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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허달림 인터뷰

‘달림’이란 이름처럼, 음악만 보고 달려왔던 만큼 스스로를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늦은 나이에 데뷔한 가수 강허달림은 2013년 만혼(晩婚)의 시기에 배우자와 아이를 맞이했고 몇 년 뒤엔 인연의 출발지인 제주도로 거처를 옮겨 살뜰히 가정을 꾸려 나갔다. 모든 날이 행복으로 물들진 못했다. 딸을 거울삼아 돌아본 회고의 육아 기간은 창작이 불가할 정도로 삶의 가치관을 흔들었고 음악 활동은 자연히 뒤로 밀리게 됐다.

고장난 감정선을 돌려놓기까지 12년, 기나긴 회복기를 거친 3집 < Love >는 체념과 포기로 일궈낸 결실이다. 부정적인 정서가 아니다. 마음 비우기를 통해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드리우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그는 따스한 포옹과도 같은 휴먼 터치, 즉 사랑을 노래한다. 2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 내내 호쾌한 웃음이 떠나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위로를 상회하는 어루만짐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날의 긍정 가득한 에너지가 당도하길 바란다.

정규 앨범으로는 12년 만에 공개한 작품이다. 공백이 길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20대에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고 그게 30대에 접어들면서 나만의 멜로디로 발현됐다. 2집까지 발매하며 나름의 스타일을 정립했는데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갖게 되면서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의 틀이 조금씩 무너졌다. 문제를 알면서도 스스로 정리가 되지 않아 도저히 곡을 쓸 수가 없었고 결국 곡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10년, 정규작 발매까지 12년이란 공백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늘 위로의 음악을 해왔음에도 3집은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개념이란 생각이 든다. 어떤 방향으로 앨범을 구상했는지.
의도나 콘셉트를 가지고 작업해 본 적이 없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이전과는 다른 사운드나 코드적인 욕심은 있지만, 막상 곡을 쓰기 시작하면 그런 생각들이 다 없어진다.

대신 이번 앨범은 한 편의 그림을 보고 감명받아 작업에 착수하게 됐다. 원래 친분이 있던 윤영미 전 아나운서의 소개로 제주도에서 윤정원 작가와 자리를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작업실에서 펭귄과 인간의 모습이 담긴 네 점짜리 연작을 보고 순간적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바로 앨범 커버로 사용하고 싶다고 요청드렸고 작가님께서 데모 파일을 듣고 새로 그림을 그려주셨다.

따스함이 감도는 앨범 커버처럼 우여곡절 가득한 10년의 파노라마에서 긍정성을 가져오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건 무엇인지.
내 멋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를 멈추게 하거나 두 번 생각하게 만드는 존재가 없었다. 그런데 그걸 깨준 유일한 사람이 딸이다. 아이를 통해 멈춤이 생겼고,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틈이 많아졌다.

2년 전 < 엄마의 노래 > 프로젝트로 선보인 바 있는 ‘Love’에서도 아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된 노래인가.
보통 멜로디 폼을 다 만들면 바로 가사를 붙이는데 그때만 해도 생각 정리가 다 안 된 상태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가끔씩 아이가 내가 흥얼거리는 것만 듣고 즉석에서 가사를 붙여줄 때가 있다. 그때마다 계속 녹음해뒀는데 그중에 내가 생각했던 곡의 느낌과 딱 맞아떨어지는 흥얼거림이 있었다. 도입부의 ‘그녀가 네게 건네는 아름다운 얘기’가 아이가 만든 멜로디다. < 엄마의 노래 >에 수록할 땐 아이의 흥얼거림을 같이 넣었다.

작업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
가사 쓸 때는 너무 힘들어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건 ‘순정’이다. ‘오늘이 그대 감사하오’란 이 말은 내가 써놓고도 되게 좋았다. 어느 날 문득 남편이랑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밑바닥부터 지금까지 잘 살아온 서로를 바라보며 참 신통방통하다는 얘기를 나눴다. 노래하며 돈 벌겠다는 열망으로 이곳저곳 엉키며 거칠게 살아왔는데 큰돈은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이루고 예쁜 집을 지으며 지금까지 흘러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사를 써 내려갔다.

덕분에 ‘어른아이’나 ‘꿈 같은 인생’ 같은 즐거운 블루스가 탄생한 게 아닌가 싶다.
순정과 결핍, 두 감정이 계속 싸우고 있던 중에도 강한 긍정이 나를 지켜냈기에 지금의 밝은 정서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블루스는 슬프다는 인식이 있지만 난 전혀 그렇지 않다. 비비 킹이나 알버트 킹의 음악을 들으면 몸이 건들거릴 정도로 블루스는 나를 흥겹게 업 시켜주는 음악이었다.

