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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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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3 이박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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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0 이권형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번째 주인공은 찰나의 단면을 노래하는 이권형이다.

암막 커튼 친 창작자의 방에서 통기타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데뷔 11년 차에 접어든 뮤지션 이권형이 음악을 만드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인디 음악’을 좇아 홍대에 발을 들인 그는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일터에 나가며 시간을 쪼개 음악을 만든다. 얼마 전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을 내놓고, 틈틈이 < 인천의 포크 >와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음악을 위해 돈을 버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의 음악을 “시행착오”, “과정 중에 있다”고 표현했다. 신보를 두고는 “기승전결 없이 딱 본론만 말한 것 같아 아쉽다”는 말을 잇기도 했다. 유달리 본인에게 엄격한 그는 순해 보이는 첫인상과 달리 내면에 아주 많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을 뒤집어 이권형의 음악을 다시 소개한다. 문을 열어놓고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 이권형. 두세 번씩 단어를 골라 정성스레 질문의 답을 이어가던 그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아마추어리즘에 기반해서 직접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인디 음악을 듣고 인디 뮤지션을 동경하다 보니 내 음악까지 직접 하게 되었다. (음악) 아직 나 자신이 프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인천을 기반으로 음반을 기획해왔고 최근에 3집 < 창작자의 방 >을 발매한 뮤지션이다.

인디씬 혹은 음악씬의 데뷔는 언제인가?
19살이었던 2011년에 해방촌에서 처음 공연했다. 직접 기획해서 내놓은 공연이니 그때를 데뷔로 보고싶다. 따지고 보면 시작은 ‘바다비’ 등에서 펑크 공연을 보고 펑크 음악을 하던 때이지만 지금 하는 ‘포크’ 음악을 제대로 시작한 건 2011년이었다.

펑크에서 포크로 변화하게 된 계기가 있는가?
당시에는 씬에 진입해 누구든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게 펑크씬에 들어간 건데 막상 음악을 하다 보니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그럼에도 적은 코드로 음악을 만들고, DIY로 음악을 제작하는 등 포크와의 교차점에 있는 펑크의 태도는 아직도 간직하는 중이다.

10월 7일 발매된 정규 3집 < 창작자의 방 > 역시 정규 2집 < 터무니없는 스텝 >에서 보여줬던 특유의 장난기 어린 가사, 선율 등을 들려줄지 알았다. 막상 열어보니 그때보다 한층 차분해진 인상이 들었다.
3집은 특히 정돈된 방식을 지향했다. DIY로 만들되 조금 더 꼴을 갖추려 했다고나 할까? 2집은 정규라고 하기에 스스로에게도 창피하다. (이유를 물으니) 음반을 발매하고 군대에 가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꾸 시기가 늦어졌다. 결국 조금 조급하게 앨범을 묶어내게 됐다.

녹음, 믹싱, 마스터링 등 전 과정을 혼자 담당하는가?
1, 2집은 막역한 동료 뮤지션 파제(Pa.je)의 집에서 기타를 녹음하고 작업실에서 마무리했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주로 주말에 녹음했는데 체력이 많이 소진됐다. 그러다 보니 3집은 동선도 다 줄이고 내가 혼자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병행하며 짬짬이 음악을 스케치했다. 자다가 일어나서 조금씩 음악을 만든 거다. 그래서인지 음반을 관통하는 서사가 없고 본론만 딱 잘라내 말하는, 기승전결 없는 음반이 완성됐다.

물론 문을 열고 닫는 방식으로 구성한 작품도 있지만, < 창작자의 방 >은 아예 의도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아 오히려 재밌었다. 문을 열어 두고 계속해서 내 얘기를 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읽어주니 고맙다. 처음부터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을 소재로 끌어당겨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수록곡 ‘파크라이프’는 내가 쓰다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물과음’에게 의뢰했는데 오후의 공원 풍경을 그린 듯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다듬어주었다.

주로 일상의 어떤 것들을 음악적 소재로 삼는지.
1집이 내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말을 가득 채워 넣는 상당히 ‘포크’스러운 접근법이었다면, 2집과 3집의 방식은 ‘속도감 있게, 소리 나는 대로’에 가까웠다. 나의 말을 음악으로 옮겨 적다 보면 작위적이기도 하고 특별하게 하고 싶은 말이 없으면 인위적인 곡이 나온다. 그래서 이번에는 손 가는 대로 스케치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상을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을 소재로 삼았다.

이권형은 자신의 음악을 음반으로 묶어내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인 것 같다.
음악을 하게 만드는 동기는 앨범이라는 꼴을 갖추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료들과 어떤 시너지가 나는지, 어떤 기록으로 남는지가 또 중요하다. 대중적인 성과를 바란 것은 아니기에 앨범을 만드는 그 과정 자체가 내게는 참 중요하다.

