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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1 차승우 X 차중용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한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밴드 노브레인, 문샤이너스, 모노톤스를 거쳐 새 프로젝트 밴드 ‘조카들’을 이끌고 있는 로큰롤 기타리스트 차승우다.  

차승우의 새 밴드 기획 ‘차승우와 조카들’은 막 저 옛날 1968년에 발표된 노래 ‘그대는 가고’의 녹음을 마쳤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유명한 국내 로큰롤 초기 역사의 레전드인 밴드 ‘키보이스’의 차중락이다. 스물네 살에 요절한 차중락은 차승우의 아버지 차중광의 형으로, 차승우에게는 큰아버지다. 차중락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니 프로젝트 팀명을 ‘조카들’로 한 이유를 알 만하다.

이런 걸 두고 재탄생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비록 오래된 곡이지만 현대적 감성을 녹여낸 편곡 덕에 지금 들어도 깔끔하다. 원래 차승우는 이 고전을 부친 차중광과 함께 다시 만들려고 했다. 아버지는 과거 형 중락과 같이 키보이스로 8군 무대를 누비던 추억을 환기하며 부평구 문화재단의 기획 ‘부평사운드’에 맞춰 곡도 ‘그대는 가고’로 직접 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암 투병 중 지난 8월 27일 별세하면서 부자(父子)의 콜라보레이션은 완성되지 못했고 작업은 아들 혼자 떠맡게 되었다. 차승우의 부담과 책임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어린 조카로서, 아들로서 선대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노래”라고 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밤하늘의 연가’, ‘나는 혼자다’ 그리고 ‘사랑의 종말’ 등등 지금도 사랑받는 차중락의 유작이 많다. 그 중에서 하필 ‘그대는 가고’를 리메이크한 이유는?
차승우: 이 ‘부평사운드’ 프로젝트에 참여할 즈음만 해도 아버지(차중광)께서 노래를 하실 수 있다고 하셨고 아버지께서 굳이 형 차중락 곡 가운데 ‘그대는 가고’를 하시길 원하셨어요. 아버님의 선택인 셈이죠. 하지만 작업이 진척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셨어요. 전에 워낙 건강하셨기 때문에 더 그러네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새로 녹음된 ‘그대는 가고’를 들어 봤는지.
차승우: 들으셨어요. 완성된 음원에 다 만족하시진 않으셨는데 ‘편곡이 재밌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제 기타를 유심히 들으시곤 1960년대 영국 밴드 섀도우즈(Shadows) 같다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실제 그런 느낌을 의도했던 거거든요. 기분도 좋았고 오래 음악을 하신 분이라 역시 보통 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프(surf) 기타를 부여하는 것이 기타편곡의 핵심이었는데 곧바로 알아차리신 거죠.

막상 ‘그대는 가고’ 녹음에 들어갈 때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차승우: 편곡, 녹음할 때 책임감이 느껴졌죠. 차씨의 이름을 물려받은 가장 나이 어린 조카, 아들로서 임하게 된 것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적어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20대부터 해온 음악 인생 중 가장 무겁게 마음을 먹고 녹음한 음원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아픈 와중에 녹음해서 더 그렇고… 아버지가 건강하셨다면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도 큽니다.

‘그대는 가고’ 재해석은 어디에 중점을 뒀나?
차승우: 오리지널 버전은 스탠더드 팝 요소가 강하고 큰아버지(차중락)께서 워낙 음색이 절제된 상태고 고운 편이시잖아요.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해서 나의 식대로 해석했습니다. 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또 다른 복고적인 서프 기타 풍에 중점을 두었죠. 시간에 제약이 있어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하진 못했으나 대체적으로 만족합니다.

인터뷰에는 차중락과 함께 차중광의 친동생인 차중용 님도 자리했다. 가요계의 레전드라고 할 ‘귀빈’의 출현에 모두들 놀랐다. 친형의 노래를 연주한 조카 차승우를 응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차중용이 누구인가. 키보이스를 뒤잇는 밴드이자 역시 전설인 ‘가이즈 앤 돌즈’에서 보컬을 맡아 활약한 바 있는 인물이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는 차중락의 고전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녹음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려졌는지를 비롯해서 차중락, 차중광,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의 음악에 대해서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보따리는 풀어도, 풀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전직 가수와 얘기하는 게 아니라 매 순간이 마치 ‘역사와의 대화’ 같았다.

차중용 선생님은 ‘그대는 가고’를 들어보셨는지요. 그리고 또 조카가 오래전부터 음악을 했는데 음악가 출신으로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차중용: 병상에서 형님을 뵈어 잠깐 듣고 다음에 듣자 하고 제대로 들을 겨를은 없었어요. 이제 자세히 들어봐야지요. 당연히 조카가 밴드 해오고 있던 것도 알고 노래도 들어봤죠. 그 전에 ‘노브레인’ 할 때는 미친놈들인 줄 알았어요. (웃음)

차승우: (이 말에 파안대소하며) 적절한 표현이십니다!!

차중락에 대한 기억을 환기해보지요. 어렸을 적 TV를 통해 본 차중락 선생님은 체구도 훤칠하시고 인물도 출중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번안(‘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한 것도 있지만 비주얼 때문에도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그 별명이 차중광 선생님께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알아요.  
차중용: 맞아요. 우리 집안 형제들이 다 잘생겼어요. 큰형 차준경(37년생), 차중덕(39년생), 차중락(42년생) 차중광(44년생) 그리고 저 차중용(47년생)..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타이틀은 중락이 형, 중광이 형에게 다 붙었죠.

‘그대는 가고’는 정확히 취입, 발표 년도가 어떻게 되나요.
차중용: 1968년일 거예요. 그해 중락이 형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취입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몇 달 전일 겁니다. 차중락의 또 다른 히트곡 ‘사랑의 종말’은 이봉조 선생 곡인데 그 전해인 1967년이 맞을 거예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그 훨씬 전이고..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훨씬 전이에요? 히트는 돌아가시고 나서인 1968년 이후 아닌가요?
차중용: 아니에요. 물론 사후 추모 분위기에서 대대적인 히트는 맞고 승우 아버지 차중광의 노래로도 널리 알려졌죠. 하지만 그것은 재조명이고 히트는 엄연히 그 전입니다. 근데 중락 형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어떻게 히트했는지 알아요? 그 당시 키보이스는 차중락(보컬),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바쁜 가운데도 신세계 레코드사 주선으로 당대 미8군 라이브 쇼 무대의 최고이자 레전드인 남석훈 씨의 음반 취입 때 반주를 해주게 됐어요. 남석훈 씨 노래로 다 채울 수가 없으니까 나머지를 키보이스의 번안곡으로 LP를 채운 겁니다.

거기에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인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번안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들어가게 됐지요. 앨범에 키보이스보다 차중락의 이름이 크게 표기되어서 차중락의 노래가 되어버린 거예요. 키보이스노랜데… 임 선생도 이 곡, 색소폰 버전의 노래로 알고 있지요? 실은 남석훈 씨 음반에 녹음된 이게 오리지널, 일렉트릭 기타 버전이요. 이게 감이 더 좋아요. (그게 언제였나요 묻자 차중용 님은 1964년이라고 답했다)

차중락의 곡이 아니라 원래는 밴드 키보이스의 노래네요. 근데 음반의 주요 곡이 아닌데 어떻게 히트가 됐을까요?
차중용: 그 무렵 부산에서 제일 유명한 초원다방에 한번 LP를 돌렸는데 여기서 반응이 시작됐어요. 그 후 인기가 퍼지면서 부산의 여성분들이 지속적으로 최동욱, 이종환 등 당대 최고의 인기 디제이가 진행하는 서울의 라디오 프로에 전화해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신청하는 거예요. 당시 전화 요금이 무척 비싼 시절이었거든요. 한마디로 인기가 부산에서 서울로 북상한 경우지. 당시에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어요. 음반이 수급도 안 된 상황이었는데…

차중용 선생님이 노래하신 밴드 가이즈 앤 돌즈를 소개해주시죠.
차중용: 중락이 형은 밴드 키보이스에 이어 가이즈 앤 돌즈(Guys And Dolls)를 하게 됐는데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의 히트로 바빠지면서 제대로 가이즈 앤 돌즈 활동을 할 수 없어서 내가 오디션을 봐서 대신 들어가게 됐지요. 미8군 클럽 대상의 연예기획사가 급히 만든 셈이죠. 가이즈 앤 돌즈 멤버는 차중락, 조용조(기타), 이수영(세컨드 기타), 차도균(베이스) 그리고 저였습니다.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 정말 컸어요. 거기도 공연을 자주 갔었죠.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즈 다 여기 무대에 섰지요. 부대마다 클럽이 몇백 개나 되었는데 클럽 이름은 기억나지는 않고 우리 음악이 로큰롤이라 무대는 장교 클럽이 아닌 주로 사병이나 하사관 클럽이었죠.    

