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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6 윤항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 록 밴드의 레전드 ‘키보이스’ 출신의 톱가수 윤항기다.

‘한국의 비틀스’라는 수식이 말해주듯 국내 초창기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 밴드 ‘키보이스’는 1960년대 부평의 미군수지원사령부 애스컴(ASCOM) 등 미군 부대의 클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국내 무대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키보이스하면 떠오르는 이름 윤항기.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딴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활동, 솔로 히트 넘버인 ‘별이 빛나는 밤에’‘나는 어떡하라고’‘장밋빛 스카프’ 등으로 한국 대중음악계에 굵직한 획을 남겼다.  

동생 윤복희가 불러 국민 위로곡이 된 ‘여러분’의 작곡자도 바로 윤항기다. 선친의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작사, 작곡, 노래, 연기 뿐 < 춤추는 함대 > 등의 뮤지컬 기획자로도 두각을 나타내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위상도 구축했다. 한국 록의 씨앗을 뿌린 공로를 인정받아 최근에는 정부가 주는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윤항기는 애스컴을 가리켜 팝음악에 꿈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우리 대중음악을 일궈낸 ‘K팝의 중심지’라고 정의했다. 여기 미군 클럽무대를 선회하며 뿌린 당대 뮤지션들의 열정을 현 대중음악의 씨앗으로 일컫고 있는 것이다. 패기 넘치던 당대의 가수 생활과 목회자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여러분’을 포함해 장대한 60년 음악 인생의 추억을 풀어놓았다.

이번‘202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셨어요. 축하드립니다.
옛날에 장관상을 받은 적은 있었는데 훈장은 처음이다. 요즘 활동을 많이 안 하다 보니 전혀 예상을 못 했는데 대한가수협회 이자연 회장이 나한테 얘기도 안 하고 추천했다고 한다. 고맙다. 수상자 연락을 받고 깜짝 놀랐다.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웃음)

은관문화훈장을 받으시게 된 역사적 공로를 뭐라고 생각하셨나요.
그날 수상 소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내가 데뷔 60년 차고 처음 1959년에 미8군에서 김희갑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며 가요계에 데뷔했다. 그때 나는 남석훈이라는 가수하고 로큰롤 가수로 활동했다. 남석훈은 나중 완전히 빅스타가 되었고. 그때 미8군에서부터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드럼도 배우면서 1963년에 한국의 최초의 록 밴드 ‘키보이스’를 결성했다. 그걸로 한국 대중음악의 한 장르를 우리가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서 한국에서도 1960, 70년대에 록의 전성기가 생기고. 그게 공로이자 자랑거린 것 같다.

키보이스 결성과정을 알려주세요. ‘한국의 비틀스’로 불리며 엄청난 인기를 누렸는데요..
키보이스가 1963년에 데뷔해서 1964년에 ‘정든 배’가 나왔다. 그게 나왔을 무렵이 한창 비틀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때다. 우리도 악기를 다루는 팀인데 비틀스도 그러니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처음 우리가 그룹을 만들었을 때는 비틀스를 모방한 게 아니라 실은 비치 보이스(Beach Boys)에 많은 영향을 받았었다. 비치 보이스를 보고 한국에서도 저런 그룹을 만들어보자 해서 만든 그룹이 키보이스다.

선생님은 나중 솔로 활동을 하면서 ‘별이 빛나는 밤에’‘장밋빛 스카프’‘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등 잊을 수 없는 노래를 많이 만드셨어요. 그런데 왜 그룹 활동을 할 때는 자작곡을 안 만드신 거예요?
좀 전 얘기한 것처럼 내가 데뷔했을 때가 1950년대 후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위대한 작곡가이신 이봉조 선배님 등이 다 미 8군 쇼에서 활동하실 때였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는 그분들도 작곡 활동을 안 하셨다. 나중에 1960년대 중반에 들면서부터 이봉조 선생님도 작곡을 하셨고 김희갑 선생님도 뒤에 시작하셨다.

그 시절 작곡을 하겠다는 생각을 못 했던 것 같다. 1964년에 낸 키보이스의 ‘정든 배’라는 노래를 쓴 것도 김영광이라는 작곡가다. 그 친구가 우리랑 친구다 보니 우리한테 이 노래 같이해보자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서 덕분에 앨범도 내게 됐다. 물론 당시 김영광이라는 친구가 작사 작곡을 할 때 ‘왜 우리는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도 있다. 분위기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 만든 곡은 1969년에 쓴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이어서 나온 곡이 ‘목이 메어’였고… 같이 1969년에 나왔다.

자작곡을 만드시게 된 계기는요?
사실 한국 뮤지션을 보고 작곡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당시는 송창식, 윤형주 등 포크 가수들도 번안 가요를 많이 할 때였다. 우리도 김영광 곡을 빼면 다 번안곡이었고. 그래서 차츰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제는 우리 곡을 조금 해야 하지 않나’, ‘외국 곡 못지않은 우리 곡을 한번 써보자!’라는 생각. 왜냐하면 나는 또 시작이 외국 노래를 부른 팝 싱어였고 록 가수였으니까. ‘별이 빛나는 밤에’나 ‘목이 메어’는 그런 외국 밴드의 곡을 많이 커버하면서 이제는 번안곡에서 벗어나 우리 곡을 써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쓴 곡이었다.

키보이스 활동하실 때도 이미 솔로로 전향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솔로로 나온 게 몇 년도였나요?
키보이스에서 1969년에 나왔다. 그러고서는 그룹을 하나 따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키보이스로 할 때는 내 이름을 많이 알리지 못해서. 또 그 당시는 월남으로 가는 게 붐이었는데, 나한테도 월남으로 갈 기회가 생겼다. 그래서 거기에 가서 쇼를 하기 위한 팀을 만들었는데 그게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다.

그 팀이랑 함께 1년간 월남에 갔다가 한국 들어와서는 팀으로 처음 발표한 곡이 ‘고고 춤을 춥시다’였다. 그게 1971년이었다. 그게 나중에 희귀음반으로까지 올라갔다. 완전한 로큰롤 송이었다. 한 곡을 가지고 끊지 않고 계속 연결, 연결해서 라이브를 30분인가 연주를 했다. 그게 음반으로 나온 거다.

선생님이 슈퍼스타로 떠오른 때는 1973년의 ‘나는 어떡하라고’였어요. 그 곡도 그렇고 이후 ‘장밋빛 스카프’도 그렇고 분명 록을 하셨는데 당대의 트렌드인 포크송을 의식하셨는지 ‘록 + 포크’ 스타일이었어요. 록을 중심으로 주변 장르와의 퓨전을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렇다. 거기에 추가로 트로트도. ‘장밋빛 스카프’가 그렇지 않나. 사실 그때는 본래 윤항기의 음악 스타일보다는 빨리 대중화할 수 있는 걸 원했다. 키브라더스를 하면서 발매한 ‘목이 메어도’나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경우에는 마니아들 사이에 알려졌다. 돌아가신 DJ 이종환 선생님이 그 노래를 좋아하셔서 라디오 방송 시그널 음악으로도 쓰시기도 했고 아예 지금도 살아있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 윤항기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세종회관인 시민회관에서 리사이틀도 했다. 그게 방송 <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오픈 기념 축하 공연이었을 거다. 그 덕에 윤항기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다가 키보이스 때부터 인연이 있던 신세계 레코드 간부가 와서 우리가 하는 걸 보더니 ‘이렇게 그룹으로 해서는 안 되겠다. 솔로로 해보자’고 제안했다. 그래서 1973년에 ‘나는 어떡하라고’가 나오고 그 후 1975년에 나온 곡이 ‘장밋빛 스카프’였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키보이스 활동할 때 썼던 곡인가요?
그건 키보이스 때 나온 게 아니라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를 만들고 월남에 가서 만든 곡이다. 월남에서 만들고 한국 와서 키브라더스 음반이 나오기 전에 그걸 고고클럽에서 연주했다. 그 후에 키브라더스 데뷔 앨범, 아까 말한 1971년의 < 고고 춤을 춥시다 >에 수록됐다. 그리고 그 곡이 대중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할 무렵에 펄 시스터즈의 음반을 작업하던 분이 나에게 와서 펄 시스터스가 그 노래를 취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음반이 나오기 전에 펄 시스터즈 버전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먼저 나왔다.

‘장밋빛 스카프’는 어떻게 쓴 곡인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이 서울 스튜디오에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 앨범 녹음을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앨범에 수록할 곡 수(數)가 딱 한 곡이 모자랐다. 그날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한 노래가 모자랐던 거다. 가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멜로디가 아닌 가사가. 그게 또 스캔들이라면 스캔들인데, 1960년도 후반에 내가 좋아했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썼다. 당시에 그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한동안 그 여인을 찾아서 전국을 미친 듯이 헤매 돌아다니기도 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스케줄도 펑크 내고 그랬던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때 갑자기 홍콩으로 사라졌다고 기사가 나고. 당시 스캔들이 많았다. (웃음) 어쨌든 불현듯 그 생각이 난 거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앞에 그 테마가 잡혔다. 그래서 그냥 부랴부랴 도착하자마자 멤버들은 스탠바이 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잠깐 기다려보라고 하고 소파에 앉아서 가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막 썼다. 그래서 그 곡이 가사가 짧다. 그다음은 이제 멜로디를 써야 하는데, 어떤 고급스러운 멜로디는 상황이 촉박하다 보니 안 나오고, 그냥 급하게 되는대로 가사에다가 써 붙인 멜로디가 그 뽕짝 스타일의 멜로디였다. ‘쿵짜작∼ 쿵짝’. 사실 그 멜로디의 영감을 받은 건 조영남 노래의 ‘불 꺼진 창’(이장희 작사 작곡)이었다. 나중 금지된 곡이다. 그 멜로디랑 리듬이 생각나더니 이 가사에 그런 스타일의 선율을 입혔다. 그게 또 운율에 딱딱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장밋빛 스카프’는 한때 노래방 애창곡 1위를 차지한 적도 있지요. 사람들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못 이룬 사랑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도 있지만 부르기 좋은 곡조이기도 해서인 것 같아요.
아주 쉽다. 키브라더스 앨범으로 나온 곡인데 그 노래가 처음 수록됐을 때는 타이틀이 아니고 밑에 깔려있는 곡이었다. 그런데 그 앨범이 라디오 쪽으로 갔는데, 라디오 측에서 앨범 전체를 들어보더니 타이틀곡보다는 밑에 있던 ‘장밋빛 스카프’가 더 좋다는 거였다. 동아방송(DBS)의 이해성 PD가 찾아내 거기서 틀기 시작하면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나는 어떡하라고’는 KBS 가수왕상의 영예를 준 곡이죠?
맞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영화로도 나왔었다. 내가 주연을 맡았었고. 그래서 내 경력에 보면 영화배우라고도 나온다. (웃음)