3집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 창작자의 방 >이라는 음반 명은 어떻게 짓게 된 것인가?
앨범의 전체적인 방향성은 아트워크를 담당한 이려진 작가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대충 스케치한 것 같은데 그려본 사람들은 안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속도와 분위기가 음악에서도 풍기길 바랐다. 이 그림의 제목이 ‘창작자의 방’이다. 방에서 녹음하고 주변 소음, 오토바이 소리가 담긴 이번 신보의 작업 방식과 테마와도 맞아서 앨범을 < 창작자의 방 >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랑에 관한 짧은 스케치’를 들으며 감정 고조가 크지 않은 사람이라 느꼈다.
1집 < 교회가 있는 풍경 >을 발매할 땐 어떻게든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애썼다. 내 커리어중 가장 다이내믹한 작품일 거다. ‘테이크 아웃 드로잉’ 등 젠트리피케이션 활동을 하며 내가 많이 변했다.

어떤 소재를 다루고 이야기할 때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을 절제하게 됐다고 할까? 가치를 판단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감정 고조를 느끼지 못할 때도 많아졌고. 기승전결이 없는 음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지만 객관적이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하다 보니 음악에도 자연스레 나타난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동료 뮤지션 예람, 천용성과 함께 한 ‘석촌호수’는 굉장히 메이저 지향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곡이 타이틀보다 더 좋다. 하하하. 후렴구 정도만 완성했을 때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게 작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은 생각하지 않고 일단 맡겨 봐야지 정도 밑그림을 그렸었다. 막상 예람, 천용성에게 받은 부분을 합쳐보니까 더 재밌게 결과물이 나왔다. 플레이어보다 기획자 입장으로 접근한 곡이기도 하다.

이번 음반에서 제일 공들였거나, 혹은 듣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곡이 있는지?
‘커피 토크’. 다른 수록곡과 코드를 다르게 접근했는데 제일 깔끔하면서도 독특하게 완성됐다. ‘경기도민 되기’도 추천하고 싶지만 어쩐지 부끄럽다.

‘경기도민 되기’는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에서 공개한 곡으로 알고 있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 인위적인 감이 있다. 이 곡을 만들 때 여러 개가 겹쳤다. 하나는 음반을 함께 만든 사람들의 주제가 비슷한 곡으로 < 인천평화창작가요제 > 공모에 제출하고자 만들게 된 노래다. 또 하나는 강남에서 경기도민들이 광역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무표정한 모습이 ‘송장’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 바치는 장송곡 콘셉트로 노래를 썼다.

< 창작자의 방 > 음반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그리고 대중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면 좋을까?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협업으로 만든 앨범이라는 게 내게 가장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렇게 간단한 방식으로, 혹은 일상에서 음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도 있었다. 리스너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동안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 계속 음악을 하면 될 수 있다는 ‘인디 음악 가이드’라고도 생각한다.

그럼 이 음악은 대중보다는 창작자들에게 다가가는 음반인가?
그렇다. 동료 창작자, 인디씬에서 순수하게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또한 특히 3집은 제대 후에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작업한 음반이기도 하다. 그래야 그다음도 있을 것 같았다고나 할까?

인천 지역 신문에 꾸준히 기고하는 칼럼도 그렇게 음악에서도 인천 출신이라는 것이 많이 소환된다고 느껴진다. 음악 안에 지역의 정체성을 묻어나도록 노력하는 편인가?
종종 펀딩 지원사업을 받기 때문에 요구받는 것과 음악의 합의점을 뽑아내고자 한다. 음악에 인천과 지역을 거는 것은 약간의 낚시, 유인책, 그리고 ‘이스터에그’ 정도라고 생각해주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이 음악에 친밀감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출신 지역을 걸어 두었지만 안에 담긴 내용들은 그것과 상관없이 가는 경우도 많다.

‘찐 음악가’. 음악 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라는 평가도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서도 음악을 계속할 수 있게끔 저축하고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음악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음악을 하며 주위 사람들도 만나고 일상과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나에게 중요한 것 같다.

이권형을 음악으로 이끈 내 인생의 뮤지션, 앨범이 있다면?
이장혁 2집 < 이장혁 Vol.2 >. 한창 곡을 쓸 때 발매가 됐고 감명을 많이 받았다. 그때 이장혁 님이 하신 작은 카페 공연 ‘다방 투어’를 따라다니며 처음 맛있는 커피도 먹어보고 이렇게 간단하게 공연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들도 배웠다.

2011년을 데뷔라고 치면 벌써 11년 차 가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인천에 사는, 인천 출신의 뮤지션들이 합작한 < 인천의 포크 > 트릴로지의 마지막 컴필레이션 < 모두의 동요 >를 완성했을 때다. 당시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고 이제 내 음악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최근에 동료 뮤지션 파제가 운영하는 ‘카페 륙’에서 했던 페스티벌을 뽑고 싶다. 그때 모인 사람들이 < 인천의 포크 >에 참여한 뮤지션들이었고, 마침 내 생일이기도 하고 해서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 인천의 포크 >가 아니었다면 굉장히 외롭게 음악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지금 음반을 만들 때도 그들에게 들려주려,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이 들 만큼 말이다.

