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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알피피(TRPP) ‘Here To Stay’ (2022)

평가: 3/5

대중적인 코드와 서브컬쳐 음악 사이에서 탄생한 티알피피(TRPP)는 전형을 거부한다. ‘부캐’와 ‘코리안 슈게이징’을 섞은 이 조합은 유쾌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으로 인디 신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몽환적인 연주에 흐릿한 목소리를 얹은 < Trpp >의 질주는 이제 1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숨 가쁘게 돌아온 < Here To Stay >는 등장의 들뜬 분위기를 잠시 잠재우며 느긋한 발걸음을 옮긴다.

따스한 감성으로 중심을 잡는 싱어송라이터 윤지영, 노엘 갤러거 내한 당시 오프닝 무대를 책임진 밴드 바이바이배드맨의 프론트 맨 정봉길, 유쾌한 밴드 일로와이로의 기타리스트 강원우. 새로운 지붕 아래 모인 인디의 선봉장들은 얼터너티브, 드림 팝 등의 재료들을 편견 없이 배합한다. ‘Clue’에서는 1990년대 다부지고도 처량했던 록의 대표주자 스매싱 펌킨스를 회상하고 ‘Rainbow spell’과 같이 잔잔한 곡에서는 브릿 팝의 서정성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최종적으로 혼탁한 사운드의 슈게이징이 정갈한 모습으로 자리 잡는다. 첫 만남의 설렘을 풍기던 1집처럼 ‘Lifetime’과 ‘Higher than the sun’등의 트랙에서는 들뜨기도 하지만 다소 잠잠한 흐름이다. 이는 노이즈 록의 아들 격인 이 장르에 드나들 수 있는 편안한 출입문 역할을 하면서도 그 소음이 선사하는 미가공과 날것의 매력을 반감시키며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비슷한 부류의 음악과 다르게 안온한 감상을 선사하지만, 반항적인 구간의 결핍 탓으로 무료감에 빠지기도 쉽다.

스산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운데 그 아래 새겨진 정체성은 데뷔작에 비해 더 확고하다. ‘반사’와 ‘명상’ 등의 노랫말 안에는 티알피피만의 추상적이고 현학적인 색깔이 선명하게 묻어나고, 삶의 윤회를 논하는 ‘Circle’과 ‘Here to stay’는 번역 그대로 이들의 기행이 ‘원’처럼 돌고 돌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선언한다.

엉성한 콘셉트 아래 감춰져 있던 티알피피의 실마리를 풀고 그 뜻을 설득하기 위한 해설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신보를 기점으로 이 기묘한 회합의 출발선을 되짚어보면 과거 음악의 짙은 향수로부터 비롯된 슈게이징의 매력을 다시금 눈치채고 받아들이게 된다. 우연한 만남이 새로운 발견으로 귀결되는 과정, 티알피피는 존재 자체로 흥미로운 세렌디피티(Serendipity)다.

– 수록곡 –

  1. Here to stay
  2. Clue
  3. Play
  4. Lifetime
  5. 반사 (Reflection)
  6. 명상 (Meditation)
  7. Higher than the sun
  8. Little boy / the darkest day
  9. Dodgy
  10. Rainbow spell
  11. Oblivion
  12. Furykawa
  13. Cir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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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노을(Parannoul)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2021)

평가: 3.5/5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아티스트다. 유일하게 노출된 정보인 밴드캠프의 소개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서울에 거주하는 20대 남성이며, 파란노을이라는 개인 프로젝트 밴드를 꾸리고 있다는 사실 정도다. 국내 인지도도 낮던 그가 최근 인디계의 유망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여러 해외 커뮤니티를 등지로 한 영미권 리스너들의 반향이었다. 베일에 싸인 뮤지션에게 레이트유어뮤직과 레딧 유저들은 흥미를 보였고 수많은 담론을 활성화했으며 급기야 그 관심은 스테레오검과 피치포크까지 번져 나갔다.

이러한 컬트적인 열광은 작품이 2010년대 접어들며 점차 사장되기 시작한 장르인 슈게이즈의 호출과 동시에 이모의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퍼즈 이펙트를 극대화한 노이즈와 조악한 레코딩 환경 속 열화를 거친 사운드, 그리고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후위로 밀려난 보컬 등 장르가 지닌 음향과 가사의 클리셰적 요소는 정공법의 일환으로 적극 차용된다.

