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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7 김홍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보이스’와 ‘히식스’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홍탁이다.

멋스럽게 샌 백발에 딱 붙는 청바지. 선글라스 속 눈동자는 호롱불처럼 빛났다. 차분한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지만, 스타와 뮤지션을 단호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로커 특유의 애티튜드와 예술가의 자의식이 충만한 그는 ‘평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성격처럼 과거의 반추를 뒤로 한 채 미래의 목표에 골몰해 있었다.

물론 한국 대중음악사의 발자취인 그의 경력을 생략하기는 어렵다. 최고의 인기 록 밴드 ‘키보이스’로 데뷔했고 ‘히파이브’와 ‘히식스’를 통해 독자적 음악영지를 건설했다. 전성기 무렵인 1972년부터 14년간 이어진 미국 체류기는 오인된 것처럼 음악적 공백기가 아닌 새로운 도전의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에는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 집 위층에 살던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우리말처럼 원활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어떤 식으로 익혀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던 시점에 기타에 빠진 게 큰 행운이었다. 당시 ‘목포의 눈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처럼 부드러운 곡들밖에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군 병사를 만나 현지 스타일을 체득할 수 있었고 오래 배우진 못했지만 커다란 수확이 되었다. 의사소통은 말이 안 통하다 보니 바디 랭기지를 주로 활용했다.

1964년 키보이스 데뷔 때 얘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다 함께 모인 건 1963년으로 기억하고, 1964년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우리의 음반이 비틀스보다 먼저 나왔던 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비틀스의 데뷔 앨범 < Please Please Me >는 1963년 3월 22일에 나왔다) 당시 키 보이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비틀스의 곡들과 김영광이 작곡한 ‘그녀 입술은 너무나 달콤해’ 였다. (원년 멤버는 김홍탁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 옥성빈이었다)

키보이스 1집의 대표곡은 ‘정든 배는 떠난다’였죠.
그 당시엔 멤버들의 자작곡이 아닌 기성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부르는 시절이었다. 김영광 선생이 작곡한 ‘정든 배는 떠난다’는 애초 트로트 선율이 완연해 우리가 추구한 록 풍으로 편곡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 샤우팅 창법을 도입했고(첫 소절의 ‘달그림자에’를 들어보라) 6도, 7도 코드를 첨가해 화성학적으로 더욱 풍성한 편곡을 완성했다. 그래도 ‘정든 배는 떠난다’가 뜬 데는 복합적인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키보이스 시절 차중락의 죽음은 안타까웠던 기억이겠어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매일같이 함께 생활했던 차중락은 순정파 로맨티스트였다. 그렇기에 그의 사망과 관련 가짜 뉴스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미8군 무대에서의 키보이스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당시 미8군 쇼에서 ‘컨템포러리 뮤직’의 최고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달랑 다섯 명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비틀스로부터 점화한 록 밴드의 전성시대와 키보이스의 등장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키보이스의 음악에서 김홍탁이 갖는 의미는요.
우선 모든 게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데뷔한 그룹에서 좋은 처우를 받았고, 무엇보다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송창식, 윤형주의 무대로 잘 알려진 쎄시봉에서 가장 먼저 공연한 것도 우리며 방송국, 지방공연과 극장 쇼를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중현과 애드포(Add4)는 키보이스와 달랐다.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키보이스는 명백히 비틀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차중락이라는 뛰어난 보컬이 있었음에도 하모니의 비중을 매우 높게 가져갔다. 반면 신중현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처럼 거친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뤘다. 신중현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음악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을 닦은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키보이스를 떠나 히파이브를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 꽂힌 상태였다. 헨드릭스의 우드스톡 공연을 보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그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하드록을 향한 음악적 야망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했을 뿐이지 키보이스 멤버와의 어떠한 불화로 떠난 것은 아니다.

키보이스와 히파이브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히파이브는 최헌이 가세하면서 히식스로 바뀐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 컵 쟁탈’이라는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열렸다. 1969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1회 대회에서는 키보이스가 대상을 받았고, 2회와 3회 연속으로 히식스가 수상했다. 대중성에 초점을 둔 심사위원은 키보이스에 좋은 점수를 줄었지만 히파이브와 히식스의 음악적 시도를 높게 평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히파이브 다음인 히식스에선 더욱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 보였다. 히식스와 키보이스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히식스 활동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창의성을 맘껏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미국 음악에서 탈피해 사이키델릭 록 그룹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를 재해석해서 연주하는 등 틀에 구속되지 않았다. 한번은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원래 약 17분 정도인 이 곡을 45분으로 늘려 잼(즉흥 변주) 형식으로 연주했다. 기타 솔로만 15분 정도 했던 것 같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을 연주하다 중간에 돌연 6명의 멤버가 동시에 드럼 연주를 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이기도 했다. 사이키델릭과 젊음의 코드가 일치했던 때라 관객 반응도 좋았다. 키보이스 시절에 비해 자작곡 비중을 높인 점도 구별점으로 꼽고 싶다.

히파이브와 히식스 시절, ‘초원’,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초원 시리즈’는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노래의 소재가 조금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자연의 소재를 활용해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초원’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그게 대박이 나서 서울 곳곳에 ‘초원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초원 세탁소’가 생겨날 정도였다. 사운드 적으로는 트로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히식스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다.

이어서 김홍탁의 부평 애스컴 회고담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통해 속된 말로 ‘그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느꼈다. 인천 출신의 그는 애스컴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키보이스의 일원으로 애스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는 순간 과거 여행을 다녀온 듯 우수에 젖었다.

미8군 무대는 당대의 K-뮤지션들에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제공해주었고 숙련을 통해 쌓은 음악적 자양분은 한국에 소울, 펑크, 재즈 등 장르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조용필과 ‘사랑과 평화’ 또한 미8군 출신임을 아시는지. 김홍탁의 증언은 ‘과거 없이 현재 없다’는 간명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부평애스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애스컴은 미군 총괄 기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뭐랄까 부유한 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 가장 많은 공연을 펼쳤던 곳이라 마음의 고향 같다. 고향이 인천이다 보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처럼 인천 또한 항구도시, 개화 도시이다 보니 당시 외국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인천 출신 뮤지션 혹은 밴드가 유독 많다.

K팝과 연결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애스컴에서 활동했던 많은 뮤지션들의 음악과 활동이 작금의 K팝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극히 한정된 인물들만 기억할 뿐이다.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서 세월 속에 잊힌 이들과 그들의 음악을 반추하고자 한다.

김홍탁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최헌이 부른 히식스의 ‘당신은 몰라’겠지만 음악적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곡은 1970년에 발표한 히식스 1집 < HE6 Vol. 1 >의 수록곡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이다.

1972년이면 전성기였는데요. 그런데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번 결심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행동한다. 엉뚱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본토 격인 미국에 부딪혀 보고픈 마음이 컸다. 떠난 뒤 약 14년 6개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운 점, 좋았던 점은 공존할 수밖에 없기에 후회는 없다.