‘그대는 내 사랑’에 참여한 현진영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았는지.
리메이크 앨범에 수록했던 ‘외로운 사람들’을 현진영 선배도 너무 좋아해서 어느 날 SNS로 연락을 주셨고 그렇게 친해졌다. 평소에도 잘 챙겨 주셔서 언제 한 번 같이 작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둘 다 잘 맞는 짝을 만나서 무던히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배우자를 위한 세레나데를 함께 부르자고 제안했다. 현진영 선배가 스윙감 있는 곡을 부르니까 다시 봤다는 반응도 꽤 있었다.

꼭 들어줬으면 하는 트랙이 있다면.
마지막 곡인 ‘지금 행복해지려 합니다.’를 추천한다. 가사에도 나오지만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결핍으로 삶이 얼룩져 있었는데, 가족을 비롯한 환경 변화를 겪으며 조금씩 그 트라우마가 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워낙 오랫동안 몸속 깊은 곳까지 각인되어 있어서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아이를 통해 튀어나오는 기질들을 반추해 보며 내 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고 내가 꿈꾸던 행복에 진입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 말을 스스로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스스로 3집 < Love >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내 손을 떠난 뒤부터는 온전히 들어주시는 분들의 몫이라고 본다.

그래서 별생각 없다. 아쉽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 되돌릴 수도 없고, 퀄리티와 별개로 음반 한 장 낸다고 천지개벽할 상황도 아니니까. 어쨌든 일상으로 빨리 돌아가야 다음을 또 기약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주기적으로 학습해 터득한 나만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주변 반응은 어땠는가.
행복감이 퍼져 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힘들다고 느꼈던 지점들이 이제는 굳은살이 되었고 내가 더 잘 걸을 수 있게, 심지어는 날아오를 수 있게 만들어줬다. 포기와 체념을 겪고 버팀이란 과정을 통해 드디어 행복으로 가는, 또 한 번의 탄생이 아닐까.

직접 곡을 쓰고 가사를 붙이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든지.
가사와 멜로디 라인을 단출하게 구성하는 게 가장 힘들다. 아직 나의 내공으로는 써지지 않는다.

강허달림 작사, 작곡에 의존하지 않고 곡을 받아볼 생각은 없었는가.
음악 시작할 때부터 곡은 받고 싶었다.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다 받는데 들어오는 게 없어서 그렇다. 내가 곡을 잘 써서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철저한 생계유지 전략일 뿐이다.

곡을 준다는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을 텐데.
만나는 사람마다 내 목소리나 리듬감을 탐내면서 같이 작업하자곤 하는데 막상 성사된 건 단 한 번도 없다. 욕심은 나도 실제로 활용한다 했을 때 감을 못 잡는 게 아닐까. 재작년부터 OST 의뢰가 조금 들어왔는데 가창이 많이 튀다 보니까 녹음까지 잘 마친 뒤에 엎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작년에 방영한 드라마 < 천원짜리 변호사 >의 OST ‘또 하루는’은 반응이 꽤 괜찮았다.
음악 감독이 정말 영리했다. 강허달림의 매력을 뽑아내면서도 대중적인 요소를 챙길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해두고 비슷한 곡을 쓰는 작곡가까지 섭외해서 PD에게 컨펌을 받아놨더라. 노래가 내 스타일이 아닐 수 있더라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준비해 주니 나도 의견을 주는 대로 따라가게 됐다. 결과적으로 드라마랑 찰떡인 곡이 탄생했다.

사실 강허달림에게 가장 관심이 갔던 부분은 바로 고향인 승주다. 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향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상실의 첫 경험이 댐 건설로 고향을 잃은 것이다. 어릴 때 집이 냇가 근처에 있었는데 주암댐과 상사댐으로 물길을 막으면서 완전히 수몰됐다. 얼마 전 인근이 가물어 물 밑에 묻혔던 시멘트 다리가 드러났는데 사진으로 봐도 여전히 찡하더라.

서울 살이를 하다가도 속이 부대낄 때면 항상 그 댐을 구경하러 갔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일종의 회귀 본능이 아닐까. 물속에 있지만 발자취를 보고 느끼고 싶어서 찾아갔던 것 같고, 그런 상실감과 망향의 정서가 나를 블루스로 인도하지 않았나 싶다.

블루스에 제대로 입문하게 된 건 언제인지.
내 삶의 모든 과정이 가수가 되기 위한 사투였다. 음악 하면서 살겠다는 마음 하나로 고교 졸업 후에 무작정 상경했고 일자리를 구해 돈부터 벌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울예전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제야 입시 준비를 위해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에 들어갔다. 화성학도 이제 막 배우는 애가 1년 준비해서 기라성 같은 친구들과 상대가 되겠는가. 당연히 떨어졌고 이후에는 그 즈음 생긴 서울 재즈 아카데미로 발을 돌렸다.

