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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벡(1944-2023), 위대한 여정

2010년 제프 벡의 내한 공연에 한데 모인 국내 유명 기타리스트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 ‘정말 끝내주게 잘 치더라’. 그렇다. 제프 벡은 말 그대로 기타를 잘 쳤고 후배 연주자들의 마음속엔 아득한 거리감과 경외심이 공존했다. 밴드 리더와 프로듀서 등 전방위를 아우르는 멀티 플레이어지만 기타 연주자로서의 업적이 첫 손에 꼽혀야 한다.

1965년부터 1966년까지 약 2년여간 야드버즈에서 재적한 벡은 일명 < Roger The Engineer >로 불리는 블루스/사이키델릭 록 명작 < The Yardbirds >를 끝으로 밴드를 떠나 이름을 내건 제프 벡 그룹을 결성했다. 로드 스튜어트가 보컬을 맡고 현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로니 우드가 베이스를 잡은 제프 벡 그룹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 ‘Beck’s bolero’가 실린 < Truth >(1968)와 < Beck-Ola >(1969)같은 블루스/하드 록 수작을 남겼다.

바닐라 퍼지의 드러머 카마인 어피스와 의기투합한 슈퍼그룹 벡 보거트 어피스(Beck, Bogert & Appice)로 한 장의 정규작 < Beck, Bogert & Appice>(1973)를 남긴 후 1970년대 중반부터 퓨전 재즈에 경도했다. 로이 부캐넌 헌정곡 ‘Cause We’ve Ended As Lovers’와 면도날 사운드의 ‘Scatterbrain’이 들어간 1975년 작 < Blow By Blow >가 경력상 하이라이트. 1980년대 미드 < 마이애미 바이스 >의 테마음악을 쓴 체코 출신 키보디스트 얀 해머의 조력으로 완성한 < Wired >(1976)와 < There & Back >(1980) 까지가 벡의 퓨전 재즈 시기였다.

피크 대신 엄지와 트레몰로 암(Tremolo Arm)을 활용해 다채로운 톤을 구사했던 1980년대에는 뉴웨이브 시대에 감응해 쉭의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초빙한 < Flash >(1985)와 기교파 드러머 테리 보지오(Terry Bozzio)와 직선적인 인스트루멘탈 록을 합작한 < Guitar Town>(1989)를 발표했다. 다음 정규작 사이 10년의 공백을 로커빌리의 재조명 < Crazy Legs >(1993)와 존 본 조비의 솔로 데뷔 앨범 < Blaze Of Glory >(1990)의 기타 연주 등의 사이드 프로젝트로 채웠다.

< Who Else? >(1999),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로 밀레니엄을 관통한 일레트로니카-기타 록은 늘 트렌드에 민감했던 그가 고안한 새로운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레드 제플린의 선장 지미 페이지에 비해 밴드 리더의 정체성은 약했고 에릭 클랩튼처럼 대중적 히트곡을 가지지 못했지만 음악성의 변화와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타 본연의 악기성을 끝없이 파고들었다.

작년 7월 배우 조니 뎁과 협업한 < 18 >을 발표하고 불과 몇 달 전까지자 투어를 돌던 그이기에 갑작스러운 죽음이 허망하나 수많은 동료, 후배 기타리스트들의 추모와 회고는 왜 그가 ‘기타리스트의 기타리스트’며 유일무이한 존재였는지 증언했다.

에디터가 권하는 제프 벡 열 곡

1. Shape of things (1966)
지미 페이지와 에릭 클랩튼, 키스 렐프(Keith Relf) 같은 명 뮤지션이 거쳐 간 야드버즈는 영국 록의 산실과도 같다. 앨범에 수록되지 않고 1966년 싱글로 발표된 ‘Shape of things’는 로큰롤의 골격 아래 덜컹대는 곡 구성과 비전형적 음향으로 비전형성을 도모했고 그 중심엔 제프 벡의 피드백 주법이 있다. 길게 늘어뜨린 음파의 공감각적 기운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원형을 확립했다. 이십 대 초에 이미 사운드 혁명을 불러온 벡은 솔로 1집 < Truth >(1968)의 첫 곡으로 ‘Shape of things’을 택했다. 하드 록의 프로토타입 격인 ‘The train kept rollin”과 더불어 야드버즈 시절 벡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곡이다.

2. Beck’s bolero / < Truth >(1968)
프랑스의 고전 음악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처럼 살랑살랑 춤을 추다 기타 이펙트로 환각의 탑을 쌓고 이내 굉음으로 응축했던 기운을 터트린다. 오랜 친구 지미 페이지와 레드 제플린의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 더 후의 드러머 키스 문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참여한 곡은 록 인스트루멘탈의 고전으로 남았다. 싱글의 A면으로 함께 붙어 있던 ‘Hi ho silver lining’도 벡이 라이브에서 즐겨 연주한 하드 록 넘버다.