그럼 8군 클럽 가이즈 앤 돌즈 공연에서 대표적인 레퍼토리는 뭐였나요?
차중용: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도 많이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I can’t get no) satisfaction’, ‘Paint it, black’이 기억나고… 그리고 애니멀스(Animals)의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를 피날레로 했어요. 관객들 다들 미쳐했지. (웃음)

동생 입장에서 형 차중락 보컬과 음악을 평가하신다면?
차중용: 최근 중광이 형도 세상을 떠나면서 형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밴드의 시작이자 국내 대중음악의 뿌리가 됐다는 점에 자랑스러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화가 나기도 해요. 가수를 하려면 음악 공부를 했어야 하잖아요.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지 하는 아쉬운 마음이 크죠. 그래서 좀 더 멋있는 노래를 남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작곡가가 가수가 가진 장점에 맞춰 곡을 써야 하는데 작곡가가 만들고 나서 노래를 주었으니 중락 형에게 맞는 노래가 없었지요. 진정한 차중락의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쉽게 말하면 양복을 입고 갓을 쓴 것이라고 할까. 음악적 역량이 반영이 전혀 안 됐어요.

그럼에도 승우 씨는 아까 큰아버지 보컬을 미성으로 표현했다. 이번 ‘그대는 가고’를 비롯해 살아 남아 있는 차중락의 곡이 많은데‘그대는 가고’말고 또 탐나는 곡이 있나?
차승우: (1초도 고민 없이 즉각) ‘사랑의 종말’을 해보고 싶어요. 이번에도 이 곡을 고려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못했거든요. 가사가 단도직입적이고 센 편이라 요즘 세대에게도 잘 먹힐 수 있다고 봅니다. 탱고 사운드도 정말 멋있고.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노브레인이나 문샤이너스 활동 때 아버지 생각을 했나?
차승우: 네 그럼요. 문샤이너스 당시에는 < 천변풍경 2009 Unforgettable > 콘서트를 아버지와 함께하기도 했어요. 큰아버지(차중락) 히트곡과 엘비스 프레슬리 커버도 하고 이것저것 하면서 1시간 정도 공연했습니다. 즐거웠어요. 이 생각을 하니 이번 ‘그대는 가고’를 아버님과 못한 안타까움이 더더욱 큽니다.

차승우가 갖고 있는 로큰롤 유전자는 큰아버지나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한국 록 밴드의 시효인데…
차승우: 저는 그렇다고 확언합니다. 음악을 하라고 종용하시진 않았지만 환경적인 혜택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도 제 음악 취향이 고색창연하기도 하고, 그런 면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부인하기 어렵지요.  

부평문화재단에서 기획하고 있는 ‘부평사운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차승우: 감사하고 너무 멋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기에, 특히나 홍대 중심의 음악 신이 거의 고사 직전인데 밴드 중점이라서 의미도 있고… 좋은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차중용 선생님은 지금 젊은이들의 음악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차중용: 한 마디로, 한 곡 들으면 다 들은 느낌이랄까요. 그 노래가 다 그 노래예요. 앞으로 40대, 50, 60대가 소비중심이 될 시장이 더 커질 텐데 고려를 안 하는 것 같이 보여요. 장르 측면에서도 예전에는 록이 있고 포크, 탱고도 있고 왈츠 트로트, 민요 등 다양하지 않았나요. 지금은 획일화돼버렸어요. (외국도 그렇다고 말씀드렸더니) 거기는 그래도 아델(Adele)이 있잖아요.

요즘 음악도 들으시나 봅니다.
차중용: 요즘도 계속 음악을 듣고 마인드가 프레쉬해져서 그런지 몰라도 젊은 세대와 별 어려움 없이 소통이 됩니다. 음악의 힘이라고 봐요. (차승우는 여기서 “작은아버지는 지금도 라디오헤드(Radiohead)를 들으세요”라고 덧붙였다)

돌이켜보면 음악이 무시 받던 60년대에 모든 가족이 음악을 했습니다.
차중용: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부자들이 많이 살던 장충동이 집이었죠. 그러니 우리 집에 가수가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했죠. 중락이 형 위인 둘째 중덕이 형은 비즈니스로 미국이나 일본에 갈 때 연회석에서 잠깐 노래 불러도 가수인 줄 알고 사인해 달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만큼 차씨 집안이 노래를 잘했어요.

‘노브레인’ ‘문샤이너스’를 이었던 밴드 모노톤즈는 어떻게 되는 건가.
차승우: 완전히 끝난 게 맞아요. 밴드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나에게 있어 노래 만드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2018년부터 의도적으로 음악적 휴지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야인 생활에 들어간 거죠. 일단 개인적으로 슬럼프가 왔고 밴드 말미에 마무리도 좋지 않았고.. 음악적 아이디어도 없다 보니 뒤죽박죽이 되면서 쉬자는 마인드가 생겼죠.

어떻게 보면 지금 한국의 환경에서 오래 밴드하기 어렵다는 것을 실감한다.
차승우: 거의 총체적 난국이죠. 제가 처음에 밴드로 시작했을 때는 인디라든지 서브 컬처가 태동하던 시기라 젊은 사람과 잘 맞물렸죠. 하지만 이후 밴드 신에서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트렌드가 걷히면서 록과 밴드가 부진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죠. 어렵게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지금은 분산되었다고 봅니다.

세계적으로도 록이 퇴조하는데 우리의 경우도 록과 밴드 그리고 인디 분야에서 좋은 음악이 이어지지 않은 것 같다.
차승우: 일관성도 없었고 작가주의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고 봐요. 이번 ‘부평사운드’의 작업이 스스로 환기하는 계기가 됐거든요. 저도 분발해야 하구요. 어깨가 참 무겁습니다.

인터뷰 : 임진모, 신현태, 김도헌, 임선희,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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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0 아마도이자람밴드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쿠마파크, 하헌진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이시스터즈의 ‘오해하지 마세요’를 다시 부른 베테랑 인디 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다.

1980년대를 경험한 이들은 작곡가 이규대와 함께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를 부르던 앳된 다섯 살 소녀를 기억한다. 1984년 아버지의 ‘예솔이’로 음악을 시작한 이자람은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소리꾼의 길을 걸었다. 1997년 국악고 재학 시절 4시간에 걸쳐 ‘심청가’를 완창하였고 1999년에는 스무 살 나이로 8시간 동안 춘향가를 완창하며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소리꾼임과 동시에 그는 2004년부터 포크록 인디밴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기도 하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송창식의 음악을, 팝을 즐겨 들으셨던 어머니로부터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사이먼 앤 가펑클을 자주 들었노라 밝힌 이자람은 “1960~70년대 음악을 사랑하던 시기에는 김추자와 김정미의 열성 팬이었다. 송골매와 조용필 LP도 모두 내가 물려받았다.”라 이야기하며 그의 폭넓은 음악적 바탕을 즐겁게 소개했다. 그 광대한 취향이 아트 록, 포크, 일상의 언어를 바쁘게 오가는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으로 연결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번 부평 프로젝트에서 이시스터즈의 김희선 님과 함께 ‘오해하지 마세요’ 녹음에 참여했다.
저희와 친분이 있는 더 보울스(The Bowls)의 서건호 씨가 프로젝트를 알려줬다. 재미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던 찰나 부평문화재단에서 연락을 받았다. 원곡을 듣는 순간 아이디어가 탁, 떠올랐다.

어떤 아이디어였나.
‘오해하지 마세요’의 원곡은 엄청 경쾌하게 들리지만 지금 관점으로 보면 여성이 길에서 플러팅(Flirting)을 당하는 이야기다. 원곡의 분위기는 과거 여성분들이 집적대는 남자들에게 ‘그런 거 아니거든~’ 하는 내용이지만, 현재의 시선으로는 그렇게 웃어넘기기보다는 조금 심각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원곡보다 느린 리듬에 더 무겁고 진지한 가사를 넣었다.

리메이크 된 곡을 처음 들어 봤을 때 김희선 선생님과 이자람의 보컬이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김희선 선생님께서는 처음부터 참여하시는 일정이었나.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을 때 부평에서 자리를 마련해 줬다. 처음에 같이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못 하고 갔다. 선생님과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던 도중 협업 제안 비슷한 말씀을 하시길래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 잡았다. 선생님이 참여하시면서 노래에 꽃이 피었다.

