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날, 모든 순간 (Every day, every moment)’와 ‘너를 만나’의 연이은 히트에 이문세와 변진섭, 성시경으로 이어지는 한국 발라더 계보에 이름이 거론될 정도였다. 흡인력 있는 음색과 가창에 2020년대 초반 발라드 왕좌는 폴킴의 차지였다. 선율감이 빼어난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 그는 ‘비’와 ‘안녕’ 등 히트곡 대부분을 작곡하기도 했다.
대새 래퍼 빅나티와 함께한 ‘한강에서’는 감각적인 팝 록이다. 젊은이들의 대표적 데이트 코스 한강을 소재로 설레는 감정을 형상화한다. 힘을 뺀 가창은 봄과 초여름의 싱그러움을 그리고, 빅나티의 랩은 “잠실보다 잠원이 더 좋지만, 잠이 많은 네 침실에서 가까우니까”란 구절로 공감을 끌어낸다. 절절한 발라드 이외에도 다양한 장르에 두루 능함을 입증했다.
더 콰이엇이 이끄는 앰비션 뮤직이 영입한 최초의 프로듀서일 만큼 웨이체드는 준수한 작곡 실력을 갖췄다. 트렌디한 힙합과 부드러운 알앤비를 모두 쉬운 곡조로 풀어내는 대중적 감각은 ‘Why do u say’, ‘Everything’과 같은 곡을 통해 이미 충분히 드러낸 바 있다.
‘뚝’도 그의 기량을 여실히 증명할 곡이다. 우선 도처에 재미 요소가 가득하다. 보사노바 리듬을 차용한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한 물기 있는 비트, 전화 다이얼 소리를 악기로 치환하고 의성어 ‘뚝’의 이중적 의미를 가사로 활용한 시도 등이 신선하다. 히트 보증수표 릴러말즈와 빅 나티의 호흡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반가운데, 둘의 목소리가 유독 빛나는 건 이렇게 감도 높은 멜로디와 재치 있는 표현을 뽑아내는 프로듀서의 번뜩이는 감각 덕분이다.
인연인 듯 정인 듯. 쉽게 정의되지 않는 사랑은 스무살 청년에게 설렘 가득한 < 낭만 >의 시절을 안겨줬지만, 동시에 처음 맛보는 지독한 패배감을 몰고오기도 했다. 빅 나티의 세 번째 EP < 호프리스 로맨틱 >은 행복의 소용돌이가 한 차례 휩쓸고 간 잔해 위에서 시작한다. 전반적인 포맷은 비슷하더라도 ‘희망을 잃은 낭만’이라는 캐치프레이즈답게 전작에 만연하던 풋풋함을 지우고 그 자리에 대신 처절한 실연의 아픔을 채워 넣었다.
향상된 보컬 표현이 먼저 두드러진다. 특유의 허스키한 톤은 유지하되 본래 구사하던 싱잉 랩 경력을 연마해 호소력 있는 가창과 담백한 래핑이라는 두 가지 문법으로 환산했다. 두 양상을 오가며 완급을 조절하는 방식이 능숙하게 펼쳐진다. 악뮤의 이수현과 합을 맞춘 오프너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에서 부드러운 듀엣의 태도를 취하다가도, 로킹한 사운드 아래 애절함이 주가 되는 ‘뻔한 발라드’에 접어들자 강력하게 소리를 내지르며 존재감을 휘어잡는 것이 그 예시다.
주제가 다층적인 만큼 곡을 풀어내는 방식 또한 변화를 맞이했다. 신시사이저와 어쿠스틱의 독특한 전환을 통해 듣는 맛을 더한 ‘덫’과 흥겨운 뉴 잭 스윙 리듬 속 오토튠을 적극 이용해 반전을 도모한 ‘빠삐용’의 작법이 흥미롭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과거 당찬 포부를 내비치던 < Bucket List >의 ‘Frank Ocean’과 점차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시작한 < 낭만 >의 ‘Vancouver’를 하나씩 언급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차근차근 돌아보는데, 이 과정에서 세 장의 연작이 마치 ‘성장 3부작’처럼 다가오도록 만드는 서사의 매듭을 제공하기도 한다.
몰입을 방해하는 지점은 존재한다. ‘정이라고 하자’의 아성을 위시한 ‘친구로 지내다 보면’은 앨범의 장치로 기능하는 ‘수록곡’의 역할과 대중 친화적인 ‘히트곡’ 사이 조율이 모호한 탓에, 작품의 깊은 감정선을 견지하려는 빅 나티와 평범한 조연을 자처한 김민석의 퍼포먼스가 상충하는 문제를 빚는다. ‘몽유’는 개성이 강한 그냥노창과 캐릭터성이 다소 어그러지며 부자연스러운 콜라보를 낳았던 ‘결혼행진곡’의 기억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포스트 말론 ‘Circles’ 풍의 서정적 비트와 후반부 스매싱 펌킨스의 ‘Today’가 떠오르는 기타 리프 역시 기시감을 더하는 요소다.
