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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0 장미화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마흔 번째 주인공은 우리 일상에 밝은 에너지를 불어 넣었던 가수 장미화다.

1960년대 미8군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그룹사운드 ‘레이디버드’에서 보컬로 활약했던 장미화는 일찍이 해외 각지를 순회하며 풍부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체계화된 공연 시스템 그리고 자유로운 문화 전반을 접하고 돌아온 그에게 한국 사회는 어딘가 삭막하게 느껴졌다. 그 얼어붙은 길거리에 화사함을 불어 넣은 게 바로 1973년 솔로 데뷔곡 ‘안녕하세요’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라며 해맑게 건넨 인사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그는 계속해서 우리 삶에 긍정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남양주 인근으로 찾아가 실제로 얼굴을 맞댄 장미화는 여전히 밝음 그 자체를 살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호쾌한 웃음과 함께 풀어낸 그의 이야기는 분명 오래전 기억임에도 근래의 일처럼 선명했다. 동시대를 함께 했던 어른들에겐 재미난 회고록으로, 당대를 살지 못했던 젊은 친구들에겐 간접적인 과거 체험기로 남길 바란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셨나요.
최근엔 TV 프로그램 녹화를 많이 하고 있다. < 스타다큐 마이웨이 >도 촬영 중이고. 얼마 전에 <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에도 나갔는데 시청률이 대박 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내가 봐도 너무 재미있더라. 내가 녹화해 놓고 내가 그렇게 웃어본 건 처음이었다. (웃음)

그리고 얼마 전에 우리나라 1세대 그룹사운드 출신들이 모여 있는 예우회 분들과 용산에 다녀왔다. 일부 반환된 미군기지 부지에 최근 공원을 조성했는데, 거기 우리 세대 얼굴들을 다 전시해 놓은 기록관을 만들었더라. 옛날에 노래하던 자리에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으니까 감회가 깊었다.

1960년대 미8군과 여성 밴드 ‘레이디버드’로 가수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65년 KBS < 아마추어 톱 싱어 선발대회 >에서 대상은 물론 연말 대상까지 받았고, 신중현 선생님이 나를 픽업해서 1966년 미8군 막내 싱어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상태였는데 맨날 레슨 받고 무대 한다고 밤새니까 학교 갈 틈이 없었다. 그러다 김시스터즈 매니저였던 맥맥퀸(Bob McMackin)이 나를 중심으로 여성 그룹사운드를 만들고 싶다 했고, 보컬 로지(장미화), 메인기타 앤젤라, 베이스 리사, 드러머 루비, 오르간 애니로 구성된 ‘레이디버드’가 탄생했다.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미8군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노래 연습을 굉장히 많이 하게끔 만들어 준 곳이었다. 그때는 신중현 선생님을 따라 눈만 뜨면 연습했었다. 또한 외국 노래에 대해서 몸이 익어갔던 장소였다. 한국 노래를 안 부르고 전부 팝송만 부르니까. 팝송 속에서 살았고 그러다 보니 외국 사람들과 사는 것 같고 그랬었다.

그래도 우리는 선배들보다 조금 나은 때에 들어갔다. 윤항기 오빠 때는 50년도 후반, 그러니까 막 6.25 전쟁을 겪고 그야말로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미8군에 딱 들어가면 식사부터 미국식으로 주곤 했는데 오빠들은 가족들과 나눠 먹기 위해 그걸 싸 갔다더라. 집에 있는 식구들이 생각나 도저히 밥이 안 넘어간다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한다.

미8군 출신 가수들에 의해서 대한민국 대중음악의 격이 올라갔다는 평이 많습니다. 의견에 동의하시나요.
당연하다. 가요계를 봤을 때 미8군 출신과 일반 가수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단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에서도 더블 A 등급을 받아야만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노래를 한다 했을 때 싱어는 가사를 다 영어로 쓸 수 있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영어를 할 줄 몰랐으니까 공연을 위해 무조건 외웠었다. 그만큼 열심히 노력을 했으니 난 자부심을 가진다. 음악적으로 봐도 그룹 출신은 솔로와 창법부터 다르고, 노래할 때의 감정 표현이나 무대 매너가 확실히 세련됐다.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먼저 무대를 가졌습니다.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레이디버드 5명이 연습해서 처음 진출한 곳은 LA다. LA에 도착해서 한복을 입고 맥맥퀸을 기다렸는데 이 사람이 공항에 안 나왔더라. 근처 공중전화기에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었는데 전부 영어로 말하니까 우린 다 못 알아듣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영사님을 만나게 돼서 맥맥퀸하고 대신 통화를 해주셨고 감사하게도 영사님 댁에서 잠시 머무르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 이후에 맥맥퀸은 우리를 픽업해서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당시 선생님과 레이디버드는 어떤 캐릭터였나요.
외적으로는 굉장히 예쁘장했다. 가랑머리 한 여자애들이 미니스커트랑 롱부츠 신고 나오니까 사람들이 너무 귀여워했다. 그들 눈에는 열네다섯 정도 되는 아이들로 보였을 거다.

그보다 대부분 오리지널 팝을 하던 때에 흑인 음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신중현 선생님이 내 목소리가 다이애나 로스랑 너무 비슷하다고 해서 그런 노래를 주로 부르라고 하셨다. 중간에 페툴라 클라크 ‘Downtown’, 앤 마그렛 ‘Slowly’ 같이 섹시한 곡도 했는데 그때마다 난리가 났었다.

한 번은 내가 슈프림스의 히트곡 ‘Stop! in the name of love’를 불렀는데 맥 맥퀸이 나더러 다이애나 로스 노래를 할 때 목소리를 너무 똑같이 내지 말라고 하더라. 아무리 닮았다 해도 자연적으로 나오는 본인 목소리 그대로 해라. 똑같아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그때부터 본연의 내 목소리를 따라 노래 부르게 됐다.

라스베가스에서도 인기가 괜찮았나요.
당시 센스 호텔이라고 있었는데 그 호텔 카지노에서 쇼를 열곤 했다. 홀 중앙에 원형 스테이지가 있는데 벽으로 반을 갈라서 두 팀이 동시에 공연을 펼쳤고 한 타임이 지나면 무대가 회전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때 우리 레이디버드와 같이 무대에 올랐던 게 바로 라이처스 브라더스였다. 얼굴이나 이름은 잘 몰라도 대표곡인 ‘Unchained melody’는 너무 잘 알았으니까 내 눈으로 직접 공연을 보고 싶었고, 막간을 활용해서 잠시 관람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무대가 두 명이 깨지기 전에 가진 마지막 무대라더라. 카메라가 없었던 게 너무 아쉬웠다.

