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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9 하헌진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쿠마파크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아홉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블루스 뮤지션 하헌진이다.

우직함과 강단. 2009년 데뷔 이후 올해 활동 11년 차에 접어든 하헌진은 장난기 어린 말투 사이 신념 있는 대답을 이어갔다. 블루스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각박한 한국에서 그는 블루스, 그중에서도 ‘델타 블루스’를 연주한다. 델타 블루스는 블루스의 탄생지인 미시시피강 인근 델타 지역에서 시작된 장르로 강한 리듬감과 코드 변환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슬라이드 주법이 특징이다.

“이 시대, 세대에도 블루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한국에서 보여주고 싶다.” 흔히 ‘서울의 블루스 맨’이란 애칭으로 소환되는 그는 단단한 포부를 지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때로는 솔로로 또 때로는 그룹으로 변신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2019년에는 현재의 4인 체제를 갖춰 ‘하헌진 밴드’를 출범, 몇 달 전 첫 음반 < 신나게 놀아보자 >(2020)를 발매했다. 이렇듯 그의 행보는 뚜렷하고 꾸준하다. 서서히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가을을 알리던 9월의 어느 날, 이즘 사무실에서 만난 하헌진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자신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5월 1일에 전역하고 그해 11월쯤 서교 예술 실험 센터에서 첫 공연을 했다. 그게 벌써 2009년의 일이다. 그때부터 줄곧 블루스 뮤지션으로 살고 있다. 어쿠스틱 블루스, 2인조 펑크(punk) 블루스를 비롯해 일렉트로니카와 아날로그 장비들을 이용해 일렉트로닉이 섞인 블루스를 하기도 한다. 지금은 4인조 블루스 밴드를 하고 있다. 2017년에는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라는 독립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기타 돈 되는 일은 모든 한다고 보면 된다. (웃음)

블루스의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특히 2015년 싱글 ‘다시 날 받아주었네’와 2016년 발매한 EP < 나아진게 없네 >에서 들려준 전자음 가득한 사운드도 재밌었다.

< 나아진게 없네 >는 아날로그 드럼머신, 신시사이저, 기타로 만들었다. 여기서 들리는 특수한 소리는 다 아이패드를 통해서 찍어낸 거다. 최근에는 컨트리풍의 음악을 하려고 준비하다가 잠깐 멈춰두고 ‘하헌진 밴드’를 통해 다시 델타 블루스를 다루고 있다. 루츠(Roots)한 델타 블루스 성향의 싱글을 만들고 있다.

하헌진 밴드는 어떻게 결성하게 된 건가?
베이스 치는 김지인이 ‘나잠수와 빅웨이브즈’에서 활동했다. 문래동에서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블루스를 좋아한다더라. 그렇게 제일 먼저 함께했고 (김)지인이 대학교 친구였던 하모니카의 우상석을 추천해줬다. 셋이서 3년 정도 공연을 종종 했다. 2019년에 밴드 실리카겔의 김건재가 드럼 합류하며 4인 체제가 됐고.

하모니카를 정규 멤버로 넣은 정통 블루스 밴드를 꾸리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하모니카‘도’ 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하모니카‘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하모니카가 있는 밴드를 처음 해보기도 하고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살려 음악을 해야 하나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

하모니카 소스가 계속 들리면 그게 패턴의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올해 2월에 발매한 음반 < 신나게 놀아보자 >의 포인트는 전곡에 하모니카가 등장하는 것이다. 전곡에 하모니카가 등장하는 블루스 록 밴드는 없었다. 나도 소니보이 윌리암슨(Sonny Boy Williamson)이나 리틀 월터(Little Walter) 스타일의 음악도 물론 하지만, 시카고 블루스만 봐도 보컬이 나올 땐 하모니카가 빠지고 하지 않나. 지루하지 않게 녹여내는 데 많은 애를 썼다. 결과적으로 더 재밌는 음반이 나왔다.

< 신나게 놀아보자 >를 하헌진 커리어 중 가장 좋은 음반이라 생각될 정도로 좋게 들었다. 기타와 하모니카도 유기적으로 연결돼있었고 악기별 밸런스도 늘어지지 않게 신경 쓴 인상이다.
솔로로 만들었던 일렉트로닉 블루스 성향의 < 나아진게 없네 >를 하헌진 밴드가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솔로나 밴드로 들려주고 싶었는데 들려주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담았다. 뮤지션 김토일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8시간 만에 원 테이크로 녹음했다. (김)토일의 도움으로 믹싱, 마스터도 직접 했고.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홍보가 잘 안 돼서 제대로 된 인디 음반을 내보려던 애초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씁쓸하다. (웃음)

홍대 등지의 클럽에서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이 크지 않나.
‘잔다리 라이브 투어 지원 사업’에 선정돼서 11월에 단독 공연을 하게 됐다. 관객을 많이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무관중 라이브 시스템으로 준비 중이다. 이쯤 되니 (코로나로 인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 외에도 재밌는 기획을 많이 했는데 다 취소됐다. 밴드 맨들 몇 명과 모여 오토바이를 타고 독립 영화 극장 순회공연을 굵직하게 계획했었는데 취소. 일본에 공연 다니며 알게 된 블루스 뮤지션들의 내한 공연을 추진했는데 그것 역시도 취소. 9월 10월 활동들이 많이 무산됐다.

그럼에도 부평구문화재단과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잘 마쳤다. 10월에 국내 재즈 1세대로 볼 수 있는 트럼페터 ‘최선배’와 작업한 ‘어두운 골목길’이란 싱글을 발매한다고.
‘어두운 골목길’은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 어제 내린 비 >에 수록됐던 곡이다. 편곡을 혼자 다 했는데 음악 자체에 당시 시대적 배경들이 담겨있어 막히던 부분들도 있었다. 원곡의 편곡된 복잡한 구성이었지만, 최대한 심플하고 모던하게 편곡을 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길 바랐다. 주니어 킴브루(Junior Kimbrough)라든가 알엘 번사이드(R.L. Burnside) 풍의 1980년대 주크 조인트 스타일의 델타 블루스가 있다. 단순한 디비트에 베이스도 반복되고, 기타도 반복되고. 한편으로는 한국 대중들에게 이런 블루스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도 싶었다. 내 음악에서도 구현하고 싶었지만, 이번 기회에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최선배와의 작업은 어땠나?
선생님 파트는 전적으로 다 맡겼다. 매번 테이크가 다를 정도로 자유로웠다. 처음에 선생님 색대로 그냥 연주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약간 당황하셨다. 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주어진 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게 방식이었으니 낯설 법도 하다. 작곡가가 시키는 대로만 연주를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막상 솔로 연주에 들어가니 달라지시더라. (웃음) 선생님께서 잘 해주셔서 색이 확 살아났다. 멤버들도 단순해서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브라스 사이 하모니카를 잘 담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기도 했는데 (하헌진) 밴드 멤버들 덕에 잘 끝냈다.

