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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8 원일

한국 대중연예사를 듣는 듯했다. 원로 사회자 겸 코미디언 원일은 1960년대부터 미8군을 제외한 수많은 ‘일반’ 극장 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트위스트 김과 쟈니 리의 무대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하는 그는 남진과 이미자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뿐만 아니라 지금은 잊힌 많은 연예인을 목격한 역사의 산증인이었다. 반세기도 더 지난 기록들은 명료한 음성을 통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대중문화 흐름과 변천에 늘 촉각을 곤두세운 원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랜 동료 방일수와 함께 각 지역 순회 공연을 도는 원일은 엄연한 현역 코미디언이다. 인터뷰 말미 힘차게 공연 포스터를 펼쳐들며 “꼭 한번 놀러오라”며 초대를 건넸다. 대한민국 방송 코미디언 협회 이사직을 역임하며 권리 신장을 위해 힘쓰고 있는 그는 노인을 위한 콘텐츠, 정통 개그 프로그램 부재에 대한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연예계에서의 발자취를 담은 < 인맥 >이란 책을 집필 중인 원일은 백마장과 대한극장에 대한 기억 등 부평과의 인연도 두터웠다.

활동 초기는 어떠셨나요?
백설희, 백난아, 금사향, 김정구 고복수, 황금심 같은 가수들이 인기를 끈 1950년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동두천과 의정부, 부평과 오산 등 각지에서 미군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었다. 주식회사 화양, 동일 등 전문적인 공연 기획사가 있을 정도였다. 당시 국내 볼거리 형태는 순극(정극), 신파극, 국극(국악)(창극), 악극(유랑극단), 서커스 다섯 가지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60년대부터 극장 쇼 시스템이 정착했다.

1960년대 극장 쇼에서 활약한 가수를 알려주신다면?
쟈니 리와 ‘땅벌’의 이태신, 안일, 지미 리, 차리 김, 차리 박, 카니 홍, 로렌 케이 등 많은 가수가 활약했다. 현미와 한명숙, 윤항기도 일반에서 먼저 활동하다가 나중에 미8군 무대에 선 것이다. 서구적인 이미지를 위해 외국 이름을 붙여다가 썼다. 바니걸스와 김시스터즈, 이시스터즈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현미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어떠한가요?
현미는 ‘밤안개’와 ‘보고 싶은 얼굴’, ‘몽땅 내 사랑’같은 곡이 히트한 뒤에 만났다. 분명 절륜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동남아를 휩쓴 한명숙과 더불어 기억에 많이 남는 가수다.

당시 국내와 미8군 연예인의 차이점은 어땠나요?
미8군 연예인들은 스탠더드 팝과 재즈를 구사했지만, 국내 연예인은 트로트를 불렀다. 애초에 방향성이 다르기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양쪽 다 실력이 탄탄했다. 몇몇 가수들은 미8군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이봉조, 박춘석 같은 스타 작곡과들과의 협업으로 곡을 취입했다. 이런 곡들이 크게 히트한 덕분에 가수의 인지도가 올라갔다. 최희준의 ‘하숙생’, 현미 ‘밤안개’가 대표적이다.

1960년대 접어들어 미군들이 대거 철수했다. 미8군에서 활동하던 보컬 그룹들이 일반 무대로 나와 서구적인 팝과 재즈를 공연했다. 양색시들과 함께 온 미군이 땅콩이 든 과자를 말하는 ‘콩과자’를 던지며 무대에 호응했던 기억이 난다.

관객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당시 극장 쇼가 사실 체계적인 볼거리는 아니었다. 국악과 연극의 수준도 그리 높진 않았다. 그나마 관중들이 선호하던 악극도 2시간 내내 몰입감이 이어지진 않았다. 1960년대부터 등장한 버라이어티쇼는 무용단의 캉캉, 재즈 곡 연주, 유명 가수의 등장으로 박수와 앙코르를 얻어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극장 쇼 인기가 점점 떨어짐과 동시에 영화의 인기는 높아졌다. 문희와 윤정희,남정임 등 여배우 트로이카가 한창 급부상한 시기였다. 그래서 쇼 단장들이 배우를 기용하기 시작했다. 신성일과 남궁원도 가끔 무대에 섰다.

그렇다면 미8군 출신들이 국내에서 공연할 땐 반응이 어땠습니까?
한명숙, 최희준, ‘키다리 미스터김’의 이금희와 ‘눈물을 감추고’의 위키리(이한필) 같은 가수들이 실력 발휘했다.