이후 실세를 장악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나는 행복합니다’가 나왔는데 전두환이 대통령이 됐을 무렵이라 ‘전두환 송’이라고도 불렸지요?
그렇다.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신군부가 그런 밝은 노래, 희망적인 노래가 아니면 다 금지시켰다. ‘장밋빛 스카프’도 한때 금지가 됐었으니. 가사가 ‘오지 않을 사람을…’ 막 그러니깐 전(前) 정권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말도 있었고. 참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1983년 히트곡 ‘이거야 정말’은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어요. 가사도 심상치 않았고.
엄진 작곡가가 만들었다. 가사를 사계절에 빗대서 참 잘 만든 노래였다. 

윤항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가 전 국민 누구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러분’이지요. 윤복희 노래로 남매의 완벽한 협업을 선사했는데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지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으셨나요?
사실‘여러분’을 만들고 난 후였다. 그전에는 그냥 동생이랑 집사람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깊은 믿음 없이 약간 강제적으로 믿은 거고..  

‘여러분’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신앙에 들어가셨던 거군요. ‘여러분’은 역사적인 명곡입니다. 선생님은 그 곡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이라는 곡만 딱 놓고 보면 어떻게 저런 곡이 나올 수 있을까 싶은데, 사실 그 이전에서부터 내가 닦아온 결과였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1974년에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 제1회 한국 가요제 >에서부터 곡을 출품했었다. 그게 한국 최초로 열린 국내 가요제였는데 그때 곡이 ‘외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때 대상을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가 대상을 받고 내 곡이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걸 시작으로 가요제가 유행이 되면서 매년 가요제가 있었다. MBC 가요제, TBC 가요제 등등. 모든 가요제에 빠짐없이 출전 곡을 냈다. 그렇게 해서 ‘나그네’라는 곡도 나오고 ‘바늘과 실’도 나오고, 정은희가 부른 ‘누구 없소’까지. 다 가요제 참가곡이다. 결론해서 내 나름의 내공을 쌓아왔다고 할까. 1979년 ‘여러분’이 그냥 갑작스럽게 나온 게 아니라 그 이전에서부터 축적되어 온 경험의 산물이다.

‘여러분’은 약간 가스펠적인 터치가 있었어요.
멜로디는 그냥 팝 발라드인데 아무래도 가사 때문일 거다. 그 곡은 내가 동생의 아픔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쓴 곡이기도 했다. 오빠로서 동생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만든 내용이다. 그때 윤복희가 광신자라고 할 정도로 신앙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담은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너를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너를 위한 것이라는 그런 마음으로 노래를 만들었다고 하면 동생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곡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체적인 모티브를 미리 동생에게 이야기했는데 아주 좋아했었다.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줄게 /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그 가사가 그렇게 해서 나온 가사다.

많은 세월이 흘러서 2011년 임재범이 < 나는 가수다 >에서 불러 ‘여러분’이 재(再)유행했지요. 그 곡을 듣고 어떠셨는지?
그 곡이 30년 만에 다시 살아났다. 30년 만에 ‘여러분’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감동적이었다. 윤복희가 부른 것과는 또 달랐다. 한창 ‘여러분’ 터지면서 인기를 얻을 때 임재범이 나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와서 나한테 간증을, 신앙 고백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 학교(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면서 한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어렸을 적 이야기인데 그때 많이 소개된 것처럼 정말 말을 더듬으셨어요?
엄청 더듬었다. 나중에 커서 활동하면서도 더듬었다. 물론 희한한 게 노래를 할 때는 말을 안 더듬었다. (웃음) 말더듬이가 고쳐진 게 성직자가 되면서부터다. 어떤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성령에 의해서 나아진 거로 생각한다.

한때 뮤지컬 기획자로 활동하신 것도 기억납니다. 한창 화제였던 < 춤추는 함대 >도 선생님이 기획하셨죠?
그렇다. 그때 내가 키보이스로 미8군에서 패키지 쇼를 할 때는 코미디도 하고 다 했다. 드럼도 치고 노래도 하고. 뮤지컬 기획도 했으니 ‘만능’이란 찬사를 많이 받았다.

음악 인생에서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러운 노래를 꼽으신다면.
한 곡으로 압축하자면 역시 ‘여러분’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의 윤항기를 만든, ‘여러분’ 같은 곡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역시 ‘별이 빛나는 밤에’다. 내가 처음 쓴 곡이기도 하고 가장 ‘윤항기다운’ 곡이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거야 정말’ 등등 다른 곡도 많지만 진짜 내 본래 스타일은 ‘별이 빛나는 밤에’ 그리고 ‘목이 메어’, ‘장밋빛 스카프’ 같은 노래들이다. 

키보이스 때부터 전국 미군 부대를 돌아다니셨는데, 부평 애스컴에 대한 기억은 어떠세요?
미 8군 쇼하는 분들에게 애스컴은 가장 큰 무대였다. 가장 클럽이 많은 데이기도 했고. 서울하고도 가까운 데다가 그 당시에 미 8군 기지 보급창이다 보니 거기서 쇼를 하게 되면 먹고 마시는 거는 아주 풍족했다. 그때가 한국에는 콜라도 모르고 햄버거도 없을 때인데 애스컴에서는 물자가 풍부하니 쇼 단체에게 미군들이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줬다. 그러니까 다른 부대 가는 거보다 애스컴 스케줄 잡히는 게 좋았다. 그날은 이제 가방 들고 가는 거였다. 먹을 거 챙기러. (웃음)

한창 애스컴 클럽무대에 서셨을 때가 1964~1966년 즈음일 텐데요.. 당시 멤버가 윤항기, 옥성빈, 김홍탁, 차도균, 차중락이었죠. 그때 선생님은 드럼을 치셨는데 노래는 어느 정도 하셨나요?
그때는 거의 다 같이 했다. 혼자 솔로로 하는 거는 (차)중락이가 한 ‘Mr. Tambourine man’ 정도고 그거 말고 나머지는 다 함께했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드럼 치면서 노래한 사람이 나다. 그거를 우리가 ‘쎄시봉’에서 하는 걸 보고 나중에 또 드럼 치면서 노래를 한 가수가 배호다.  

키보이스 때 가장 기억나는 곡은요.
역시‘정든 배’다. 또 아이러니한 게 키보이스는 분명 록 그룹인데 그 곡은 또 완전 뽕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 그게 뽕이 아니었으면 히트 못 쳤을 거다. 작곡가 김영광이 그걸 노렸다. ‘그녀 입술은 달콤해’도 같은 앨범 수록곡이었는데 실은 그게 타이틀곡이었다. ‘정든 배’는 밑에 깔린 노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취입해서 ‘정든 배는 떠난다’로 내기도 했고.  

애스컴 클럽 공연에서 미군들 앞에 노래할 때 레퍼토리는 어떤 곡들이었나요?
다 팝송이었다. 비틀스 초기 곡들은 거의 다 연주했다. ‘I want to hold your hand’, ‘She loves you’, ‘A hard day’s night’ 등등. 비치 보이스도 했고.. 

미군들은 어떤 곡을 가장 좋아하던가요?
그때‘이미테이션’이라고 해서 미국 가수들 모창을 많이 했었다. 그때 내가 레이 찰스(Ray Charles)랑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모창을 하고, 차중락이 엘비스 프레슬리, 차도균이 팻 분을 했다. 특히 내가 레이 찰스랑 루이 암스트롱 모창을 할 때는 미군들이 자지러졌다. 거의 졸도 수준이었다. (웃음) 일어나서 기립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I can’t stop loving you’랑 ‘Hello, Dolly’였는데 다 까무러쳤다.

부평 애스컴의 우리 음악계에 남긴 의미는 뭘까요?
애스컴은 우리 키보이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록 음악을 추구하고 그 세계에 꿈을 가지고 있던 젊은이들이 가장 쉽게 모이고 그 문화를 접할 수 있던 곳이었다. 왜냐하면 동두천 문산은 멀었고 부평은 서울과 가까웠다. 그래서 더 자주 갔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K팝의 뿌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다양한 팝음악을 시도했던 곳이고 그 음악들이 우리 음악의 다양성에 기여했다고 본다.  

선생님에게 음악은 뭐였을까요, 대중에게 윤항기의 음악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나는 팝 음악을 할 때는 나 자신에 대해서 ‘앞으로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안 했다. ‘그게 아니면 할 게 없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내가 가진 재능이 그거다 보니. 그래서 그냥 음악을 죽기 살기로 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해오다 보니 나중에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부터는 앞으로 내가 음악인으로서 무언가를 남길 수 있는 바를 해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곡을 쓰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변화가 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윤항기의 곡은 거의 다 그 당시 나의 삶에 대한 표현이었다. ‘라이프 뮤직(Life Music)’이 아닐까. 그걸 또 대중이 동의를 해주셨다. 그 삶을 인정해주셔서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나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사랑해준 게 아닐까 싶다. 항상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신현태,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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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5 신지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다섯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여름 댄스음악의 전설이자 현재진행형 코요태의 메인 보컬 신지다.