진행: 박수진, 손민현, 정다열
정리: 박수진, 손민현
사진: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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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4 프롬올투휴먼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네 번째 주인공은 깊고 진한 풍미의 알앤비 밴드, 프롬올투휴먼이다.

혹자는 이들을 두고 ‘레지스탕스’라고 표현한다. 동명의 음반 제목만큼이나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꾸준한 음악적 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흑인음악의 문화를 탐구하고 전파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수식어인 것이다. 네 장의 EP로 혜성처럼 나타나 여러 수상을 거머쥔 화려한 이력은 밴드가 지닌 굳건한 자세만큼이나 이에 상응하는 수려한 실력을 증명한다.

틀에 갇히지 않는 음악을 위해 진득한 외골수 청년들이 뭉쳐 만들어낸 알앤비 밴드,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은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창작 세계를 나타낸다. 다양하고 깊은 그루브를 아주 부드럽게 뿜어내다가도, 때론 댄서블한 바이브를 가져오기도 한다. ‘음악은 좋은 대화 수단인 것 같다’는 말처럼 그 순간 하고 싶은 언어를 소리에 담아 흘려보낸다.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한 여름 밤, 홍대 사무실에서 프롬올투휴먼의 보컬 ‘블레싱’ 김석근을 만나 그들의 음악관에 대해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즘을 보고 계신 독자분들에게 간략한 소개 부탁한다.
반갑습니다. 저는 프롬올투휴먼이라는 밴드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블레싱(Blesssing)’ 김석근이라고 합니다. 예명인 블레싱은 축복의 의미인 ‘블레스(Bless)’와 노래한다는 ‘싱(Sing)’을 합쳐 만든 뜻입니다. 제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예명을 짓게 되었습니다.

프롬올투휴먼(From All To Human)이라는 밴드명의 뜻이 궁금하다.
단어 뜻 자체로는 ‘모든 존재로부터 인간까지’라는 의미를, 내적으로는 ‘아직 진화가 덜 된 우리가 음악적으로 좀 더 진화를 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사실 ‘프롬올투휴먼’이라는 문구는 앨범에 쓰려고 했던 이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더 형이 우리가 각자 가진 음악적 결핍을 해소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밴드 이름으로 정하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꺼냈고, 다들 동의하게 되어 지금의 팀명이 결정되었다.

간략한 멤버 소개와 모이게 된 계기에 관해 이야기를 부탁한다.
밴드는 건반을 맡은 리더 문성환, 기타를 치는 박재우, 드럼의 문성호, 베이스의 남우석, 그리고 보컬인 저(블레싱)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멤버끼리 부르는 영어 이름은 있지만 막상 공연에서 부끄러워하더라. 지금은 멤버들의 직접적인 의사가 없으니 일단 본명으로 말씀드린다. (웃음)

리더 성환이 형과 재우 형, 성호 형은 이미 이전에 다른 밴드를 하고 있었고 리뉴얼 과정에서 내게 권유가 들어왔다. 그때가 2015년 정도였을 거다. 밴드에서 마침 흑인 음악을 하는 친구를 찾고 있었고, 한창 페이스북이 유행할 때였는데 리더 형이 SNS의 노래 부르는 제 영상을 보고 멤버 영입을 제안했다.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영상 속 머리를 빡빡 민 내 모습을 보고 팀에 이런 분위기가 강한 친구가 필요했다며 뽑았다고 들었다.

2017년부터 꾸준하게 팀 단위 작업물을 내고 있고, 의상을 맞춘 단체 사진을 보면 유독 팀 분위기가 돈독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도 사실 안에서 엄청 싸운다. 대신 다소 언쟁이 있더라도 한 명이 이해를 못하면 모두가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의견을 나누는 편이다. 다른 팀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떤 내용의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먼저 얘기한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가 굉장히 습하고 처음 보는 장소라면, 이 점에 대해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모두가 동의를 마치고 합주에 들어가서 이 메타포에 어울리는 코드 진행을 던진다. 돈독해 보이는 이유가 이런 솔직함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팀 내부에서 이러한 언쟁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묵히지 않고 바로 표출하고 해소하는 스타일인지.
맞다. 다만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 리더 형이 엄청나게 노력했다. 누군가 의견을 제시하면 싸울지언정 서로 가감 없이 얘기한다. 그래야 ‘이 멤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왜 이렇게 생각할까?’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물론 쉽지는 않아도 팀이 이어지려면 어쨌든 필요한 과정이다. 결정을 내리려면 누군가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결국 생각을 같이하기 위해 모였으니까. 그래야 더욱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음악을 할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든다.

멤버 간 음악 취향은 어떻나.
지금이야 하고 싶은 음악이 절충되어 서로 알앤비, 소울, 힙합 등 흑인 음악에 대한 내용을 많이 공유하는 편이지만, 옛날에는 조금 달랐다. 기타 형은 AC/DC 같은 록을 좋아하고 나는 국내 음악은 잘 안 듣고 흑인 음악만 듣는 타입이었다. 근데 서로 교류하며 다른 것도 듣다 보니 이런 편견들이 깨지더라. 그런 곳에서 오는 충격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또 듣는 취향이 다양해질 수 있던 것 같다.

