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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7 전석환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일곱 번째 주인공은 1960-70년대 ‘다함께 노래 부르기’의 주역 전석환이다.

건전가요 보급운동, 싱어롱-Y, 레크리에이션, 캠프 송, 뮤직 테라피(Music Therapy) 등의 용어가 모두 그로부터 비롯되었다. 1960-70년대 ‘통기타의 전령’, 그와 함께 확산된 ‘포크송의 개척자’도 바로 그였다.

TV는 물론 라디오조차 대중적 보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삼천여 곡에 달하는 레퍼토리를 보유한 전석환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통기타 하나 들쳐메고 학교와 일터를 비롯한 일상 곳곳을 돌아다녔고, 대한민국 전체가 아름다운 멜로디로 물들기 시작했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인 싱어롱(Sing Along)부터 ‘노래에 따라 생활이 움직인다’라는 개념의 뮤직 테라피까지, 음악의 순수한 힘을 강조했던 그가 범대중적 열풍의 중심에 섰던 것은 단순 우연이 아니었다.

최근 어린 시절 적을 두었던 인천으로 돌아와 음악 교육을 이어가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흔의 춘추에도 그 의지와 열정은 여전히 뜨거웠다. 부정이 아닌 긍정, 겸손을 넘어선 겸공을 저지할 방법은 없었다. 지치지 않는 화술로 꽉 채운 3시간의 인터뷰, 한 세기에 가까운 한국 음악의 근현대사 그리고 전석환의 일대기를 체감해 보라.

연배가 무색할 정도로 발음이 정확하신데요, 첫 방송은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기억하시지요.
방송 출연을 많이 한 관계로 아직도 몸이 그 시절을 기억하는 듯해서 그런 것 같다. 방송은 가장 먼저 했던 게 1964년 라디오 프로 < 삼천만의 합창 >이었고, TV에선 1965년 < 노래의 메아리 >가 처음이었다.

고향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건너오게 된 계기는요.
황해도 벽성군 소재의 섬 용매도가 고향인데, 고립된 지역임에도 교회가 들어와 있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네도 잘 살았던 편이라 중학교부터는 섬을 떠나 서울에 있는 한성중학교로 갔다. 일종의 유학이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해 참전하게 됐고, 휴전이 조금씩 언급되던 1952년에 집안 소유의 배를 타고 가족 모두 인천으로 떠나오게 됐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위한 시험도 치렀는데 배다리에서 우연히 재회한 국민학교 선배가 전쟁은 곧 끝나니까 공부를 택하라고 권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선택지였지만 그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인천의 첫인상은 어땠는지요.
서울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도시 수준은 인천이 상대적으로 좋지 못했다. 특히 항구 노동자들이 많아서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어릴 적에 인천의 주파수와 잘 맞지 않았는데 그걸 달래 준 곳이 교회였다.

유독 교회와 연이 깊어 보이는데요.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 자유 국가를 논하기 전에 종교 국가가 됐다, 독립운동 때만 봐도 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고 그들이 많은 사람을 이끌었다. 내가 살던 용매도는 북방 선교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종교 생활’이 아닌 ‘생활 종교’를 추구했다. 내 음악인생에서 중요한 ‘생활 음악’, 즉 뮤직 테라피도 결국 다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함께 노래 부르기’ 이른바 싱어롱(Sing Along)은 우리의 유행가 풍토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어느 나라이든 민요야말로 가장 깊은 역사를 품고 있다. 아메리칸 포크 뮤직의 진수인 벌 아이브스(Burl Ives)는 물론 그를 본떠 나온 밥 딜런까지 전부 대대로 내려온 전승 가요였다. 목청이 좋아야 하거나 폼을 잡아야 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노말(normal) 사운드다. 민요라 하면 보통 한 옥타브 안에서 5음만을 가지고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아 따라 부르기 쉬웠다. 독창, 중창, 합창을 넘어 제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음악 대학이 들어서면서 테너, 소프라노라는 개념이 생겼고, 전문적인 7음 음계가 교과서에 실리기 시작하며 함께 노래하기 어려워졌다. 이를 타파하고자 싱어롱을 들여온 것이다.

미국의 싱어롱을 보급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떤 환경의 산물이었나요.
역시 교회의 영향이다.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1기생으로 입학해 작곡 공부를 할 때 박태준 박사님께서 가르쳐 주신 서양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독창, 중창, 합창이 전부 가능하면 그야말로 좋은 거지만 그건 욕심이었다. 그러던 중 ‘I, My, Me’ 그리고 ‘We, Our, Us’의 개념이 머리를 스쳐 가면서 성가와 찬송가가 대응됐다. 내가 추구하는 건 비교적 대중적인 찬송가에 가까웠다.

전석환의 동의어나 다름없는 ‘싱어롱-Y’의 Y는 무엇을 상징하는지요.
YMCA의 Y, 당신(You)의 Y, 그리고 젊음(Youth)의 Y였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가요를 꿈꾸게 된 결정적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부끄러운 얘기이긴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아버지께서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편인데 노래만 불렀다 하면 꼭 얼굴을 찡그리셨다. 눈을 감고 흐느끼고 어떨 땐 핏대를 올리기도 하셨다. 어릴 때부터 그게 너무 싫었는데 그렇게 흘러가던 노래, 당시의 유행가가 바로 일본의 엔카였다.

훗날 NHK가 연출의 연(演)자로 바꾸긴 했지만 엔카(연가)는 원래 연애의 연(戀)자를 썼던 사랑 노래였다. 술집에서 주로 불렀던 노래이기도 한데 사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나온 노래라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한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집단의식이 강한 조선인을 와해하기 위해 일제가 심어둔 일종의 염세 사상이라 본다.

그리고 예전에 재일교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는데 어떤 분이 “왜 십 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나냐?”고 물어보면서 가사를 ‘십 리만 걸어도 행복해요’로 하면 안 되느냐고 했다. 뭐만 하면 너무 울고 짜는 느낌이라 창피하다는 얘기였다. 그 소리를 듣고 완전 쇼크에 빠졌다.

음악적으로 밝음, 명랑함을 추구할 수 있으려면, 실제적 경험도 작용했을 것 같은데요.
미8군에서의 무대 경험이 큰 자산으로 남았다. 1958년도부터 조선호텔 미 장교 클럽에서 전자 오르간 연주를 맡았는데 영어로 대화도 잘 되고 하다 보니 그들의 입맛에 맞춰 연주할 기회가 잦았다. 뮤지컬은 웬만하면 다 통했는데 대체로 시끄럽거나 느린 음악을 싫어했다. 어릴 적에 배워 익숙했던 ‘Old folks at home-Swanee river(스와니 강물)’나 ‘Old Black Joe(올드 블랙 조)’ 같은 노래가 그들의 슬픈 감정을 담은 걸 보고 학교 교과서의 정확성, 미래 지향성이 없다는 걸 깨달았고, 우리와 음악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느꼈다.

