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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7 이정선 X 윤병주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일곱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포크의 대부 이정선과 블루스 대표 주자 윤병주다.

정확한 수식인지 모르지만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로 음악인구에 회자되는 이정선 그리고 블루스 하면 떠오르는 뮤지션 윤병주를 함께 만났다. 근래 윤병주가 이끄는 프로젝트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은 막 ‘항구의 밤’이라는 곡을 원곡의 주인공 이정선과 함께 녹음했다. 10월에 발표할 음원을 미리 들어봤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귀를 잡아끈다.

이정선이 오래전 내놓은 곡을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을 위해 새로이 편곡해 레코딩한 것이다. 이 기획은 대중음악의 발상지라고 할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동시에 인천 부평 지역 뮤지션들을 찾아 음원제작으로 연결하는 ‘글로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밴드 ‘지인들’의 멤버 중 한 명도 이곳 인천 출신이다.

이들의 조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윤병주와 지인들은 전에도 이정선의 곡 ‘거리’와 ‘우연히’를 리메이크해 싱글로 낸 바 있다. 얼핏 음악적 관련성이 떨어져 보이는 둘의 연(緣)이 어떻게 맺어진 건지 궁금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재미있게’ 음악을 하려는, 어쩌면 음악가의 기본을 강조하며 음악 녹음의 즐거움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이정선의 곡인 ‘항구의 밤’을 녹음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정선이 직접 노래까지 했는데… 그 많은 곡들 가운데 왜 하필 ‘항구의 밤’을 고른 건가?
윤병주: 사실 애초 (이)정선 형의 곡들 중에서 딱 그 곡을 원했던 건 아니다. ‘바닷가의 선들’도 있고 기존에 내가 해오던 블루스, 록적인 색채를 잘 살릴 수 있는 형 노래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색다른 도전이었다고 할까. 안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도 직접 해보면 결국 우리 음악의 맛이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다고 본다. 부평구문화재단 기획대로 인천이 항구라는 점도 생각했고…

‘항구의 밤’이 어떤 곡인지 알려 달라.
이정선 : 이 곡은 1990년에 나온 앨범 < 雨 >에 수록되어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단출하게 어쿠스틱 기타 하나 가지고 만든 노래였다. 이번에는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과 함께 하는 만큼 더 리얼하게 항구의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다. 시끄러운 선술집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복작복작한 느낌?…

원곡이 슬픈 감정을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번 음원의 보컬은 상대적으로 밝게 느껴진다.
이정선 :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원래 즐거울 때가 더 슬픈 거 모르나? (웃음) 원래 ‘항구의 밤’이 그렇게 슬픈 노래는 아니다.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을 담고 있다.

윤병주 : 오랫동안 이정선 음악을 들어 왔다. 어릴 때 들은 정선이 형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근래 공연에서 받은 느낌은 또 다르더라. ‘항구의 밤’에서의 보컬은 뭐랄까… 또, 또 다른 제3의 보이스컬러였다. 확실히 정선이 형 연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깊이가 존재한다. 젊을 때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있었다면 나이가 쌓인 지금 옛 노래를 부르니 맛이 또 다를 수밖에…

‘항구의 밤’에 블루스의 터치가 강하게 느껴져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얼핏 윤병주와 이정선 간에 음악적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한국에서 블루스를 밴드 명으로 내세우며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표방한 게 바로 엄인호와 정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촌 블루스’ 아닌가?
이정선 : 1970년대 초에 음악을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다. 시작은 그렇게  재미였는데 한 10년 쯤 음악계에 있다 보니 바로 그 재미가 사라졌다. 다 돈과 연결되니까 즐거움을 좇으며 활동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엄)인호를 만나서 그냥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재밌게 음악 한번 해보자’ 하면서 음악 동호회 느낌으로 ‘신촌 블루스’를 만든 것이다.

그래도 당시 블루스를 내걸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정선 : 공연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카페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주로 놀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 관심 있는 장르도 다르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좁히고 좁히다 보니 블루스만 남더라. 그래서 블루스를 했다. (웃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게 블루스는 늘 편한 음악이다. 어렵게 만들고 싶으면 어렵게 만들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쉽게 만드는. 어떻게 해도 내 음악적 뿌리는 늘 블루스에 닿아있다. 많은 분들이 나를 포크로 연관 짓지만 실은 블루스다.

윤병주는 이름만 들어도 즉각적으로 블루스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윤병주 : 블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음악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젼 시기, 그러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 음악이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블루스에 영향받은 록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연주를 하면 블루스적인 게 늘 풍겨 나온다. 그만큼 내 몸에 블루스가 배어 있다.

‘노이즈가든’을 거쳐 ‘로다운 30’ 그리고 새 프로젝트인 ‘윤병주와 지인들’ 역시 블루스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윤병주 : 물론 멤버 변동이 있긴 했지만 ‘로다운 30’은 함께 모여 작업을 시작한 게 2000년이다. 반면 ‘지인들’은 멤버들 각자 밴드들인 ‘소울트레인’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관계가 조금 더 느슨하다. 그룹의 모태는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다. 1960년대 활동한 미국 밴든데 그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한다. 블루스도 하고 잼도 계속한다. 요즘 미국 쪽을 보면 결국 다 잼과 루츠(Roots)록 쪽 음악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우리도 비슷하다. 다 내려놓고 실컷 연주나 해보자 싶었다. 정선이 형 곡 하나로 무대에서 십 분씩 연주하고 그랬다.

‘지인들’을 통해 꼭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윤병주 : ‘로다운 30’은 당연 창작 곡이라면 ‘지인들’은 커버(Cover). 즉 기성곡을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원래 커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커버를 녹음해서 발표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안 해본 거라는 것에 끌렸다고 할까. ‘항구의 밤’(10월에 발매 예정)도 그렇고 올해 초 제작한 ‘거리’, ‘우연히’가 모두 이정선 선생님의 곡이다.

윤병주가 리메이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땠나?
이정선 : 뭐 좋았다. (웃음) 근데 ‘거리’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나 싶긴 했다. 이게 내 정규 1집 < 이정선 1집 >(1974)에 수록된 곡인데 그 음반이 나오자마자 딱 금지가 됐다. 11곡 중에서 9곡인가가 금지됐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한데…
이정선 : 병주가 참 맛있게 기타를 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노이즈가든 때의 윤병주가 회상될 만큼 ‘윤병주스러운’ 기타 톤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노이즈가든을 알았느냐 물으니)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부터 음악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윤병주 : ‘거리’를 녹음할 때 정선이 형이 피처링에 참여해주지 않으실 걸 대비해 다른 버전의 연주까지 다 맞춰 뒀었다. 이 곡을 커버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형이 함께해주길 바랐는데 다행히 흔쾌하게 승낙해주셔서 고마웠다. 늘 외국 팝을 듣던 내게 국내 블루스 음악의 강렬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니까 여러모로 뜻깊기도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윤병주 : 2011년 즈음, 한 레이블의 축하 연주를 ‘로다운 30’하고 정선이 형이 같이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만나서 ‘건널 수 없는 강’, ‘우리네 인생’, ‘우연히’, ‘오늘 같은 밤’을 포함해서 네 다섯 곡 정도를 함께 했다.

함께 작업하는데 음악적 트러블은 없었는지?
이정선 : 합을 많이 맞추려고 하면 더 틀려진다. (웃음) 요즘 시대는 어지간한 비트가지고서는 세다고 느끼지 않지 않나. 그래서 나는 윤병주와 지인들이 기타나 리듬을 더 강하게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엔지니어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안 싸우려고 그냥 뒀다. (일동 웃음)

윤병주는 이정선과의 작업이 주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윤병주 : 내가 처음 팝을 들은 게 초등학교 때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 롤링스톤 >같은 외국 록 잡지를 보셨고 그 영향으로 나도 < 월간 팝송 >을 끼고 살았다. 그랬으니 우리나라 밴드 음악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겠나. 그러다 우연히 정선이 형의 최신 음반을 사서 듣게 됐는데 형이 자주 하는 말처럼 한국적인 ‘뽕’스러움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다. 지미 페이지 연주에서나 나오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블루스가 솟아 나왔다. 그 이후로 정선이 형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다.

편곡 과정은 수월했나?
병주 : ‘항구의 밤’은 형이 무대에서 종종 연주하기도 하는 곡이다. 특히 < EBS 스페이스 공감 >이나 < 온스테이지 > 영상이 좋다. 그 질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녹음도 빨리 끝난 편이다.

