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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이두헌 인터뷰

1980년대 음악을 기억할 때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밴드 ‘다섯 손가락’이다. 그 시절 음악 젊음들에게 그들이 남긴 노래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그리고 ‘풍선’은 1순위 애창 레퍼토리들로 남아있다. 특히 ‘풍선’은 2006년 아이돌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하면서 한참 뒤 세대 청춘들도 다섯 손가락이란 존재를 알게 됐다.

이두헌(기타)은 이 팀의 사실상 음악감독이나 같았던 존재였다. ‘새벽기차’와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을 작사 작곡했고 ‘풍선’의 노랫말도 빚어냈다. 그는 전성기 시절 투톱이었던 임형순(보컬)은 물론 원년 멤버 최태완(건반)과 투합하면서 곧 다섯손가락의 컴백 앨범이 나올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베이스는 송골매와 위대한 탄생 출신의 이태윤, 드럼은 베테랑 장혁이 맡는다고 한다. 다섯 손가락은 현재 신곡 녹음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했다. 이두헌은 자신이 만든 카페이자 작은 음악회장인 경기 수지 소재의 ‘책가옥’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다섯손가락의 궤적 뿐 아니라 음악 팬이라면 귀 담아 들어야 할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섯 손가락이 완전체로 돌아온다니 기쁩니다. 임형순과 함께 선 마지막 무대가 언제지요.
2004년에 배철수 씨가 진행한 < 7080콘서트 > 2회에 출연했어요. 그때 저희가 다시 만나서 연주를 했죠.

임형순과 이두헌 두 분의 음악적 비전 차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하자’는 대의명분이 있었나보죠.
명분이라기보다는 나이가 드니까 너그러워진 것 같아요. 제가 둥글어졌다고 봐야죠. 굳이 뭐 이제 와서 ‘내 건 내 거고 네 건 네 거고’ 이럴 필요가 뭐 있나요.

이력을 많이 남기신 분들이라서 돌아온 다섯 손가락은 과연 어떤 스타일의 음악을 들려줄지 궁금합니다.
이미 써놓은 곡도 많고 지금도 곡을 계속 쓰고 있어요. 4월 중순 즈음에 드러머 장혁 씨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시작해요. 저는 사실 머릿속에 생각이 많죠. 블루스도 하고 싶고, 재즈도 하고 싶고. 그렇지만 명색이 공식적 활동인데 대중적 지향을 갖지 않을 수는 없어요. 임형순 씨는 아직도 다마키 코지같이 옛날 다섯 손가락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하는데, 저는 미국 유학 다녀오면서 좀 많이 바뀌었죠. 지금은 다룰 수 있는 음악이 많아져서 사실은 하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이두헌과 합을 이룰 요즘 스타일이라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재즈가 가장 가까운 것 같아요. 재즈 중에서도 아주 스탠더드 하거나 비밥 스타일은 아니고 컨템포러리한 스타일이요. 네오 비밥 같은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인스트루멘탈 같은 스타일에 보컬도 같이 생각을 하고 있어요. 요즘 키스 자렛이나 브래드 멜다우 같은 친구들도 ECM 스타일로 가기 시작하면서 클래식이나 전통 음악, 포크가 다 교배가 되니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완전 재즈의 언어보다는 포크적인 언어, 국악적인 것들, 클래식적인 거죠.

임형순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작곡에 팝 보컬의 개념이 필요할 텐데 이 부분도 고려하겠지요.
그렇죠. 이미 그렇게 맞춰서 쓰고 있기 때문에 다채로울 겁니다. 거기다가 또 베이시스트 이태윤 씨가 노래를 또 잘해요. 송골매 때도 그랬고 부활 때도 그랬고. 그래서 이태윤 씨의 보컬도 이번에 많이 들어갈 거예요.

임형순 이두헌 최태완은 원래 오리지널 멤버인데 이태윤과 장혁은 어떤 인연인가요.
이태윤은 1980년대 중반 그때부터 항상 저희 언저리에서 있었던 친구예요. 장혁은 후배이긴 하지만 워낙 프로고. 그래서 팀으로 어딜 나갈 때는 오래전부터 항상 같이했어요. 이 다섯 라인업으로 이미 한 10년 정도를 활동하고 있었죠.