미국 다음으로 떠난 곳은 어디였나요.
라스베가스 이후엔 캐나다랑 동남아도 돌았다. 베트남 구정 공세가 일어났던 시기에 현지에 머물렀었는데 그때 공항이 완전 봉쇄됐다. 노래하던 클럽에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는데 그 집이 문을 닫으니까 밥도 잘 못 먹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맹호부대에 도움을 요청하란 소리를 들었고 바로 연락을 취해 부대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베트남이 다시 문을 연 이후에 싱가포르, 태국, 홍콩 등 마저 공연을 돌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미8군을 거쳐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오긴 했지만 1973년 ‘안녕하세요’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무명에 가까웠다. 장미화란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건 ‘안녕하세요’ 덕이 크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다른 분들 말로는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미8군 때야 그냥 철모르고 노래할 때라 막연한 재미였지만, 솔로 데뷔 직후엔 인기는 물론 돈도 많이 벌며 진정한 전성기를 맞았다.

말씀하신 데뷔곡 ‘안녕하세요’는 물론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어떻게 말할까’ 등 수많은 노래가 우리 사회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들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미국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끼리도 인사를 나누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싸우다가 나온 사람들 같았다. 그래서 ‘안녕하세요’가 인기를 끌었을 때 “좀 웃고 삽시다. 안녕하시죠?” 내가 막 그러면 사람들이 웃더라. 그다음에 낸 노래가 ‘웃으면서 말해요’였는데 그때 노란색 스마일 스티커를 내가 처음으로 만들어서 택시 같은 데 붙이고 그랬었다. 다 같이 웃고 살자고. 참 좋은 노래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런 노래 좀 불러줘야 하는데 부를 데가 없다.

‘안녕하세요’, ‘웃으면서 말해요’ 모두 MBC 악단장을 맡았던 여대영 선생님의 곡입니다.
그런데 나는 막상 MBC에서 출연 정지를 당했던 사람이다. 활동 당시에 집시 스타일의 옷을 많이 입었는데 등을 너무 팠다고 1년 정지를 시키더라. 같은 날 출연한 여가수 중에 가슴 쪽을 판 사람도 있었는데 거긴 정지를 안 당했다. 너무 열받아서 내가 직접 사장실에 올라가서 엄청 따졌다. 지금이야 다 품고 사는데 그때는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하는, 소위 성깔이 좀 있었다.

실제로는 TBC에 더 많이 출연했다. < 쇼쇼쇼 >에서 무지 키워줬다. 매일 같이 나갔으니까.

TV에 나올 때마다 항상 춤을 추셨습니다. 본인의 아이디어였나요.
내 아이디어다. 무슨 노래를 하라 그러면 내가 집에서 거울을 보고 이 노래는 이렇게 해야지 하고 무대를 떠올리며 안무를 구상했다.

가수로도 최고지만 예능 스타로 활동했어도 최고였을 것 같아요.
코미디언 구봉서 씨, 서영주 씨 이런 분들이 너는 이쪽에 종사했어도 잘 됐을 거라고 하셨다.

1973년부터 전성기를 보냈지만 이후 긴 공백을 가지기도 하셨습니다.
1983년에 컴백을 했는데 이 시기가 꽤 마음에 남는다. 이혼하고 난 다음이니까. 아픈 엄마와 3살 난 아기를 데리고 나와서 살 때 통 허무했었다. ‘내 인생 바람에 실어’라는 노래 속에 그 가슴앓이가 다 들어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야간 업소뿐이었다. 미국의 큰 호텔에서 체계적인 공연을 하다가 이상한 술집에서 노래를 부르려 하니 적응이 안 됐다. 현미 언니 같은 선배들도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돈을 버는 건 좋았다. 다만 꼭 술 먹고 무대로 음식을 던지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원래는 누가 뭐라 그러거나 욕을 들으면 무서워하면서 울고 그랬었는데 이 엉망인 분위기에 동화되면서 굉장히 사나워졌다. 나중엔 도저히 못 참고 뛰어 내려가서 그대로 얼굴에 던져주기도 했었다. 이런 게 내 가치관하고 너무 안 맞으니까 그냥 이럴 때 결혼이나 해서 가정집 안에 들어앉아 조용히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전 남편이었다. 처음엔 매너도 너무 좋고 뭐 하나를 해도 고급스러운 젠틀맨이었다. 그래서 식을 올렸는데 결혼 첫날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이 사람은 내 사람, 그러면서 딱 날 잡기 시작하더라. 내 기가 눌려 기분이 영 찜찜했지만 우리 엄마 말을 듣고 그냥 참으며 지냈는데 살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됐다. 그래도 큰아들이 곁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내 모든 재산과 우리 아들을 바꿨다. 아이가 내 보물이다.

복귀 이후에도 많은 히트곡으로 가요계를 수놓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간단히 짚어볼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봄이 오면’, ‘내 마음은 풍선’ (1973) / ‘웃으면서 말해요’ (1974) / ‘그 누가 뭐래도’ (1976) / ‘어떻게 말할까’, ‘푸른처녀’, ‘해뜰날’ (1977) / ‘애상’ (1985) / ‘내 인생 바람에 실어’, ‘서풍이 부는 날’ (1988)

그런데 인기에 비해 상복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7대 가수상처럼 돈 주고 받는 상 이런 거는 맨날 받았다. 그런데 정작 가수왕 상같이 큰 상들은 탈 법한데도 못 탔다. 그때는 매니저들이 다 알아서 처리했으니까. 그래서 난 맨날 떨어졌다.

개인적으로 뽑는 장미화의 베스트 트랙은 무엇인가요.
옛날엔 ‘여름의 훈장’이었다가 ‘쓸쓸한 연가’로 제목을 바꾼 곡이 있다. 동아방송 드라마 주제가로도 썼다. ‘안녕하세요’보다 더 히트할 거라 예상했는데 그때 분위기와는 안 맞는 노래였던 것 같다. 최고로 맘에 드는 노래다. ‘사랑, 그 그리움’이란 곡도 정말 아끼는데 주목받지 못해 너무 아깝다.

장미화의 음악 인생에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누구입니까.
신중현 선생님이 나의 길을 열어줬다. 창법이나 매너도 그렇지만 연습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걸 몸소 보여주셨다. 추운 겨울날 선생님 댁에서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겸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덜덜 떨면서 걸어온 후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에 들어가 기타 연습을 하시더라. 선생님처럼 일 없는 날에도 매일같이 연습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신중현 선생님 외에 우리나라 가수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이 있을까요.
선배 중에선 패티김 언니가 제일 멋있었다. 후배는 같은 그룹사운드 출신인 조항조나 김상배가 기억에 남는다.

최근 해외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우리 K팝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나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우리가 예전에 해외로 다닐 때 그런 무대를 원했었다. 왜 우리는 세계적으로 나가서 노래를 못 부르나. 우리는 뭐가 모자라서 이게 안 되나. 그런데 요즘 우리 후배들이 나가서 당당하게 1위 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다. 참 감사하다.

그 친구들이 우리를 모를 수 있다. 그럼에도 미8군 쪽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바탕이 되고,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그 부대 안에서 힘들게 고생하면서 피나는 노력으로 쟁취했던 무대 경험이 모이고 모여 지금의 K팝이 되었다는 걸 인지해 주면 좋겠다. 더욱더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항상 뒤에서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끝으로 장미화 선생님은 우리 가요계에서 어떤 가수로 남기를 바라시나요.
참 착하고 활달하고, 언제 봐도 기분 좋은 여자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정다열, 이승원
정리 : 정다열
사진 : 이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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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7 전석환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일곱 번째 주인공은 1960-70년대 ‘다함께 노래 부르기’의 주역 전석환이다.