뭔가 일종의 합주 같다.
오, 얘기하고 보니 그렇다. (웃음)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을 정의하자면.
오,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의도는 너무 잘 알겠지만 ‘정의’라는 단어가 특히 답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듣는 사람들이 결정해 주는 게 나은지, 아니면 우리가 말을 드리는 게 나은지. 게다가 나 혼자 말하는 건 팀의 의견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정의를 굳이 하자면 ‘대화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메타포를 두고 많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나. 이 비유하는 과정도 누군가에게는 경험 일수도, 누군가에게는 설득 일수도, 누군가에게는 공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은 좋은 대화 수단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순간 공유하는 추억이나 관심사를 음악으로 표출하는 건지.
그게 제일 가깝다. 나중에 가서 음악을 들었을 때 이걸 만들 때 어떤 기분이었고 또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기록물인 셈이다. 물론 옛날에는 훨씬 비장했고, 누군가한테 인정받기를 원했고, 염세적인 마음도 굉장히 강했다. 또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려야 한다는 욕구가 강해서 그런 앨범을 낸 것도 있었고. 근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해소되다 보니 또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게 되더라. 지금은 우리가 그 순간 하고 싶은 대화가 자연스럽게 담기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 컨템포러리 알앤비부터 뉴잭스윙, 네오소울까지 다루는 장르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런 요소를 가장 잘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이 흑인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르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더 연구하고, 다른 것을 발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 팀은 EP와 싱글만 가득하고 아직 정규 앨범이 없는데, 1집에서는 뭔가 다양한 것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정규 1집은 지금까지 선보인 음악의 종합편인 건가.
아직 정확하게 정해진 건 없지만, 마침 얼마 전에 리더 형과 정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나는 남의 의견을 잘 수렴하지 않는 성격인데 어느 순간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 고민을 리더 형에게 꺼내니, 오히려 ‘나는 네 것이 좋다. 잘하고 있으니 보여줘도 괜찮다’라며 편하게 다독여주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음악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던 것처럼, 우리 밴드도 삶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졌으니까.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에너지가 바뀌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가 주제일 것 같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음악을 들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없어졌을 때 이 친구들은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지만, 오랫동안 남을 음악적 언어를 물려주고 싶다.

어찌 보면 정규에 앞서 네 장의 EP로 연습을 마친 것은 아닌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규라는 어감 자체가 굉장히 무게감이 있다. 이 무게감이 어디로 가고,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발표한 EP들은 네 번의 질문, 혹은 네 개의 대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각각 EP별로 설명하자면 첫 EP < LIEF >는 삶의 어려움과 휴식이라는 굴레 속 얼마나 솔직하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다음 EP < Paradise >는 조금 원초적이게도 여름에 꽂혀서 뉴잭스윙 스타일로 갔고, 세 번째 EP < Double Barrel > 같은 경우에는 영화 < 쟝고 >를 보고 바로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EP < Resistance >는 우리 밴드가 보여줄 수 있는 비장함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힙합 아티스트와의 콜라보가 매우 많다. 한요한, 재달, 큐엠과의 같이 작업했고, 피처링으로는 딥플로우의 < Founder >와 최근 피타입의 < Hardboiled Café >에도 참여했는데.
맞다. 그분들 중에는 우리 음악을 좋게 들어주신 분도 계시고,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하여 참여해 주신 분도 계시다. 특히 VMC에 반 루더(Van Ruther)라는 아티스트가 있는데, 딥플로우 님이 리얼 밴드로 앨범을 만들고 싶은데 주변에 밴드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 반 루더 형이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사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지만, 그 밖의 이면에서 보면 장르 간의, 더 나아가면 문화 간 연결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힙합 덕에 좀 더 자연스럽게 협업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흑인 음악과 밴드 사운드를 결합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과거부터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의 퀘스트러브(Questlove)가 속해 있는 더 루츠에서 영감을 가장 많이 받았다. 더 나가서 디안젤로 앤 더 뱅가드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뭔가 편하게 재밍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에서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을 수 있던 것 같다.

앨범 아트가 되게 인상적이다. 사운드만큼이나 비주얼에서 오는 디자인적 일치감이 있는 것 같은데.
밴드의 아트워크는 유자(Yooza)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유재형 작가가 맡아주었다. 팀 로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EP를 초창기부터 다 작업해준 분이다. 당시 우리는 미국에 있는 카툰 문화 그 서브 컬처적인 장르들을 전부 다 결합해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그거를 표현할 수 있는 분이 유자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모든 앨범아트를 카툰 형식으로 정하게 되었다.

