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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 백영규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네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추억의 인물이자 현재도 맹렬히 뛰는 레전드 가수 백영규다.

음악계 동향에 밝지 않은 사람에게 백영규는 1980년대 초반 히트 퍼레이드와 당시의 애청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 ‘잊지는 말아야지’, ‘순이생각’,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곳에서’ 등에 멈춰있겠지만 그 기억은 강렬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처량함과 비참정서… 가녀린 음색에 묻어낸 그 슬픔은 그만의 것이었다. 백영규는 하지만 그 알려진 과거보다는 ‘덜 알려진 현재’가 오히려 더 분주하다.

한마디로 ‘쉼 없음’, ‘꾸준함’이다. 2015년까지 경인방송 라디오 < 가고 싶은 마을 >을 진행했고 2018년부터는 추억의 음악다방 콘서트 기획 < 백다방 >의 섭외와 프로듀싱을 도맡아 하고 있다. 원체 바쁜 유전자인 걸까. 코로나시국을 돌파하려는 의도의 노래 ‘천사’를 막 내놓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름 아닌 부평출신. 부평과 인천 관련 공적인 일에도 성실히 임해오고 있다. 그는 모든 게 음악이라며 음악으로 “삶을 알아간다”고 말했다.

‘1952년생 청년’ 백영규 “젊음의 비결? 실패하더라도 내지른다!”

요즘 인터뷰가 자주 눈에 띕니다
얼마 전 후배가수 김도연과 ‘천사’라는 싱글을 발매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의료진 등을 생각하며 쓴 곡인데 이 노래가 뒤늦게 화제가 됐다. SBS 뉴스까지 나왔더라. (웃음)

왜 화제가 됐을까요
잘 모르겠다. 질병관리 본부 쪽에서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SNS 채널 7군데에 내 노래를 업로드 했다.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메일도 따로 받았다. 그냥 의료진 힘내라, 힘내라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 존중을 짙게 담으려 했다. 그걸 좋게 봐준 게 아닐까?

첫 히트 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돌아보니 1980년이네요. 대중의 관심을 떠나 정확히 40년을 달려왔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활동량이 변함없는데…
그렇게 보니 쉬지 않긴 한 것 같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타율이 그리 좋진 않았다. (웃음) 다만 내가 만든 노래가 예상보다도 빨리 대중의 관심을 받고 그 호흡이 좀 길게 이어지면서 초기 활동 기반을 잘 다질 수 있었다. 이후 제작자로서도 음악가로서도 감을 못 잡고 방황한 기간도 길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갑과 을의 격차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몇 없을 거다.

꾸준함의 동력은 뭔가요
요즘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라기 보단 그냥 경험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음반 제작을 하다보면 혼자서 기획 해야지 필드도 뛰어야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 라디오를 13년간 진행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단순히 출연만 한 게 아니라 기획 연출까지 다 했었는데 거기서 얻은 것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내가 또 일할 때 보면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은 내지르는 성격이더라. 그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나이를 먹을수록, 요즘 더 할 일이 많다.

트로트, 댄스,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입니다. 늘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젊은 문화와의 연계를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만들려고 하진 않는다. 녹음실을 자주 들락날락 하다보면 젊어질 수밖에 없는 건 있다. 엔지니어들이 다 젊지 않나. 자연스럽게 성향이, 또 음악적 성향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이 듣는 음악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요새 음악 가닥이 되게 많아졌다. 그 다양한 장르 중에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한다. < 이태원 클라쓰 >란 드라마를 재밌게 봤는데 거기서 김필이 부른 ‘그때 그 아인’ 같은 노래는 우리 세대 음악가들이 불러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겠더라. 2007년 발표한 내 노래 ‘감춰진 고독’은 요즘 들어 중장년층들에게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계속해서 더 많은 세대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

‘부평’, 음악활동의 길을 트다.

부평이 고향인가요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즈음에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부평으로 이사 왔다. 부평 4동에 ‘깡마당’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가 내 본가다. 계속 거기서 살면서 인천 동산 중·고등학교를 통학했다.

부평을 음악적인 면과 연관 지을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음악을 하게 된 동기가 부평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시대가 ‘통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지 않나. 친구가 통기타를 치면 그 멜로디에 내가 보컬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그렇게 음악에 접어들 게 된 거다.

음악적 데뷔인 듀엣 ‘물레방아’도 그 연장선 상에서 만들어진거죠.
대학 다니면서 ‘물레방아’의 전초격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때 밴드 이름이 ‘유심초’였다. 유시형, 유의형 형제가 만든 포크그룹 유심초가 바로 이 유심초다. 두 형제들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활동했다. 유시형고 훗날 물레방아로 같이 노래한 이춘근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뭉쳐 다니며 음악을 한 거다. 그러다가 나랑 이춘근이 물레방아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

사실상의 고향인 부평에 어떤 인상은 갖고 있나요.
양평 시골 촌놈이던 내게 부평은 정말 커보였다. 촌사람이 도시로 와서 좀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주눅 들고 소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을 많이 만났다. 앞서 말한 유시형, 유의형은 방앗간 집 셋 째, 넷 째 아들이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내 음악 길이 시작될 수 있었다. 부평에 관한 노래도 많이 썼다. 내게 부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그 시절 얘기를 조금만 더 하신다면
그때 보통 가수들은 업소에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당시에는 그게 돈벌이였고 또 당연한 굴레였다. 근데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 했다. 음악다방에서 노래 부른 기억은 있어도 자세 잡고 업소에 정기 출연한 적은 없다. 그런 내게 음악적인 인적 자원들은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부평에서 만난 다양한 음악 인맥들이 내 길을 넓혀줬다.