건전가요 보급운동, 싱어롱-Y, 레크리에이션, 캠프 송,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 등의 용어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1960-70년대 ‘통기타의 전령’, 그와 함께 확산된 ‘포크송의 개척자’도 바로 그였다.

TV는 물론 라디오조차 대중적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삼천여 곡에 달하는 레퍼토리를 보유한 전석환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통기타 하나 들쳐메고 학교와 일터를 비롯한 일상 곳곳을 돌아다녔고, 대한민국 전체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인 싱어롱(Sing Along)부터 ‘노래에 따라 생활이 움직인다’라는 개념의 뮤직 테라피까지, 음악의 순수한 힘을 강조했던 그가 범대중적 열풍의 중심에 섰던 것은 단순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어린 시절 적을 두었던 인천으로 돌아와 음악 교육을 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흔의 춘추에도 그 의지와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부정이 아닌 긍정, 겸손을 넘어선 겸공을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지치지 않는 화술로 꽉 채운 3시간의 인터뷰, 한 세기에 가까운 한국 음악의 근현대사 그리고 전석환의 일대기를 체감해 보라.

연배가 무색할 정도로 발음이 정확하신데요, 첫 방송은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하시지요.
방송 출연을 많이 한 관계로 아직도 몸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듯해서 그런 것 같다. 방송은 가장 먼저 했던 게 1964년 라디오 프로 < 삼천만의 합창 >이었고, TV에선 1965년 < 노래의 메아리 >가 처음이었다.

고향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오게 된 계기는요.
황해도 벽성군 소재의 섬 용매도가 고향인데, 고립된 지역임에도 교회가 들어와 있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네도 잘 살았던 편이라 중학교부터는 섬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다. 일종의 유학이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참전하게 됐고, 휴전이 조금씩 언급되던 1952년에 집안 소유의 배를 타고 가족 모두 인천으로 떠나오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도 치렀는데 배다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국민학교 선배가 전쟁은 곧 끝나니까 공부를 택하라고 권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였지만 그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인천의 첫인상은 어땠는지요.
서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도시 수준은 인천이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다. 특히 항구 노동자들이 많아서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릴 적에 인천의 주파수와 잘 맞지 않았는데 그걸 달래 준 곳이 교회였다.

유독 교회와 연이 깊어 보이는데요.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 자유 국가를 논하기 전에 종교 국가가 됐다, 독립운동 때만 봐도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이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내가 살던 용매도는 북방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 생활’이 아닌 ‘생활 종교’를 추구했다. 내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생활 음악’, 즉 뮤직 테라피도 결국 다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 이른바 싱어롱(Sing Along)은 우리의 유행가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민요야말로 가장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아메리칸 포크 뮤직의 진수인 벌 아이브스(Burl Ives)는 물론 그를 본떠 나온 밥 딜런까지 전부 대대로 내려온 전승 가요였다. 목청이 좋아야 하거나 폼을 잡아야 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노말(normal) 사운드다. 민요라 하면 보통 한 옥타브 안에서 5음만을 가지고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아 따라 부르기 쉬웠다. 독창, 중창, 합창을 넘어 제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음악 대학이 들어서면서 테너, 소프라노라는 개념이 생겼고, 전문적인 7음 음계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하며 함께 노래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타파하고자 싱어롱을 들여온 것이다.

미국의 싱어롱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떤 환경의 산물이었나요.
역시 교회의 영향이다.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기생으로 입학해 작곡 공부를 할 때 박태준 박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양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창, 중창, 합창이 전부 가능하면 그야말로 좋은 거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 ‘I, My, Me’ 그리고 ‘We, Our, Us’의 개념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성가와 찬송가가 대응됐다. 내가 추구하는 건 비교적 대중적인 찬송가에 가까웠다.

전석환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싱어롱-Y’의 Y는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YMCA의 Y, 당신(You)의 Y, 그리고 젊음(Youth)의 Y였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요를 꿈꾸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부끄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께서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편인데 노래만 불렀다 하면 꼭 얼굴을 찡그리셨다. 눈을 감고 흐느끼고 어떨 땐 핏대를 올리기도 하셨다. 어릴 때부터 그게 너무 싫었는데 그렇게 흘러가던 노래, 당시의 유행가가 바로 일본의 엔카였다.

훗날 NHK가 연출의 연(演)자로 바꾸긴 했지만 엔카(연가)는 원래 연애의 연(戀)자를 썼던 사랑 노래였다. 술집에서 주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한데 사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나온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집단의식이 강한 조선인을 와해하기 위해 일제가 심어둔 일종의 염세 사상이라 본다.

그리고 예전에 재일교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는데 어떤 분이 “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냐?”고 물어보면서 가사를 ‘십 리만 걸어도 행복해요’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다. 뭐만 하면 너무 울고 짜는 느낌이라 창피하다는 얘기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완전 쇼크에 빠졌다.

음악적으로 밝음, 명랑함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실제적 경험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미8군에서의 무대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다. 1958년도부터 조선호텔 미 장교 클럽에서 전자 오르간 연주를 맡았는데 영어로 대화도 잘 되고 하다 보니 그들의 입맛에 맞춰 연주할 기회가 잦았다. 뮤지컬은 웬만하면 다 통했는데 대체로 시끄럽거나 느린 음악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 배워 익숙했던 ‘Old folks at home-Swanee river(스와니 강물)’나 ‘Old Black Joe(올드 블랙 조)’ 같은 노래가 그들의 슬픈 감정을 담은 걸 보고 학교 교과서의 정확성, 미래 지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우리와 음악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 중에도 무난하고 경쾌한 리듬의 노래 그러니까 ‘노말’한 곡들 예를 들면 벌 아이브스의 ‘Home on the range(언덕 위의 집)’ 같은 곡은 항상 반응이 좋았다. 소위 말해 노래로부터 플레져(Pleasure)를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래로 이 즐거움을 얻고자 해야지 신경 쓰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확실히 그때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970년대 당시 음악적 존재감이 컸던 선생님께서 긍정을 강조하셨기 때문인지 예를 들어 ‘아침이슬’처럼 금지곡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요.
실상 당대 금지곡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방송에서 건전가요만 부르고 바른말을 하는 이미지로 나오다 보니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면서 이런저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아침 이슬’ 가사 속 ‘묘지’를 ‘대지’로 교체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금지곡 처분을 받고 나서 꺼낸 얘기다. 실제로 김민기와 만났을 때 내가 가사를 바꿔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힘든 삶을 살았으니 사고 방식이 나처럼 낙관적일 수만은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세대에서는 우리 시대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융합과 화합의 덕목을 길렀으면 한다.