이두헌 씨는 젊었던 시절부터 음악의 깊이와 관련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압니다. 우선 기타리스트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섯손가락 시절과 미국 유학에 다녀온 후 어떻게 달라졌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단어가 많아졌죠. 예전에는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버지, 어머니 정도였다면 지금은 부친, 모친까지는 할 수 있는 거죠. 언어의 깊이나 수준은 확실히 나아졌죠. 근데 또 그런다고 기타가 좋아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반대로 그게 더 정제가 되고 말이 적어지면서 훨씬 더 좋은 기타가 된다고 생각해요.

먼저 다섯손가락 멤버들보다 선배인 김성호와 어떻게 인연이 닿은 건지 얘기해보죠. ‘풍선’의 작곡자잖아요. 1집에도 ‘좁은 골목’ ‘작은 기쁨’ ‘슬픈 사랑’ 등 3곡이나 주었고요.
옛날 서울 신림동 살던 집 앞에 레코드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가 중앙대 캠퍼스밴드 ‘블루 드래곤’ 드러머 분의 친형이 운영하시는 곳이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제가 기타를 좀 치고 그러니까 그분께서 “네가 기타를 제대로 치려면 우리 팀에 있는 성호 형을 한 번 찾아가 봐라”라고 말했고 , 저는 친구 3명이랑 김성호 씨가 살고 계셨던 강남 대치동 은마 아파트로 무작정 찾아갔죠. 거기서 오디션 비슷하게 봤는데 나머지 두 명은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너희는 공부해라 그러면서요. (웃음) 저 보고는 시간 되는대로 오라고 하셔서 처음엔 일주일에 1~2번 정도 가다가 나중엔 거의 맨 날 갔죠. 당시에 신림동에서 대치동을 가려면 버스를 세 번 정도를 갈아탔어야 해서 오고 가는 길이 쉽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어쨌든 거기 다니면서 김성호 형으로부터 기타 연주부터 화성, 작 편곡까지 다 배웠죠.

당시에 다섯 손가락은 학생들인데 연습실까지 소유하면서 집요하게 음악에 매진하는 팀이라고 소문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김성호씨 이후의 과정들에 대해서 설명 좀 부탁드려요.
일단 저희 싱어가 원래 ‘세월이 가면’을 부른 최호섭 씨였고, 베이스는 작곡가 하광훈이었어요. 근데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두 명이 탈퇴한 거죠. 그래서 녹음을 시작했을 때 베이스는 조원익 선생이 쳐줬어요. 중학교 때부터 이미 각자가 자기 악기에서는 프로를 지향했던. 1집 멤버 정리를 해보자면 임형순, 이두헌, 박강영, 최태완이 있고 베이스는 빈자리나 마찬가지였죠. 근데 여기에 이우빈이라고 저희를 서울음반에 소개했던 매개체가 되었던 친구가 사진을 같이 찍은 거였죠. 실제로 베이스는 조원익 씨가 쳤고요.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 히트하고 나서 팀 내부의 분위기는 어땠었나요.
안 좋았죠. 사실 저희는 음악적인 욕심이 많았었는데 임형순 씨가 들어오면서 대중적으로 변한 편이죠. 형순이가 가요 지향적인 친구이기도 했고 소속사도 막상 음반으로 내려고 하니까 이전 노래들은 안 팔릴 거라며 노선 변경을 요구했죠. 그러다 보니 저희 음악이 좀 더 쉽기도 하면서 상업적인 쪽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그렇다면 1집이 성공할 때부터 이미 음악적 트러블이 있었겠네요.
그렇죠. 박강영 씨 같은 경우에는 음반 내자마자 아예 활동을 같이 못했어요. 녹음만 같이 한 거죠.