부평과 인천에 관한 노래도 많이 만드셨죠?
부평은 인천의 한 구(區)고 당연히 인천 노래를 조금 만들었다. ‘추억의 신포동’이란 노래 들어봤는지. 2016년 인천시가 인천 가치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의 노래 선정 작업을 추진하면서 쓰게 된 곡이다. 신포동은 인천 부평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하는 추억의 공간으로 음악다방도 많았다. 당시 팝 가요 청취수준이 꽤 높았다. 노래는 1편과 2편이 있는데 내 버전은 재미없고 ‘아라’라는 가수가 부른 게 좋다. 미디로 만든 트로트다. 신포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도 있지 않나요.
인천에 있던 성냥공장을 반추하며 만든 노래다. 인천에 많던 공장들의 역사를 그려보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이 있다. 참, 인천 맥주축제 로고송으로 지금도 행사 때 흘러나오는 ‘송도로 가자’도 있다. ‘기차 타고 평양 지나, 파리에서 커피 한잔’이라는 가사가 내가 썼지만 인상적이다. 인천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 곡이랄까. 그러고 보니 인천 노래를 제법 만든 편이다. (웃음)

부딪히며 익힌 대중감각 “음악적 핵심이던 비애감, 벗어나니 넓어졌다”

1977년 이춘근과 함께 혼성 듀엣 ‘물레방아’로 데뷔하고 거의 동시에 ‘순이 생각’이 큰 사랑을 받았는데..
‘순이 생각’, ‘슬픈 계절에 만나요’,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 곳에서’ 등 많은 곡이 히트했다. 1977년 그룹으로 시작해 1979년부터 솔로 음반을 냈다. 이후 1983년까지 총 6개의 정규 음반을 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작품마다 애정 받는 노래들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음악가로서 축복이기도 하지만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초창기부터 음반 제작의 많은 부분을 맡았지요
데뷔할 때부터 회사가 나한테 다 맡겼다. 지금도 이해를 못 하겠다. 경험도 없는데 왜 나를… (웃음)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배운 것들이 많다. 오리엔트 프로젝트의 나현구한테는 순발력을 배웠다. 악보가 안 떠오르면 감각대로 느낌대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같은 멤버였던 강근식도 좋은 영감을 많이 줬고.

앞서 말한 축복이 이와 같은 의미인 건가요
백영규는 여태까지 계보가 없었다. 송창식하면 떠오르는 계보가 있지 않나. 나는 음악적인 멘토도 없었고 큰 스승도 없었다. 혼자 나와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음악이 극과 극이다. 잘나오는 건 굉장히 잘 나오고 못 나오는 건 못나오고.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냈다. 그래서 창피한 곡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트곡이 많은데요, 그 곡들의 핵심정서는 뭘까요
얼마 전에 보니까 슬픈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 1위에 올랐다더라. (웃음) 굳이 핵심을 따져보자면 ‘비애감’이다. 첫 대중 히트 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 담긴 그 어떤 헤어짐이나 슬픔의 감정들. 그것들이 내 음악을 세상에 많이 알려줬다. 계속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고…

벗어나고자 했다는 건 무슨 의미죠.
나한테는 디렉터가 없지 않나. ‘슬픈 계절에 만나요’가 히트하면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지금은 이렇게 남의 음악도 듣고 할 여유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한 곡이 히트하면 ‘아 이런 곡을 만들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예를 들면 ‘잊지는 말아야지’가 뽕짝이니까 다음 곡 ‘가신 님 그리워’도 비슷하게 만든 거다. 그러면 대중에게 외면 받는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걸 알고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후회로 남아있나요.
많이 아쉽다. 과거 다양한 선택을 했었다면 백영규 음악관이 달라졌지 않을까. 아쉬웠던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은 늘 경계한다. 그때는 수정이라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골치 아프게 수정한다. 모니터링도 하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곡을 고치곤 한다. 왜 딱 눈치 보면 곡이 괜찮은지 별로인지 알지 않나. ‘천사’도 수정을 되게 많이 한 곡이다.