선생님이 경험하신 최고의 무대는 무엇입니까?
‘뜨거운 안녕’의 자니 리다. 자니 리와 ‘허무한 마음’을 부른 정원 콤비가 잘 나갔고, 영화에서도 큰 인기를 얻은 트위스트 김(김한섭)이 춤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다양한 공연을 진행하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쇼 진행을 많이 맡았다. 동대문운동장 서독 서커스, 시민회관 인도마법단, 대만 아크로바틱쇼, 현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에 특설링을 제작해서 돌고래 쇼를 하기도 했다. 구봉서가 주축이 된 월하의 무법자, 김희갑의 팔도 강산 귀국 쇼도 기억에 남는다.

그때 당시에 극장 쇼 많이 했던 진행자는 누가 있었나요?
백금녀와 콤비로 활약했던 서영춘, 송해와 박시명 콤비, 임희춘 배수남 / 서영수 이기동 / 최성일 이대성 / 심철호 남성남 (후에 남철 남성남) 선배들이 계셨다. MBC가 개국하면서 구봉서, 배삼룡 같은 스타 희극인들이 다 그쪽으로 갔다. 자연스레 극장 쇼가 약화되었지만 난 사명감을 갖고 그 자리를 지켰다.

미8군 부대와 인접했던 극장과 그렇지 않은 극장은 어떤 점에서 달랐습니까?
용주골과 문산, 파주, 의정부, 동두천처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극장엔 극장 주인들이 팝과 재즈를 포함했다. 큰 차이는 없었다.

극장 쇼에서 특히 노래를 잘 불렀던 가수는 누가 있습니까?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중반까지 요즘 가요무대 많이 나오는 박재란이 인기 끌었고, 1964년 ‘동백 아가씨’부터 이미자의 존재감이 높아졌다. 최숙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 후 미8군 출신인 현미, 한명숙, 최희준이 인기 대열에 동참했다.

어린 시절 부천 소사에서 본 가수 박재란이 잊히지 않습니다. 그의 무대는 어땠나요?
박재란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나와 함께할 때는 인기가 약간 하락할 때다. 최숙자의 인기가 높았고, 이미자와 김세레나(국민 동생이라 불리며 인기 엄청 많았다), 조미미, 김부자가 인기를 구가했다. 곧이어 월남전이 터졌고 나도 위문 공연에 다녀왔다. 현재 그 일과 관련하여 국가유공자 지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있다.

윤항기나 신중현 같은 로큰롤 세대도 목격하셨나요?
신중현이 일반 무대에 사이키델릭 록을 들고 왔다. 신중현과 퀘션스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는데 번쩍이는 조명과 환각적인 음악에 절로 춤사위가 나왔다. 나도 그래서 사이키델릭 춤을 연구했다.

1960년대 후반엔 다크 아이스와 키 보이스 같은 밴드들이 인기를 끌었다. 신중현과 엽전들의 매니저기도 했던 박영걸 사단 라스트 챤스는 히피다운 분위기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후에 ‘안녕’으로 사랑받은 김태화가 라스트 챤스 출신이다.

월남엔 어떻게 가게 되신건가요?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인 문화공보부에서 간 거다. 전쟁이 맘처럼 되지 않았고 군인들의 사기도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지원사령부에서 국방부에 위문 공연을 위해 인기 연예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국방부와 문공부가 협조했을 것이다. ‘불나비’, ‘불개미’의 가수 김상국도 같이 다녀 왔다.

월남 위문공연 중 공습으로 공연이 중단된 적도 있습니까?
포탄이 날아와서 무대 밑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했다.

남진, 태원, 진성남 같은 가수들은 월남전에 군인으로 참전했습니다. 그들이 공연도 했나요?
공연도 했다. 남진은 이미 ‘가슴아프게’와 ‘울려고 내가 왔나’의 히트 가수였기에 무대 매너가 화려했다.

김상국은 스탠더드 팝에 기반한 서구적 풍모와 ‘쾌지나 칭칭나네’의 전통적 느낌이 혼재된 독특한 가수였습니다.
김상국은 루이 암스트롱의 ‘When the saint go marching in’도 잘 불렀다. 월남전 미군들을 상대로 공연한 적이 있다. 배일집과 내가 진행을 맡았지만 둘 다 영어가 짧아 미군과 소통이 어려웠다. 그래서 김상국이 대신 사회를 보고 나와 배일집은 판토마임을 구사했다. 김상국이 영어 노래 불렀고 김하정은 춤을 췄다.