당시 새로운 세대의 평단이 호평하고 지원해주면서 대학생들에게 많이 알려진 것으로 압니다. 평가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강인중 씨는 레코드사 제작부장으로 우리 앨범을 제작했고 유명 라디오작가인 왕광순, 그리고 재즈평론가 김진목 선생 등이 있겠네요. 몇몇 분은 아예 연습실로 찾아오시기도 했어요. 오셔서 얘 네들 음악은 신선하고 좋다는 얘기를 해주셨죠. 대학교 1학년 애들 작품으로 프로 음반을 만들어 보라고 했으니까 그만한 칭찬이 없죠.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같은 경우는 실제로 수요일에 빨간색 장미가 많이 팔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어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이나 ‘새벽 기차’는 어떤 상황에서 쓰게 된 곡들이죠?
앨범에 실을 곡들을 웬만큼 갖춰 놓은 상황이었는데 회사 쪽에서는 지금 있는 곡들로는 히트하기 어렵다면서 두 곡 정도는 대중적인 걸 써야 한다고 했어요. 그렇게 오더가 떨어졌고 부랴부랴 급하게 쓴 노래가 ‘새벽 기차’랑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이죠. 두 곡 모두 가장 나중에 쓴 곡이고 엉겁결에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근데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 굳이 수요일을 붙인 이유가 있나요. 그럼 호응이 있을 걸로 생각했나요.
그냥 만든 날이 수요일이었어요. (웃음) 짝사랑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날 퇴짜를 맞고 명동 거리를 걸어가는데 백화점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장미꽃을 팔고 계시더라고요. 그걸 보고 나서 버스를 탔는데 또 뒤에 여학생들이 수다를 떨어요. “밖에 비가 오는데 오늘이 수(水)요일이라서 그런가.” 이렇게 농담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할머니가 장미 팔던 모습, 비오는 수요일 이런 게 엮이면서 나온 거죠. 한창 담배 피울 때였는데 급한 대로 담뱃갑 안 종이에 줄 쳐서 멜로디랑 가사를 썼죠.

기법적으로 음악적인 실험도 많이 하셨지만 ‘수요일에 빨간 장미를’에서는 빨간색, ‘풍선’에서는 노란색을 쓰는 걸 보고 색깔 감각 그러니까 은근히 대중적인 감각도 있다고 느꼈거든요. 색감 같은 게 이두헌에게 있어서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색에 대한 생각이 있기도 하고 일단 무채색보다는 컬러를 좋아해요. 음악 작업을 할 때도 항상 색깔을 많이 떠올리는 편입니다. ‘이층에서 본 거리’나 ‘전자오락실에서’, ‘서울은’에서는 회색이라고 하면, 또 어떤 곡은 약간 오렌지색, 푸른색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러죠. 곡 작업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색깔을 생각하기 때문에 은연중에 색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간다고 봅니다.

1집과 2집이 어쨌든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죠. 그런데 수록 곡 가운데 대중적으로 소화가 안 되어서 아쉽게 여기는 곡은 있나요.
최근에 새로 녹음을 진행하면서 임형순 씨가 1집에 실린 ‘고독한 이에게'(이두헌 작사작곡이다)라는 곡을 다시 녹음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다시 들어봤는데 그 당시에 어떻게 이런 노래를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사도 좀 우울한 면이 있고.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는데요. 이두헌 음악은 왜 그렇게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우울했던 건가요.
저희 아버지는 이북에서 내려오신 실향민이에요. 거기선 양조장을 운영할 정도로 부잣집 아들이나 다름없었는데 일사 후퇴 막바지에 내려오면서 완전 빈털터리가 되셨잖아요. 물론 혼자 사업을 정말 열심히 하셔서 성공은 하셨는데 어쨌든 아버님의 성격이 저랑은 썩 맞지 않았죠. 그야말로 애증의 관계죠. 그게 결국엔 저를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죠.

그런 환경에서 음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텐데요.
그렇죠. 아버지께서 술 많이 드신 날에는 고향 생각도 나고 하셔서 난폭해지기도 하셨어요. 화목한 가정을 꿈꿨는데 그게 어려웠죠. 그러다 보니까 20대까지만 해도 “집은 가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고 모든 게 다 어두워졌던 거죠.

보컬에 있던 임형순이 2집 후 팀을 떠나게 되었어요. 그때 솔직히 임형순과의 갈등이 심했나요.
아니에요. 형순이랑 저는 그다지 갈등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렇게 편하게 잘 지내는 거죠. 최태완 씨가 농담처럼 자꾸 얘기하는 건 있어요. ‘뭔가 준비된 게 (솔로) 있었을 것이다.’ 제가 보기에도 좀 그랬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옷 잘 입고 솔로로 나가면 반응이 좋았으니까. 잘 모르긴 해도 일종의 제안이 있었을 거예요. 준비를 계속하다 보니까 계속 겉돌게 되는 거죠.

그리고 저희는 발표할 곡들을 공연장에서 미리 선보이는 편이었어요. 근데 아무래도 곡을 제가 쓰다 보니까 자기한테 맞는 노래가 점점 없어진다고 느꼈던 거죠. 본인이 생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전자오락실에서’, ‘이층에서 본 거리’의 가사는 무겁고 우울했으니까.

