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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1 박준형

개그맨이지만 DJ 활동으로 음악에 대한 감성과 식견을 드러내고 있다. 소위 “음악광”이지만 개그 분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음악을 사랑하지만 개그는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라디오 세대로서 라디오에 대한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에 실제 어릴 때부터 라디오 DJ를 하고 싶다 생각을 품었다. 그런데 DJ를 아무나 시켜주는 것은 아니잖나. 그래서 개그맨으로 먼저 자리를 잡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시기에 방송국에 DJ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보냈다. 그렇게 맡은 첫 프로그램이 ‘우비소녀’ 김다래와 함께했던 2000년대 초반 KBS의 < 천하무적 >이다.

개그맨 중에서 음악을 잘 아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감성과 공감 능력이 없으면 개그를 짜기 힘들다. 개그맨들이 그런 쪽에 특화된 사람들이다 보니 자연스레 음악과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벌써 MBC에서 < 2시만세 >를 진행한 지 10년이 넘었다. 정말 긴 세월 동안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에 강하다는 사실을 많이 어필했는데, 그렇다면 어릴 적 롤모델로 삼은 DJ는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역시 우리 때는 < 별이 빛나는 밤에 > 인기가 대단했다. 이문세 DJ의 < 별밤 >을 들으면서 수학을 공부했는데, 방송이 끝나고 확인하면 두 시간 동안 < 수학의 정석 >에서 푼 문제는 겨우 하나 정도였다. 그만큼 집중해서 들었다는 뜻이다. 당시 잼 콘서트나 보조 MC였던 이경규 선배가 맡은 코너 등이 기억에 남는다. 배우 박중훈 선배가 10시에 진행했던 < 밤을 잊은 그대에게 >나 < 인기가요 > 등도 많이 들었다.

음악에 대한 감수성의 원천은 어디인가?
부모님이 음악을 좋아하신 영향도 있고, 주말에 < 오미희의 가요산책 >을 들으며 인기 있는 가요 20곡을 열심히 듣기도 했다. 정말 재밌게 들은 터라 공테이프로 열심히 녹음도 했고, 배터리가 아까워서 리와인드는 볼펜을 꽂아 수동으로 돌리기도 했다. 당시에는 음악 중간에 DJ 목소리가 들어가면 싫기도 했다.

21~22세 사이에는 영등포에서 리어카를 끌며 가요 테이프를 파는, 이른바 ‘길보드’ 아르바이트도 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하루는 어떤 아저씨가 리어카에 있는 테이프를 200만원에 전부 사면서 다시 오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길 건너 음악사 사장님으로 나 때문에 장사가 안되어서 그런 것이었다. 내 치기가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일은 바로 접었다. 재미도 있고 사회가 장난이 아니라는 것도 실감한 경험이었다. 가요의 실제 인기를 체감하기는 정말 좋았다.

당시 가장 잘 팔린 아티스트는 누구인가?
‘기억의 습작’이 수록된 전람회의 데뷔 앨범 < Exhibition >이다. 실제 훗날 라디오 진행을 하다가 방송국에서 김동률을 만났을 때 덕분에 대학 등록금을 벌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이외 당시 서태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룰라의 음악이 함께 들어간 테이프나 ‘일과 이분의 일’을 부른 투투, 신승훈 등도 잘나갔다. 이런 독집뿐만 아니라 컴필레이션이나 클럽 댄스 메들리도 많이 팔렸고, 그중에서 눈에 확 들어온 테이프 표지가 사실 구준엽의 작품이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전체적으로 가요가 막 살아나던 시기였다.