김하정도 당대 인기 가수였습니다.
출중한 외모에 ‘살짜기 옵서예’, ‘금산아가씨’, ‘사랑’ 등 히트곡도 많았다. 지금은 몸이 안 좋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과거 연예계와 거대 기업화된 현재 연예계 풍토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끼시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 경제 수준이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여러 가지 기회가 증가했다.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분업이 대부분이었던 과거와 달리 능력만 된다면 배우와 가수 등 다양한 분야의 겸업이 가능하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부평, 인천과의 인연은 어떠한가요?
그 지역에서 극장 쇼 진행을 주로 하진 않았지만, 백마장과 대한극장같은 명소가 친숙하고, 미군을 대상으로 한 무대(애스컴)가 활발했음을 기억한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중이신가요?
동료 코미디언 방일수와 각 지방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고 있다. 연예인으로서의 60여년 삶을 담은 <인맥 >이라는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신하영
정리 : 염동교, 신하영
사진 :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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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8 채제민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여덟 번째 주인공은 록밴드 부활의 버팀목인 드러머 채제민이다.

호인(好人). 35년 경력의 베테랑 드러머 채제민이 준 인상이다. 따스한 언행과 호탕한 웃음에 분위기가 밝아졌고 이야기도 술술 풀려나갔다. 1987년 강변가요제 수상작 ‘매일 매일 기다려’의 주인공 티삼스로 데뷔한 이후 신승훈과 김건모의 세션 드러머로 활약해온 그는 1998년 동경했던 록밴드 부활에 가입했다. 1년간의 짧은 활동과 안타까운 이별. 하지만 명곡 ‘Never ending story’가 수록된 여덟 번째 앨범 < 새, 벽 >에 참여했고 그 이후 20년째 부활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고 있다.

채제민에게 인천은 어떤 의미일까? 나고 자라며 막대한 음악적 영감을 받음과 동시에 십여 년간 드럼 학원을 운영하며 후학을 양성한 곳. 배움과 가르침이 공존했던 인천은 음악 인생의 터전이자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재능형이 아닌 철저한 노력형’이며 ‘가늘고 길게 음악 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땀 흘린 자의 무게감과 겸손이 묻어 나왔다. 올해 각종 페스티벌에서 펼쳐질 부활의 공연에 흥분된다는 그는 현재 대학교 겸임 교수와 인터넷 라디오 디제이 등 다방면에 긍정적 기운을 불어넣고 있다.

이즘과의 인터뷰를 기억하는지?
기억이 생생하다. 2005년이니 벌써 17년이 지났다.

원래 인천에 거주하시는지?
인천 토박이다. 태어난 곳은 율목동이고 지금은 청라에 산다.

부활 활동은 몇 년째인가?
1998년에 들어와서 6집 < 理想 시선 >부터 활동하고 있으니 25년째이다. 리더 겸 기타리스트 김태원 다음으로 오래된 멤버이다.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활의 드러머로 활약하고 계시는데 롱런의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어렸을 적 헤비메탈을 들을 때도 멜로디컬한 음악을 선호했고 자연스레 부활의 팬이 되었다. 부활 특유의 서정성에 매혹되었달까? 이승철 밴드에서 세션 활동을 하던 시기 키보디스트 최승찬이 부활을 소개해 준 계기로 가입하게 되었다. 워낙 오래전부터 흠모해왔던 분들이라 따로 굳은 마음을 먹지 않아도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7집 < Color > 은 참여하지 않았다. 재합류 이후 8집 < 새, 벽 >에 수록한 ‘Never ending story’가 성공하며 완전한 멤버십을 확립했다고 보이는데 그동안 가장 즐거웠던 때는 언제인가?
뻔한 답변이 될 수도 있지만 역시 2002년 ‘Never ending story’의 성공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실 처음에는 반응이 오지 않았다. < 윤도현의 러브레터 >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다가 보컬 이승철이 감정에 북받쳤는지 눈물을 흘렸는데 아마 뮤지션으로서 승패의 갈림길이 될 수 있는 시험대로 여긴 것 같다. 이 일을 기점으로 봐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곡과 앨범에 대한 인기가 대폭 상승해 50여 개의 도시를 돌며 순회공연했다. 얼핏 듣기론 곡이 교과서에도 수록됐다고 들었다. 감사한 일이다.