1998년 데뷔 이래 코요태는 마이너 댄스음악이란 확고한 정체성으로 나이트클럽과 길거리를 수놓았다. “차가 있었던 분들이라면 우리의 테이프가 꼭 있었다.” ‘순정’, ‘만남’, ‘시련’, ‘Passion’, ‘디스코왕’ 등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히트곡이 줄지어 터지면서 그들은 댄스음악 전문팀의 롱런 가능성을 시범했다. 그때 만해도 가수가 댄스음악을 가지고 10년 이상 장수하기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중심엔 노래하는 신지가 있었다. 오랜 세월을 통해 익숙해진 목소리는 이제 댄스음악, 발라드, 트로트 등으로 멀티 스타일로 발현되어 대중을 찾았고, 가수는 기꺼이 노래 부를 수 있는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 모두가 ‘인복’ 때문이라며 반복적으로 주변인들에 대한 감사와 애정을 표한 현한 신지를 지난 10월25일 홍대 빅퍼즐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대화에 거침이 없었다.

1998년 데뷔한 코요태가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이름을 지킨 동력이 무엇일까?
크게 튀지 않았지만, 멤버 개개인이 방송을 통해 꾸준하게 얼굴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코요태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 예전보다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김종민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김종민은 (코요태 핵심은)신지의 목소리라고 말하지만, 앨범과 노래에 한정할 때만이 그럴 것이다. 내가 메인 보컬이니까.. (웃음) 그것도 많은 분이 들어주실 때나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코요태의 시작부터 원년 멤버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인복이 많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많이 얘기했지만 코요태를 그만두지 않은 것이 내가 가장 잘한 일이다.

김종민이 군 생활을 하기 전과 후에도 많은 예능 활동을 소화하고 있다.
응원한다. 코요태는 원래 애초 예능을 많이 하는 그룹이었고, 사랑받을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 역시도 김종민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자주 예능에 출연했다. 방송에서는 나름 청순하게 생긴 여자가수가, 솔직하게 말하는 콘셉 자체가 신선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웃음)

코요태에서 신지의 정체성을 본인은 어떻게 보는지..
내가 지금 마흔이다. 열여덟 살 데뷔 이후 내 인생의 반 이상을 이지선이란 본명보단 신지로 살았다. 이름보다 예명이 익숙한 만큼, 많은 분께 나를 알릴 수 있었던 계기 역시 코요태였다. 만약 솔로나 걸 그룹으로 나왔으면 이만큼 빛을 봤을까. (웃음) 코요태로 시작을 안 했다면 내가 과연 이 자리에 있었을까?

그 당시 여성 보컬을 중심으로 한 3인조 혼성그룹의 조합은 흔하지 않았다.
맞다. 3인조 혼성은 많이 있었지만, 여자 보컬을 메인으로 세운 댄스 그룹은 우리가 처음이라 생각한다. 사실 데뷔 때만 해도 많은 분이 그룹의 축인 차승민한테 스포트라이트가 갈 거라고 했다. 나는 인천에서 가요제나 쫓아다니던 촌스러운 아이였으니까. 외모도 아이돌보다 못했고,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고. 그런 어린 애가 누구한테도 안 지려고 했다. 당차다 못해 되바라져 보이기도 했을 거다.

‘순정’이 히트했을 땐 어떤 기분이었나. 1999년이다.
잘 몰랐다. 나이트클럽을 갈 수 없었던 고등학교 3학년의 나이였으니 체감을 할 수 없었다. 코요태 음악 중 애증의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순정’이다. 신지를 있게 해준 곡이고, 아직 무대의 엔딩이기도 하다. 공연에서 ‘순정’을 먼저 부르면 다른 노래가 다 죽으니까 세트 리스트 무조건 마지막 순서에 배치한다.

‘파란’, ‘비상’ 등 새 곡을 가지고 나올 때마다 신지의 어떤 형태든 특별한  안무 동작이 있었다. 팬들이 많이 따라했던 부분이다. 본인 아이디어의 산물인가?
내가 요청하는 건 딱 하나다. 라이브 하면서 안무를 보여드려야 하니까 발보단 팔과 손을 이용하는 동작을 부탁드렸고, 실제로 그런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쉽고. 나부터가 어려운 춤은 못 춘다. (웃음) 어려운 부분이 없으니 많은 분이 디스코 클럽 같은 곳에서 편하게 따라 한 것 같다.

코요태 혹은 솔로를 통틀어서 제일 자랑스럽거나 만족스러운 앨범 혹은 곡은?
뭐가 더 좋고 나쁘다고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코요태의 가장 단단한 결과물은 1집 < 고요태(高耀太) >, 2집 < 실연 >, 6집 < Koyote 6 >라고 생각한다. 다른 앨범도 마찬가지지만, ‘디스코왕’이 있던 6집은 열일곱 곡으로 꽉 채워 발매했고 그중에서도 버릴 게 없었다. 특히나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신지는 항상 ‘기’가 세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뜻밖에 무대 공포증이 있다는 얘기에 놀랐다.
아무도 안 믿더라. 그게 너무 힘들었다. 나는 힘들어 죽겠는데. (웃음) 어릴 때는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철이 든 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솔로 활동을 하게 됐다. 김종민이 갑자기 군 대체 복무 판정을 받아 가게 됐고, 빽가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요태란 그룹 안에서 애초 가졌던 ‘각자 해보고 싶은 음악을 혼자 해보자’가 아니라 마지못해 한 거고. 2008년부터 10년까지가 불안정한 시기였다. 만약 그때 코요태를, 가수 신지를 포기를 했다면 지금 이렇게 인터뷰도 못 했을 거다.

혹시 코요태로 모든 걸 일구고 난 다음, 일종의 허탈감은 아니었을까?
그런 건 아니다. 멤버들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컸다.

우울증 대인기피증 등 당시 리얼한 상황을 듣고 싶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카메라 리허설까진 아무렇지 않게 잘했다. 그런데 본방송에 들어가고, 시작해야 되는 데 뭔가 어색하더라. ‘내가 지금 여기에 왜 있지?’란 생각이 들었다. 그 전부터 떨림은 있었는데 < 음악중심 >하던 날이 최악이었다. 생방송, MC를 많이 했던 터라 라이브와 녹화 방송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디서 온 건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갑자기 닥치니.. 미치겠더라

병원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대인기피증, 무대 울렁증, 공황장애, 그리고 우울증이라고 했다. 약은 먹지 않았다. 평소 내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병이지만, 사실 대외적으로 비추었던 센 이미지는 ‘자기방어’적이었던 내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스스로 뛰어난 것도 없다 느끼며 연예인을 시작했고, 활동하면서도 ‘무슨 복이 많아서 사랑을 받을까?’란 생각을 했다. 너무 잘 될 때는 기계처럼 움직이기도 했고.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됐는데, 스케줄이 너무 많아 흥미를 느낄 시간도 없었다.

지금도 혼자 무대는 힘든가?
당시에 비하면 아무렇지 않지만, 아직 발라드는 혼자 하기 힘들다. 그때는 녹음하면서도 떨었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녹음실에 작곡가와 나만 남아 불도 끄고, 가사도 외워 노래 불렀는데, 목소리가 바들바들 흔들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좋으련만. 불안을 겪고 난 뒤엔 조금만 인지해도 더 떨게 되더라.

신지는 출생(부평구 청천동)은 물론 초중고를 부평에서 졸업한 오리지널 부평인이다. 청천 초등학교, 북인천여중(계양구 소재), 부평구 부개동의 부개여고를 다녔다. 그에게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자 동시에 ‘가수의 꿈을 품게 한 공간’이다. 자그마한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가요제에 출전하면서 데뷔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는 다른 인천 아티스트처럼 인천이란 출신을 자랑스러워했다.

부평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곳이었다. 나한테 부평역 앞 지하상가는 놀이터였다. 가수를 하기 전에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데뷔하고도 우리 음악이 얼마나 나오는지, 반응이 어떤지 가늠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자주 갔다. 길보드 차트라고 하지 않나? 리어카에서 노래가 나오고 했던 때에 인기를 체감할 수 있었다. 부평은 마음 편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고향으로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은 있는지.
부모님이 한 번도 인천을 떠나신 적이 없었고, 나만 서울에 나와 있던 터라 워낙 자주 다녀온다. 떠났다든가 다시 간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도 마음  속에는 부평이 있는 것 같다. 가끔 스케줄 때문에 경인 고속도로를 지나가면, 예전에 살았던 무지개 아파트가 보인다. 그때는 어릴 때 생각이 나 뭉클하다. 따로 숙소는 있긴 했지만 3집을 시작하고도 집은 부평이었다.

어릴 때 제일 좋아했던 가수 혹은 음악은?
박미경의 노래로 가요제에 많이 나가기도 했고,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는 인천 청소년 가요제에 나가서 은상을 받았다. 여자 가수가 솔로로 무대 위 그렇게 멋진 모습은 처음 봤다. 충격이었다. 심지어 고음을 너무 잘 올리더라. 그런 강렬한 모습 때문에 박미경을 동경했다. 남자가수의 경우 무조건 ‘모두 잠든 후에’의 김원준이다. 김원준의 인천 팬클럽 회장이기도 했다. (웃음)

박미경을 따라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시원했고, 멋있었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여자한테 저런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박미경이 처음이었으니까. 노래 자체를 부르는 걸 좋아하던 나였으니까, 저렇게 무대에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연락도 하고 지낸다.  신기하다. (웃음)

곧 코요태 앨범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모레인 10월 27일에 이효리(린다G)와 함께 한 ‘삭제’가 나온다. 6월부터 매달 노래를 한 곡씩 내고 있었고, 이번이 네 번째이다.  11월엔 신지의 솔로 음원을 거쳐 12월에 남은 두 곡을 더 포함해 코요태의 미니앨범으로 나올 계획이다.

‘삭제’은 어떤 스타일인가?
전형적인 코요태의 댄스곡이다.