인천-부평과의 인연이나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을까?
2017년 즈음 부평의 ‘씽크빅문고’에서 공연을 했던 적이 있다. 서점이라는 데는 동네의 색채를 많이 반영한다. 예를 들어 보광동에는 잡지나 문제집이 많고 서울대학교 근처에는 사회, 과학 서적이 즐비하다. 특이하게 씽크빅문고는 서점이라기보다는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땐 대중들이 잘 아는 커버 곡을 들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내 노래만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잘 즐겨줘서 색다르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새벽에 MTV에서 너바나의 < 언플러그드 인 뉴욕(Unplugged In New York) >(1994)을 봤다. 그때 기타를 시작했다. 당시 동네에 ‘이제는 파실래요’라는 매장이 있었다. 모든 물건이 다 천 원이었다. 거기서 아버지가 12현짜리 기타를 사다 줬다. 그중 6줄만 껴서 연습했었다. (웃음) 손가락이 아파서 관둘까 하던 참에 일렉트릭 기타를 샀다. 줄이 되게 얇고 치기도 편하더라. 굉장히 열심히 연주했다.

처음부터 블루스의 길을 걸은 건 아니다.
시작은 당연히 록이었다. 친구들이 듣던 라디오헤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같은 록을 들었다. 어릴 때 한번은 서태지 솔로 2집인 < 울트라맨이야 >(2000)를 택시에 두고 내려서 울면서 뛰어다니고 그랬다. (웃음)

중학교 때 한 음악 동호회 정모에 나갔는데 어떤 형이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추천해줬던 기억이 있다. 기타는 페르난데스(Fernandes)가 좋다고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웃음) 그런데 집에 가서 추천받은 레드 제플린, 비틀즈, 크림(Cream)을 듣다가 문득 이 노래들의 기원을 어딜까 생각했다. 당시 자주 읽던 < 올뮤직(Allmusic) >에서 이런 음악들이 어디에서 왔다는 리뷰를 읽게 되었다.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음악을 알게 되었고, 롤링 스톤즈는 척 베리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임진모 선생님께서 쓰신 ‘비틀즈 VS 비치 보이즈’라는 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블루스로 넘어가면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통해서 공부했다. 말이 길어졌지만 어떤 뮤지션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되면서 블루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런 부분들을 많이 참고했다.

내가 블루스를 고집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없어서다. 델타 블루스가 좋은데,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크다.

록 음악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록 음악은 자본이 넘치고 넘쳐서 생긴 음악 중 하나다. 배부른 저항이지.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그걸 너무 필터링 없이 답습해왔다. 한국은 일본처럼 건전한 청년 문화 등 사회적 논의가 있지도 않았고, 본인들이 좋아하는 록스타들의 외형만 가져오곤 했다. 한국 록 시장은 팬들이 만든 시장이다. 자연히 그 팬들이 나이 들어가며 쇠퇴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에게 음악을 물려줄 만한 동력이 있지도 않고, 마니아 취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점도 있고. 뮤지션들도 음악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했다. 소수의 고급 취향처럼 남아있는 상황이라 본다. 

블루스 음악을 하는 하헌진의 경우는 어떤가.
블루스 음악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과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팬질’을 하고 있는 거니까. 아주 넓게 생각하면 에릭 클랩튼도 고전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열렬한 팬 아닌가. 그럼에도 프로라면 팬으로 출발했어도 시장과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고민해야 하는데 대부분 자기만족에서 머물고 만다. 한국에서는 유명해지면 모두 ‘연예인’ 아닌가. 

뮤지션 하헌진으로서 목표가 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사람과 음악이 일치되기 어렵지 않나. 진부할 수는 있어도 진정성 있고 진솔한 뮤지션으로 남고 싶다. 이 시대, 세대에도 블루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보여주고 싶다.

또 하나 중요한 목표가 로컬 아티스트로의 기능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공연을 하다 보면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한다. “프랑스에서 한국말로 블루스를 하면 너는 돈을 받고 음악을 한다.”라고. 처음에 그런 얘기를 들으면 혹하지. 하지만 차츰 여기서 자리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정착해야 다른 친구들도 이 나라에서 같이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 혼자 나가고 끝나면 곤란하다. 가뜩이나 델타 블루스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내가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으로 하헌진이 뽑은 ‘내 인생의 음반’을 소개해 줄 수 있나.
존 리 후커의 < The Country Blues of John Lee Hooker >(1959)를 2009년쯤 듣고 블루스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두 번째로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 Watertown >(1970)이다. 프랭크 시나트라 커리어 중 유일하게 오케스트라와 따로 녹음한 작품이고 슬픈 시골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앨범인데 고작 3만 장 팔려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은퇴하게 만든 앨범이다. ‘앨범은 이렇게 서사적인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배웠다.

세 번째 앨범은 그레이스 존스의 < Slave To The Rhythm >(1985)이다. 이 앨범도 콘셉트 앨범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드럼 머신과 끝없는 잼, 악기 연주 위 디스코와 덥(Dub)이 어지럽게 섞여 든다. < 나아진 게 없네 > EP를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비 행콕의 < Thrust >(1974) 역시 미니멀한 퓨전 재즈의 끝이라 좋아하고. 마지막으로는… 비치 보이스? < Pet Sounds >(1966)는 많이 꼽으니 < All Summer Long >(1964) 하겠다. 

인터뷰 : 신현태, 박수진, 임동엽, 김도헌, 장준환
사진 : 임동엽
정리 : 박수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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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8 쿠마파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덟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실험적인 재즈 힙합 밴드 쿠마파크다.

이들을 장르라는 단어로 국한할 수 있을까. 재즈와 힙합을 오가는 쿠마파크(Kumapark)는 색소포니스트 한승민(LAZYKUMA)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6인조 밴드로, 2013년 셀프 타이틀 정규 앨범과 2017년 < NEW TYPE > EP 등 흥미로운 작업물을 발표하며 재즈를 기반으로 구축한 단단하고도 오묘한 크로스오버를 선보였다. 여러 악기를 이용해 힙합, 소울, 디스코와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요소를 가미한 그들의 복합적인 음악은 타 아티스트들 가운데서도 단연 독보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다.

쿠마파크는 본인의 음악을 떠올릴 때 하나의 장르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느 한 곳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색다른 ‘멋’과 화려한 라인업에서 우러나오는 듣는 ‘맛’을 낳은 셈이다. 러브존스 레코드의 수장이자 재즈 힙합의 개척자, 쿠마파크를 만나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10월 공개 예정인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녹음에 참여했다. 작업 과정에서 중점에 둔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재즈와 힙합, 일렉트로닉을 하는 밴드다 보니 사운드가 어쿠스틱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흔히 말하는 트로트의 ‘뽕끼’를 좀 덜어내고 멜로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를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에 녹여낼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밴드의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이질감이 생길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색소폰뿐만 아니라 전자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신시사이저 피아노가 인상적이다.
색소폰이 멜로디 한 부분을 연주하면 다음 파트를 건반이 받는 식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도록 만들었다. 색소폰이 연주를 혼자 다 하게 되면 경음악 느낌이 강해질 것 같으니 이를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장치를 심어 놓았다.

