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이야기를 한다’라는 점에서 선우정아의 입지는 확고하다. ‘도망가자’ 와 ‘구애’, ‘동거’처럼 개성과 자기주장 뚜렷한 곡들은 현 대중음악계에서의 존재감을 다졌고 마니아를 결집했다. 가사와 사운드 양 진영에서 또렷한 색깔과 균형감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며 잊기 힘든 음색의 소유자기도 하다.
신곡 ‘싸움’은 우회와 은유 없이 민낯을 드러낸다. “서로를 때리고 찌르고 아파해 / 서로를 죽일 듯 몰아세워”의 노랫말은 가창과 피아노 연주에 중화(中和)되나 씁쓸함과 처연함을 남긴다. 큰 굴곡 없이 산문시 읽듯 담담하게 흐르는 구성은 조금씩 고조되다 “내가 찢어낸 너의 등 / 불타버리는 우리 둘”의 불꽃에 이른다. 지난한 연인 관계와 갈등을 묘사한 ‘싸움’은 재치와 감각의 자리에 깊이를 새겨넣었다.
‘그대로네 어쩜 네 생각만 하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이렇게나 잠깐 좋고 오랫동안 나삐 지낼 거였으면 왜 이리 허무히 젊음을 너란 애에게 다 써버렸을까’
그리고 남자.
‘여전하네 어쩜 거짓말만 하고 착한 척만 하고 이렇게 또 잠깐 내 맘을 헤집고 들쑤시면 재밌나보다 나도 참 바보지 왜 하필 너란 애에게 뭐든 다 줬을까’
남녀의 차이를 극사실주의로 표현한 ‘어쩜’은 추운 겨울, 들판에 혼자 서있는 앙상한 나무처럼 쓸쓸하고 가슴 깊이 침잠하지만 그 안에는 분노와 미련, 억울함과 후회의 모습이 대치한다. 초반부의 단출하고 건조한 악기 구성은 슬픔을 확대하며 클라이맥스로 휘몰아친다. 데뷔 30년이 넘은 베테랑 이승환과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며 활동하는 선우정아의 떨리는 음색은 사랑의 설렘과 깨어진 애증의 원망을 동시에 담는다.
1985년 생, 소띠인 선우정아는 모든 걸 뒤튼다.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스펙 쌓는 것도, 좋은 곳에 취직해서 많은 월급을 받는 것도, 멋진 몸매를 유지해서 타인들의 부러움을 사는 것도, 부지런히 살아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남과 비교하는 것도 부질없고 필요 없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자신이 소가 된다고 걱정하지만 자기는 소띠라 괜찮다고도 한다. 한 게으름뱅이의 넋두리처럼 들리지만 심각한 경쟁사회에 내몰린 젊은 세대에겐 카타르시스를 주는 노랫말이다.
재즈의 선율 위에서 선우정아는 이 주제에 맞춰 나른하게 노래하고 맥없이 부르는 창법은 빌리 아일리시나 라나 델 레이와 같은 선에 위치한다. 빌리 아일리시와 라나 델 레이가 노라 존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외형이다.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들과의 협업도 부지런하게 활동을 하는 선우정아에게 ‘뒹굴뒹굴’은 허세와 가식이 가득 찬 노래다.
세정은 나보다 남을 향했다. 대중은 < 프로듀스 101 >의 무한 경쟁 속, 긍정적이고 털털한 자세로 자신보다 타 연습생들을 위로하고 ‘국민 프로듀서님’들께 큰 절을 올리는 세정의 이타적인 매력을 사랑했다. 첫 솔로 싱글 ‘꽃길’ 역시 나를 믿고 사랑해준 ‘누군가’를 위해 노래한 곡이었다. 그랬던 그가 ‘나는 초록을 담은 / 작은 화분 하나가 필요해’라 차분히 앨범의 막을 올리는 모습이 새롭다. 남을 향하기 전, 나를 마주하는 세정이다.
