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Album KPOP Album

슬롬(Slom) ‘Weather Report’ (2022)

평가: 3/5

수더분한 성격의 프로듀서 슬롬은 자기를 내보이거나 자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다. 도통 알 수 없는 속을 헤아릴 유일한 단서는 정교하게 담금질한 그의 작품뿐. < 쇼미더머니 > 경연곡 ‘회전목마’ 등으로 무대와 차트 모두 합격점을 받아낸 신입생은 자이언티의 레이블 스탠다드 프렌즈에 합류하며 점차 그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 래퍼를 빛나게 만드는 감독 역할도 쉬지 않는 동시에 새 보금자리에서 발매한 < Weather Report >는 정돈된 음악 안에 감춰둔 그의 내면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는 보고서다.

일주일 날씨를 상징하는 7개 트랙은 흘러가 버린 시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다. 이 기상예보에 따르면 그가 지나온 일기(日氣)는 대체로 흐림에 가깝지만, 빗방울이 빗발칠 정도는 아니다. 관계의 허무에서 비롯된 ‘아니라고’와 ‘Skit’, 일상이 된 코로나 시대 서글픈 감정을 담은 ‘D.r.e.a.m’ 등 어딘가 다들 처연한 주제를 읊고 있지만 슬롬은 관찰자의 자세로 우중충한 하늘을 담담하게 관조하며 잔잔한 멜로디를 지어낸다. 

서정성은 연주곡이나 악기가 중심을 잡은 부분에 특히 두드러진다. 보컬의 도움 없이 물방울 소리로 빛과 소금의 원곡을 재해석한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에는 거장에 대한 존경과 함께 엷은 미소가 녹아있고, 마찬가지로 음성이 생략된 마지막 트랙 ‘우산’의 빗소리로 쓸쓸하게 이어진다. 영국 가수 윌 히얼드와 협업한 ‘What do I do’ 후주의 기타 솔로 역시 갈수록 압축되고 짧아져 가는 시대에 반가운 여백의 미를 제공한다. 거세고 날카로운 사운드의 드릴(Drill)이 득세한 요즘 유행과 달리 차별화된 미니멀리즘이 만족스럽다.

먹구름을 비집고 들어온 친구들과 함께 활기찬 외출도 감행한다. 어둑어둑한 공기가 중심을 잡고 있지만 펑키한 베이스 리듬을 몰고 온 조력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날씨를 재해석한다. ‘아니라고’의 자이언티가 특유의 멜랑콜리함으로 단연 돋보이는 가운데, 퓨전재즈 풍 ‘선인장’에 합을 맞춘 크러쉬와 빈지노도 흐린 날에 느껴지는 온도를 빼어나게 표현했다. 슬롬 표 감성에 담백하게 어울리는 피에이치원과 로꼬 등 래퍼 라인도 다소 부족할 수 있는 내지를 빼곡하게 채웠다.

화려한 피쳐링 진이 한편에 자리 잡았지만, < Weather Report >는 슬롬의 역할과 본연의 미덕을 잘 포착했다. 목소리보다 기악 연주와 음악이 은은하게 빛나며 프로듀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부각했고, 그 선율에는 차분한 창작자의 태도가 묻어나 진폭은 얕고 구성은 단출하다. 빼어난 절제미, 늘 대중성과 자기 창작욕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던 강점을 재차 증명한다. 

– 수록곡 –

1. 아니라고 (Feat. 자이언티)
2. 선인장 (Feat. 크러쉬, 빈지노)
3. Skit (Feat. 이하이, 로꼬)
4. D.r.e.a.m (Feat. 피에이치원)
5.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
6. What do I do (Feat. 윌 히얼드)
7. 우산

Categories
Album KPOP Album

수민 & 슬롬(SUMIN & Slom) ‘Miniseries’ (2021)

평가: 3.5/5

추종자를 위한 단편극

만약 진취적이고 감각적인 K팝을 원하는 이라면, < Your Home >부터 찬란하게 미끄러져 내려오는 싱어송라이터 수민의 행보를 되짚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현 힙합 신이 내비치는 대중적 동향을 파악하고 싶은 이라면, 작년 < 쇼미더머니 9 > 경연곡 중 프로듀서 슬롬의 손길이 닿은 곡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욕심을 더 내어 이러한 감각성과 대중성을 성실히 만족하면서도, 동시에 완성도 높은 결정체를 갈망한다면 그 해답은 < Miniseries >가 될 것이다.