아마도이자람밴드에게도 독특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대개 녹음실에 혼자 들어가서 노래를 부르곤 하는데, 김희선 선생님께서는 워낙 오랜만의 녹음이셔서 그런지 저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부탁을 하셨다. 같이 노래하고, 원하시는 ‘필’에 맞춰 먼저 부르기도 하고, 지휘도 하고 동료처럼 노래하기도 하면서 즐겁게 녹음에 임했다. 저를 의지하고 믿어주시는 게 옆에서 느껴져서 엄청난 책임감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세요’를 원래 알고 있었나. 밴드 멤버들의 곡에 대한 첫인상도 궁금하다.
나도 그렇고 밴드 멤버들도 이 노래는 처음이었다. 흔히 말해 그 ‘뽕끼’를 소화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지더라. 다들 연주자들이니 반드시 ‘원곡의 맛’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거다. 오히려 나는 우리에게 없는 과거의 스타일을 굳이 흉내 내거나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전혀 다르게 가고 싶다고 얘기했다. 근데 또 막상 바꾸려고 하니 코드가 단순하고 특히 마지막 파트는 마이너 조로 가다 보니 편곡하기 까다롭더라. 그 안에서 전부 바꾸기는 어려워서 먼저 전체 멜로디부터 손봤다. 구조를 옮긴 다음 코드 워킹을 입혔다.

앞서 언급한대로 ‘오해하지 마세요’의 리메이크는 원곡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김희선 선생님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우려를 많이 하셨다. 그 곡을 몇십 년 부르셨으니 조금 낯설어하셨던 것 같다. 처음 이틀 정도 고민을 많이 하다가 선생님께 ‘이러한 해석에 의해서 곡이 이렇게 변주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유지하고 싶은데, 선생님께서 많이 불편하시면 재고해보겠습니다’고 문자를 드렸다. 다행히도 선생님께서 이해를 해주셨다. 녹음 당일에는 심지어 자꾸 듣다 보니 이것도 매력이 있다고 해주시더라. 본인 노래가 완전히 바뀌었을 때 생기는 낯섦은 당연한데, 이해해 주신 선생님이 너무 멋있었다. 게다가 연습도 정말 열심히 해오셨다. 감동이었다.

국악을 하다 갑자기 밴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
고등학교 때 홍대의 태권V(더블 듀스의 후신, 스팽글의 전신)에 놀러 갔다가 충격을 받았다. 밴드가 너무 멋있고, 나도 저렇게 해보고 싶었다. 매주 재머스(Jammers)에 가고, 한음파의 전신 심고사(심장병을 고친 사람들)가 펄 잼(Pearl Jam)을 카피하는 것도 봤다. 대학에 가자마자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선이, 언니네 이발관의 음악을 들으면서 꿈을 키우던 도중 자연스럽게 음악 동아리 ‘메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가 붕가붕가 레코드가 만들어지는 시기였지. 자연스레 밴드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시대적 흐름 한가운데에 편승해서 같이 흘러간 셈이다. 초창기에는 같은 동아리 출신이었던 ‘청년실업’의 이기타와 밴드를 했다. 지금 기타 치는 이민기는 내 후배다.

본인은 밴드의 스타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9월 27일 공개한 싱글 ‘시간’과 2월에 발매한 ‘오소리 꽃신’을 들으며 느낀 점인데 좀 괴랄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어둡고 우울한 쪽의 괴랄함보다는, 유쾌하고 건강한 쪽의 괴랄함 말이다.

약간 오밀조밀한 괴랄함을 뜻하는 건가.
싱글 ‘시간’에 담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이 곡이 가사가 엄청 진지하고 시적인데, 처음 친구에게 글을 보내줬더니 룸메이트와 같이 보고 울었다고 한다. 자기 마음을 너무 건드린다, 노래로 꼭 써 달라. 그래서 노래를 만들어 보내줬더니, “이 가사에 이런 음악을 붙이다니 미친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웃음). 그때 제 습관을 알았고 괴랄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나는 어떤 가사를 읽었을 때 자연스레 연상되는 음악을 피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내용일수록 어울리지 않는 악기를 가져와 붙이고, 상상 가능한 음악적 어법을 최대한 피해서 다닌다. 나도 다들 좋아하는 발라드 한번 써보고 싶지만, 본성이 그걸 허용 못 한다.

그 비트는 느낌이 또 매력 아닌가.
뭐, 아주 소수의 팬만 있는 걸 보면 좋은 매력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좋아해 주시니 계속하고 있다. (웃음)

판소리 작업의 경우도 일반적이진 않다. 외국의 희곡과 문학작품을 우리의 소리로 옮기는 독특한 작업을 보면 알 수 있다.
평균보다 조금 책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여러 작품을 읽다 하고 싶은 느낌이 오면 그때 작업에들어간다. 한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에 경도됐던 시기에 읽은 희곡 < 사천의 선인’을 옮긴 ‘사천가’, <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을 새로 만든 ‘억척가’가 그렇다. 헤밍웨이의 < 노인과 바다 >도 마찬가지다. 너무 매력적이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판소리로 부른다.

천상병 시인의 ‘달빛’, ‘노래’, ‘나무’ 등의 작품을 독자적으로 해석한 2014년 EP < 크레이지 배가본드 >도 그런 시각으로부터 출발한 건지.
아, 그건 의정부에서 열리는 ‘천상병 예술제’에서 의뢰를 받았다. 천상병 시인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고 해서 첫해에는 고사했다. 그런데 이후 시인의 시집과 에세이집을 읽어보니 너무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다음 해 예술제에 바로 참여했다.

‘밴드’ 이자람과 ‘국악’ 이자람의 페르소나가 다를까.
음, 다른 것 같다. 스위치를 켜듯이 성격이 달라진다. 우선 판소리를 할 때는 앞서 말한 ‘괴랄함’이 없다. 소리꾼 이자람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잘 나눌 것 같은 동네 언니 이미지라면, 밴드에서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캐릭터로 변하는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할 건데 어쩔 거야’ 같은, 아마도 그게 양립되는 건 아닐까.

혹시 안경의 차이는 아닌지. 클라크 켄트는 안경을 벗고 슈퍼맨이 되는데, 이자람은 밴드 활동할 때 반드시 안경을 쓰고 있다.
맞다! 밴드 할 때는 안경을 낀다. (웃음)

아마도이자람밴드는 밴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라이브를 꾸준히 해온 밴드다. 2019년도 코로나 사태 이후로 공연이 전부 취소되거나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공연을 못 하니 힘들다. 그래도 멤버들에게 고마운 게 있다면 내가 무언가를 제시하면 같이 가준다는 점이다. 지금은 싱글이라도 많이 내자는 마음으로 밴드가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다. 딴 데 돈 쓰면서 녹음하기보다 우리 밴드 내에서 어느 정도 수준의 음질을 뽑아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최근에 마이크도 사고 나름 홈 레코딩 시스템을 구축해서 녹음을 시작했다. 완전 만족이다.

코로나로 인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모습이다.
우선 원할 때 녹음할 수 있고, 무엇보다 지출을 많이 안 해도 된다. 예전에는 노래 한 곡을 낼 때 대략 백만 원 정도가 필요했다. 지금은 마스터링만 맡기면 되는 수준이니까 자부심이 많이 생기더라. 시스템도 갖추고 싱글도 발매 중이다. 11월 발매 예정인 다른 컴필레이션 앨범에도 참여했다. 2020년에 곡 작업을 굉장히 많이 했다.

2019년 4월 두 번째 정규 앨범 < FACE > 이후 왕성한 활동이다.
드러머 김온유랑 베이스 김정민이 합류하게 되면서 밸런스가 너무 좋아졌다. 어떤 팬분께서 ‘옛날에 자기가 좋아하던 밴드 특유의 하모니가 있어서 처음에는 멤버 변동이 싫었는데, 막상 보고 나니 지금 물오른 것 같으니 라이브로 볼 사람은 지금 빨리 공연을 봐야 한다’고 쓴 글을 읽었다. 정말 고마웠다. 실제로 2집부터 지금 나오는 싱글까지 안 멈추고 합주와 편곡을 해오고 있다. 뭐, 이것도 언젠가 변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이 확 붙은 것 같다. 한번 타올라 보겠다. (웃음)

밴드 활동을 오래 하면서도 화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원동력이 있나.
맛있는 거 먹기,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밴드가 깨지는 건 돈 문제라고 하는데 우리 밴드는 일단 돈이 그렇게 많아 본 적이 없고, 먹는 걸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함께 보내는 시간이 유지된다. (웃음) 그러면서 다른 일들도 잘 굴러가고, 유대감도 생기고.

앞서 말했듯 밴드가 스트레스 해소의 창구도 되고, 제2의 정체성도 될 수 있는데, 이자람에게 밴드의 의미란.
내게 밴드는 도화지 같다. 뭔가 그려낼 수 있고, 또 그릴 수 있게 하는.

올해 5월에는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아닌 이자람의 솔로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 이방인의 노래 >의 내용을 담은 싱글 ‘Lázara theme’이다.
솔로 싱글도 약간 코로나가 준 전화위복 중 하나다. 판소리하는 이자람의 기록물은 많이 없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홈레코딩을 해보면서 녹음하고 발매하는 게 그렇게 엄청 어려운 일은 아니기도 해서, 약간 아카이빙의 개념으로 시작했다. 어쩌면 공연을 못 오는 관객들에게는 또 조그만 갈증 해소가 되지 않을까.


