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