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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기적 (Miracle)’ (2023)

평가: 2.5/5

수많은 외로운 밤을 지나 열네 번째 음반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한국 록의 역사와 나란히 걸어온 부활이 전작 < Purple Wave >(2012) 이후 간헐적으로 발매된 싱글을 묶어 올가을 복귀를 예고한다. 긴 공백은 변화를 동반했다. 기나긴 역사에 굵직한 명 보컬리스트들을 대거 배출한 그룹은 5년간 멤버로 활약한 김동명과 작별하고 박완규를 다시 품에 안았다.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정통 록발라드다. 리더 김태원이 주조한 서정성 짙은 멜로디는 ‘사랑할수록’, ‘Never ending story’의 위력엔 못 미치나 무디지 않았으며, 독백하듯 한음 한음 쏟아내는 허스키 보컬엔 노련미가 배어 있다. 예스러운 선율에 대한 반가움과 피로감이 공존하는 싱글. ‘기적’을 바라기보다 익숙한 문법으로 고유의 감성을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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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8 채제민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여덟 번째 주인공은 록밴드 부활의 버팀목인 드러머 채제민이다.

호인(好人). 35년 경력의 베테랑 드러머 채제민이 준 인상이다. 따스한 언행과 호탕한 웃음에 분위기가 밝아졌고 이야기도 술술 풀려나갔다. 1987년 강변가요제 수상작 ‘매일 매일 기다려’의 주인공 티삼스로 데뷔한 이후 신승훈과 김건모의 세션 드러머로 활약해온 그는 1998년 동경했던 록밴드 부활에 가입했다. 1년간의 짧은 활동과 안타까운 이별. 하지만 명곡 ‘Never ending story’가 수록된 여덟 번째 앨범 < 새, 벽 >에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째 부활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채제민에게 인천은 어떤 의미일까? 나고 자라며 막대한 음악적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십여 년간 드럼 학원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한 곳. 배움과 가르침이 공존했던 인천은 음악 인생의 터전이자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재능형이 아닌 철저한 노력형’이며 ‘가늘고 길게 음악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땀 흘린 자의 무게감과 겸손이 묻어 나왔다. 올해 각종 페스티벌에서 펼쳐질 부활의 공연에 흥분된다는 그는 현재 대학교 겸임 교수와 인터넷 라디오 디제이 등 다방면에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이즘과의 인터뷰를 기억하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2005년이니 벌써 17년이 지났다.

원래 인천에 거주하시는지?
인천 토박이다. 태어난 곳은 율목동이고 지금은 청라에 산다.

부활 활동은 몇 년째인가?
1998년에 들어와서 6집 < 理想 시선 >부터 활동하고 있으니 25년째이다. 리더 겸 기타리스트 김태원 다음으로 오래된 멤버이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활의 드러머로 활약하고 계시는데 롱런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어렸을 적 헤비메탈을 들을 때도 멜로디컬한 음악을 선호했고 자연스레 부활의 팬이 되었다. 부활 특유의 서정성에 매혹되었달까? 이승철 밴드에서 세션 활동을 하던 시기 키보디스트 최승찬이 부활을 소개해 준 계기로 가입하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흠모해왔던 분들이라 따로 굳은 마음을 먹지 않아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7집 < Color > 은 참여하지 않았다. 재합류 이후 8집 < 새, 벽 >에 수록한 ‘Never ending story’가 성공하며 완전한 멤버십을 확립했다고 보이는데 그동안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인가?
뻔한 답변이 될 수도 있지만 역시 2002년 ‘Never ending story’의 성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처음에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 윤도현의 러브레터 >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다가 보컬 이승철이 감정에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렸는데 아마 뮤지션으로서 승패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시험대로 여긴 것 같다. 이 일을 기점으로 봐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곡과 앨범에 대한 인기가 대폭 상승해 50여 개의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했다. 얼핏 듣기론 곡이 교과서에도 수록됐다고 들었다. 감사한 일이다.

일찍이 부활을 좋아하셨다고 했는데 언제부터였는가?
부활의 인천 시민회관에서 공연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당시 티삼스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부활을 흠모했던 것 같다. 시나위도 그렇고 백두산도 좋아했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부활의 음악을 선호했다.
*티삼스: 1987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매일 매일 기다려’로 동상을 수상한 캠퍼스 밴드

부활 활동과 후학 양성을 병행했다. 새로운 활동 분야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데 계기는 무엇인가?
‘필 음악학원’이라는 드럼 교습소를 1990년대 초중반에도 운영했다. 인천 출신 뮤지션들이 꽤 많이 거쳐 간 곳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보람을 느꼈다.