‘전자오락실에서’는 인스트루멘탈(연주곡) 아니었나요.
가사가 있었는데 심의 통과를 못했어요. 무조건 안 된다는 식이었죠. 전자오락실에서 사행성을 조장한다든지 청소년 유해시설에 대한 예찬이라는 이유를 대면서요. 그래서 3집에는 인스트루멘탈로 남았다가 4집에서 다시 가사가 생겼죠.

다섯손가락 3집으로 된 앨범에 수록된 ‘이층에서 본 거리’는 마니아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꼽힐 만큼 호평을 받았지요. 전 당시 ‘수녀’가 가사에 등장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곡인가요.
대학생 때 제가 이층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아래층 구두 부스에서 중학교 때 친했던 친구가 구두를 닦고 있었어요. 구두를 가지러 올라왔다가 몇 년 만에 우연히 절 만난 거죠. 얼마나 놀랐겠어요. 다 집어 던지고 바로 나가 버렸죠. 어린 마음에 본인은 대학을 못 나오고 구두를 닦고 있다는 현실이 좀 그랬었겠죠.

그때 마침 수녀가 지나가고, 건너편에 약국이 있는데 밑에 담배라는 간판이 붙어있고. 또 조금 있으니까 초등학교 6학년쯤 되어 보이는 애가 껌 사달라고 놔두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 상황을 그대로 썼던 거죠. 원래 가사는 ‘어릴 적 내 친구는 구두를 닦고/ 세상은 모순 속에 깊어만 가고/ 온종일 껌을 파는 아이도 있고’였어요. 이것도 심의에 걸리면서 통과가 안됐죠.

그래서인지 ‘이층에서 본 거리’가 분명히 다섯 손가락의 타이틀로 나왔음에도 많은 세월 속에서 이두헌의 솔로로 사람들이 기억을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 다음이 다섯 손가락의 마지막인데 3집에서 이미 반응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왜 4집까지 강행했나요.
이제 음악을 안 하기로 마음을 먹고 3집의 마지막에 ‘노래를 마치며’라는 곡을 넣었어요. 그러고 나서 결혼까지 했는데 머릿속에선 계속 멜로디가 생각나고 기타만 잡으면 또 새로운 코드가 생각나고 하니까. 그래서 써놓은 노래들 마무리만 하겠다. (웃음) 그런 마음가짐으로 만들었죠.

사실 저도 죄송하지만 4집은 안 샀어요. 그래도 4집까지 내면서 이두헌 씨가 거둔 음악적 성과가 있다면 뭘까요.
저는 제가 ‘주제’ 갖고 노래를 만들려고 애쓴 80년대의 뮤지션 중 한사람이었다고 생각해요.

주제라고 한다면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예전에 김민기 씨나 한대수 씨가 무엇을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상태에서 노래를 만들었거든요. 막연한 대중적 접점만 찾는 게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테마’를 가지려고 했죠. 도시에 대한 반대든, 동심파괴에 대한 이야기든 1980년대 들어와서는 그렇게 주제를 가지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사라졌죠. 그래서 저는 노찾사 이런 개념과는 달리 한 가지 주제를 갖고 음악을 만들었어요. 지금도 계속 하고 싶은 것이 그런 거예요.

그 뒤로 이두헌 씨가 겪었던 음악적 갈등을 듣고 싶습니다.
프랭크 시내트라가 80살에 < Duet > 앨범으로 그래미상을 탔잖아요.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제 나이가 서른 중반 정도로 기억하는데 ‘내가 음악을 팔십까지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일단 단어가 너무 없어요. 요리로 치자면 냄비 하나랑 라면 하나만 달랑 있는 거죠. 파도 없고 계란도 없고. 그래서 그때까지 음악을 하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됐죠. 사실 유학은 오래전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결심을 한 건 딱 그때인 거죠.

처음에는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 게 아니었어요. 1993년 보스톤 소재 버클리 음악대학 프로듀싱 전공으로 갔는데 첫날 학교 퍼포먼스 센터에서 기타 과 전공 선생님 7명이 리사이틀을 한 거예요. 기타도 안 가져갔었는데 그걸 보고 바로 한국에 전화해서 기타를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로 다음 학기에 기타를 배우기 위해서 퍼포먼스 전공으로 바꿨어요.