근래 백영규 음악스타일은요.
2000년대부터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아까 말한 2007년에 나온 ‘감춰진 고독’을 들어봐라. 멜로디는 단순한 쓰리 핑거에 통기타 음악이지만 편곡 자체에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을 가미했다. 전주만 해도 일분이 훨씬 넘는다. 이외에도 2016년에 낸 ‘술 한 잔’은 대중 트로트고 ‘얼룩진 상처’도 마찬가지다. 많이 히트는 안 됐지만. (웃음)

인기가수, 공연기획자, 라디오진행자인 백영규는 또 딴 가수에게도 곡을 준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김세화의 ‘아그네스’ ‘타인인 줄 알면서도’, 유심초의 ‘나는 홀로 있어도’,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아름다운 눈물 꽃’이 그가 쓴 곡들이다. 특히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은 서태지와 아이들 광풍이 있기 전인 1991년 빅히트했고 백영규가 직접 제작했다. 음반제작자로도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랜 세월을 쉼 없이 달려온 결과, 이렇게 넓은 활동 보폭과 다채로운 입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음악을 하며 가장 기쁠 때는 언제였나요.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는 오히려 못 느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게 마음으로 와 닿았을 때는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을 제작했던 즈음이었다. 돈도 좀 생기고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주고 살 맛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웃음) 제작자로서 우쭐한 그런 것에 취하기도 했고. 거품이 빨리 빠진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박정수 정규 1집 <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은 정말 라디오를 뒤덮었습니다.
히트 이후에 방황도 길었다. 제작자 입장에서 박정수의 음폭이 넓으니까 그걸 다 쓰고 싶었다. 그러다보니까 음악적으로 자기만족은 있지만 대중들과 서서히 멀어지게 되더라. 대중음악은 대중이 좋아해야하는데 나는 ‘내가 만들고 대중들은 좋아해라’ 이런 방향으로 변하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대중한테 외면을 많이 받았다. 그 버릇을 고치게 된 게 거의 2010년 즈음인 것 같고.

또 다른 호시절은 없었는지.
이건 좀 어려운 얘기인데 음악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운 시절을 꼽고 싶다. 통기타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내가 듣기 좋아하는 음악은 어쩔 때는 록이고 또 어쩔 때는 엔야(Enya) 풍의 신비로운 곡들이다. 언제인가부터는 또 미디에 손 되게 됐다. 엄청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고 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장르들을 조금씩이라도 건드려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매번 내가 이런 것들도 할 수 있겠다는 걸 배우고 느끼고 늘 자라고 있다. (웃음)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수작으로 생각하는 곡이 있나요.
13년 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과 같은 노래 ‘가고 싶은 마을’을 꼽고 싶다. 2015년에 발표했는데 방송을 하며 받은 영감을 담았다. 그 전 2011년 곡 ‘그리움 안고 헤어지자’도 애정을 갖고 있다. 트로트에 약간의 랩을 넣었다. 음악적 실험을 했던 곡이다.

백영규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그때그때 답변이 달라진다. 질문이 상당히 방대하지 않나. 다만 가장 솔직한 건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10가지로 하면 10개를 다 통과해야한다. 그게 정말 힘들다는 거다. 라디오 하면서 이와 관련된 걸 많이 배웠다. 문자가 들어오면 늘 진실한 답변을 하려고 습관을 들였다. 그러니까 청취자들이 굉장히 좋아해줬고 그런 과정들이 가사를 쓸 때 가장 큰 주안점으로 작용했다. 가사를 쓴다기보다 사람을 쓰자 다짐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음악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음악은 내게 삶이다.

백영규 노래는 늘 한편의 슬픈 시와 같습니다. 시적 감성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습관과 노력이다. 타고난 건 절대 아니다. 멜로디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가사를 써야하는데 그 순간이 정말 괴롭다. 예를 들어 작곡을 한 시간 한다면 가사는 일주일이 걸린다. 그 시간과 순간들을 늘 빼둔다. 주변에서 영감을 얻으려 노력하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잘 풀어내려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습관적으로 말이다. 최근 백운산 쪽으로 이사를 갔다. 산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웃음)

진행 : 임진모, 김도헌, 박수진,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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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 김구라, 그리(GRE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비와이와 홍이삭을 잇는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스타 방송진행자 김구라와 그 아들인 뮤지션 그리(GREE)다.

가장 잘나가는 방송 예능프로그램 진행자인 김구라는 코미디 뿐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과 일가견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대중스타로 떠오르기 전에는 팝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 알려진 대로 또 1998년생 그의 아들 동현은 ‘MC그리’란 예명이 말해주듯 음악의 길을 걷고 있다.

음악광 아버지와 뮤지션 아들. 둘과 음악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했다. 음악을 바라보는, 부자간의 비슷한 그러나 세대차로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시각을 기대했지만 둘은 합(合)의 장면을 연출했다. 두 사람은 음악 관련 대화에 즐겁게 그리고 성의 있게 임했다. 김구라는 “아들의 진로와 행보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렵겠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음악을 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장르범주를 넘어 음악적 보폭을 넓히겠다는 의지를 보인 아들(김동현)은 최근 앞에 MC를 떼어냈다면서 “근래 음악에 다시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다루는 또 다른 일정을 모두 인천 부평시장 근처 카페에서 진행해 이즘과 부평문화재단의 기획에 부응했다. 김구라는 인천맨임을 강조했다. 인터뷰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인터뷰에 응해줘 감사하다. 그리(김동현)가 음악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방송에서 “나를 잡아주고 있는 것은 팝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만큼의 음악광이다. 그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밑에서 자랐는데 음악과 관련해 아버지의 인상은.
그리 : 사실 제가 힙합을 했지만 아빠는 아시다시피 록입니다. 당연히 옛날부터 제게 록 그리고 서구 팝을 많이 들었지요. 프린스, 마이클 잭슨 등등. 아버지가 그런데 어느 날 에미넴(Eminem) 노래를 들려주셨어요.