11월에 나올 본인의 곡은? 어떤 스타일인가?
아마 11월 20일에 발매될 것 같다. 제목은 ‘세 번 잊어요’다. 6월에 발매한 ‘히트다 히트’의 프로듀서 ‘알고보니혼수상태’가 만들었고, 얼마 전 선물로 받은 곡이다. 처음 들었을 땐 너무 트로트가 아닌가 생각했다. 아직 정통에 가까운 장르를 표현할 정도의 깊이는 없었으니까. 작곡가에게 말하니 내 원래 스타일로만 불러 달라고 했고, 녹음한 뒤 나온 결과물에 생각보다 너무 만족해했다.

2008년 정규 1집 < 1stAlbum > 이후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 본인의 솔로 정규 앨범 준비 계획은?
신곡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내 음악 때문에 그룹의 작업을 뒤로할 순 없다. 일단 코요태가 우선이니까. 내년에 기회가 된다면 김종민도 빽가도 솔로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내 활동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고.

코요태는 두 분의 약간은 무신경한 점으로(웃음)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작게는 커버 디자인부터 사진을 고르고 뮤직비디오 수정하는 것까지. 그래서 멤버들이 나를 총 프로듀서라고 불러준다. 내가 해서 분란이 없다고. (웃음)

앞으로 어떻게 코요태를 유지해 갈 것인가?
2012년부터 직접 기획사를 만들어서 우리끼리 코요태를 꾸려가고 있는데 쉽지 않더라. 감사하게도 공연이 많은 그룹이었지만, 이번 코로나 19로 사무실 재정이 좀 힘들다.

코요태의 음악도 이제는 옛날 노래다. 요즘 분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알아봐 주시고 반가워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어떤 가수든 신경 써서 만들어낸 음악을 소개할 때 모두 사랑을 받으면 좋겠지만, 원한다고 이뤄지는 건 아니니까. 우리의 목표는 해체하지 말고 디너쇼까지 해보는 것이다. 코요태가 40주년 일 때 김종민이 환갑이다. (웃음) 잔치 겸 디너쇼를 해보는 게 어떨까? 혼성 그룹으론 유일무이할 거 같다. 평론가님도 그 디너쇼에 꼭 와 달라.

감사해야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꽤 길다면 긴 시간을 활동했다. 중간 중간 무너지는 순간과 힘든 시기가 있었고 버틸 수 있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술에 의지할 때도 있었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결론은 다시 밝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서 방송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 그래서 항상 나는 전생에 나라보다 더 큰 우주를 구한 것만큼의 인복이 있다고 말한다.

앞으로도 많은 분께서 코요태의 음악을 예전처럼 부담 없이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일일이 다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감사하고 싶은 분들이 많다. 너무 감사하다.

인터뷰 : 임진모, 손기호, 임동엽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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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4 유심초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인천 부평구 문화재단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계한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네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1980년대 초반 음악계를 석권한 형제 듀오 ‘유심초’다.

다가올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유시형과 유의형의 친형제 듀오 유심초를 만났다. 둘은 학생 시절부터 백영규, 이춘근 등과 함께 고향 부평에 터를 잡고 노래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부평을 외국 문물을 일찍이 접하고 낭만적이고 평화로운 ‘문화지대’로 기억했다. 1980년대 초중반 유심초의 본격 활동은 비록 짧았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스매시 ‘원투 펀치’로 당대 음악 팬들에게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지금 들어도 눈물 날 것 같은 소슬하면서도 아린 감성 그리고 시적(詩的)인 가사는 어떤 음악으로부터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느낌이 각별했다. ‘세련됐다’, ‘클래시컬하다’, ‘딴 음악하고는 달랐다’는 칭송이 잇따랐다. 상기한 두 곡 외에도 그 이전 ‘너와의 석별’ ‘이것 참 야단났네’ 그리고 그 이후 ‘사랑하는 그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유심초의 골든 레퍼토리들이다. 오래 활동하지 않았어도 히트넘버가 말해주듯 굵직한 궤적을 남긴 셈이다.

두 형제는 2000년대 통기타 붐에 의해 소환되어 다시 한번 분주한 시절을 재현했다. 한창 뛰던 젊은 시절 대중가수로 올인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방황을 뒤로 넘기고 지금은 음악의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고 털어놓았다. 떠들썩한 매체 활동보다는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으로 임한다고도 했다. 둘은 10월의 어느 멋진 날, 경기 서현역 부근 한 카페에서 유심초의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로 신나게 내달렸다.

데뷔 당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
유시형: 데뷔는 ‘너와의 석별’과 ‘너’라는 곡이었다. 이종용이 불러서 히트했지만 사실 우리가 오리지널이다. 원래 이종용이 자기가 앞면, 우리가 뒷면 이런 식으로 앨범을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군대 마지막 휴가 때 녹음을 하고 다시 들어갔는데, 이종용이 욕심이 나섰는지 내가 녹음한 반주에 그대로 자기 목소리를 입혀 타이틀로 걸어 발매했다. 제대 4개월 남겨 놓은 상태에서 그 노래가 방송에서 막 터져 나오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게 1975년 일이다.

데뷔 시기에 백영규 선생님과 음악 인연이 있지요?
유시형 : 백영규는 우리가 정식 앨범 나오기 전 아마추어 시절에 외대 다니면서 같이 음악 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당시 멤버는 학생 신분으로 나, 백영규, 숙대생 이춘근이었고 전석환 씨가 진행한 KBS 라디오 공개 방송 < 삼천만의 합창 > 등 라디오 프로에 나가곤 했었다. 그런데 나랑 백영규가 군대 가고 팀이 깨지니 의형이랑 이춘근이 혼성 듀엣으로 활동을 이어나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이대 메이퀸이 스토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숙대생인 이춘근이 더 이상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물레방아’는 어떻게 생긴 팀인지 알려주세요.
유시형 : 1975년 제가 제대할 무렵에 이종용의 권유로 공동 앨범을 발매하게 돼서 동생이랑 유심초가 탄생했고, 백영규가 저보다 늦게 군 제대를 하고 이춘근도 졸업을 하고 활동이 가능해지니 둘이 만나서 결성한 팀이 물레방아다. 그렇게 나온 데뷔 노래가 ‘순이 생각’.

1978년 나온 곡 ‘이것 참 야단났네’는 인상적이었습니다. 킹스턴 트리오(The Kingston Trio)의 ‘Greenback dollar’를 가사를 완전히 색다르게 번안했는데, 누가 개사한 건가요?
유의형 : 내가 했는데 이름은 형으로 올라가 있을 거다. 신고하는 사람이 착각해서 유시형으로 올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사람들은 형 유시형, 동생 유의형을 헷갈려한다고 말했다)

1975년 ‘너와의 석별’로 준수하게 데뷔를 했지만 이름을 알리는 수준이었고 결정타는 1980년 ‘사랑이여’였다. ‘너와의 석별’과 ‘사랑이여’ 사이에 공백이 꽤 긴데요…
유의형 :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라는 노래가 중간에 있다. 1976년도 발표했는데, 그것도 꽤 알려진 편이다. 그 노래가 한창 방송에서 반응을 얻을 즈음에 내가 군대를 갔다. 그리고 1978년 제대하고 발표한 게 상기한 번안곡 ‘이것 참 야단났네’다. 제대한 후에는 또 집에서 음악을 반대해서 1~2년 동안 못했다.

집안에서는 왜 반대를 했나요?
유의형 : 왜냐하면 아버지는 “전공을 살리지 왜 가수를 하려고 하느냐”는 거였다. 사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대학 졸업하기 전까지만 한다고 말했다.

유시형 : 부모님이 학생 시절 아마추어로서 음악을 하는 건 인정을 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하니까 아버지뿐 아니라 집안의 형들도 말리고 나섰다. 그런데 그 무렵에 최용식이란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사랑이여’를 포함해 노래 15 ~ 20곡 정도를 만들어서 왔었다.

최용식 작곡가는 누군가요?
유시형 :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그 친구가 군대에 있을 때 ‘너와의 석별’을 듣고는 그게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꼭 유심초에게 곡을 주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왔는데, 알고보니 중학교 동문이었다. 그 노래들을 받아놓고 처음에는 한 2~3년 정도를 묵어놨었다. 그러다가 1980년도에 다시 앨범을 내고 싶어 곡 정리를 하는데 ‘사랑이여’가 굉장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노래의 곡과 가사를 약간 수정해서 발표하게 되었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같은 작곡가인가요?
유시형 : 그건 다른 친구가 썼다. 앨범에서 아마 최용식 곡은 ‘사랑이여’ 하나일 거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춘근의 동생인 이세문이 썼다. 그 노래의 가사는 그리고 < 성북동 비둘기 >를 쓴 김광섭 시인의 < 저녁에 >라는 시다. 작사가도 김광섭씨로 올라가있다.

집에서 반대가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음악을 다시 하게 된 건가요?
유의형 : 1980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무렵 아버지께서 형이랑 내 손을 잡고 ‘그래,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씀하셨다. 돌아가시기 전 마침내 허락을 해주신 거다. 그 말을 듣고 우리가 ‘사랑이여’랑 다른 곡들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사랑이여’가 매체를 화려하게 수놓고 있을 때 누군가가 “유심초 쟤들은 배운 애들이라서 음악도 왠지 모르게 지적(知的)”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그는 유심초의 학력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형 유시형은 외대 말레이어과와 국제통상학과를 전공했고 동생 유의형은 한양대 공대를 다녔다. 둘 모두 명문대 출신이다)
유의형 : 나는 원래 의사가 되려고 했었다. 그때 한양대가 의대 건물을 산에 막 짓던 무렵이라 공대도 같이 지원을 했는데 그게 붙었다. 그런데 나는 의대를 가고 싶어서 재수를 하려 했지만 위에 형들이 반대했다. 재수까지 하고 의대 다니면 7년이라고. 결국 형 덕분에 유심초로 잘 되긴 했지만 의대를 못 간 게 ‘약간’ 한으로 남아 있다. (웃음) 사실 내가 텔레비전에 나왔을 때는 고교 동창들이 그랬다. 쟤가 왜 노래를 하는 거야, 뭐가 부족해 가수 짓을 하냐고. 그 시절은 연예인을 딴따라로 비하하고 비아냥대던 시절이었다.