학창 시절 음악을 일깨워 준 가수와 노래도 알고 싶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 당시 7~8살이었던 나에게 화성을 쌓아 만든 가성이 정말 인상 깊었다. 조용필을 너무 사랑해서 12월 31에 방송하는 MBC의 < 10대 가수제 >도 흥미진진하게 시청할 정도였다. 조용필이 아니라 이용이 상을 타는 바람에 1982년을 올바르게 시작하지 못한 것도 같다. (웃음)

이문세의 4집 < 사랑이 지나가면 >도 충격이었다. ‘사랑이 지나가면’, ‘이별 이야기’, ‘그女의 웃음소리뿐’ 등을 들으면서 음악을 제대로 듣기 시작했고, 당시 조하문의 음악도 많이 들었다. 두 번째 충격은 중학교 2학년 여름 평상에 누워 라디오를 들으면서 만난 유재하의 ‘지난날’이었다. 이듬해로 넘어가면서는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 ’87년 서울’ 등이 실린 < 10집 Part. 1 >과 함께 조용필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서서히 조용필과 멀어졌지만 나는 꾸준히 좋아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에는 들국화의 ‘제발’을 정말 좋아해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 들국화 II > 앨범을 들었다.

소위 ‘팝 세대’라 불릴 수 있는 1970~75년생에 속해 있지만 팝 음악은 잘 안 들은 것 같다.
가요만 파기에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히트곡 중심으로 들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A면 네 번째 곡까지 듣는 스타일이었다. 그래도 팝 음악 중 내가 국내에 전파한 노래가 있는데, 바로 < 개그콘서트 > ‘패션 7080’ 코너의 오프닝 음악이었던 킨(Keane)의 ‘Everybody’s changing’이다. 나중에 밴드가 페스티벌로 내한 공연을 펼쳤을 때 관중들이 노래에 맞춰 원을 만든 채 코너 속 우리처럼 워킹을 하고 춤을 췄다더라. 보고 희열을 느꼈다.

음악을 좋아했으니 직접 음악을 제작하는 ‘갈프로젝트’도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갈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하는 이유는.
‘대박을 쳐야지’ 하는 마음은 없고, 그저 창조적이고 싶다는 생각에 꾸준히 하고 있다. 실제 중학교 2~3학년 당시 기타를 열심히 피면서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는 했다.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녹음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글 쓰는 일도 좋아해 원래는 작사를 꿈꿨는데 점차 음악을 배우다 보니 자연스레 작곡까지 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첫 작곡 결과물은 무엇인가.
‘부킹협주곡 G단조 줄리아나 아리아’. 웃기려고 만든 4분짜리 노래로 클럽에서 여자들을 유혹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쓴 곡이다. (웃음) 노래를 만들면서 내가 웃겨도 정작 듣는 사람은 웃기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웠다. 과거 영화 < 챔피언 마빡이 >를 찍으면서도 그랬다. 나를 포함한 개그맨들이 코미디를 다 짜면서 재미있다 싶어도 정작 촬영된 영상을 보면 별로였던 것이다. ‘부킹 협주곡’도 나중에 들으니 웃기지 않더라. 영화에서 느낀 괴리감을 음악에서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 그래서 코미디 요소는 처음에만 있고 요즘에는 잘 안 넣는 편이다. 내 노래가 사람들이 돈 내고 들을 만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래도 돈을 떠나 음악 창작을 하지 않았으면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다.
그렇다. 노래는 사람의 흥을 돋우니까. 이것이 음악의 힘이라 생각한다.

라디오 시그널 음악도 많이 작곡한 것으로 안다. 제작에 있어서 주안점을 둔 것이 있다면.
히트를 거둔 MBC 시그널 음악을 비롯해 꽤 많이 만들었다. 라디오는 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하니 신나게 갈 수밖에 없다. 빠른 템포에 맞춰 활기찬 가사로 ‘우리 다 함께 라디오를 듣는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등의 메시지를 넣는다. DJ가 직접 로고송을 만드니 PD도 정말 좋아했다.