에미넴? 나중 래퍼가 되는 데 이 부분이 영향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처음 들은 에미넴 노래는 뭐였나?
아빠의 영향, 당연하죠. 노래는 영화 <8 마일>의 ‘Lose yourself’였어요. 이 곡을 접하면서 랩에 대한,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걸 시작으로 다른 래퍼들의 음악도 찾아 듣고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막상 음악세계 활동이 만만치 않다는 걸 익히 알지 않는가. 아들이 음악 쪽으로 가는 걸 쉬 동의하지 못했을 듯한데…
구라 : 나는 차 안에서 항상 음악을 튼다. 사실 내가 음악을 틀면 가족들이 싫어한다. 동현이 엄마는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럼에도 동현이한테는 많이 들려줬다. 팝도 많이 들려주고. 가끔 래퍼 흉내도 내주고. 나의 경우 음악적으로 이모의 영향이 컸다. 이모가 팝을 많이 좋아해서 덩달아 나도 팝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동현하고 같이 방송하고 다니면서… 뭐 사실 그 나이 때 되면 자동으로 음악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닌가. 그 무렵 랩을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처음에 반대했는데 굳이 하겠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별로 아들의 진로에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결국 가수가 업이 됐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는 게 기쁜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생각이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20대 초중반까지 좋아하는 일도 못 찾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 동현이는 본의 아니게 방송을 하게 됐고, 길도 찾고 그랬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음악 안 하고 연기 하고 그랬으면 이도저도 아니었을 것 같다. 이쪽으로 뻗어가는 게 그래서 좋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고 아들은 음악에 뜻과 방향을 잡고 가는 게 좋아 보인다.
아직 돈을 벌고 하지는 않지만, 자기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뭐 조금 능력이 있으니 도와주고.

이 상태에선 아버지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들이 어느 정도 입지를 꾸리려면 아버지가 도와줘야할 것 같다.
그리 : 실제로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지금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 두 배로 갚을 생각이에요.
구라 : 나는 또 그렇게 생각하는데.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돈 버느라 스트레스 많이 받고, 저도 그랬지만 공황장애도 겪고 그렇지 않은가. 나도 옛날에 무명시절이 있었지만 안 될 때의 스트레스와 잘 될 때의 스트레스는 또 다르잖아요. 지금처럼!

‘그리’는 혹시 아빠가 쓴 음악 글 봤는지. 아빠가 음악을 그냥 취미 수준으로 듣는 게 아니라 듣는 걸 넘어 평론가처럼 글까지 쓰셨다. 한번 찾아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을 내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글을 잘 안 읽습니다(웃음).

1990년대 말 잡지에 팝 칼럼니스트로 기고도 했고 얼마 후 김현동 인터넷방송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구라 : 조선일보에 1년 정도 연재도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잡지에도 쓰고. 음악 글 쓰는 게 꿈이어서. 그런데 글을 쓰는 거 즐겁기보다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고 그 때문에도 현재는 조금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필자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음악과는 뭔가 연이 맺어진 게 있는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요즘 음악적인 유튜브 방송을 많이 하고 음악관련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운명적인 관계 같고 그렇다.

이즘과 함께 하는 부평 문화재단 < MEETS 시리즈 >는 가수 관련 기획인데 음악광이고 아들이 음악을 하고 있어서 뮤지션 범주 내에 섭외했다. 먼저 방송에서 고향인 인천 얘기를 자주하고 인하대 출신이라는 걸 강조한다. 인천과의 연결고리가 분명해 보인다.
아시다시피 고향이 인천이다. 그런데 본적은 서울이다. 어쨌든 본적은 서울이지만, 태어나기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형은 1968년도에 태어났고 (김구라는 1970년생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가정동인가, 대우자동차 사원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난 그 5층짜리 아파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살았다. 이후 간석동에도 살았고 신혼집을 계양구 계산동에서 차렸고 완벽한 ‘인천맨’이다. 인천은 나의 홈타운이다. 그리고 내 방송 타입이 신변잡기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는 편 아닌가. 그래서 인천 얘기가 많다.

서울이 본적인데도 굳이 인천출신임을 강조한다. 고향을 ‘서울’이라고 하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도 궁금한데 성공하고 나서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런 것처럼 서울로 가지 않았다. 인천 아니면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구라 : 대학 졸업 후에는 인천이 아니라 김포다. 지금은 일산이고… 서울로 가지 않는 이유라… 글쎄 동현이 엄마가 소위 말해 교육에 집중하지 않는 편이다. 김포에 식구도 있고 하니깐. 동현이 엄마가 (서울로) 가자고 했으면 갔을 것 같다. 또 딱히 서울 행 의지도 없었다. 나중 집 분양도 일산 쪽에 받게 되었고 서울로 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기가 좋은데 뭘..