유시형 : 우리는 학교 다니면서 주로 방송 위주로 활동을 했지만 그 당시에 다른 많은 가수들은 생맥줏집이나 음악 감상실 같은 데서 무명으로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았다. 그런데 우리는 대학생 프로그램과 음반사에 연결돼서 앨범이 나오고 운좋게 반응을 얻었던 터라 어떻게 보면 당대 연예계의 ‘쓴맛’은 별로 못 봤던 게 사실이다.

1981년을 장식한 ‘사랑이여’로 모든 영예를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당시 기분을 듣고 싶습니다.
유시형 : 우리가 ‘사랑이여’로 방송국에서 대상 타던 순간, 옆에 매니저들이 수상 무대 올라가서 울라고 그랬다. 그런데 사실 진짜로 울고 싶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우리가 성공하는 걸 못 보고 돌아가셨으니까. 걱정도 많이 하고 그러셨는데. 그래서 정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는 그게 쇼하는 것 같아서 참았다. 그냥 의연하게 수상 소감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쇼맨십도 필요한 거 아니었나 싶고. (웃음)

세월이 조금 지나서 1985년에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반응을 얻었다. 이때도 전처럼 시차가 존재했는데 이때는 왜 공백기가 생겼나요?
유시형 : ‘사랑이여’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터지고 나서 또 ‘나는 홀로 있어도’라는 곡도 조금 떴다. 그런데 방송국에서 우리를 부르면 항상 ‘사랑이여’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만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노래를 부를 틈이 없었다. 새 곡을 내놔도 거기에 미치지를 못하니까. 그때는 순진해서 방송국에서 요구하는 대로만 했다. 다른 곡들은 고개를 못 든 셈이다.

유의형 : 사실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 버금가는 곡을 내놔야겠다는 압박을 많이 받았다. 세월이 조금 흐르다가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만났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내놨던 거다.

그런데 그 뒤로는 왜 갑자기 사라지신 건가요?
유시형 : ‘사랑하는 그대에게’가 나오고 방송가에서 이건 제2의 ‘사랑이여’다 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심리적 압박감이 심했다. 아마추어로서 할 때는 즐기는 맛에 했으니 부담이 없었는데, 프로가 되고 탑 순위에 오르니 스스로 굉장히 부족한 걸 느꼈다. 가수로서, 연예인으로서 이걸 잘 하고 있는 건가. 그런 갈등이 생기면서 1987년인가 활동중단을 선언했다.

유의형 : 그리고 사실 형이나 나나 성격이 연예계랑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 게다가 형제이다 보니 형은 나보다 어깨가 더 무거웠을 거다. 동생까지 끌고 가는 거니깐. 나는 형한테 기대면 되지만, 주위에서 보기에는 형이 동생까지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노래하는 거니 형이 더 부담이 컸을 거다.

그 뒤의 행보와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유시형 : 나는 1990년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3년 동안 거기서 살았고 동생은 한국에서 다른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7080과 통기타 붐이 일었다. 미사리부터 해서 전국적인 붐이었다. 그런 열풍이 일어나니 많은 통기타 가수들이 무대에 나갔다. 동생이 혼자 무대에 나가서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불렀다. ‘홀로 가는 길’로 활동한 가수이기도 한 남화용이 만든 이 노래는 ‘밑에서’ 꽤 알려져서 우리가 없을 때도 김세환, 유익종, 박강성 같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 부르곤 했다. 동생이 이 노래를 부르면서 리퀘스트가 엄청 들어왔다고 한다. 유심초 오리지널 멤버 뭉쳐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2003년에 2년 계약을 맺고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유심초 음악을 정의하신다면..
유시형 : 의미를 한마디로 말하지는 못해도 음악의 특징을 이야기하자면, 일단 멜로디는 서정적이고 가사는 시적이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음악에 그런 게 있지 않나. 빠른 음악은 사람을 흥분시키지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음악도 있다. 우리 노래는 듣는 순간 큰 박수는 안 나와도 끝나고 나갈 때는 어떤 여운을 남겨주는 그런 음악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대중에게 임팩트는 있었지만 활동 기간은 짧았다.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요?
유의형 : 그때는 스스로 방황을 많이 했다. 그래서 차라리 아예 대학을 안 다니고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했으면 죽기 살기로 했을 거다. 그러면 보다 더 많은 곡도 남겼을 거고. 그리고 형이나 나나 우리가 노래를 마음먹고 쓰면 굉장히 많이 썼을 거다. 그런데 뭔가 속으로는 흔들렸다. ‘내가 대중가수를 진짜로 해?’. 그런 정체성 혼란으로 활동을 빨리 접었고 돌이켜 보면 아쉬운 일이다.

유시형 : 2003년에 한국에 들어온 후에는 방송도 많이 나간다. 젊은 시절에는 미래불안으로 동생이 말한 그런 스트레스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대에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지금에서는 그게 너무 행복하다. 어디 공연에 가서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사랑하는 그대에게‘를 부르면 팬들이 앙코르를 외쳐주고. 지금 이 나이에 이런 행복을 어떻게 누리나 싶다.

유심초는 전성기 시절에 텔레비전 출연할 때 항상 양복을 입고 나오셨는데.. 어른들한테 이미지가 좋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유의형 : 이미지 이야기를 하니 말인데 그동안 사생활을 다루는 많은 대담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왔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우리는 출연하는 걸 거절했다. 편집하는 사람이나 제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뭔가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려고 하는 것 같다. 또 반전이 있어야 재미있지 않나. 우리는 그냥 조용히 노래만 남기자는 생각이다.

유시형 : 많은 팬들이 우리에 대해 좋은 이미지, 어떤 신비감이나 꿈같은 걸 가지고 있다. 나는 팬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에 대한 그런 이미지를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늙으면서 이것저것 변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방송에 나가서 일일이 뭐 하다가 망했다는 둥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자기 팬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거라고 생각한다.

부평이 고향이고 음악 활동도 부평에서 시작하셨는데 부평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유시형 : 내가 어릴 적에는 미군 애스컴(ASCOM)이 있었다. 거기 조그만 동산에 올라가 보면 큰 잔디밭에서 미국 사람들이 야구를 하는 것도 보고 그랬다. 또 부평이 미군이 주둔하다 보니 외국 문물이 빨리 들어온다. 그래서 옛날에는 트위스트 김 같은 분들이 와서 춤도 배워갔다는 얘기도 들었다. 여기가 그런 외국 문화가 바깥으로 나가는 큰 창구였던 셈이다. 낭만도 있었고, 평화롭고…

애스컴이 두 분의 음악 활동에 어떠한 영향이 있었다고 보시는지.
유시형 : 그렇다. 왜냐하면 음악다방 같은 데 가면 거기서 흘러나오는 오리지널 앨범들로 팝송도 소개가 됐고. 또 선배들한테서도 여러 음악 정보나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음반들도 접했다. 외국 판 구하기 힘든데 형들 방에 가면 팝 샹송 칸초네 앨범들로 가득했다. 그때 ‘La novia’라는 노래를 막 한글로 적으면서 듣곤 했는데, 지금도 그게 제일 좋아하는 노래다.

유의형 : 미군 부대가 있다 보니 원판 같은 게 나온다. 그 영향에 무엇보다 음악다방에 가서 팝송 듣는 게 좋았다. ‘키 다방’ 그리고 신신 카바레 건물 1층에 있던 ‘신신 다방’은 아주 유명했다.

부평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는데 유심초로 유명해지고도 부평에 사셨나요?
유시형 : ‘사랑이여’로 크게 성공했을 때도 계속 부평에 살면서 활동을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부평에 초등학교 출신들 친목회도 많이 했다.

출신 학교를 알려주신다면.
유시형 : 부평동 초등학교에 다녔고 중학교는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는 동산 고등학교를 나왔다. 동산 중고 출신이다.

유의형 : 나도 똑같다. 그리고 아까 이야기한 백영규를 비롯해 ‘너’를 작곡한 서새건, 작사한 심진구도 다 동산 중학교 고등학교 출신이다.

유심초 노래 베스트와 개인적으로 덜 알려져서 아쉬운 노래를 꼽자면.
유시형 : 일단 베스트는 ‘사랑이여’,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나는 홀로 있어도’, ‘사랑하는 그대에게’, ‘너와의 석별’, 그리고 ‘이것 참 야단났네’. 잘 알려진 곡들이니까 아무래도 그게 베스트가 아닐까. 그리고 덜 알려져서 아쉬운 곡은 ‘그님만을’. (유시형 작사/작곡)

앨범을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첫 음반은 분명 ‘너와의 석별’이라 봐야죠?
유시형 : 그렇다. 그다음에 ‘이것 참 야단났네’가 나왔고, ‘사랑한다 말해주세요’도 있었다. 그리고 1980년에 ‘사랑이여’가 수록된 앨범을 발매했는데 이게 우리가 제대로 된 음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실상의 1집이다.

유의형 : 왜 우리가 앨범다운 앨범으로 ‘사랑이여’를 꼽는 것이냐면 그전에는 제작자가 따로 있었다. 녹음, 편곡이 다 그 사람들에 의해 이뤄졌는데, ‘사랑이여’는 우리가 직접 제작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편곡에 관여하게 되고, 편곡자에게 여러 요구도 하고 그래서 제대로 우리의 음악을 표현할 수 있었다.