그런 중에도 무난하고 경쾌한 리듬의 노래 그러니까 ‘노말’한 곡들 예를 들면 벌 아이브스의 ‘Home on the range(언덕 위의 집)’ 같은 곡은 항상 반응이 좋았다. 소위 말해 노래로부터 플레져(Pleasure)를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노래로 이 즐거움을 얻고자 해야지 신경 쓰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확실히 그때부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1970년대 당시 음악적 존재감이 컸던 선생님께서 긍정을 강조하셨기 때문인지 예를 들어 ‘아침이슬’처럼 금지곡에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존재하는데요.
실상 당대 금지곡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방송에서 건전가요만 부르고 바른말을 하는 이미지로 나오다 보니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면서 이런저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아침 이슬’ 가사 속 ‘묘지’를 ‘대지’로 교체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금지곡 처분을 받고 나서 꺼낸 얘기다. 실제로 김민기와 만났을 때 내가 가사를 바꿔 불러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했었다.

찢어지게 가난했고 힘든 삶을 살았으니 사고 방식이 나처럼 낙관적일 수만은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 세대에서는 우리 시대의 과오를 그대로 답습하지 말고 융합과 화합의 덕목을 길렀으면 한다.

스스로가 인정하는 전석환의 가장 큰 공헌은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공이라고 할 건 없다. 다만 음악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음악계가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그 옛날부터 국제화, 글로벌을 꿈꿨던 게 바로 나다. 과거 경제적 빈곤기에 기본적인 의식주도 해결이 안 되던 나라였으니 노래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를 우습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최근 K팝이 글로벌 무대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싱어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갈등이 오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국경, 언어, 문화와 상관없이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공통 분모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순수 음악적 요소만 아니라 소위 말하는 율동이나 동작, 퍼포먼스가 그 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나왔을 적에 전 세계가 흔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건전가요 보급에도 앞장섰지만 통기타 붐의 시작을 알린 선구자이시기도 합니다.
2015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 대한민국 통기타음악 50년사 & 방송DJ 50년사 특별전 >에 초대된 적이 있다. 함께 자리했던 ‘통기타 군단의 교장선생님’ 이백천에게 “내가 왜 통기타의 선구자냐”고 했더니 나 때문에 우리나라에 대학 가요제가 생겨났다고 하더라. 당시에 세고비아 기타 재고가 없어서 못 팔 만큼 통기타 인기가 상당했던 건 사실이다.

전국의 학교, 음악감상실, 심지어 한강의 모래사장을 찾아 사람들에게 합창 지도에 나섰던 시절, 한해 15만 명이 참여하는 센세이션이 야기되었다는 엄청난 인파를 몰고 다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뭐였나요.
부산 해운대에서 약 30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몰린 적이 있는데 해수욕장 전체가 그야말로 인파로 덮였다. 처음엔 해수욕을 즐기던 사람들만 모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아지니까 깔려 있던 파라솔과 텐트를 치워야 하는 사태까지 갔다. 여러모로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음악적 보상으로 ‘노을’이란 곡을 작곡했다.

창작 가요도 많이 썼지만 해외 각국의 수많은 민요를 번안해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전석환 번안가요 베스트는요.
아무래도 ‘그리운 고향’이 아닐까. ‘Sloop John B’를 번안한 곡으로, 오래도록 바다에 나와 있는 뱃사람이 고향의 사계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을 담았다.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하는 ‘석별의 정’도 널리 알려졌고… 창작곡으로는 ‘정든 그 노래’와 ‘앵카-송(Anchor song)’, ‘좋아졌네’를 고를 수 있겠다.

지금 시대에 다시 울려 퍼졌으면 하는 노래는 없는지요.
아버지께 배웠던 노래 ‘부모은공’을 추천한다. 길지 않고 무엇보다 가사가 간단해서 나이 든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곡이다. 율동과 함께 배우기 딱 좋다.

인천시민들에게 기쁘게도 작년 5월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지금은 인천과 잘 맞는지 궁금합니다.
작년 5월에 자리를 잡으면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각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아직도 조금 거친 면이 남아있더라. 작년에 송년회만 12군데 참석했는데 쭉 돌고 나니까 비로소 인천의 주파수가 잡히기 시작했다.

다시 터를 잡은 인천에서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예술적 음악적 기록이 많이 남기지 못했다. 올해 안으로 인천의 저명인사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같이 노래를 만들고 녹음도 진행할 계획이다. 이젠 창작 의욕만 있으면 얼마든지 팀을 이뤄 무언가를 만들 수 있으니 그 창의력과 의지를 발휘해 다양한 방면으로 소개하려 한다.

진행 : 임진모, 염동교, 정다열, 신하영
정리 : 정다열, 임진모
사진 :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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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36 신연아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서른여섯 번째 주인공은 4인조 알앤비 그룹 빅마마의 리더이자 호원대학교 교수로 활동 중인 신연아다.

명품 보컬 그룹의 귀환, 2021년 빅마마의 재결합 소식은 유난히 반가웠다. 급작스러운 해체 이후 9년 만에 용기 내 얼굴을 마주한 이들에게 그 시절을 함께 했던 팬은 물론 빅마마를 전혀 모르는 신세대까지 뜨거운 관심으로 화답했다. 외모 지상주의를 향한 도전으로 출중한 가창 실력을 앞세웠던 2000년대 초중반의 당찬 하모니가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로 빅마마 데뷔 20주년을 맞았지만 멤버들은 오히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팀의 리더 신연아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강의실. 오랜 기간 호원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그에게 교정은 무대만큼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인터뷰 역시 평소 학생들이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진행했다. 잔잔히 깔리는 제자들의 피아노 연주를 따라 담화를 이어간 신연아 교수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만이 번졌다.

2003년 빅마마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소감이 어떤지.
건너뛴 시간이 길어서 살짝 양심에 찔리지만 (웃음) 데뷔한 지 20년 됐다는 걸 누군가 기억해 주고 기다려 준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냥 20년이구나. 사람으로 치면 성인이 되는 시기인 만큼 빅마마란 팀도 어느 정도 무르익었는지 돌아보게 되는 지점인 듯하다.

2021년 재결합을 알린 후 딩고 킬링보이스, odg, it’s live 등 유튜브 콘텐츠를 중심으로 모습을 비췄다. 일련의 과정이 계획된 움직임이었나.
재결합 자체가 그해 4월에 갑자기 진행된 얘기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압력 센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더 힘들어지기 전에 후다닥 하게 됐다. 그래서 5월에 만나 음원 하나를 거의 바로 녹음해 발매했고 첫 스케줄로 딩고 라이브가 잡혔다. 20분 넘는 시간을 원테이크로 부르는 데 정말 사람 잡는 일이더라. 9년 만에 만나서 맞추려니 걱정도 되고 떨리기도 했는데 조용한 환경 조성을 위해 에어컨도 끄고 녹화해서 리허설 한 번에 땀이 확 났다. 그래도 다들 한가락 하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간만에 모였는데도 몸이 기억해서 나오더라.

천만 조회수를 기록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대중들이 많이 기다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도 우리를 그렇게 계속 찾아주고 좋아해 준다는 거는 진짜 선물 같은 일이라고 본다. 그런 중에 또 희한한 건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팬층으로 유입됐다는 것이다. 20대 친구들이 언니라고 부르면 참 기분이 묘하다. (웃음)

작년에 빅마마 전국투어 < ReBorn >을 성공리에 마쳤다. 2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도 예정된 대규모 공연 계획이 있는지.
물론이다. 사실 데뷔 앨범이 나왔던 2월도 고려했었지만 공연 대목인 연말에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의견이 나와서 아마 올해 말 정도에 음원 하나 발표하며 찾아 뵙지 않을까 싶다.