사실 힙합이나 알앤비, 소울은 흑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고, 그런 의미에서 정통 알앤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서브 컬처에 속한다. 주류가 되고 싶어도 부딪히는 현실이 있기에 그런 문화를 이해하려는 자세와 사랑을 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온 것 같다. 아트워크를 자세히 보면 표현 방식이 굉장히 직관적일 때도 있고, 많은 요소를 숨겨놓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되게 재밌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을까.
지금은 새로운 도전보다 이 흑인음악 장르를 좀 더 깊게 파보고 싶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몰두하다 보면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도전이었구나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여름을 맞이해 뉴잭스윙 앨범을 만들었을 때도, 영화 < 쟝고 >의 스토리만으로 음악을 만들었을 때도, 모두가 도전이었다.

인천에 대한 추억이 궁금하다.
음, 우선 태어난 고향은 의정부지만 어릴 때 이사를 하다 중학생 때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다. 청소년기는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지 않나. 마침 집도 안정해지고,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에 기억이 제일 편하다. 그리고 음악을 시작하면서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가 필요했는데, 인천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다 보니 인천이라는 지역이 음악적으로 다가온 것이 많았다. 자아 형성과 음악적 고리를 모두 인천에서 형성할 수 있던 셈이다.

그리고 기타(박재우)형도 인천 출신이다. 둘이 학원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밴드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소래에 있는 한 맥주집에서 나눈 기억이 난다. 그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이 도전이고 무서워서 선택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형이 강력하게 설득하면서 결정권을 준 덕에 지금의 프롬올투휴먼이 결성되었다.

기억나는 인천과의 연이 있다면.
예전 부평과 < 부평 사운드 >에서 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인천 부평에 위치한 ‘창고 재즈펍’에서 공연했던 기억도 난다. 아쉽게도 당시 코로나 시즌이어서 관객 없이 녹화로만 진행했다. 요즘에는 인천에서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장이 엄청 많아졌다. 카페라든지 펍이라든지, 혹은 페스티벌이라든지 다시 한번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밴드가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 팬데믹이 겹쳤다.
그때가 절정으로 힘든 시기였다. 팀 내부에서도 의욕이 떨어지다 보니 활기찬 회의조차 진행되지 않더라. 우리 밴드가 2019년도에 ‘KT&G 상상마당 밴드디스커버리 선정’이나 ‘신한카드 루키 프로젝트 대상’ 등 여러모로 유의미한 외부 활동을 많이 했던 터라 그 아웃풋이 다가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는 그 의욕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만든 계기였다.

무엇보다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제일 힘들었다. 앨범을 내도 반응이 없고, 막상 밖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도 없는데다 상황이 나아진다는 기약조차 없었으니. 카메라 보고 혼자 얘기하며 소통하려니 미치겠더라. 그때 저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다. 사람이 없으면 그냥 합주하는 기분만 들고 재미도 덜하다. 최근 딥플로우 < Founder > 콘서트의 백밴드로 참여했는데, 그 짧은 공연만으로도 해소가 되고 에너지가 생기더라. 그 기억으로 아직까지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단독 공연 계획이 있는지.
당분간은 그때 공연에서 얻은 에너지를 다시 발판 삼아 앨범으로 만드는데 집중할 것 같다. 계획했던 것보다 발매가 많이 밀리기도 했고 그때 가서 천천히 계획해도 되니까. 그리고 만약 기회가 된다면 해외 투어를 해보고 싶다. 예전에 대만에서 초청받아 가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분들이 다들 서투른 한국말로 환호해주던 광경이 기억에 아직도 남는다.

지금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밴드를 만든 베스트 앨범을 뽑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2집 < The Wind, The Sea, The Rain >을 꼽는다.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을 시작해야겠다고 맘 먹은 이유다. ‘My story’라는 곡을 듣고 ‘아, 이게 진짜 음악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그리고 ‘End of the road’가 수록된 보이즈 투 맨의 < Cooleyhighharmony >를 뽑고 싶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도대체 어떤 음악을 듣고 자랐을까, 하는 생각에서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 찾게 된 앨범이다.

팀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앨범을 뽑자면, 1996년도 발매된 맥스웰의 < Maxwell’s Urban Hang Suite >와 ‘Untilted (how does it feel)’이 수록된 2000년도 작품 디안젤로의 < Voodoo >를 꼽고 싶다. 사운드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레퍼런스로 많이 삼기도 하고, 멤버들과 같이 들으면서 밴드의 바이블이자 모토가 되어준 소중한 앨범들이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본격적으로 준비하기보다도 음악은 되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불 뒤집어쓴 상태에서 앞서 말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흥미를 붙이게 된 셈이다. 이 분야는 끝없이 연구해야 하는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영향도 많고, 또 그 사람의 뿌리를 찾으려고 올라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너무 재미있다. 일종의 덕질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제일 존경하는 보컬리스트 역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뽑고 싶다. 사실 나는 개별 보컬도 중요하지만,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지닌 진정한 감성은 멤버 네 명이 모두 모였을 때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하모니라던가 섬세하게 잡히는 소리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지 않나. 그리고 보이즈 투 맨과 같은 시기에 나온 조데시(Jodeci) 그룹도 언급하고 싶다. 사랑을 팝적인 감성으로 부르는 보이즈 투 맨과는 다르게 조데시는 굉장히 선정적이고 섹시한 가사를 노래하는 팀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섹시한 음악도 해보고 싶고, 사랑스러운 음악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물론 이런 짙은 감성들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 아직도 열심히 연구 중이다. (웃음)

진행 :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김성욱
정리 : 장준환
사진 : 프롬올투휴먼 제공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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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2 강혜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두 번째 주인공은 K팝 아이돌과 트로트를 아우르는 뮤지션 강혜연이다.