버클리에서 배운 것은요.
다양성이죠. 이스라엘이나 브라질 같은 여러 인종의 음악을 만나잖아요. 똑같은 기타에 똑같은 장르를 쳐도 그 나라나 개인의 인생의 색깔들이 느껴져서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래서 음악은 결국 글로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보스턴이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등록금과 수업료도 그렇고… 1996년까지 학비를 어떻게 충당을 했나요.
그때 이미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벌어두었던 수입이 있었죠. 그리고 지금 얘기하면 아무도 안 믿을 얘기지만 그때 컴퓨터 프로그래밍 음악 2세대라고 할 정도로 작업을 많이 했어요. 조규찬의 ‘따뜻했던 커피조차도’, 김건모의 ‘첫인상’을 비롯해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의 컴퓨터 시퀀싱을 전부 제가 맡아서 했었죠. 당시에는 편곡료보다도 비싸게 받았어요. 세션이 한 30만원 받을 때, 프로그래밍 하는 사람은 100만원을 받았으니까요. 거기다 프로그래머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었죠.

이제 한국 K팝도 시장 측면에서 글로벌로 가고 있는데 BTS를 비롯한 K팝의 도약에 대해서 음악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저는 사실 큰 점수는 안 줘요. 기초가 부족하다고 봐야죠. 예를 들면 비틀스를 가지고 있는 영국.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 딥 퍼플, 레드 제플린을 들으면서 자란 세대의 자녀들. 심지어는 일본 애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친구들은 최소한 장르에 대한 존중이 다 있잖아요. BTS가 지금 K팝으로 세계에서 최고라고 하더라도 김민기, 노찾사, 신중현도 최고라고 생각해 주는 분위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죠. 이렇게 뿌리가 약한 식물은 그렇게 크게 자라지 못하거든요.

음악적인 면에서 토양이 굳지 못한 거고 또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존중심도 부족하고. 이런 점이 아쉽죠. 어제 (이)승환이랑 같이 기타치고 놀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번에 < 이승환과 아우들 >이라는 공연을 했어요. 근데 제가 “승환이 네가 우리나라에서 ‘이승환과 형님들’은 할 수 없다는 게 참 안타깝다”라고 했어요.

그래도 나름 우리가 외국 팝과 록을 들으면서 내공을 쌓아온 건데 어느 순간부터 뿌리가 약하다는 게 드러났을까요.
아무래도 프로덕션 개념이 발전되면서 그랬다고 봐야죠. 예전에 음반사 시스템이었을 때는 음악을 아는 분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어느 날인가부터 장사를 하는 사람이 음반을 제작하기 시작한 거죠. 음악이 예술에서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봐요. 옛날 동아기획이나 지구레코드처럼 좋은 음악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죠.

홍보지원도 크게 없었고 TV에 많이 나오지도 않았었는데 KBS에서 그룹상까지 수상했다. 당시에 사람들이 다섯 손가락을 왜 그렇게 좋아했다고 보나요.
그렇게 좋아한 것 같진 않은데. (웃음) 물론 음반이 많이 팔리긴 했었죠. 회사에서 65만장이 팔렸다고 저희한테 얘기를 했으니까. 활동 당시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은 딱 한 번 불렀어요. 그 노래를 TV에서 불러본 적이 없어요. 홍보시스템은 제로였죠.

솔직히 ‘풍선’은 1집의 곡들보다는 가볍다는 이미지를 주는 곡이다. 그런데 나중에 동방신기가 리메이크해서 대박을 쳤을 때의 느낌은 어땠는지.
이 노래가 그럴 만한 곡인가? (웃음) 전혀 예상 못 했죠. 그렇게까지 재조명 받을 만한 노래인가? 근데 다시 발표했을 때 보니까 또 (동방신기의 분위기에) 맞더라고요.

그래도 새로운 세대가 다섯 손가락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죠. 김광진 씨는 동방신기가 ‘마법의 성’을 불러줘서 그 세대 아이들이 자기를 안다는 게 영광이라고 했었거든요.
저도 당연히 인정은 하지만 사실 크게 감흥은 없었어요. 김광진 씨와는 정반대네요. 저는 누구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만 아무나의 뮤지션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대상으로서 저를 봤을 때 누구나 나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날 좋아하는 건 제가 사양하겠다는 거죠.

다섯 손가락은 분명 아마추어의 순수와 프로뮤지션십을 공유한 팀이죠. 그래서 ‘새벽 기차’나 ‘풍선’이 먹혀든 게 여학생들이 들을 음반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결국엔 그건 작사와 작곡을 주도한 이두헌 덕분 아닐까요.
그건 아니에요. (웃음) 팀이 다 같이 한 거니까. 다 뛰어난 친구들이었잖아요. 다섯 손가락 해체하자마자 최태완은 김현식부터 해서 봄여름가을겨울, 조용필까지 갔으니까. 지금도 같이 연주해보면 깜짝깜짝 놀라요.