그럼에도 작사-작곡진을 과감히 압축하고 통일해 곡간 연결성을 대폭 강화하고, 키드밀리와 소금(Sogumm)의 작업물로 정밀함을 입증한 프로듀서 드레스(Dress)와의 상호 교류를 통해 자신이 설 수 있는 공간을 더 크게 확보했다는 점. 그리고 자가발전에 대한 욕심을 당당히 결과물로 나타냈다는 점에서 무수한 잠재력이 포착된다. 무섭게 확장하는 스펙트럼도 이를 방증한다. 불과 몇 년 전, 좋아하는 아티스트에 대한 오마주로 자기색을 정하던 소년이 기억난다. 고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 여러 질료가 뒤섞이는 가운데 어느덧 자신만의 팔레트가 만들어지고 있다.
– 수록곡 – 1.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은 (Feat. 이수현) 2. 뻔한 발라드 3. 친구로 지내다 보면 (Feat. 김민석 of 멜로망스) 4. 덫 5. 몽유 (Feat. 그냥노창) 6. 마지막 시 7. 빠삐용
3세대 걸그룹 여자친구의 가창을 책임졌던 유주에게 솔로 가수 타이틀은 어색하지 않다. 본격적으로 출사표를 낸 건 2021년이지만, 2015년 로꼬와 함께한 스테디셀러 ‘우연히 봄’과 3년 후 발표한 감성적인 알앤비 ‘Love rain’이 기반을 다졌다. 작사 작곡의 지분을 가져간 첫 번째 EP < REC. > 이후 6개월 만에 나온 신곡은 달콤한 한여름 밤의 꿈 같은 노래다.
음역과 리듬감이 두루 뛰어난 가창과 피아노 기반의 감각적인 사운드가 푸른 여름밤을 시각화한다. 직접 참여한 가사는 변덕스러운 마음을 여름 날씨에 비유하지만, 그 끝엔 풋풋한 사랑이 있고’낭만 래퍼’ 빅 나티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듯한 재치 있는 랩을 더했다. 청춘의 가슴을 간질이는 ‘이브닝’은 솔로 행보의 가속을 붙여줄 시즌 송이다.
만 열아홉의 젊은 래퍼 빅나티는 로맨틱 월드를 건설해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힘든 힙합 문화의 문턱을 낮춘다. 힙합과 알앤비를 아우르는 싱잉랩은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가사는 공감대를 구축한다. 힙합 오디션 프로그램 < 고등 래퍼 >와 < 쇼 미 더 머니 >를 통해 경험을 쌓은 그는 십센치와 함께한 ‘정이라고 하자’로 대중과의 간격을 더욱 좁혔고 두 번째 EP < 낭만 >을 통해 싱잉랩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180도 바뀔 수 있다는 ‘낭만교향곡’과 영어 가사의 장점이 돋보이는 ‘Vancouver’는 여성을 거칠게 다루는 몇몇 가사들과 달리 1970~80년대 국내 포크 음악의 순정을 담았다. 다만 확고한 콘셉트로 무게추는 쏠렸고 몇 차례의 치기 어린 가사에 워드 플레이와 라이밍의 위력도 덜하다. 힙합에 뿌리를 둔 뮤지션인 만큼 랩 본연의 연구도 필요하다.
각양각색 뮤지션들이 십 대 래퍼의 너른 취향을 드러낸다. 재즈의 터치를 심은 ‘결혼행진곡’은 섬뜩한 집착으로 일관성에 균열을 내고 시온, 예스코바, 안다영이 돌림노래처럼 개성을 쌓은 ‘Hachiko’는 멜로우한 알앤비 트랙이다. EP와 정규 앨범 사이에 있는 듯한 애매한 분량임에도 다양성을 포섭했다.
공격적인 랩과 비트 없이도 매력적이다. 역으로 대중가요에서 질리도록 노래했던 주제를 파고들어 빅나티만의 낭만론을 설파한다. < 낭만 >은 쏙쏙 박히는 멜로디로 대중성을 붙잡았고 이채로운 스타일도 돋보인다. 음악감독 꿈나무의 수줍은 도전이다.
-수록곡- 1. 낭만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2. 낭만교향곡(Feat. 창모, 박재범) 3. Lovey dovey(Feat. 미노이) 4. Poker (Feat. 다운) 5. Vancouver 6. Actor (Feat. 피에이치원) 7.결혼행진곡 (Feat. 디보(Dbo)) 8. Hachiko (Feat. 시온, Yescoba, 안다영) 9. 마침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