오디션 프로그램 < 내일은 미스트롯 >의 등장은 기성세대 위주의 트로트 신에 젊음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송가인, 임영웅을 비롯한 수많은 차세대 주자를 발굴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탄탄한 팬덤 문화가 형성된 덕분에 주요 음악 차트의 상위권에서도 트로트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긍정적 성과와 달리 대부분의 젊은 층은 여전히 트로트를 즐겨 듣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 장르의 현주소를 받아들이고 세대 간극을 좁히기 위해 힘쓰는 이가 있다. 걸그룹 이엑스아이디(EXID)의 초기 멤버이자 베스티(BESTie)의 리더로 활약한 강혜연은 아이돌 활동을 마친 2018년 ‘왔다야’를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 변신을 꾀했다. 급격한 노선 변경이었지만 트로트를 향한 진심 하나로 시장이 필요로 하는 본인만의 스타일을 잡아 나갔고 < 미스트롯 2 >를 기점으로 그 노력들이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아이돌과 트로트, 양분화된 두 흐름 사이를 넘나들었던 10여 년의 시간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푸르른 여름의 기운을 몰고 나타난 강혜연과 함께 파란만장했던 그의 음악 인생을 되짚어 보았다. 

작년 정규 1집 < 선데이혜연 > 발매 이후 별다른 음악 행보는 없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일은 어느 때보다 열심히 하고 있었다. < 미스트롯 2 > 종영 이후 < 화요일은 밤이 좋아 >, < 6시 내고향 >에 출연하며 부지런히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중이다. 물론 음악 작업 또한 늘 생각하고 있다. 다만 아직 어떤 스타일의 곡을 내야 할지 정하지 못해서 완성도를 위해서라도 시간을 두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중이다.

방송 출연 이후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전에는 내가 트로트 한다고 해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많이 알아봐 주셔서 감사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스케줄도 많아졌다. 그전까지는 고정 일정이 별로 없어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외가인 제주도에도 종종 다녀오고 했었는데 지금은 따로 시간 내기도 어려울 정도다. 보내주시는 관심에 감사할 따름이다.

< 미스트롯 2 >에는 어떻게 참가하게 되었는지.

사실 시즌 1 때 연락이 오긴 했었다. 근데 그때는 트로트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트로트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나가봤자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만약에 시즌 2를 하게 된다면 나가겠다고 얘기를 했고 그전까지 트로트를 체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준비하는 동안 국악도 배웠다고 들었다.

세미 트로트만 잘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전통 창법을 익히기 위해서 민요를 한 2~3개월 정도 배웠었다. 하지만 원래 국악을 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어설프게 흉내만 내다가 성대 결절 조짐이 보였다. 프로그램 참가 대비는 물론이고 가수 생활도 계속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됐다.

기존에 익혔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인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정신없이 외우기 바빠서 뭐가 부족한지 느낄 새도 없었다. (웃음) 음계가 적힌 악보라도 있었으면 그나마 편할 텐데 민요에선 선생님이 불러 주시는 멜로디와 리듬을 따라 하고 그걸 녹음해서 집에서 연습하는 게 최선이었다. 새삼 국악 하시는 분들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 미스트롯 2 > 자기소개 당시 “아이돌 꼬리표는 싫다”라는 문구를 사용했다.

아이돌 출신 자체를 부정한 건 절대 아니다. 다른 친구들보다 방송 적응이 빨랐고 무대 매너도 금방 습득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이돌 활동이 큰 도움이 됐다. 다만 아이돌을 하다가 트로트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트로트만 좋아하시던 팬분들께서 경계를 많이 하셨다. 단순히 아이돌 출신이란 꼬리표 때문에 트로트를 향한 내 진심이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런 슬로건을 내걸었다.

아이돌 연습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사실 처음부터 아이돌을 목표로 한 건 아니었다. 발라드나 알앤비를 즐겨 들었기 때문에 마야, 임정희, 다비치 같은 가수가 되고 싶어했고, 심지어 춤도 아예 출 줄 몰랐던 몸치라서 아이돌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브라운아이드걸스 회사에서 연습생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어 경험 삼아 한번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이 됐다. 대학보다 연습생 쪽으로 운이 있었던 것 같다. (웃음)

연습생을 하면서도 입시 도전을 계속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연습생 트레이닝과 입시 준비가 결이 다르다 보니 꾸준히 문을 두들겼음에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다. 4수 정도 한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항상 대학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기타 치고 노래 부르는 환상이 있었기 때문에, 휴학하는 한이 있더라도 대학만큼은 꼭 가보고 싶었다.