이번 음원제작은 부평구문화재단 기획의 일환이다. 많은 지자체나 문화재단들이 공공재원으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할 건 없는지 말해 달라.
이정선 : 좋은 기획이고 재밌는 프로젝트다. 나는 공공 재원으로 음악 신을 지원하는 사업을 좋게 보고 있다. 다만 음악에 대한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늘 최선을 다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색을 잃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간섭이 전혀 없어서 좋았다. (웃음)

함께 작업하면서 선배에게 배운 것이 있었을 텐데…
윤병주 : 정선이 형은 항상 음악을 “재밌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곁에 있으면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또 하고 싶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내 음악이 지금 이 시대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안절부절 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늘 지금에 행복할 수 있는 마음. 20, 30년 후에 정선이 형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갖고 싶을 만큼 많은 걸 배웠고 또 영향을 받았다.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선희
사진 : 임선희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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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6 리듬파워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자·타칭 ‘인천의 아들’ 리듬파워다.

안주하지 않는 자세와 자신감. 그리고 무엇보다 끈끈한 우애가 돋보였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나 힙합이란 꿈을 함께 좇은 리듬파워의 시작은 탄탄대로였다. 처음 쓴 자작곡으로 굵직한 오디션을 한 번에 통과하는가 하면 200:1의 경쟁률을 뚫고 다이나믹 듀오가 수장으로 있던 < 아메바 컬쳐 >에 들어갔다. 이후 이들이 세상에 확실한 카운터펀치를 날리기까지 자그마치 7년의 시간이 걸렸다. 특유의 재치 있는 가사와 에너지를 쏟아냈지만 대중의 너른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29. 멤버 보이비의 입대까지 겹치며 리듬파워는 정체기를 마주한다.

3년에 걸쳐 매회 출연한 < 쇼미더머니 >는 멤버 행주의 말에 따르면 애초 퇴로가 없는 ‘유일한 선택’이지만 결국은 회심의 일격이 됐다. “우린 놀러 나간 게 아니었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 얼마 전 오랜 시간 함께한 < 아메바 컬쳐 >를 나와 < 팀플레이 뮤직 >을 직접 설립한 그들에게 지난날의 소회 그리고 앞으로 밟아가야 할 길을 물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막 2막을 연 리듬파워와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얼마 전 10년간 함께한 소속사 ‘아메바 컬쳐’에서 독립했다.
행주 : 설렘 반, 아쉬움 반이다. 소속사를 나오면서 멤버들끼리 ‘팀플레이 뮤직’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옛날에는 먼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목표가 눈 앞에 펼쳐지니 설레는 마음이 들더라. 반면, 아메바 컬쳐에서 10년, 무려 10년간 있으며 쌓인 어마어마한 정 때문에 아쉬움도 컸다.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마음이 좀 이상했다.

회사 설립은 오래전부터 꿈꿨던 건가?
보이비 : 알려져 있다시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다. 우리들끼리 뭔가 해보는 것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스텝 중 하나가 회사였다. 장기적인 커리어를 봤을 때 계속해서 형들(아메바 컬쳐의 설립자이기도 한 다이나믹 듀오)과 함께하는 게 좋을까 자립하는 게 좋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해왔다. 그러다 작년 이맘때 쯤 의견을 확실히 모았고.

팀플레이 뮤직에서의 활동은 아무래도 과거와는 다를 것 같다.
지구인 : 아메바 컬쳐에 있을 때는 회사의 규모도 크고 색이 뚜렷하다 보니 즉각적인 아이디어 실현에 제약이 있었다. 우리끼리 해보려한 이유들 중 아이디어를 흐름대로 속도 있게 가져가 보자 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행주 : 대중들 입장에서는 ‘쟤네가 왜 나왔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그냥 우리 곡을 들려주고 싶다. ‘아 이런 음악을 하고 싶어서 나왔구나’ 알 수 있을 거다. (웃음)

음악 스타일의 변화라고 볼 수도 있는 건가?
보이비 : 따지고 보면 예전에도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어떤 대중적인 노선이 고려됐었다면 이제는 상황이 달려졌지 않나. 우리도 이제 막 시작해서 예측에 머물긴 하지만 곡 단위의 양극화가 심해질 것 같다. 어떤 곡은 엄청 대중적이고 또 어떤 곡은 엄첨 비대중적이고. 중간노선은 잘 안 걸을 것 같다.

행주 : 때마침 오늘 ‘팀플레이 뮤직’의 첫 싱글들이 발매된다. ‘Anycall’과 ‘T3AMPLAY’. 우리의 첫 출사표이자 자영업자의 포부를 담았다. 우선은 이 곡들을 즐겨 달라. (웃음)

싱글에 대한 소개를 조금 더 해준다면?
보이비 : ‘T3AMPLAY’는 회사 이름과 동명이다. 대찬 포부를 선전포고하는 느낌? 이 곡이 미래를 상징한다면 ‘Anycall’은 과거다. 10대 후반부터 20대에 겪은 것들이 한 사람의 취향에 많은 부분 영향 미친다. 그 시절이 우리에게는 넵튠스(The Neptunes)다. 항상 넵튠스의 클럽튠이 가슴 속에 남아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아 이 스타일은 아직 아무도 안 했지 싶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사운드에 더 중점을 둬 작업했다.

어느덧 데뷔 10년 차다. 각자가 기억하는 상징적인 장면들이 있을 것 같은데.
지구인 : 처음 공연했던 2008년. 우리끼리 그냥 인천 술집에서 언젠가 공연해보자는 말만 하다가 처음으로 UMF(Underground Microphon Federation) 오디션에 나갔다. 팔로알토, 피타입, 슈프림팀 등이 거쳐 간 나름 큰 공연 브랜드다. 23살쯤이었는데 긴장해서 어떻게 무대를 끝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웃음) 홍대의 수 노래방 쪽을 걸어가다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기뻤다. 돈이나 명예는 지금 훨씬 많이 가졌지만 ‘기쁨’의 크기는 그때가 제일 컸던 것 같다.

행주 : 곡을 만든 것도 처음이었고 셋이 합을 맞춰서 무대에 선 것도 처음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경으로, 젊음의 패기로 무작정 공연했다.

보이비 : 데모 파일명을 그대로 노래 제목으로 썼다. ‘빅바운스’. 내 첫 소절은 ‘Make it rain(돈을 뿌리다)’ 였다. (일동 웃음)

행주 : 난 아메바 컬쳐와 첫 도장 찍었을 때다. 그전까지는 그저 방구석에서 곡 만들고 이유 없는 자신감만 있었다. 그때 회사 오디션 경쟁률이 200:1 정도라고 들었다. 그냥 무작정 부딪혔고 바로 뽑혔다. 솔직히 왠지 모르게 될 것 같은 마음이 들긴 했다. (웃음) 다이나믹 듀오 형들은 힙합 신에서 최고의 우상 같은 존재인데 그 사람들이랑 계약하는 게 정말 꿈만 같았다. 홍대 멀티샵에 가서 각자 티 하나, 모자 하나씩 사고 부모님한테 돈을 보내드렸다. 만화의 한순간이지 않나.

높은 경쟁률을 뚫을 수 있던 이유가 뭘까?
지구인 : 형들이 군대에서 국군 방송 라디오를 진행했다. 당시 우리는 EP 하나를 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슬슬 이름이 알려질 때였는데 형들이 우리를 게스트로 초대했다. 목이 터져라 라이브를 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보이비가 꼽는 변곡점은?
보이비 : 군 입대. 솔직히 기존에 냈던 EP 두 장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음악적인 성과도 미비하지 대학 졸업도 못 했지 나이는 29이지. 팀을 그만두거나 해체할 것도 아닌 상황에서 한 명이 군대를 가야 하는 거니까 여러모로 각성이 많이 됐다.

행주 : 보이비가 군대를 갔을 때 처음으로 < 쇼미더머니 > 출연을 생각했다. 절실함을 넘어서서 다 이길 거라는 자신감이 컸는데 그걸 나도 그렇고 보이비도 그렇고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 계기 및 발판이 보이비의 입대다.

지구인 : 친구 관계는 계속 가겠지만 어쩌면 리듬파워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보이비 군대 들어갈 때 셋이서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 쇼미더머니 >로 변화를 좀 만들어보자 했는데 결론적으로 좋은 한방이었다.

< 쇼미더머니 >가 리듬파워 성장에 큰 활력을 줬다.
보이비 : 군 제대 하고 나는 바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뒤도 보지 않고 올라갈 길만 남았다 그렇게 믿고 했다.