마니아 취향을 사로잡은 또 하나는 밴드 스스로가 언급한 ‘청소년기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것들에 대한 레퍼런스’다. 앨범은 1990년대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와 록 마니아라면 즉각 반응할 수 밖에 없는 오마주로 가득하다. 효과음이나 내레이션 등 부가적 장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관여하거나, 개별 아티스트의 잔상을 가져오는 등 방식도 다양하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2001) 대사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세상’의 드러밍 도입부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Only shallow’를, ‘청춘반란’의 초반 진행은 카 시트 헤드레스트의 9분짜리 대곡 ‘Beach life-in-death’를 각각 소환한다. ‘흰천장’에서는 언니네이발관 ‘가장 보통의 존재’의 기타가 일그러지며 뭉개지는 순간과, 모임별 ‘푸른전구빛’의 신디사이저가 뚜렷한 형체를 찾아가는 상반된 감상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

자연스레 2000년대를 관통하는 강렬한 노스탤지어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감정의 근원은 누군가의 청춘이 깃든 국내 인디 록, 슈게이즈의 비주류성과 그런지의 반항 정신에 대한 동경, 더 나아가면 라디오헤드의 ‘Creep’과 벡의 ‘Loser’가 노래하던 ‘찌질함’의 표상이다. 작품은 이러한 지점을 노골적으로 겨냥하며 공감을 유도하고 청자를 끌어 당기는데, 공통분모가 많을수록 그 인력은 더욱 거세진다.

침투 과정은 면밀하고 능숙하다. 열등감을 숨기지 않고 토로하는 노랫말은 청춘이 지닌 미숙한 면과 부끄러운 기억을 회고하게 만들지만, 인공적으로 만든 노스탤지어와 비교적 쉽고 명징한 선율을 통해 일시적으로 감각을 마비시키고 미화된 기억을 주입한다. 지하철 소음과 라디오의 시보음을 삽입한 ‘아름다운 세상’과 알람소리를 넣은 ‘흰천장’의 경우가 그렇다. 기억을 파고드는 일상의 소음을 배치한 뒤 부유하듯 몽롱한 잔향과 거친 악기의 질감, 그리고 최면과도 같은 보컬의 읊조림을 차례차례 배치하며 앨범의 명명처럼 ‘꿈의 저편’으로 넘어가는 듯한 효과를 부여하고 있다.

비협조적인 디스토션을 강조한 ‘변명’과 반대로 어쿠스틱한 면을 내세우며 환기를 주도하는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메탈의 금속성과 여러 악기의 불포화 가운데 제세동을 가하는 ‘격변의 시대’ 등 일관된 목적 아래 다양한 시도를 행하는 점도 흥미롭다. 절제된 감정선 아래 보컬의 존재감을 격상하는 ‘엑스트라 일대기’ 역시 반전을 주도하는 구간이다. 다만 대부분 곡이 긴 러닝타임에도 뚜렷한 완급 없이 계속해서 높은 수준의 고양감을 요하는데다, 가공되지 않은 텍스처를 지나치게 강조하기에 피로감이 누적된다. 청취에 있어 휴식이 반강제적으로 필요하다는 단점이 명확하다. 은어로 가득한 ‘청춘반란’의 훅과 ‘Chicken’의 상투적 비유는 공들여 쌓은 몰입을 깨트리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자기혐오와 무기력으로 점철된 화자는 여전히 격한 비관과 자조적 언어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럼에도 ‘더는 도망가지 않’고(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되고 회자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자신의 ‘노래가 죽지 않’기 위해(청춘반란) 당당히 주체로서 행동하고 처절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극복이라는 서사를 떠올리고 일종의 해방감을 얻게 된다. 그 수단이 비록 상투적일지라도, 잊고 지내던 과거의 순수와 저마다의 설렘과 아림을 추억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 이 미지의 아티스트가 창조한 공색 백일몽에는 분명한 가치를 찾아볼 수 있다.

– 수록곡 –
1. 아름다운 세상 
2. 변명
3.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 
4. 흰천장 
5.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6. 격변의 시대
7. 청춘반란
8. 엑스트라 일대기
9. Chicken
10. 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