일찍이 부활을 좋아하셨다고 했는데 언제부터였는가?
부활의 인천 시민회관에서 공연에 간 적이 있다. 나는 당시 티삼스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부활을 흠모했던 것 같다. 시나위도 그렇고 백두산도 좋아했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부활의 음악을 선호했다.
*티삼스: 1987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매일 매일 기다려’로 동상을 수상한 캠퍼스 밴드

부활 활동과 후학 양성을 병행했다. 새로운 활동 분야를 개척했다고 볼 수 있는데 계기는 무엇인가?
‘필 음악학원’이라는 드럼 교습소를 1990년대 초중반에도 운영했다. 인천 출신 뮤지션들이 꽤 많이 거쳐 간 곳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보람을 느꼈다.

레슨할 때 주요 포인트는 무엇인가?
기본적인 루디먼트(Rudiment)을 가르친다. 각 친구의 특성을 유심히 관찰해 그쪽을 특화하려 한다. 모든 노래를 잘 소화하기는 어렵기에 빠른 곡을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라면 그 장점을 살리도록 도와준다.
*드럼 루디먼트(Drum Rudiment): 더욱 확장되고 복잡한 드럼 패턴의 기초를 형성하는 비교적 작은 패턴들의 모음

여전히 강의하고 있는지?
백석 예술대학교의 겸임 교수다.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하면서 밴드 앙상블과 합주를 지도한다. 강의를 열심히 하면서도 밴드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노력한다.

교육자의 입장에서 학생들에게 어떤 것을 강조하는지?
마음속 행복을 가장 강조한다. 음악을 비롯해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원하는지가 중요하다. 마음이 시키지 않으면 즐겁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기 싫은 공부 등 떠밀면 더 잘 안 하게 되듯 음악도 마찬가지다.

드러머로서, 또 교육자로서 영화 < 위플래시 >를 보았는가? 감상이 궁금하다.
감명 깊게 본 영화 중 하나다. 외국의 뮤지션은 물론이고 영화 및 각종 예술 작품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 위플래시 >같은 음악영화들뿐만 아니라 음악가의 일대기를 그린 외국 영화들을 보면 배우와 실존 인물 간 싱크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연습했으리라 생각한다. 가혹한 가르침은 지양해야 하겠지만 스틱을 들 만한 힘이 있다면 계속 노력해야 한다.

채제민 드럼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레이드 백(Laid Back)이다. 같은 리듬을 쳐도 약간 뒤로 밀어 안정감을 준다. 정박의 템포에서 약간씩 빨라지는 습성의 드러머도 있고 느려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야 한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연주자는 신나는 곡에 강하지만 발라드를 연주할 때는 깊이가 부족하다. 저 같은 경우에는 약간 뒤쪽에 붙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서정적인 부활 음악에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 신나는 음악에서는 부족한 면도 있다.
레이드 백(Laid Back): 리듬을 정박보다 조금 뒤로 밀며 그루브를 만드는 것.

최근 감명 깊게 본 드럼 연주가 있는지?
시베리아노(Estepario Siberiano)라는 사람이다. 결코 세계적인 드러머는 아니지만, 구독자가 60만이 넘는 유튜버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드럼을 연주하다 하나의 스타일에 치중하기 마련인데 시베리아노라는 두 가지 모두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의 일과를 영상으로 봤는데 종일 연습만 하더라. 굉장한 연습량을 통한 결실이라고 느꼈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다면 연주자로서 훌륭한 뮤지션은 연습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보는가? 아니면 어느 정도는 타고난 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연습형이다. 타고난 재능이 하나도 없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다가 그만두고, 친구이자 밴드 사라하의 기타리스트 인재홍의 합주실에 따라갔다. 그렇게 시작한 음악이 너무 좋았다. 당시에는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다.

부활 25주년을 한번 정리하자면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17년 전 인터뷰했을 때는 주로 어려움을 토로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버티는 것’의 가치를 말하고 싶다. 예전만 해도 모든 걸 버리고 음악에 올인하는 문화였다. 요즘은 좀 바뀌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학원을 운영했던 것도 음악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워낙에 인생의 모토가 ‘가늘고 길게’이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이즘 공식 질문이다. 드러머로서 음악 인생에 영향을 많이 준 앨범이나 아티스트가 있다면?
내가 하는 음악과 느낌이 다르지만, 토토를 정말 좋아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제프 포카로는 리듬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다. 완전히 상반된 스타일을 가진 머틀리 크루의 토미 리도 들고 싶다. 기본기가 좋을 뿐 아니라 퍼포먼스가 정말 멋있었다. 밴 헤일런의 음악도 많이 들었고 ‘음악을 해야겠다’라고 마음먹게 해준 밴드는 저니다.