행주 : 개개인으로 봐도 팀으로도 봐도 < 쇼미더머니 > 출연은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래퍼들이 ‘놀러 나왔다’ 이렇게 인터뷰를 종종 했는데 우리는 아니었다. 그런 거와는 달랐다. 이거 아니면 안 될 만큼 날이 서 있었고 그만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구인 : 쿨한 척 하고 싶지 않았고 매 방송에 진지하게 임했다. 방송을 통해서 대외적으로 봤을 때도 래퍼를 내 직업으로 삼을 수 있게 됐다. 예전에는 행사를 가면 불특정한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었다면 이제는 아니다. 어딜 가든 우리를 아는 사람들 앞에 선다. < 쇼미더머니 >가 확실히 우리 성장에 가속도를 붙여줬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은 각별하다. 그들 스스로 몇몇 인터뷰에서 ‘인천의 아들’이라 공공연히 밝히기도 했고 실제로 2년 간 인천 홍보대사로 활동했다. 특히나 그들은 한국 힙합에서 그간 지양되어 온 지역 색을 음악에 반영하는 이른바, ‘샤라웃(Shout out)’을 국내에 거의 처음으로 선도했다. 고등학교 시절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을 회상하는 ‘바보언덕’, 동성로에서의 일탈을 그리는 ‘동성로’, ‘인천 출신은 인천공항으로 가는 중’ 노래하며 래퍼로서의 자부심을 다지는 ‘인천공항’ 등에서 그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을 느낄 수 있다.

행주와 지구인은 중학교, 보이비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걸로 안다. 어렸을 때부터 다 같이 힙합을 들었던 건가?
지구인 : 중학교 때 서태지에 엄청 빠져있었다. 서태지가 랩 메탈을 우리나라에 가져오지 않았나. 그 노래들을 듣고 충격 아닌 충격을 받고 이후 림프 비즈킷, 린킨 파크의 음악을 밤새 팠다. 그러다 고2때 린킨 파크가 내한을 왔는데 힙합을 좋아하던 보이비와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거기에 행주까지 합류하게 됐고.

행주 : 힙합의 매력에 빠지게 된 건 거의 전부 이 친구들의 영향이다. 나는 그냥 음악을 듣고 부르기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남들이 쭈뼛쭈뼛할 때 제일 먼저 손들고 앞에 나가서 소리 내고 뽐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우리 때는 힙합이 제일 비주류였는데 옆에 힙합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들이 나서길 좋아하는 나와 자연스레 맞아떨어졌다.

지구인 : 20살이 돼서는 행주가 학교를 빠지고 내가 있던 신촌으로 넘어오면 다 같이 향뮤직에 출근하다시피 갔다. 한두 시간 동안 거기서 음악 듣고 고르고 고른 CD 한두 장 사서 인천에 오고 그랬다. 인천이 방이 되게 싸다. 연습실이 없으니까 한 명이 CDP를 들고 오고 인천에 방 하나 잡아서 랩하고 가사 쓰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평생 이렇게 살면 진짜 좋지 않을까 얘기도 자주 나눴다. (웃음)

가사나 뮤직비디오에 인천이 자주 등장한다.
보이비 : 어린 시절 우리가 듣고 자란 힙합은 늘 자기의 지역색을 반영했다. 자기가 살아온 곳을 샤라웃하는 거다. 래퍼들이 자수성가해서 자기 지역을 대표하는 게 자연스러운 특성이었다면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었다. 그걸 거의 우리가 처음 했을 거다.

행주 : 2010년에 EP < 리듬파워 >를 냈다. 거기 보면 ‘인천상륙 작전’이라는 곡이 있는데 그걸 쓸 때쯤 아 우리나라 래퍼들은 자기 지역 얘기를 잘 안 하네 깨달았다. 힙합하면 홍대로 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고 자연스레 씬들도 홍대에 집결돼 있었다. 우리가 먼저 아이덴티티를 꺼내야겠다는 본능이 있었다.

리듬파워에게 인천이란?
지구인 : 요즘은 힙합씬에서 자기 출신을 밝히는 게 많아졌다. 창모도 그렇고 제이통도 그렇고. 동료 뮤지션들을 만났을 때 그들이 우리의 샤라웃에 영향 많이 받았다고 말할 때 자부심이 든다. ‘바보언덕’, ‘인천공항’, ‘동성로’ 등 인천에 관한 곡들도 많다. 물론 우리의 정체성이 인천에만 얽매여서는 안 되겠지만 큰 음악적 영감이 된 건 확실하다.

행주 : 사실 한국에서 음악에 지역 색을 나타낼 수 있는 곳으로 부산을 종종 떠올리는데 인천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뱃사공이나 슬리피도 다 인천 출신이다. 2017년부터 2년간 리듬파워가 인천 홍보대사를 했다. 이거 한다고 해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엄청 큰 뿌듯함을 느낀다. 현실적으로 보면 누군가에게 혹은 인천에게 멋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홍보대사를 맡긴 게 아닌가. 10년 뒤에도 인천 홍보대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만의 커리어를 밀고 나가고 싶다.

10년 활동을 되돌아본다면 지금 위치에 만족하는 편인가?
보이비 : 전혀 아니다. 아직도 올라갈 곳이 엄청 많이 남았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쉬고 있지만 불과 재작년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재정적인 여유도 있고 삶에 안정감도 있었다. 그런데 스스로 거기서 나왔다. 조금 더 바깥세상에 발 디딤으로써 시쳇말로 올라가거나 떨어지거나 둘 중 하나로 가보자 했다. 전 회사에 계속 남았다면 안정적으로 오래 머물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으로 올라가진 못했을 거다.

지구인 : 돌이켜보면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한 건 환경의 변화가 컸다. 늘 어떤 공간에 우리를 밀어 넣었다. 큰 성공을 하면서 말년병장의 나태함이나 매너리즘에 빠지기 딱 좋을 시기였는데 이게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2막을 열어서 치고 올라가야 한다. 또 보니까 딱딱 계획 세운 대로 따라가지는 않지만 얼추 생각한 대로 흘러갔다. 더 높은 정점을 꿈꾸고 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일단 해보려 한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지구인 : 우리가 떼창을 진짜 잘 뽑아낸다. 그걸 보여줄 수 있게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꽉 채운 단독 콘서트를 열고 싶다. 아님 DJ DOC 형들이나 싸이 형이 한 것처럼 풀 파티도 해보고 싶고.

보이비 : (왜 풀 파티냐고 묻자) 그 시대에서 제일 신나는 음악을 하는 팀이 되고 싶다. 에픽하이, 다이나믹 듀오도 풀 파티를 했었다. 베이스는 힙합이지만 여기 가면 제일 신나게 놀 수 있는 파티 넘버원 콘서트.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음악 장르는 좀 다르지만 합쳐지면 터지는 어떤 시너지가 있다. 유쾌하고 강한 에너지라고나 할까. 그걸 한껏 보여주고 싶다. (웃음)

각자의 베스트 음반도 궁금하다.
행주 : 팔로알토 형의 언더그라운드 시절 앨범들을 다 좋아한다. 처음으로 돈 주고 산 외국 앨범은 에미넴의 < Curtain Call >. 그의 히트곡만 모아 놓은 음반이다. 래퍼로서 색을 잡게 도움 준 뮤지션은 푸샤 T고 또 요즘은 윤종신 선배님의 행보를 롤 모델 삼고 있다.

보이비 : 2003년에 MBC < 음악캠프 >에서 렉시의 ‘Let me dance’ 무대를 봤다. 그때 테디(Teddy)가 피처링이었는데 그 모습에 홀딱 반했다. 톤이며 랩이며 퍼포먼스며 다 그냥 아주 끝내줬다. 또 꼽자면 대학교 때 힙합 동아리 방에서 나스(Nas) 곡에 피처링으로 등장하는 루다크리스를 우연히 보고 그의 플로우 디자인과 발성을 따라 하다 목이 맨날 쉬기도 했다. (웃음) 인간적 매력이나 가사 쓰는 스타일에는 제이 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구인 :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떠오르는 대로 말해보자면 린킨 파크 1집 < Hybrid Theory >, 림프 비즈킷 2집 < Significant Other >가 있고. 백스트리트 보이즈, 엔 싱크, 웨스트 라이프도 되게 좋아했다. 맥스 마틴 특유의 그 팝스러운 곡들이 취향에 맞았다. 힙합은 다이나믹 듀오의 < Taxi Driver >, 제이 지의 < The Black Album >, < The Blueprint >…. 여기 까지만 할까요? (일동 웃음)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동엽, 조지현, 장준환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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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5 박기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그리고 베테랑 가수 백영규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 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노래 잘하는 가수 박기영이다.