‘갈프로젝트’에서도 ‘To… 쯔위’라는 나름의 히트곡이 있다.
원제는 학창 시절 책상 서랍 속, 시간표 등에 사진을 붙여 놓을 정도로 좋아했던 배우 ‘왕조현’이다. < 천녀유혼 >을 보고 반해, 그날 밤새 공부를 하면서 서울대학교 수석 입학생이 되어 인터뷰에서 왕조현의 이름을 외치는 상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 추억을 담아 만들었는데, 유통사 친구가 왕조현으로 하면 노래를 누가 듣겠냐 하면서 당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트와이스(TWICE)의 쯔위로 제목을 바꿨다. 유튜브 조회수가 300만을 찍을 정도로 이슈가 되어서 쯔위도 노래를 알 것 같다. 가사를 보고 유부남이 왜 이러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트와이스의 팬 원스(ONCE)는 오히려 좋아해 줬던 기억이 난다. 다만 이슈만 만들어 주고 노래 흥행까지는 안 시켜주더라. (웃음)

음악과 관련해서 실현하고 싶은 목표가 있나?
로직이나 큐베이스 등의 쉬운 툴 덕분에 음악을 만드는 저변이 넓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옥석은 가려지는 시대다. 뭇 인디 밴드처럼 기막힌 음악을 내가 만들지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그저 꾸준히 하고 싶을 뿐이다.

인천 사람은 아니지만 인하대 출신이다. 인천이 일명 ‘음악 도시’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 가진 이미지는 어떠한지 묻고 싶다.
인하대 후문 앞 용현동에서 자취했던 사람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일단 물가가 아주 좋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술 마시러 가면 안주가 엄청나게 나오는 곳이 많았다. 풍요롭고 낭만 가득했던 모교 주변 풍경에 지금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대학생 시절 자유공원, 수봉공원, 월미도 등을 돌아다니며 견문도 많이 넓혔다. 대학생 새내기 때 월미도로 데이트를 가게 되면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인 줄 알았던 월미도가 사실 택시 타고 가는 유원지임을 깨달은 에피소드도 있다. 공부만 하던 고등학생에서 막 대학생이 되었으니 아는 게 있었겠나. (웃음)
그리고 인천이 음악 다방도 많고, 하드 록과 메탈의 고장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연히 음악이 강한 도시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박준형의 캠퍼스 생활도 들려줄 수 있나.
개그맨을 꿈꾸고 있던 당시 원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개그 동아리를 만들었다. 인하공전과 붙어있는 탓에 인하공전 학생들도 우리 학교 쪽으로 많이 다녔는데, 이를 보고 연합 개그 동아리를 만들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푸하하’라는 동아리를 만들고 전단지를 온갖 곳에 붙인 덕분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 점차 그렇게 되면서 인원이 200명까지 모였다. 회장이었던 나 외에도 < 웃찾사 >의 ‘LTE 뉴스’로 알려진 김일희가 ‘푸하하’ 출신 개그맨이다. 지금도 가끔 동아리 친구들을 만나 밥을 사주고는 한다.

코미디 얘기로 들어가 보자. 박준형 코미디의 핵심은 무엇인가.
‘참신함’이다. 오래 연명하다 보니 진부해진 감도 있지만 그래도 파생 코너가 많이 나온 것은 내가 보여준 신선함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 요즘 유튜브에서 활약 중인 < 피식대학 > 채널의 ‘Daily Korean’ 시리즈도 내가 만들었던 ‘생활사투리’와 유사한 면이 있지 않나.

코미디에 대한 영향은 주로 어디서 받았나?
잡지와 신문을 많이 본 덕분에 아이디어는 많았지만 사실 어릴 때부터 웃긴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1998년도부터 4년 동안 대학로에서 매일 공연을 하는 극장 생활 덕분에 단련된 것에 가깝다. 극장 출신인 나와 갈갈이 패밀리 사단이 이렇게 경험이 쌓이면서 공개 코미디에 최적화된 호흡을 얻었다. ‘사랑의 가족’ 등의 코너에서 보여준, 한 템포 뒤에서 들어가는 개그도 이렇게 체득한 것이다.