선우정아가 곡을 만들고 바버렛츠 안신애와 함께 노랫말을 쓴 ‘화분’은 정갈하다. 미니멀한 피아노와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 위 세정은 ‘초록을 닮은’ 싱그러움과 ‘사람들이 모르는 그늘진 마음’을 어루만지는 위로의 목소리를 꾸밈없이 전달한다. 감정 과잉, 근거 없는 긍정의 발라드 곡이 피로를 유발하는 요즘 시대에 나 자신을 보듬으며 타인을 품어내는, 오히려 ‘덜어내기’에 가까운 깨끗한 곡이 반갑다.
‘화분’ 아래 이어지는 수록곡들도 일관된 테마 아래 솔로 세정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꽃길’을 닮은 발라드 ‘오늘은 괜찮아’는 아이유의 ‘Love poem’처럼 어둡고 무력한 길을 걷는 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곡이다. 첫 후렴부를 팔세토 처리하며 여린 감성을 전달하고 마지막 후렴부를 무리 없이 강하게 소화하는 세정의 역량도 돋보인다.
태연의 솔로 커리어가 겹쳐가는, 밝은 톤의 모던 록 ‘Skyline’과 그루비한 ‘오리발’으로 단조로움을 피하고 새로운 면모를 더하는 구성도 좋다. 곡 작업에 적극 참여했기에 감각적인 이 두 곡은 물론 애절한 ‘꿈속에서 널’까지 준수한 가창을 보여주는 것도 덤.
2016년 ‘꽃길’과 2018년 구구단 활동 이후 1년 남짓한 공백기 동안 고민이 많았을 터다. < 화분 >은 급하게 첫 발걸음을 내딛는 대신, 처음부터 차근차근 다시 걸어 나가는 길이다. 작은 방 안의 화분을 가꾸듯 천천히 자신을 어루만지며 보다 많은 이들에게 닿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화려한 밖을 향해 꿋꿋이 웃음 짓던 세정은 이제 시선을 안으로 돌리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 이미, “너도 그”럴지도.
선우정아의 음악적 역량은 넓다. 그는 감정의 폭을 노래로 정확히 그려내는 보컬리스트이자 대부분의 곡을 직접 작사 작곡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다. 자기 것을 진두지휘 하는 것에서 나아가 대중 가수와의 협업도 많다. 투애니원, 아이유, 토이 등과 함께 작업했고 최근에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 < 복면가왕 >, < 놀면 뭐하니 >, < 사운드 오브 뮤직 : 음악의 탄생 > 등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고 있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그는 결코 대중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다. 음악에 담긴 솔직함 덕택이다. 연일 바쁘게 작업실과 공연장을 오가는 와중 얼마 전 그의 정규 3집 < Serenade >가 발매됐다. 대외적인 성공과 별개로 음반의 속내를 열어보니 짙고 어두운, 때로는 외롭기까지 한 그의 현재가 담겨 있었다. 유난히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1월 17일. 홍대의 이즘 사무실에서 그에게 그 감정들의 원인을 물었다. 답변은 ‘나’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시작됐다.
지난 2016년 이즘 인터뷰 이후 3년 반 만에 다시 만났다. 바뀐 게 있다면? 방송을 많이 하게 됐고 주류 미디어에 노출도 많이 됐다. (원치 않았는데 생긴 것도 있느냐 물으니) 감사하게도 많지 않은 거 같다. 단순하고 금방 사라진 불만들은 조금 있지만 오래 붙잡아두고 아파할 고민들이 (지금 당장은) 없다. 감사할 일이다.
요즘 활동 궤적만 놓고 보면 완전한 상승세다. 그런데 발매된 음반 < Serenade >는 주저하고 아파하는 선우정아의 모습이 더 많이 보인다. 욕심 때문인 것 같다. (웃음) 나도 내가 왜 이런 걸까 스스로에게 많이 질문한다. 일도 잘 되고 좋은 무대에도 자주 서는데 왜 이렇게 불만이 많고 불안한 걸까? 고민을 곱씹어 보며 내가 아직까지 현실적으로 이뤄낼 수 있는 것 이상의 것들을 계속 꿈꾸고 있기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여기서 오는 마찰도 종종 느낀다.