언급한 밴드 중에서 채제민의 인생곡을 뽑자면?
머틀리 크루의 ‘Looks that kill’과 ‘Too young to fall in love’를 들겠다.

진행: 임진모, 염동교
정리: 염동교
사진: 염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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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4 프롬올투휴먼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스물네 번째 주인공은 깊고 진한 풍미의 알앤비 밴드, 프롬올투휴먼이다.

혹자는 이들을 두고 ‘레지스탕스’라고 표현한다. 동명의 음반 제목만큼이나 현상 유지를 거부하고 꾸준한 음악적 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흑인음악의 문화를 탐구하고 전파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수식어인 것이다. 네 장의 EP로 혜성처럼 나타나 여러 수상을 거머쥔 화려한 이력은 밴드가 지닌 굳건한 자세만큼이나 이에 상응하는 수려한 실력을 증명한다.

틀에 갇히지 않는 음악을 위해 진득한 외골수 청년들이 뭉쳐 만들어낸 알앤비 밴드,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은 하나로 규정하기 힘든 창작 세계를 나타낸다. 다양하고 깊은 그루브를 아주 부드럽게 뿜어내다가도, 때론 댄서블한 바이브를 가져오기도 한다. ‘음악은 좋은 대화 수단인 것 같다’는 말처럼 그 순간 하고 싶은 언어를 소리에 담아 흘려보낸다. 그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한 여름 밤, 홍대 사무실에서 프롬올투휴먼의 보컬 ‘블레싱’ 김석근을 만나 그들의 음악관에 대해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즘을 보고 계신 독자분들에게 간략한 소개 부탁한다.
반갑습니다. 저는 프롬올투휴먼이라는 밴드에서 노래를 하고 있는 ‘블레싱(Blesssing)’ 김석근이라고 합니다. 예명인 블레싱은 축복의 의미인 ‘블레스(Bless)’와 노래한다는 ‘싱(Sing)’을 합쳐 만든 뜻입니다. 제가 노래를 할 수 있는 건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런 예명을 짓게 되었습니다.

프롬올투휴먼(From All To Human)이라는 밴드명의 뜻이 궁금하다.
단어 뜻 자체로는 ‘모든 존재로부터 인간까지’라는 의미를, 내적으로는 ‘아직 진화가 덜 된 우리가 음악적으로 좀 더 진화를 하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자 했다. 사실 ‘프롬올투휴먼’이라는 문구는 앨범에 쓰려고 했던 이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더 형이 우리가 각자 가진 음악적 결핍을 해소하고 진화하는 과정을 밴드 이름으로 정하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꺼냈고, 다들 동의하게 되어 지금의 팀명이 결정되었다.

간략한 멤버 소개와 모이게 된 계기에 관해 이야기를 부탁한다.
밴드는 건반을 맡은 리더 문성환, 기타를 치는 박재우, 드럼의 문성호, 베이스의 남우석, 그리고 보컬인 저(블레싱)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멤버끼리 부르는 영어 이름은 있지만 막상 공연에서 부끄러워하더라. 지금은 멤버들의 직접적인 의사가 없으니 일단 본명으로 말씀드린다. (웃음)

리더 성환이 형과 재우 형, 성호 형은 이미 이전에 다른 밴드를 하고 있었고 리뉴얼 과정에서 내게 권유가 들어왔다. 그때가 2015년 정도였을 거다. 밴드에서 마침 흑인 음악을 하는 친구를 찾고 있었고, 한창 페이스북이 유행할 때였는데 리더 형이 SNS의 노래 부르는 제 영상을 보고 멤버 영입을 제안했다. 이건 비하인드 스토리지만, 영상 속 머리를 빡빡 민 내 모습을 보고 팀에 이런 분위기가 강한 친구가 필요했다며 뽑았다고 들었다.