유시형 : 정리하자면 ‘너와의 석별’로 데뷔를 했고, ‘이것 참 야단났네’, ‘사랑한다 말해주세요’가 중간에 있고 그다음에 ‘사랑이여’가 제대로 된 앨범으로 사실상의 1집이다. 거기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도 함께 있다. 그리고 ‘나는 홀로 있어도’가 타이틀 곡으로 나온 것이 2집이다. 그다음 3집이 ‘사랑하는 그대에게’고. 모처럼 음반 얘기를 하니까 과거가 살아 돌아오는 느낌이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이홍현
사진 : 임동엽
정리 : 임진모, 이홍현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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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3 곽경묵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홍이삭, 김구라와 아들 그리, 백영규, 박기영, 리듬파워, 이자람 등이 자리해 그들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세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밴드 소울 트레인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인 곽경묵이다.

이름에서부터 소울 음악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이 느껴진다. < 소울 트레인(Soul Train) >은 1971년 첫 방영된 미국의 유명 TV 프로그램의 이름이다. 소울 음악을 필두로 R&B, 디스코, 펑크(Funk), 가스펠, 힙합 등 소위 흑인 음악으로 대변되는 아티스트들의 라이브를 35년간 일반 대중에게 전했던 전설적인 음악 방송이다. 이 쇼 프로는 ‘블랙 뮤직 파티’ 그 자체였다. 밴드 소울 트레인은 이 이름을 그대로 따온 한국의 소울 밴드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이라는 기본 밴드 구성에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으로 이루어진 금관악기 멤버들과 코러스, 보컬리스트까지 가세해 10인조의 대규모 그룹의 편성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가족적인 팀워크가 이들의 특장점이 되었다. 현란한 기교보다는 멤버의 조율과 조화를 중시하며 고전 음악 포맷이 최적의 합을 맞춰왔다. 단순하게 옛 음악을 현재로 가져왔다고만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하모니가 밴드 소울 트레인에 새겨져 있다. 현재 개인 건강상의 이유로 리더 곽경묵과는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쾌유를 빌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밴드에 대해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2008년에 처음 결성된 소울 트레인이다. 우리 밴드는 소울 음악을 하는 팀이다.

한국에서 정통 소울 밴드라고 하니 많은 대중에게는 낯설 것 같다. 밴드 소울 트레인은 어떤 팀인가?
같이 뮤지컬에서 연주하던 몇몇 브라스 멤버들과 뜻이 맞아 대학로의 작은 클럽에서 같이 연주를 해왔다. 처음에는 10인조로 출발한 대규모 밴드였다.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멤버 변화가 다소 있었고, 때때로 객원 멤버와도 함께 연주하고 있다. 현재에는 7인조로 남아 있다. 멤버는 내가 세션 연주를 하던 시절부터 합을 맞춰온 드러머 이정학, 뮤지컬 작품을 하며 만난 키보드 윤희나, 대학로 클럽에서 연주하며 지금까지 계속 함께 해온 노래하는 임윤정, 작년에 새로 들어온 듬직한 베이스 김광훈. 그리고 뮤지컬을 하면서 만나 소울 트레인을 함께 만든 색소폰 조성현, 트롬본 김신. 그리고 기타 치는 나. 이렇게 7명이다.

음악적인 지향점은 처음부터 60~70년대 유행했던, 거칠지만 따뜻한 소울 음악을 연주하는 거였다. 지금도 그렇다. 프로필에는 ‘한국형 소울’을 지향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다. (웃음) 한국 사람이 하면 그냥 한국형이라고 해도 되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구성원도 많다 보니 어려운 점이 많을 것 같다. 어떤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라이브에서나 음원으로도 가족적 팀워크 강한 팀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모임이나 마찬 가지겠지만 두 명 이상이면 힘든 건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웃음) 그래도 나름 리더의 결정에 잘 따라준다. 또 알아서들 형, 누나, 아우들 잘 챙기는 인성 좋은 친구들이라 편하고 늘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점들이 연주 하거나 공연할 때도 그대로 드러난다. 서로 연주도 배려하면서 한다고 할까. 이런 가족적인 분위기, 서로를 배 려하는 분위기가 밴드 소울 트레인에는 늘 있다. 속된 말로 나대는 사람이 없다. 그 장점이 단점일 때도 있다. 누군가 확 앞으로 치고 나가줬으면 할 때도 너무들 참아준다. (웃음)

그 외에 멤버가 많아 힘들 때는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니 돈이 많이 든다. 이동 비용이 가장 힘든 문제다. 다 돈이다. 또, 밥 한 끼를 먹어도 다른 밴드의 두 배는 기본이니까 말이다. (웃음)

결성 이후에 프로젝트 성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김추자 트리뷰트 밴드 ‘춤추자’ 밴드에 관해서도 궁 금하다.
2010년 < 지산 록 페스티벌 > 때 트리뷰트 밴드들이 꾸미는 무대가 있었다. 함께 해보자는 제의를 받고 이런 저런 의견들을 모으다가, 때마침 당시에 앨범 준비하면서 많이 듣고 있던 김추자 선생님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윤정이의 제의로 진행하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던 프로젝트였다. 45분짜리 메들리를 만들어 쉼 없이 연주하고 끝냈다. 관객분들과 지산 록페 측의 반응이 아주 좋았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도 한 번 더 참여하게 됐다. 두 번 모두 열심히 준비했고 좋은 기억이 많았던 공연이다. 특히 호응이 좋아서 더 즐거웠다. 덕분에 1집에도 몇 곡이 수록되었다. 그 콘셉트로 팀의 합도 좋아 공연도 몇 번 했다. 언젠가는 다시 연주하고 싶은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첫 솔로 앨범 < 49…Again >(2017)은 어떤 앨범인가?
50을 앞두고 뭔가 소울 트레인이 아닌 내가 좋아하던 스타일들의 다른 색깔의 음악을 해보고 싶었다. 오랜 인연이 있는 사토 유키에(Sato Yukie) 형의 ‘곱창전골’이라는 밴드가 있다. 일본인 멤버로 구성된 한국 음악을 하는 재미있는 록밴드다. < 49…Again >(2017)은 곱창전골의 베이시스트 아카이 코지로(Akai Kojiro)와 드러머 이토 코키(Ito Koki)라는 두 일본 친구와 함께 만든 앨범이다. 이 멤버와 크고 작은 공연을 많이 해왔었다. 언젠가는 꼭 프로젝트로 함께 연주하고 싶은 아티스트들이었다. 그래서 솔로 앨범이지만 ‘MOOK & JAKO PROJECT’라는 팀 이름으로 발매했다. 여기에서 ‘MOOK’은 일본 친구들이 부르는 내 이름이고, ‘JAKO’는 별 뜻 없이 JAPAN KOREA의 합쳐진 말이다. 이름 배열의 순서는 손님 먼저다.

기타리스트 무크(Mook)는 상상밴드 활동으로 많은 이들이게 알려진 편이다. 지금의 커리어와는 사실 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상상밴드 시절의 연주와 추억 같은 것이 있다면?
상상밴드는 당시 회사에서 관리해주던 밴드여서 편하긴 했다. 사실 내 음악이라기보다는 리더였던 쇼기와 노래하는 베니의 음악이었다. 그래도 나름 팀의 구심점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더 많이 참여하고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이 그때 멤버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음악적으로 안 맞 았다는 이유보다는 그 당시 음악인으로 게을렀다는 생각이다.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과 연주를 열심히 하지 못 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10월 공개 예정이라고 하는 ‘사랑한다면’은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참여했던 ‘사랑한다면’에 대한 편곡이나 녹음을 하면서 중점을 두려고 했던 부분이 있나?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관들이 여러 가지 국가 지원 사업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정보량이 부족해서 많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한 통로로 모아서 오픈해준다면 이런저런 사업들에 쉽게 참여해 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부평구문화재단에서 제안해준 데블스의‘사랑한다면’은 원곡의 느낌을 살리면서 조금 더 대중적으로 만들자는 관점으로 작업했다. 그래서 후주 부분에 뭔가 다른 임팩트를 주고 싶었다. 잘 나온 것 같아 다행이다.

데블스의 故 김명길 선생님과 작업 예정이었지만, 프로젝트 준비 기간 동안 안타깝게 암으로 별세하시게 되었다.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들었는데, 특별한 기억이 있나? 어떤 뮤지션이었나?
20여 년 전에 야간업소에서 일할 때 다른 밴드의 리더로 활동하셨다. 대기실 등에서 거의 6개월 이상을 매일 뵙던 분이다.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라고 하시면서 편하게 해주셨다. 정말 인자하시고 기타도 편하게 연주하시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에게 아드님의 기타 레슨을 부탁하기도 하셨다. 내가 “형님 아드님이 나이가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여쭤봤더니 이제 군대 막 제대했으니 24살이라고, 난 당시 27살이었는데 말이다. (웃음) 그 이후로 < 고고70 >(2008)이라는 영화가 나오고 하면서 이름을 다시 듣게 돼서 반가웠다. 이번 프로젝트에도 함께 하신다기에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뵙지 못하게 되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음악 활동을 하면서 인천-부평과의 인연이나 기억나는 추억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가? (인천-부평에 대한 생각과 감정)
어릴 때 함께 연주했던 선배들이 인천, 부평 분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많이 놀러 가서 술도 마시고 음악 얘기도 많이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인천에는 80년대 말에 헤비메탈 밴드들도 많았다. 지금도 나에게는 인천. 부평하면 ‘록의 도시’라는 생각부터 든다.