그런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던 정규 2집 < It’s Okay, Dear >의 밝은 분위기와 상당히 대조되기도 하는데. 시쳇말로 이번 작품에 더 꼬여있는 내가 담겨 있다. 원래 앨범 제목도 세레나데가 아니었다. 음반 작업을 시작하면서 내 안에 얽히고설켜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많이 느꼈고 그런 쪽의 우울한 모습을 숨김없이 표현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Serenade’를 완성했다. 이곡을 다 만들고 가사, 멜로디 등을 보니 오히려 새롭게 환기시킬 지점들이 보이더라. 그래서 전반적으로 분위기를 조금 더 밝게 끌어왔다. 결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밝고 어두움의 균형을 맞췄다고 생각한다.
본격적으로 앨범 작업에 돌입한 시기는 언제인가? ‘쌤쌤’을 쓰면서부터였으니 2019년 1월쯤이다. 그 노래를 만들고 ‘이제 정규 3집을 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섰다. 사실 내게 미발매 곡들이 정말 많다. ‘배신’, ‘생애’ 등은 20대 초, 중반에 적은 노래다. 그렇게 일기장 쓰듯 쌓인 것들이 많았고 아까 말했듯 그 안에는 정말 개인적인 아프고 외로운 소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작품은 ‘나’, ‘선우정아’에서 출발해 결국 ‘대중’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으로 향했다. 발매 과정이 아니라 ‘과정을 발매’한 거다.
수록곡이 많은 이유는 뭔가? 이번 음반의 첫 번째 규율은 ‘수록곡을 많이 넣자’ 였다. 내가 내 곡에 대한 집착이 좀 있다. (웃음) 내 노래들을 내가 너무 사랑하는 거다. 그러다보니 활동하는데 있어서 선우정아의 것에 역으로 갇히는 경우도 있고 한계에 젖어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다. 아웃풋이 있어야 새로운 인풋도 생기지 않나. 나의 일부를 털어내고 싶었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한 해소가 필요했다.
수록곡 얘기를 해보자. 사람들에게 가장 들려주고 싶은 곡을 하나만 뽑는다면? ‘Serenade’다. 음반에서 유일하게 남을 위해 썼다. (웃음) 30대가 되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비슷한 위치에 있던 친구들과 서 있는 계단, 활동하는 공간이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누군가에 비해 빨리 조명을 받은 것도 있고 또 그러다보니 함부로 위로의 말을 건네기 힘든 상황들이 종종 있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내가 좋아하는, 좋아했던 사람도 “그냥 모두 다 잘 잤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았다.
반대로 완전히 개인적인 곡도 궁금하다. 살면서 아주 가끔씩 빠져나올 수 없게 우울해질 때가 있다. 그날이 딱 그랬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긴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잠도 못자고 마음도 푸석한 게 말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정말 횡설수설 하다가 끝이 났다. 근데 또 역설적으로 그 인터뷰의 반응이 정말 좋았다. 차라리 내 꾸며진 모습을 대중이 좋아해줬다면 심적으로 편했을 텐데 나의 꺼내고 싶지 않은 빈틈이 보여 졌을 때 누군가가 열광한다는 게 솔직히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Interview’에 그때 느낀 감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어려서부터 늘 자존감이 낮았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죽어라고 열심히 했다. 끊임없이 나를 증명하려 하려했고 ‘저 다 잘해요’ 하며 칭찬을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갈구했다. (웃음) 특히 20대 때 그런 나쁜 열정이 정점을 찍었는데 그래서 힘든 것도 있었고 또 그래서 성장한 부분도 있었다.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보면 될까? 나쁘게 표현하면 회피형 인간이다. (웃음) (이유를 묻자) 내가 겁이 많다. ‘To zero’를 들어보면 안다. 살다보면 상처와 잡음들을 우리가 껴안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이고 져야할 때가 있다. 그건 싫은데 그렇다고 만남을 그르칠 수도 없고 그냥 우리 서로의 좋은 점만 기억하며 헤어지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떨까 상상하다가 그 노래를 썼다.