스스로가 인정하는 전석환의 가장 큰 공헌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이라고 할 건 없다. 다만 음악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음악계가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그 옛날부터 국제화, 글로벌을 꿈꿨던 게 바로 나다. 과거 경제적 빈곤기에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던 나라였으니 노래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최근 K팝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싱어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갈등이 오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국경, 언어, 문화와 상관없이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순수 음악적 요소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율동이나 동작, 퍼포먼스가 그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왔을 적에 전 세계가 흔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전가요 보급에도 앞장섰지만 통기타 붐의 시작을 알린 선구자이시기도 합니다.
2015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 대한민국 통기타음악 50년사 & 방송DJ 50년사 특별전 >에 초대된 적이 있다. 함께 자리했던 ‘통기타 군단의 교장선생님’ 이백천에게 “내가 왜 통기타의 선구자냐”고 했더니 나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학 가요제가 생겨났다고 하더라. 당시에 세고비아 기타 재고가 없어서 못 팔 만큼 통기타 인기가 상당했던 건 사실이다.

전국의 학교, 음악감상실, 심지어 한강의 모래사장을 찾아 사람들에게 합창 지도에 나섰던 시절, 한해 15만 명이 참여하는 센세이션이 야기되었다는 엄청난 인파를 몰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뭐였나요.
부산 해운대에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몰린 적이 있는데 해수욕장 전체가 그야말로 인파로 덮였다. 처음엔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만 모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지니까 깔려 있던 파라솔과 텐트를 치워야 하는 사태까지 갔다.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음악적 보상으로 ‘노을’이란 곡을 작곡했다.

창작 가요도 많이 썼지만 해외 각국의 수많은 민요를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 번안가요 베스트는요.
아무래도 ‘그리운 고향’이 아닐까.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으로, 오래도록 바다에 나와 있는 뱃사람이 고향의 사계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하는 ‘석별의 정’도 널리 알려졌고… 창작곡으로는 ‘정든 그 노래’와 ‘앵카-송(Anchor song)’, ‘좋아졌네’를 고를 수 있겠다.

지금 시대에 다시 울려 퍼졌으면 하는 노래는 없는지요.
아버지께 배웠던 노래 ‘부모은공’을 추천한다. 길지 않고 무엇보다 가사가 간단해서 나이 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곡이다. 율동과 함께 배우기 딱 좋다.

인천시민들에게 기쁘게도 작년 5월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인천과 잘 맞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5월에 자리를 잡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아직도 조금 거친 면이 남아있더라. 작년에 송년회만 12군데 참석했는데 쭉 돌고 나니까 비로소 인천의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시 터를 잡은 인천에서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예술적 음악적 기록이 많이 남기지 못했다. 올해 안으로 인천의 저명인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젠 창작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팀을 이뤄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창의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면으로 소개하려 한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정다열, 신하영
정리 : 정다열, 임진모
사진 :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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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6 신연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여섯 번째 주인공은 4인조 알앤비 그룹 빅마마의 리더이자 호원대학교 교수로 활동 중인 신연아다.

명품 보컬 그룹의 귀환, 2021년 빅마마의 재결합 소식은 유난히 반가웠다. 급작스러운 해체 이후 9년 만에 용기 내 얼굴을 마주한 이들에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팬은 물론 빅마마를 전혀 모르는 신세대까지 뜨거운 관심으로 화답했다. 외모 지상주의를 향한 도전으로 출중한 가창 실력을 앞세웠던 2000년대 초중반의 당찬 하모니가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로 빅마마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멤버들은 오히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팀의 리더 신연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강의실. 오랜 기간 호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그에게 교정은 무대만큼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인터뷰 역시 평소 학생들이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진행했다. 잔잔히 깔리는 제자들의 피아노 연주를 따라 담화를 이어간 신연아 교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만이 번졌다.

2003년 빅마마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소감이 어떤지.
건너뛴 시간이 길어서 살짝 양심에 찔리지만 (웃음) 데뷔한 지 20년 됐다는 걸 누군가 기억해 주고 기다려 준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20년이구나.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는 시기인 만큼 빅마마란 팀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지점인 듯하다.

2021년 재결합을 알린 후 딩고 킬링보이스, odg, it’s live 등 유튜브 콘텐츠를 중심으로 모습을 비췄다. 일련의 과정이 계획된 움직임이었나.
재결합 자체가 그해 4월에 갑자기 진행된 얘기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압력 센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더 힘들어지기 전에 후다닥 하게 됐다. 그래서 5월에 만나 음원 하나를 거의 바로 녹음해 발매했고 첫 스케줄로 딩고 라이브가 잡혔다. 20분 넘는 시간을 원테이크로 부르는 데 정말 사람 잡는 일이더라. 9년 만에 만나서 맞추려니 걱정도 되고 떨리기도 했는데 조용한 환경 조성을 위해 에어컨도 끄고 녹화해서 리허설 한 번에 땀이 확 났다. 그래도 다들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간만에 모였는데도 몸이 기억해서 나오더라.

천만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대중들이 많이 기다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주고 좋아해 준다는 거는 진짜 선물 같은 일이라고 본다. 그런 중에 또 희한한 건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팬층으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20대 친구들이 언니라고 부르면 참 기분이 묘하다. (웃음)

작년에 빅마마 전국투어 < ReBorn >을 성공리에 마쳤다. 2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도 예정된 대규모 공연 계획이 있는지.
물론이다. 사실 데뷔 앨범이 나왔던 2월도 고려했었지만 공연 대목인 연말에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아마 올해 말 정도에 음원 하나 발표하며 찾아 뵙지 않을까 싶다.

정식 데뷔는 2003년이지만 1990년대부터 3인조 코러스 팀 ‘빈칸 채우기’로 활약하며 당대 발매된 수많은 앨범에 이름을 남겼다. 코러스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시작은 인하대학교 창작가요 동아리 ‘꼬망스’다. 데뷔곡 ‘Break away’를 써준 (이)현정 언니는 동아리 2년 선배고, 함께 했던 (김)효수는 2년 후배다. 어느 날 현정 언니가 소찬휘 선배 앨범에 곡을 수록하게 되면서 셋이 같이 코러스를 해보자고 제안해서 한 곡 녹음을 해봤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부터 프로듀서분께서 앨범 전체를 맡겨 주셨고 나아가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대부분의 작품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입소문이 나다 보니 그렇게 한 6~7년 정도를 하게 됐다. 셋 모두 톤이 다름에도 배음 효과를 통해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다는 걸 이때 느꼈다.

‘꼬망스’는 인하대학교에서 하나의 단과로 치부될 만큼 유명 뮤지션들이 거쳐 간 모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동아리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시절 가요제에 많이 출전했는데 성과가 나름 괜찮았다. 1995년 MBC 강변가요제 은상을 수상했을 때도 같이 나갔던 친구와 그 곡을 써주신 선배 모두 동아리 멤버였다. 한 기수에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걸출한 음악인들이 많이 탄생한 걸 보면 다들 열정이 대단했었다.

인천의 음악이 유독 강점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항구 도시 특성상 문물을 빠르게 흡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전에 기본적으로 바다 주변 사람들은 파도처럼 감정의 출렁임이 큰 것 같다. 일반인으로 살기는 불편할지라도 음악처럼 감성적인 예술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음악의 깊이를 더해주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믿고 있다.