원곡에 비애나 그리움의 무드가 있다면, 쿠마파크 버전의 ‘연안부두’는 낭만적인 밤바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유명한 노래다 보니 작업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더더욱 틀어서 가기로 한 것 같다. 원곡이 안 떠오를 정도로 최대한 다르게 가고 싶었다. 작업하면서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바꿔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다행히 부평 측에서 온전히 저희에게 일임한 덕에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천-부평에 대해서 남는 기억이나 추억들이 있다면.
작년 10월 부평에서 열린 ‘뮤직게더링 2019’에 참가한 적이 있다. 솔직히 섭외가 들어오고 무대 직전까지도 인천이나 부평이 문화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는 사실을 그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올라가고 보니 그 거대한 규모에 그때 부평이 뭔가 풀어나가려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처음 작업 제안을 받으셨을 때 프로젝트에 대한 인상이 어땠는지.
엄청 좋았다, 참신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공공 단체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아닌가. 우리나라의 문화 투자는 국악이나 클래식이나 다르게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는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제안해준 것 자체가 언더그라운드와 상생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되게 재밌는 경험이었다. 급하게 연락이 온 것만 빼면. (웃음)

지자체나 문화재단 등에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많다.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서 의견이 혹시 있다면.
이게 소문이 잘 퍼져서 기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은데 조금 편향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일을 관장하시는 분들이 직접적인 관계자를 고용해야 이 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실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다소 엉뚱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좀 있는 것 같다. 아티스트와 지자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이 있다면 좀 더 많은 뮤지션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까.

2013년 정규 앨범과 2017년 EP 이후로 공백 기간이 꽤 길다.
일단 멤버들이 이 밴드만 하는게 아니고, 다들 바쁘게 세션맨으로 활동하다 보니 한번 만나기도 힘들다. 작업은 거의 저랑 키보드 치는 친구가 곡을 같이 만들고 파일을 보내면 각자 집에서 받는 방식인데, 이게 빨리 될 수도 있는 방식이지만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방식이다.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곡이 지겨워져서 버리기도 하고, 중간중간 지향점이 조금씩 변경되기도 하고. 물론 시간이 좀 걸려도 작업은 계속 해오고 있다.

오래 기다린 팬들에게 요즘 근황을 간략하게 말해주신다면.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올스톱 됐다. 원래 클럽에서 연주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모든 게 멈춘 데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태다.

그 말에 동감이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프로젝트가 많았을 텐데.
최근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 때 광진구 문화센터 쪽에서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라이브 셋’이라는 야외 공연의 제안이 왔다. 선우정아를 포함한 몇 팀이 공연하기로 했는데, 이 것도 지금은 바로 취소가 됐다.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경우 코로나 사태를 대비해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혹시 온라인 공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서 재미없다. 합주실에서 우리끼리 연습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원래 라이브는 좀 틀리고 부정확하더라도 분위기나 무드에 맞춰가며 와일드 하게 연주하는 맛이 있는데, 아무래도 관중의 반응이 없으니 좀처럼 흥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연습하듯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쿠마파크의 음악은 미국 힙합 프로듀서에 대한 존경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다. 힙합 마니아들에게는 힙합 쪽으로, 또 재즈 팬들에게는 또 재즈 쪽으로 각인되는 것 같다.
우리가 참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이,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힙합으로 보기도 하고 반대로 힙합 페스티벌에서는 재즈 밴드로 보는 경우가 있다. 첫 작품은 따로 정의한 건 없었는데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스타일의 재즈가 많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고, 두 번째 EP는 재즈 요소를 많이 뺀 인스트루멘탈 힙합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부평문화단체 LP에서 수록되는 음원은 좀 더 일렉트로닉한 느낌이다. 요즘에는 일렉트로닉한 성향의 신시사이저를 많이 활용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리더다 보니 최근 듣는 음악에 따라 스타일이 오가는 편이다.

그렇다면 최근 즐겨 듣는 아티스트는.
플로팅 포인츠(Floating Points)와 톰 요크(Thom Yorke) 솔로 앨범. 약간 미니멀한 쪽의 신시사이저가 들어간 그런 일렉트로니카를 자주 듣는다. 다음 차기작에 접목해볼까도 생각 중인데, 아무래도 밴드 성향이 흑인음악 쪽이다 보니 어떻게 ‘조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은 밴드가 재즈와 힙합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표현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하이브리드의 개념이 아닐까.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인스트루멘탈 힙합 밴드에 대해 낯설어 하는 감이 있다. MC가 없고 비트만 있는 힙합은 인기가 조금 없지 않나 싶다.

러브존스 레코드(Luv Jones Records)라는 레이블을 독립적으로 설립해 활동 중이다.
어릴 때는 음악을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 레이블이나 크루 같이 음악을 직접 하지 않아도 음악 관련 일을 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점차 그 쪽 관련 지인도 만나게 되면서 하기로 마음을 먹고, 에반스 사장님과 함께 만든 것이 러브존스 레코드의 시작이었다. 도중에 사장님이 다른 일로 옮기게 되면서 우리끼리 남아 해보겠다 말씀드렸다.

레퍼런스로 둔 곳이 있다면.
레이블보다는 오케이 플레이어(Okayplayer) 같은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한 밴드나 네오 소울 같이, 요즘 유행하는 힙합보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시대의 힙합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큰 움직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2010년대 말, 힙합 신에서 커뮤니티의 개념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확실히 선조격인 느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쿠마파크는 게스트 협업을 굉장히 많이 한 케이스기도 하다. 기억에 남는 협업이나 아티스트가 있는지.
누구 하나 기억에 안 남는 사람은 없는데, 처음 같이 작업하기도 했고 제일 접점도 많았던 팔로알토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다른 분들은 발매 공연까지만 같이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팔로알토는 저희 첫 앨범부터 EP까지 같이 한데다 케미도 잘 맞는 편이라 그 친구 곡을 저희가 연주하기도 하고, 하이라이트 공연에는 아예 저희가 게스트 밴드로도 참여도 했었다.

팔로알토 뿐만 아니라 김아일, 가리온, 소울다이브, 지투, 저스디스 등과 함께 작업했고, 크러시와는 ‘밥맛이야’에서 호흡을 맞췄다. 확실히 힙합으로 단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다.
앨범 내에도 보컬과 연주 트랙이 나뉘어질 만큼 어느 하나에 주력하기보다 개개인에게 분산되는 팀이라 협업에 있어 수월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작년까지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올해는 레이블 단위 활동은 줄어든 모습이다.
원래 소속 아티스트가 많이 있었는데 수민처럼 다른 곳으로 가거나, 군대나 시집을 가는 식으로 전부 흩어지는 바람에 지금 레이블에 있는 실질적인 아티스트는 쿠마파크 뿐이다. 앨범을 내고 그 후에 다시 레이블을 움직일 생각이다. 코로나 때문에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밴드는 서로 의견이 엇갈리거나 여러 이유에서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쿠마파크는 2017년 활동 멤버 그대로 팀이 유지가 잘 되는 편이다. 팀워크에 따로 비결이 있는지.
오히려 맨날 붙어 있으면 싸우게 되는데, 오랜만에 한 번씩 보고 하니까 팀이 안 깨진다. (웃음) 사실 말도 안되는 밴드인게 보컬(김혜미)은 지금 재즈만 하고 있고, 베이스(구본암)는 세션맨이지만 자기 음악을 따로 하는 친구다. 건반(황득경)은 싱어송라이팅을 하는 데다, 드럼(김영진)은 지금 ‘윤석철 트리오’에서 활동 중인데, 재즈 신의 제일 바쁜 드러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와서는 힙합을 하고 있다.