정식 데뷔는 2003년이지만 1990년대부터 3인조 코러스 팀 ‘빈칸 채우기’로 활약하며 당대 발매된 수많은 앨범에 이름을 남겼다. 코러스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시작은 인하대학교 창작가요 동아리 ‘꼬망스’다. 데뷔곡 ‘Break away’를 써준 (이)현정 언니는 동아리 2년 선배고, 함께 했던 (김)효수는 2년 후배다. 어느 날 현정 언니가 소찬휘 선배 앨범에 곡을 수록하게 되면서 셋이 같이 코러스를 해보자고 제안해서 한 곡 녹음을 해봤는데 반응이 좋았다. 그때부터 프로듀서분께서 앨범 전체를 맡겨 주셨고 나아가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대부분의 작품에 코러스로 참여했다. 입소문이 나다 보니 그렇게 한 6~7년 정도를 하게 됐다. 셋 모두 톤이 다름에도 배음 효과를 통해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다는 걸 이때 느꼈다.

‘꼬망스’는 인하대학교에서 하나의 단과로 치부될 만큼 유명 뮤지션들이 거쳐 간 모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동아리 에피소드가 있다면.
그 시절 가요제에 많이 출전했는데 성과가 나름 괜찮았다. 1995년 MBC 강변가요제 은상을 수상했을 때도 같이 나갔던 친구와 그 곡을 써주신 선배 모두 동아리 멤버였다. 한 기수에 10명도 채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걸출한 음악인들이 많이 탄생한 걸 보면 다들 열정이 대단했었다.

인천의 음악이 유독 강점을 보였던 이유는 무엇이라 보는가.
항구 도시 특성상 문물을 빠르게 흡수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전에 기본적으로 바다 주변 사람들은 파도처럼 감정의 출렁임이 큰 것 같다. 일반인으로 살기는 불편할지라도 음악처럼 감성적인 예술을 하기엔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이 음악의 깊이를 더해주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믿고 있다.

지금의 신연아를 만든 가수 혹은 음악이 있다면.
블루스에 빠져 지내던 대학 시절엔 허스키한 중저음의 프랑스 여성 보컬 파트리샤 카스를 즐겨 들었다. 그러다 졸업할 때쯤 인천대 출신인 낯선 사람들의 데뷔를 마주하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동아리 멤버들과 둘러앉아 앨범을 듣고 이렇게 훌륭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상당한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 정도로 낯선 사람들 1집은 내게 최고의 명반으로 남아있다. 베이비페이스 같은 알앤비에 관심을 두다가도 프랑스에서 재즈와 월드 뮤직에 끌리고, 맨하탄 트랜스퍼부터 스테이시 켄트까지 변했던 것처럼 그때그때 꽂힌 장르와 아티스트에 귀가 가는 편이다.

프랑스 유학은 어떻게 결정하게 된 건가.
코러스 활동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스스로가 노래 자판기 같다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한 작곡가분의 추천으로 유학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데 마침 나와 똑같은 불문과였던 친언니가 프랑스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어서 나도 겸사겸사 따라가게 됐다. 잠시 코러스 생활을 접고 도망치듯 떠나갔던 상황이라 마땅한 계획은 없었다.

타지에서의 유학 생활은 할 만했는지.
대학생 때 노래만 하느라 불어 실력이 초보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보니 현지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음악을 접을 생각까지 하며 방황기를 겪다가 우연히 한국에서 가져온 테이프 하나를 탁 틀었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음악을 안 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자만이었다는 걸 느끼고 그때부터 학교를 알아보고 C.I.M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학교에선 음악 용어를 쓰다 보니 어학원에서 배운 단어는 무용지물 수준이었다. 제일 어려운 수업이 화성학이었는데 학기 전에 불어 화성학책을 살짝 봐둔 게 그나마 도움이 됐다. 그렇게 눈치껏 하루하루 배워가긴 했지만 주변 친구들과 깊숙한 대화를 나누긴 힘들었다. 물론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사귀게 되었던 친구가 지금의 남편이 됐다.

당시의 추억들이 한국에 돌아온 이후 음악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어학원과 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시선이 본인에게 맞춰져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분석이 전부 끝난 상태였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나도 그때부터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온전히 나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행에 크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각자의 개성을 인정하며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훗날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큰 양분이 되어 돌아왔다. 입시만 봐도 우리는 어떤 선을 넘기 위한 단점 보완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그 시간에 나만의 장점을 발굴해 더욱 발전시키는 게 훨씬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학생들이 스스로가 가장 빛날 수 있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게 교육자의 임무라 생각하고, 그런 면에서 항상 옆 친구 노래 따라 부르지 말라고 강조한다.

2009년부터 호원대학교 실용음악학부에서 보컬 전공 교수를, 그리고 K-POP학부에서 학과장을 맡고 있다. 교수직은 어떻게 맡게 되었는지.
교수를 하기 전만 해도 가수 활동에 대한 의욕이 남아있던 때라 교수직을 거절했었다. 그런데도 정원영 교수님은 학교에 있으면 음악을 더 잘하고 많이 하게 될 거라며 불굴의 의지로 계속 설득하셨다. 그냥 믿어 보자 하고 시작했는데 정말 다른 즐거움, 다른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가수와 교수 활동의 연차가 거의 비슷하다. 단상과 무대에 오를 때 차이가 있다면.
가수로 활동할 때는 온전히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 시선이 나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학교에 있으면서 나보다 남을 더 많이 바라보니까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타인의 인생에, 특히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는 성장기에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거니까 모든 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스스로를 더 솔직하게 바라보게 됐다. 막말로 애들한테 하는 만큼 내가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전엔 무대에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됐고 음악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 가르치면서 노래한다는 것 자체가 나를 겸손함으로 이끌었다.

강의할 때 중점을 두는 교육 방침이 있다면.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노래도 결국 몸으로 하는 거라 마음에 따라 소리 내는 게 달라진다.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내 환부를 다 보여줘야 치료가 가능한 것처럼, 개선에 도달하기 위해선 나와의 시간이 즐거워져야 한다. 그래서 친구들이 나부터 편하게 느끼고 다가올 수 있게끔 내 고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고, 그들의 걱정 또한 최대한 이해하고 들어주려 한다. 과거의 내가 배울 곳이 많지 않아서 느꼈던 답답함을 제자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진 않다.

기억에 남는, 눈길이 가던 친구가 있다면 간단히 소개 부탁한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친구들이 참 많다. 정채원이란 친구는 대학원이나 유학을 통해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여력이 충분하지 않아 배움을 포기했는데, 그렇다고 불만도 없더라. 그 모습을 보고 이 친구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막연한 기대로 주변 친구들과 함께 앨범을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고 올해 초에 EP < Attention >을 발매했다. 최근 연락을 해보니 본인이 나왔던 예고에 선생님으로 가게 됐다면서 그 월급으로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겠다고 말하는데 내가 다 뿌듯하고 행복했다.

K-POP학과장 신연아는 해외에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글로벌 K팝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매우 긍정적인 입장이다. 프랑스에 머물렀던 2000년과 비교해 보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크게 일조한 게 바로 K팝이다. 2016년에 학교에서 해외 6개국을 돌며 K팝을 알려주는 K팝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외국인 친구들이 들고 오는 음악이 단순히 아이돌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같은 그룹을 시작으로 아이유부터 이적, 박효신, 성시경까지 다양하게 소비하면서 그것 때문에 한국어를 배우고 있더라.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적 파장이다.