2017년부터 꾸준하게 팀 단위 작업물을 내고 있고, 의상을 맞춘 단체 사진을 보면 유독 팀 분위기가 돈독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도 사실 안에서 엄청 싸운다. 대신 다소 언쟁이 있더라도 한 명이 이해를 못하면 모두가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의견을 나누는 편이다. 다른 팀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떤 내용의 음악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해 먼저 얘기한다. 예를 들어 오늘 날씨가 굉장히 습하고 처음 보는 장소라면, 이 점에 대해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모두가 동의를 마치고 합주에 들어가서 이 메타포에 어울리는 코드 진행을 던진다. 돈독해 보이는 이유가 이런 솔직함 덕분인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팀 내부에서 이러한 언쟁 과정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등을 묵히지 않고 바로 표출하고 해소하는 스타일인지.
맞다. 다만 이런 시스템이 만들어지기까지 리더 형이 엄청나게 노력했다. 누군가 의견을 제시하면 싸울지언정 서로 가감 없이 얘기한다. 그래야 ‘이 멤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왜 이렇게 생각할까?’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수 있지 않나. 물론 쉽지는 않아도 팀이 이어지려면 어쨌든 필요한 과정이다. 결정을 내리려면 누군가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겠지만, 결국 생각을 같이하기 위해 모였으니까. 그래야 더욱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음악을 할 수 있지 않냐는 생각이 든다.

멤버 간 음악 취향은 어떻나.
지금이야 하고 싶은 음악이 절충되어 서로 알앤비, 소울, 힙합 등 흑인 음악에 대한 내용을 많이 공유하는 편이지만, 옛날에는 조금 달랐다. 기타 형은 AC/DC 같은 록을 좋아하고 나는 국내 음악은 잘 안 듣고 흑인 음악만 듣는 타입이었다. 근데 서로 교류하며 다른 것도 듣다 보니 이런 편견들이 깨지더라. 그런 곳에서 오는 충격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또 듣는 취향이 다양해질 수 있던 것 같다.

뭔가 일종의 합주 같다.
오, 얘기하고 보니 그렇다. (웃음)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을 정의하자면.
오, 정말 어려운 질문이다. 의도는 너무 잘 알겠지만 ‘정의’라는 단어가 특히 답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듣는 사람들이 결정해 주는 게 나은지, 아니면 우리가 말을 드리는 게 나은지. 게다가 나 혼자 말하는 건 팀의 의견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정의를 굳이 하자면 ‘대화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곡을 만드는 과정에서 메타포를 두고 많은 경험을 공유하지 않나. 이 비유하는 과정도 누군가에게는 경험 일수도, 누군가에게는 설득 일수도, 누군가에게는 공감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프롬올투휴먼의 음악은 좋은 대화 수단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순간 공유하는 추억이나 관심사를 음악으로 표출하는 건지.
그게 제일 가깝다. 나중에 가서 음악을 들었을 때 이걸 만들 때 어떤 기분이었고 또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할 수 있는 기록물인 셈이다. 물론 옛날에는 훨씬 비장했고, 누군가한테 인정받기를 원했고, 염세적인 마음도 굉장히 강했다. 또 사람들에게 우리를 알려야 한다는 욕구가 강해서 그런 앨범을 낸 것도 있었고. 근데 그런 것들이 조금씩 해소되다 보니 또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게 되더라. 지금은 우리가 그 순간 하고 싶은 대화가 자연스럽게 담기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1990년대 컨템포러리 알앤비부터 뉴잭스윙, 네오소울까지 다루는 장르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런 요소를 가장 잘 풀어낼 수 있는 수단이 흑인음악이라고 생각했다. 이 장르에 대해 더 집중적으로 더 연구하고, 다른 것을 발굴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 중이다. 우리 팀은 EP와 싱글만 가득하고 아직 정규 앨범이 없는데, 1집에서는 뭔가 다양한 것을 보여드리려고 한다.

정규 1집은 지금까지 선보인 음악의 종합편인 건가.
아직 정확하게 정해진 건 없지만, 마침 얼마 전에 리더 형과 정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원래 나는 남의 의견을 잘 수렴하지 않는 성격인데 어느 순간 도태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 고민을 리더 형에게 꺼내니, 오히려 ‘나는 네 것이 좋다. 잘하고 있으니 보여줘도 괜찮다’라며 편하게 다독여주었다.

여태까지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음악을 보여주는 과정에서 내용이 조금씩 달라졌던 것처럼, 우리 밴드도 삶을 살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졌으니까.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사랑을 주고받으며 에너지가 바뀌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뭔가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가 주제일 것 같다. 어린아이부터 나이 드신 분까지 음악을 들었을 때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나중에 우리가 죽어서 없어졌을 때 이 친구들은 이런 생각을 했고, 이런 얘기를 했구나 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지만, 오랫동안 남을 음악적 언어를 물려주고 싶다.