‘그리’는 인천 기억이 어떠한가.
솔직히 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이사를 갔으니까요. (어떤 이미지인지 묻자) 아버지의 실질적인 터전 자체가 인천이고 많은 얘기를 들어서 거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까요. 산 기억은 없지만 아주 친근해요. 그리고 아직 할머니가 인천에 사시니까요. (옆에서 아버지 구라는 “아마 얘는 인천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을 거예요”라고 말을 붙였다)

서울은 어떻게 생각 되는지.
(구라) 복잡해! 솔직히 약속도 잘 안 잡는다. 일 하는 곳이 다 거기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서 오후7시에 약속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4시에 출발해야 한다. 일산에서. 짜증이 난다. 강남이 또 사실 문화의 중심인데, 난 별로 동경하지 않는다. 내가 보면 그렇더라. 많은 일산 사람들이 다 서울로 가려고 한다. 그게 상향이동인가 (웃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복잡하고 차도 많고 그렇다.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에게 기대를 하는 게 있다. 사람은 피도 환경도 속일 수 없다. 아버지가 록과 팝에 음악에 박식하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음악을 좋아하니깐 분명 음악유전자가 아들에게 들어와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음악적인 게 언젠가 섞여 도드라지게 마련이다. 남들이 못할 걸 하지 않을까. 잘될 거라고 본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브릿팝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라디오헤드(Radiohead)나 그런 거요. 음악을 폭넓게 접하고 있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도 아버지 덕분이기도 하고요. 팝도 많이 듣고요. 제가 힙합이미지가 강한데요, 장르에 제한되고 싶지 않아서 활동이름 MC 그리에서 MC를 아예 빼버렸어요. 래퍼가 아니라 대중가수로 가는 거죠.

요즘 듣는 음악은
그리 : 라우브(Lauv) 그리고 레이니(LANY), 바지(Bazzi)… 노래를 하고 있어서 그런 가수를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싱잉(노래) 수준은 어떻게 보는지
구라 : 아무래도 전문 싱어는 아니니깐. 싱어는 제가 <복면가왕>을 하다 보니까 워낙 노래 잘 하는 사람도 많고. 재능의 측면에서 한번은 탁재훈씨가 제게 그러더라고. ‘솔직히 넌 럭키한 거야. 네가 노래를 잘 하니 춤을 잘 추니?’ 처음에는 좀 기분이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얘기지. 그런데 희극인이라는 엔터테이너 관점에서 어떻게 보면 뭐랄까 제가 판을 조금 꿰뚫어보는 그런 능력이 있구나 생각이 든다. 그것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온 거 아니겠나.

언젠가 김태원씨도 그랬다. 기타를 잘 안 치길래 ‘기타 연습 요즘 왜 안 해요?’ 하니까 ‘잘 안 해, 기타는 돈이 잘 안 돼’. 농담 식으로 얘기한 건데 결국 자신은 기타리스트보다 음악 전반을 다루는 컴포서(composer, 작곡가)라는 거지. 그렇게 동현이도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작곡을 하고 자기노래를 표현하는 정도만 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리’는 이제 음악에 분명한 입지를 새겼다. 후회는 없는지.
후회 안 합니다. 슬럼프는 오지만.. (‘언제 슬럼프가 왔어요?’ 물으니) 20살 때쯤이었는데. 음악을 듣고도 느낌이 안 왔어요. 감이 전혀 안 잡혔습니다. 레퍼런스를 잡아야겠다, 이런 풍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런 감이 도대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때 나온 노래가 2019년 초에 발표한 곡 ‘벨튀’(feat. 서사무엘, 가은)였죠. 레트로였어요. 조금 재미없게 음악을 했다고 할까요.

그럼 슬럼프에서 일어선 때는
그리 : 작년 가을 겨울쯤. 슬럼프가 조금 길었어요. 저 스스로 문제 때문이었죠. 지금은 조금 음악에 재미를 찾았어요. 만나는 사람도 바뀌고. 조금 더 나아졌지요.

음악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리) 음악은 애증인 것 같아요. 잘 나올 때는 너무 기분이 좋고 날아갈 것 같은데, 안 나오고 그러면 스트레스 받고 엄청 밉죠. 사람들이 욕하면 회의감마저 들고요. 그러다가 또 만들 때는 즐겁고..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헌사를 한다면
얼마 전에 헌정 곡도 낸 걸요. ‘HIM’이라고. 원래 아버지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드리려고 준비한 건데 결과적으로 못해드렸어요. 어버이날에 공개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유출이 되는 바람에 4월에 발표 돼버린 거죠.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절절이 담은 이 노래에는 중간에 ‘사실 난 벌써 미안해져/ 그대가 내게 준만큼은/ 그대에게 평생 못 줄 텐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다시 한 번 묻는데 아들이 음악 한 거에 대한 아버지의 진짜 솔직한 심정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방송에 뛰어들었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문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들 두루두루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음악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음악이라는 베이스를 깔고 자기 일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아들이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원하는가, 뮤지션이 되기를 원하는가.
엔터테이너가 낫지 않을까. 완벽한 뮤지션보다는. 요즘에는 음악 하는 사람들도 다 엔터테이너가 되고 있지 않나. 추세가 그렇다. <라디오스타> 함께 했던 윤종신도 그렇고. 너무 뮤지션으로 국한되어있지 않는 게….