미국으로 떠난 후 음악관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세상과 나 자신이 변함에 따라 추구하는 음악 또한 자연스레 변화해왔다. 미국 생활 초기에 일류 호텔에서 스탠더드 재즈를 연주했다. 본성이 로커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점차 적응해나갔다. 후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박인수가 부른 1980년 작 ‘너처럼 예쁠수야’의 펑키(Funky)한 사운드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미래 대중음악의 중심엔 재즈가 있다고 보았고 실용 음악학원이라는 말 대신 서울재즈아카데미란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홍탁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원장으로 계시면서 얻은 보람은 무엇인가요.
축구 경기서 스타플레이어만큼이나 경기 전반을 조율하는 미드필더가 중요한 것처럼 곡 제작의 전체적인 과정을 조율하는 뮤지션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이러한 뮤지션들의 산실 역할을 해서 기쁘다. 현재 BTS의 곡 녹음에 참여하는 뮤지션, 테크니션 중 아카데미 출신이 더러 있는 거로 안다.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록은 힙합이나 EDM에 밀려 침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생을 록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물론 안타깝다. 역시나 좋은 곡이 발표되어야 록이 다시 살 수 있다고 본다. 신중현 선배님이 ‘빗속의 여인’을 비롯한 많은 명곡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음악 뮤지션이기 때문에 대중이 사랑하는 음악, 좋은 곡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생님께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 혹은 밴드를 다섯 팀만 소개해주세요.
‘Rock around the clock’으로 로큰롤의 시작을 알렸던 빌 헤일리 & 히스 코메츠(Bill Haley And His Comets)와 비틀스(Beatles), 앞서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산타나(Santana, 그의 휴대폰 벨 소리는 ‘Samba pa ti’였다.) 그리고 조금 의외로 들리겠지만 시카고(Chicago). 재즈 록 퓨전 밴드 아닌가.

김홍탁 선생님의 향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유튜브를 꾸준히 할 계획이다. 키보이스를 계승하는 해피 밴드와 히식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567Nll과 함께 유튜브를 통한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계획 중이다. 좀 더 크게 보자면 아까도 말했지만,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처럼 <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 >을 설립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양평, 인천, 서울, 샌프란시스코의 네 도시에서 < K All-Star Group >이란 이름으로 자선 공연을 펼치고도 싶다.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

인터뷰 : 임진모, 김성욱, 염동교,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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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4 유심초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네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1980년대 초반 음악계를 석권한 형제 듀오 ‘유심초’다.

다가올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유시형과 유의형의 친형제 듀오 유심초를 만났다. 둘은 학생 시절부터 백영규, 이춘근 등과 함께 고향 부평에 터를 잡고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부평을 외국 문물을 일찍이 접하고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문화지대’로 기억했다. 1980년대 초중반 유심초의 본격 활동은 비록 짧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스매시 ‘원투 펀치’로 당대 음악 팬들에게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지금 들어도 눈물 날 것 같은 소슬하면서도 아린 감성 그리고 시적(詩的)인 가사는 어떤 음악으로부터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느낌이 각별했다. ‘세련됐다’, ‘클래시컬하다’, ‘딴 음악하고는 달랐다’는 칭송이 잇따랐다. 상기한 두 곡 외에도 그 이전 ‘너와의 석별’ ‘이것 참 야단났네’ 그리고 그 이후 ‘사랑하는 그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유심초의 골든 레퍼토리들이다. 오래 활동하지 않았어도 히트넘버가 말해주듯 굵직한 궤적을 남긴 셈이다.

두 형제는 2000년대 통기타 붐에 의해 소환되어 다시 한번 분주한 시절을 재현했다. 한창 뛰던 젊은 시절 대중가수로 올인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방황을 뒤로 넘기고 지금은 음악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털어놓았다. 떠들썩한 매체 활동보다는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으로 임한다고도 했다. 둘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 경기 서현역 부근 한 카페에서 유심초의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로 신나게 내달렸다.

데뷔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유시형: 데뷔는 ‘너와의 석별’과 ‘너’라는 곡이었다. 이종용이 불러서 히트했지만 사실 우리가 오리지널이다. 원래 이종용이 자기가 앞면, 우리가 뒷면 이런 식으로 앨범을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군대 마지막 휴가 때 녹음을 하고 다시 들어갔는데, 이종용이 욕심이 나섰는지 내가 녹음한 반주에 그대로 자기 목소리를 입혀 타이틀로 걸어 발매했다. 제대 4개월 남겨 놓은 상태에서 그 노래가 방송에서 막 터져 나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게 1975년 일이다.

데뷔 시기에 백영규 선생님과 음악 인연이 있지요?
유시형 : 백영규는 우리가 정식 앨범 나오기 전 아마추어 시절에 외대 다니면서 같이 음악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당시 멤버는 학생 신분으로 나, 백영규, 숙대생 이춘근이었고 전석환 씨가 진행한 KBS 라디오 공개 방송 < 삼천만의 합창 > 등 라디오 프로에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나랑 백영규가 군대 가고 팀이 깨지니 의형이랑 이춘근이 혼성 듀엣으로 활동을 이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대 메이퀸이 스토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숙대생인 이춘근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물레방아’는 어떻게 생긴 팀인지 알려주세요.
유시형 : 1975년 제가 제대할 무렵에 이종용의 권유로 공동 앨범을 발매하게 돼서 동생이랑 유심초가 탄생했고, 백영규가 저보다 늦게 군 제대를 하고 이춘근도 졸업을 하고 활동이 가능해지니 둘이 만나서 결성한 팀이 물레방아다. 그렇게 나온 데뷔 노래가 ‘순이 생각’.

1978년 나온 곡 ‘이것 참 야단났네’는 인상적이었습니다.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의 ‘Greenback dollar’를 가사를 완전히 색다르게 번안했는데, 누가 개사한 건가요?
유의형 : 내가 했는데 이름은 형으로 올라가 있을 거다. 신고하는 사람이 착각해서 유시형으로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형 유시형, 동생 유의형을 헷갈려한다고 말했다)

1975년 ‘너와의 석별’로 준수하게 데뷔를 했지만 이름을 알리는 수준이었고 결정타는 1980년 ‘사랑이여’였다. ‘너와의 석별’과 ‘사랑이여’ 사이에 공백이 꽤 긴데요…
유의형 :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라는 노래가 중간에 있다. 1976년도 발표했는데, 그것도 꽤 알려진 편이다. 그 노래가 한창 방송에서 반응을 얻을 즈음에 내가 군대를 갔다. 그리고 1978년 제대하고 발표한 게 상기한 번안곡 ‘이것 참 야단났네’다. 제대한 후에는 또 집에서 음악을 반대해서 1~2년 동안 못했다.

집안에서는 왜 반대를 했나요?
유의형 : 왜냐하면 아버지는 “전공을 살리지 왜 가수를 하려고 하느냐”는 거였다. 사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만 한다고 말했다.

유시형 : 부모님이 학생 시절 아마추어로서 음악을 하는 건 인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하니까 아버지뿐 아니라 집안의 형들도 말리고 나섰다. 그런데 그 무렵에 최용식이란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사랑이여’를 포함해 노래 15 ~ 20곡 정도를 만들어서 왔었다.

최용식 작곡가는 누군가요?
유시형 :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그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너와의 석별’을 듣고는 그게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꼭 유심초에게 곡을 주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왔는데, 알고보니 중학교 동문이었다. 그 노래들을 받아놓고 처음에는 한 2~3년 정도를 묵어놨었다. 그러다가 1980년도에 다시 앨범을 내고 싶어 곡 정리를 하는데 ‘사랑이여’가 굉장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노래의 곡과 가사를 약간 수정해서 발표하게 되었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같은 작곡가인가요?
유시형 : 그건 다른 친구가 썼다. 앨범에서 아마 최용식 곡은 ‘사랑이여’ 하나일 거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춘근의 동생인 이세문이 썼다. 그 노래의 가사는 그리고 < 성북동 비둘기 >를 쓴 김광섭 시인의 < 저녁에 >라는 시다. 작사가도 김광섭씨로 올라가있다.