물론 우리 스스로 아이돌 음악을 경시하던 시기도 있었다. 춤만 잘 추고 노래는 못 한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춤이라도 잘 추는 게 어딘가라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서서 노래해도 상당한 근력을 요구하는데 춤까지 추려면 체육인만큼 체력 단련이 되어 있어야 한다. 결과를 내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는 영역까지 도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박수받아 마땅하다.

음악을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지.
연습이 잘 되는 매 순간순간이 행복하다. 대부분 사람 앞에서 노래할 때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만 무대에서 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기 때문에 감사한 일이지 혼자 마음껏 행복한 것과는 살짝 거리가 있다. 그래서 컨디션이 잘 안 돌아오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게 아닌가 불안해하다가도 노래가 잘 되고 내가 쓴 곡이 제법 괜찮을 땐 뿌듯하다. 결국 나 자신과의 콘서트인 셈이다.

빅마마 그리고 솔로 활동을 통틀어서 꼽는 신연아의 Best 5는 무엇인가.
빅마마 ‘거부’ (2003) – 사회에 대한 분노 지수가 한창일 때 가사를 썼다. 지금 보면 그때 왜 그렇게 썼을까 싶다가도 당시의 반항 정신을 어느 정도 대신해 주지 않았나 싶어 뿌듯한 면도 있다.

빅마마 ‘Thanks to..’ (2006) – 팬들을 향한 감사함을 담아 가사를 써 내려간 곡인데, 최근에 다시 활동을 시작하면서 참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빅마마 ‘사랑’ (2010) –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작곡가분께서 써주신 곡이다. 클래시컬한 멜로디 위에 사랑의 이면을 철학적으로 담았는데 빅마마 5집에 담겨서 무대에서 보여드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신연아 ‘Cosmos’ (2014) – 사랑을 주고받을 존재 하나면 우주를 다 가진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작업했다.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가사가 아름답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신연아 ‘늙은 어미의 노래’ (2014) –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남겨둔 자식들을 걱정하는 내용의 노래다.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에 집중해서 듣는다면 처음 접한 분들도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좋은 곡이다.

끝으로 신연아는 어떤 음악인으로 남고 싶은지.
나 자신은 물론 환경으로부터 자립하기 위해선 일단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많아야 한다. 곡 작업은 물론이고 각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여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음악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진행 : 장준환, 정다열, 김태훈
정리 : 정다열
사진 :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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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20 서수남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하청일과의 콤비로 한국 컨트리 포크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뮤지션 서수남이다.

큰 키에 서글서글한 미소, 재치 있는 입담을 갖춘 서수남을 방송인으로만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중심은 음악이다. 하청일과 함께 내놓은 ‘동물농장’, ‘팔도유람’ 등 무수한 히트곡은 세대를 막론하고 널리 사랑 받았고 ‘수다쟁이’는 한국 랩 음악의 시초로 평가받기도 했다. 격동의 1970년대, 서수남 하청일 콤비는 국민들에 웃음과 감동을 선사해준 마술사였다.

거침없이 흘러나오는 옛날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미8군부터 시작해 하청일과 공유한 전성기, 선풍적 인기를 끈 노래 교실까지 쉼 없이 달려온 그의 여정이 펼쳐졌다. 코믹함 속에 숨겨진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멈추지 않는 열정을 확인했다.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아지고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이 된 것에 감사하다는 그에게서 대선배의 따스함과 인자함이 묻어나왔다.

선생님 요즘 근황이 궁금해요.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우선 코로나 때문에 공연은 못 하고 있다. 지금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다. 주업이 방송과 강연인데 현 상황으로 인해 여러모로 외부 활동이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에 복면가왕에서 만나 봬서 반가웠습니다. 출연하시게 된 계기를 알 수 있을까요?
프로그램 출연진에서 연락이 왔다. 추석 때 나가는 방송이다 보니 고연령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얼굴을 찾고 있던 모양이다. 목 상태가 안 좋아서 기량 발휘를 못 한 게 아쉽다.

음악을 접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소년기에 접한 AFKN(주한미군방송)의 영향이 크다. 라디오에서 종일 음악이 흘러나왔는데 특히 컨트리풍 곡들이 인상적이었다. 음악 잡지를 사서 본 것도 큰 영향.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잡지들을 명동 뒷골목에서 팔곤 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신 계기는요?
고등학교 3학년이니 입시 공부를 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 라디오만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명동에 있는 쎄시봉이라는 음악감상실에 출입하게 되었다. 거기에 가보니 미 8군 부대에서 나온 컨트리, 팝 음반이 가득했다. 그래도 영어엔 자신이 있던 터라 가사를 나름대로 해석해가면서 음악 탐구에 열정을 쏟았다.

기타는 종로 2가에서 처음 접했다. 세계 음악학원이라는 기타 교습소에서 ‘애수의 소야곡’이나 ‘황성옛터’를 연습했다. 어느 날 원장님께서 ‘베사메 무초’를 연주하시는데 그 룸바 리듬이 너무 강렬해서 ‘아름다운 멜로디 이외에도 또 다른 연주 세계가 있구나’란 걸 실감했다.

그렇게 기타를 잡고 미국 팝송들을 연습하면서 조금씩 실력을 쌓았다.

음악을 한다고 할 때 부모님과 갈등은 없으셨나요?
물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음악 하면 딴따라라고 부르며 경시하는 풍토였다. 어머니가 제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는데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타만 치고 있으니 얼마나 걱정이 심하셨겠는가. 결국 어찌어찌해서 한양대를 입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고 음악 감상실에서 사는 게 일과였다.

그렇다면 영혼의 콤비 하청일 씨는 어떻게 만나시게 된 건가요?대학교 때 음악 동아리 활동하면서 만났고 2학년 때 함께 콩쿠르에 나갔다. MBC가 주관하고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꽤 큰 대회였는데 거기서 돈 깁슨의 ‘Oh lonesome me’를 불러 입상했다. 밴드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혼자 기타 반주와 노래를 곁들인 게 독특했나보다.

그 대회에서 하청일 씨와 일행을 만났다. 자기네들이 지금 ‘아리랑 부라더스’ 보컬 그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한 명이 모자란다고 나보고 들어와 달라는 거다. 당시에 브루벨스라는 사중창이 있었는데 그들과 비슷한 모습을 생각한 것 같다.

그 이후의 일들도 조금 더 들려주세요.
‘아리랑 부라더스’ 멤버들은 악보도 다들 볼 줄 아는 실력파였다. 나는 멜로디 파트였고. 몇 개월 함께 연습하고 워커힐 호텔의 가야금 식당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어처구니없게도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그림이 안 좋다고 나만 빠지게 되었다. (서수남은 190cm에 달하는, 당시로선 드문 장신이었다.) 그 길로 미8군 각종 무대에 오르며 전문적인 음악 생활을 시작했다.

미8군 부대에 가보니 윤항기, 차도균이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 중이더라. 나도 오디션을 봐서 호평과 함께 A 등급을 받았다. 웨스턴 쥬빌리 쇼라는 단체에 들어갔는데 나와 음악적 코드가 딱 맞아 만족스러웠다. 1967년부터는 컨트리 음악 방송 그랜드올오프리쇼에 참여했고 비틀스처럼 전기기타가 들어간 록 음악이 득세했던 시절임을 고려했을 때 참 인기가 많았다. 샤우터스, 김치스, 키보이스, 가이즈 앤 돌스 등 각양각색 밴드들이 활약하던 시기다.