한국 예능에서 음악이 가지는 위치는. 전에는 절대적이었던 음악이 요즘에 갖는 위치를 어떻게 판단하나.
구라 : 음악도 생업이지 않나.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방송도 유튜브, 넷플릭스 시대에 또 코로나 사태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광고가 안 돼 한 달에 몇 억씩 손해 보는 방송도 많고. 그것처럼 음악도 너무 어렵다. 끊임없이 소비가 될 테지만 옛날처럼 음악 독자적으로 강한 위상을 갖거나 절대적이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타(他) 여러 장르들과 융 복합하는 그런 다재다능한 뮤지션이 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이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원하는 건가.
뮤지션만 하기는 쉽지 않다는 거다. 그 길은 쉽지 않고. 그러니 편견을 가지지 말고 여러 장르에 실력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게 시너지가 될 수도 있으니.

‘그리’는 ‘브랜뉴 뮤직’에 소속되어 있다. 회사가 그리를 보는 입장은 어떤가. 본인은 회사에서 여기서 어떤 포지션을 원하는지. 좀 전에 대중노선을 취한다고 했는데, 회사와 잘 정돈이 된 건가.
브랜뉴 뮤직은 K팝도 많이 하고 방송에도 신경 쓰고 실제로 많이 해요. 저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걸 반대하는 그런 것도 없고요. (제가) 방송하는 것도 좋아하고. 호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떨 때는 김구라 아들이라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솔로 스탠딩은 필수다. ‘그리’는 음악인이든 연예인이든 간에 본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뭔가. 성공인가 행복인가.
(단칼에) 행복!!! 그냥 지금처럼 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공에 대한 욕심이 들지 모르죠, 아빠도 영원히 방송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저도 어쨌거나 혼자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그게 행복인 것 같습니다.

참 구라씨는 좋은 소식이 있지 않나.
같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

어느 정도 얘기가 오가고 있는지.
식구들끼리 밥 먹으면서 얘기 했다. 물론 방송에서는 아직 손사래를 좀 친다. 왜냐면 나이가 또 오십이 넘었으니깐. 나도 나이를 먹으니 옛날 선배들 말이 와 닿더라. 뻔히 아는데 왜 그렇게 손사래를 치나 했다. 나도 그 나이가 되니깐, 아이도 방송을 같이 하고, 연예인이고, 옛날에 가족 예능도 많이 하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혼한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막 ‘결혼해서 좋습니다!’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의 가치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또 같이 있는 친구가 그런 걸 좋아하면 모르지만 그 친구도 알려지는 거 원치 않고 그렇다. 강수진 김국진 같은 경우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랑 같이 지내는 친구는 그렇지 않으니.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고. 서로 공개를 원치도 않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거다. 이해를 바란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 ‘그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이렇게 어려운 시간 내줘 감사하다. 아들은 성공해서 나중에 꼭 이즘과 인터뷰 했으면 좋겠다.
(구라) 그래야지… (그리) 저도 그랬으면 바랍니다.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이홍현
정리 : 임진모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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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 비와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대표이사 이영훈)은 대중음악평론 웹진 이즘(IZM)과 한국 대중음악 역사와 함께한 인천·부평 아티스트의 발자취를 기록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라는 타이틀의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에 참여하는 아티스트는 인천·부평을 대표함은 물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다양한 시대의 아티스트를 선정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힙합 서바이벌 예능 < 쇼미더머니 >로 이름을 알린 힙합 뮤지션 비와이다.

지난해 비와이는 정규 2집 < The Movie Star >를 통해 독특하고도 과감한 확장된 음악 세계를 선보였다. < The Blind Star >의 자아 성찰을 넘어 한국 힙합 시장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주체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입체적 시각을 영화 사운드트랙처럼 웅장한 소리에 실어냈다. 

신실한 교인,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되묻고 고뇌하는 모습은 본인뿐 아니라 힙합 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오는 6월 15일 래퍼 심바자와디와 함께한 새 앨범 < NEO CHRISTIAN >을 공개 예정인 비와이를 만났다.

상대적으로 비와이는 ‘어른들도 아는 래퍼’의 이미지가 있다.

제가 사랑받기 좋은 캐릭터를 갖추고 있는 것 같아요. 힙합 팬 말고 대중 분들께서 ‘비와이는 이래서 좋다’라고 말씀하실 때 주로 나오는 내용이 ‘욕이 없다’, ‘돈 이야기가 없다’, ‘여자 이야기가 없어서 좋다’ 등이거든요. 어른 분들께서는 아무래도 앨범 대신 싱글 단위로 많이 들으시니까, ’Forever’, ‘The time goes on’, ‘Day day’ 등 희망적인 내용의 노래들이 많이 어필했다고 봅니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클린’한 이미지는 아무래도 교회 영향도 있고요.

6월 15일 발표되는 새 앨범의 이름 역시 < Neo Christian Flow >다. 본인이 생각하는 ‘Neo Christian Flow’란 무엇인가.