집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건가요?
유의형 : 1980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무렵 아버지께서 형이랑 내 손을 잡고 ‘그래,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마침내 허락을 해주신 거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사랑이여’랑 다른 곡들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사랑이여’가 매체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유심초 쟤들은 배운 애들이라서 음악도 왠지 모르게 지적(知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그는 유심초의 학력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형 유시형은 외대 말레이어과와 국제통상학과를 전공했고 동생 유의형은 한양대 공대를 다녔다. 둘 모두 명문대 출신이다)
유의형 : 나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었다. 그때 한양대가 의대 건물을 산에 막 짓던 무렵이라 공대도 같이 지원을 했는데 그게 붙었다. 그런데 나는 의대를 가고 싶어서 재수를 하려 했지만 위에 형들이 반대했다. 재수까지 하고 의대 다니면 7년이라고. 결국 형 덕분에 유심초로 잘 되긴 했지만 의대를 못 간 게 ‘약간’ 한으로 남아 있다. (웃음) 사실 내가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는 고교 동창들이 그랬다. 쟤가 왜 노래를 하는 거야, 뭐가 부족해 가수 짓을 하냐고. 그 시절은 연예인을 딴따라로 비하하고 비아냥대던 시절이었다.

유시형 :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 주로 방송 위주로 활동을 했지만 그 당시에 다른 많은 가수들은 생맥줏집이나 음악 감상실 같은 데서 무명으로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생 프로그램과 음반사에 연결돼서 앨범이 나오고 운좋게 반응을 얻었던 터라 어떻게 보면 당대 연예계의 ‘쓴맛’은 별로 못 봤던 게 사실이다.

1981년을 장식한 ‘사랑이여’로 모든 영예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당시 기분을 듣고 싶습니다.
유시형 : 우리가 ‘사랑이여’로 방송국에서 대상 타던 순간, 옆에 매니저들이 수상 무대 올라가서 울라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 진짜로 울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우리가 성공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셨으니까. 걱정도 많이 하고 그러셨는데. 그래서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는 그게 쇼하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냥 의연하게 수상 소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쇼맨십도 필요한 거 아니었나 싶고. (웃음)

세월이 조금 지나서 1985년에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반응을 얻었다. 이때도 전처럼 시차가 존재했는데 이때는 왜 공백기가 생겼나요?
유시형 :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터지고 나서 또 ‘나는 홀로 있어도’라는 곡도 조금 떴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우리를 부르면 항상 ‘사랑이여’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만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노래를 부를 틈이 없었다. 새 곡을 내놔도 거기에 미치지를 못하니까. 그때는 순진해서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대로만 했다. 다른 곡들은 고개를 못 든 셈이다.

유의형 : 사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버금가는 곡을 내놔야겠다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세월이 조금 흐르다가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만났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내놨던 거다.

그런데 그 뒤로는 왜 갑자기 사라지신 건가요?
유시형 :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나오고 방송가에서 이건 제2의 ‘사랑이여’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심리적 압박감이 심했다. 아마추어로서 할 때는 즐기는 맛에 했으니 부담이 없었는데, 프로가 되고 탑 순위에 오르니 스스로 굉장히 부족한 걸 느꼈다.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이걸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갈등이 생기면서 1987년인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유의형 : 그리고 사실 형이나 나나 성격이 연예계랑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형제이다 보니 형은 나보다 어깨가 더 무거웠을 거다. 동생까지 끌고 가는 거니깐. 나는 형한테 기대면 되지만, 주위에서 보기에는 형이 동생까지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노래하는 거니 형이 더 부담이 컸을 거다.

그 뒤의 행보와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시형 : 나는 1990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3년 동안 거기서 살았고 동생은 한국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7080과 통기타 붐이 일었다. 미사리부터 해서 전국적인 붐이었다. 그런 열풍이 일어나니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무대에 나갔다. 동생이 혼자 무대에 나가서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불렀다. ‘홀로 가는 길’로 활동한 가수이기도 한 남화용이 만든 이 노래는 ‘밑에서’ 꽤 알려져서 우리가 없을 때도 김세환, 유익종, 박강성 같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부르곤 했다. 동생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리퀘스트가 엄청 들어왔다고 한다. 유심초 오리지널 멤버 뭉쳐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2003년에 2년 계약을 맺고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유심초 음악을 정의하신다면..
유시형 :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지는 못해도 음악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일단 멜로디는 서정적이고 가사는 시적이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음악에 그런 게 있지 않나. 빠른 음악은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음악도 있다. 우리 노래는 듣는 순간 큰 박수는 안 나와도 끝나고 나갈 때는 어떤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음악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대중에게 임팩트는 있었지만 활동 기간은 짧았다.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유의형 : 그때는 스스로 방황을 많이 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대학을 안 다니고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했으면 죽기 살기로 했을 거다. 그러면 보다 더 많은 곡도 남겼을 거고. 그리고 형이나 나나 우리가 노래를 마음먹고 쓰면 굉장히 많이 썼을 거다. 그런데 뭔가 속으로는 흔들렸다. ‘내가 대중가수를 진짜로 해?’. 그런 정체성 혼란으로 활동을 빨리 접었고 돌이켜 보면 아쉬운 일이다.

유시형 : 2003년에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방송도 많이 나간다. 젊은 시절에는 미래불안으로 동생이 말한 그런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대에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금에서는 그게 너무 행복하다. 어디 공연에 가서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부르면 팬들이 앙코르를 외쳐주고. 지금 이 나이에 이런 행복을 어떻게 누리나 싶다.

유심초는 전성기 시절에 텔레비전 출연할 때 항상 양복을 입고 나오셨는데.. 어른들한테 이미지가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유의형 : 이미지 이야기를 하니 말인데 그동안 사생활을 다루는 많은 대담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왔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출연하는 걸 거절했다. 편집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뭔가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또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나.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이다.

유시형 : 많은 팬들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이미지, 어떤 신비감이나 꿈같은 걸 가지고 있다. 나는 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늙으면서 이것저것 변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방송에 나가서 일일이 뭐 하다가 망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자기 팬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평이 고향이고 음악 활동도 부평에서 시작하셨는데 부평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유시형 : 내가 어릴 적에는 미군 애스컴(ASCOM)이 있었다. 거기 조그만 동산에 올라가 보면 큰 잔디밭에서 미국 사람들이 야구를 하는 것도 보고 그랬다. 또 부평이 미군이 주둔하다 보니 외국 문물이 빨리 들어온다. 그래서 옛날에는 트위스트 김 같은 분들이 와서 춤도 배워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가 그런 외국 문화가 바깥으로 나가는 큰 창구였던 셈이다. 낭만도 있었고, 평화롭고…

애스컴이 두 분의 음악 활동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다고 보시는지.
유시형 : 그렇다. 왜냐하면 음악다방 같은 데 가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오리지널 앨범들로 팝송도 소개가 됐고. 또 선배들한테서도 여러 음악 정보나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음반들도 접했다. 외국 판 구하기 힘든데 형들 방에 가면 팝 샹송 칸초네 앨범들로 가득했다. 그때 ‘La novia’라는 노래를 막 한글로 적으면서 듣곤 했는데, 지금도 그게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유의형 : 미군 부대가 있다 보니 원판 같은 게 나온다. 그 영향에 무엇보다 음악다방에 가서 팝송 듣는 게 좋았다. ‘키 다방’ 그리고 신신 카바레 건물 1층에 있던 ‘신신 다방’은 아주 유명했다.

부평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유심초로 유명해지고도 부평에 사셨나요?
유시형 : ‘사랑이여’로 크게 성공했을 때도 계속 부평에 살면서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부평에 초등학교 출신들 친목회도 많이 했다.

출신 학교를 알려주신다면.
유시형 : 부평동 초등학교에 다녔고 중학교는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는 동산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산 중고 출신이다.

유의형 : 나도 똑같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백영규를 비롯해 ‘너’를 작곡한 서새건, 작사한 심진구도 다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 출신이다.