레슨할 때 주요 포인트는 무엇인가?
기본적인 루디먼트(Rudiment)을 가르친다. 각 친구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해 그쪽을 특화하려 한다. 모든 노래를 잘 소화하기는 어렵기에 빠른 곡을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라면 그 장점을 살리도록 도와준다.
*드럼 루디먼트(Drum Rudiment): 더욱 확장되고 복잡한 드럼 패턴의 기초를 형성하는 비교적 작은 패턴들의 모음

여전히 강의하고 있는지?
백석 예술대학교의 겸임 교수다.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하면서 밴드 앙상블과 합주를 지도한다. 강의를 열심히 하면서도 밴드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는지?
마음속 행복을 가장 강조한다. 음악을 비롯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즐겁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공부 등 떠밀면 더 잘 안 하게 되듯 음악도 마찬가지다.

드러머로서, 또 교육자로서 영화 < 위플래시 >를 보았는가? 감상이 궁금하다.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외국의 뮤지션은 물론이고 영화 및 각종 예술 작품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 위플래시 >같은 음악영화들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일대기를 그린 외국 영화들을 보면 배우와 실존 인물 간 싱크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연습했으리라 생각한다. 가혹한 가르침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스틱을 들 만한 힘이 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채제민 드럼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레이드 백(Laid Back)이다. 같은 리듬을 쳐도 약간 뒤로 밀어 안정감을 준다. 정박의 템포에서 약간씩 빨라지는 습성의 드러머도 있고 느려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야 한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연주자는 신나는 곡에 강하지만 발라드를 연주할 때는 깊이가 부족하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약간 뒤쪽에 붙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부활 음악에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 신나는 음악에서는 부족한 면도 있다.
레이드 백(Laid Back): 리듬을 정박보다 조금 뒤로 밀며 그루브를 만드는 것.

최근 감명 깊게 본 드럼 연주가 있는지?
시베리아노(Estepario Siberiano)라는 사람이다. 결코 세계적인 드러머는 아니지만, 구독자가 60만이 넘는 유튜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드럼을 연주하다 하나의 스타일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시베리아노라는 두 가지 모두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의 일과를 영상으로 봤는데 종일 연습만 하더라. 굉장한 연습량을 통한 결실이라고 느꼈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다면 연주자로서 훌륭한 뮤지션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타고난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연습형이다. 타고난 재능이 하나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이자 밴드 사라하의 기타리스트 인재홍의 합주실에 따라갔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이 너무 좋았다. 당시에는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다.

부활 25주년을 한번 정리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17년 전 인터뷰했을 때는 주로 어려움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버티는 것’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예전만 해도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올인하는 문화였다. 요즘은 좀 바뀌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원을 운영했던 것도 음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워낙에 인생의 모토가 ‘가늘고 길게’이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드러머로서 음악 인생에 영향을 많이 준 앨범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내가 하는 음악과 느낌이 다르지만, 토토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제프 포카로는 리듬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다.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을 가진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도 들고 싶다. 기본기가 좋을 뿐 아니라 퍼포먼스가 정말 멋있었다. 밴 헤일런의 음악도 많이 들었고 ‘음악을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게 해준 밴드는 저니다.

언급한 밴드 중에서 채제민의 인생곡을 뽑자면?
머틀리 크루의 ‘Looks that kill’과 ‘Too young to fall in love’를 들겠다.

진행: 임진모, 염동교
정리: 염동교
사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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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정동하 인터뷰