올해 초에는 MBC 예능 < 놀면 뭐하니 >의 ‘방구석 콘서트’ 출연해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김태호 PD님이 뮤지컬 < 서편제 > 때부터 제 작업을 관심 있게 보신 걸로 알고 있다. 얼핏 무한도전 출연 의사를 확인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체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 따로 응하지 않았다. 마침 이번 < 놀면 뭐하니 >의 경우에는 정확히 코로나로 공연을 하지 못하는 예술인들을 섭외하는 콘셉트였고, 김태호 PD님이 “이제야 어울리는 곳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다.”라며 직접 전화를 주셨기에, 바로 출연을 결정했다.

TV 출연 후 반응은 어땠나.
코로나 시기다 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건 딱히 없는 것 같다. 방송도 패널들이 해주는 리액션을 제외하면, 객석의 반응이 없기도 하고. 하루빨리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싶다.

밴드 라이브와 판소리를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송출하는 데 차이점이 있을까.
음악 같은 경우에는 눈으로 보는 뮤직비디오도 있고 무엇보다 귀로 꽂는 음악의 정체성이 크니까 온라인으로 만들어서 결과물을 남기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 세계에 이미 생긴 문화다. 그런데 공연 예술은 조금 다르다. 한 공간에서 겪는 실시간 경험의 영역이 공연 예술에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판소리 혹은 창작 연극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송출되는 것은 사실 아쉽다. 함께한다는 공간의 경험이 삭제된 형태다.

대중음악 같은 경우에도 이번 추석 나훈아 씨가 여는 <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 콘서트는 실시간 스트리밍 외에 다시 보기나 재방송은 제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아마 본인의 공연이 하나의 공연 예술의 폼으로 만들어진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신 것 같다. 이를테면 벡(Beck)의 공연은 매 공연이 모두 다르다. 그냥 있는 곡 리스트를 쭉 부르는 공연이 아니라 하나의 테마를 짜서 한다는 거다. 스토리보드가 있어서 공연 예술의 형태로 다가가는 콘서트를 스트리밍으로만 송출하는 것은 코로나 시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보기 클립은 지원하지 않는 게 좋아 보인다.

단독 공연이 올해 두 번 취소가 됐는데, 이후 계획이 있다면.
10월에 합정동에 위치한 폼텍 웍스홀에서 띄어 앉기로 아마도이자람밴드의 공연을 진행한다. 지금까지 발표한 싱글들을 선보이는 자리가 될 것 같다.

아마도이자람밴드의 팬들은 음원만큼 밴드의 공연과 라이브를 사랑한다. 실제로 음원으로 들을 때와 다르게 라이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더 잘 들리는 느낌이다.
판소리꾼 이자람과 밴드 이자람 모두 전하는 말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빚어 놓은 말로 무대에 서기에 그 말들이 매번 어떻게 발화되는가에 집중하다. 발음과 발성의 경우는 소리꾼의 기본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라이브의 매력은 이런 거다. 어느 날은 옛 애인에게 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부모님에게 하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매력을 느끼신 게 아닐까.

활동 분야가 굉장히 다양하다. 음악 감독도 겸임하고, 희곡을 판소리로 각색도 하고, 직접 퍼포먼스도 하고, 밴드에서는 기타와 보컬을 한다. 이런 멀티플레이어적 행보가 가끔 힘들지는 않나.
힘들지는 않다. 근데 가끔 길에서 술 먹고 노는 무리의 사람들이 종종 부럽기는 하다. 많은 일을 택하면 어쩔 수 없이 시간이 모자라다. 그래서 일생에 친구들과 노는 일이 잘 없었다. 나한테는 없는 문화인 셈이다. 그래도 판소리 작업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밴드 음악으로 잘 해소된다. 내가 멤버들과 합주할 때 자주 하는 게 “아, 진짜 좋다”라는 말이다.

어린 나이부터 쉴 틈 없이 달려오시면서 번아웃이 온 적은 없는지 궁금하다.
물론 있다. 크게 번아웃이 와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하던 일들을 강제로 멈춘 적이 있다. 이때 이자람의 가장 큰 정체성인 퍼포머로서의 활동은 멈추고 의뢰받은 일만 작업했는데, 그때 음악감독 일을 많이 해서 그런지 지금의 타이틀이 생긴 것 같다.

그러면 지금의 왕성한 활동으로 극복하게 된 계기는.
일단은 밥과 잠이다. 늘 강조하는 건데 밥과 잠이 잘 굴러가면 기본은 가는 것 같다. 마음가짐 면에서는 사명감을 좀 떨쳐내려고 했다. 팀을 위해서, 그리고 국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마인드는 번아웃을 부르는 최적의 마음이다. 스스로 채찍질하거나 남이 나를 채찍질하기에도 허울이 좋은 명제 아닌가. 그런 걸 다 벗어던지고 2년 딱 지내봤더니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차오른 것 같다. 이득봉이라는 사람이 최근에 사명감에 대한 글을 썼다. 아, 이득봉이 누구냐 하면, 바로 내 작가 필명이다. 후후. 한참 손 푸는 중이다. (웃음)

아마도이자람밴드가 앞으로 어떤 팀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나.
10년 후에도 하고 있는 밴드였으면 좋겠다. 그것밖에 바랄 게 없다.

마지막으로 본인의 음악 세계에 있어 결정적인 아티스트나 노래가 있다면.
아마츄어증폭기. 그분이 노래를 하는 태도나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에 정말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요즘에는 세인트 빈센트(St. Vincent)를 레퍼런스로 두고 있는데, 특히 ‘Marrow’라는 곡을 좋아한다.

인터뷰 : 김도헌,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사진 : 김도헌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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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9 하헌진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쿠마파크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아홉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블루스 뮤지션 하헌진이다.

우직함과 강단. 2009년 데뷔 이후 올해 활동 11년 차에 접어든 하헌진은 장난기 어린 말투 사이 신념 있는 대답을 이어갔다. 블루스에 대한 애정이 유독 각박한 한국에서 그는 블루스, 그중에서도 ‘델타 블루스’를 연주한다. 델타 블루스는 블루스의 탄생지인 미시시피강 인근 델타 지역에서 시작된 장르로 강한 리듬감과 코드 변환을 매끄럽게 이어가는 슬라이드 주법이 특징이다.

“이 시대, 세대에도 블루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한국에서 보여주고 싶다.” 흔히 ‘서울의 블루스 맨’이란 애칭으로 소환되는 그는 단단한 포부를 지녔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때로는 솔로로 또 때로는 그룹으로 변신하며 꾸준한 활동을 이어왔다. 2019년에는 현재의 4인 체제를 갖춰 ‘하헌진 밴드’를 출범, 몇 달 전 첫 음반 < 신나게 놀아보자 >(2020)를 발매했다. 이렇듯 그의 행보는 뚜렷하고 꾸준하다. 서서히 불어오는 찬 바람이 가을을 알리던 9월의 어느 날, 이즘 사무실에서 만난 하헌진과의 인터뷰를 공개한다.

음악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자신을 간단히 소개해 달라.
5월 1일에 전역하고 그해 11월쯤 서교 예술 실험 센터에서 첫 공연을 했다. 그게 벌써 2009년의 일이다. 그때부터 줄곧 블루스 뮤지션으로 살고 있다. 어쿠스틱 블루스, 2인조 펑크(punk) 블루스를 비롯해 일렉트로니카와 아날로그 장비들을 이용해 일렉트로닉이 섞인 블루스를 하기도 한다. 지금은 4인조 블루스 밴드를 하고 있다. 2017년에는 <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 >라는 독립 영화의 음악을 맡았다. 기타 돈 되는 일은 모든 한다고 보면 된다. (웃음)

블루스의 색채가 강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다양한 시도를 했다. 특히 2015년 싱글 ‘다시 날 받아주었네’와 2016년 발매한 EP < 나아진게 없네 >에서 들려준 전자음 가득한 사운드도 재밌었다.

< 나아진게 없네 >는 아날로그 드럼머신, 신시사이저, 기타로 만들었다. 여기서 들리는 특수한 소리는 다 아이패드를 통해서 찍어낸 거다. 최근에는 컨트리풍의 음악을 하려고 준비하다가 잠깐 멈춰두고 ‘하헌진 밴드’를 통해 다시 델타 블루스를 다루고 있다. 루츠(Roots)한 델타 블루스 성향의 싱글을 만들고 있다.

하헌진 밴드는 어떻게 결성하게 된 건가?
베이스 치는 김지인이 ‘나잠수와 빅웨이브즈’에서 활동했다. 문래동에서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는데 블루스를 좋아한다더라. 그렇게 제일 먼저 함께했고 (김)지인이 대학교 친구였던 하모니카의 우상석을 추천해줬다. 셋이서 3년 정도 공연을 종종 했다. 2019년에 밴드 실리카겔의 김건재가 드럼 합류하며 4인 체제가 됐고.

하모니카를 정규 멤버로 넣은 정통 블루스 밴드를 꾸리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하모니카‘도’ 하는 사람은 있었어도 하모니카‘만’ 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하모니카가 있는 밴드를 처음 해보기도 하고 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이걸 어떻게 살려 음악을 해야 하나 고민이 굉장히 많았다.