박기영은 노래를 잘한다. 잘해서 1997년 데뷔 이래 히트곡이 많다. ‘시작’ ‘마지막 사랑’, ‘Blue sky’, ‘산책’, ‘나비’, ‘그대 때문에’, 그리고 영화 <시>의 ‘아네스의 노래’와 ‘넬라 판타지아’ 등등 꽤 여러 노래가 떠오른다. 동시에 TV 오디션 형식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오페라스타>,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등에 나와 과시한 돋보이는 가창력도 기억된다. 하지만 박기영은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먼저 노래하는 걸 좋아한다. 인터뷰 중 짧은 몇 마디에 ‘싱어 유전자’가 느껴질 정도.

코로나 시국에 최근 다시 유튜브 활동에 돌입한 것도 ‘노래는 쉬지 않는다!’라는 사고의 발로다. 그는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고 했다. 당연히 음악에 대한 감사함이 내재화해 있다. 고교 방송반 활동이 자랑스러웠다는 그는 인천이란 연고가 많은 음악적 토대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음악 관련 대화를 즐거워했다. 어떤 질문에도 조금의 막힘이 없이 답을 풀어냈다. 그는 가수로서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수차례 강조했다.

23년이 된 가수 활동을 하면서 사이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팝페라 시도일 것 같다.<불후의 명곡>의 ‘넬라 판타지아’ 영상을 보고 ‘박기영 맞아?’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중가수가 오페라 영역에 도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특별한 계기가 있나?
2012년에 tvN<오페라스타> 출연한 것이 결정적 계기이다. 음악적 도전이기도 하고 그때 <오페라스타>가 뜨거운 반응을 얻을 만큼 매우 핫(hot)했다. ‘시즌 1’이 성공을 거둔 것을 보고 ‘왜 나를 안 불렀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하고 싶어서 ‘시즌 2’ 출연 연락이 오자마자 바로 ‘오케이’했다. 당시 많은 경연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이왕 한다면 새로운 것을 하고 싶었다.

자작곡을 시도한 지난 2000년의 3집 ‘Blue sky’와 팝페라 시도의 음악적 쾌감을 비교한다면
20대는 알 수 없는 치기가 앞섰다. 굉장히 열정적이지만 근원을 모르고, 자기 자신에게 도취해 있다. 나중 그게 별거 아니고 허상이라는 걸 깨쳤을 때 엄청난 좌절을 경험했다. 데뷔해서 좋은 반응을 얻어 바쁜 삶을 보내게 됐을 때 ‘내가 지금 뭐 하는 걸까’하는 정체성 혼란이 왔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하는 물음조차 던질 여유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박기영 하면 떠오르는 곡들, 이른바 히트곡이 그 당시의 노래들이라는 점이다.

‘넬라 판타지아’의 음악적 기쁨이 더 컸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 어릴 때는 음악을 ‘안다’ 보다 ‘어쩌다 보니 했다’의 느낌이 더 컸다. 많이 혼란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십억을 줘도 그 당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대면 콘서트가 다시 일상화되면 공연에서 과거 히트곡들은 안 부를 건가
나를 기억해주는 곡들인데 당연히 한다. 대중의 니즈니까. ‘넬라 판타지아’도 대중의 니즈 중 하나이다. 아마 사라 브라이트만 언니는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해할 것이다. (웃음) 원곡자보다 영상 조회 수가 높으니 말이다.

박기영의 히트곡들에 성악적 요소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넬라 판타지아’가 놀랍다. 어렸을적 성악에 대한 경험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전혀 없다. <오페라스타> 하기 이전에는 성악의 성자도 몰랐다. 다들 어렸을 때 배웠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심지어 성악가 김활란 선생님과 같이 공연을 했는데 대기실에 오셔서“솔직히 말해봐. 원래 했지?”라고 물어보실 정도였다. 당시에 해외와 달리 우리나라는 대중가수가 팝페라로 도전한 경우는 드물어서 ‘내가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록, 발라드, 재즈, 팝페라, 포크 등 추구한 장르가 다양하다. 장르에 대한 왕성한 식욕이랄까. 박기영의 특장인데 또 그중 하나로 ‘어쿠스틱블랑’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오페라스타>로 성공했을 때 아이가 생겨서 모든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애착육아를 하면서 아이에 전념하는 시기를 보냈고 음악을 하려면 혼자 곡도 쓰고 명상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그러질 못했다. 음악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과 같이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 라이브 앨범도 냈는데
현재진행형 뮤지션이라는 뜻이다. 스튜디오 라이브의 경우, 국내에서 최초로 PA 스피커 없이 진행했다. 녹음실에서만 접할 수 있는 섬세한 사운드를 공유하고 싶어서 스튜디오에 관객을 초대하여 공연을 선보였다. 관객은 헤드셋을 끼고 제 노래를 듣는데 숨소리까지 들려서 다들 깜짝 놀라시더라.

한번은 팬분들께 단독 콘서트와 스튜디오 라이브 중 어떤 것이 더 좋았냐고 물어보았는데 스튜디오 라이브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았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스튜디오 라이브를 취소 했는데 내년에는 꼭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많은 프로그램 출연과 어쿠스틱블랑, 라이브 등 쉼 없이 꾸준하게 활동한다.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유는
아니다. 쉰 적 은근히 많다. 20대는 소속사와의 갈등으로 쉬기도 했다. 잠시 잊혔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딸을 낳고 키우면서도 팬들 머릿속에 사라질 수 있었다. ‘어쿠스틱블랑’을 한 이유가 바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나를 살게 한다.

약 20년 넘는 음악 인생에서 중요한 모멘트를 짚어본다면
일단 처음 1999년 ‘시작’과 ‘마지막 사랑’은 대중이 나를 인식해주신 감사한 시기이자 아까 말했듯 너무나도 정신없던 시기이다. 4년이라는 공백을 마친 후 오랜만의 활동인 ‘나비’와 ‘그대 때문에’가 분기점이 될 것이다.

그다음은 2010년 7집 앨범의 ‘빛’이 타이틀이었는데 쫄딱 망했다. 이때 당시 가요계가 음반을 내면 손해인 분위기였다. 갈팡질팡하던 때를 지나 ‘아네스의 노래’로 다시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이후에 <오페라스타>와 크로스오버 앨범을 뽑을 수 있겠다.

‘아네스의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진 곡인가.
5, 6집이 여러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 7집이 이에 비해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간 달라진 음악 시장을 마주하면서 더 이상 음악을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을 접을까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찰나, 연락이 왔다. 지금은 종영한 <대한민국 영화대상>에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8개 부문에 이름을 올렸는데 OST가 없다고, 여성이 주인공이고 여성을 소재로 하였으니  OST를 만들고 영화제 축하 무대에 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너무 멋있어서 바로 ‘오케이’ 했는데 영화제가 3주 남은 시점이었다. (웃음)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창동 감독님이 작성한 시가 나오는데. 이 시가 주는 여운이 매우 강력해서 어떻게 함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대로 넣었을 때 의미가 살아있다고 판단했다. 영화 속 시가 없었더라면 노래를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네스의 노래’ 덕분에 음악을 계속하게 되었다.

박기영 관련한 자료 어느 것을 찾아봐도 어김없이 인천 신현초등학교, 동인천여자중학교, 인성여고 등 학적 사항이 나온다. 인천 출신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서울과 가까운 지역적 근린 때문에 굳이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박기영은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그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인천이 고향 맞나.
엄밀히 말하면 서울에 태어났고 학교 들어가기 전에 인천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 회사로 인해 인천의 남동공단에서 살았고 신현초등학교를 다녔다. 중학교는 ‘동인천여자중학교’를, 고등학교는 ‘인성여자고등학교’를 나왔다.

인천에 대한 기억은. 서울에서 이사 온 것이라면 친구가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처음 인천으로 이사 왔을 때 말처럼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아이들이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서 아무도 놀아주지 않았다. 친구들에 비해 소심한 성격이었는데 살아남기 위해서 나중에는 저절로 씩씩하게 되더라. (웃음) 같이 놀 친구가 없어서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아마 놀 친구들이 많았다면 음악을 안 했을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시작함에 있어 학창 시절이 중요하다고 본다.
생각해보면 중학교 때 방송반을 맡았고 합창 대회에 매번 나간 걸로 보아 음악적으로 무언가 있었다. 방송반이니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고 소개하는 글을 쓰고 낭독을 하면서 쌓은 경험이 지금 와서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까지 계속 방송반을 했고 방송제도 나갔다. 인성여자고등학교 ISBC(InSung Broadcasting Center) 21기 방송반이었는데, 이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컸었다. 인천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가 우리 학교 방송제를 보러 올 정도였다. 나의 음악 생활에 많은 토대가 되었다.