지금의 신연아를 만든 가수 혹은 음악이 있다면.
블루스에 빠져 지내던 대학 시절엔 허스키한 중저음의 프랑스 여성 보컬 파트리샤 카스를 즐겨 들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 인천대 출신인 낯선 사람들의 데뷔를 마주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동아리 멤버들과 둘러앉아 앨범을 듣고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 정도로 낯선 사람들 1집은 내게 최고의 명반으로 남아있다. 베이비페이스 같은 알앤비에 관심을 두다가도 프랑스에서 재즈와 월드 뮤직에 끌리고, 맨하탄 트랜스퍼부터 스테이시 켄트까지 변했던 것처럼 그때그때 꽂힌 장르와 아티스트에 귀가 가는 편이다.

프랑스 유학은 어떻게 결정하게 된 건가.
코러스 활동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가 노래 자판기 같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한 작곡가분의 추천으로 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데 마침 나와 똑같은 불문과였던 친언니가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어서 나도 겸사겸사 따라가게 됐다. 잠시 코러스 생활을 접고 도망치듯 떠나갔던 상황이라 마땅한 계획은 없었다.

타지에서의 유학 생활은 할 만했는지.
대학생 때 노래만 하느라 불어 실력이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보니 현지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음악을 접을 생각까지 하며 방황기를 겪다가 우연히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 하나를 탁 틀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자만이었다는 걸 느끼고 그때부터 학교를 알아보고 C.I.M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선 음악 용어를 쓰다 보니 어학원에서 배운 단어는 무용지물 수준이었다. 제일 어려운 수업이 화성학이었는데 학기 전에 불어 화성학책을 살짝 봐둔 게 그나마 도움이 됐다. 그렇게 눈치껏 하루하루 배워가긴 했지만 주변 친구들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긴 힘들었다. 물론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사귀게 되었던 친구가 지금의 남편이 됐다.

당시의 추억들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 음악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어학원과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시선이 본인에게 맞춰져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분석이 전부 끝난 상태였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나도 그때부터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행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훗날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큰 양분이 되어 돌아왔다. 입시만 봐도 우리는 어떤 선을 넘기 위한 단점 보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나만의 장점을 발굴해 더욱 발전시키는 게 훨씬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학생들이 스스로가 가장 빛날 수 있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게 교육자의 임무라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항상 옆 친구 노래 따라 부르지 말라고 강조한다.

2009년부터 호원대학교 실용음악학부에서 보컬 전공 교수를, 그리고 K-POP학부에서 학과장을 맡고 있다. 교수직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교수를 하기 전만 해도 가수 활동에 대한 의욕이 남아있던 때라 교수직을 거절했었다. 그런데도 정원영 교수님은 학교에 있으면 음악을 더 잘하고 많이 하게 될 거라며 불굴의 의지로 계속 설득하셨다. 그냥 믿어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정말 다른 즐거움,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수와 교수 활동의 연차가 거의 비슷하다. 단상과 무대에 오를 때 차이가 있다면.
가수로 활동할 때는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시선이 나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 있으면서 나보다 남을 더 많이 바라보니까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타인의 인생에, 특히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성장기에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니까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더 솔직하게 바라보게 됐다. 막말로 애들한테 하는 만큼 내가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무대에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됐고 음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가르치면서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겸손함으로 이끌었다.

강의할 때 중점을 두는 교육 방침이 있다면.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노래도 결국 몸으로 하는 거라 마음에 따라 소리 내는 게 달라진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내 환부를 다 보여줘야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개선에 도달하기 위해선 나와의 시간이 즐거워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부터 편하게 느끼고 다가올 수 있게끔 내 고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그들의 걱정 또한 최대한 이해하고 들어주려 한다. 과거의 내가 배울 곳이 많지 않아서 느꼈던 답답함을 제자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진 않다.

기억에 남는, 눈길이 가던 친구가 있다면 간단히 소개 부탁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친구들이 참 많다. 정채원이란 친구는 대학원이나 유학을 통해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배움을 포기했는데, 그렇다고 불만도 없더라. 그 모습을 보고 이 친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막연한 기대로 주변 친구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고 올해 초에 EP < Attention >을 발매했다. 최근 연락을 해보니 본인이 나왔던 예고에 선생님으로 가게 됐다면서 그 월급으로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말하는데 내가 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K-POP학과장 신연아는 해외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글로벌 K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매우 긍정적인 입장이다. 프랑스에 머물렀던 2000년과 비교해 보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크게 일조한 게 바로 K팝이다. 2016년에 학교에서 해외 6개국을 돌며 K팝을 알려주는 K팝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외국인 친구들이 들고 오는 음악이 단순히 아이돌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같은 그룹을 시작으로 아이유부터 이적, 박효신, 성시경까지 다양하게 소비하면서 그것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있더라.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적 파장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 아이돌 음악을 경시하던 시기도 있었다. 춤만 잘 추고 노래는 못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춤이라도 잘 추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서서 노래해도 상당한 근력을 요구하는데 춤까지 추려면 체육인만큼 체력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결과를 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영역까지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연습이 잘 되는 매 순간순간이 행복하다. 대부분 사람 앞에서 노래할 때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만 무대에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지 혼자 마음껏 행복한 것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그래서 컨디션이 잘 안 돌아오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불안해하다가도 노래가 잘 되고 내가 쓴 곡이 제법 괜찮을 땐 뿌듯하다. 결국 나 자신과의 콘서트인 셈이다.

빅마마 그리고 솔로 활동을 통틀어서 꼽는 신연아의 Best 5는 무엇인가.
빅마마 ‘거부’ (2003) – 사회에 대한 분노 지수가 한창일 때 가사를 썼다. 지금 보면 그때 왜 그렇게 썼을까 싶다가도 당시의 반항 정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주지 않았나 싶어 뿌듯한 면도 있다.

빅마마 ‘Thanks to..’ (2006) – 팬들을 향한 감사함을 담아 가사를 써 내려간 곡인데, 최근에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빅마마 ‘사랑’ (2010) –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작곡가분께서 써주신 곡이다. 클래시컬한 멜로디 위에 사랑의 이면을 철학적으로 담았는데 빅마마 5집에 담겨서 무대에서 보여드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연아 ‘Cosmos’ (2014) – 사랑을 주고받을 존재 하나면 우주를 다 가진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가사가 아름답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신연아 ‘늙은 어미의 노래’ (2014) –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남겨둔 자식들을 걱정하는 내용의 노래다.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에 집중해서 듣는다면 처음 접한 분들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좋은 곡이다.

끝으로 신연아는 어떤 음악인으로 남고 싶은지.
나 자신은 물론 환경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선 일단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한다. 곡 작업은 물론이고 각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장준환, 정다열, 김태훈
정리 : 정다열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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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4 파제(Pa.j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네 번째 주인공은 관성에 갇히지 않고 음악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 파제(Pa.je)다.