하모니카 소스가 계속 들리면 그게 패턴의 반복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올해 2월에 발매한 음반 < 신나게 놀아보자 >의 포인트는 전곡에 하모니카가 등장하는 것이다. 전곡에 하모니카가 등장하는 블루스 록 밴드는 없었다. 나도 소니보이 윌리암슨(Sonny Boy Williamson)이나 리틀 월터(Little Walter) 스타일의 음악도 물론 하지만, 시카고 블루스만 봐도 보컬이 나올 땐 하모니카가 빠지고 하지 않나. 지루하지 않게 녹여내는 데 많은 애를 썼다. 결과적으로 더 재밌는 음반이 나왔다.

< 신나게 놀아보자 >를 하헌진 커리어 중 가장 좋은 음반이라 생각될 정도로 좋게 들었다. 기타와 하모니카도 유기적으로 연결돼있었고 악기별 밸런스도 늘어지지 않게 신경 쓴 인상이다.
솔로로 만들었던 일렉트로닉 블루스 성향의 < 나아진게 없네 >를 하헌진 밴드가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솔로나 밴드로 들려주고 싶었는데 들려주지 못한 것들을 마음껏 담았다. 뮤지션 김토일이 운영하는 스튜디오에서 8시간 만에 원 테이크로 녹음했다. (김)토일의 도움으로 믹싱, 마스터도 직접 했고.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홍보가 잘 안 돼서 제대로 된 인디 음반을 내보려던 애초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씁쓸하다. (웃음)

홍대 등지의 클럽에서 공연을 많이 하는 편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이 크지 않나.
‘잔다리 라이브 투어 지원 사업’에 선정돼서 11월에 단독 공연을 하게 됐다. 관객을 많이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무관중 라이브 시스템으로 준비 중이다. 이쯤 되니 (코로나로 인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그 외에도 재밌는 기획을 많이 했는데 다 취소됐다. 밴드 맨들 몇 명과 모여 오토바이를 타고 독립 영화 극장 순회공연을 굵직하게 계획했었는데 취소. 일본에 공연 다니며 알게 된 블루스 뮤지션들의 내한 공연을 추진했는데 그것 역시도 취소. 9월 10월 활동들이 많이 무산됐다.

그럼에도 부평구문화재단과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잘 마쳤다. 10월에 국내 재즈 1세대로 볼 수 있는 트럼페터 ‘최선배’와 작업한 ‘어두운 골목길’이란 싱글을 발매한다고.
‘어두운 골목길’은 197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 어제 내린 비 >에 수록됐던 곡이다. 편곡을 혼자 다 했는데 음악 자체에 당시 시대적 배경들이 담겨있어 막히던 부분들도 있었다. 원곡의 편곡된 복잡한 구성이었지만, 최대한 심플하고 모던하게 편곡을 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들었을 때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되길 바랐다. 주니어 킴브루(Junior Kimbrough)라든가 알엘 번사이드(R.L. Burnside) 풍의 1980년대 주크 조인트 스타일의 델타 블루스가 있다. 단순한 디비트에 베이스도 반복되고, 기타도 반복되고. 한편으로는 한국 대중들에게 이런 블루스가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도 싶었다. 내 음악에서도 구현하고 싶었지만, 이번 기회에 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다.

최선배와의 작업은 어땠나?
선생님 파트는 전적으로 다 맡겼다. 매번 테이크가 다를 정도로 자유로웠다. 처음에 선생님 색대로 그냥 연주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약간 당황하셨다. 주로 활동하던 시기에는 주어진 대로 정확히 연주하는 게 방식이었으니 낯설 법도 하다. 작곡가가 시키는 대로만 연주를 하셨다고 하니 말이다. 막상 솔로 연주에 들어가니 달라지시더라. (웃음) 선생님께서 잘 해주셔서 색이 확 살아났다. 멤버들도 단순해서 오히려 더 힘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브라스 사이 하모니카를 잘 담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기도 했는데 (하헌진) 밴드 멤버들 덕에 잘 끝냈다.

인천-부평과의 인연이나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을까?
2017년 즈음 부평의 ‘씽크빅문고’에서 공연을 했던 적이 있다. 서점이라는 데는 동네의 색채를 많이 반영한다. 예를 들어 보광동에는 잡지나 문제집이 많고 서울대학교 근처에는 사회, 과학 서적이 즐비하다. 특이하게 씽크빅문고는 서점이라기보다는 만남의 광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땐 대중들이 잘 아는 커버 곡을 들려줬어야 했는데 나는 내 노래만 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잘 즐겨줘서 색다르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음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는.
중학교 2학년 새벽에 MTV에서 너바나의 < 언플러그드 인 뉴욕(Unplugged In New York) >(1994)을 봤다. 그때 기타를 시작했다. 당시 동네에 ‘이제는 파실래요’라는 매장이 있었다. 모든 물건이 다 천 원이었다. 거기서 아버지가 12현짜리 기타를 사다 줬다. 그중 6줄만 껴서 연습했었다. (웃음) 손가락이 아파서 관둘까 하던 참에 일렉트릭 기타를 샀다. 줄이 되게 얇고 치기도 편하더라. 굉장히 열심히 연주했다.

처음부터 블루스의 길을 걸은 건 아니다.
시작은 당연히 록이었다. 친구들이 듣던 라디오헤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같은 록을 들었다. 어릴 때 한번은 서태지 솔로 2집인 < 울트라맨이야 >(2000)를 택시에 두고 내려서 울면서 뛰어다니고 그랬다. (웃음)

중학교 때 한 음악 동호회 정모에 나갔는데 어떤 형이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을 추천해줬던 기억이 있다. 기타는 페르난데스(Fernandes)가 좋다고 이야기해주기도 했고. (웃음) 그런데 집에 가서 추천받은 레드 제플린, 비틀즈, 크림(Cream)을 듣다가 문득 이 노래들의 기원을 어딜까 생각했다. 당시 자주 읽던 < 올뮤직(Allmusic) >에서 이런 음악들이 어디에서 왔다는 리뷰를 읽게 되었다. 머디 워터스(Muddy Waters)의 음악을 알게 되었고, 롤링 스톤즈는 척 베리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임진모 선생님께서 쓰신 ‘비틀즈 VS 비치 보이즈’라는 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블루스로 넘어가면서,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통해서 공부했다. 말이 길어졌지만 어떤 뮤지션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는지 알게 되면서 블루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런 부분들을 많이 참고했다.

내가 블루스를 고집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없어서다. 델타 블루스가 좋은데, 이런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었던 마음이 가장 크다.

록 음악의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록 음악은 자본이 넘치고 넘쳐서 생긴 음악 중 하나다. 배부른 저항이지.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그걸 너무 필터링 없이 답습해왔다. 한국은 일본처럼 건전한 청년 문화 등 사회적 논의가 있지도 않았고, 본인들이 좋아하는 록스타들의 외형만 가져오곤 했다. 한국 록 시장은 팬들이 만든 시장이다. 자연히 그 팬들이 나이 들어가며 쇠퇴할 수밖에 없다. 다음 세대에게 음악을 물려줄 만한 동력이 있지도 않고, 마니아 취향에서 벗어나지 않는 점도 있고. 뮤지션들도 음악 시장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했다. 소수의 고급 취향처럼 남아있는 상황이라 본다. 

블루스 음악을 하는 하헌진의 경우는 어떤가.
블루스 음악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과거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팬질’을 하고 있는 거니까. 아주 넓게 생각하면 에릭 클랩튼도 고전 블루스 아티스트들의 열렬한 팬 아닌가. 그럼에도 프로라면 팬으로 출발했어도 시장과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고민해야 하는데 대부분 자기만족에서 머물고 만다. 한국에서는 유명해지면 모두 ‘연예인’ 아닌가. 

뮤지션 하헌진으로서 목표가 있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사람과 음악이 일치되기 어렵지 않나. 진부할 수는 있어도 진정성 있고 진솔한 뮤지션으로 남고 싶다. 이 시대, 세대에도 블루스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역시 보여주고 싶다.

또 하나 중요한 목표가 로컬 아티스트로의 기능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공연을 하다 보면 친구들이 그런 말을 한다. “프랑스에서 한국말로 블루스를 하면 너는 돈을 받고 음악을 한다.”라고. 처음에 그런 얘기를 들으면 혹하지. 하지만 차츰 여기서 자리 잡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정착해야 다른 친구들도 이 나라에서 같이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 혼자 나가고 끝나면 곤란하다. 가뜩이나 델타 블루스를 하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 내가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마지막으로 하헌진이 뽑은 ‘내 인생의 음반’을 소개해 줄 수 있나.
존 리 후커의 < The Country Blues of John Lee Hooker >(1959)를 2009년쯤 듣고 블루스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두 번째로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 Watertown >(1970)이다. 프랭크 시나트라 커리어 중 유일하게 오케스트라와 따로 녹음한 작품이고 슬픈 시골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콘셉트 앨범인데 고작 3만 장 팔려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은퇴하게 만든 앨범이다. ‘앨범은 이렇게 서사적인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을 배웠다.