서수남의 애스컴 추억은 또렷했다. 그에게 애스컴은 최신 문물에 눈 휘둥그레지는 신천지이자 본인의 끼를 풀어헤칠 안성맞춤 무대였다. 펑크(Funk), 디스코, 재즈 등 다양한 장르로 분화한 블루스에 비해 현대에 미치는 영향이 덜한 감이 있으나, 컨트리 음악을 향한 미국인들의 사랑은 자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등 당대의 대표 뮤지션들도 음악 뿌리의 한 축에 컨트리가 있었다.

미군들은 향수를 건드리는 컨트리 곡을 들으며 애상에 젖다가도 서수남의 전매특허 코믹 퍼포먼스에 열광했다. 탄탄한 실력과 빛나는 아이디어로 군부대를 들썩이게 했던 그는 애스컴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나요?
물론 생생하게 기억한다. 항구도시다 보니 모든 물자가 인천으로 들어왔고 보급기지인 애스컴이 자연스레 문화 일번지가 되었다. 나를 비롯한 저희 밴드 멤버들이 다 같이 카우보이 모자 쓰고 AFKN에서 나오는 최신곡을 들려주면 반응이 정말 좋았다. 평소에 라디오 방송으로만 듣던 곡을 라이브로 보니까 얼마나 재밌었겠는가.

그 당시 어떤 곡을 부르셨는지 기억하실까요?
지미 로저스가 부른 ‘뮬 스키너 블루스(Mule skinner blues)’라는 고전 컨트리 곡을 자주 불렀고 요들송도 인기가 많았다. 우리는 컨트리 전문이다 보니 자니 캐쉬나 행크 윌리엄스의 모창을 해서 관중들의 반응을 끌어냈다.

서수남 하청일 콤비로 ‘과수원길’, ‘동물농장’, ‘팔도유람’, ‘수다쟁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기셨어요.
현인의 딸 현혜정과 듀엣 활동을 하던 시기에 MBC에서 PD로 활동하던 김경태씨가 코믹한 노래를 부르는 콤비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곧바로 하청일을 떠올렸고, 이미 아리랑 부라더스의 이름으로 1964년에 녹음했던 ‘동물농장’으로 서수남 하청일 콤비의 서막을 알렸다.

‘동물농장’은 해리 벨라폰테의 ‘I do adore her’의 번안곡이라는 느낌이 안 들 정도로 획기적인 창작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벨라폰테의 곡에서 발상을 얻어서 만든 건 맞지만 번안곡이라기보단 제2의 창작에 가깝다고 본다. 녹음할 당시 암탉 소리 등 실제 동물 소리를 삽입하려 했으나 여건이 어려워 동물 모사를 한 게 외려 큰 인기를 끌었다. 공연할 때는 즉석에서 동물을 바꿔가며 모사를 했고 큰 웃음을 주었다.

‘과수원길’이라는 곡은 교과서에 인기가 워낙 대단하여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우리 콤비는 3개 방송사(KBS, MBC, TBS)의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동요를 많이 불렀다. 그래서인지 어린이 팬들이 참 많았다. 어느 날 ‘과수원길’을 듣는데 곡이 너무 좋아서 작곡자인 김공선 당시 신림초 교장에게 ‘이 곡 취입해도 될까요?’라고 여쭤봤다. 그렇게 허락을 받아 오아시스 레코드에서 녹음한 곡이 슈퍼 히트를 기록했다.

코미디언과 뮤지션을 아우르는 정체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그 정체성이 성공 비결이라 고마운 마음이다. 가수가 전업이었지만 구봉서, 곽규석 같은 대선배들이 우리를 참 예뻐해 주셨다. 이홍렬, 임하룡, 이용식 같은 코미디언 후배들과도 친분이 많다. 그리고 사실 진지한 곡도 안 알려졌을 뿐 다수 발표했다. 1970년부터 91년까지 활동했으니 여러 스타일의 곡을 보유할 수밖에 없다.

특히 ‘수다쟁이’는 현재 한국의 랩 음악의 효시라는 평가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동의한다. 그 곡 이외에 ‘버스를 타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설악산 양양 낙산사 대관령 고개 넘어 강릉 경포대 삼척’이라고 줄줄이 읊는 ‘팔도유람’도 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빨리 가사를 읽는 노래가 없었으니까.

오리지널 곡에 대한 열망은 없으셨나요?
1985년에 발표한 트로트풍의 ‘친구가 그립구나’가 자작곡이었다. 하청일과 헤어지고 나서도 작곡을 꽤 했다. 1992년엔 < 세상사는 이야기 >라는 독집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 인기를 구가한 노래 교실이 궁금합니다.
사실 그전에도 가곡을 함께 부르는 가곡 교실은 있었다. 반면 나는 일본의 가라오케에서 모티브를 얻은 가요 교실을 도입했다. 작곡가 길옥윤이 노래방의 시초가 된 150곡 정도의 가요 반주를 만들었고 그 곡을 노래 교실에도 사용했다.

꽃꽂이나 붓글씨 같은 정적인 취미생활이 주를 이룰 때인데 노래 교실은 훨씬 동적이지 않은가. 주부들 사이에 인기가 퍼져서 나중에는 회원이 천 명이 넘어갔다. 커다란 강당을 빌려야 했다. 그렇게 10여 년간 노래 교실을 이어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선생님을 자주 봐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동안 노래 교실 활동을 하다가 2천 년도부터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MBC < 브레인 서바이벌 >에 패널로 나가면서 인기를 끌었고 방송 활동을 계속해왔다. 가수와 코미디언, 예능 패널을 아우르는 멀티 엔터테이너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현재의 국내 대중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내가 데뷔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발전했다. 1970년대에도 내가 주로 구사했던 컨트리와 디스코, 록 등 다양한 장르가 있었지만, 지금은 훨씬 다양한 스타일로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어서 후배들이 자랑스럽다.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음악 인생을 돌아보신다면요?
대중음악은 늘 사랑받아왔지만 사회적으로 대접을 못 받고 무언가 소외되어 있었던 것 같다. 딴따라라고 불리던 시절에 데뷔했는데 언젠가부터 연예인이라는 칭호가 생기고 지금은 어디 가나 사랑받는 직업이 되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상대적으로 짧아진 요즘 가수들의 수명에 비해 꽤 긴 시간을 활동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

BTS를 통해 한국이 문화예술 강국임이 입증되었고 국민들의 많은 성원도 큰 힘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공연장을 비롯한 대중음악 관련 시설이 많이 부족하다. 국가적인 제도로 이런 부분을 개선한다면 더욱더 단단한 입지를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 손기호, 염동교, 장준환
사진 : 본인 제공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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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8 김삼순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들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열여덟 번째 인터뷰의 주인공은 인천 최초의 걸 밴드 ‘레이디버즈’의 드러머 김삼순이다.

올해 브레이브걸스 ‘롤린(Rollin’)’ 역주행은 위문 열차 공연 영상으로부터 시작했다. 특히 병사들이 의자 위로 올라가서 가오리 춤을 따라 출 만큼 흥겨워하는 모습은 군 생활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전폭적인 지지의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도 걸그룹의 공연은 많은 병사들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인천 출신 여성들로 결성된 5인조 걸 밴드 레이디버즈는 전국의 미군 부대 클럽을 누비며 병사들의 환호를 받았다.