그 시절에 들었던 수많은 노래 중에서 오직 한 곡만이 내 숨을 멎게 했는데, 그게 바로 엘라 핏제랄드의 ‘I ain’t got nothin’ but the blues’였다. 음과 음 사이를 한 호흡에 바이브레이션 없이 본연의 소리로 리듬을 타며 나가는데 그 음성이 너무 멋졌다. 엘라의 정교한 창법을 닮기 위해 첫 카피곡으로 삼아 가장 열심히 연습했었고, 그 덕에 내가 지금까지 보컬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남았다고 본다. 블루스를 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엘라 핏제랄드 외에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꼽는다면.
환경적, 정서적 요인에 의해 블루스로 접어들긴 했지만 실은 가사와 멜로디의 합이 주요한 포크가 하고 싶었다. 특히 밥 딜런의 모든 음악을 좋아한다. 뭐 하나 고르기가 어렵지만 오늘은 우리나라 라디오 애청곡이기도 한 ‘One more cup of coffee’가 생각난다.

국내에서는 어렸을 때부터의 우상인 이선희 선배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라디오에서 ‘그래요, 잘못은 내게 있어요’를 듣고 꽂혀서 바로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다. 정말 뒤도 없이 무모했다. 예전에 팬클럽 ‘홍당무’ 활동도 하고 방에 브로마이드도 붙였을 정도로 열혈 팬이었다.

신촌블루스에서의 기억은 어떻게 남아있는지.
휴식기 때 엄인호 선생님께서 내 노래를 듣고 같이 해보자고 손 내밀어 주신 게 시작이었다. 처음엔 신촌블루스란 닉네임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2년 밖에 안 하기도 했고 난 강허달림인데 꼭 이런 수식어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위대한 밴드 출신이란 사실만으로 어느 정도 검증된 사람이란 걸 대중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내겐 정말 큰 우산 같은 존재다. 더 늦어지기 전에 꼭 선생님과 듀엣 곡을 만들어 앨범에 담고 싶다.

마지막으로 장르적인 표현을 제외하고 본인의 음악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강허달림은 강허달림의 음악을 한다는 말을 가장 듣고 싶다. 여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물론 외롭게 지내왔던 만큼 어느 정도의 범주에 걸치면서 줄을 탈 필요는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야 방송도 나가고 할 테니 말이다. (웃음)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 정다열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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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신촌블루스 디스코그래피 돌아보기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한과 비애를 담은 블루스. 하울링 울프와 존 리 후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로버튼 존슨과 이들의 문법을 계승해 록 레전드가 된 에릭 클랩튼과 레드 제플린 등으로 영미권 대중음악의 근간을 이뤘다. 기타리스트 엄인호를 중심으로 35년간 음악공동체를 이어간 신촌블루스는 척박한 한국 블루스 뮤직에 대중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공연 문화에 공헌했다. 가요에 블루스를 녹인 신촌블루스의 역사를 음반 별로 되새겨본다.

< 신촌Blues >(1988)
보사노바와 록을 혼합했던 밴드 풍선에서 의기투합한 바 있는 한국 블루스의 두 거목 엄인호와 이정선은 1980년대 중반 블루스의 방향성을 세웠다. 이정선과 포크 그룹 해바라기에서 함께 활동했던 소리의 마녀 한영애와 들국화의 조덕환과 엄인호가 발탁한 신예 정서용, 한국 소울의 대부 박인수가 보컬 라인을 형성했다.

대중적으로는 정서용과 엄인호가 입 맞춘 ‘아쉬움’이었다. 수수하게 퍼지는 오르간과 색소폰 솔로 등 블루스 요소와 흡인력 있는 선율 덕에 엄인호 지향의 ‘블루스 가요’가 성립했다. 한영애가 부른 타이틀 곡 ‘그대 없는 거리’와 신중현의 곡을 재해석한 박인수 보컬의 ‘봄비’도 사랑받았다. 이정선은 명반 < 30대 >(1985)의 ‘바닷가에 선들’을 재수록해 각별함을 드러냈다. 음악적으로 완숙한 멤버들이 완성한 데뷔 앨범 같지 않은 데뷔 앨범이었다.