‘네오 크리스천’이라는 본질적인 개념이 있는 것이지 따로 ‘네오 크리스천 플로우’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저희는 힙합 하는 사람들이지, 찬양에 사용되는 소리나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굳이 가져와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에요. 비와이, 그리고 이번 앨범을 함께한 심바자와디가 ‘네오 크리스천’이라는 주제 아래 힙합으로 이야기하는 앨범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조금 더 찬양에 가깝고, < The Movie Star >만큼은 아니지만 무게감 있는 작품이에요.

비와이의 랩 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죠. 카니예 웨스트, 켄드릭 라마, 프로듀서 마이크 딘 등… 한국에서는 버벌진트죠. 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한국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

< The Movie Star >에서도 드러나듯 비와이의 음악 세계는 카니예 웨스트처럼 큰 규모와 실험적인 시도가 두드러진다.

실제로 그 앨범은 그런 결이 있었죠. 클래식의 요소도 가져왔고, 올드 스쿨적인 요소, 테크노, 하우스, 트랩 등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했어요. 그게 힙합의 매력이라 생각해요. 하나에 정체되기보단 여러 가지를 가져와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재창조의 매력이랄까요.

켄드릭 라마를 언급한 데는 본인이 힙합의 주요한 메시지 중 하나, 저항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는 뜻일까.

물론 고민하고 있죠. 음악적으로도 전통을 깨고 싶고 완전히 새로운 걸 찾죠. 하지만 어떤 부분에선 그런 게 저희 윗 세대가 힙합을 바라보는 일종의 클리셰라 생각되기도 해요. ‘나라가 이런데 래퍼는 뭐하냐!’, 평소 기부 활동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기부 안 하냐’, 나름 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왜 저항 안 하냐’… 이해는 하지만 조금은 구시대적인 개념 같아요.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비와이가 생각하는 비와이의 힙합, 비와이 랩의 핵심을 묻고 싶다.

흠…. 평소에 많이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굳이 한마디를 담자면 ‘저에 대한 연민’? ‘Day day’의 경우 나답게 살지 못했던 어린 시절 콤플렉스를 털어놓는 곡이고, < The Movie Star >의 경우도 무작정 미국 힙합이 멋있다고 생각하며 따라 했던 과거 제 모습을 연민하는 감정이 어느 정도 있죠.

비와이를 대중에게 소개한 계기로 2016년 엠넷의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 쇼미더머니 >를 빼놓을 수 없다. 시즌 4에 처음 등장했던 비와이는 이듬해 시즌 5에서 ‘Forever’, ‘Day day’를 통해 자신을 알리며 경연 우승을 거머쥐었다. < 쇼미더머니 >에 나간 계기를 묻자 비와이는 “나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나만 듣기 아쉬웠다.”라 대답하며, 경연 프로그램 출연이 자신에게 가져다준 것들과 그로 인해 변화를 맞은 삶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 The Time Goes On > 앨범을 발표한 후 < 쇼미더머니 >에 출연했다.

시즌 4 나갔을 때는 어색했어요. 그때는 ‘잘못된 겸손’을 갖고 있어서 제가 봐도 멋이 없었어요.

‘잘못된 겸손’이라는 개념이 궁금하다.

그때의 제게 있어서 겸손함은 사람들 앞에서 고개 숙이고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 제가 경외하는 존재에 대한 섬김이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겸손이죠. 때문에 제가 자신감 있는 게 겸손함이었죠. 자신감이 없다는 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하나님만 무서워야 했는데 < 쇼미더머니 시즌 4 >에선 사람을 무서워하려니까, 멋이 없었죠.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겸손’이었어요.

그리고 그다음 해 시즌 5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고 실제로 정상에 올랐다. 예감이 들었나.

‘믿는다’와 ‘믿긴다’를 구분해야 한다고 봐요. 제 자신이 ‘이번 시즌 우승을 믿는다’는 생각에 속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 저는 < 쇼미더머니 시즌 5 > 우승이 너무 ‘믿겨졌’어요. 마치 하나님이 ‘믿기는’ 것처럼요. 물론 이게 제가 우월해서, 제가 대단해서라는 뜻은 아니에요.

당시 2016년 IZM 올해의 싱글로 선정된 ‘Day day’가 화제였다. 현재 빠른 랩 스타일과 비교하면 리드미컬한 느낌이 두드러지는데.

저도 그런 스타일을 하고 싶은데 더 깊이 공부하고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 하는 랩 스타일의 경우 일단 디자인하고 808 드럼으로 강렬한 비트를 더하면 완성이 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Forever’도 물론 멋진 곡이지만 저는 ‘Day day’에 더 많은 게 들어갔다고 생각해요. 일단 비와이가 있었고, 그 당시 유행하던 트랩 비트가 있었고, 펑크(Funk), 오케스트라적인 요소도 있었을 뿐 아니라 많은 분들께 사랑도 받았으니까요.