콜라보도 회피한 건가? 대중 활동이 많아졌으니 자연스레 한 두곡쯤 피처링을 쓸 줄 알았다. 내가 음악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특히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게 너무 힘들다. 차라리 내가 힘든 건 참을 수 있는데 누군가에게 실례가 되는 건 견딜 수 없다. 내가 미련한 거다. 하하하. 그래도 꼭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넣었을 꺼다. 다만 이번 음반은 시작점 자체가 내 내면의 깊은 한 구석에 찍혀있어 단독으로 가는 게 나았다. 이렇게 된 바에야 완전 내 이야기, 해보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를 실컷 해보자 하며 혼자 꾸렸다.
음악 안에 담긴 자신 만의 이야기. 바로 거기에서 대중들이 열광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다. 내 큰 욕심 중 하나도 이와 비슷하다.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 전하기. 감사하게도 공연을 하면 다양한 나이대의 분들이 현장을 찾아와 준다. 얼마 전에는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10대 아이가 부모님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오기도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있었고. 그럴 때면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런 사랑을 받나 싶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더 진실 되게 노래를 쓰고 부르려 노력 중이다.
작곡가로서의 행보도 놓칠 수 없다. 최근 아이유를 필두로 이문세, 박정현 등 다른 뮤지션들에게 곡을 많이 주고 있는데 내 곡과 타인의 곡을 나누는 기준이 있다면. 솔직함의 정도 차에 따라 나뉘는 것 같다. 정규 1집 < Masstige >를 발매하고 본격적으로 내 생각들을 곡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언제나 솔직하게, 부끄러움까지 솔직하게 적자는 것이었다. 노래를 완성해보면 ‘아 이건 100% 선우정아의 스토리다’ 혹은 아니다 하는 게 느껴진다. 내 연대기에서 비켜나가는 건 내가 직접 불러도 맛이 살지 않는다. 그럴 때는 다른 적임자에 양보한다. 때로는 포기의 미덕도 필요하니까.
어떻게 보면 데뷔 작 < Masstige >에 가장 선우정아 색이 없다. 1집을 발매했을 때가 21살 22살 즈음이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앨범을 내자고 하니까 일단 시작했고 그러면서 휘뚜루마뚜루 휩쓸린 것도 많았다. 그 앨범을 내고 7년 정도 (웃으며) 수행을 했다. 크고 작은 공연도 많이 하고 다채로운 음악도 많이 시도했다. 어떻게 보면 그 긴 무명의 시간이 오늘 내 음악의 가장 큰 자양분이 됐다.
그렇게 이번 정규 3집까지 왔다. 음악적 지향점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것 같나? 앞으로 내가 어떤 음악을 하게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지금 잘 가고 있는 지를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는 거다. 한 가지, 감사한 상황인 건 확실하다. 이번 < Serenade >만 보더라도 작업적인 것에서의 아쉬움이 (당연히) 있다. 언제나 최상의 완벽함은 불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2019년의 선우정아 그 자체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뿌듯하다. 재밌었고 즐거웠고 시원했다. 내가 이 음반으로 받은 위로가 음악을 듣는 여러분들에게도 잘 전해진다면 더 바랄게 없다.
2020년의 선우정아는? 대중 예술은 늘 어렵다. 돈을 받고 음악을 만든다. 혹은 음악을 만들고 돈을 번다는 구조 자체에서 어떤 딜레마를 느낀다. 그래도 내 작품을 통해 선우정아라는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흔들리며 살고 있구나 보여주며 위로를 주고 싶다. 내가 그렇게 받아왔으니 주는 방법도 내게 온 것처럼 나갈 수밖에 없다. 재밌는 프로젝트들을 많이 준비 중이다. 녹슬지 않고 자주 찾아 오겠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