세 번째 앨범은 그레이스 존스의 < Slave To The Rhythm >(1985)이다. 이 앨범도 콘셉트 앨범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드럼 머신과 끝없는 잼, 악기 연주 위 디스코와 덥(Dub)이 어지럽게 섞여 든다. < 나아진 게 없네 > EP를 만드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허비 행콕의 < Thrust >(1974) 역시 미니멀한 퓨전 재즈의 끝이라 좋아하고. 마지막으로는… 비치 보이스? < Pet Sounds >(1966)는 많이 꼽으니 < All Summer Long >(1964) 하겠다. 

인터뷰 : 신현태, 박수진, 임동엽, 김도헌, 장준환
사진 : 임동엽
정리 : 박수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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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8 쿠마파크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비와이,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여덟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실험적인 재즈 힙합 밴드 쿠마파크다.

이들을 장르라는 단어로 국한할 수 있을까. 재즈와 힙합을 오가는 쿠마파크(Kumapark)는 색소포니스트 한승민(LAZYKUMA)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6인조 밴드로, 2013년 셀프 타이틀 정규 앨범과 2017년 < NEW TYPE > EP 등 흥미로운 작업물을 발표하며 재즈를 기반으로 구축한 단단하고도 오묘한 크로스오버를 선보였다. 여러 악기를 이용해 힙합, 소울, 디스코와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요소를 가미한 그들의 복합적인 음악은 타 아티스트들 가운데서도 단연 독보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다.

쿠마파크는 본인의 음악을 떠올릴 때 하나의 장르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느 한 곳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색다른 ‘멋’과 화려한 라인업에서 우러나오는 듣는 ‘맛’을 낳은 셈이다. 러브존스 레코드의 수장이자 재즈 힙합의 개척자, 쿠마파크를 만나 그의 음악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에 10월 공개 예정인 김트리오의 ‘연안부두’ 녹음에 참여했다. 작업 과정에서 중점에 둔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우리가 재즈와 힙합, 일렉트로닉을 하는 밴드다 보니 사운드가 어쿠스틱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흔히 말하는 트로트의 ‘뽕끼’를 좀 덜어내고 멜로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한국적인 정서를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에 녹여낼 수 있는지에 집중했다. 밴드의 색을 칠하는 과정에서 이질감이 생길까 봐 걱정을 많이 했다.

색소폰뿐만 아니라 전자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신시사이저 피아노가 인상적이다.
색소폰이 멜로디 한 부분을 연주하면 다음 파트를 건반이 받는 식으로, 멜로디를 주고받도록 만들었다. 색소폰이 연주를 혼자 다 하게 되면 경음악 느낌이 강해질 것 같으니 이를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장치를 심어 놓았다.

원곡에 비애나 그리움의 무드가 있다면, 쿠마파크 버전의 ‘연안부두’는 낭만적인 밤바다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유명한 노래다 보니 작업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래서 더더욱 틀어서 가기로 한 것 같다. 원곡이 안 떠오를 정도로 최대한 다르게 가고 싶었다. 작업하면서 이렇게까지 마음대로 바꿔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다행히 부평 측에서 온전히 저희에게 일임한 덕에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인천-부평에 대해서 남는 기억이나 추억들이 있다면.
작년 10월 부평에서 열린 ‘뮤직게더링 2019’에 참가한 적이 있다. 솔직히 섭외가 들어오고 무대 직전까지도 인천이나 부평이 문화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는 사실을 그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올라가고 보니 그 거대한 규모에 그때 부평이 뭔가 풀어나가려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처음 작업 제안을 받으셨을 때 프로젝트에 대한 인상이 어땠는지.
엄청 좋았다, 참신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공공 단체에서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아닌가. 우리나라의 문화 투자는 국악이나 클래식이나 다르게 특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에게는 잘 이뤄지지 않는 편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제안해준 것 자체가 언더그라운드와 상생하려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되게 재밌는 경험이었다. 급하게 연락이 온 것만 빼면. (웃음)

지자체나 문화재단 등에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많다. 이런 움직임들에 대해서 의견이 혹시 있다면.
이게 소문이 잘 퍼져서 기존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은데 조금 편향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일을 관장하시는 분들이 직접적인 관계자를 고용해야 이 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실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다소 엉뚱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좀 있는 것 같다. 아티스트와 지자체를 중간에서 연결하는 역할이 있다면 좀 더 많은 뮤지션에게 기회가 가지 않을까.

2013년 정규 앨범과 2017년 EP 이후로 공백 기간이 꽤 길다.
일단 멤버들이 이 밴드만 하는게 아니고, 다들 바쁘게 세션맨으로 활동하다 보니 한번 만나기도 힘들다. 작업은 거의 저랑 키보드 치는 친구가 곡을 같이 만들고 파일을 보내면 각자 집에서 받는 방식인데, 이게 빨리 될 수도 있는 방식이지만 오래 걸릴 수도 있는 방식이다.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곡이 지겨워져서 버리기도 하고, 중간중간 지향점이 조금씩 변경되기도 하고. 물론 시간이 좀 걸려도 작업은 계속 해오고 있다.

오래 기다린 팬들에게 요즘 근황을 간략하게 말해주신다면.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올스톱 됐다. 원래 클럽에서 연주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모든 게 멈춘 데다 떨어져 있어야 하는 상태다.

그 말에 동감이다. 아무래도 코로나 때문에 취소된 프로젝트가 많았을 텐데.
최근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 때 광진구 문화센터 쪽에서 ‘퇴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한 라이브 셋’이라는 야외 공연의 제안이 왔다. 선우정아를 포함한 몇 팀이 공연하기로 했는데, 이 것도 지금은 바로 취소가 됐다. 페스티벌도 마찬가지다.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의 경우 코로나 사태를 대비해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혹시 온라인 공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솔직하게 말해서 재미없다. 합주실에서 우리끼리 연습하는 거랑 다를 게 없지 않나. 원래 라이브는 좀 틀리고 부정확하더라도 분위기나 무드에 맞춰가며 와일드 하게 연주하는 맛이 있는데, 아무래도 관중의 반응이 없으니 좀처럼 흥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연습하듯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쿠마파크의 음악은 미국 힙합 프로듀서에 대한 존경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 같다. 힙합 마니아들에게는 힙합 쪽으로, 또 재즈 팬들에게는 또 재즈 쪽으로 각인되는 것 같다.
우리가 참 애매한 위치에 있는 것이, 재즈 페스티벌에서는 힙합으로 보기도 하고 반대로 힙합 페스티벌에서는 재즈 밴드로 보는 경우가 있다. 첫 작품은 따로 정의한 건 없었는데 로버트 글래스퍼(Robert Glasper) 스타일의 재즈가 많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연주하고 싶었고, 두 번째 EP는 재즈 요소를 많이 뺀 인스트루멘탈 힙합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이번 부평문화단체 LP에서 수록되는 음원은 좀 더 일렉트로닉한 느낌이다. 요즘에는 일렉트로닉한 성향의 신시사이저를 많이 활용한 음악을 듣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가 리더다 보니 최근 듣는 음악에 따라 스타일이 오가는 편이다.

그렇다면 최근 즐겨 듣는 아티스트는.
플로팅 포인츠(Floating Points)와 톰 요크(Thom Yorke) 솔로 앨범. 약간 미니멀한 쪽의 신시사이저가 들어간 그런 일렉트로니카를 자주 듣는다. 다음 차기작에 접목해볼까도 생각 중인데, 아무래도 밴드 성향이 흑인음악 쪽이다 보니 어떻게 ‘조합’할지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본인은 밴드가 재즈와 힙합 사이에 애매한 위치에 있다고 표현했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하이브리드의 개념이 아닐까.
그랬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인스트루멘탈 힙합 밴드에 대해 낯설어 하는 감이 있다. MC가 없고 비트만 있는 힙합은 인기가 조금 없지 않나 싶다.

러브존스 레코드(Luv Jones Records)라는 레이블을 독립적으로 설립해 활동 중이다.
어릴 때는 음악을 좋아하는 팬 입장에서 레이블이나 크루 같이 음악을 직접 하지 않아도 음악 관련 일을 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점차 그 쪽 관련 지인도 만나게 되면서 하기로 마음을 먹고, 에반스 사장님과 함께 만든 것이 러브존스 레코드의 시작이었다. 도중에 사장님이 다른 일로 옮기게 되면서 우리끼리 남아 해보겠다 말씀드렸다.