최태완은 음악적 스승이 고 김명곤 씨 아닌가요. 우리 음악계 편곡분야 제일의 인물인데..
맞아요. 개인적으로 제일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했을 때 가장 먼저 전화하신 분도 김명곤 선생이었고요. 아직도 잊지를 못해요. 전화도 방금 개통하고 새로 한 번호인데도 전화를 주셨어요. “이제 너희 세대가 음악 신에서 목소리도 내고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정말 기대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러고 얼마 안 되어서 돌아가셨어요.

이두헌 선생님을 음악가로 만든 인생의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먼저 한대수. 아홉 살 때 그의 ‘바람과 나’라는 노래를 듣고 그랬고. 그 후론 이정선이라는 뮤지션. 저랑 너무 가깝지만 지금도 그걸 영광스럽게 생각할 정도예요. ‘섬소년’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모든 노래가 음악적으로 세련됐죠. 편곡이나 작곡도 잘 하셨고. 제일의 롤 모델이었죠. 물론 김민기, 한 대수 그리고, 김정호도 있지만 세월이 다 지난 다음에 한 사람만 내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면, 이정선 이 세 글자에요.

팝 쪽에선?
외국에서 한 사람만 고르라면 지미 헨드릭스죠. 너무 완벽해요. 연주만의 얘기가 아니라 보컬, 작곡, 톤, 뉘앙스, 뮤지션십. 그냥 모든 면에서 뛰어났어요. 그다지 높지 않은 목소리인데도 노래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웃음) 이걸 배웠죠. 사실 저도 노래를 할 생각은 없었거든요. 그래도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에게 용기를 얻었죠. 자기 개성이 확실했죠.

음악적으로 가장 만족했던 하이라이트 모멘트는.
남들이 볼 때는 제일 존재감이 없었을 때예요. 4집의 ‘서울은’이라는 곡의 심의가 해결이 되면서 인스트루멘탈이 아닌 노래로 나올 수 있었을 때 좋았아요.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도시/ 저녁 찬거리에 팔아버린 자존심이 울먹이는 곳’ 이런 가사가 들어갔는데, 들뜬 88년 올림픽 시점에서 일반적인 서울 정서와는 반대되는 곡이었죠. 하지만 음악가로서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서 좋았죠.

미국에 다녀와서 낸 앨범들은 어떤 게 있죠.
재즈부터 펑크(Funk), 라틴까지 들어있었고, 인스트루멘탈 곡도 3~개가 있는 2000년의 < Imagine >이 있고요. 그 다음에 제가 다 노래한 < Sings >, ‘두개의 시계’ 정도가 있겠네요.

기본적으로 이번에 다섯 손가락이 다시 만나게 된 이유를 뭐라고 할까요.
형순이 얘기로는 사람이 이 나이를 먹으면서 반목하지 않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한 모습인데, 아직까지 (연주할) 손이 죽지 않고 있을 때 하나 정도 남겨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더라고요.

교편은 언제부터 잡은 거죠.
귀국하자마자 2000년에 신설된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 음악학과의 겸임교수를 맡았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실 교수가 잘 맞지는 않아요. 시간도 그렇고 정치의 세계 느낌도 들고. 2019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있어요. 다음 학기부터 초빙으로 바뀌는데 그렇게 되면 이제 경희대는 정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죠.

중학교 때 음악에 꽂혀서 40년 가깝게 활동을 하고 있네요. 미국 가서 공부도 하고 돌아와서 어떤 형태든 기쁨도 좌절도 겪었는데 음악은 도대체 이두헌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제 몸을 구성하는 유기물 중 하나로 봐요. 뚜렷한 의미가 있지는 않은 거죠. 사람들이 숨을 잘 쉬려고 애를 쓰잖아요. 숨이야 그냥 붙어있는 건데 호흡법 강좌를 배워가면서 하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정도의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거죠.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너무 좋네요. 코로나 팬더믹이 해제되어 더 재미있게 활동했으면 좋겠네요.
저희 멤버들도 바라고 있어요. 특히 작은 공연을 많이 하고 싶어 해요. 원래도 그랬지만 이태윤이나 다른 친구들이 100석, 200석 규모의 공연장을 너무 그리워해요.

인터뷰: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정리: 임진모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