다시 얘기를 돌려서 코로나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나
3월에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5월 즈음 되니 어쩔 수 없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혼란스럽긴 하다. 생물학자 최재천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하게 된 생각이 있다. 직접 했든 안 했든 인간의 공동 문제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나도 책임이 있고 나도 가해자 중 한 명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 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 반성과 활로 모색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가장 안타까운 건 아이들이다.

코로나로 인해 음악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유럽이 문화 예술과 인간에 대한 진중한 물음이 생기고, 음악에 대한 다양한 장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느 정도 먹고 살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세계 전체가 많이 침체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기에는 단순한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기분 전환에 몰두하는 것이 편하다. 나도 요즘 시기에는 과거 깊은 감성으로 작업했던 내 노래를 듣는 것이 힘들 지경이다. 예상을 하자면 대중문화 자체가‘쉽게 다가올 수 있는 것’ 조금은 신나는 것으로 교체되지 않을까.

현재 준비하고 있는 작업이 있는지
크로스오버 정규 앨범을 준비하고 있다. 2 LP를 생각하고 있고 6~7곡 제작하는데 ‘넬라 판타지아’도 넣을 예정이다. 하나씩 새로운 시도를 다 해보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문화 다양성 실천주의자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할 것 같다
감사하다. 데뷔했을 당시에는 작업을 함께 했던 프로듀서님들이‘노래는 너무 잘하는데 개성은 없는 거 같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 가요계에는 개성으로 똘똘 뭉친 가수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떤 뚜렷한 개성을 갖는 것보다 다양성을 가졌기에 내가 여러 장르를 소화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팝페라도 소화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자체가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갑자기 이즘의 20년 맞이 <내 인생의 음악 10곡> 기획이 생각나 ‘박기영이 꼽는 박기영의 노래 10곡’을 꼽아 달라고 했다. 이런 주문에 응하는 것은 시간이 걸리기 마련인데 그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자신과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성실한 관찰이 느껴졌던 대목. “내가 만족하면서도 대중이 사랑을 준 곡들이어야겠죠?” 그 10곡을 공개하면…

1. <불후의 명곡>에서 부른 ‘넬라 판타지아’
2. <복면가왕>에서 부른 밴드 부활의 ‘Lonely night’
3. ‘나비’
4. ‘그대 때문에’
5. ‘Blue sky’
6. ‘나비’가 수록된 2004년 앨범의 ‘Mercy’
7. ‘아네스의 노래’
8. <오페라스타 >에서 노래한 ‘Caronome (그리운 이름이여)’
9. <불후의 명곡 > 김수희편에서 부른 ‘멍에’
10. ‘시작’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임선희
정리 : 임진모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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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4 백영규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등이 자리해 그들만의 음악이야기는 물론, 각각의 인천 부평에 대한 인연도 들려주었다. 이번 네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추억의 인물이자 현재도 맹렬히 뛰는 레전드 가수 백영규다.

음악계 동향에 밝지 않은 사람에게 백영규는 1980년대 초반 히트 퍼레이드와 당시의 애청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 ‘잊지는 말아야지’, ‘순이생각’,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곳에서’ 등에 멈춰있겠지만 그 기억은 강렬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그 처량함과 비참정서… 가녀린 음색에 묻어낸 그 슬픔은 그만의 것이었다. 백영규는 하지만 그 알려진 과거보다는 ‘덜 알려진 현재’가 오히려 더 분주하다.

한마디로 ‘쉼 없음’, ‘꾸준함’이다. 2015년까지 경인방송 라디오 < 가고 싶은 마을 >을 진행했고 2018년부터는 추억의 음악다방 콘서트 기획 < 백다방 >의 섭외와 프로듀싱을 도맡아 하고 있다. 원체 바쁜 유전자인 걸까. 코로나시국을 돌파하려는 의도의 노래 ‘천사’를 막 내놓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또한 그는 다름 아닌 부평출신. 부평과 인천 관련 공적인 일에도 성실히 임해오고 있다. 그는 모든 게 음악이라며 음악으로 “삶을 알아간다”고 말했다.

‘1952년생 청년’ 백영규 “젊음의 비결? 실패하더라도 내지른다!”

요즘 인터뷰가 자주 눈에 띕니다
얼마 전 후배가수 김도연과 ‘천사’라는 싱글을 발매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의료진 등을 생각하며 쓴 곡인데 이 노래가 뒤늦게 화제가 됐다. SBS 뉴스까지 나왔더라. (웃음)

왜 화제가 됐을까요
잘 모르겠다. 질병관리 본부 쪽에서 자신들이 직접 운영하는 SNS 채널 7군데에 내 노래를 업로드 했다.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메일도 따로 받았다. 그냥 의료진 힘내라, 힘내라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 존중을 짙게 담으려 했다. 그걸 좋게 봐준 게 아닐까?

첫 히트 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를 돌아보니 1980년이네요. 대중의 관심을 떠나 정확히 40년을 달려왔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도 활동량이 변함없는데…
그렇게 보니 쉬지 않긴 한 것 같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타율이 그리 좋진 않았다. (웃음) 다만 내가 만든 노래가 예상보다도 빨리 대중의 관심을 받고 그 호흡이 좀 길게 이어지면서 초기 활동 기반을 잘 다질 수 있었다. 이후 제작자로서도 음악가로서도 감을 못 잡고 방황한 기간도 길었다. 우리나라에서 나만큼 갑과 을의 격차를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몇 없을 거다.

꾸준함의 동력은 뭔가요
요즘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 스스로도 그 이유를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내가 내린 결론은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라기 보단 그냥 경험이 많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음반 제작을 하다보면 혼자서 기획 해야지 필드도 뛰어야지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 라디오를 13년간 진행한 건 정말 잘한 일이다. 단순히 출연만 한 게 아니라 기획 연출까지 다 했었는데 거기서 얻은 것들이 참 많다. 그리고 내가 또 일할 때 보면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은 내지르는 성격이더라. 그런 것들이 다 합쳐져서 나이를 먹을수록, 요즘 더 할 일이 많다.

트로트, 댄스,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입니다. 늘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젊은 문화와의 연계를 의도적으로 의식하고 만들려고 하진 않는다. 녹음실을 자주 들락날락 하다보면 젊어질 수밖에 없는 건 있다. 엔지니어들이 다 젊지 않나. 자연스럽게 성향이, 또 음악적 성향이 넓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사람들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그들이 듣는 음악에 더 집중하는 편이다. 요새 음악 가닥이 되게 많아졌다. 그 다양한 장르 중에 내가 가져갈 수 있는 장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한다. < 이태원 클라쓰 >란 드라마를 재밌게 봤는데 거기서 김필이 부른 ‘그때 그 아인’ 같은 노래는 우리 세대 음악가들이 불러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겠더라. 2007년 발표한 내 노래 ‘감춰진 고독’은 요즘 들어 중장년층들에게서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이렇게 계속해서 더 많은 세대들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곡을 쓰고 싶다.

‘부평’, 음악활동의 길을 트다.

부평이 고향인가요
경기 양평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즈음에 경찰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부평으로 이사 왔다. 부평 4동에 ‘깡마당’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가 내 본가다. 계속 거기서 살면서 인천 동산 중·고등학교를 통학했다.

부평을 음악적인 면과 연관 지을 수 있겠습니다.
처음 음악을 하게 된 동기가 부평의 친구들 때문이었다. 그때 우리 시대가 ‘통기타를 못 치면 간첩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지 않나. 친구가 통기타를 치면 그 멜로디에 내가 보컬을 하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그렇게 음악에 접어들 게 된 거다.

음악적 데뷔인 듀엣 ‘물레방아’도 그 연장선 상에서 만들어진거죠.
대학 다니면서 ‘물레방아’의 전초격인 그룹을 만들었다. 그때 밴드 이름이 ‘유심초’였다. 유시형, 유의형 형제가 만든 포크그룹 유심초가 바로 이 유심초다. 두 형제들이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오고 대학도 같이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활동했다. 유시형고 훗날 물레방아로 같이 노래한 이춘근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뭉쳐 다니며 음악을 한 거다. 그러다가 나랑 이춘근이 물레방아란 이름으로 본격적인 음악을 시작했다.

사실상의 고향인 부평에 어떤 인상은 갖고 있나요.
양평 시골 촌놈이던 내게 부평은 정말 커보였다. 촌사람이 도시로 와서 좀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다고 느꼈고 그래서 주눅 들고 소심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을 많이 만났다. 앞서 말한 유시형, 유의형은 방앗간 집 셋 째, 넷 째 아들이었는데 그들을 통해서 내 음악 길이 시작될 수 있었다. 부평에 관한 노래도 많이 썼다. 내게 부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그 시절 얘기를 조금만 더 하신다면
그때 보통 가수들은 업소에서 노래를 많이 불렀다. 당시에는 그게 돈벌이였고 또 당연한 굴레였다. 근데 나는 그런 경험이 전무 했다. 음악다방에서 노래 부른 기억은 있어도 자세 잡고 업소에 정기 출연한 적은 없다. 그런 내게 음악적인 인적 자원들은 정말 소중한 인연이다. 부평에서 만난 다양한 음악 인맥들이 내 길을 넓혀줬다.