레퍼런스로 둔 곳이 있다면.
레이블보다는 오케이 플레이어(Okayplayer) 같은 단체를 만들고 싶었다. 흑인음악을 기반으로 한 밴드나 네오 소울 같이, 요즘 유행하는 힙합보다는 우리가 좋아하는 시대의 힙합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큰 움직임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2010년대 말, 힙합 신에서 커뮤니티의 개념이 많이 나오기도 했는데 확실히 선조격인 느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쿠마파크는 게스트 협업을 굉장히 많이 한 케이스기도 하다. 기억에 남는 협업이나 아티스트가 있는지.
누구 하나 기억에 안 남는 사람은 없는데, 처음 같이 작업하기도 했고 제일 접점도 많았던 팔로알토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다른 분들은 발매 공연까지만 같이 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팔로알토는 저희 첫 앨범부터 EP까지 같이 한데다 케미도 잘 맞는 편이라 그 친구 곡을 저희가 연주하기도 하고, 하이라이트 공연에는 아예 저희가 게스트 밴드로도 참여도 했었다.

팔로알토 뿐만 아니라 김아일, 가리온, 소울다이브, 지투, 저스디스 등과 함께 작업했고, 크러시와는 ‘밥맛이야’에서 호흡을 맞췄다. 확실히 힙합으로 단정짓기 어려울 정도로 스펙트럼이 넓다.
앨범 내에도 보컬과 연주 트랙이 나뉘어질 만큼 어느 하나에 주력하기보다 개개인에게 분산되는 팀이라 협업에 있어 수월한 면이 있지 않나 싶다.

작년까지의 활발한 활동에 비해 올해는 레이블 단위 활동은 줄어든 모습이다.
원래 소속 아티스트가 많이 있었는데 수민처럼 다른 곳으로 가거나, 군대나 시집을 가는 식으로 전부 흩어지는 바람에 지금 레이블에 있는 실질적인 아티스트는 쿠마파크 뿐이다. 앨범을 내고 그 후에 다시 레이블을 움직일 생각이다. 코로나 때문에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밴드는 서로 의견이 엇갈리거나 여러 이유에서 깨지는 경우가 많은데, 쿠마파크는 2017년 활동 멤버 그대로 팀이 유지가 잘 되는 편이다. 팀워크에 따로 비결이 있는지.
오히려 맨날 붙어 있으면 싸우게 되는데, 오랜만에 한 번씩 보고 하니까 팀이 안 깨진다. (웃음) 사실 말도 안되는 밴드인게 보컬(김혜미)은 지금 재즈만 하고 있고, 베이스(구본암)는 세션맨이지만 자기 음악을 따로 하는 친구다. 건반(황득경)은 싱어송라이팅을 하는 데다, 드럼(김영진)은 지금 ‘윤석철 트리오’에서 활동 중인데, 재즈 신의 제일 바쁜 드러머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와서는 힙합을 하고 있다.

물론 밴드를 만들 당시 재즈를 좀 할 줄 아는 사람들이 힙합음악을 연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일부러 이런 식으로 만든 거지만, 아무래도 그런 면에서 다른 팀들하고 분위기가 다를 수밖에 없고 또 거기서 오는 시너지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너무 내 욕심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지 고민도 했지만, 근데 또 다들 흑인음악에 대한 애정이 전반에 깔려 있기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쿠마파크는 팀이기도 하지만 브랜드이기도 한데, 어떤 음악을 하는지 간략하게 설명해준다면.
우리는 일단 재즈 밴드다. 힙합도 하지만 재즈를 기반으로 한 다른 장르를 그때 그때 가지고 와서 변용을 한다. 물론 흑인 음악에 베이스를 두고 있지만, 여러 재밌는 시도를 많이 하려고 하는 편이다. 얼마 전에는 국악인들과 함께 협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 때 생황이라는 악기를 처음 봤는데, 소리가 너무 좋아서 이 악기로 작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궁극적으로 쿠마파크를 사람들이 어떻게 기억했으면 하나.
쿠마파크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장르가 아닌 이미지나 그림으로 그려졌으면 좋겠다. 잘 모르겠는데 얘네 음악은 이런 ‘느낌’이더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음악에는 어떻게 빠지게 됐는지 궁금하다.
원래 음악을 하기 전에 힙합 리스너였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라디오에서 주말에는 빌보드 차트 1위부터 10위까지 곡을 틀어주는 날이 있었는데, 그 때 맨 위에 차트들이 힙합이었던 적이 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힘든 음반이었기에 미국에 사시는 어머니 친구분께 부탁드려 닥터 드레와 투팍, 스눕독 같은 유명한 아티스트의 앨범을 소포로 받아 듣곤 했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음악을 찾아 듣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재즈를 좋아하게 된 계기도 그렇다. 서울대입구 쪽 제가 자주 다니던 사계 레코드라고 아트록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 이였는데, 가게에 들어가면 청바지 쫙 달라붙고 느끼하게 머리를 기른 형이 음악을 추천해주곤 했다. 중3 이었나, 거기서 계속 힙합, 소울, 알앤비만 듣고 있으니까 주인 아저씨께서 그럴거면 재즈도 들어야 된다면서 한 음반을 알려줬다. 그 앨범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 Kind of Blue >였는데, 집에 사 들고 오게 되면서 재즈에 빠지게 됐다.

재즈하면 색소폰이지만, 많고 많은 악기 중 색소폰을 하게 된 경위가 있는지.
색소폰은 정말 우연히 시작하게 됐다. 원래 미대를 가려고 미술을 하던 도중 갑자기 실용음악과가 가고 싶은 거다. 그 때 꿈이 힙합음악을 하는 토이였다. 힙합 프로듀싱을 내가 직접 해서 래퍼와 보컬을 초빙해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물론 엄마한테 미술 다 때려 치고 음악하겠다 했을 때는 엄청 혼났다. 갑자기 무슨 음악이냐고.

그렇게 작곡 공부와 레슨을 받으면서 실용음악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서울에서 시험을 보려고 했다. 근데 서울은 작곡가 시험을 보려면 악기가 필요하다는 거다. 당시 나는 할 줄 아는 악기가 하나도 없었고, 컴퓨터 미디나 조금 할 줄 아는 수준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작곡을 가르쳐 주던 선생님이 “야, 색소폰 하는 사람이 없어. 기타는 쌔고 쌔서 잘 쳐야 되는데 색소폰은 좀만 불면 합격이야.”라 말해주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되었다. (웃음)

마지막 질문, 지금의 나를 만든 베스트 앨범을 뽑는다면.
재즈 중에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 ‘Round About Midnight >, 그리고 힙합에서 가장 좋아했던 앨범은 피트 락과 씨엘 스무스(Pete Rock & CL Smooth)의 < The Main Ingredient >다. 웨스트 코스트의 지훵크(G-Funk)나 이스트 코스트의 붐뱁만 듣다가 처음으로 재지한 샘플이 들어간 힙합 음악을 접하게 된 순간이다.

인터뷰 : 김도헌, 임동엽, 장준환
정리 : 장준환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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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7 이정선 X 윤병주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일곱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포크의 대부 이정선과 블루스 대표 주자 윤병주다.

정확한 수식인지 모르지만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로 음악인구에 회자되는 이정선 그리고 블루스 하면 떠오르는 뮤지션 윤병주를 함께 만났다. 근래 윤병주가 이끄는 프로젝트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은 막 ‘항구의 밤’이라는 곡을 원곡의 주인공 이정선과 함께 녹음했다. 10월에 발표할 음원을 미리 들어봤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귀를 잡아끈다.

이정선이 오래전 내놓은 곡을 부평구문화재단이 진행하는 기획 앨범을 위해 새로이 편곡해 레코딩한 것이다. 이 기획은 대중음악의 발상지라고 할 부평의 미군기지 애스컴의 역사성을 복원하는 동시에 인천 부평 지역 뮤지션들을 찾아 음원제작으로 연결하는 ‘글로컬’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밴드 ‘지인들’의 멤버 중 한 명도 이곳 인천 출신이다.

이들의 조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윤병주와 지인들은 전에도 이정선의 곡 ‘거리’와 ‘우연히’를 리메이크해 싱글로 낸 바 있다. 얼핏 음악적 관련성이 떨어져 보이는 둘의 연(緣)이 어떻게 맺어진 건지 궁금했다. 서울 방배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재미있게’ 음악을 하려는, 어쩌면 음악가의 기본을 강조하며 음악 녹음의 즐거움을 확인해주고 있었다.  