코로나19로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뀐 것 같다. 소울 트레인은 공연으로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든 상황이긴 하지만, 솔로나 밴드 활동, 이후 공연 계획이 있나?
대부분의 뮤지션이 그럴 테지만, 사실 활동을 거의 못 하는 상황이다. 밴드의 3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집중이 잘 안 돼서 지지부진하다. 개인적으로 건강 상태도 많이 안 좋아지고. 그래도 조금씩 힘을 내서 올 연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소울 트레인 3집 앨범의 준비를 마칠 계획이다. 공연은 사회적인 분위기나 건강 상태로 조금은 미뤄두고 있다.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 기타 연주를 하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같이 방을 쓰던 6살 차이 나는 친형 덕에 팝이나 록 음악을 많이 듣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기타보다 노래 때문이었다. 밥 딜런(Bob Dylan)이나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로니 반 잔트(Ronnie Van Zant), 킹 크림슨(King Crimson),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 Palmer)의 그렉 레이크(Greg Lake), 킹 크림슨(King Crimson), 록시 뮤직(Roxy Music), 유라이어 힙(Uriah Heep) 활동을 했던 존 웨튼(John Wetton),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의 로버트 플랜트(Robert Plant),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두 거목 로저 워터스(Roger Waters),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와 같은 거장들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기타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노래하면서 기타를 연주하고 싶어져서 기타 연습을 시작했다. 근데 아무리 해도 노래에는 너무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영향을 받은 뮤지션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많아져서 누구라고 딱히 말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고등학교 때 티비에서 생방으로 밤을 새워 보았던 < 라이브 에이드(Live Aid) >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 인생의 앨범과 아티스를 꼽는다면?
너무 많지만, 굳이 뽑자면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의 데뷔작 < Pronounced ‘Lĕh-‘nérd ‘Skin-‘nérd >(1973)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 The Final Cut >(1983)이다. 아티스트는 단연 핑크 플로이드다.

기타리스트 곽경묵은 어떤 연주자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고 싶은가?
따뜻하고 인간적인 느낌의 연주를 하는 음악인이 되고 싶다.

인터뷰 :신현태
사진 :정종민
정리 :신현태
기획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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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2 송창식 인터뷰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두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음악계의 ‘레전드 중 레전드’이자 인천 출신의 대표 뮤지션 송창식이다.

한때 수십 곳이 줄지어 성업하던 미사리의 라이브 카페 가운데 ‘열애’(윤시내)와 함께 남아 있는 두 카페 중의 하나 ‘쏭아’를 찾았다. 송창식의 별칭인 쏭아(Ssonger) 타이틀대로 송창식이  정기적으로 출연하는 곳이다. 그는 지금의 젊음은 가늠하기 힘든, 절대적이고 거한 존재감으로 베이비붐 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전설이다. 근래 듀엣이라는 말이 그렇듯 기타리스트 함춘호와 함께 무대를 서는데 이날은 송창식 혼자 노래했다.  

그의 소리는 카페 공간을 쩌렁쩌렁 울릴 만큼 컸다. 본인은 ‘잘 안 된다’고 나중 말했지만 현장에서 듣기에는 환상적인 발성이자 우람한 소리덩치였다. 게다가 본인 취향이 아닌, 팬들이 좋아하고 신나하는 곡 중심으로 레퍼토리를 구성한 게 더 놀라웠다. ‘관객들을 위한 배려’는 대중가수의 으뜸 덕목이다. 그는 신청곡도 받아 자신의 히트곡도 아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르기도 했다.

2002년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송창식과 자리할 경우 어김없이 인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는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에 잠시 피난한 것을 빼곤 성장기를 줄곧 인천에서 보낸 ‘원단 인천맨’이다. 지금도 인천에 남다를 애정을 간직해 자신의 모든 일이 ‘인천이랑 관련이 있는 일’이라며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한 번쯤’, ‘왜 불러’, ‘상아의 노래’를 부른 뒤 관객의 신청곡도 받으셨어요. ‘푸르른 날’, ‘60대 노부부의 이야기’ 그리고 이후 ‘맨 처음 고백’, ‘우리는’, ‘가나다라’, ‘고래 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을 줄줄이 불러주셨습니다. 혹시 신청곡을 받지 않았다면 대신 어떤 곡을 하셨을까요?
보통은 ‘피리 부는 사나이’와 ‘담배 가게 아가씨’를 많이 불러요. 사실 (공연 레퍼토리들이) 거의 비슷해요. 쏭아 라이브 클럽에서 똑같은 곡을 계속하면 관객들이 재미없으실 거예요. 그래서 신청곡도 받고 빠른 노래와 느린 노래 섞어가면서 하지요.

‘상아의 노래’는 뜻밖이었어요. ‘송창식’하면 싱어송라이터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라 수두룩한 본인 곡을 놔두고 이 곡을 하실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거든요. 물론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지만요.
‘상아의 노래’는 솔직히 잊고 있었던 노래에요. 제가 녹음했는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노랜가 찾아보니 제 노래더라고요. 이후에 제가 제 음반을 다시 사서 이 노래를 배웠어요. (웃음)

‘상아의 노래’는 김희갑 선생님 곡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신청을 많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물론 좋은 곡이니까 그렇겠죠? (웃음)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상아의 노래’가 제가 제일 먼저 취입한 곡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이미자 씨가 먼저 발매한 곡으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저에게 김희갑 씨가 부탁했어요. 그래서 취입을 했지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왜 울어’라는 곡도 함께 녹음했죠. 저는 잊고 있던 것을 많은 분들이 제 기억 속에서 소환해주신 거예요. 김희갑 씨가 굳이 제게 ‘상아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던 것은 아마도 당시에는 제가 그 노래를 부르기 딱 좋은 목소리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지금도 딱 어울리는 목소리라고 보시는지.
목(성대)을 수술한 이후에 지금은 사실 ‘상아의 노래’에 맞는 목소리가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이후로는 테크닉으로만 부르게 되었어요. 다이내믹 그러니까 강약으로만 부르는 노래가 되었지요. 원곡과는 완전 딴판이죠. 근데 3년 전에 다시 목 수술을 다시 했는데 지금은 오리지널도 안 되고 그 전 버전도 아니에요. 수술 이후 아직도 컨트롤이 안 되어서 아쉽습니다. 발성 연습을 꾸준히 해서 다시 찾아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제는 노인네 목소리가 나오겠죠? (웃음)

그런데 공연을 보니 대단한 발성이시던데요..
그래도 내 맘대로 나오는 거는 아니에요. 목 수술을 했지만, 평소의 목소리는 어떤 소리가 나와도 저는 상관이 없어요. 근데 노래할 때 목을 제대로 컨트롤할 수가 없어졌어요. 그동안 쌓였던 노하우가 없어진 거죠.

그렇다면 수술 이후에 특히 안 되는 곡들이 있으신가요?
다 잘 안 돼요. (웃음) 지금은 요령으로 하는 거예요. 오랫동안 노래를 했으니까 관록으로 한다고 할까요. 예전 말로 음악성으로만 하는 거죠. 소리도 마음처럼 나오지 않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제어도 안 되고요. 원래 내 목소리의 힘은 우렁참에 있는데 지금은 노래를 내 마음대로 못하는 ‘나쁜’ 상황이에요.

근래 무대에선 거의 대부분 기타리스트 함춘호 씨와 짝을 이뤄 ‘듀엣’이라는 언론의 평가도 나오는데요. 노래에 관해 함춘호 씨가 도움이 되지는 않나요?
함춘호와는 나이가 10년 이상 차이가 나는 만큼 음악적 갭이 존재해요. 하지만 그와 함께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음악성 추구라기보단 듣는 사람을 위해서인 거죠. 혼자서 하면 노래가 학구적으로 되어요. 음악성 위주로 하게 되죠. 함춘호와 해야 풍성해지고 듣는 사람이 신나게 되니까 그게 좋아요. 혼자 빠져서 하는 것보다는 팬들이 듣기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죠.

함춘호 기타를 평가하신다면?
통기타에서는 최강이죠. 하지만 함춘호가 최강인 시절에 저는 음악 활동을 안 했어요. 그래서 함께 활동한 역사도 없죠. 다행스러운 건 그 친구가 내 음악으로 시작을 했다는 거예요. 때문에 제 음악을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워낙에 실력이 좋은 데다 제 노래는 다 아니까 아주 편해요. 하지만 함춘호와 같이 함께 공연하다 보면 노래 측면에서는 ‘희생’을 해야 해요. 노래가 내 의도대로 나가야 하는데, 다른 소리가 나오니 제 의도와는 사실 달라지는 경우가 있죠. 연주자 (함춘호) 입장에서 앞에 나와 보이길 원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이런 욕심이 함춘호도 만만치 않아요.

최근 < 악인전 >, < 뽕숭아 학당 > 같은 TV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놀라웠습니다.
< 악인전 >이라는 프로그램은 김명정이라는 작가와 인연으로 출연했는데 예전에 <집사부일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1회를 나에게 해달라고 했는데 안 했다가 이번의 요청에는 ‘그래 해보자’ 이렇게 된 거예요. ‘내가 되겠느냐?’ 물어보니 무조건 된다고 하더라고요. 내식대로 해보겠다고 하고 시작했죠. 시작하니까 막상 아이디어를 낸 작가는 빠졌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었죠. < 뽕숭아학당 >은 조영남 씨를 위해 한 것으로 제가 함께하면 나아질 것 같아서 응했던 경우에요.  

부평구문화재단에서 부평·인천 출신 음악가들에 대해서 부각하며 로컬리티를 살리는 프로젝트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2002년 저와의 첫 인터뷰에서도 인천 이야기를 참 많이 해주셨는데요. 인천을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인천은 제가 태어난 곳이에요. 인천에서 태어나서 인천에서 쭉 자랐죠. ‘6.25 피난’ 이후에 다시 돌아왔어요. 자라는 시기는 쭉 인천에서 지냈으니까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고생의 기억은 다 인천에 있어요. 쉽게 이야기해 저의 고향이에요. 초등학교, 중학교 친구들이 아직 다 인천에 있지요.