소극장에서 관객을 만나며 연습한 사람들이니까 다른 코너보다 앞설 수 있었다. 정종철이 잘 살려준 ‘마빡이’도 극장 시절부터 ‘건들건들 건달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만든 아이디어였다. 우리의 성공을 보고 이후 < 웃찾사 > 개그맨들이 벤치마킹하여 극장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 개그 콘서트 >는 우리나라의 새천년 웃음의 동의어와 다름없다. 본인이 여태 아이디어를 낸 코너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은 무엇인가.
정말 많지만 그래도 ‘갈갈이 삼형제’다. 내가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 코너가 없었으면 내가 이렇게 잘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잘 사는 것 같아 ‘갈갈이 삼형제’에게 고맙다.

박준형을 포함한 여러 개그맨에 힘입어 < 개그콘서트 >가 정점을 찍었지만 지금은 코미디가 거의 사장된 시기다.
사실 모든 것에는 흥망성쇠가 있는 법이니까. 관객을 앞에 둔 당시 코미디 문화가 나와 잘 맞아 성공할 수 있던 것이고, 지금은 또 다른 형식의 코미디가 흥행을 하고 있다. 나한테는 크게 먹히지는 않고, TV 포맷에 어울리는 스타일도 아니라 생각하지만 애초에 요즘 사람들이 TV를 거의 안 보는 시대가 되었으니 그런 변화를 따르는 것이다.

박준형도 이제 나이가 50을 앞두고 있다. 중장년층에 돌입한 시점에서 박준형의 앞으로의 목표를 묻고 싶다.
선배들을 보면 50세에 들어서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서 성공한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30대 초반에 성공하고 이후에는 인기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 한계가 있나 하는 생각도 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바둑이나 게임도 경험이 많은 50세보다 젊은 20세의 실력이 더 뛰어나지 않나. 전성기가 지나가면 이제 남은 게 없는 것인지, 초기에 비해 내가 무뎌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도 이런 의심을 최대한 없애기 위해, 더 노력하고 다른 것을 생각하려 한다. 50대만의 ‘촉’으로 계속 뻗어 나가고 싶다.

진행: 임진모, 장준환, 정다열, 한성현
정리: 한성현
사진: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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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8 원일

한국 대중연예사를 듣는 듯했다. 원로 사회자 겸 코미디언 원일은 1960년대부터 미8군을 제외한 수많은 ‘일반’ 극장 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트위스트 김과 쟈니 리의 무대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는 그는 남진과 이미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잊힌 많은 연예인을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반세기도 더 지난 기록들은 명료한 음성을 통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대중문화 흐름과 변천에 늘 촉각을 곤두세운 원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동료 방일수와 함께 각 지역 순회 공연을 도는 원일은 엄연한 현역 코미디언이다. 인터뷰 말미 힘차게 공연 포스터를 펼쳐들며 “꼭 한번 놀러오라”며 초대를 건넸다. 대한민국 방송 코미디언 협회 이사직을 역임하며 권리 신장을 위해 힘쓰고 있는 그는 노인을 위한 콘텐츠, 정통 개그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연예계에서의 발자취를 담은 < 인맥 >이란 책을 집필 중인 원일은 백마장과 대한극장에 대한 기억 등 부평과의 인연도 두터웠다.

활동 초기는 어떠셨나요?
백설희, 백난아, 금사향, 김정구 고복수, 황금심 같은 가수들이 인기를 끈 1950년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동두천과 의정부, 부평과 오산 등 각지에서 미군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주식회사 화양, 동일 등 전문적인 공연 기획사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 국내 볼거리 형태는 순극(정극), 신파극, 국극(국악)(창극), 악극(유랑극단), 서커스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극장 쇼 시스템이 정착했다.

1960년대 극장 쇼에서 활약한 가수를 알려주신다면?
쟈니 리와 ‘땅벌’의 이태신, 안일, 지미 리, 차리 김, 차리 박, 카니 홍, 로렌 케이 등 많은 가수가 활약했다. 현미와 한명숙, 윤항기도 일반에서 먼저 활동하다가 나중에 미8군 무대에 선 것이다. 서구적인 이미지를 위해 외국 이름을 붙여다가 썼다. 바니걸스와 김시스터즈, 이시스터즈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현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요?
현미는 ‘밤안개’와 ‘보고 싶은 얼굴’, ‘몽땅 내 사랑’같은 곡이 히트한 뒤에 만났다. 분명 절륜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동남아를 휩쓴 한명숙과 더불어 기억에 많이 남는 가수다.