새해 벽두에 만난 정동하는 그가 경연 프로그램에서 펼친 다채로운 퍼포먼스만큼이나 유연했다.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에서 승승장구하며 자신을 각인했지만 솔로 명의로 발표한 곡들의 존재감이 옅었던 게 사실. 그러던 그가 경사를 맞았다. 작년 1월께 발표한 싱글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서서히 인기를 높이더니 어느덧 노래방 애창곡이 된 것이다. ‘이 곡을 통해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채웠다.’라고 말하는 그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진행형 보컬’이라고 했다.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대응해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꾸어가고 있다는 설명. 팬데믹의 기간 그간의 여정을 되돌아보며 음악적 성숙을 이뤄냈다는 그는 록커의 정체성에 매몰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덧 솔로 경력 10년 차에 접어든 정동하는 ‘부활의 보컬’ 다섯 글자가 주는 무게감 혹은 책무감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만나서 반갑다. 근황은 어떠한가?
코로나로 인해 평년보다는 못했지만 그래도 가수 소향과 공연을 계속 진행했습니다. 원래는 KBS2의 예능 프로그램 <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 >(이하: 불후의 명곡) 에 자주 출연했지만, 경연 가수의 이미지가 강해지는 것 같아 요즘엔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2012년 말부터 2013년도까지 고정 출연하다가 그 이후로는 특집 때에만 나갔습니다. (정동하는 우승 트로피 15개를 보유, 2021년 현재까지 < 불후의 명곡 > 최다 우승자다) 2016년에는 MBC 예능 프로그램 < 미스터리 음악 쇼 복면가왕 >에 출연해 36대 가왕이 되었죠.

경연 프로에서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경연 프로그램은 마치 F1 레이스 같았습니다. 500명 소규모 대중에게 노래의 매력을 전달하는 게 목표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실험을 병행할 수 있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면서도 전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처음 노래를 시작할 때에는 기량을 선보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그 후로는 이야기, 메시지, 감정선의 전달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힘을 빼고 노래하게 되더라고요.

부활 활동을 하면서도 점차 가창에 힘을 빼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목소리에 이끼가 낀 가수’라는 표현을 기억합니다. 예전 가요들을 들으며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 힘을 빼고 자기 안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메시지의 훌륭한 전달자로 성숙해가는 과정인 것 같습니다.

이제 나의 대표곡을 얻었다!”

2021년에 나름의 성과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꾸준히 불리는 곡이 탄생했다.
개인적으론 ‘나름’을 넘어선 ‘최고’의 성과였습니다. 2005년 7월 데뷔하여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생각이나’, ‘사랑이란 건’ 등 부활 곡으로는 종종 언급되었으나 솔로 경력을 대표하는 곡은 없었어요. 그래서 ‘추억이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더욱 소중합니다.

감동적인 가사와 애절한 음색이 잘 어울린다. 소위 말해 ‘부르는 맛이 있는’ 곡이기도 한데, 가수 입장에선 어떻게 생각하는가?
작곡자 문성욱이 부활 시절의 ‘생각이나’를 듣고 음악의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훗날 작곡가로 데뷔해 저와 꼭 작업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요. 그 친구는 꿈을 이룬 셈이죠. 이번 곡에서 ‘생각이나’의 장점과 감성을 재현하려고 했는데 유튜브 댓글을 보면 대중도 그 의도를 파악하셨더라고요. 히트곡을 향한 갈망, 좋은 음악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픈 열망이 결합해 좋은 시너지를 낳았습니다. 일종의 노래방 도전 곡처럼 된 것도 성공 요인입니다. 부르기에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쉬운 곡도 아니라 많은 분께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정동하에겐 여전히 록커의 이미지가 강하다.
저는 록커의 정체성, 록 음악을 해야겠다는 의무감은 크게 없어요. 제 음악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이 상태가 그냥 좋을 뿐입니다. 틀에 갇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떠한 길이 생기더라고요.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가수들이 특히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수는 백수와 한 끗 차입니다. 시간이 생긴 김에 대학교 학사 졸업을 하고 대학원 한 학기를 마쳤습니다.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요. 그간 바빠서 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둘 채워가는 중입니다. 레이싱도 작년에 단 두 번 나갔지만,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어떤 발전이 있었나?
그간 무대 위에서 노래하기에 바빴지 제 음악을 돌아보는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여태까지 발표한 앨범들과 직접 무대 연출을 맡았던 < 불후의 명곡 >을 점검하며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예전에는 흉성의 구사 빈도가 높았다면, 지금은 비강을 많이 사용하는구나.’라는 식으로 변화 과정이 짚어가며 가창의 이해도를 높인 것 같습니다.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며 시대에 맞춰가고 있다!”