뮤지션 파제(Pa.je)는 음악가가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묻게 한다. 차 막히는 주말 아침, 홍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저녁에 있을 공연을 위해 거주지인 인천에서 서울로 막 도착했다고 했다. 카페를 운영하고,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는 그는 바쁘지만 편안한 인상으로 질의에 답했다.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기타를 잡고(그의 기타 실력은 정말 엄청나다!)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는 그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으니 “결국에는 내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 중간 매개물”이란 답이 돌아왔다. 음악이 목표가 아닌 수단이라는 예상치 못한 답변에서 그만큼 일상에 깊게 침투한 음악의 파워가 느껴지는 듯했다. 음악가는 어디를 향해 어떻게 움직이는가. 파제는 삶 속에서 음악과 함께, 음악을 곁에 두며, 담담하게 걸어 나간다.

2020년 연주곡으로 채워진 정규 음반 < Pa.je Archive >를 발매했고 8월 30일, 오랜만에 EP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했다.
작년에 음반을 하나 내긴 했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홍대에서 긴 시간 같이 활동했던 뮤지션 ‘엉망’과 ‘포래스트’라는 팀명으로 < Piece Forest >를 냈다. 엉망이 노래를 부르고 내가 작곡, 편곡, 연주를 했다. 사실 < 관성의 바깥 > 녹음도 작년에 다 끝낸 상태였다. 2022년도에 다른 일이 무조건 많을 것으로 예상했기에 앨범에 대한 방향성을 고민하던 와중 인천문화재단에 좋은 지원사업이 떴고 다행이 지원받게 되어 < 관성의 바깥 >을 발매하게 되었다.

< 관성의 바깥 >과 관련된 공연 혹은 활동 계획이 있다면?
11월 19일에 인천에 있는 카페 겸 문화공간 ‘인천여관X루비살롱’에서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EP 중심의 공연은 아니고 그냥 파제라는 뮤지션이 해오던 지난 활동들의 연장선상으로 봐주면 좋겠다. < 관성의 바깥 >의 후속 공연은 아마 없지 않을까? 이번 음반은 연주자로서, 싱어송라이터로서 파제가 아니라, 마음 가볍게 시간이 날 때마다 만든 곡들을 묶어 발매했다. 작곡부터 그렇게 진행했다 보니 발매 이후의 공연을 염두 하지 않았다. (웃음)

‘관성의 바깥’이라는 음반 명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뮤지션 파제의 이미지가 있다. 기존 발매했던 ‘제주의 봄’과 같은 따스한 어쿠스틱 사운드의 음악이 있고, 버둥 혹은 다른 뮤지션들과 콜라보한 음반에서처럼 싱어송라이터, 포크 뮤지션으로서의 행보가 있다. 이것 말고 내가 가진 영역, 즉 우주가 상당히 큰데 그걸 보여주기가 사실 쉽지만은 않다. 그런 면에서 < 관성의 바깥 >은 내가 관성처럼 해오던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지만 누가 들어도 파제의 노래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앨범을 통해 관성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면 이해가 쉬울까? 음반 커버를 보면 동그란 게 막 있는데 그게 나의 태양계다. 우리한테 관성은 태양계이지 않나. 애매한 위치에 모여있는 별들은 ‘관성의 바깥’을 표현한 거다. 태양계 밖에 있는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디자인을 맡아 준 장희문과 상의 끝에 완성했다.

EP 수록곡 ‘사천진 걸음마’란 노래를 재밌게 들었다. 얼마 전 유튜브에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영상을 올리기도 했던데.
친한 동생과 강릉에 놀러 갔었다. 동생이 혼자 컨셉을 잡고 걸어가다가 갑자기 카메라를 보고 인사를 하고, 또 걸어가며 장난을 치더라. 그때 문득 그냥 걸어가는 모습을 찍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계속 한 방향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영상을 찍었고, 집에 와서 영상을 붙여보니 그 반복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영상 클립을 먼저 따고 바로 이런 식의 곡을 만들겠다는 감이 왔다. 귀엽고 발랄하게 사운드를 뽑으려고 장난을 많이 친 노래다.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쭉 음악 활동을 한 건가?
군대 빼고는 늘 인천에서 살았다. 심지어 군대도 용산 쪽이어서 인천을 관통하는 1호선을 타고 다녔다. (웃음)

음악 활동을 하기에 공연장 등 인천의 인프라는 어떤가?
형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록, 메탈이 주였던 1990~2000년대 초에는 구월동 쪽에 연습실도 많고 서울에서 인천 쪽으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활동하는 시기도 다르다 보니 내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다.

그 당시 음악을 했던 사람들은 이제 클럽을 차리거나 본인의 공간을 가질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됐다. 그러다 보니 인천에 헤비니스 부류의 공연장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인천에 있는 어쿠스틱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들이 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 아쉬움이 좀 크다.

인천에서 개인 카페를 운영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공연도 열었던 걸로 안다.
동료 뮤지션 단편선, 전유동, 이권형과 함께 공연했었다. 외곽의 넓은 공간에서 음악 하며 놀면 재밌겠다는 이야기를 이전부터 나눴고,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 이를 진행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뒤, 만날 때마다 조금씩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공고가 뜬 인천문화재단의 ‘시작공간일부’를 통해 청년 축제 사업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관객도 많이 오고, 우리 카페 고객도 꽤 많이 현장을 찾아 즐기고 갔다. 다만, 정기적으로 공연을 제안하시는 분도 있는데 현실적으로 그건 힘들다. 기획 음악 장비 및 인력 구축, 관객 홍보 등 고민할 지점이 많기에 단순히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무턱대고 진행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천에서 참여한 공연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 하나를 꼽아준다면?
콜트콜텍 노동자 음악제. (이)권형이 나를 섭외해서 엉망과 인천의 다른 밴드들과 주안역 앞에서 버스킹을 했었다. 그곳이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대여서 아무도 우리 얘기를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발걸음을 멈췄다. 지나가던 학생들, 어른들까지 말이다.

요즘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졌다고 해도 어떤 소리를, 메시지를 던졌을 때 시민들이 들어주는 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사람들이 진심을 들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력이 있구나 하는 걸 배웠다고나 할까? 관심을 주는 것을 보고 사실 조금 놀라기까지 했다. 세상은 충분히 움직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처음부터 ‘파제’란 활동명으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게 아니라고.
2010년도에 전역하고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다. 기존에 각자 속해있는 또 다른 밴드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시간 맞추기가 어렵더라. 혼자라도 먼저 해야겠다 싶어 그룹을 나와 음악을 시작했다. 그때는 밴드 음악을 그냥 어쿠스틱 기타로 가져와서 하는 형태이다 보니 우울한 노래들이 많았다. 회색빛의, 회색 톤의 음악을 한다고 해서 ‘그레이톤’이라는 이름을 썼었다. 내 이미지랑 안 맞지 않나. (웃음) 2013년 후반부터 ‘파제’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제의 음악에서 기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타는 언제부터 익힌 것인지.
2006년 11월 수능 끝난 날에 형한테 처음 배웠다. (실력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 것인 줄 알았다고 하니) 얼마 안 됐다. (웃음) 형은 일찍부터 음악을 하려고 하던 사람인데, 나는 그냥 ‘기타 치면서 데미안 라이스 노래 부르고 싶다’ 정도였다. 군대 막바지에 조금씩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형을 통해 핑크 플로이드나 오아시스 등을 접하면서 영역을 넓히게 됐던 것 같다. 기타 솔로 같은 것도 따보고 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악기, 기타를 다루는 등 누구보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다.
한국에 플라멩코 단체가 있다. 내가 플라멩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하다 그 단체 선생님과 인연이 되어 스페인에 직접 가서 플라멩코를 배웠다. 그때 ‘파두’라는 포르투갈 장르를 알게 됐고, 터키에서는 ‘카눈’이란 악기를 배웠다. 그렇게 다양한 음악에 조금 더 관심을 두게 됐다. 물론 나는 그 소리를 단순히 내 음악에 잘 녹여내고 싶다는 측면에 가까워 적절한 연주법만 익힌 정도다. 프로 연주자만큼의 실력은 절대 아니다. (웃음)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서 음악에 대한 지평이 넓어지다 보니까 조금 더 수월하게 음악을 만들고 진심을 더 담을 수 있게 된 건 확실하다. 전에는 많은 게 막연했고 음악 카피도 잘 안되고 그랬다.