물론 밴드를 만들 당시 재즈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힙합음악을 연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만든 거지만,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다른 팀들하고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거기서 오는 시너지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내 욕심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지 고민도 했지만, 근데 또 다들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 깔려 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쿠마파크는 팀이기도 하지만 브랜드이기도 한데, 어떤 음악을 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일단 재즈 밴드다. 힙합도 하지만 재즈를 기반으로 한 다른 장르를 그때 그때 가지고 와서 변용을 한다. 물론 흑인 음악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여러 재밌는 시도를 많이 하려고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국악인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생황이라는 악기를 처음 봤는데,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 악기로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쿠마파크를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했으면 하나.
쿠마파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장르가 아닌 이미지나 그림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는데 얘네 음악은 이런 ‘느낌’이더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음악에는 어떻게 빠지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음악을 하기 전에 힙합 리스너였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주말에는 빌보드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 곡을 틀어주는 날이 있었는데, 그 때 맨 위에 차트들이 힙합이었던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반이었기에 미국에 사시는 어머니 친구분께 부탁드려 닥터 드레와 투팍, 스눕독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의 앨범을 소포로 받아 듣곤 했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음악을 찾아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즈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그렇다. 서울대입구 쪽 제가 자주 다니던 사계 레코드라고 아트록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 이였는데, 가게에 들어가면 청바지 쫙 달라붙고 느끼하게 머리를 기른 형이 음악을 추천해주곤 했다. 중3 이었나, 거기서 계속 힙합, 소울, 알앤비만 듣고 있으니까 주인 아저씨께서 그럴거면 재즈도 들어야 된다면서 한 음반을 알려줬다. 그 앨범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였는데, 집에 사 들고 오게 되면서 재즈에 빠지게 됐다.

재즈하면 색소폰이지만, 많고 많은 악기 중 색소폰을 하게 된 경위가 있는지.
색소폰은 정말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원래 미대를 가려고 미술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실용음악과가 가고 싶은 거다. 그 때 꿈이 힙합음악을 하는 토이였다. 힙합 프로듀싱을 내가 직접 해서 래퍼와 보컬을 초빙해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엄마한테 미술 다 때려 치고 음악하겠다 했을 때는 엄청 혼났다. 갑자기 무슨 음악이냐고.

그렇게 작곡 공부와 레슨을 받으면서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시험을 보려고 했다. 근데 서울은 작곡가 시험을 보려면 악기가 필요하다는 거다. 당시 나는 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고, 컴퓨터 미디나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작곡을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야, 색소폰 하는 사람이 없어. 기타는 쌔고 쌔서 잘 쳐야 되는데 색소폰은 좀만 불면 합격이야.”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웃음)

마지막 질문, 지금의 나를 만든 베스트 앨범을 뽑는다면.
재즈 중에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 ‘Round About Midnight >, 그리고 힙합에서 가장 좋아했던 앨범은 피트 락과 씨엘 스무스(Pete Rock & CL Smooth)의 < The Main Ingredient >다. 웨스트 코스트의 지훵크(G-Funk)나 이스트 코스트의 붐뱁만 듣다가 처음으로 재지한 샘플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접하게 된 순간이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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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7 이정선 X 윤병주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일곱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포크의 대부 이정선과 블루스 대표 주자 윤병주다.

정확한 수식인지 모르지만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로 음악인구에 회자되는 이정선 그리고 블루스 하면 떠오르는 뮤지션 윤병주를 함께 만났다. 근래 윤병주가 이끄는 프로젝트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은 막 ‘항구의 밤’이라는 곡을 원곡의 주인공 이정선과 함께 녹음했다. 10월에 발표할 음원을 미리 들어봤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귀를 잡아끈다.

이정선이 오래전 내놓은 곡을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을 위해 새로이 편곡해 레코딩한 것이다. 이 기획은 대중음악의 발상지라고 할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동시에 인천 부평 지역 뮤지션들을 찾아 음원제작으로 연결하는 ‘글로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밴드 ‘지인들’의 멤버 중 한 명도 이곳 인천 출신이다.

이들의 조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윤병주와 지인들은 전에도 이정선의 곡 ‘거리’와 ‘우연히’를 리메이크해 싱글로 낸 바 있다. 얼핏 음악적 관련성이 떨어져 보이는 둘의 연(緣)이 어떻게 맺어진 건지 궁금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재미있게’ 음악을 하려는, 어쩌면 음악가의 기본을 강조하며 음악 녹음의 즐거움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이정선의 곡인 ‘항구의 밤’을 녹음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정선이 직접 노래까지 했는데… 그 많은 곡들 가운데 왜 하필 ‘항구의 밤’을 고른 건가?
윤병주: 사실 애초 (이)정선 형의 곡들 중에서 딱 그 곡을 원했던 건 아니다. ‘바닷가의 선들’도 있고 기존에 내가 해오던 블루스, 록적인 색채를 잘 살릴 수 있는 형 노래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색다른 도전이었다고 할까. 안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도 직접 해보면 결국 우리 음악의 맛이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다고 본다. 부평구문화재단 기획대로 인천이 항구라는 점도 생각했고…

‘항구의 밤’이 어떤 곡인지 알려 달라.
이정선 : 이 곡은 1990년에 나온 앨범 < 雨 >에 수록되어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단출하게 어쿠스틱 기타 하나 가지고 만든 노래였다. 이번에는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과 함께 하는 만큼 더 리얼하게 항구의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다. 시끄러운 선술집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복작복작한 느낌?…

원곡이 슬픈 감정을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번 음원의 보컬은 상대적으로 밝게 느껴진다.
이정선 :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원래 즐거울 때가 더 슬픈 거 모르나? (웃음) 원래 ‘항구의 밤’이 그렇게 슬픈 노래는 아니다.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을 담고 있다.

윤병주 : 오랫동안 이정선 음악을 들어 왔다. 어릴 때 들은 정선이 형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근래 공연에서 받은 느낌은 또 다르더라. ‘항구의 밤’에서의 보컬은 뭐랄까… 또, 또 다른 제3의 보이스컬러였다. 확실히 정선이 형 연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깊이가 존재한다. 젊을 때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있었다면 나이가 쌓인 지금 옛 노래를 부르니 맛이 또 다를 수밖에…

‘항구의 밤’에 블루스의 터치가 강하게 느껴져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얼핏 윤병주와 이정선 간에 음악적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한국에서 블루스를 밴드 명으로 내세우며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표방한 게 바로 엄인호와 정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촌 블루스’ 아닌가?
이정선 : 1970년대 초에 음악을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다. 시작은 그렇게  재미였는데 한 10년 쯤 음악계에 있다 보니 바로 그 재미가 사라졌다. 다 돈과 연결되니까 즐거움을 좇으며 활동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엄)인호를 만나서 그냥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재밌게 음악 한번 해보자’ 하면서 음악 동호회 느낌으로 ‘신촌 블루스’를 만든 것이다.

그래도 당시 블루스를 내걸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정선 : 공연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카페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주로 놀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 관심 있는 장르도 다르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좁히고 좁히다 보니 블루스만 남더라. 그래서 블루스를 했다. (웃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게 블루스는 늘 편한 음악이다. 어렵게 만들고 싶으면 어렵게 만들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쉽게 만드는. 어떻게 해도 내 음악적 뿌리는 늘 블루스에 닿아있다. 많은 분들이 나를 포크로 연관 짓지만 실은 블루스다.

윤병주는 이름만 들어도 즉각적으로 블루스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윤병주 : 블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음악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젼 시기, 그러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 음악이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블루스에 영향받은 록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연주를 하면 블루스적인 게 늘 풍겨 나온다. 그만큼 내 몸에 블루스가 배어 있다.