유심초 노래 베스트와 개인적으로 덜 알려져서 아쉬운 노래를 꼽자면.
유시형 : 일단 베스트는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홀로 있어도’, ‘사랑하는 그대에게’, ‘너와의 석별’, 그리고 ‘이것 참 야단났네’. 잘 알려진 곡들이니까 아무래도 그게 베스트가 아닐까. 그리고 덜 알려져서 아쉬운 곡은 ‘그님만을’. (유시형 작사/작곡)

앨범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첫 음반은 분명 ‘너와의 석별’이라 봐야죠?
유시형 : 그렇다. 그다음에 ‘이것 참 야단났네’가 나왔고,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도 있었다. 그리고 1980년에 ‘사랑이여’가 수록된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게 우리가 제대로 된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상의 1집이다.

유의형 : 왜 우리가 앨범다운 앨범으로 ‘사랑이여’를 꼽는 것이냐면 그전에는 제작자가 따로 있었다. 녹음, 편곡이 다 그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사랑이여’는 우리가 직접 제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편곡에 관여하게 되고, 편곡자에게 여러 요구도 하고 그래서 제대로 우리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었다.

유시형 : 정리하자면 ‘너와의 석별’로 데뷔를 했고, ‘이것 참 야단났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가 중간에 있고 그다음에 ‘사랑이여’가 제대로 된 앨범으로 사실상의 1집이다. 거기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있어도’가 타이틀 곡으로 나온 것이 2집이다. 그다음 3집이 ‘사랑하는 그대에게’고. 모처럼 음반 얘기를 하니까 과거가 살아 돌아오는 느낌이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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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3 곽경묵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이자람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세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밴드 소울 트레인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곽경묵이다.

이름에서부터 소울 음악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느껴진다. < 소울 트레인(Soul Train) >은 1971년 첫 방영된 미국의 유명 TV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소울 음악을 필두로 R&B, 디스코, 펑크(Funk), 가스펠, 힙합 등 소위 흑인 음악으로 대변되는 아티스트들의 라이브를 35년간 일반 대중에게 전했던 전설적인 음악 방송이다. 이 쇼 프로는 ‘블랙 뮤직 파티’ 그 자체였다. 밴드 소울 트레인은 이 이름을 그대로 따온 한국의 소울 밴드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 밴드 구성에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으로 이루어진 금관악기 멤버들과 코러스, 보컬리스트까지 가세해 10인조의 대규모 그룹의 편성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가족적인 팀워크가 이들의 특장점이 되었다. 현란한 기교보다는 멤버의 조율과 조화를 중시하며 고전 음악 포맷이 최적의 합을 맞춰왔다. 단순하게 옛 음악을 현재로 가져왔다고만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하모니가 밴드 소울 트레인에 새겨져 있다. 현재 개인 건강상의 이유로 리더 곽경묵과는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쾌유를 빌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밴드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2008년에 처음 결성된 소울 트레인이다. 우리 밴드는 소울 음악을 하는 팀이다.

한국에서 정통 소울 밴드라고 하니 많은 대중에게는 낯설 것 같다. 밴드 소울 트레인은 어떤 팀인가?
같이 뮤지컬에서 연주하던 몇몇 브라스 멤버들과 뜻이 맞아 대학로의 작은 클럽에서 같이 연주를 해왔다. 처음에는 10인조로 출발한 대규모 밴드였다.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멤버 변화가 다소 있었고, 때때로 객원 멤버와도 함께 연주하고 있다. 현재에는 7인조로 남아 있다. 멤버는 내가 세션 연주를 하던 시절부터 합을 맞춰온 드러머 이정학, 뮤지컬 작품을 하며 만난 키보드 윤희나, 대학로 클럽에서 연주하며 지금까지 계속 함께 해온 노래하는 임윤정, 작년에 새로 들어온 듬직한 베이스 김광훈. 그리고 뮤지컬을 하면서 만나 소울 트레인을 함께 만든 색소폰 조성현, 트롬본 김신. 그리고 기타 치는 나. 이렇게 7명이다.

음악적인 지향점은 처음부터 60~70년대 유행했던, 거칠지만 따뜻한 소울 음악을 연주하는 거였다. 지금도 그렇다. 프로필에는 ‘한국형 소울’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웃음) 한국 사람이 하면 그냥 한국형이라고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구성원도 많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다. 어떤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라이브에서나 음원으로도 가족적 팀워크 강한 팀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모임이나 마찬 가지겠지만 두 명 이상이면 힘든 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래도 나름 리더의 결정에 잘 따라준다. 또 알아서들 형, 누나, 아우들 잘 챙기는 인성 좋은 친구들이라 편하고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점들이 연주 하거나 공연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로 연주도 배려하면서 한다고 할까.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 서로를 배 려하는 분위기가 밴드 소울 트레인에는 늘 있다. 속된 말로 나대는 사람이 없다. 그 장점이 단점일 때도 있다. 누군가 확 앞으로 치고 나가줬으면 할 때도 너무들 참아준다. (웃음)

그 외에 멤버가 많아 힘들 때는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 돈이 많이 든다. 이동 비용이 가장 힘든 문제다. 다 돈이다. 또, 밥 한 끼를 먹어도 다른 밴드의 두 배는 기본이니까 말이다. (웃음)

결성 이후에 프로젝트 성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김추자 트리뷰트 밴드 ‘춤추자’ 밴드에 관해서도 궁 금하다.
2010년 < 지산 록 페스티벌 > 때 트리뷰트 밴드들이 꾸미는 무대가 있었다.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이런 저런 의견들을 모으다가, 때마침 당시에 앨범 준비하면서 많이 듣고 있던 김추자 선생님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윤정이의 제의로 진행하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던 프로젝트였다. 45분짜리 메들리를 만들어 쉼 없이 연주하고 끝냈다. 관객분들과 지산 록페 측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도 한 번 더 참여하게 됐다. 두 번 모두 열심히 준비했고 좋은 기억이 많았던 공연이다. 특히 호응이 좋아서 더 즐거웠다. 덕분에 1집에도 몇 곡이 수록되었다. 그 콘셉트로 팀의 합도 좋아 공연도 몇 번 했다. 언젠가는 다시 연주하고 싶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첫 솔로 앨범 < 49…Again >(2017)은 어떤 앨범인가?
50을 앞두고 뭔가 소울 트레인이 아닌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들의 다른 색깔의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오랜 인연이 있는 사토 유키에(Sato Yukie) 형의 ‘곱창전골’이라는 밴드가 있다.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한국 음악을 하는 재미있는 록밴드다. < 49…Again >(2017)은 곱창전골의 베이시스트 아카이 코지로(Akai Kojiro)와 드러머 이토 코키(Ito Koki)라는 두 일본 친구와 함께 만든 앨범이다. 이 멤버와 크고 작은 공연을 많이 해왔었다. 언젠가는 꼭 프로젝트로 함께 연주하고 싶은 아티스트들이었다. 그래서 솔로 앨범이지만 ‘MOOK & JAKO PROJECT’라는 팀 이름으로 발매했다. 여기에서 ‘MOOK’은 일본 친구들이 부르는 내 이름이고, ‘JAKO’는 별 뜻 없이 JAPAN KOREA의 합쳐진 말이다. 이름 배열의 순서는 손님 먼저다.