이정선의 곡인 ‘항구의 밤’을 녹음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이정선이 직접 노래까지 했는데… 그 많은 곡들 가운데 왜 하필 ‘항구의 밤’을 고른 건가?
윤병주: 사실 애초 (이)정선 형의 곡들 중에서 딱 그 곡을 원했던 건 아니다. ‘바닷가의 선들’도 있고 기존에 내가 해오던 블루스, 록적인 색채를 잘 살릴 수 있는 형 노래들도 많았다. 이번에는 나름대로 색다른 도전이었다고 할까. 안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도 직접 해보면 결국 우리 음악의 맛이 묻어나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 결과물도 그렇게 나왔다고 본다. 부평구문화재단 기획대로 인천이 항구라는 점도 생각했고…

‘항구의 밤’이 어떤 곡인지 알려 달라.
이정선 : 이 곡은 1990년에 나온 앨범 < 雨 >에 수록되어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단출하게 어쿠스틱 기타 하나 가지고 만든 노래였다. 이번에는 밴드 ‘윤병주와 지인들’과 함께 하는 만큼 더 리얼하게 항구의 분위기를 살리고 싶었다. 시끄러운 선술집에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복작복작한 느낌?…

원곡이 슬픈 감정을 중심으로 흘렀다면 이번 음원의 보컬은 상대적으로 밝게 느껴진다.
이정선 : 군중 속의 고독이란 게 있다. 그리고 원래 즐거울 때가 더 슬픈 거 모르나? (웃음) 원래 ‘항구의 밤’이 그렇게 슬픈 노래는 아니다. 슬픔이 다 지나간 다음을 담고 있다.

윤병주 : 오랫동안 이정선 음악을 들어 왔다. 어릴 때 들은 정선이 형의 목소리가 있다. 그런데 근래 공연에서 받은 느낌은 또 다르더라. ‘항구의 밤’에서의 보컬은 뭐랄까… 또, 또 다른 제3의 보이스컬러였다. 확실히 정선이 형 연배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깊이가 존재한다. 젊을 때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있었다면 나이가 쌓인 지금 옛 노래를 부르니 맛이 또 다를 수밖에…

‘항구의 밤’에 블루스의 터치가 강하게 느껴져서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얼핏 윤병주와 이정선 간에 음악적 거리가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 한국에서 블루스를 밴드 명으로 내세우며 블루스 음악을 제대로 표방한 게 바로 엄인호와 정선이 주축이 되어 만든 ‘신촌 블루스’ 아닌가?
이정선 : 1970년대 초에 음악을 시작했다. 음악을 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다. 시작은 그렇게  재미였는데 한 10년 쯤 음악계에 있다 보니 바로 그 재미가 사라졌다. 다 돈과 연결되니까 즐거움을 좇으며 활동하는데 제약이 있었다. (엄)인호를 만나서 그냥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고 ‘그래 그럼 우리 같이 재밌게 음악 한번 해보자’ 하면서 음악 동호회 느낌으로 ‘신촌 블루스’를 만든 것이다.

그래도 당시 블루스를 내걸었다는 게 놀라웠다.
이정선 : 공연을 하려고 모인 게 아니니까 카페에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주로 놀았다. 그러다 보니 각자 관심 있는 장르도 다르고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좁히고 좁히다 보니 블루스만 남더라. 그래서 블루스를 했다. (웃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내게 블루스는 늘 편한 음악이다. 어렵게 만들고 싶으면 어렵게 만들고 쉽게 만들 수 있으면 쉽게 만드는. 어떻게 해도 내 음악적 뿌리는 늘 블루스에 닿아있다. 많은 분들이 나를 포크로 연관 짓지만 실은 블루스다.

윤병주는 이름만 들어도 즉각적으로 블루스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윤병주 : 블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듣던 음악이다. 브리티시 인베이젼 시기, 그러니까 1960년대와 1970년대 음악이 대부분 그렇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블루스에 영향받은 록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일부러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연주를 하면 블루스적인 게 늘 풍겨 나온다. 그만큼 내 몸에 블루스가 배어 있다.

‘노이즈가든’을 거쳐 ‘로다운 30’ 그리고 새 프로젝트인 ‘윤병주와 지인들’ 역시 블루스를 베이스로 하고 있다.
윤병주 : 물론 멤버 변동이 있긴 했지만 ‘로다운 30’은 함께 모여 작업을 시작한 게 2000년이다. 반면 ‘지인들’은 멤버들 각자 밴드들인 ‘소울트레인’ 등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큼 관계가 조금 더 느슨하다. 그룹의 모태는 그레이트풀 데드(Grateful Dead)다. 1960년대 활동한 미국 밴든데 그 사람들을 보면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자유롭게 한다. 블루스도 하고 잼도 계속한다. 요즘 미국 쪽을 보면 결국 다 잼과 루츠(Roots)록 쪽 음악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우리도 비슷하다. 다 내려놓고 실컷 연주나 해보자 싶었다. 정선이 형 곡 하나로 무대에서 십 분씩 연주하고 그랬다.

‘지인들’을 통해 꼭 하고 싶은 건 무엇인가?
윤병주 : ‘로다운 30’은 당연 창작 곡이라면 ‘지인들’은 커버(Cover). 즉 기성곡을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원래 커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커버를 녹음해서 발표한 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안 해본 거라는 것에 끌렸다고 할까. ‘항구의 밤’(10월에 발매 예정)도 그렇고 올해 초 제작한 ‘거리’, ‘우연히’가 모두 이정선 선생님의 곡이다.

윤병주가 리메이크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어땠나?
이정선 : 뭐 좋았다. (웃음) 근데 ‘거리’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았나 싶긴 했다. 이게 내 정규 1집 < 이정선 1집 >(1974)에 수록된 곡인데 그 음반이 나오자마자 딱 금지가 됐다. 11곡 중에서 9곡인가가 금지됐었다.

결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한데…
이정선 : 병주가 참 맛있게 기타를 친다. (웃음) 개인적으로는 노이즈가든 때의 윤병주가 회상될 만큼 ‘윤병주스러운’ 기타 톤이 느껴졌다. (예전부터 노이즈가든을 알았느냐 물으니)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이 없어서 그렇지 그때부터 음악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윤병주 : ‘거리’를 녹음할 때 정선이 형이 피처링에 참여해주지 않으실 걸 대비해 다른 버전의 연주까지 다 맞춰 뒀었다. 이 곡을 커버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형이 함께해주길 바랐는데 다행히 흔쾌하게 승낙해주셔서 고마웠다. 늘 외국 팝을 듣던 내게 국내 블루스 음악의 강렬함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니까 여러모로 뜻깊기도 했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때는?
윤병주 : 2011년 즈음, 한 레이블의 축하 연주를 ‘로다운 30’하고 정선이 형이 같이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 만나서 ‘건널 수 없는 강’, ‘우리네 인생’, ‘우연히’, ‘오늘 같은 밤’을 포함해서 네 다섯 곡 정도를 함께 했다.

함께 작업하는데 음악적 트러블은 없었는지?
이정선 : 합을 많이 맞추려고 하면 더 틀려진다. (웃음) 요즘 시대는 어지간한 비트가지고서는 세다고 느끼지 않지 않나. 그래서 나는 윤병주와 지인들이 기타나 리듬을 더 강하게 치고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엔지니어들이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안 싸우려고 그냥 뒀다. (일동 웃음)

윤병주는 이정선과의 작업이 주는 기분이 남달랐을 것 같다.
윤병주 : 내가 처음 팝을 들은 게 초등학교 때였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 롤링스톤 >같은 외국 록 잡지를 보셨고 그 영향으로 나도 < 월간 팝송 >을 끼고 살았다. 그랬으니 우리나라 밴드 음악에서 내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겠나. 그러다 우연히 정선이 형의 최신 음반을 사서 듣게 됐는데 형이 자주 하는 말처럼 한국적인 ‘뽕’스러움이 너무 멋지게 다가왔다. 지미 페이지 연주에서나 나오는 신비스럽고 강렬한 블루스가 솟아 나왔다. 그 이후로 정선이 형 공연도 보러 다니고 그랬다.

편곡 과정은 수월했나?
병주 : ‘항구의 밤’은 형이 무대에서 종종 연주하기도 하는 곡이다. 특히 < EBS 스페이스 공감 >이나 < 온스테이지 > 영상이 좋다. 그 질감을 그대로 살리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녹음도 빨리 끝난 편이다.

이번 음원제작은 부평구문화재단 기획의 일환이다. 많은 지자체나 문화재단들이 공공재원으로 음악계를 지원하는 사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할 건 없는지 말해 달라.
이정선 : 좋은 기획이고 재밌는 프로젝트다. 나는 공공 재원으로 음악 신을 지원하는 사업을 좋게 보고 있다. 다만 음악에 대한 간섭을 안 한다는 조건 하에서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밖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늘 최선을 다한다. 외부에서 간섭하면 색을 잃는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간섭이 전혀 없어서 좋았다. (웃음)

함께 작업하면서 선배에게 배운 것이 있었을 텐데…
윤병주 : 정선이 형은 항상 음악을 “재밌으려고 한다”고 말한다. 곁에 있으면 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는다. 오래 음악을 하려면, 또 하고 싶다면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내 음악이 지금 이 시대에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서 안절부절 하거나 피해의식을 갖는 게 아니라 늘 지금에 행복할 수 있는 마음. 20, 30년 후에 정선이 형의 (음악에 대한) 태도를 갖고 싶을 만큼 많은 걸 배웠고 또 영향을 받았다.

인터뷰 : 임진모, 박수진, 임선희
사진 : 임선희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