< 신촌Blues II >(1989)
블루스 음악으로선 이례적인 히트를 기록한 2집 < 신촌Blues II >는 음악공동체의 정점이었다. 펑크(Funk)와 레게가 뒤섞인 ‘골목길’은 김현식의 가창으로 시대회자의 지위를 얻었고 엄인호의 ‘바람인가’와 최고의 발라드 작곡가 이영훈의 ‘빗속에서’를 엮은 메들리가 연주 집단의 정체성을 요약했다. 이정선의 펑키한 넘버 ‘산 위에 올라’와 비비킹의 기타에서 이름을 따온 한영애 보컬의 ‘루씰’까지 모든 곡이 매혹적이다.

가객 김현식과 소리의 마녀 한영애가 시대의 소리를 입혔다. 가요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동아기획의 구성원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 전태관이 조력자로 나섰고 ‘나에게로의 초대’의 정경화가 코러스로 완성도를 높였다. 이정선과 엄인호가 합작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으나 한국 블루스의 화양연화를 빚어낸 < 신촌Blues II >는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선의 선정으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 받았다.

< 신촌Blues III >(1990)
밴드의 축이었던 이정선이 떠나고 엄인호가 주도적으로 기획한 음반이다. 전반적으로 절제된 사운드가 처연한 감성을 살렸고 각양각색 보컬로 엄인호의 지휘 아래 음악공동체의 기량이 공고해졌다. 2집에서 코러스로 참여했던 정경화가 브라스가 강조된 재즈풍의 ‘비 오는 어느 저녁’과 절절한 ‘마지막 블루스’로 음반의 도입부를 책임졌다.

앨범 전반의 대중적 색채는 엄인호가 추구하는 블루스 가요와 맞닿아 있다. 정규 1, 2집을 통해 얻은 내공으로 선율과 분위기의 균형감도 구축했다. 엄인호는 적재적소에 블루스 터치를 가미했고 김영배와의 기타 하모니도 조화롭다. 손석우 작곡, 김현식 노래의 ‘이별의 종착역’이 특히 사랑받았지만 맨발의 디바 이은미의 가창에 이정식의 색소폰 연주가 어우러지는 ‘그댄 바람에 안개로 날리고’와 자취를 찾기 힘든 가수 김미옥이 부른 ‘비오는 날’도 여운을 남겼다.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1 >(1989) &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2 >(1991)
두 장의 라이브 음반도 혁혁한 공로다. 1960년대부터 라이브 음반 제작이 활발했던 영미권과 달리 국내 밴드들은 기술적 장벽에 가로막혀 작업을 단념하곤 했다. 국내 라이브 문화를 대표했던 신촌블루스는 열악한 환경을 딛고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1 >과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 2 >를 내놓았다. 관객과의 호흡에서 전해지는 생동감은 라이브 음반만의 매력. 신촌블루스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었다.

1989년 롯데 잠실 홀에서 녹음한 첫번째 라이브 음반 < 신촌블루스 라이브 Vol.1 >에선 한영애와 김현식 두 언더그라운드 슈퍼스타가 위력을 발휘했다. 자신의 대표곡 ‘누구없소’와 이정선의 ‘건널 수 없는 강’로 이어진 한영애의 무대는 스캣으로 즉흥성을 포착했고, 포효의 ‘떠나가 버렸네’는 김현식 탁성의 진면목이다. 관객의 호응을 고스란히 담아 순수한 형태의 라이브 음반을 지향했다.

서울가든호텔에서 녹음한 1991년 작 < 신촌Blues 라이브 Vol. 2 >는 보다 발전한 음향 기술로 라이브의 강점을 반영했다. 신촌블루스 4기 보컬 김형철과 ‘묻어버린 아픔’으로 알려진 김동환이 번갈아 가며 노래했다. 김동환의 야생적 가창은 ‘서로 다른 이유 때문에’와 ‘환상’으로 좌중을 휘어잡았고 엄인호는 ‘갈등’과 ‘마틸다’ 등 대다수의 곡에 목소리를 실었다. 첫 번째 라이브 음반과 마찬가지로 엄인호의 친형 엄인환이 색소폰을 맡았다.

신촌블루스는 현재진행형이다. 2021년에 한국 대중음악의 전설을 기록하는 < Return Of The Legends >에 참여했고 2022년에 엘피 붐에 발맞춰 정규 1집을 리이슈했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박보밴드와의 협업도 예정되어 있다. 2022년 11월 이즘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엄인호는 신촌블루스의 역사 계승 의지를 드러냈다. 한국 블루스의 명맥을 위해 힘닿는데 까지 노력하겠다는 것. 리더 엄인호를 주춧돌로 강성희, 제니스, 김상우로 이뤄진 보컬 라인에 이상진(베이스), 김준우(드럼), 안정현(키보드)로 구성된 음악공동체는 엔데믹 속 공연을 준비 중이다.

이미지 작업: 백종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