기타리스트 무크(Mook)는 상상밴드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게 알려진 편이다. 지금의 커리어와는 사실 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상상밴드 시절의 연주와 추억 같은 것이 있다면?
상상밴드는 당시 회사에서 관리해주던 밴드여서 편하긴 했다. 사실 내 음악이라기보다는 리더였던 쇼기와 노래하는 베니의 음악이었다. 그래도 나름 팀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많이 참여하고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그때 멤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음악적으로 안 맞 았다는 이유보다는 그 당시 음악인으로 게을렀다는 생각이다.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과 연주를 열심히 하지 못 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10월 공개 예정이라고 하는 ‘사랑한다면’은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참여했던 ‘사랑한다면’에 대한 편곡이나 녹음을 하면서 중점을 두려고 했던 부분이 있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들이 여러 가지 국가 지원 사업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보량이 부족해서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한 통로로 모아서 오픈해준다면 이런저런 사업들에 쉽게 참여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제안해준 데블스의‘사랑한다면’은 원곡의 느낌을 살리면서 조금 더 대중적으로 만들자는 관점으로 작업했다. 그래서 후주 부분에 뭔가 다른 임팩트를 주고 싶었다.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다.

데블스의 故 김명길 선생님과 작업 예정이었지만, 프로젝트 준비 기간 동안 안타깝게 암으로 별세하시게 되었다.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기억이 있나? 어떤 뮤지션이었나?
20여 년 전에 야간업소에서 일할 때 다른 밴드의 리더로 활동하셨다. 대기실 등에서 거의 6개월 이상을 매일 뵙던 분이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시면서 편하게 해주셨다. 정말 인자하시고 기타도 편하게 연주하시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에게 아드님의 기타 레슨을 부탁하기도 하셨다. 내가 “형님 아드님이 나이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여쭤봤더니 이제 군대 막 제대했으니 24살이라고, 난 당시 27살이었는데 말이다. (웃음) 그 이후로 < 고고70 >(2008)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하면서 이름을 다시 듣게 돼서 반가웠다. 이번 프로젝트에도 함께 하신다기에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뵙지 못하게 되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음악 활동을 하면서 인천-부평과의 인연이나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인천-부평에 대한 생각과 감정)
어릴 때 함께 연주했던 선배들이 인천, 부평 분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많이 놀러 가서 술도 마시고 음악 얘기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인천에는 80년대 말에 헤비메탈 밴드들도 많았다. 지금도 나에게는 인천. 부평하면 ‘록의 도시’라는 생각부터 든다.

코로나19로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뀐 것 같다. 소울 트레인은 공연으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든 상황이긴 하지만, 솔로나 밴드 활동, 이후 공연 계획이 있나?
대부분의 뮤지션이 그럴 테지만, 사실 활동을 거의 못 하는 상황이다. 밴드의 3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집중이 잘 안 돼서 지지부진하다. 개인적으로 건강 상태도 많이 안 좋아지고. 그래도 조금씩 힘을 내서 올 연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소울 트레인 3집 앨범의 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공연은 사회적인 분위기나 건강 상태로 조금은 미뤄두고 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 기타 연주를 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같이 방을 쓰던 6살 차이 나는 친형 덕에 팝이나 록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타보다 노래 때문이었다. 밥 딜런(Bob Dylan)이나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로니 반 잔트(Ronnie Van Zant), 킹 크림슨(King Crimson),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의 그렉 레이크(Greg Lake), 킹 크림슨(King Crimson), 록시 뮤직(Roxy Music), 유라이어 힙(Uriah Heep) 활동을 했던 존 웨튼(John Wetto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두 거목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와 같은 거장들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타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노래하면서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져서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근데 아무리 해도 노래에는 너무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많아져서 누구라고 딱히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고등학교 때 티비에서 생방으로 밤을 새워 보았던 < 라이브 에이드(Live Aid) >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 인생의 앨범과 아티스를 꼽는다면?
너무 많지만, 굳이 뽑자면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데뷔작 < Pronounced ‘Lĕh-‘nérd ‘Skin-‘nérd >(1973)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 The Final Cut >(1983)이다. 아티스트는 단연 핑크 플로이드다.

기타리스트 곽경묵은 어떤 연주자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싶은가?
따뜻하고 인간적인 느낌의 연주를 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

인터뷰 :신현태
사진 :정종민
정리 :신현태
기획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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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2 송창식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음악계의 ‘레전드 중 레전드’이자 인천 출신의 대표 뮤지션 송창식이다.

한때 수십 곳이 줄지어 성업하던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가운데 ‘열애’(윤시내)와 함께 남아 있는 두 카페 중의 하나 ‘쏭아’를 찾았다. 송창식의 별칭인 쏭아(Ssonger) 타이틀대로 송창식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곳이다. 그는 지금의 젊음은 가늠하기 힘든, 절대적이고 거한 존재감으로 베이비붐 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전설이다. 근래 듀엣이라는 말이 그렇듯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무대를 서는데 이날은 송창식 혼자 노래했다.  

그의 소리는 카페 공간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본인은 ‘잘 안 된다’고 나중 말했지만 현장에서 듣기에는 환상적인 발성이자 우람한 소리덩치였다. 게다가 본인 취향이 아닌, 팬들이 좋아하고 신나하는 곡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한 게 더 놀라웠다. ‘관객들을 위한 배려’는 대중가수의 으뜸 덕목이다. 그는 신청곡도 받아 자신의 히트곡도 아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기도 했다.

2002년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송창식과 자리할 경우 어김없이 인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에 잠시 피난한 것을 빼곤 성장기를 줄곧 인천에서 보낸 ‘원단 인천맨’이다. 지금도 인천에 남다를 애정을 간직해 자신의 모든 일이 ‘인천이랑 관련이 있는 일’이라며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그런데 공연을 보니 대단한 발성이시던데요..
그래도 내 맘대로 나오는 거는 아니에요. 목 수술을 했지만, 평소의 목소리는 어떤 소리가 나와도 저는 상관이 없어요. 근데 노래할 때 목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어졌어요. 그동안 쌓였던 노하우가 없어진 거죠.

그렇다면 수술 이후에 특히 안 되는 곡들이 있으신가요?
다 잘 안 돼요. (웃음) 지금은 요령으로 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노래를 했으니까 관록으로 한다고 할까요. 예전 말로 음악성으로만 하는 거죠. 소리도 마음처럼 나오지 않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어도 안 되고요. 원래 내 목소리의 힘은 우렁참에 있는데 지금은 노래를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나쁜’ 상황이에요.

근래 무대에선 거의 대부분 기타리스트 함춘호 씨와 짝을 이뤄 ‘듀엣’이라는 언론의 평가도 나오는데요. 노래에 관해 함춘호 씨가 도움이 되지는 않나요?
함춘호와는 나이가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만큼 음악적 갭이 존재해요.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음악성 추구라기보단 듣는 사람을 위해서인 거죠. 혼자서 하면 노래가 학구적으로 되어요. 음악성 위주로 하게 되죠. 함춘호와 해야 풍성해지고 듣는 사람이 신나게 되니까 그게 좋아요. 혼자 빠져서 하는 것보다는 팬들이 듣기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함춘호 기타를 평가하신다면?
통기타에서는 최강이죠. 하지만 함춘호가 최강인 시절에 저는 음악 활동을 안 했어요. 그래서 함께 활동한 역사도 없죠. 다행스러운 건 그 친구가 내 음악으로 시작을 했다는 거예요. 때문에 제 음악을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워낙에 실력이 좋은 데다 제 노래는 다 아니까 아주 편해요. 하지만 함춘호와 같이 함께 공연하다 보면 노래 측면에서는 ‘희생’을 해야 해요. 노래가 내 의도대로 나가야 하는데, 다른 소리가 나오니 제 의도와는 사실 달라지는 경우가 있죠. 연주자 (함춘호) 입장에서 앞에 나와 보이길 원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이런 욕심이 함춘호도 만만치 않아요.