당시 국내와 미8군 연예인의 차이점은 어땠나요?
미8군 연예인들은 스탠더드 팝과 재즈를 구사했지만, 국내 연예인은 트로트를 불렀다.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기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양쪽 다 실력이 탄탄했다. 몇몇 가수들은 미8군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이봉조, 박춘석 같은 스타 작곡과들과의 협업으로 곡을 취입했다. 이런 곡들이 크게 히트한 덕분에 가수의 인지도가 올라갔다. 최희준의 ‘하숙생’, 현미 ‘밤안개’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 접어들어 미군들이 대거 철수했다. 미8군에서 활동하던 보컬 그룹들이 일반 무대로 나와 서구적인 팝과 재즈를 공연했다. 양색시들과 함께 온 미군이 땅콩이 든 과자를 말하는 ‘콩과자’를 던지며 무대에 호응했던 기억이 난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당시 극장 쇼가 사실 체계적인 볼거리는 아니었다. 국악과 연극의 수준도 그리 높진 않았다. 그나마 관중들이 선호하던 악극도 2시간 내내 몰입감이 이어지진 않았다. 1960년대부터 등장한 버라이어티쇼는 무용단의 캉캉, 재즈 곡 연주, 유명 가수의 등장으로 박수와 앙코르를 얻어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극장 쇼 인기가 점점 떨어짐과 동시에 영화의 인기는 높아졌다. 문희와 윤정희,남정임 등 여배우 트로이카가 한창 급부상한 시기였다. 그래서 쇼 단장들이 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다. 신성일과 남궁원도 가끔 무대에 섰다.

그렇다면 미8군 출신들이 국내에서 공연할 땐 반응이 어땠습니까?
한명숙, 최희준, ‘키다리 미스터김’의 이금희와 ‘눈물을 감추고’의 위키리(이한필) 같은 가수들이 실력 발휘했다.

선생님이 경험하신 최고의 무대는 무엇입니까?
‘뜨거운 안녕’의 자니 리다. 자니 리와 ‘허무한 마음’을 부른 정원 콤비가 잘 나갔고, 영화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트위스트 김(김한섭)이 춤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다양한 공연을 진행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쇼 진행을 많이 맡았다. 동대문운동장 서독 서커스, 시민회관 인도마법단, 대만 아크로바틱쇼, 현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에 특설링을 제작해서 돌고래 쇼를 하기도 했다. 구봉서가 주축이 된 월하의 무법자, 김희갑의 팔도 강산 귀국 쇼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당시에 극장 쇼 많이 했던 진행자는 누가 있었나요?
백금녀와 콤비로 활약했던 서영춘, 송해와 박시명 콤비, 임희춘 배수남 / 서영수 이기동 / 최성일 이대성 / 심철호 남성남 (후에 남철 남성남) 선배들이 계셨다. MBC가 개국하면서 구봉서, 배삼룡 같은 스타 희극인들이 다 그쪽으로 갔다. 자연스레 극장 쇼가 약화되었지만 난 사명감을 갖고 그 자리를 지켰다.

미8군 부대와 인접했던 극장과 그렇지 않은 극장은 어떤 점에서 달랐습니까?
용주골과 문산, 파주, 의정부, 동두천처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극장엔 극장 주인들이 팝과 재즈를 포함했다. 큰 차이는 없었다.

극장 쇼에서 특히 노래를 잘 불렀던 가수는 누가 있습니까?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요즘 가요무대 많이 나오는 박재란이 인기 끌었고, 1964년 ‘동백 아가씨’부터 이미자의 존재감이 높아졌다. 최숙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 후 미8군 출신인 현미, 한명숙, 최희준이 인기 대열에 동참했다.