기록에 의하면 어릴 적부터 음악성이 뛰어나서 친구들이 ‘모차르트’라고 했다면서요.
초등학교 때부터 악보를 그릴 수가 있었어요. 귀로 듣고 악보를 그리는 능력뿐만 아니라 머릿속에 생각난 멜로디를 악보를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초등학교 때 당시에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일단 제 주변에는 없었어요. 그러는 모습을 보고 어른들이 저더러 모차르트라고 했어요. 모차르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이 하도 그러니까 나도 내가 대단한 줄 알았다니까요. (웃음)

음악을 향한 결심이나 열정의 기반이 인천이었겠네요.
그럼요. 초등학교 때부터예요. 가장 중요한 계기는 6학년 때, 인천여상의 ‘심포니 오케스트라’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구경을 간 거였어요. 엄청난 쇼크를 받았어요. 사실 음악보단 지휘자라는 게 쇼킹했어요. 그래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꿈이 됐죠. 하지만 당시 제가 입학한 서울예고에는 지휘과가 없었고, 지휘를 하기 위해서는 피아노 작곡을 했었어야 해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성악과에 입학을 한 거예요. 하지만 아니었죠.

인천에서 경기도 콩쿠르를 학교 대표로 간 적이 있었어요. 1등 없는 2등이라는 것을 했어요. 1등이면 1등이지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되었죠. (웃음) 제일 잘했는데 1등 될 실력이 안 되었나 보죠? (웃음) 그래도 나는 ‘노래는 제일 잘한다!’는 자부심은 있었어요.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줄로만 알고 성악과를 갔는데, 내 노래는 노래가 아니었던 거죠. (웃음) 그때 처음 알았죠. 음악이라는 것이 공부를 해야 하는 지성적 행위구나.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성악도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던 시절이에요. 그런 점들에 충격이 커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2002년 인터뷰에서 그때까지 도니체티 오페라 < 사랑의 묘약 >에서 ‘남몰래 흐르는 눈물’ 같은 클래식 말고는 아는 곡이 없고 대중가요에 대한 접점이 없었다고 하셨죠.
‘쎄시봉’ 가기 전까지도 대중가요를 몰랐어요. 서유석 씨를 고등학교 캠핑 때 처음 만났는데요. 기타 치면서 팝송을 부르는데 에디 아널드(Eddy Arnold)의 ‘I really don’t want to know’라는 곡이었어요. 곡 중간에 ‘하우 매니(How many~)’가 반복이 돼요. 그래서 저희가 그 형(서유석)을 ‘하우매니형’이라고 불렀어요. (웃음) 그 한 곡을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부를 정도는 안 되었죠, 저는 이후에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Una furtiva lagrima)’이라는 오페라 곡 위주로 불렀어요. 쎄시봉에서도 이 곡을 불렀으니까요. 대신 트윈폴리오가 팝송을 해야 해서 노력을 많이 했어요. 맛을 내기 위해서 말이죠.

트윈폴리오 이후에도 솔로로 화려한 커리어를 개척했는데, 내 소리에 대해서 멋지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사람들이 내 목소리에 매료가 된다는 것을 느끼긴 했지만 좋은 소리라고는 생각은 안 했어요. 왜냐면 록 음악을 못 했기 때문이에요. 사실 내가 록을 하려다가 목을 상했어요. 70년대에 많이 상했죠. ‘왜 불러’는 록을 하기 직전에 불렀던 노래에요. 진짜 록을 하고 싶었는데, 하도 소리를 질러대서 목이 많이 상했어요. 그래도 제 목소리가 굉장하다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50년 이상 노래를 하셨는데 만약 인생의 분기점 셋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처음에 쎄시봉에 가서 노래할 때 팝송을 했는데 조영남 씨 노래를 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서울대 성악과 학생이 부르는데, 음악적인 가치가 대중음악에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이왕 할 거라면 최고로 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심이 결정적인 첫 분기점이죠.

트윈폴리오가 분기점이 아닌가요.
윤형주와의 트윈폴리오는 ‘연습’ 기간이에요. 당시에는 내 목소리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죠. 그런 면에서 트윈폴리오에 대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분기점은 군대 가서예요. 1973년도에 영장이 나왔어요.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 유명 가수라고 해서 갔어야 했어요. 박정희 정부 시절엔 그랬어요. 안가면 매국노가 되는 시절이었죠. 군대에 가서 처음으로 그동안 했던 걸 돌아봤어요. 하루는 < AFKN 아마추어 블루스 콘테스트 >를 봤는데 아무리 봐도 나보다 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내 위치가 어디인가.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었어요. 내가 20년 동안 음악을 했는데 미국 아마추어보다 못한다는 거였죠. 아주 창피하고 속상했어요.

음악적으로 무엇이 못하는 점이었나요?
모든 면에서 내가 못 한다고 느꼈어요. 한국에서 나는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이후에는 또 < 전주 대사습놀이 >’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봤어요. 여학생들 둘이 나왔죠. 하나는 가야금, 하나는 노래를 했는데 그날도 저 친구들도 저보다 잘하는 거예요. (웃음) 모두가 나보다 잘한다는 생각에 무너졌어요. 밤새 울어서 눈이 부어서 다녔죠. 너무 분했죠. 내가 바보인가? 음악을 수십 년 했는데.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고 남의 것을 흉내만 냈으니까 잘할 리가 있겠느냐. 내 음악을 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간 공부했던 이론과 실기를 다 버렸어요. 진짜 분기점이죠. 그때 시작한 것이 지금의 노래에요.

음악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셨겠네요.
이후 깔봤던 음악들을 재평가했어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보니 내가 그걸 못했기 때문이에요 (웃음) 그때부터 유행가를 알게 되었어요. 진짜 대중음악을요. 7개월간 군 생활을 하고, 나오자마자 하던 곡들은 다 버리고 ‘한 번쯤’같은 곡을 처음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더 많은 팬이 송창식의 음악에 빠졌죠.
그래도 이전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군대 이후의 활동을 싫어했어요. 충실하게 노래하는 것을 왜 버렸냐고 실망하던 팬들도 많았어요. 특히 여성 팬들이 많이 떠났죠.

세 번째 분기점은요?
다음은 ‘가나다라’에요. 1979, 1980년도였는데요. 그때 음악이라는 것이 이론적이든 실기로든 저 스스로 적립이 되었어요. 공부해왔던 음악 이론이 다 정리되었어요.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한국말에서 나오는 음악’을 처음으로 냈죠. 이 작법에 대해서 논문을 썼으면 아마 박사가 됐을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음악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작전을 짰어요. 한 번에 이런 이론들을 다 넣으면 너무 획기적이라, 제가 정리한 창작법을 한 곡에 10%, 20%씩 적용했다고 할까요.

그 시작이 ‘토함산’ 아니었나요?
사실 시작으로 따지면 ‘피리 부는 사나이’예요. 1974년도에요. 아주 조금씩 넣었죠. 실제로 제대로 해볼까 마음먹은 것은 ‘가나다라’였어요. 당시 많이들 놀랐죠.

1985년 크게 히트한 ‘담배 가게 아가씨’, ‘참새의 하루’도 많이 놀랐는데..
그 곡들 경우는 ‘내가 할 음악은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에 집착해 있다가 ‘과거에 했던 음악도 내 것이다’라고 해서 모든 것이 합쳐진 것에요. 부정해왔던 음악도 내 것이라 생각하니까 좋았어요. 그 곡들은 제가 공부했던 것들 이론들 모든 것을 합치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음악이 칼로 무 자르듯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번쯤’, ‘가나다라’가 음악 인생에서 전기(轉機)가 된 곡인데 ‘피리 부는 사나이’도 중요한 곡이라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도 있죠. 실제로는 ‘뽕끼’가 많은 곡이에요. 트로트라는 것이 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까 늘 궁금했어요. 특히 음악적 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트로트를 쉽게 받아들이는 특유의 한국적 감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우리말이라는 건 복잡한 지성으로 표현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라는 감성을 말이라는 지성으로 표현하는 거잖아요? 기본적인 리듬에 복잡한 감성을 표현할 수 있으니 트로트 감성이 잘 먹힌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송창식 트로트는 달랐어요.
달랐죠. 같은 뽕짝이라고 해도, 제가 예고에서 배운 것은 ‘음악이 잘게, 잘게 분석될 수 있다!’라는 것이에요. 감성만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고 지성도 충족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반쪽짜리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구사했던 트로트는 기본 리듬도 달랐어요. 당시에는 모두가 ‘뽕짝~ 뽕짝!’이었는데, 난 ‘뽕짝~ 뽕짝~ 뽕짜작! 뽕짝~’!!!

음악이 송창식에게 무엇인가요?
타고 다니는 것이에요. 인생이 한길이라고 생각하면 난 음악을 타고 가는 거죠. 이게 고장이 나면 안 되거든요.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음악 속에서 같이 있는 것이죠. 타고 가는 것에 목표 지점이 있으니까요. 목표를 가지고 가는 것이죠.

왜 송창식 음악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요.
배짱이 맞는 거죠. 체질이 같은 거니까요. 체질이 같지 않으면 절대로 히트가 안 돼요. 아무리 어렵고 좋게 만들어도 체질로 표현이 안 되면 히트하기 힘들어요. 초창기에 아름다웠던 목소리로 불렀던 것은 지성만 맞았다고 생각해요. 음악은 체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석을 하고 그것을 완성해야지요.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면 부르는 상황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작전 속에서 있어요. 부르는 동안에는 내가 아닌 존재로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내 노래가 절대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쉽게 듣는 이유는 체질적으로 맞는 거예요.

고향 인천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은요.
사실 인천이랑 다 관련이 있는 일이에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직접적으로 ‘인천’ 이렇게 규정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거기에서 시작이 되었잖아요. 평생을 했고, 지금까지도 하고 있으니까요. 나중에는 어떤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활동 자체에 여유가 있다면 인천으로 이사를 하고 싶어요. (거기로 갈) 여건이 사실 안 되었어요. 여러 가지로요. 경제적인 문제도 그렇고요.

싫어하는 말이 있으신가요.
예전엔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비난 댓글 같은 것에도 관심 없고요. 비난 댓글 쓰는 사람은 비난 댓글이 취미 생활이니까요.

인터뷰 : 임진모, 신현태, 임동엽, 권민지
정리 : 임진모
사진 : 임동엽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추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