파제를 대표할 수 있는 음악 혹은 음반을 한 장 뽑아준다면?
무조건 연주 앨범인 정규 1집 < Pa.je Archive >. 그 음반에 오랜 기간 내가 해오던 음악 스타일이 잘 녹아 있다. 곡을 쓰던 때와 현재 시점에서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과거보다 지금의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거다. < Pa.je Archive >에는 당시에 내가 했던 생각과 마음이 온전히 들어있다. 존경도 애정도 때로는 아쉬움도 담기지 않았겠나. 그런 감정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음반에 담았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도 궁금하다.
연주곡 중심의 음반을 한 2장 정도 발매하려고 생각 중이다. 실제로 곡을 꽤 만들긴 했는데 앨범을 내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음반 계획은 한 번에 네다섯 개씩 한다. 예를 들어 < Pa.je Archive 2 >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곡 앨범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상황에 맞춰 조금 더 완성되고, 충분히 즐거운 앨범이 뽑힌다면 그때 작업물을 세상에 내놓지 않을까.

진행 : 박수진
정리 : 장준환, 박수진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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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3 이박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 세 번째 주인공은 테크노와 뽕짝을 한국적인 맛으로 버무린 가수 이박사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 우리는 신나고 재밌는 음악을 한껏 즐기다가도 한편으로는 경박하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내비친다. 이박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비슷했다. ‘몽키매직’을 비롯한 그의 유쾌함을 사랑하는 이들 맞은편에서는 ‘B급 정서’라며 독특한 캐릭터를 폄하하는 시선이 공존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온갖 코멘트에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길을 이어왔고, 이를 따라 이제는 그의 음악도 서서히 재발굴되고 있다.

한낮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이즘을 만나준 이박사의 아우라는 스타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모든 곳이 무대였다. 삶과 음악을 묻는 질문에 툭툭 명언을 남기며 시원시원한 말투로 인터뷰를 휘어잡은 거장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1973년도부터 음악을 시작했으니 올해로 거의 50년 째다. 여태까지의 음악 생활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이 궁금하다.
음악을 한다는 것은 “일기예보”다.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변하곤 하니까. 임기응변이나 기동력, 순발력이 필요하고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예술을 했다. 원래 내 직업은 디자이너로, 결혼식 신랑 예복을 재단하고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체형에 맞추고 내 기술도 개발하다 보니 음악도 자연스럽게 공연마다 나를 새롭게 맞췄다.

여태까지 가졌던 직업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엇인가.
관광 가이드다. 단풍이 나는 가을 아침 5시에 출발하고 새벽 1시에 돌아온다. 갔다 온 후에도 청소하고 버스에서 자면서 다음날 멘트를 외웠다. 몸도 피곤한데다 짖궃은 손님들도 많아 그런 것이 힘들었다. 그래도 저녁에 서울로 돌아올 때 버스에서 불 끈 채로 나이트 클럽처럼 노래 부르는 재미는 있었다.

당시 관광버스마다 있는 ‘메아리 전자’ 같은 음악 기기가 있었다. 코드만 누르면 그에 맞춰 남성은 마이너, 여성은 메이저 식으로 조성도 자동으로 나오는 형식이었다. 즉 이름만 우리가 몰랐을 뿐이지 테크노가 그때도 존재한 것이다. 이 리듬에 맞춰 내가 멜로디와 추임새를 만들어 넣었다. 같은 메이저 노래끼리 메들리로 엮어 150곡 정도 만들어 부르니 반응이 매우 좋았다.

그때의 경험이 본격적인 테크노로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1989년에 메들리 음반 녹음 당시에 청주 스튜디오에서 하루에 150곡을 모조리 녹음했다. 내 관광 가이드 모습을 본 음반 제작자의 요청에 하루에 10만원을 받고 작업했다. 160 BPM 이상으로 속도도 빠른 곡을 그렇게 빨리 완성하니 엔지니어도 놀랐다.

이박사 하면 떠오르게 되는 독창적인 추임새는 어떻게 체득한 것인가?
그냥 반주만 재생해서는 관광버스에서 재미가 없다. 내가 원체 끼가 있다 보니 음악만 듣고서도 입으로 자동으로 그런 추임새가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열광한 관광객들이 당시 이름을 붙여줬는데, 그게 바로 ‘신나는 이군’이었다.

가수 생활 초창기 이야기가 궁금하다.
1973년도 5월 KBS < 민속 백일장 >에 나갔다. 경기민요 부문에 출전했지만 우승자로 제주도에서 올라온 피리 연주자 등 다른 쟁쟁한 악기 연주자들에 밀려 그때는 아쉽게 떨어졌다. 그 이후 ‘배뱅이굿’의 대가 이은관 선생을 찾아갔으나 당시 공연으로 바쁘셨던 때라 만나 뵙지는 못했다. 대신 이창배 선생에게 향해 디자이너 생활로 바쁜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 국악을 배웠다. 그러다 디자이너 생활에 싫증이 나 밤무대에서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민요를 위해서는 옆에 코러스가 필요했다. 그보다는 혼자 할 수 있는 가요를 배워야겠다 싶어 이번에는 가수 나훈아의 음악을 제작한 임종수 선생을 찾아갔다.