양손에 쥔 드럼 스틱, 숏컷 헤어스타일, 몸에 딱 맞춰 떨어지는 근사한 옷. 지금 봐도 세련된 모습으로 공연하던 사진을 보여주는 레이디버즈의 드러머 김삼순은 그때와 다름없이 생기가 넘쳤다. 타지에 살고 있지만 ‘내 고향이 부평이니 애스컴 역시 내 고향이다’라며 밴드 활동 시절의 추억과 애스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금도 인천 그린 실버 악단,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로 음악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 김삼순을 만났다. 

우선 인천 최초의 걸밴드, 레이디버즈 데뷔에 얽힌 에피소드가 궁금합니다.
레이디버즈는 여자들끼리 시작한 그룹이다. 그룹명도 숙녀를 뜻하는 ‘레이디’와 새들이 조잘거리는 모습을 연상한  ‘버드’가 합쳐진 단어다. 근데 ‘레이디버드’(Ladybird)를 검색하니 무당벌레가 나오더라. 55년 전 그때만 해도 단장님이나 우리 멤버들이나, 다들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일차원적인 뜻만 생각하고 만든 셈이다. (웃음)

정확하게 활동을 개시한 건 몇 년일까요.
당시에 오디션을 본 게 있었으니, 아마 1968년도일 거다. 신중현도 바로 옆에서 본 기억이 있고 이미자나 최희준이 쇼를 열면 펄 시스터즈와 같이 서기도 했으니. 처음에는 여자 여섯 명이 함께 연습하며 시민회관에서 공연을 했다. 그러다 미 8군 오디션이 다가올 때쯤 퍼스트 기타가 사정이 생겨 밴드에서 나가게 됐고, 단장님이 데려온 남자 한 명과 몇 개월을 다시 연습한 뒤 미8군 오디션에 나갔다. 그때 서파리스(Surfaris) ‘Wipe out’의 드럼 솔로로 B+ 등급을 받으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국내 가요 무대에서의 인상에 남는 기억이 있을까요.
한 미8군 사단에 가면 한 달 정도 머물며 공연을 하는데, 그동안에도 틈틈이 국내 가요 무대에 출연했다. 그때 배호의 마지막 공연에도 나갔고, KBS 사옥이 남산에 있을 때 김상희와 함께 녹화를 하기도 했다.

드럼을 시작할 때 영향을 준 노래나 뮤지션은 누구였나요.
우리 맏언니와 결혼한 형부가 한국 최초의 드러머 김윤옥 선생이다. 당시 음악하는 사람은 일명 ‘딴따라’라는 편견이 있었는데도, 우리 형부가 워낙 인물도 잘나고 인간성도 좋았던 터라 아버지와 맏언니도 형부에게 드럼을 배우는 것을 허락해주더라. 그때가 17살이었다. 마침 오빠도 아코디언을 연주해서 ‘음악하는 남매’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다.

당시 레이디버즈의 연주 실력은 어땠나요.
아우, 별로였다. 히식스나 키보이스같이 실력이 뛰어난 밴드에 비교하면 말도 못 한다. 우리는 여자로서 덕을 본 셈이다.

미8군에서 연주했던 레퍼토리를 소개해주세요.
당시 우리 밴드의 단골 곡은 아까도 말했듯 서파리스(The Surfaris)의 ‘Wipe out’이다. 벤처스(The Ventures)의 ‘Shanghied’나 ‘Django’도 자주 연주했고, 비틀스 곡은 거의 다 했던 것 같은데 특히 ‘I’m so tired’를 많이 연주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미8군 중 어디에서 주로 공연하셨는지.
전국의 부대란 부대는 다 돌았다. 미8군에는 밴드 비 클래스와 에이 클래스가 나뉘어 있는가 하면 패키지, 쇼 프로 형식으로 들어가는 게 있다. 우리 밴드가 속한 쇼 클래스는 가격이 더 비쌌다. 저녁 9시, 10시, 11시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공연을 하는데, 애스컴에서 공연할 때는 다른 밴드의 빈자리를 채워주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대가 있을까요.
일단 반응이 좋은 부대가 가장 재미있다. 당시 무대는 사병 클럽, 중상사 클럽, 장교 클럽으로 세 개로 나뉘는데, 장교 클럽은 다들 점잖게 앉아 경청만 하니 조금만 틀려도 티가 나서 주눅이 들 정도다. 근데 또 사병 클럽으로 가면 함성이나 반응이 너무 좋다. 몇몇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밴드 멤버들을 보려고 바로 앞까지 무릎으로 기어오기도 하고. (웃음) 중상사 클럽은 다들 카메라를 하나씩 들고 공연에 온다. 어느 날 한 군인이 즉석카메라를 가져와 그 자리에서 한 장 찍어 건네준 기억이 난다. 그때 우리나라는 카메라가 워낙 귀할 때라 정말 놀랐다.

애스컴은 고향이니까 더 반가웠겠어요.
그렇다. 어디를 가든 대우는 좋았지만 아무래도 고향과도 같은 애스컴이 가장 반가웠다. 우리가 공연에 가면 미군 장교들이 커피도 권하고 토마토 주스도 줬다. 그때 토마토 주스를 처음 먹어봤는데 먹어보지 않았던 것이라 내 입에는 안 맞더라.

그러면 레이디버즈 이름으로는 활동을 몇 년 정도 하셨는지.
정확하게 2년 활동했다. 미8군은 2년 활동을 하면 다시 오디션을 봐야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에, 1968년에 시작하여 1970년에 활동을 마쳤다. 그리고 그때는 여자가 스물셋만 넘어가도 올드미스라 하던 시절이라 고등학생 때부터 5년간 펜팔을 주고받던 군인과 결혼했다. 이후에는 내 자리를 장미화가 채운 것 같다. 다시 미8군 오디션을 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장미화와 임정임이 레이디버즈로 활동하며 동남아에 진출한 것을 보고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레이디버즈로 활동할 때 돈은 얼마 정도 받으셨나요.
그 당시 월급 3만 3천 원에서 세금 10퍼센트를 떼고 3만 원을 받은 것 같다. 집에 1만 원 정도 드리고, 1만 원은 저금하고, 나머지 1만원은 용돈으로 쓰면서 좋은 의상과 신발을 맞췄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군 상사였던 남편의 월급이 8천원인걸 알게 됐을 때 정말 놀랐다.

레이디버즈로 활동하며 전국을 다니던 때를 어떤 시절로 기억하시나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나에게 아주 좋은 기회이자 행복한 시절이었고, 그렇기에 빨리 그만둔 것에 서운할 때도 있었다. 중간에 후회를 많이 하기도 했고. 그래도 나쁜 길로 안 빠지고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서 지금의 부군을 만나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비가 사람들에게는 다 있는 거고, 무엇보다 떳떳하게 살 수 있어 당당하다. 물론 젊을 때는 지금은 사별한 남편이 이상하게 볼까 미8군에서 공연한 사실을 말 못 하기도 했었다. 근데 후에 말하고 난 뒤에는 내가 음악 활동을 한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화를 내주기도 했다.