‘노이즈가든’을 거쳐 ‘로다운 30’ 그리고 새 프로젝트인 ‘윤병주와 지인들’ 역시 블루스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윤병주 : 물론 멤버 변동이 있긴 했지만 ‘로다운 30’은 함께 모여 작업을 시작한 게 2000년이다. 반면 ‘지인들’은 멤버들 각자 밴드들인 ‘소울트레인’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관계가 조금 더 느슨하다. 그룹의 모태는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다. 1960년대 활동한 미국 밴든데 그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한다. 블루스도 하고 잼도 계속한다. 요즘 미국 쪽을 보면 결국 다 잼과 루츠(Roots)록 쪽 음악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우리도 비슷하다. 다 내려놓고 실컷 연주나 해보자 싶었다. 정선이 형 곡 하나로 무대에서 십 분씩 연주하고 그랬다.

‘지인들’을 통해 꼭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윤병주 : ‘로다운 30’은 당연 창작 곡이라면 ‘지인들’은 커버(Cover). 즉 기성곡을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원래 커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커버를 녹음해서 발표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안 해본 거라는 것에 끌렸다고 할까. ‘항구의 밤’(10월에 발매 예정)도 그렇고 올해 초 제작한 ‘거리’, ‘우연히’가 모두 이정선 선생님의 곡이다.

윤병주가 리메이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땠나?
이정선 : 뭐 좋았다. (웃음) 근데 ‘거리’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나 싶긴 했다. 이게 내 정규 1집 < 이정선 1집 >(1974)에 수록된 곡인데 그 음반이 나오자마자 딱 금지가 됐다. 11곡 중에서 9곡인가가 금지됐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한데…
이정선 : 병주가 참 맛있게 기타를 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노이즈가든 때의 윤병주가 회상될 만큼 ‘윤병주스러운’ 기타 톤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노이즈가든을 알았느냐 물으니)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부터 음악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윤병주 : ‘거리’를 녹음할 때 정선이 형이 피처링에 참여해주지 않으실 걸 대비해 다른 버전의 연주까지 다 맞춰 뒀었다. 이 곡을 커버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형이 함께해주길 바랐는데 다행히 흔쾌하게 승낙해주셔서 고마웠다. 늘 외국 팝을 듣던 내게 국내 블루스 음악의 강렬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니까 여러모로 뜻깊기도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윤병주 : 2011년 즈음, 한 레이블의 축하 연주를 ‘로다운 30’하고 정선이 형이 같이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만나서 ‘건널 수 없는 강’, ‘우리네 인생’, ‘우연히’, ‘오늘 같은 밤’을 포함해서 네 다섯 곡 정도를 함께 했다.

함께 작업하는데 음악적 트러블은 없었는지?
이정선 : 합을 많이 맞추려고 하면 더 틀려진다. (웃음) 요즘 시대는 어지간한 비트가지고서는 세다고 느끼지 않지 않나. 그래서 나는 윤병주와 지인들이 기타나 리듬을 더 강하게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엔지니어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안 싸우려고 그냥 뒀다. (일동 웃음)

윤병주는 이정선과의 작업이 주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윤병주 : 내가 처음 팝을 들은 게 초등학교 때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 롤링스톤 >같은 외국 록 잡지를 보셨고 그 영향으로 나도 < 월간 팝송 >을 끼고 살았다. 그랬으니 우리나라 밴드 음악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겠나. 그러다 우연히 정선이 형의 최신 음반을 사서 듣게 됐는데 형이 자주 하는 말처럼 한국적인 ‘뽕’스러움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다. 지미 페이지 연주에서나 나오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블루스가 솟아 나왔다. 그 이후로 정선이 형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다.

편곡 과정은 수월했나?
병주 : ‘항구의 밤’은 형이 무대에서 종종 연주하기도 하는 곡이다. 특히 < EBS 스페이스 공감 >이나 < 온스테이지 > 영상이 좋다. 그 질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녹음도 빨리 끝난 편이다.

이번 음원제작은 부평구문화재단 기획의 일환이다. 많은 지자체나 문화재단들이 공공재원으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할 건 없는지 말해 달라.
이정선 : 좋은 기획이고 재밌는 프로젝트다. 나는 공공 재원으로 음악 신을 지원하는 사업을 좋게 보고 있다. 다만 음악에 대한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늘 최선을 다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색을 잃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간섭이 전혀 없어서 좋았다. (웃음)

함께 작업하면서 선배에게 배운 것이 있었을 텐데…
윤병주 : 정선이 형은 항상 음악을 “재밌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곁에 있으면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또 하고 싶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내 음악이 지금 이 시대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안절부절 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늘 지금에 행복할 수 있는 마음. 20, 30년 후에 정선이 형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갖고 싶을 만큼 많은 걸 배웠고 또 영향을 받았다.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선희
사진 : 임선희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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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6 리듬파워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자·타칭 ‘인천의 아들’ 리듬파워다.

안주하지 않는 자세와 자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끈끈한 우애가 돋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힙합이란 꿈을 함께 좇은 리듬파워의 시작은 탄탄대로였다. 처음 쓴 자작곡으로 굵직한 오디션을 한 번에 통과하는가 하면 200:1의 경쟁률을 뚫고 다이나믹 듀오가 수장으로 있던 < 아메바 컬쳐 >에 들어갔다. 이후 이들이 세상에 확실한 카운터펀치를 날리기까지 자그마치 7년의 시간이 걸렸다. 특유의 재치 있는 가사와 에너지를 쏟아냈지만 대중의 너른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29. 멤버 보이비의 입대까지 겹치며 리듬파워는 정체기를 마주한다.

3년에 걸쳐 매회 출연한 < 쇼미더머니 >는 멤버 행주의 말에 따르면 애초 퇴로가 없는 ‘유일한 선택’이지만 결국은 회심의 일격이 됐다. “우린 놀러 나간 게 아니었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 얼마 전 오랜 시간 함께한 < 아메바 컬쳐 >를 나와 < 팀플레이 뮤직 >을 직접 설립한 그들에게 지난날의 소회 그리고 앞으로 밟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막 2막을 연 리듬파워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얼마 전 10년간 함께한 소속사 ‘아메바 컬쳐’에서 독립했다.
행주 : 설렘 반, 아쉬움 반이다. 소속사를 나오면서 멤버들끼리 ‘팀플레이 뮤직’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옛날에는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니 설레는 마음이 들더라. 반면, 아메바 컬쳐에서 10년, 무려 10년간 있으며 쌓인 어마어마한 정 때문에 아쉬움도 컸다.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마음이 좀 이상했다.

회사 설립은 오래전부터 꿈꿨던 건가?
보이비 :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다. 우리들끼리 뭔가 해보는 것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스텝 중 하나가 회사였다. 장기적인 커리어를 봤을 때 계속해서 형들(아메바 컬쳐의 설립자이기도 한 다이나믹 듀오)과 함께하는 게 좋을까 자립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해왔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쯤 의견을 확실히 모았고.