종로에서 학원을 하시는 그분과 만나게 되면서 덩달아 한복남 선생님과 가수 방주연, 통기타 혼성듀오 ‘라나 에 로스포’의 한민 등과도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섯 달 동안 악보 공부를 하고 다시 밤무대로 향해 한 달에 30만원 정도의 수입을 벌었다. 이때 내 소문이 퍼져 찾아온 연예부장이 여러 곳에 꽂아줘 하루에 많게는 열한 곳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그 이후의 행보가 결코 쉽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신바람 이박사’라는 이름으로 방송국에 찾아가 활동을 하려 했지만 메들리 음악이라는 이유로 심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겪었지만 이기범 악단의 도움을 받아 MBC < 내고향 좋을씨고 >에 출연하게 되었다. 90년도부터는 아예 전속으로 활동하며 노래를 받았지만 내 성에 차지 않아 직접 만들었는데 이번에도 심의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에 간 TBS의 < 9595쇼 >에서 당시 MC였던 허참, 박세민의 옆에서 5~6개월 간 보조 진행자로 활동했다. 나중에는 허참의 뒤를 이어 MC를 맡을 뻔했으나 윗선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이후 한동안 주춤하다 1995년도 일본 소니를 통해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은 ‘몽키매직’도 일본 곡으로 알고 있다.
원래 제목은 ‘원숭이 나무에 올라’였다. 95년도 공연 무대를 위해 일본에 갔을 당시 레퍼토리로 받은 150곡 중 하나였다. 그 많은 곡을 일주일만에 다 외워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한국어 가사를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접 작사 제안을 했고, 그러면서 ‘몽키매직’이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판권은 일본에 있다.

일본 노래 중에서는 ‘몽키매직’의 인기가 가장 높지만 코로나19 발발 전에 ‘야야야’라는 곡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백댄서 없이 혼자 무대를 하다 보니 그런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즉흥적으로 만든 코러스였다. 지금은 전국적으로 중년 여성들의 품바나 난타 강습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당시 인기가 꽤 많았다. 그런 인기의 비결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인기가 꽤 많았던 수준이 아니라 최고였다. 더군다나 일본은 음반 로열티가 높게 나오고 CD 구매도 활성화된 덕분에 돈도 많이 벌었다. 그리고 활동이 바쁜 탓에 그 많은 돈을 쓸 시간도 없었다.

일본 음악 특유의 느낌과 다르게 당기는 테크노 리듬으로 빠르게 간 것이 차별화 지점이 되어 인기를 끈 것 같다. 일본 측에서는 풀 밴드 구성을 선호했으나 나는 거부하고 그 대신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듀오를 이뤘다. 한국에서의 익숙한 방식이기도 했고 이목을 나에게 집중시키려는 전략이기도 했다. 이것이 잘 맞아 떨어져 소위 ‘대박’이 났다.

그쪽에서 빨간색으로 의상도 정해줬는데, 디자이너 출신이었던 나는 이것도 내 고집으로 양복을 입고 무대에 섰다. 멜로디는 일본 관객들에게 익숙했지만 박자도 빠르고, 가사도 내가 아는 한국어로 바꿨다. 맘에 들지 않는다면 전속 계약을 관두겠다 하니 결국 일본 측에서 논의를 하다, 그래도 익숙한 멜로디 때문에 충분히 먹힐 것이라며 내 손을 들어줬다.

익숙한 멜로디와 경쾌한 리듬의 적절한 조화가 성공을 이룬 것 같다. ‘재미의 전형’이다.
거기에 입으로 넣는 추임새까지 넣어 무대를 꾸리니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당시 1,500명 정도 되는 젊은 관객들이 비록 가사는 한국말이었어도 자신들이 아는 멜로디를 하니 신나서 꽹과리도 치고 엄청난 호응을 보여줬다. 원래 두 시간 공연을 앵콜 요청 때문에 두 시간 더 해 총 네 시간 동안 할 정도였다.

끝나고 내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도 길게 서있었다. 관객들 대부분은 여자였는데, 그 중에서도 또 절반은 음악을 하는 이들이었다. 내 독창성에 매료된 셈이다. 이후 함께 작업을 하자는 제의도 들어왔지만 언어의 차이도 있는데다, 내지르는 한국 스타일과 달리 맛있고 아기자기하게 부르는 일본 스타일이 맞지 않아 혼자 하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런 생소함이 그들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어 ‘한국적 테크노’라며 존경하는 시선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언론에서는 ‘B급 문화’ 혹은 ‘엽기’라면서 깎아내리기도 했다.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많이 겪었던 일이었다. 손님들이 수고비도 주지 않으면서 부려먹는 경험도 종종 있었다. 이를 통해 내가 철칙을 하나 얻었다. ‘칭찬을 욕으로 듣고, 욕을 칭찬으로 듣는다.’

인천과의 연관점도 듣고 싶다.
어린 시절 취미가 있어 < TV쇼 진품명품 >에도 나오셨던 ‘장석’ 구서칠 선생님께 간석동에서 서예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게 인천에 한번 발을 들이니 장학회도 다니다가 나이트클럽에도 가게 되고 했다.

인천에 대한 이미지는 어떤가.
최고다. 인천에서는 나쁜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박사는 열심히 사는 사람’, ‘부지런하다’ 같은 좋은 얘기만 들었다. 내가 실제로 남에게 피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지만. 그리고 공연 문화에서도 인천은 다르다. 타 지역에 비해 사람들이 흥이 많아 점잖지 않고 적극적이다. 즉 노는 문화가 강하다.

부평구문화재단과 함께 일한다면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나.
홍보대사가 하고 싶지만 인천 사람이 아니라 좀 곤란하니, 역시 공연을 하고 싶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경기 민요부터 해서 정통 오리지널 뽕짝까지. 임창정과 했던 ‘임박사와 함께 춤을’ 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피쳐링하는 그런 그림도 좋다.

국내 후배 중에서 유심히 보는 가수가 있나 궁금하다.
김호중 노래가 좋다. 소위 ‘쇳소리’가 들어간다. 딱 찔러주는 느낌을 좋아하는 한국 취향에 맞게 김호중의 그 유리를 긁는 듯한 목소리에는 카리스마가 있다. 누군가는 약간 답답하게 느낄지 몰라도, 원래 완벽한 느낌 보다는 인간적인 느낌이 사람을 안달나게 하는 법이다.

여러 무대를 서면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곳은 어디라 생각하는가.
나이트 클럽에 가면 그곳에 맞게, 칠순 잔치 가면 다 특성에 맞게 다 나를 맞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는 개성, 나만의 것을 그때그때 보여준다. 며칠 전 안산 공연에서도 짧은 무대였지만 즉흥적으로 가사를 보여주니 관객들이 놀라더라.

그동안의 음악 작업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결과물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경기민요’다. 1989년 메들리 음반 1, 2, 3집 중에서 2집을 경기 민요에 디스코를 섞어 만들었다.

여태까지 온갖 추임새를 다 했다. 그 중에서 최고의 추임새를 선정한다면 어떤 것일까.
“좋아 좋아.” 내가 좋다 하니 보는 사람들도 다 좋아한다. “고래?” 하는 것도 다 내 입에서 나온 추임새다. “앗싸” 등도 반응이 좋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누구인지.
딥 퍼플이다. 어릴 때 팝송을 들으면서 ‘Highway star’, ‘Black night’ 등을 많이 접했다. 이외에도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이나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도 빼놓을 수가 없다. 대체로 솔로보다는 밴드 음악을 좋아했다.

음악이라는 존재를 이박사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예술은 나의 취미요, 음악은 나의 친구요, 노래는 나의 동반자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진행 : 임진모, 임동엽, 정다열, 한성현
정리 : 한성현
사진 : 임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