어린 시절 부천 소사에서 본 가수 박재란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의 무대는 어땠나요?
박재란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나와 함께할 때는 인기가 약간 하락할 때다. 최숙자의 인기가 높았고, 이미자와 김세레나(국민 동생이라 불리며 인기 엄청 많았다), 조미미, 김부자가 인기를 구가했다. 곧이어 월남전이 터졌고 나도 위문 공연에 다녀왔다. 현재 그 일과 관련하여 국가유공자 지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윤항기나 신중현 같은 로큰롤 세대도 목격하셨나요?
신중현이 일반 무대에 사이키델릭 록을 들고 왔다. 신중현과 퀘션스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는데 번쩍이는 조명과 환각적인 음악에 절로 춤사위가 나왔다. 나도 그래서 사이키델릭 춤을 연구했다.

1960년대 후반엔 다크 아이스와 키 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매니저기도 했던 박영걸 사단 라스트 챤스는 히피다운 분위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후에 ‘안녕’으로 사랑받은 김태화가 라스트 챤스 출신이다.

월남엔 어떻게 가게 되신건가요?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인 문화공보부에서 간 거다. 전쟁이 맘처럼 되지 않았고 군인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원사령부에서 국방부에 위문 공연을 위해 인기 연예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국방부와 문공부가 협조했을 것이다. ‘불나비’, ‘불개미’의 가수 김상국도 같이 다녀 왔다.

월남 위문공연 중 공습으로 공연이 중단된 적도 있습니까?
포탄이 날아와서 무대 밑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했다.

남진, 태원, 진성남 같은 가수들은 월남전에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들이 공연도 했나요?
공연도 했다. 남진은 이미 ‘가슴아프게’와 ‘울려고 내가 왔나’의 히트 가수였기에 무대 매너가 화려했다.

김상국은 스탠더드 팝에 기반한 서구적 풍모와 ‘쾌지나 칭칭나네’의 전통적 느낌이 혼재된 독특한 가수였습니다.
김상국은 루이 암스트롱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도 잘 불렀다. 월남전 미군들을 상대로 공연한 적이 있다. 배일집과 내가 진행을 맡았지만 둘 다 영어가 짧아 미군과 소통이 어려웠다. 그래서 김상국이 대신 사회를 보고 나와 배일집은 판토마임을 구사했다. 김상국이 영어 노래 불렀고 김하정은 춤을 췄다.

김하정도 당대 인기 가수였습니다.
출중한 외모에 ‘살짜기 옵서예’, ‘금산아가씨’, ‘사랑’ 등 히트곡도 많았다.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과거 연예계와 거대 기업화된 현재 연예계 풍토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끼시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경제 수준이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가지 기회가 증가했다.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분업이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능력만 된다면 배우와 가수 등 다양한 분야의 겸업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부평, 인천과의 인연은 어떠한가요?
그 지역에서 극장 쇼 진행을 주로 하진 않았지만, 백마장과 대한극장같은 명소가 친숙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무대(애스컴)가 활발했음을 기억한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중이신가요?
동료 코미디언 방일수와 각 지방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고 있다. 연예인으로서의 60여년 삶을 담은 <인맥 >이라는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신하영
정리 : 염동교, 신하영
사진 :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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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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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3 이박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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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0 이권형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찰나의 단면을 노래하는 이권형이다.