팀플레이 뮤직에서의 활동은 아무래도 과거와는 다를 것 같다.
지구인 : 아메바 컬쳐에 있을 때는 회사의 규모도 크고 색이 뚜렷하다 보니 즉각적인 아이디어 실현에 제약이 있었다. 우리끼리 해보려한 이유들 중 아이디어를 흐름대로 속도 있게 가져가 보자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행주 : 대중들 입장에서는 ‘쟤네가 왜 나왔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냥 우리 곡을 들려주고 싶다. ‘아 이런 음악을 하고 싶어서 나왔구나’ 알 수 있을 거다. (웃음)

음악 스타일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는 건가?
보이비 : 따지고 보면 예전에도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어떤 대중적인 노선이 고려됐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달려졌지 않나. 우리도 이제 막 시작해서 예측에 머물긴 하지만 곡 단위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 같다. 어떤 곡은 엄청 대중적이고 또 어떤 곡은 엄첨 비대중적이고. 중간노선은 잘 안 걸을 것 같다.

행주 : 때마침 오늘 ‘팀플레이 뮤직’의 첫 싱글들이 발매된다. ‘Anycall’과 ‘T3AMPLAY’. 우리의 첫 출사표이자 자영업자의 포부를 담았다. 우선은 이 곡들을 즐겨 달라. (웃음)

싱글에 대한 소개를 조금 더 해준다면?
보이비 : ‘T3AMPLAY’는 회사 이름과 동명이다. 대찬 포부를 선전포고하는 느낌? 이 곡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Anycall’은 과거다. 10대 후반부터 20대에 겪은 것들이 한 사람의 취향에 많은 부분 영향 미친다. 그 시절이 우리에게는 넵튠스(The Neptunes)다. 항상 넵튠스의 클럽튠이 가슴 속에 남아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아 이 스타일은 아직 아무도 안 했지 싶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사운드에 더 중점을 둬 작업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다. 각자가 기억하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있을 것 같은데.
지구인 : 처음 공연했던 2008년. 우리끼리 그냥 인천 술집에서 언젠가 공연해보자는 말만 하다가 처음으로 UMF(Underground Microphon Federation) 오디션에 나갔다. 팔로알토, 피타입, 슈프림팀 등이 거쳐 간 나름 큰 공연 브랜드다. 23살쯤이었는데 긴장해서 어떻게 무대를 끝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웃음) 홍대의 수 노래방 쪽을 걸어가다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기뻤다. 돈이나 명예는 지금 훨씬 많이 가졌지만 ‘기쁨’의 크기는 그때가 제일 컸던 것 같다.

행주 : 곡을 만든 것도 처음이었고 셋이 합을 맞춰서 무대에 선 것도 처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경으로, 젊음의 패기로 무작정 공연했다.

보이비 : 데모 파일명을 그대로 노래 제목으로 썼다. ‘빅바운스’. 내 첫 소절은 ‘Make it rain(돈을 뿌리다)’ 였다. (일동 웃음)

행주 : 난 아메바 컬쳐와 첫 도장 찍었을 때다. 그전까지는 그저 방구석에서 곡 만들고 이유 없는 자신감만 있었다. 그때 회사 오디션 경쟁률이 200:1 정도라고 들었다. 그냥 무작정 부딪혔고 바로 뽑혔다. 솔직히 왠지 모르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긴 했다. (웃음) 다이나믹 듀오 형들은 힙합 신에서 최고의 우상 같은 존재인데 그 사람들이랑 계약하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홍대 멀티샵에 가서 각자 티 하나, 모자 하나씩 사고 부모님한테 돈을 보내드렸다. 만화의 한순간이지 않나.

높은 경쟁률을 뚫을 수 있던 이유가 뭘까?
지구인 : 형들이 군대에서 국군 방송 라디오를 진행했다. 당시 우리는 EP 하나를 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슬슬 이름이 알려질 때였는데 형들이 우리를 게스트로 초대했다. 목이 터져라 라이브를 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보이비가 꼽는 변곡점은?
보이비 : 군 입대. 솔직히 기존에 냈던 EP 두 장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음악적인 성과도 미비하지 대학 졸업도 못 했지 나이는 29이지. 팀을 그만두거나 해체할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한 명이 군대를 가야 하는 거니까 여러모로 각성이 많이 됐다.

행주 : 보이비가 군대를 갔을 때 처음으로 < 쇼미더머니 > 출연을 생각했다. 절실함을 넘어서서 다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컸는데 그걸 나도 그렇고 보이비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 계기 및 발판이 보이비의 입대다.

지구인 : 친구 관계는 계속 가겠지만 어쩌면 리듬파워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보이비 군대 들어갈 때 셋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 쇼미더머니 >로 변화를 좀 만들어보자 했는데 결론적으로 좋은 한방이었다.

< 쇼미더머니 >가 리듬파워 성장에 큰 활력을 줬다.
보이비 : 군 제대 하고 나는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뒤도 보지 않고 올라갈 길만 남았다 그렇게 믿고 했다.

행주 : 개개인으로 봐도 팀으로도 봐도 < 쇼미더머니 > 출연은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래퍼들이 ‘놀러 나왔다’ 이렇게 인터뷰를 종종 했는데 우리는 아니었다. 그런 거와는 달랐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구인 : 쿨한 척 하고 싶지 않았고 매 방송에 진지하게 임했다. 방송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봤을 때도 래퍼를 내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행사를 가면 불특정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었다면 이제는 아니다. 어딜 가든 우리를 아는 사람들 앞에 선다. < 쇼미더머니 >가 확실히 우리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줬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은 각별하다. 그들 스스로 몇몇 인터뷰에서 ‘인천의 아들’이라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고 실제로 2년 간 인천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특히나 그들은 한국 힙합에서 그간 지양되어 온 지역 색을 음악에 반영하는 이른바, ‘샤라웃(Shout out)’을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선도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을 회상하는 ‘바보언덕’, 동성로에서의 일탈을 그리는 ‘동성로’, ‘인천 출신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 노래하며 래퍼로서의 자부심을 다지는 ‘인천공항’ 등에서 그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행주와 지구인은 중학교, 보이비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걸로 안다. 어렸을 때부터 다 같이 힙합을 들었던 건가?
지구인 : 중학교 때 서태지에 엄청 빠져있었다. 서태지가 랩 메탈을 우리나라에 가져오지 않았나. 그 노래들을 듣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고 이후 림프 비즈킷, 린킨 파크의 음악을 밤새 팠다. 그러다 고2때 린킨 파크가 내한을 왔는데 힙합을 좋아하던 보이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거기에 행주까지 합류하게 됐고.

행주 : 힙합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건 거의 전부 이 친구들의 영향이다. 나는 그냥 음악을 듣고 부르기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남들이 쭈뼛쭈뼛할 때 제일 먼저 손들고 앞에 나가서 소리 내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우리 때는 힙합이 제일 비주류였는데 옆에 힙합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들이 나서길 좋아하는 나와 자연스레 맞아떨어졌다.

지구인 : 20살이 돼서는 행주가 학교를 빠지고 내가 있던 신촌으로 넘어오면 다 같이 향뮤직에 출근하다시피 갔다. 한두 시간 동안 거기서 음악 듣고 고르고 고른 CD 한두 장 사서 인천에 오고 그랬다. 인천이 방이 되게 싸다. 연습실이 없으니까 한 명이 CDP를 들고 오고 인천에 방 하나 잡아서 랩하고 가사 쓰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진짜 좋지 않을까 얘기도 자주 나눴다. (웃음)

가사나 뮤직비디오에 인천이 자주 등장한다.
보이비 : 어린 시절 우리가 듣고 자란 힙합은 늘 자기의 지역색을 반영했다. 자기가 살아온 곳을 샤라웃하는 거다. 래퍼들이 자수성가해서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게 자연스러운 특성이었다면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었다. 그걸 거의 우리가 처음 했을 거다.