그룹 활동 중에도 종종 트로트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목회에서 어른분들이 ‘찰랑찰랑’이나 ‘남행열차’ 같은 노래를 부르시니까 자연스럽게 많이 접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중학교 때 선생님께 장윤정 선배님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때 마침 ‘어머나’, ‘짠짜라’ 같은 곡들이 한창 대박을 터트리던 시기라서 자주 듣고 따라 불렀다. 기본적으로 트로트란 장르에 대해 친근감이나 애정이 어느 정도 있었다.

베스티 활동 당시에도 대표님이 내가 트로트 좋아하는 걸 아니까 엠넷에서 방영한 < 트로트 엑스 >라는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셨다. 그때부터 트로트를 많이 듣고 전문적인 레슨까지 받았었는데 알려주신 선생님께서도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트로트 가수를 해보라고 하셨다. 실제로 받아 놓았던 곡들도 꽤 있었지만 회사 재정 문제로 앨범 제작은 무산되었다.

아이돌에서 트로트 가수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사실 첫 팀이었던 이엑스아이디(EXID)에서 나오고 옮겼던 소속사 이사님께서도 트로트 솔로를 먼저 권유하셨다. 그런데 엄마랑 상의해 보면서 트로트는 나이가 들어서 해도 괜찮으니까 아이돌 활동을 더 해보자고 결론을 내렸고, 그렇게 재데뷔 하게 된 팀이 베스티였다.

활동을 이어가다가 베스티 계약도 생각보다 일찍 만료되고 나니 당장 뭘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혼자 음악 활동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작곡도 배워보며 유튜브 개인 채널에 영상을 조금씩 올리고 있었는데, 지금 대표님께서 갑자기 연락을 주셨다. 베스티 때 라디오에 나가서 불렀던 트로트 커버 영상을 보고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고 계셨다고 말씀하셨고 덕분에 지금의 길로 잘 넘어올 수 있었다.

아이돌과 트로트 가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아이돌 때는 멤버들이 있어서 서로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지만, 트로트는 혼자 모든 걸 이끌어야 하고 관객과의 소통도 온전히 내 몫이다. 물론 잘하면 내가 돋보인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런 부담감 자체가 상당히 컸다. 그전에는 무대에서 긴장해 본 적이 없었는데 트로트 가수로 처음 무대에 올랐을 땐 마이크가 덜덜 흔들릴 정도로 매우 떨렸다.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데뷔 직후에는 별다른 스케줄이 없었다. 한 1년 동안 < 가요무대 >에 나가며 트로트를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지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감을 잡았다 싶었는데 이 때 코로나가 터져서 뭘 할 수도 없었다. 행사도 못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떠올려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유튜브에 트로트 영상을 꾸준히 올렸다. < 미스트롯 2 > 전에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트로트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선배들의 노래를 많이 리메이크하게 된다. 원곡의 느낌을 살리려고 하는지 아니면 본인만의 스타일로 바꿔 부르는 편인지.

기존 트로트 팬층들은 보통 옛 노래를 그대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계신다. 그런데 < 가요무대 > 같은 프로그램의 PD님들은 오히려 나의 상큼하고 통통 튀는 모습을 원했던 것 같다. 처음엔 ‘왜 내게 이런 곡을 추천하셨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다른 출연진의 스타일을 보고 그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젊은 트로트 가수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얼굴과 소리가 필요했고, 그 후로는 선배님들의 무대를 마냥 따라 하기보단 나만의 장점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렇다면 트로트 가수 강혜연의 장단점은.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이 중요한 아이돌을 겪어봤기 때문에 아무래도 무대 위 표정이나 동작은 기존 트로트 가수분들보다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그만큼 소리 면에서 약점이 존재한다. 트로트를 오래 한 분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울림이 얕고, 다양하고 섬세함을 요구하는 기교 자체도 부족하다. 그래도 부단히 노력하면 자연스레 채워 나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작년에 한창 브레이브걸스가 역주행으로 시끌벅적했을 때 유정 씨가 절친한 가수로 강혜연 씨를 언급했다. 어떤 인연이 있는지.

KBS에서 방영한 아이돌 회생 프로그램 < 더 유닛 >에 같이 출연하면서 알게 됐다. 당시에 성격도 비슷하고 서로의 아픔을 너무 잘 아니까 금방 친해졌다.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자주 만나서 각자의 인생에 대한 얘기를 나눴고,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었다. 그렇게 방황의 시기를 겪고 있다가 나는 < 미스트롯 2 >에 나가서 잘 풀리기 시작했고 브레이브걸스도 딱 그때 역주행을 하며 부활했다.