최근 < 악인전 >, < 뽕숭아 학당 > 같은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놀라웠습니다.
< 악인전 >이라는 프로그램은 김명정이라는 작가와 인연으로 출연했는데 예전에 <집사부일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1회를 나에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 했다가 이번의 요청에는 ‘그래 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되겠느냐?’ 물어보니 무조건 된다고 하더라고요. 내식대로 해보겠다고 하고 시작했죠. 시작하니까 막상 아이디어를 낸 작가는 빠졌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었죠. < 뽕숭아학당 >은 조영남 씨를 위해 한 것으로 제가 함께하면 나아질 것 같아서 응했던 경우에요.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부평·인천 출신 음악가들에 대해서 부각하며 로컬리티를 살리는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02년 저와의 첫 인터뷰에서도 인천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는데요.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인천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인천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쭉 자랐죠. ‘6.25 피난’ 이후에 다시 돌아왔어요. 자라는 시기는 쭉 인천에서 지냈으니까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생의 기억은 다 인천에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 저의 고향이에요.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아직 다 인천에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음악성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악보를 그릴 수가 있었어요. 귀로 듣고 악보를 그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난 멜로디를 악보를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당시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일단 제 주변에는 없었어요. 그러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저더러 모차르트라고 했어요. 모차르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이 하도 그러니까 나도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니까요. (웃음)

음악을 향한 결심이나 열정의 기반이 인천이었겠네요.
그럼요. 초등학교 때부터예요. 가장 중요한 계기는 6학년 때, 인천여상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구경을 간 거였어요. 엄청난 쇼크를 받았어요. 사실 음악보단 지휘자라는 게 쇼킹했어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 됐죠. 하지만 당시 제가 입학한 서울예고에는 지휘과가 없었고,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작곡을 했었어야 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한 거예요. 하지만 아니었죠.

인천에서 경기도 콩쿠르를 학교 대표로 간 적이 있었어요. 1등 없는 2등이라는 것을 했어요. 1등이면 1등이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죠. (웃음) 제일 잘했는데 1등 될 실력이 안 되었나 보죠? (웃음) 그래도 나는 ‘노래는 제일 잘한다!’는 자부심은 있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로만 알고 성악과를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웃음) 그때 처음 알았죠. 음악이라는 것이 공부를 해야 하는 지성적 행위구나.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성악도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에요. 그런 점들에 충격이 커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002년 인터뷰에서 그때까지 도니체티 오페라 < 사랑의 묘약 >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클래식 말고는 아는 곡이 없고 대중가요에 대한 접점이 없었다고 하셨죠.
‘쎄시봉’ 가기 전까지도 대중가요를 몰랐어요. 서유석 씨를 고등학교 캠핑 때 처음 만났는데요. 기타 치면서 팝송을 부르는데 에디 아널드(Eddy Arnold)의 ‘I really don’t want to know’라는 곡이었어요. 곡 중간에 ‘하우 매니(How many~)’가 반복이 돼요. 그래서 저희가 그 형(서유석)을 ‘하우매니형’이라고 불렀어요. (웃음) 그 한 곡을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부를 정도는 안 되었죠, 저는 이후에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라는 오페라 곡 위주로 불렀어요. 쎄시봉에서도 이 곡을 불렀으니까요. 대신 트윈폴리오가 팝송을 해야 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맛을 내기 위해서 말이죠.

트윈폴리오 이후에도 솔로로 화려한 커리어를 개척했는데, 내 소리에 대해서 멋지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매료가 된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좋은 소리라고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왜냐면 록 음악을 못 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내가 록을 하려다가 목을 상했어요. 70년대에 많이 상했죠. ‘왜 불러’는 록을 하기 직전에 불렀던 노래에요. 진짜 록을 하고 싶었는데,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목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도 제 목소리가 굉장하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50년 이상 노래를 하셨는데 만약 인생의 분기점 셋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처음에 쎄시봉에 가서 노래할 때 팝송을 했는데 조영남 씨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서울대 성악과 학생이 부르는데, 음악적인 가치가 대중음악에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왕 할 거라면 최고로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심이 결정적인 첫 분기점이죠.

트윈폴리오가 분기점이 아닌가요.
윤형주와의 트윈폴리오는 ‘연습’ 기간이에요. 당시에는 내 목소리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죠. 그런 면에서 트윈폴리오에 대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분기점은 군대 가서예요. 1973년도에 영장이 나왔어요.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 유명 가수라고 해서 갔어야 했어요. 박정희 정부 시절엔 그랬어요. 안가면 매국노가 되는 시절이었죠.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그동안 했던 걸 돌아봤어요. 하루는 < AFKN 아마추어 블루스 콘테스트 >를 봤는데 아무리 봐도 나보다 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내 위치가 어디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내가 20년 동안 음악을 했는데 미국 아마추어보다 못한다는 거였죠. 아주 창피하고 속상했어요.

음악적으로 무엇이 못하는 점이었나요?
모든 면에서 내가 못 한다고 느꼈어요. 한국에서 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후에는 또 < 전주 대사습놀이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어요. 여학생들 둘이 나왔죠. 하나는 가야금, 하나는 노래를 했는데 그날도 저 친구들도 저보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모두가 나보다 잘한다는 생각에 무너졌어요. 밤새 울어서 눈이 부어서 다녔죠. 너무 분했죠. 내가 바보인가? 음악을 수십 년 했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흉내만 냈으니까 잘할 리가 있겠느냐. 내 음악을 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간 공부했던 이론과 실기를 다 버렸어요. 진짜 분기점이죠. 그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노래에요.

음악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셨겠네요.
이후 깔봤던 음악들을 재평가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보니 내가 그걸 못했기 때문이에요 (웃음) 그때부터 유행가를 알게 되었어요. 진짜 대중음악을요. 7개월간 군 생활을 하고, 나오자마자 하던 곡들은 다 버리고 ‘한 번쯤’같은 곡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더 많은 팬이 송창식의 음악에 빠졌죠.
그래도 이전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군대 이후의 활동을 싫어했어요. 충실하게 노래하는 것을 왜 버렸냐고 실망하던 팬들도 많았어요. 특히 여성 팬들이 많이 떠났죠.

세 번째 분기점은요?
다음은 ‘가나다라’에요. 1979, 1980년도였는데요. 그때 음악이라는 것이 이론적이든 실기로든 저 스스로 적립이 되었어요. 공부해왔던 음악 이론이 다 정리되었어요.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한국말에서 나오는 음악’을 처음으로 냈죠. 이 작법에 대해서 논문을 썼으면 아마 박사가 됐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악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작전을 짰어요. 한 번에 이런 이론들을 다 넣으면 너무 획기적이라, 제가 정리한 창작법을 한 곡에 10%, 20%씩 적용했다고 할까요.

그 시작이 ‘토함산’ 아니었나요?
사실 시작으로 따지면 ‘피리 부는 사나이’예요. 1974년도에요. 아주 조금씩 넣었죠. 실제로 제대로 해볼까 마음먹은 것은 ‘가나다라’였어요. 당시 많이들 놀랐죠.

1985년 크게 히트한 ‘담배 가게 아가씨’, ‘참새의 하루’도 많이 놀랐는데..
그 곡들 경우는 ‘내가 할 음악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다가 ‘과거에 했던 음악도 내 것이다’라고 해서 모든 것이 합쳐진 것에요. 부정해왔던 음악도 내 것이라 생각하니까 좋았어요. 그 곡들은 제가 공부했던 것들 이론들 모든 것을 합치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음악이 칼로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번쯤’, ‘가나다라’가 음악 인생에서 전기(轉機)가 된 곡인데 ‘피리 부는 사나이’도 중요한 곡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있죠. 실제로는 ‘뽕끼’가 많은 곡이에요. 트로트라는 것이 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까 늘 궁금했어요. 특히 음악적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트로트를 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한국적 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우리말이라는 건 복잡한 지성으로 표현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라는 감성을 말이라는 지성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기본적인 리듬에 복잡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트로트 감성이 잘 먹힌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송창식 트로트는 달랐어요.
달랐죠. 같은 뽕짝이라고 해도, 제가 예고에서 배운 것은 ‘음악이 잘게, 잘게 분석될 수 있다!’라는 것이에요. 감성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도 충족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구사했던 트로트는 기본 리듬도 달랐어요. 당시에는 모두가 ‘뽕짝~ 뽕짝!’이었는데, 난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음악이 송창식에게 무엇인가요?
타고 다니는 것이에요. 인생이 한길이라고 생각하면 난 음악을 타고 가는 거죠. 이게 고장이 나면 안 되거든요.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음악 속에서 같이 있는 것이죠. 타고 가는 것에 목표 지점이 있으니까요.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죠.