행주 : 2010년에 EP < 리듬파워 >를 냈다. 거기 보면 ‘인천상륙 작전’이라는 곡이 있는데 그걸 쓸 때쯤 아 우리나라 래퍼들은 자기 지역 얘기를 잘 안 하네 깨달았다. 힙합하면 홍대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자연스레 씬들도 홍대에 집결돼 있었다. 우리가 먼저 아이덴티티를 꺼내야겠다는 본능이 있었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이란?
지구인 : 요즘은 힙합씬에서 자기 출신을 밝히는 게 많아졌다. 창모도 그렇고 제이통도 그렇고. 동료 뮤지션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우리의 샤라웃에 영향 많이 받았다고 말할 때 자부심이 든다. ‘바보언덕’, ‘인천공항’, ‘동성로’ 등 인천에 관한 곡들도 많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이 인천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큰 음악적 영감이 된 건 확실하다.

행주 : 사실 한국에서 음악에 지역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곳으로 부산을 종종 떠올리는데 인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뱃사공이나 슬리피도 다 인천 출신이다. 2017년부터 2년간 리듬파워가 인천 홍보대사를 했다. 이거 한다고 해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엄청 큰 뿌듯함을 느낀다. 현실적으로 보면 누군가에게 혹은 인천에게 멋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홍보대사를 맡긴 게 아닌가. 10년 뒤에도 인천 홍보대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만의 커리어를 밀고 나가고 싶다.

10년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지금 위치에 만족하는 편인가?
보이비 : 전혀 아니다. 아직도 올라갈 곳이 엄청 많이 남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지만 불과 재작년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재정적인 여유도 있고 삶에 안정감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거기서 나왔다. 조금 더 바깥세상에 발 디딤으로써 시쳇말로 올라가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로 가보자 했다. 전 회사에 계속 남았다면 안정적으로 오래 머물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가진 못했을 거다.

지구인 : 돌이켜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환경의 변화가 컸다. 늘 어떤 공간에 우리를 밀어 넣었다. 큰 성공을 하면서 말년병장의 나태함이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딱 좋을 시기였는데 이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2막을 열어서 치고 올라가야 한다. 또 보니까 딱딱 계획 세운 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얼추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 더 높은 정점을 꿈꾸고 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일단 해보려 한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지구인 : 우리가 떼창을 진짜 잘 뽑아낸다. 그걸 보여줄 수 있게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꽉 채운 단독 콘서트를 열고 싶다. 아님 DJ DOC 형들이나 싸이 형이 한 것처럼 풀 파티도 해보고 싶고.

보이비 : (왜 풀 파티냐고 묻자) 그 시대에서 제일 신나는 음악을 하는 팀이 되고 싶다.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도 풀 파티를 했었다. 베이스는 힙합이지만 여기 가면 제일 신나게 놀 수 있는 파티 넘버원 콘서트.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좀 다르지만 합쳐지면 터지는 어떤 시너지가 있다. 유쾌하고 강한 에너지라고나 할까. 그걸 한껏 보여주고 싶다. (웃음)

각자의 베스트 음반도 궁금하다.
행주 : 팔로알토 형의 언더그라운드 시절 앨범들을 다 좋아한다. 처음으로 돈 주고 산 외국 앨범은 에미넴의 < Curtain Call >. 그의 히트곡만 모아 놓은 음반이다. 래퍼로서 색을 잡게 도움 준 뮤지션은 푸샤 T고 또 요즘은 윤종신 선배님의 행보를 롤 모델 삼고 있다.

보이비 : 2003년에 MBC < 음악캠프 >에서 렉시의 ‘Let me dance’ 무대를 봤다. 그때 테디(Teddy)가 피처링이었는데 그 모습에 홀딱 반했다. 톤이며 랩이며 퍼포먼스며 다 그냥 아주 끝내줬다. 또 꼽자면 대학교 때 힙합 동아리 방에서 나스(Nas) 곡에 피처링으로 등장하는 루다크리스를 우연히 보고 그의 플로우 디자인과 발성을 따라 하다 목이 맨날 쉬기도 했다. (웃음) 인간적 매력이나 가사 쓰는 스타일에는 제이 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구인 :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자면 린킨 파크 1집 < Hybrid Theory >, 림프 비즈킷 2집 < Significant Other >가 있고.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 싱크, 웨스트 라이프도 되게 좋아했다. 맥스 마틴 특유의 그 팝스러운 곡들이 취향에 맞았다. 힙합은 다이나믹 듀오의 < Taxi Driver >, 제이 지의 < The Black Album >, < The Blueprint >…. 여기 까지만 할까요? (일동 웃음)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동엽, 조지현, 장준환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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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5 박기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그리고 베테랑 가수 백영규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노래 잘하는 가수 박기영이다.

박기영은 노래를 잘한다. 잘해서 1997년 데뷔 이래 히트곡이 많다. ‘시작’ ‘마지막 사랑’, ‘Blue sky’, ‘산책’, ‘나비’, ‘그대 때문에’, 그리고 영화 <시>의 ‘아네스의 노래’와 ‘넬라 판타지아’ 등등 꽤 여러 노래가 떠오른다. 동시에 TV 오디션 형식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오페라스타>,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등에 나와 과시한 돋보이는 가창력도 기억된다. 하지만 박기영은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먼저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인터뷰 중 짧은 몇 마디에 ‘싱어 유전자’가 느껴질 정도.

코로나 시국에 최근 다시 유튜브 활동에 돌입한 것도 ‘노래는 쉬지 않는다!’라는 사고의 발로다. 그는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고 했다. 당연히 음악에 대한 감사함이 내재화해 있다. 고교 방송반 활동이 자랑스러웠다는 그는 인천이란 연고가 많은 음악적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음악 관련 대화를 즐거워했다. 어떤 질문에도 조금의 막힘이 없이 답을 풀어냈다. 그는 가수로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23년이 된 가수 활동을 하면서 사이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팝페라 시도일 것 같다.<불후의 명곡>의 ‘넬라 판타지아’ 영상을 보고 ‘박기영 맞아?’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중가수가 오페라 영역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특별한 계기가 있나?
2012년에 tvN<오페라스타> 출연한 것이 결정적 계기이다. 음악적 도전이기도 하고 그때 <오페라스타>가 뜨거운 반응을 얻을 만큼 매우 핫(hot)했다. ‘시즌 1’이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왜 나를 안 불렀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하고 싶어서 ‘시즌 2’ 출연 연락이 오자마자 바로 ‘오케이’했다. 당시 많은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이왕 한다면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다.