암막 커튼 친 창작자의 방에서 통기타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데뷔 11년 차에 접어든 뮤지션 이권형이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인디 음악’을 좇아 홍대에 발을 들인 그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일터에 나가며 시간을 쪼개 음악을 만든다. 얼마 전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을 내놓고, 틈틈이 < 인천의 포크 >와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음악을 위해 돈을 버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음악을 “시행착오”, “과정 중에 있다”고 표현했다. 신보를 두고는 “기승전결 없이 딱 본론만 말한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잇기도 했다. 유달리 본인에게 엄격한 그는 순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내면에 아주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뒤집어 이권형의 음악을 다시 소개한다. 문을 열어놓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권형. 두세 번씩 단어를 골라 정성스레 질문의 답을 이어가던 그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해서 직접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인디 음악을 듣고 인디 뮤지션을 동경하다 보니 내 음악까지 직접 하게 되었다. (음악) 아직 나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음반을 기획해왔고 최근에 3집 < 창작자의 방 >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인디씬 혹은 음악씬의 데뷔는 언제인가?
19살이었던 2011년에 해방촌에서 처음 공연했다. 직접 기획해서 내놓은 공연이니 그때를 데뷔로 보고싶다. 따지고 보면 시작은 ‘바다비’ 등에서 펑크 공연을 보고 펑크 음악을 하던 때이지만 지금 하는 ‘포크’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건 2011년이었다.

펑크에서 포크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당시에는 씬에 진입해 누구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펑크씬에 들어간 건데 막상 음악을 하다 보니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그럼에도 적은 코드로 음악을 만들고, DIY로 음악을 제작하는 등 포크와의 교차점에 있는 펑크의 태도는 아직도 간직하는 중이다.

10월 7일 발매된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 역시 정규 2집 < 터무니없는 스텝 >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장난기 어린 가사, 선율 등을 들려줄지 알았다. 막상 열어보니 그때보다 한층 차분해진 인상이 들었다.
3집은 특히 정돈된 방식을 지향했다. DIY로 만들되 조금 더 꼴을 갖추려 했다고나 할까? 2집은 정규라고 하기에 스스로에게도 창피하다. (이유를 물으니) 음반을 발매하고 군대에 가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꾸 시기가 늦어졌다. 결국 조금 조급하게 앨범을 묶어내게 됐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 등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는가?
1, 2집은 막역한 동료 뮤지션 파제(Pa.je)의 집에서 기타를 녹음하고 작업실에서 마무리했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주로 주말에 녹음했는데 체력이 많이 소진됐다. 그러다 보니 3집은 동선도 다 줄이고 내가 혼자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병행하며 짬짬이 음악을 스케치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조금씩 음악을 만든 거다. 그래서인지 음반을 관통하는 서사가 없고 본론만 딱 잘라내 말하는, 기승전결 없는 음반이 완성됐다.

물론 문을 열고 닫는 방식으로 구성한 작품도 있지만, < 창작자의 방 >은 아예 의도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오히려 재밌었다. 문을 열어 두고 계속해서 내 얘기를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읽어주니 고맙다. 처음부터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소재로 끌어당겨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록곡 ‘파크라이프’는 내가 쓰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물과음’에게 의뢰했는데 오후의 공원 풍경을 그린 듯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다듬어주었다.

주로 일상의 어떤 것들을 음악적 소재로 삼는지.
1집이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말을 가득 채워 넣는 상당히 ‘포크’스러운 접근법이었다면, 2집과 3집의 방식은 ‘속도감 있게, 소리 나는 대로’에 가까웠다. 나의 말을 음악으로 옮겨 적다 보면 작위적이기도 하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인위적인 곡이 나온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 가는 대로 스케치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이권형은 자신의 음악을 음반으로 묶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인 것 같다.
음악을 하게 만드는 동기는 앨범이라는 꼴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어떤 시너지가 나는지,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가 또 중요하다. 대중적인 성과를 바란 것은 아니기에 앨범을 만드는 그 과정 자체가 내게는 참 중요하다.