공인된 두 아티스트가 만나 수려한 진척도를 자아냈다. 비트 메이킹을 맡은 슬롬이 배후에 깔리는 윤곽을, 가사와 보컬을 맡은 수민이 전면에 드러나는 퍼포먼스를 담당하며 분리된 환경 속 각자의 장점을 골라 담는 작업을 펼친다. 이어지는 결합의 과정은 실로 안정적이다. 개성파 수민의 정열적인 빨강과 침착한 성향인 슬롬의 중용적 노랑은 정교하게 융화되며 이내 앨범의 상징적 색채인 주황빛으로 거듭난다.

사랑이라는 소재를 자잘하게 다룬 트랙들이 대열을 맞춰 병렬적으로 배치된다. 허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급과 진폭, 하물며 방향까지도 전부 다르다. 검질긴 네오 소울로 상대의 환영을 붙잡으려는 ‘신기루’, 지펑크의 그루브를 전가하며 댄스홀의 광경을 그려내는 ‘곤란한 노래’, 강박적 박자의 일렉트로닉 성분을 담아내며 끄덕임을 유도하는 ‘여기저기’ 등 각각의 트랙은 형상을 거듭 교체하며 표현의 범주를 계속 확장해 나간다. 이는 사랑이라는 복합적인 감정이 쉽게 일축될 수 없음을 의미하고, 두 뮤지션의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강조하는 지점이다.

말 그대로 ‘착했다가도, 스윗했다가도, 거칠’다. 반복을 쉽게 허용하지 않되 관성으로 단단히 이어 붙인 작법은 집중을 깨트리지 않는 선에서 길이와 점성을 유연하게 조절하며 통일감을 부여한다. 다만 능란한 변주로 독특한 인상을 각인한 초반부에 비해, 인스트루멘탈 트랙 ‘ㅜ’ 이후 비교적 정적으로 구성되는 후반부는 다소 무던하게 다가올 여지를 남긴다. 개러지 비트를 차용한 변화구 ‘한잔의 추억’이 경쾌하게 마무리를 장식하기 전까지 과도하게 평균을 주장한 구간은 작중 유일한 평범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쉽게 화려하기를 거부하고 얻어낸 고도의 세련미다. 늘 유행의 최전선을 달리던 수민의 캐주얼한 음악성이 다듬기에 최적화된 슬롬의 프로듀싱과 상호적으로 맞물려 대중 친화적 양식으로 여과된 모양새다. 펀딩 제작이라는 태생부터 강한 도전 정신을 내비치듯, 극도로 중도의 미학을 지향한 < Miniseries >는 어떠한 접두사에도 어울리는 영민한 보편성과 종합성을 선사한다. 마치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추종자라면 누구나 만족시킬 수 있을, 어떠한 하나의 ‘잘 만들어진 얼터너티브 알앤비 앨범’의 규범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 수록곡 –
1. 신기루
2. 맞닿음
3. 곤란한 노래
4. 여기저기

5. 어떻게 될 것 같애
6. ㅜ
7. 망가진 사이
8. 일단은
9. Trap
10. 한잔의 추억

Categories
KPOP Single Single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 ‘Party forever’ (2021)

평가: 3/5

한결 가볍고 홀가분해졌다. 전작 < 화기엄금 >을 가득 메웠던 타이트한 랩과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미디엄 템포 리듬의 부드러운 싱잉 랩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근래 공개된 사이먼 도미닉의 음악 중 가장 힘을 덜어냈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의 여유가 매끄러운 신스 멜로디 속에 깃들어 있다. 일전에 ‘귀가본능’에서 증명되었던 프로듀서 슬롬과의 합이 이번에도 깔끔한 케미를 불러일으킨다.

안정감과 편안함이 더해진 사운드는 대중에게 친근함을 유발하는 래퍼 정기석의 이미지로도 이어진다. 그의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를 가진 곡이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과 함께 있더라도 근원적인 공허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랩 스타의 모순을 노래한다. 아티스트 본인뿐 아니라 현대인들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이 보편적인 외로움은 ‘짠해’에서부터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는 것에 탁월했던 그의 특이점이 다시 한번 발휘되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