지금 많은 걸그룹이 활동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드시나요.
다들 너무 실력도 좋고 여러 방면에서 완벽하게 잘하는 친구들이다. (웃음)

레이디버즈 활동 이후 언제 다시 음악을 시작하셨나요.
우선 부모나 형제한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음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음악이 정말 하고 싶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35년간 식당을 영업하느라 도저히 할 시간이 없었다.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나니 50살이 되었는데 정말 음악이 미치게 하고 싶어 식당을 병행하며 여유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했다. 첫 시작은 부평에 있는 인천여성문화회관에서 장구를 배웠는데, 가르치는 선생님이 날 보고 혹시 예전에 악기를 다룬 적이 있는지 너무 익숙하게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시더라. 오래전에 드럼을 좀 쳤다고 말씀드리니 그때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에 드럼 자리가 비었다고 소개해주셨다.

인천시와 여성가족부가 인천 팝스 오케스트라를 지원하다가 지금은 인천가족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인천가족재단 고문 자리에 앉아 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까지 정기 연주에 참여했다. 항상 나가는 것은 아니고 오케스트라에 타악기 연주자가 5명 정도 필요한데 징, 카우벨 같은 타악기 연주자 자리가 비면 채우고 있다. 15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에는 시간 여유가 더 생겨서 인천 그린 실버 악단에서도 활동했다. < 가요무대 >를 진행하시던 김정도 선생님이 운영하던 오케스트라인데 김정도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함께 활동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미국 진출이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데, 최근 많은 K팝 가수들이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고 정상을 따내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K팝 가수들 정말 뛰어나고 훌륭하지만, 그래도 우리 시대에는 나름대로 우리가 최고였다. 특히 애스컴은 우리나라 음악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다들 악보를 보기는커녕, 악기조차 제대로 배울 수 없던 환경에서도 선배들은 부대 앞에 있는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나 미군들이 흥얼거리는 멜로디를 듣고 음악을 독학했으니까. 물론 흉내 내는 것을 시작으로 만들었지만, 그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오늘날 K팝이 발전한 것이라 본다.

인터뷰 : 임진모, 임동엽, 장준환, 정수민
사진 : 임동엽
정리 : 장준환, 정수민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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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IZM이즘x문화도시 부평] #17 김홍탁

웹진 이즘(IZM)이 문화도시 부평과 함께 하는 < 음악 중심 문화도시 부평 MEETS 시리즈 >는 인천과 부평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아티스트들을 순차적으로 인터뷰하는 시리즈 기획이다. 지금까지 관련한 이곳 출신의 여러 뮤지션이 자리해 그들 자신의 음악 이야기와 인천 부평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한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키보이스’와 ‘히식스’에서 활동한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김홍탁이다.

멋스럽게 샌 백발에 딱 붙는 청바지. 선글라스 속 눈동자는 호롱불처럼 빛났다. 차분한 말투에 여유가 묻어 나왔지만, 스타와 뮤지션을 단호하게 구분하기도 했다. 로커 특유의 애티튜드와 예술가의 자의식이 충만한 그는 ‘평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성격처럼 과거의 반추를 뒤로 한 채 미래의 목표에 골몰해 있었다.

물론 한국 대중음악사의 발자취인 그의 경력을 생략하기는 어렵다. 최고의 인기 록 밴드 ‘키보이스’로 데뷔했고 ‘히파이브’와 ‘히식스’를 통해 독자적 음악영지를 건설했다. 전성기 무렵인 1972년부터 14년간 이어진 미국 체류기는 오인된 것처럼 음악적 공백기가 아닌 새로운 도전의 시기였다. 한국으로 돌아와 1992년에는 서울재즈아카데미를 설립,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고 했다.

중학생 시절 친구 집 위층에 살던 미군 병사에게 기타를 배웠다고 들었습니다. 의사소통이 우리말처럼 원활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어떤 식으로 익혀나갔는지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던 시점에 기타에 빠진 게 큰 행운이었다. 당시 ‘목포의 눈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처럼 부드러운 곡들밖에 배울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군 병사를 만나 현지 스타일을 체득할 수 있었고 오래 배우진 못했지만 커다란 수확이 되었다. 의사소통은 말이 안 통하다 보니 바디 랭기지를 주로 활용했다.

1964년 키보이스 데뷔 때 얘기를 들려주세요.
우리가 다 함께 모인 건 1963년으로 기억하고, 1964년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우리의 음반이 비틀스보다 먼저 나왔던 거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아니었다. (비틀스의 데뷔 앨범 < Please Please Me >는 1963년 3월 22일에 나왔다) 당시 키 보이스의 주요 레퍼토리는 비틀스의 곡들과 김영광이 작곡한 ‘그녀 입술은 너무나 달콤해’ 였다. (원년 멤버는 김홍탁 차중락 차도균 윤항기 옥성빈이었다)

키보이스 1집의 대표곡은 ‘정든 배는 떠난다’였죠.
그 당시엔 멤버들의 자작곡이 아닌 기성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부르는 시절이었다. 김영광 선생이 작곡한 ‘정든 배는 떠난다’는 애초 트로트 선율이 완연해 우리가 추구한 록 풍으로 편곡했다. 비틀스의 영향을 받아 샤우팅 창법을 도입했고(첫 소절의 ‘달그림자에’를 들어보라) 6도, 7도 코드를 첨가해 화성학적으로 더욱 풍성한 편곡을 완성했다. 그래도 ‘정든 배는 떠난다’가 뜬 데는 복합적인 운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키보이스 시절 차중락의 죽음은 안타까웠던 기억이겠어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매일같이 함께 생활했던 차중락은 순정파 로맨티스트였다. 그렇기에 그의 사망과 관련 가짜 뉴스가 많아서 마음이 아팠다.

미8군 무대에서의 키보이스 인기는 어느 정도였는지요.
당시 미8군 쇼에서 ‘컨템포러리 뮤직’의 최고봉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달랑 다섯 명이 만들어내는 사운드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비틀스로부터 점화한 록 밴드의 전성시대와 키보이스의 등장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키보이스의 음악에서 김홍탁이 갖는 의미는요.
우선 모든 게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하늘에 감사한 마음이다. 처음 데뷔한 그룹에서 좋은 처우를 받았고, 무엇보다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송창식, 윤형주의 무대로 잘 알려진 쎄시봉에서 가장 먼저 공연한 것도 우리며 방송국, 지방공연과 극장 쇼를 누비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신중현과 애드포(Add4)는 키보이스와 달랐다. 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나요.
키보이스는 명백히 비틀스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차중락이라는 뛰어난 보컬이 있었음에도 하모니의 비중을 매우 높게 가져갔다. 반면 신중현의 음악은 롤링 스톤스처럼 거친 기타 사운드가 주를 이뤘다. 신중현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음악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기반을 닦은 최고의 뮤지션이라고 생각한다.

키보이스를 떠나 히파이브를 결성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시에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에 꽂힌 상태였다. 헨드릭스의 우드스톡 공연을 보고 잠을 못 이룰 정도로 흥분감에 사로잡혔다. 그에 영향을 받아 사이키델릭, 하드록을 향한 음악적 야망을 갖고 새로운 도전을 했을 뿐이지 키보이스 멤버와의 어떠한 불화로 떠난 것은 아니다.