부평과 인천에 관한 노래도 많이 만드셨죠?
부평은 인천의 한 구(區)고 당연히 인천 노래를 조금 만들었다. ‘추억의 신포동’이란 노래 들어봤는지. 2016년 인천시가 인천 가치재창조 사업의 일환으로 인천의 노래 선정 작업을 추진하면서 쓰게 된 곡이다. 신포동은 인천 부평사람이라면 대부분 기억하는 추억의 공간으로 음악다방도 많았다. 당시 팝 가요 청취수준이 꽤 높았다. 노래는 1편과 2편이 있는데 내 버전은 재미없고 ‘아라’라는 가수가 부른 게 좋다. 미디로 만든 트로트다. 신포동의 추억을 떠올리며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도 있지 않나요.
인천에 있던 성냥공장을 반추하며 만든 노래다. 인천에 많던 공장들의 역사를 그려보고 싶었고 지금도 그 마음이 있다. 참, 인천 맥주축제 로고송으로 지금도 행사 때 흘러나오는 ‘송도로 가자’도 있다. ‘기차 타고 평양 지나, 파리에서 커피 한잔’이라는 가사가 내가 썼지만 인상적이다. 인천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 곡이랄까. 그러고 보니 인천 노래를 제법 만든 편이다. (웃음)

부딪히며 익힌 대중감각 “음악적 핵심이던 비애감, 벗어나니 넓어졌다”

1977년 이춘근과 함께 혼성 듀엣 ‘물레방아’로 데뷔하고 거의 동시에 ‘순이 생각’이 큰 사랑을 받았는데..
‘순이 생각’, ‘슬픈 계절에 만나요’, ‘우리 만나요, 처음 만난 그 곳에서’ 등 많은 곡이 히트했다. 1977년 그룹으로 시작해 1979년부터 솔로 음반을 냈다. 이후 1983년까지 총 6개의 정규 음반을 제작했는데 감사하게도 작품마다 애정 받는 노래들이 꼭 하나씩은 있었다. 음악가로서 축복이기도 하지만 혹은 그렇지 않기도 하다.

초창기부터 음반 제작의 많은 부분을 맡았지요
데뷔할 때부터 회사가 나한테 다 맡겼다. 지금도 이해를 못 하겠다. 경험도 없는데 왜 나를… (웃음)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배운 것들이 많다. 오리엔트 프로젝트의 나현구한테는 순발력을 배웠다. 악보가 안 떠오르면 감각대로 느낌대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순발력이라고나 할까. 같은 멤버였던 강근식도 좋은 영감을 많이 줬고.

앞서 말한 축복이 이와 같은 의미인 건가요
백영규는 여태까지 계보가 없었다. 송창식하면 떠오르는 계보가 있지 않나. 나는 음악적인 멘토도 없었고 큰 스승도 없었다. 혼자 나와서 이렇게 하다보니까 음악이 극과 극이다. 잘나오는 건 굉장히 잘 나오고 못 나오는 건 못나오고.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냥 냈다. 그래서 창피한 곡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트곡이 많은데요, 그 곡들의 핵심정서는 뭘까요
얼마 전에 보니까 슬픈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 1위에 올랐다더라. (웃음) 굳이 핵심을 따져보자면 ‘비애감’이다. 첫 대중 히트 곡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 담긴 그 어떤 헤어짐이나 슬픔의 감정들. 그것들이 내 음악을 세상에 많이 알려줬다. 계속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고…

벗어나고자 했다는 건 무슨 의미죠.
나한테는 디렉터가 없지 않나. ‘슬픈 계절에 만나요’가 히트하면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지금은 이렇게 남의 음악도 듣고 할 여유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한 곡이 히트하면 ‘아 이런 곡을 만들어야 겠구나’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예를 들면 ‘잊지는 말아야지’가 뽕짝이니까 다음 곡 ‘가신 님 그리워’도 비슷하게 만든 거다. 그러면 대중에게 외면 받는다는 걸 그때 당시에는 잘 몰랐다. 그걸 알고 벗어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후회로 남아있나요.
많이 아쉽다. 과거 다양한 선택을 했었다면 백영규 음악관이 달라졌지 않을까. 아쉬웠던 시간들이 있기에 지금은 늘 경계한다. 그때는 수정이라는 게 없었는데 지금은 골치 아프게 수정한다. 모니터링도 하고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곡을 고치곤 한다. 왜 딱 눈치 보면 곡이 괜찮은지 별로인지 알지 않나. ‘천사’도 수정을 되게 많이 한 곡이다.

근래 백영규 음악스타일은요.
2000년대부터 음악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다. 아까 말한 2007년에 나온 ‘감춰진 고독’을 들어봐라. 멜로디는 단순한 쓰리 핑거에 통기타 음악이지만 편곡 자체에 프로그레시브 스타일을 가미했다. 전주만 해도 일분이 훨씬 넘는다. 이외에도 2016년에 낸 ‘술 한 잔’은 대중 트로트고 ‘얼룩진 상처’도 마찬가지다. 많이 히트는 안 됐지만. (웃음)

인기가수, 공연기획자, 라디오진행자인 백영규는 또 딴 가수에게도 곡을 준 싱어 송 라이터이기도 하다. 김세화의 ‘아그네스’ ‘타인인 줄 알면서도’, 유심초의 ‘나는 홀로 있어도’,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아름다운 눈물 꽃’이 그가 쓴 곡들이다. 특히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은 서태지와 아이들 광풍이 있기 전인 1991년 빅히트했고 백영규가 직접 제작했다. 음반제작자로도 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어쩌면 오랜 세월을 쉼 없이 달려온 결과, 이렇게 넓은 활동 보폭과 다채로운 입지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음악을 하며 가장 기쁠 때는 언제였나요.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서는 오히려 못 느꼈다. 남들이 알아주는 게 마음으로 와 닿았을 때는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을 제작했던 즈음이었다. 돈도 좀 생기고 사람들도 많이 알아봐주고 살 맛 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웃음) 제작자로서 우쭐한 그런 것에 취하기도 했고. 거품이 빨리 빠진다는 걸 그땐 잘 몰랐다.

박정수 정규 1집 <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 >은 정말 라디오를 뒤덮었습니다.
히트 이후에 방황도 길었다. 제작자 입장에서 박정수의 음폭이 넓으니까 그걸 다 쓰고 싶었다. 그러다보니까 음악적으로 자기만족은 있지만 대중들과 서서히 멀어지게 되더라. 대중음악은 대중이 좋아해야하는데 나는 ‘내가 만들고 대중들은 좋아해라’ 이런 방향으로 변하게 된 거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대중한테 외면을 많이 받았다. 그 버릇을 고치게 된 게 거의 2010년 즈음인 것 같고.

또 다른 호시절은 없었는지.
이건 좀 어려운 얘기인데 음악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스스로 배운 시절을 꼽고 싶다. 통기타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내가 듣기 좋아하는 음악은 어쩔 때는 록이고 또 어쩔 때는 엔야(Enya) 풍의 신비로운 곡들이다. 언제인가부터는 또 미디에 손 되게 됐다. 엄청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고 한 건 아니지만 다양한 장르들을 조금씩이라도 건드려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매번 내가 이런 것들도 할 수 있겠다는 걸 배우고 느끼고 늘 자라고 있다. (웃음)

알려지지 않았지만 스스로 수작으로 생각하는 곡이 있나요.
13년 간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제목과 같은 노래 ‘가고 싶은 마을’을 꼽고 싶다. 2015년에 발표했는데 방송을 하며 받은 영감을 담았다. 그 전 2011년 곡 ‘그리움 안고 헤어지자’도 애정을 갖고 있다. 트로트에 약간의 랩을 넣었다. 음악적 실험을 했던 곡이다.

백영규에게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그때그때 답변이 달라진다. 질문이 상당히 방대하지 않나. 다만 가장 솔직한 건 음악을 만드는 방법을 10가지로 하면 10개를 다 통과해야한다. 그게 정말 힘들다는 거다. 라디오 하면서 이와 관련된 걸 많이 배웠다. 문자가 들어오면 늘 진실한 답변을 하려고 습관을 들였다. 그러니까 청취자들이 굉장히 좋아해줬고 그런 과정들이 가사를 쓸 때 가장 큰 주안점으로 작용했다. 가사를 쓴다기보다 사람을 쓰자 다짐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음악을 통해 삶을 알아간다. 음악은 내게 삶이다.