‘척하면 척’의 작곡을 맡은 투챔프랑 연이 닿은 것도 혹시 유정 덕분인지.

맞다. 사실 ‘척하면 척’은 투챔프와 함께 작곡에 참여한 내 남동생 디웨일의 노래이기도 하다. 동생이 작곡한다는 사실을 알았던 유정이가 투챔프 오빠들과 연결을 시켜줬고 서로 음악적인 합이 잘 맞았는지 팀을 만든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포인트나 어울리는 스타일도 잘 알아서 앞으로도 작업을 같이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반 대중가요 같은 느낌도 든다.

한동안 대중가요를 안 듣고 트로트만 들어서 그런지 처음 들었을 땐 확실히 낯설었다. 기존 트로트 곡들은 어른들도 따라 부를 수 있게 노랫말이나 멜로디가 쉬운 편인데 ‘척하면 척’은 아이돌 음악처럼 리듬감도 넘치고 가사도 많아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서 단순한 방향으로 수정을 요청하려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해서 그대로 가기로 했다.

물론 ‘트로트’라는 명칭과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즐겨듣지 않는다. 요즘 차트에 트로트도 많이 올라와 있어서 길거리에서도 간간이 트로트가 들려오는데 대부분 바로 넘기거나 플레이리스트에서 제외해버린다. 앞으로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세련된 트로트를 만들어 보고 싶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 나서 해보고 싶은 음악 스타일이나 장르가 있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발라드를 해보고 싶다. 특히 7080 시대를 겪은 어른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옛날 감성의 발라드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포크도 해보고 싶다. 옛날에 많이 즐겨 듣기도 했고 베스티 때 기타를 독학으로 배워서 김광석 선배님의 곡들을 많이 연습했을 정도로 잔잔한 음악에 관심이 있다.

고향이 인천이다. 쭉 인천에서 살아온 만큼 인천에 얽힌 추억도 많을 것 같다.

예전에 살던 용현동 집이 인하대학교 후문이랑 가까워서 매년 학교 축제에 놀러 가곤 했었다. 2002년엔 초대 가수로 마야 선배님이 오셨는데,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폭발적인 가창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할 정도다. 원래도 노래하고 춤추는 걸 좋아했지만 그 무대를 보고 나서 나도 저런 멋있는 가수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실용음악 학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꿈을 키워 나갔다.

무대에 서는 걸 워낙 좋아해서 고등학교 시절에 지역 가요제를 정말 많이 나갔었다. 한창 다닐 때는 하루에 2개도 참가해 봤을 정도였다. 부평 청소년 가요제에서 상을 탔었고 화도진 청소년 가요제에서도 입상해서 신포 문화의 거리에서 쓸 수 있는 상품권을 받기도 했었다.

동생도 음악인의 길로 빠졌다. 집안에 음악 DNA가 흐르는 건가.

꼭 그렇지도 않다. 우리 아빠는 음악 듣는 건 정말 좋아해도 완전 음치에 박치다. (웃음) 다른 건 모르겠지만 피아노나 기타 같은 악기를 배우는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대신 춤만큼은 익히는 데 정말 오래 걸렸다.

음악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바로 허락하셨는지.

엄마는 내가 하고 싶은 걸 지지해 주신 반면 아빠는 처음에 많이 반대했다. PD인 삼촌 친구분에게 연예계에 대한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으셔서 그런지, 방송 연예인보다는 뮤지컬 배우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성당에서 성가를 부르는 가수가 되길 바라셨다. 심지어 아이돌을 한창 하고 있을 때도 관두고 딴 거 해도 된다고 계속 말씀하셨다. 그래도 트로트 하고 나서부터는 유명해지고 용돈도 챙겨드려서 지금은 자랑을 하고 다니실 정도로 좋아하신다. (웃음)


확실히 수입이 늘어나긴 했는지.

늘었다기보단 생겼다고 하는 게 맞다. 가수로 데뷔하고 9년 동안 한 번도 정산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이돌은 TV에 자주 나오고 화려한 모습으로 보이다 보니까 잘 버는 줄 아는 친구들이 많은데 현실은 그게 아니다. 주변에선 직장도 어느 정도 자리 잡아서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돈을 타서 쓰는 입장이었다. 그래도 < 미스트롯 2 >가 끝난 그해 가을에 처음으로 정산금이 들어왔다. 이제 내 밥벌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가수 생활 중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는 지금, 강혜연의 목표는 무엇인가.

여기까지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나이에만 할 수 있는 음악적인 시도를 많이 해보려고 한다. 아마 그 중심엔 기존 트로트의 질감을 계승하면서도 대중가요의 트렌드도 적절히 반영할 수 있는 ‘세미 트로트’가 있을 것 같다. 장윤정, 홍진영 선배님의 뒤를 잇는 세미 트로트의 다음 주자는 물론이고, 아이돌 출신 트로트 가수의 선두에서 보다 더 젊은 후배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본보기가 되고 싶다.

진행: 소승근, 장준환, 정다열
사진: 정다열
정리: 정다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