. 사극 OST에서 들려준 화려한 현악기와 꺾어 부르는 창법뿐만 아니라 2017년도 음반 < 一日(일일) >에서는 힘을 뺀 보컬로 고전적인 이미지를 탈피해 대중과의 접점도 찾았다.
여러 시도 끝에 자신만의 장르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그는 사극 풍의 ‘홍연’과 ‘상사화’, 무도회가 떠오르는 이국적인 < 일일 > 수록곡 ‘Little kingdom’ 스타일을 이번 타이틀곡 ‘출항’에서 시도했다. 피아노의 크레셴도(점점 세게)가 떠나는 배의 시작을 알리고 최근 케이팝에서 많이 활용하는 뭄바톤 리듬 위를 질주하는 현악기가 고전적인 아름다움에 현대적 새로움을 더한다.
화려한 소리의 수록곡들과 달리 피아노와 보컬만으로 구성된 ‘항해’는 경상도 민요 ‘뱃노래’의 멜로디를 차용해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한탄한다. 전작 ‘능소화’의 코드를 변주한 ‘난파’에서의 고음은 몰아치는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배를 이미지화 하며 ‘끝이 보여요’라는 가사는 ‘항해의 끝’과 ‘인생의 끝’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응축된 감정이 폭발하며 절정을 이루는 하이라이트.
< 섬으로 >는 서사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싱어송라이터의 역량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흡입력 있는 구성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가사는 그의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다양한 결말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개성파 뮤지션 안예은의 이번 앨범은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다지기 위한 도약점이다.
안예은의 폭은 넓다. 사극 OST를 통해 널리 사랑받은 ‘홍연’, ‘상사화’ 같은 노래가 주는 짙은 인상으로 인해 그의 음악적 토양을 그 언저리로 한정 짓는 사람이 많을지라도 그게 결코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앞서 서술한 사극에 잘 어우러지는 화려한 현악기와 쨍한 보컬을 강조한 곡을 쓰고 발라드를 쓰고 후크송을 쓴다. 음악이 주는 느낌에 따라 시대적 배경을 그려보자면 그의 가용 범위는 고대와 현대를 넘나든다.
일정 부분 이 다양성이 안예은 표 앨범의 집중도를 흩으려 왔다. 허나 2년 만에 발매된 이번 정규 3집에 또다시 반복되는 이러한 다양성을 마주했을 때 이는 더 이상 응집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머물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것을 뛰어넘는 싱어송라이터의 기질이 살아 숨 쉰다. 비슷한 장르에 따라 세 묶음으로 뚝뚝 끊어 구성을 나눴는데 이게 각각 저마다의 자리에서 쫀쫀하게 제 역할을 해낸다.
‘속삭임의 회랑’은 안예은의 전형이다. 현악기로 선율을 박차고 나가며 활강하듯 현을 타고 오르는 멜로디와 상상력을 가득 담은 가사가 사극의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타이틀 ‘Kakotopia’는 한 술 더 나간다. 디스토피아를 형상화한 곡이라더니 과연 팽팽하게 잡아 당겨 진 기타 줄 마냥 질긴 고음이 화려하게 곡을 잡는다. 재즈적인 피아노가 서사를 끌고 가는 ‘도깨비’ 역시 마찬가지다.
2막은 현대적인 발라드다. 고독한 내면의 슬픔을 풀어낸 것만 같은 ‘꿈’은 피아노를 중심으로 ‘모두의 시선이 차게 꽂힌다.’ 노래하고 연장 선상에서 ‘배’는 이러한 감성을 정점으로 끌어 올린다. 얼핏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노래 같으나 쉬이 그 화살이 자신으로 향하는 게 느껴지는 이 곡은 섬세한 가사와 점점 확장되는 감정선이 일품인 이 음반의 화룡정점이다. ‘난 뭍으로 가고 싶어 / 항해를 끝내줄래’란 글에 응축된 외로움이 안예은에게 고착된 어떤 인상의 제약을 풀어낸다.
끝으로 후크. 지난 정규 2집 < O >처럼 음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동요같이 쉽고 따뜻한 노래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의 유쾌함을 대변한다. 소포모어에서 ‘홀로봄’이 그 역할이었다면 신보에서 그 자리는 ‘문어의 꿈’과 ‘품행제로가’ 맡는다. 이렇듯 구성만 놓고 보면 폭은 넓고 주제는 많고 음반을 꾸린 얼개 자체도 계속해서 과거와 반복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이 형형색색의 찡함이 모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 쓰고 잘 부른다. 허물없이 벗겨놓은 자유로운 이야기와 그가 사용하는 음악적 도구들이 꾸지람에도 꿋꿋이 제 역할을 해냈다. 여기서 안예은의 세계관을 본다. 그의 당찬 서사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