백영규 노래는 늘 한편의 슬픈 시와 같습니다. 시적 감성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습관과 노력이다. 타고난 건 절대 아니다. 멜로디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가사를 써야하는데 그 순간이 정말 괴롭다. 예를 들어 작곡을 한 시간 한다면 가사는 일주일이 걸린다. 그 시간과 순간들을 늘 빼둔다. 주변에서 영감을 얻으려 노력하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잘 풀어내려 늘 촉각을 곤두세운다. 습관적으로 말이다. 최근 백운산 쪽으로 이사를 갔다. 산에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있다. (웃음)

진행 : 임진모, 김도헌, 박수진,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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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 김구라, 그리(GREE)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비와이와 홍이삭을 잇는 세 번째 인터뷰 주인공은 스타 방송진행자 김구라와 그 아들인 뮤지션 그리(GREE)다.

가장 잘나가는 방송 예능프로그램 진행자인 김구라는 코미디 뿐 아니라 음악에 대해서도 풍부한 지식과 일가견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대중스타로 떠오르기 전에는 팝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방송을 통해 알려진 대로 또 1998년생 그의 아들 동현은 ‘MC그리’란 예명이 말해주듯 음악의 길을 걷고 있다.

음악광 아버지와 뮤지션 아들. 둘과 음악 얘기를 나눌 기회를 마련했다. 음악을 바라보는, 부자간의 비슷한 그러나 세대차로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시각을 기대했지만 둘은 합(合)의 장면을 연출했다. 두 사람은 음악 관련 대화에 즐겁게 그리고 성의 있게 임했다. 김구라는 “아들의 진로와 행보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렵겠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음악을 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장르범주를 넘어 음악적 보폭을 넓히겠다는 의지를 보인 아들(김동현)은 최근 앞에 MC를 떼어냈다면서 “근래 음악에 다시 재미를 붙였다”고 했다. 둘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다루는 또 다른 일정을 모두 인천 부평시장 근처 카페에서 진행해 이즘과 부평문화재단의 기획에 부응했다. 김구라는 인천맨임을 강조했다. 인터뷰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인터뷰에 응해줘 감사하다. 그리(김동현)가 음악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없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버지는 방송에서 “나를 잡아주고 있는 것은 팝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힐 만큼의 음악광이다. 그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 밑에서 자랐는데 음악과 관련해 아버지의 인상은.
그리 : 사실 제가 힙합을 했지만 아빠는 아시다시피 록입니다. 당연히 옛날부터 제게 록 그리고 서구 팝을 많이 들었지요. 프린스, 마이클 잭슨 등등. 아버지가 그런데 어느 날 에미넴(Eminem) 노래를 들려주셨어요.

에미넴? 나중 래퍼가 되는 데 이 부분이 영향으로 작용했을 것 같다. 처음 들은 에미넴 노래는 뭐였나?
아빠의 영향, 당연하죠. 노래는 영화 <8 마일>의 ‘Lose yourself’였어요. 이 곡을 접하면서 랩에 대한,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죠. 그걸 시작으로 다른 래퍼들의 음악도 찾아 듣고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막상 음악세계 활동이 만만치 않다는 걸 익히 알지 않는가. 아들이 음악 쪽으로 가는 걸 쉬 동의하지 못했을 듯한데…
구라 : 나는 차 안에서 항상 음악을 튼다. 사실 내가 음악을 틀면 가족들이 싫어한다. 동현이 엄마는 음악을 별로 안 좋아한다. 그럼에도 동현이한테는 많이 들려줬다. 팝도 많이 들려주고. 가끔 래퍼 흉내도 내주고. 나의 경우 음악적으로 이모의 영향이 컸다. 이모가 팝을 많이 좋아해서 덩달아 나도 팝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동현하고 같이 방송하고 다니면서… 뭐 사실 그 나이 때 되면 자동으로 음악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닌가. 그 무렵 랩을 하겠다고 하더라. 사실 처음에 반대했는데 굳이 하겠다는 거다. 그런데 나는 별로 아들의 진로에 간섭을 하지 않는 편이다.

결국 가수가 업이 됐다.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직업적으로 음악을 하는 게 기쁜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생각이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20대 초중반까지 좋아하는 일도 못 찾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 동현이는 본의 아니게 방송을 하게 됐고, 길도 찾고 그랬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음악 안 하고 연기 하고 그랬으면 이도저도 아니었을 것 같다. 이쪽으로 뻗어가는 게 그래서 좋다.

아버지는 음악을 좋아하고 아들은 음악에 뜻과 방향을 잡고 가는 게 좋아 보인다.
아직 돈을 벌고 하지는 않지만, 자기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도 뭐 조금 능력이 있으니 도와주고.

이 상태에선 아버지의 위치와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아들이 어느 정도 입지를 꾸리려면 아버지가 도와줘야할 것 같다.
그리 : 실제로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지금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 두 배로 갚을 생각이에요.
구라 : 나는 또 그렇게 생각하는데. 20대 초반 젊은이들이 돈 버느라 스트레스 많이 받고, 저도 그랬지만 공황장애도 겪고 그렇지 않은가. 나도 옛날에 무명시절이 있었지만 안 될 때의 스트레스와 잘 될 때의 스트레스는 또 다르잖아요. 지금처럼!

‘그리’는 혹시 아빠가 쓴 음악 글 봤는지. 아빠가 음악을 그냥 취미 수준으로 듣는 게 아니라 듣는 걸 넘어 평론가처럼 글까지 쓰셨다. 한번 찾아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을 내셨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글을 잘 안 읽습니다(웃음).

1990년대 말 잡지에 팝 칼럼니스트로 기고도 했고 얼마 후 김현동 인터넷방송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구라 : 조선일보에 1년 정도 연재도 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잡지에도 쓰고. 음악 글 쓰는 게 꿈이어서. 그런데 글을 쓰는 거 즐겁기보다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고 그 때문에도 현재는 조금 생각을 안 하고 있다. 언젠가는 다시 필자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하지만 음악과는 뭔가 연이 맺어진 게 있는 것 같다. 본의 아니게 요즘 음악적인 유튜브 방송을 많이 하고 음악관련 내용이 인터넷에 많이 돌아다니는 걸 보면 운명적인 관계 같고 그렇다.

이즘과 함께 하는 부평 문화재단 < MEETS 시리즈 >는 가수 관련 기획인데 음악광이고 아들이 음악을 하고 있어서 뮤지션 범주 내에 섭외했다. 먼저 방송에서 고향인 인천 얘기를 자주하고 인하대 출신이라는 걸 강조한다. 인천과의 연결고리가 분명해 보인다.
아시다시피 고향이 인천이다. 그런데 본적은 서울이다. 어쨌든 본적은 서울이지만, 태어나기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형은 1968년도에 태어났고 (김구라는 1970년생이다) 그때 우리가 살던 곳은 가정동인가, 대우자동차 사원아파트였다. 아파트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난 그 5층짜리 아파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까지 살았다. 이후 간석동에도 살았고 신혼집을 계양구 계산동에서 차렸고 완벽한 ‘인천맨’이다. 인천은 나의 홈타운이다. 그리고 내 방송 타입이 신변잡기 이런 이야기도 많이 하는 편 아닌가. 그래서 인천 얘기가 많다.

서울이 본적인데도 굳이 인천출신임을 강조한다. 고향을 ‘서울’이라고 하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도 궁금한데 성공하고 나서 많은 유명인사들이 그런 것처럼 서울로 가지 않았다. 인천 아니면 경기도에 남아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구라 : 대학 졸업 후에는 인천이 아니라 김포다. 지금은 일산이고… 서울로 가지 않는 이유라… 글쎄 동현이 엄마가 소위 말해 교육에 집중하지 않는 편이다. 김포에 식구도 있고 하니깐. 동현이 엄마가 (서울로) 가자고 했으면 갔을 것 같다. 또 딱히 서울 행 의지도 없었다. 나중 집 분양도 일산 쪽에 받게 되었고 서울로 가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기가 좋은데 뭘..