쇼미더머니 > 이후 비와이의 결과물을 듣는 팬들은 ‘의도적으로 과거 스타일을 배제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일부러 그런 랩 스타일을 추구하는 건가?라는 오해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비와이라는 캐릭터가 빡세고, 웅장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니까요. 그런 스타일을 극대화해서 만든 앨범이 바로 < The Movie Star >죠.

힙합이 세대 음악을 벗어나 전 대중을 아우르는 ‘팝 뮤직’의 영역을 넘보는 지금 비와이와 같은 아티스트들은 경연 프로그램과 크리스천 이미지를 통해 기성세대로의 접근에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 이에 대해 비와이는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고 있다.”며 소통의 영역에 대한 고민을 내비쳤다. 동시에 “래퍼들은 다 이렇다는 일반화를 벗고 들어 보면 현재 힙합 신에도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음악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 번거로울 수 있지만, 한 번쯤 관심을 가져주시면 좋겠다.”라며 힙합 신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The Movie Star >의 배경이 궁금하다.

우선 영화 보는 걸 좋아해요. 특히 스케일이 큰 영화를 보며 받는 압도적인 느낌을 좋아하는데 이걸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메시지로는 영화에서 주인공, 그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의 삶에 대해 생각한 내용을 담았고요.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나.

영화 < 아이언맨 >을 예로 들어볼게요. 우선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를 연기하는 배우는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죠. 지금 그 사람은 대본을 읽고 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에요. 그런데 < 아이언맨 >이라는 작품 안에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토니 스타크라는 존재로 살고 있어요. ‘주연’이라는 트랙에 이 개념이 더 잘 설명되어 있어요. 주연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주인공은 토니 스타크인 거죠.

저는 지금까지 힙합 신에서 ‘주연’의 삶을 살았어요. 해외 래퍼들, 미국 힙합을 들으며 그 문화와 요소 모두를 동경하고 그들처럼 행동하고 말을 뱉어야 진짜 멋진 힙합 스타가 될 줄 알았죠. ‘주연’을 맡아서 그들을 연기한 거예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멋없는 행동이었어요. 따라쟁이였던 거죠. 그래서 이제는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인스타그램 독자 @s2s2_y_kiki 님의 질문 : 앨범을 제작하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개념이 있다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새로움’입니다. ‘이것은 새로운가?’를 항상 제 자신에게 물어봐요. 새로운 게 없으면 그걸 들을 이유가 있나 싶은 생각입니다. 물론 제가 낸 작품들이 엄청나게 혁신적이고 새로운 작품은 아니지만, 항상 새 것에 대한 고민을 하는 편이에요.

실제로 굉장히 변화무쌍하고 독특하며 과감한 작품이라 본다. 앨범을 셀프 프로듀싱했는데, 이것도 ‘새로움’에 대한 고민의 연장선이었나.

그렇기도 하지만 우선 셀프 프로듀싱이 제 생각을 구현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이었어요. < The Movie Star >의 경우 사운드는 괜찮았는데 텍스트, 특히 가사를 정리하는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서의 어려움인지?

애매모호한 부분이 걸렸죠. 일부러 모호함을 의도하기도 했지만 명확히 텍스트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믹싱 과정에서도 제가 최대한 내고 싶은 소리를 내려니 쉽지 않았고요.

쇼미더머니 > 출연 이후 방황하다 구원을 받고 앞으로 전진하는 < The blind star>와 공통적으로 < The Movie Star > 역시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가다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극복의 서사가 중심이다. 흥미로운 공통분모인데.

1집은 말씀하신 대로 의도된 이야기였어요. 어떻게 보면 정말 제 삶의 이야기니까요. < The Movie Star >도 비슷한 결을 가져가려 했고요. ‘꼭 이렇게 해야겠다!’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모두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 The Movie Star >의 타이틀 싱글 ‘가라사대’ 역시 2019년 IZM 올해의 가요 싱글로 선정되었다. ‘Day day’와 ‘Forever’의 중간을 의도한 것으로 들린다.

정확한 표현이에요. < The Movie Star >가 ‘Forever’의 확장판이었다면, 다음 앨범은 ‘Day day’의 확장판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비와이가 꼽는 ‘내 인생의 영화’가 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인셉션 >,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 세븐 >을 꼽겠습니다.

인천 출신 힙합 아티스트들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대전에서 태어나 인천으로 이사를 온 비와이, 그리고 그의 고등학교 친구 씨잼(C Jamm)은 현재 한국 힙합을 이끄는 젊은 신성이다. 이들이 재학했던 인하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의 선배가 3인조 힙합 그룹 리듬파워, 그리고 후배가 지난해 < 오리엔테이션 > 앨범으로 주목받은 래퍼 최엘비다. 부평구 문화재단의 프로젝트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의 첫 주자로 선발된 비와이에게 인천에 대한 기억을 물었다.

인천이라는 도시에 대한 생각은.

건강하고 멋진 도시가 되었으면 해요. 아무래도 학창 시절엔 어두운 모습을 많이 봤거든요. 인천이 서울 바로 옆에 있어서 규모도 점점 커지고 사람들도 많아지는데 모두 서울로 가지 인천에 모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는 도시, 서울로 가지 않아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도시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정리 : 김도헌, 이홍현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