키보이스와 히파이브와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히파이브는 최헌이 가세하면서 히식스로 바뀐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서울 시민회관에서 ‘플레이보이 컵 쟁탈’이라는 보컬 그룹 경연대회가 열렸다. 1969년 5월 17일부터 20일까지 열린 제1회 대회에서는 키보이스가 대상을 받았고, 2회와 3회 연속으로 히식스가 수상했다. 대중성에 초점을 둔 심사위원은 키보이스에 좋은 점수를 줄었지만 히파이브와 히식스의 음악적 시도를 높게 평가한 심사위원도 있었다.

히파이브 다음인 히식스에선 더욱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펼쳐 보였다. 히식스와 키보이스의 본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히식스 활동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점은 창의성을 맘껏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당시의 전형적인 미국 음악에서 탈피해 사이키델릭 록 그룹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In-a-gadda-da-vida’를 재해석해서 연주하는 등 틀에 구속되지 않았다. 한번은 명동 오비스캐빈에서 원래 약 17분 정도인 이 곡을 45분으로 늘려 잼(즉흥 변주) 형식으로 연주했다. 기타 솔로만 15분 정도 했던 것 같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산타나의 ‘Black magic woman’을 연주하다 중간에 돌연 6명의 멤버가 동시에 드럼 연주를 하는 퍼포먼스도 선보이기도 했다. 사이키델릭과 젊음의 코드가 일치했던 때라 관객 반응도 좋았다. 키보이스 시절에 비해 자작곡 비중을 높인 점도 구별점으로 꼽고 싶다.

히파이브와 히식스 시절, ‘초원’, ‘초원의 빛’, ‘초원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유명한 ‘초원 시리즈’는 어떻게 기획하시게 된 건가요.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노래의 소재가 조금은 획일화되어 있었다. 자연의 소재를 활용해 신선한 느낌을 표현하고 싶어 ‘초원’이란 단어를 쓰게 되었다. 그게 대박이 나서 서울 곳곳에 ‘초원 다방’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초원 세탁소’가 생겨날 정도였다. 사운드 적으로는 트로트 일변도에서 벗어나 히식스만의 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 작품이다.

이어서 김홍탁의 부평 애스컴 회고담이 이어졌다. 그 이야기를 통해 속된 말로 ‘그가 얼마나 잘나갔는지’를 느꼈다. 인천 출신의 그는 애스컴을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키보이스의 일원으로 애스컴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던 그는 순간 과거 여행을 다녀온 듯 우수에 젖었다.

미8군 무대는 당대의 K-뮤지션들에게 프로페셔널리즘을 제공해주었고 숙련을 통해 쌓은 음악적 자양분은 한국에 소울, 펑크, 재즈 등 장르 음악의 뿌리가 되었다. 조용필과 ‘사랑과 평화’ 또한 미8군 출신임을 아시는지. 김홍탁의 증언은 ‘과거 없이 현재 없다’는 간명한 진리를 재확인해줬다.

부평애스컴에 대한 기억을 들려주세요.
애스컴은 미군 총괄 기지 중에서도 가장 크고, 뭐랄까 부유한 부대 중 하나였다. 당시 가장 많은 공연을 펼쳤던 곳이라 마음의 고향 같다. 고향이 인천이다 보니 더 애틋하게 느껴지는 것도 있고.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처럼 인천 또한 항구도시, 개화 도시이다 보니 당시 외국 문물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고 그래서인지 인천 출신 뮤지션 혹은 밴드가 유독 많다.

K팝과 연결지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하다. 애스컴에서 활동했던 많은 뮤지션들의 음악과 활동이 작금의 K팝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극히 한정된 인물들만 기억할 뿐이다.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서 세월 속에 잊힌 이들과 그들의 음악을 반추하고자 한다.

김홍탁 음악 인생에 있어서 가장 자랑스러운 곡은 무엇인가요.
아무래도 가장 인지도가 높은 최헌이 부른 히식스의 ‘당신은 몰라’겠지만 음악적으로 자부심을 가지는 곡은 1970년에 발표한 히식스 1집 < HE6 Vol. 1 >의 수록곡 ‘말하라 사랑이 어떻게 왔는가’이다.

1972년이면 전성기였는데요. 그런데도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번 결심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행동한다. 엉뚱한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대중음악의 본토 격인 미국에 부딪혀 보고픈 마음이 컸다. 떠난 뒤 약 14년 6개월을 미국에서 보냈다. 어떻게 살아도 아쉬운 점, 좋았던 점은 공존할 수밖에 없기에 후회는 없다.

미국으로 떠난 후 음악관의 변화가 있으셨나요.
세상과 나 자신이 변함에 따라 추구하는 음악 또한 자연스레 변화해왔다. 미국 생활 초기에 일류 호텔에서 스탠더드 재즈를 연주했다. 본성이 로커이기에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점차 적응해나갔다. 후에 퓨전 재즈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고 박인수가 부른 1980년 작 ‘너처럼 예쁠수야’의 펑키(Funky)한 사운드가 그 결과물 중 하나다. 미래 대중음악의 중심엔 재즈가 있다고 보았고 실용 음악학원이라는 말 대신 서울재즈아카데미란 이름을 사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김홍탁은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18년간 원장으로 재직했다)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원장으로 계시면서 얻은 보람은 무엇인가요.
축구 경기서 스타플레이어만큼이나 경기 전반을 조율하는 미드필더가 중요한 것처럼 곡 제작의 전체적인 과정을 조율하는 뮤지션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서울재즈아카데미가 이러한 뮤지션들의 산실 역할을 해서 기쁘다. 현재 BTS의 곡 녹음에 참여하는 뮤지션, 테크니션 중 아카데미 출신이 더러 있는 거로 안다.

현재 한국의 대중음악계에서 록은 힙합이나 EDM에 밀려 침체된 상태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생을 록에 헌신한 사람으로서 물론 안타깝다. 역시나 좋은 곡이 발표되어야 록이 다시 살 수 있다고 본다. 신중현 선배님이 ‘빗속의 여인’을 비롯한 많은 명곡으로 대중에게 다가간 것처럼 말이다. 결국 우리는 대중음악 뮤지션이기 때문에 대중이 사랑하는 음악, 좋은 곡을 만들어내야 한다.

선생님께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 혹은 밴드를 다섯 팀만 소개해주세요.
‘Rock around the clock’으로 로큰롤의 시작을 알렸던 빌 헤일리 & 히스 코메츠(Bill Haley And His Comets)와 비틀스(Beatles), 앞서 언급한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 산타나(Santana, 그의 휴대폰 벨 소리는 ‘Samba pa ti’였다.) 그리고 조금 의외로 들리겠지만 시카고(Chicago). 재즈 록 퓨전 밴드 아닌가.

김홍탁 선생님의 향후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우선 유튜브를 꾸준히 할 계획이다. 키보이스를 계승하는 해피 밴드와 히식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567Nll과 함께 유튜브를 통한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계획 중이다. 좀 더 크게 보자면 아까도 말했지만, 미국 로큰롤 명예의 전당처럼 < K팝 뮤지션 명예의 전당 >을 설립하고 싶다. 한국 대중음악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양평, 인천, 서울, 샌프란시스코의 네 도시에서 < K All-Star Group >이란 이름으로 자선 공연을 펼치고도 싶다. 아직 과제가 많이 남았다.

인터뷰 : 임진모, 김성욱, 염동교, 장준환, 정다열
사진 : 정다열
정리 : 임진모, 염동교
기획 : 부평구문화재단 문화도시사업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