‘그리’는 인천 기억이 어떠한가.
솔직히 없어요. 태어나자마자 이사를 갔으니까요. (어떤 이미지인지 묻자) 아버지의 실질적인 터전 자체가 인천이고 많은 얘기를 들어서 거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할까요. 산 기억은 없지만 아주 친근해요. 그리고 아직 할머니가 인천에 사시니까요. (옆에서 아버지 구라는 “아마 얘는 인천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미지는 없을 거예요”라고 말을 붙였다)

서울은 어떻게 생각 되는지.
(구라) 복잡해! 솔직히 약속도 잘 안 잡는다. 일 하는 곳이 다 거기다. 예를 들어, 서울 강남에서 오후7시에 약속이 있다 그러면 여기서 4시에 출발해야 한다. 일산에서. 짜증이 난다. 강남이 또 사실 문화의 중심인데, 난 별로 동경하지 않는다. 내가 보면 그렇더라. 많은 일산 사람들이 다 서울로 가려고 한다. 그게 상향이동인가 (웃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복잡하고 차도 많고 그렇다.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에게 기대를 하는 게 있다. 사람은 피도 환경도 속일 수 없다. 아버지가 록과 팝에 음악에 박식하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음악을 좋아하니깐 분명 음악유전자가 아들에게 들어와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도 음악적인 게 언젠가 섞여 도드라지게 마련이다. 남들이 못할 걸 하지 않을까. 잘될 거라고 본다.
감사합니다. 요즘은 브릿팝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라디오헤드(Radiohead)나 그런 거요. 음악을 폭넓게 접하고 있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음악 스펙트럼이 넓어진 것도 아버지 덕분이기도 하고요. 팝도 많이 듣고요. 제가 힙합이미지가 강한데요, 장르에 제한되고 싶지 않아서 활동이름 MC 그리에서 MC를 아예 빼버렸어요. 래퍼가 아니라 대중가수로 가는 거죠.

요즘 듣는 음악은
그리 : 라우브(Lauv) 그리고 레이니(LANY), 바지(Bazzi)… 노래를 하고 있어서 그런 가수를 많이 듣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싱잉(노래) 수준은 어떻게 보는지
구라 : 아무래도 전문 싱어는 아니니깐. 싱어는 제가 <복면가왕>을 하다 보니까 워낙 노래 잘 하는 사람도 많고. 재능의 측면에서 한번은 탁재훈씨가 제게 그러더라고. ‘솔직히 넌 럭키한 거야. 네가 노래를 잘 하니 춤을 잘 추니?’ 처음에는 좀 기분이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맞는 얘기지. 그런데 희극인이라는 엔터테이너 관점에서 어떻게 보면 뭐랄까 제가 판을 조금 꿰뚫어보는 그런 능력이 있구나 생각이 든다. 그것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온 거 아니겠나.

언젠가 김태원씨도 그랬다. 기타를 잘 안 치길래 ‘기타 연습 요즘 왜 안 해요?’ 하니까 ‘잘 안 해, 기타는 돈이 잘 안 돼’. 농담 식으로 얘기한 건데 결국 자신은 기타리스트보다 음악 전반을 다루는 컴포서(composer, 작곡가)라는 거지. 그렇게 동현이도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작곡을 하고 자기노래를 표현하는 정도만 되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리’는 이제 음악에 분명한 입지를 새겼다. 후회는 없는지.
후회 안 합니다. 슬럼프는 오지만.. (‘언제 슬럼프가 왔어요?’ 물으니) 20살 때쯤이었는데. 음악을 듣고도 느낌이 안 왔어요. 감이 전혀 안 잡혔습니다. 레퍼런스를 잡아야겠다, 이런 풍으로 만들어야겠다. 그런 감이 도대체 오지 않는 거예요. 그때 나온 노래가 2019년 초에 발표한 곡 ‘벨튀’(feat. 서사무엘, 가은)였죠. 레트로였어요. 조금 재미없게 음악을 했다고 할까요.

그럼 슬럼프에서 일어선 때는
그리 : 작년 가을 겨울쯤. 슬럼프가 조금 길었어요. 저 스스로 문제 때문이었죠. 지금은 조금 음악에 재미를 찾았어요. 만나는 사람도 바뀌고. 조금 더 나아졌지요.

음악의 힘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리) 음악은 애증인 것 같아요. 잘 나올 때는 너무 기분이 좋고 날아갈 것 같은데, 안 나오고 그러면 스트레스 받고 엄청 밉죠. 사람들이 욕하면 회의감마저 들고요. 그러다가 또 만들 때는 즐겁고.. 그 과정이 재미있어요.

아버지에 대한 헌사를 한다면
얼마 전에 헌정 곡도 낸 걸요. ‘HIM’이라고. 원래 아버지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드리려고 준비한 건데 결과적으로 못해드렸어요. 어버이날에 공개를 해야겠다 싶었는데 유출이 되는 바람에 4월에 발표 돼버린 거죠.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미안함을 절절이 담은 이 노래에는 중간에 ‘사실 난 벌써 미안해져/ 그대가 내게 준만큼은/ 그대에게 평생 못 줄 텐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다시 한 번 묻는데 아들이 음악 한 거에 대한 아버지의 진짜 솔직한 심정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본의 아니게 나 때문에 방송에 뛰어들었고, 나의 관점에서 보면, 대중문화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들 두루두루 하지 않은가. 그런데 음악은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음악이라는 베이스를 깔고 자기 일을 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아들이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원하는가, 뮤지션이 되기를 원하는가.
엔터테이너가 낫지 않을까. 완벽한 뮤지션보다는. 요즘에는 음악 하는 사람들도 다 엔터테이너가 되고 있지 않나. 추세가 그렇다. <라디오스타> 함께 했던 윤종신도 그렇고. 너무 뮤지션으로 국한되어있지 않는 게….

한국 예능에서 음악이 가지는 위치는. 전에는 절대적이었던 음악이 요즘에 갖는 위치를 어떻게 판단하나.
구라 : 음악도 생업이지 않나.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방송도 유튜브, 넷플릭스 시대에 또 코로나 사태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광고가 안 돼 한 달에 몇 억씩 손해 보는 방송도 많고. 그것처럼 음악도 너무 어렵다. 끊임없이 소비가 될 테지만 옛날처럼 음악 독자적으로 강한 위상을 갖거나 절대적이지는 못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타(他) 여러 장르들과 융 복합하는 그런 다재다능한 뮤지션이 흥하는 것 같다.

그래서 아들이 엔터테이너가 되기를 원하는 건가.
뮤지션만 하기는 쉽지 않다는 거다. 그 길은 쉽지 않고. 그러니 편견을 가지지 말고 여러 장르에 실력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게 시너지가 될 수도 있으니.

‘그리’는 ‘브랜뉴 뮤직’에 소속되어 있다. 회사가 그리를 보는 입장은 어떤가. 본인은 회사에서 여기서 어떤 포지션을 원하는지. 좀 전에 대중노선을 취한다고 했는데, 회사와 잘 정돈이 된 건가.
브랜뉴 뮤직은 K팝도 많이 하고 방송에도 신경 쓰고 실제로 많이 해요. 저와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음악적으로 제가 하고자 하는 걸 반대하는 그런 것도 없고요. (제가) 방송하는 것도 좋아하고. 호흡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떨 때는 김구라 아들이라는 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솔로 스탠딩은 필수다. ‘그리’는 음악인이든 연예인이든 간에 본인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뭔가. 성공인가 행복인가.
(단칼에) 행복!!! 그냥 지금처럼 하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공에 대한 욕심이 들지 모르죠, 아빠도 영원히 방송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저도 어쨌거나 혼자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열심히 살아야죠. 그게 행복인 것 같습니다.

참 구라씨는 좋은 소식이 있지 않나.
같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

어느 정도 얘기가 오가고 있는지.
식구들끼리 밥 먹으면서 얘기 했다. 물론 방송에서는 아직 손사래를 좀 친다. 왜냐면 나이가 또 오십이 넘었으니깐. 나도 나이를 먹으니 옛날 선배들 말이 와 닿더라. 뻔히 아는데 왜 그렇게 손사래를 치나 했다. 나도 그 나이가 되니깐, 아이도 방송을 같이 하고, 연예인이고, 옛날에 가족 예능도 많이 하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혼한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막 ‘결혼해서 좋습니다!’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나의 가치관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또 같이 있는 친구가 그런 걸 좋아하면 모르지만 그 친구도 알려지는 거 원치 않고 그렇다. 강수진 김국진 같은 경우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랑 같이 지내는 친구는 그렇지 않으니.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이고. 서로 공개를 원치도 않고. 그래서 그런 얘기를 안 하는 거다. 이해를 바란다.

아까도 말한 것처럼 무엇보다 ‘그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이렇게 어려운 시간 내줘 감사하다. 아들은 성공해서 나중에 꼭 이즘과 인터뷰 했으면 좋겠다.
(구라) 그래야지… (그리) 저도 그랬으면 바랍니다.

진행 : 임진모, 김도헌, 이홍현
정리 : 임진모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신현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