정동하 보컬의 핵심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다른 가수들과의 차별점은?
‘진행형 보컬’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속 연구하고 발전하려고 해요. 제 가창을 완성형으로 간주하고 연구를 멈추면 시간이 쇠퇴하게 됩니다. 시대마다 음악이 변하잖아요. 옛날 노래를 주로 트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면서 과거 음악이 시대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음향 장비와 연주, 편곡 스타일, 악기 상태 같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당대의 숨결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속 연기가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처럼 노래에서도 과한 기교의 사용이 어색해진 느낌이에요.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하는 표현법으로 시대에 부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부족한 면은 보완하고 장점은 살려야겠죠.

‘진행형’이라는 얘기는 결국 그 시대의 감성과 호흡이 다르기 때문에, 현시대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가 이런 측면에서 호응을 끌어낸 것인가?
가급적 담백하게 부르려고 노력했습니다. 감정의 과잉이 아닌 담담함은 부활 시절 김태원 형님이 추구했던 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진한 보컬을 선호하게 된다면 그 흐름을 따르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노래에 제 자신을 맞추는 편이고 그래서 곡마다 스타일이 다릅니다. (수줍게 웃으며) 아무래도 저는 < 히든 싱어 >에 나가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정동하의 대표적인 강점은 라이브 실력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생각해봤습니다. 제가 뭘 좋아하는지, 무엇에 가슴이 뛰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저는 싱글과 앨범 녹음을 지속해서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무대 자체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평소 다른 뮤지션 콘서트에 초청받아 가면 객석에서 손뼉 치는 것도 어색한 사람인데 제 무대가 되면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그 순간에 빠져들게 됩니다.

무조건 많은 무대에 서고자 한다!”

최근 꽂힌 곡은 무엇이 있는가?
사실 요즘 음악을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학구파처럼 음악을 찾아 듣지는 않지만, 소리에 민감한 편이라 한번 들으면 잘 잊지 않고, 그렇게 기억해 둔 음악을 편곡에 활용하곤 합니다. < 불후의 명곡 >에서 부른 ‘거위의 꿈’에서 ‘Over the rainbow’를 삽입한 게 그 예입니다.

최근에는 위켄드의 ‘Blinding lights’를 좋게 들어 < 유희열의 스케치북 >에서 커버했습니다. 예전에는 1980년대 드럼 머신 사운드의 인위성을 싫어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감성이 된 것 같아 오히려 특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위켄드의 강점은 역시나 좋은 송 라이팅일 것이다.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도 곡 자체가 좋다. 성공 가도를 위한 키포인트는 역시나 ‘좋은 곡과 만남’이 아닐까 한다.
그 의견에 공감합니다. 작년 10월에 나온 ‘너의 모습’이 소소하게 사랑받고 있고 바로 지난주에 네이버 웹툰 < 금혼령 >의 OST인 ‘사랑과 이별 사이’를 발표했습니다. 전주가 긴 것을 비롯해서 여러모로 ‘추억은 만남보다 이별에 남아’와 비슷한 결을 가진 곡이에요.

새해 첫 인터뷰인데 올해 계획을 묻고 싶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유가 생긴다면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다만 한 해 계획은 8년째 동일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무대에 서서 관객 여러분들을 만나는 거예요. 무대가 되었든 유튜브던 팬들과 만날 수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는 게 목표입니다.

오늘날 정동하를 만든 정동하를 만든 곡, 앨범 혹은 가수를 알려달라.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어릴 때부터 소리에 예민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음정이 불안한 보컬 곡보다는 연주곡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듣고 그런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악기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음악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앨범은 퀸의 < Greatest Hits >입니다.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의 하모니에 감탄했습니다. 학창 시절 하모니 혹은 팀워크를 이룰 무언가를 찾고 있었고 그러다 발견한 게 밴드부였습니다. 처음에는 키보디스트로 들어갔지만 남자 학교에 건반 주자가 워낙 희귀해서 주목도가 높아지더라고요. 그걸 피하려고 오디션을 봤는데 어쩌다 보니 붙어서 보컬을 하게 되었습니다. 밴드부 보컬을 하면서 음악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게 퀸의 앨범입니다.

닮고 싶은 보컬리스트로서는 임재범 선배를 꼽고 싶습니다. 진성과 가성의 경계에 있는 ‘반가성’을 그분처럼 유연하게 쓰는 분이 없죠.

인터뷰: 임진모, 염동교, 장준환, 정수민, 한성현
정리: 임진모, 염동교
사진: 정수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