어찌 보면 정규에 앞서 네 장의 EP로 연습을 마친 것은 아닌지.
어떻게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정규라는 어감 자체가 굉장히 무게감이 있다. 이 무게감이 어디로 가고, 제대로 표현하고 있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앞서 발표한 EP들은 네 번의 질문, 혹은 네 개의 대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각각 EP별로 설명하자면 첫 EP < LIEF >는 삶의 어려움과 휴식이라는 굴레 속 얼마나 솔직하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다음 EP < Paradise >는 조금 원초적이게도 여름에 꽂혀서 뉴잭스윙 스타일로 갔고, 세 번째 EP < Double Barrel > 같은 경우에는 영화 < 쟝고 >를 보고 바로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 EP < Resistance >는 우리 밴드가 보여줄 수 있는 비장함의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힙합 아티스트와의 콜라보가 매우 많다. 한요한, 재달, 큐엠과의 같이 작업했고, 피처링으로는 딥플로우의 < Founder >와 최근 피타입의 < Hardboiled Café >에도 참여했는데.
맞다. 그분들 중에는 우리 음악을 좋게 들어주신 분도 계시고, 부탁했을 때 흔쾌히 응하여 참여해 주신 분도 계시다. 특히 VMC에 반 루더(Van Ruther)라는 아티스트가 있는데, 딥플로우 님이 리얼 밴드로 앨범을 만들고 싶은데 주변에 밴드가 없을까 하는 질문에 반 루더 형이 우리를 소개해 주었다. 사실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지만, 그 밖의 이면에서 보면 장르 간의, 더 나아가면 문화 간 연결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힙합 덕에 좀 더 자연스럽게 협업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흑인 음악과 밴드 사운드를 결합하려는 이러한 시도가 과거부터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국의 퀘스트러브(Questlove)가 속해 있는 더 루츠에서 영감을 가장 많이 받았다. 더 나가서 디안젤로 앤 더 뱅가드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뭔가 편하게 재밍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에서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을 수 있던 것 같다.

앨범 아트가 되게 인상적이다. 사운드만큼이나 비주얼에서 오는 디자인적 일치감이 있는 것 같은데.
밴드의 아트워크는 유자(Yooza)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인 유재형 작가가 맡아주었다. 팀 로고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EP를 초창기부터 다 작업해준 분이다. 당시 우리는 미국에 있는 카툰 문화 그 서브 컬처적인 장르들을 전부 다 결합해서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었고, 그거를 표현할 수 있는 분이 유자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모든 앨범아트를 카툰 형식으로 정하게 되었다.

사실 힙합이나 알앤비, 소울은 흑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고, 그런 의미에서 정통 알앤비는 우리나라에서는 서브 컬처에 속한다. 주류가 되고 싶어도 부딪히는 현실이 있기에 그런 문화를 이해하려는 자세와 사랑을 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온 것 같다. 아트워크를 자세히 보면 표현 방식이 굉장히 직관적일 때도 있고, 많은 요소를 숨겨놓아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다. 되게 재밌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을까.
지금은 새로운 도전보다 이 흑인음악 장르를 좀 더 깊게 파보고 싶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몰두하다 보면 나중에 지나고 나서야 도전이었구나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여름을 맞이해 뉴잭스윙 앨범을 만들었을 때도, 영화 < 쟝고 >의 스토리만으로 음악을 만들었을 때도, 모두가 도전이었다.

인천에 대한 추억이 궁금하다.
음, 우선 태어난 고향은 의정부지만 어릴 때 이사를 하다 중학생 때 인천에 정착하게 되었다. 청소년기는 정서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시기지 않나. 마침 집도 안정해지고, 좋은 친구들을 만난 덕에 기억이 제일 편하다. 그리고 음악을 시작하면서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가 필요했는데, 인천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에 다니다 보니 인천이라는 지역이 음악적으로 다가온 것이 많았다. 자아 형성과 음악적 고리를 모두 인천에서 형성할 수 있던 셈이다.

그리고 기타(박재우)형도 인천 출신이다. 둘이 학원에서 만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밴드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소래에 있는 한 맥주집에서 나눈 기억이 난다. 그때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이 도전이고 무서워서 선택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형이 강력하게 설득하면서 결정권을 준 덕에 지금의 프롬올투휴먼이 결성되었다.