왜 송창식 음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배짱이 맞는 거죠. 체질이 같은 거니까요. 체질이 같지 않으면 절대로 히트가 안 돼요. 아무리 어렵고 좋게 만들어도 체질로 표현이 안 되면 히트하기 힘들어요. 초창기에 아름다웠던 목소리로 불렀던 것은 지성만 맞았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체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석을 하고 그것을 완성해야지요.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상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전 속에서 있어요. 부르는 동안에는 내가 아닌 존재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내 노래가 절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쉽게 듣는 이유는 체질적으로 맞는 거예요.

고향 인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요.
사실 인천이랑 다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인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시작이 되었잖아요. 평생을 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어요. (거기로 갈) 여건이 사실 안 되었어요. 여러 가지로요.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요.

싫어하는 말이 있으신가요.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비난 댓글 같은 것에도 관심 없고요. 비난 댓글 쓰는 사람은 비난 댓글이 취미 생활이니까요.

인터뷰 : 임진모, 신현태, 임동엽, 권민지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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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1 차승우 X 차중용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한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밴드 노브레인, 문샤이너스, 모노톤스를 거쳐 새 프로젝트 밴드 ‘조카들’을 이끌고 있는 로큰롤 기타리스트 차승우다.  

차승우의 새 밴드 기획 ‘차승우와 조카들’은 막 저 옛날 1968년에 발표된 노래 ‘그대는 가고’의 녹음을 마쳤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유명한 국내 로큰롤 초기 역사의 레전드인 밴드 ‘키보이스’의 차중락이다. 스물네 살에 요절한 차중락은 차승우의 아버지 차중광의 형으로, 차승우에게는 큰아버지다. 차중락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니 프로젝트 팀명을 ‘조카들’로 한 이유를 알 만하다.

이런 걸 두고 재탄생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비록 오래된 곡이지만 현대적 감성을 녹여낸 편곡 덕에 지금 들어도 깔끔하다. 원래 차승우는 이 고전을 부친 차중광과 함께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아버지는 과거 형 중락과 같이 키보이스로 8군 무대를 누비던 추억을 환기하며 부평구 문화재단의 기획 ‘부평사운드’에 맞춰 곡도 ‘그대는 가고’로 직접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암 투병 중 지난 8월 27일 별세하면서 부자(父子)의 콜라보레이션은 완성되지 못했고 작업은 아들 혼자 떠맡게 되었다. 차승우의 부담과 책임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조카로서, 아들로서 선대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노래”라고 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밤하늘의 연가’, ‘나는 혼자다’ 그리고 ‘사랑의 종말’ 등등 지금도 사랑받는 차중락의 유작이 많다. 그 중에서 하필 ‘그대는 가고’를 리메이크한 이유는?
차승우: 이 ‘부평사운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즈음만 해도 아버지(차중광)께서 노래를 하실 수 있다고 하셨고 아버지께서 굳이 형 차중락 곡 가운데 ‘그대는 가고’를 하시길 원하셨어요. 아버님의 선택인 셈이죠. 하지만 작업이 진척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전에 워낙 건강하셨기 때문에 더 그러네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새로 녹음된 ‘그대는 가고’를 들어 봤는지.
차승우: 들으셨어요. 완성된 음원에 다 만족하시진 않으셨는데 ‘편곡이 재밌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제 기타를 유심히 들으시곤 1960년대 영국 밴드 섀도우즈(Shadows)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실제 그런 느낌을 의도했던 거거든요. 기분도 좋았고 오래 음악을 하신 분이라 역시 보통 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프(surf) 기타를 부여하는 것이 기타편곡의 핵심이었는데 곧바로 알아차리신 거죠.

막상 ‘그대는 가고’ 녹음에 들어갈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차승우: 편곡, 녹음할 때 책임감이 느껴졌죠. 차씨의 이름을 물려받은 가장 나이 어린 조카, 아들로서 임하게 된 것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적어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20대부터 해온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음원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아픈 와중에 녹음해서 더 그렇고… 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큽니다.

‘그대는 가고’ 재해석은 어디에 중점을 뒀나?
차승우: 오리지널 버전은 스탠더드 팝 요소가 강하고 큰아버지(차중락)께서 워낙 음색이 절제된 상태고 고운 편이시잖아요.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나의 식대로 해석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또 다른 복고적인 서프 기타 풍에 중점을 두었죠. 시간에 제약이 있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진 못했으나 대체적으로 만족합니다.

인터뷰에는 차중락과 함께 차중광의 친동생인 차중용 님도 자리했다. 가요계의 레전드라고 할 ‘귀빈’의 출현에 모두들 놀랐다. 친형의 노래를 연주한 조카 차승우를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차중용이 누구인가. 키보이스를 뒤잇는 밴드이자 역시 전설인 ‘가이즈 앤 돌즈’에서 보컬을 맡아 활약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차중락의 고전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녹음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려졌는지를 비롯해서 차중락, 차중광,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의 음악에 대해서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보따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직 가수와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이 마치 ‘역사와의 대화’ 같았다.

차중용 선생님은 ‘그대는 가고’를 들어보셨는지요. 그리고 또 조카가 오래전부터 음악을 했는데 음악가 출신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차중용: 병상에서 형님을 뵈어 잠깐 듣고 다음에 듣자 하고 제대로 들을 겨를은 없었어요. 이제 자세히 들어봐야지요. 당연히 조카가 밴드 해오고 있던 것도 알고 노래도 들어봤죠. 그 전에 ‘노브레인’ 할 때는 미친놈들인 줄 알았어요. (웃음)

차승우: (이 말에 파안대소하며) 적절한 표현이십니다!!

차중락에 대한 기억을 환기해보지요. 어렸을 적 TV를 통해 본 차중락 선생님은 체구도 훤칠하시고 인물도 출중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한 것도 있지만 비주얼 때문에도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그 별명이 차중광 선생님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아요.  
차중용: 맞아요. 우리 집안 형제들이 다 잘생겼어요. 큰형 차준경(37년생), 차중덕(39년생), 차중락(42년생) 차중광(44년생) 그리고 저 차중용(47년생)..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타이틀은 중락이 형, 중광이 형에게 다 붙었죠.

‘그대는 가고’는 정확히 취입, 발표 년도가 어떻게 되나요.
차중용: 1968년일 거예요. 그해 중락이 형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취입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몇 달 전일 겁니다. 차중락의 또 다른 히트곡 ‘사랑의 종말’은 이봉조 선생 곡인데 그 전해인 1967년이 맞을 거예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그 훨씬 전이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훨씬 전이에요? 히트는 돌아가시고 나서인 1968년 이후 아닌가요?
차중용: 아니에요. 물론 사후 추모 분위기에서 대대적인 히트는 맞고 승우 아버지 차중광의 노래로도 널리 알려졌죠. 하지만 그것은 재조명이고 히트는 엄연히 그 전입니다. 근데 중락 형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히트했는지 알아요? 그 당시 키보이스는 차중락(보컬),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바쁜 가운데도 신세계 레코드사 주선으로 당대 미8군 라이브 쇼 무대의 최고이자 레전드인 남석훈 씨의 음반 취입 때 반주를 해주게 됐어요. 남석훈 씨 노래로 다 채울 수가 없으니까 나머지를 키보이스의 번안곡으로 LP를 채운 겁니다.