자작곡을 시도한 지난 2000년의 3집 ‘Blue sky’와 팝페라 시도의 음악적 쾌감을 비교한다면
20대는 알 수 없는 치기가 앞섰다. 굉장히 열정적이지만 근원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도취해 있다. 나중 그게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깨쳤을 때 엄청난 좌절을 경험했다. 데뷔해서 좋은 반응을 얻어 바쁜 삶을 보내게 됐을 때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하는 정체성 혼란이 왔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조차 던질 여유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기영 하면 떠오르는 곡들, 이른바 히트곡이 그 당시의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넬라 판타지아’의 음악적 기쁨이 더 컸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어릴 때는 음악을 ‘안다’ 보다 ‘어쩌다 보니 했다’의 느낌이 더 컸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십억을 줘도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대면 콘서트가 다시 일상화되면 공연에서 과거 히트곡들은 안 부를 건가
나를 기억해주는 곡들인데 당연히 한다. 대중의 니즈니까. ‘넬라 판타지아’도 대중의 니즈 중 하나이다. 아마 사라 브라이트만 언니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할 것이다. (웃음) 원곡자보다 영상 조회 수가 높으니 말이다.

박기영의 히트곡들에 성악적 요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넬라 판타지아’가 놀랍다. 어렸을적 성악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전혀 없다. <오페라스타> 하기 이전에는 성악의 성자도 몰랐다. 다들 어렸을 때 배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심지어 성악가 김활란 선생님과 같이 공연을 했는데 대기실에 오셔서“솔직히 말해봐. 원래 했지?”라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당시에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대중가수가 팝페라로 도전한 경우는 드물어서 ‘내가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록, 발라드, 재즈, 팝페라, 포크 등 추구한 장르가 다양하다. 장르에 대한 왕성한 식욕이랄까. 박기영의 특장인데 또 그중 하나로 ‘어쿠스틱블랑’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오페라스타>로 성공했을 때 아이가 생겨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애착육아를 하면서 아이에 전념하는 시기를 보냈고 음악을 하려면 혼자 곡도 쓰고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질 못했다. 음악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과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라이브 앨범도 냈는데
현재진행형 뮤지션이라는 뜻이다. 스튜디오 라이브의 경우, 국내에서 최초로 PA 스피커 없이 진행했다. 녹음실에서만 접할 수 있는 섬세한 사운드를 공유하고 싶어서 스튜디오에 관객을 초대하여 공연을 선보였다. 관객은 헤드셋을 끼고 제 노래를 듣는데 숨소리까지 들려서 다들 깜짝 놀라시더라.

한번은 팬분들께 단독 콘서트와 스튜디오 라이브 중 어떤 것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았는데 스튜디오 라이브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스튜디오 라이브를 취소 했는데 내년에는 꼭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프로그램 출연과 어쿠스틱블랑, 라이브 등 쉼 없이 꾸준하게 활동한다.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아니다. 쉰 적 은근히 많다. 20대는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쉬기도 했다. 잠시 잊혔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딸을 낳고 키우면서도 팬들 머릿속에 사라질 수 있었다. ‘어쿠스틱블랑’을 한 이유가 바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

약 20년 넘는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모멘트를 짚어본다면
일단 처음 1999년 ‘시작’과 ‘마지막 사랑’은 대중이 나를 인식해주신 감사한 시기이자 아까 말했듯 너무나도 정신없던 시기이다. 4년이라는 공백을 마친 후 오랜만의 활동인 ‘나비’와 ‘그대 때문에’가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다음은 2010년 7집 앨범의 ‘빛’이 타이틀이었는데 쫄딱 망했다. 이때 당시 가요계가 음반을 내면 손해인 분위기였다. 갈팡질팡하던 때를 지나 ‘아네스의 노래’로 다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 <오페라스타>와 크로스오버 앨범을 뽑을 수 있겠다.

‘아네스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5, 6집이 여러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7집이 이에 비해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간 달라진 음악 시장을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음악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접을까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찰나, 연락이 왔다. 지금은 종영한 <대한민국 영화대상>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는데 OST가 없다고,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을 소재로 하였으니  OST를 만들고 영화제 축하 무대에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너무 멋있어서 바로 ‘오케이’ 했는데 영화제가 3주 남은 시점이었다. (웃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창동 감독님이 작성한 시가 나오는데. 이 시가 주는 여운이 매우 강력해서 어떻게 함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넣었을 때 의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영화 속 시가 없었더라면 노래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 덕분에 음악을 계속하게 되었다.

박기영 관련한 자료 어느 것을 찾아봐도 어김없이 인천 신현초등학교, 동인천여자중학교, 인성여고 등 학적 사항이 나온다. 인천 출신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서울과 가까운 지역적 근린 때문에 굳이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기영은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인천이 고향 맞나.
엄밀히 말하면 서울에 태어났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회사로 인해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살았고 신현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동인천여자중학교’를, 고등학교는 ‘인성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인천에 대한 기억은. 서울에서 이사 온 것이라면 친구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 인천으로 이사 왔을 때 말처럼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서 아무도 놀아주지 않았다. 친구들에 비해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나중에는 저절로 씩씩하게 되더라. (웃음)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아마 놀 친구들이 많았다면 음악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시작함에 있어 학창 시절이 중요하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방송반을 맡았고 합창 대회에 매번 나간 걸로 보아 음악적으로 무언가 있었다. 방송반이니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고 소개하는 글을 쓰고 낭독을 하면서 쌓은 경험이 지금 와서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방송반을 했고 방송제도 나갔다. 인성여자고등학교 ISBC(InSung Broadcasting Center) 21기 방송반이었는데, 이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었다. 인천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가 우리 학교 방송제를 보러 올 정도였다. 나의 음악 생활에 많은 토대가 되었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코로나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3월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5월 즈음 되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혼란스럽긴 하다. 생물학자 최재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하게 된 생각이 있다. 직접 했든 안 했든 인간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나도 책임이 있고 나도 가해자 중 한 명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반성과 활로 모색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가장 안타까운 건 아이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음악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유럽이 문화 예술과 인간에 대한 진중한 물음이 생기고, 음악에 대한 다양한 장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먹고 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세계 전체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기에는 단순한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기분 전환에 몰두하는 것이 편하다. 나도 요즘 시기에는 과거 깊은 감성으로 작업했던 내 노래를 듣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예상을 하자면 대중문화 자체가‘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 조금은 신나는 것으로 교체되지 않을까.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업이 있는지
크로스오버 정규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2 LP를 생각하고 있고 6~7곡 제작하는데 ‘넬라 판타지아’도 넣을 예정이다. 하나씩 새로운 시도를 다 해보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문화 다양성 실천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다
감사하다. 데뷔했을 당시에는 작업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님들이‘노래는 너무 잘하는데 개성은 없는 거 같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 가요계에는 개성으로 똘똘 뭉친 가수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떤 뚜렷한 개성을 갖는 것보다 다양성을 가졌기에 내가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팝페라도 소화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자체가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갑자기 이즘의 20년 맞이 <내 인생의 음악 10곡> 기획이 생각나 ‘박기영이 꼽는 박기영의 노래 10곡’을 꼽아 달라고 했다. 이런 주문에 응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그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신과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성실한 관찰이 느껴졌던 대목. “내가 만족하면서도 대중이 사랑을 준 곡들이어야겠죠?” 그 10곡을 공개하면…

1.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넬라 판타지아’
2. <복면가왕>에서 부른 밴드 부활의 ‘Lonely night’
3. ‘나비’
4. ‘그대 때문에’
5. ‘Blue sky’
6. ‘나비’가 수록된 2004년 앨범의 ‘Mercy’
7. ‘아네스의 노래’
8. <오페라스타 >에서 노래한 ‘Caronome (그리운 이름이여)’
9. <불후의 명곡 > 김수희편에서 부른 ‘멍에’
10. ‘시작’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임선희
정리 : 임진모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