기억나는 인천과의 연이 있다면.
예전 부평과 < 부평 사운드 >에서 연을 맺은 적이 있었고, 인천 부평에 위치한 ‘창고 재즈펍’에서 공연했던 기억도 난다. 아쉽게도 당시 코로나 시즌이어서 관객 없이 녹화로만 진행했다. 요즘에는 인천에서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장이 엄청 많아졌다. 카페라든지 펍이라든지, 혹은 페스티벌이라든지 다시 한번 꼭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밴드가 주목받기 시작할 즈음 팬데믹이 겹쳤다.
그때가 절정으로 힘든 시기였다. 팀 내부에서도 의욕이 떨어지다 보니 활기찬 회의조차 진행되지 않더라. 우리 밴드가 2019년도에 ‘KT&G 상상마당 밴드디스커버리 선정’이나 ‘신한카드 루키 프로젝트 대상’ 등 여러모로 유의미한 외부 활동을 많이 했던 터라 그 아웃풋이 다가오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는 그 의욕을 완전히 끊어버리게 만든 계기였다.

무엇보다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제일 힘들었다. 앨범을 내도 반응이 없고, 막상 밖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환경도 없는데다 상황이 나아진다는 기약조차 없었으니. 카메라 보고 혼자 얘기하며 소통하려니 미치겠더라. 그때 저는 인터넷 방송을 하는 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꼈다. 사람이 없으면 그냥 합주하는 기분만 들고 재미도 덜하다. 최근 딥플로우 < Founder > 콘서트의 백밴드로 참여했는데, 그 짧은 공연만으로도 해소가 되고 에너지가 생기더라. 그 기억으로 아직까지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단독 공연 계획이 있는지.
당분간은 그때 공연에서 얻은 에너지를 다시 발판 삼아 앨범으로 만드는데 집중할 것 같다. 계획했던 것보다 발매가 많이 밀리기도 했고 그때 가서 천천히 계획해도 되니까. 그리고 만약 기회가 된다면 해외 투어를 해보고 싶다. 예전에 대만에서 초청받아 가서 공연한 적이 있는데, 말도 통하지 않는 분들이 다들 서투른 한국말로 환호해주던 광경이 기억에 아직도 남는다.

지금의 나를, 그리고 지금의 밴드를 만든 베스트 앨범을 뽑는다면.
개인적으로는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2집 < The Wind, The Sea, The Rain >을 꼽는다. 중학교 2학년 때 음악을 시작해야겠다고 맘 먹은 이유다. ‘My story’라는 곡을 듣고 ‘아, 이게 진짜 음악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 그리고 ‘End of the road’가 수록된 보이즈 투 맨의 < Cooleyhighharmony >를 뽑고 싶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도대체 어떤 음악을 듣고 자랐을까, 하는 생각에서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 찾게 된 앨범이다.

팀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앨범을 뽑자면, 1996년도 발매된 맥스웰의 < Maxwell’s Urban Hang Suite >와 ‘Untilted (how does it feel)’이 수록된 2000년도 작품 디안젤로의 < Voodoo >를 꼽고 싶다. 사운드에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레퍼런스로 많이 삼기도 하고, 멤버들과 같이 들으면서 밴드의 바이블이자 모토가 되어준 소중한 앨범들이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본격적으로 준비하기보다도 음악은 되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불 뒤집어쓴 상태에서 앞서 말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음악을 듣고, 따라 부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흥미를 붙이게 된 셈이다. 이 분야는 끝없이 연구해야 하는 것 같다. 누군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영향도 많고, 또 그 사람의 뿌리를 찾으려고 올라가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너무 재미있다. 일종의 덕질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제일 존경하는 보컬리스트 역시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뽑고 싶다. 사실 나는 개별 보컬도 중요하지만, 브라운 아이드 소울이 지닌 진정한 감성은 멤버 네 명이 모두 모였을 때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하모니라던가 섬세하게 잡히는 소리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지 않나. 그리고 보이즈 투 맨과 같은 시기에 나온 조데시(Jodeci) 그룹도 언급하고 싶다. 사랑을 팝적인 감성으로 부르는 보이즈 투 맨과는 다르게 조데시는 굉장히 선정적이고 섹시한 가사를 노래하는 팀이다. 생각해 보면 이런 섹시한 음악도 해보고 싶고, 사랑스러운 음악도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물론 이런 짙은 감성들은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니까, 아직도 열심히 연구 중이다. (웃음)

진행 : 장준환, 임동엽, 정다열, 김성욱
정리 : 장준환
사진 : 프롬올투휴먼 제공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