거기에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인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들어가게 됐지요. 앨범에 키보이스보다 차중락의 이름이 크게 표기되어서 차중락의 노래가 되어버린 거예요. 키보이스노랜데… 임 선생도 이 곡, 색소폰 버전의 노래로 알고 있지요? 실은 남석훈 씨 음반에 녹음된 이게 오리지널, 일렉트릭 기타 버전이요. 이게 감이 더 좋아요. (그게 언제였나요 묻자 차중용 님은 1964년이라고 답했다)

차중락의 곡이 아니라 원래는 밴드 키보이스의 노래네요. 근데 음반의 주요 곡이 아닌데 어떻게 히트가 됐을까요?
차중용: 그 무렵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초원다방에 한번 LP를 돌렸는데 여기서 반응이 시작됐어요. 그 후 인기가 퍼지면서 부산의 여성분들이 지속적으로 최동욱, 이종환 등 당대 최고의 인기 디제이가 진행하는 서울의 라디오 프로에 전화해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신청하는 거예요. 당시 전화 요금이 무척 비싼 시절이었거든요. 한마디로 인기가 부산에서 서울로 북상한 경우지. 당시에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어요. 음반이 수급도 안 된 상황이었는데…

차중용 선생님이 노래하신 밴드 가이즈 앤 돌즈를 소개해주시죠.
차중용: 중락이 형은 밴드 키보이스에 이어 가이즈 앤 돌즈(Guys And Dolls)를 하게 됐는데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히트로 바빠지면서 제대로 가이즈 앤 돌즈 활동을 할 수 없어서 내가 오디션을 봐서 대신 들어가게 됐지요. 미8군 클럽 대상의 연예기획사가 급히 만든 셈이죠. 가이즈 앤 돌즈 멤버는 차중락, 조용조(기타), 이수영(세컨드 기타), 차도균(베이스) 그리고 저였습니다.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 정말 컸어요. 거기도 공연을 자주 갔었죠.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 다 여기 무대에 섰지요. 부대마다 클럽이 몇백 개나 되었는데 클럽 이름은 기억나지는 않고 우리 음악이 로큰롤이라 무대는 장교 클럽이 아닌 주로 사병이나 하사관 클럽이었죠.    

그럼 8군 클럽 가이즈 앤 돌즈 공연에서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뭐였나요?
차중용: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도 많이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 ‘Paint it, black’이 기억나고… 그리고 애니멀스(Animals)의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를 피날레로 했어요. 관객들 다들 미쳐했지. (웃음)

동생 입장에서 형 차중락 보컬과 음악을 평가하신다면?
차중용: 최근 중광이 형도 세상을 떠나면서 형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밴드의 시작이자 국내 대중음악의 뿌리가 됐다는 점에 자랑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화가 나기도 해요. 가수를 하려면 음악 공부를 했어야 하잖아요.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하는 아쉬운 마음이 크죠. 그래서 좀 더 멋있는 노래를 남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곡가가 가수가 가진 장점에 맞춰 곡을 써야 하는데 작곡가가 만들고 나서 노래를 주었으니 중락 형에게 맞는 노래가 없었지요. 진정한 차중락의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쉽게 말하면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이라고 할까. 음악적 역량이 반영이 전혀 안 됐어요.

그럼에도 승우 씨는 아까 큰아버지 보컬을 미성으로 표현했다. 이번 ‘그대는 가고’를 비롯해 살아 남아 있는 차중락의 곡이 많은데‘그대는 가고’말고 또 탐나는 곡이 있나?
차승우: (1초도 고민 없이 즉각) ‘사랑의 종말’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도 이 곡을 고려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했거든요. 가사가 단도직입적이고 센 편이라 요즘 세대에게도 잘 먹힐 수 있다고 봅니다. 탱고 사운드도 정말 멋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노브레인이나 문샤이너스 활동 때 아버지 생각을 했나?
차승우: 네 그럼요. 문샤이너스 당시에는 < 천변풍경 2009 Unforgettable > 콘서트를 아버지와 함께하기도 했어요. 큰아버지(차중락) 히트곡과 엘비스 프레슬리 커버도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1시간 정도 공연했습니다. 즐거웠어요. 이 생각을 하니 이번 ‘그대는 가고’를 아버님과 못한 안타까움이 더더욱 큽니다.

차승우가 갖고 있는 로큰롤 유전자는 큰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국 록 밴드의 시효인데…
차승우: 저는 그렇다고 확언합니다. 음악을 하라고 종용하시진 않았지만 환경적인 혜택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제 음악 취향이 고색창연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부인하기 어렵지요.  

부평문화재단에서 기획하고 있는 ‘부평사운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차승우: 감사하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기에, 특히나 홍대 중심의 음악 신이 거의 고사 직전인데 밴드 중점이라서 의미도 있고…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중용 선생님은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차중용: 한 마디로, 한 곡 들으면 다 들은 느낌이랄까요. 그 노래가 다 그 노래예요. 앞으로 40대, 50, 60대가 소비중심이 될 시장이 더 커질 텐데 고려를 안 하는 것 같이 보여요. 장르 측면에서도 예전에는 록이 있고 포크, 탱고도 있고 왈츠 트로트, 민요 등 다양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획일화돼버렸어요. (외국도 그렇다고 말씀드렸더니) 거기는 그래도 아델(Adele)이 있잖아요.

요즘 음악도 들으시나 봅니다.
차중용: 요즘도 계속 음악을 듣고 마인드가 프레쉬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젊은 세대와 별 어려움 없이 소통이 됩니다. 음악의 힘이라고 봐요. (차승우는 여기서 “작은아버지는 지금도 라디오헤드(Radiohead)를 들으세요”라고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음악이 무시 받던 60년대에 모든 가족이 음악을 했습니다.
차중용: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부자들이 많이 살던 장충동이 집이었죠. 그러니 우리 집에 가수가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했죠. 중락이 형 위인 둘째 중덕이 형은 비즈니스로 미국이나 일본에 갈 때 연회석에서 잠깐 노래 불러도 가수인 줄 알고 사인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차씨 집안이 노래를 잘했어요.

‘노브레인’ ‘문샤이너스’를 이었던 밴드 모노톤즈는 어떻게 되는 건가.
차승우: 완전히 끝난 게 맞아요.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나에게 있어 노래 만드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2018년부터 의도적으로 음악적 휴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야인 생활에 들어간 거죠. 일단 개인적으로 슬럼프가 왔고 밴드 말미에 마무리도 좋지 않았고.. 음악적 아이디어도 없다 보니 뒤죽박죽이 되면서 쉬자는 마인드가 생겼죠.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의 환경에서 오래 밴드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차승우: 거의 총체적 난국이죠. 제가 처음에 밴드로 시작했을 때는 인디라든지 서브 컬처가 태동하던 시기라 젊은 사람과 잘 맞물렸죠. 하지만 이후 밴드 신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트렌드가 걷히면서 록과 밴드가 부진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죠. 어렵게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은 분산되었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도 록이 퇴조하는데 우리의 경우도 록과 밴드 그리고 인디 분야에서 좋은 음악이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차승우: 일관성도 없었고 작가주의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고 봐요. 이번 ‘부평사운드’의 작업이 스스로 환기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저도 분발해야 하구요. 어깨가 참 무겁습니다.

인터뷰 : 임진모, 신현태, 김도헌, 임선희,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