3집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 창작자의 방 >이라는 음반 명은 어떻게 짓게 된 것인가?
앨범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아트워크를 담당한 이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대충 스케치한 것 같은데 그려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속도와 분위기가 음악에서도 풍기길 바랐다. 이 그림의 제목이 ‘창작자의 방’이다. 방에서 녹음하고 주변 소음, 오토바이 소리가 담긴 이번 신보의 작업 방식과 테마와도 맞아서 앨범을 < 창작자의 방 >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스케치’를 들으며 감정 고조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 느꼈다.
1집 < 교회가 있는 풍경 >을 발매할 땐 어떻게든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애썼다. 내 커리어중 가장 다이내믹한 작품일 거다. ‘테이크 아웃 드로잉’ 등 젠트리피케이션 활동을 하며 내가 많이 변했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이야기할 때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절제하게 됐다고 할까?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감정 고조를 느끼지 못할 때도 많아졌고. 기승전결이 없는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다 보니 음악에도 자연스레 나타난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동료 뮤지션 예람, 천용성과 함께 한 ‘석촌호수’는 굉장히 메이저 지향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타이틀보다 더 좋다. 하하하. 후렴구 정도만 완성했을 때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게 작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맡겨 봐야지 정도 밑그림을 그렸었다. 막상 예람, 천용성에게 받은 부분을 합쳐보니까 더 재밌게 결과물이 나왔다. 플레이어보다 기획자 입장으로 접근한 곡이기도 하다.

이번 음반에서 제일 공들였거나, 혹은 듣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는지?
‘커피 토크’. 다른 수록곡과 코드를 다르게 접근했는데 제일 깔끔하면서도 독특하게 완성됐다. ‘경기도민 되기’도 추천하고 싶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경기도민 되기’는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에서 공개한 곡으로 알고 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인위적인 감이 있다. 이 곡을 만들 때 여러 개가 겹쳤다. 하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사람들의 주제가 비슷한 곡으로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 공모에 제출하고자 만들게 된 노래다. 또 하나는 강남에서 경기도민들이 광역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무표정한 모습이 ‘송장’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 바치는 장송곡 콘셉트로 노래를 썼다.

< 창작자의 방 > 음반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그리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으로 만든 앨범이라는 게 내게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혹은 일상에서 음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리스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 계속 음악을 하면 될 수 있다는 ‘인디 음악 가이드’라고도 생각한다.

그럼 이 음악은 대중보다는 창작자들에게 다가가는 음반인가?
그렇다. 동료 창작자, 인디씬에서 순수하게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또한 특히 3집은 제대 후에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작업한 음반이기도 하다. 그래야 그다음도 있을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인천 지역 신문에 꾸준히 기고하는 칼럼도 그렇게 음악에서도 인천 출신이라는 것이 많이 소환된다고 느껴진다. 음악 안에 지역의 정체성을 묻어나도록 노력하는 편인가?
종종 펀딩 지원사업을 받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과 음악의 합의점을 뽑아내고자 한다. 음악에 인천과 지역을 거는 것은 약간의 낚시, 유인책, 그리고 ‘이스터에그’ 정도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음악에 친밀감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출신 지역을 걸어 두었지만 안에 담긴 내용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가는 경우도 많다.

‘찐 음악가’. 음악 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끔 저축하고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음악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음악을 하며 주위 사람들도 만나고 일상과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것 같다.

이권형을 음악으로 이끈 내 인생의 뮤지션, 앨범이 있다면?
이장혁 2집 < 이장혁 Vol.2 >. 한창 곡을 쓸 때 발매가 됐고 감명을 많이 받았다. 그때 이장혁 님이 하신 작은 카페 공연 ‘다방 투어’를 따라다니며 처음 맛있는 커피도 먹어보고 이렇게 간단하게 공연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들도 배웠다.

2011년을 데뷔라고 치면 벌써 11년 차 가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인천에 사는, 인천 출신의 뮤지션들이 합작한 < 인천의 포크 > 트릴로지의 마지막 컴필레이션 < 모두의 동요 >를 완성했을 때다. 당시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고 이제 내 음악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최근에 동료 뮤지션 파제가 운영하는 ‘카페 륙’에서 했던 페스티벌을 뽑고 싶다. 그때 모인 사람들이 < 인천의 포크 >에 참여한 뮤지션들이었고, 마침 내 생일이기도 하고 해서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 인천의 포크 >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외롭게 음악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지금 음반을 만들 때도 그들에게 들려주려,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들 만큼 말이다.

진행: 박수진, 손민현, 정다열
정리: 박수진, 손민현
사진: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