3. All shook up / < Beck-Ola >(1969)
제프 벡 그룹의 명의로 발표한 1972년 작 < Beck-Ola >의 인트로 곡이다. 흑인 블루스 뮤지션 오티스 블랙웰(Otis Blackwell)이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준 산뜻한 로큰롤이 거친 부기 록으로 재탄생했다. 로드 스튜어트(보컬)과 로니 우드(베이스), 비틀스와 롤링 스톤스 등 수많은 뮤지션과 협업한 건반 연주자 니키 홉킨스의 드림팀이 탄탄한 연주를 들려줬다. 미국 회사 록올라 주크박스에서 이름을 따온 < Beck-Ola >에는 ‘All shook up’이외에도 ‘Spanish boots’나 ‘Plynth(water down the drain)’처럼 당대 최고 연주자들의 기량을 만끽할 수 있는 곡들로 가득하다.

4. Definitely maybe / < Jeff Beck Group >(1972)
테네시 주 멤피스의 녹음 장소와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출신의 기타연주자 스티브 크로퍼(Steve Cropper)의 프로듀서 기용 등 제프 벡 그룹의 세 번째 스튜디오 음반 < Jeff Beck Group >은 블루스의 뿌리에 다가서려는 흔적이다. 흑인 보컬리스트 바비 텐치(Bobby Tench)의 목소리도 유독 소울풀하게 들린다. 하나 백미는 벡이 작곡한 마지막 트랙 ‘Definitely maybe’로 마치 우는듯한 기타 톤과 후반부 맥스 미들턴의 펜더 로즈 일렉트릭 피아노가 처연함을 드리웠다. 밴드에 처음 가입한 파워 드러머 코지 파웰은 ‘Ice cream cakes’에서 견실한 기본기를 드러냈다.

5. Cause we’ve ended as lovers / < Blow By Blow >(1975)
Blow By Blow >는 제프 벡의 솔로 경력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이 제작한 1975년 걸작 덕에 제프 벡은 퓨전 재즈의 역사에도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목소리 없이 악기 연주로만 이뤄진 인스트루멘탈 음반임에도 유기적 구성과 개별곡의 마력 덕에 빌보드 200에서도 4위까지 올랐다. ‘Constipated duck’과 ‘Freeway jam’처럼 펑키(Funky)한 넘버들 사이로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은 곡은 벡이 또 한 명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로이 부캐넌에게 헌정한 ‘Cause we’ve ended as lovers’다.

6. Led boots / < Wired >(1976)
걸작 < Blow By Blow > 후 1년 만에 나온 1976년 작 < Wired >는 당시 벡의 창작력이 극에 달했음을 방증한다. 얀 해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음반으로 < Blow By Blow >의 키보디스트 맥스 미들턴(Max Middleton)의 아날로그 연주와 해머의 신시사이저가 고루 활약하며 벡의 기타를 보좌했다. 재야의 강자 나라다 마이클 왈든(Narada Michael Walden)과 윌버 배스컴(Wilbur Bascomb)의 리듬 섹션도 탄탄한 흠 잡을 데 없는 퓨전 재즈/인스트루멘탈 록 앨범에서 ‘Led boots’는 상기한 모든 음악적 요소를 압축했다.

7. You never know / < There & Back >(1980)
데이비드 보위의 < Lodger >(1979)가 베를린 트릴로지에서 지니는 지위처럼 퓨전 재즈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인 < There & Back >도 앞의 두 음반에 비해 무게감이 덜하나 영혼의 파트너 얀 해머와 토니 하이마스(Tony Hymas), 1990년대 토토의 드러머로 활동했던 사이먼 필립스(Simon Phillips)의 특급 연주는 가사 없이 소리만으로 즐겁다. 벡은 타이틀 곡 ‘You never know’에서 해머가 깔아준 판 위로 유영하며 찰떡궁합을 뽐냈다. 반복적인 전자음을 파고드는 기타 연주는 1980년대 이후 줄곧 채택해온 소리 문법이기도 하다.

8. People get ready / < Flash >(1985)
디스코/펑크(Funk) 그룹 쉭의 기타리스트 나일 로저스가 참여한 1985년 작 < Flash >는 그간의 인스트루멘탈 경향에서 벗어나 지미 홀(Jimmy Hall), 카렌 로렌스(Karen Lawrence) 등 다양한 보컬을 세웠고 벡 본인도 노래했다. 수록곡 ‘Escape’가 1986년 제28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했으나 죽마고우 로드 스튜어트가 목소리를 더한 ‘People get ready’가 더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원곡은 소울의 거목 커티스 메이필드가 이끈 임프레션스가 1965년에 발매했다.

9. Nadia / < You Had It Coming >(2001)
< Wired >와 < Flash >에서 신시사이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던 벡은 1990년대 말부터 일렉트로니카와 기타 록의 융합을 시도했다. 예순을 향해 가던 거장은 < Who Else? >(1999)과 < You Had It Coming >(2001), < Jeff >(2003) 세 작품으로 당대의 경향성을 포착했다. 저명한 여성 기타리스트 제니퍼 배튼(Jennifer Batten)이 참여한 2001년 작 < You Had It Coming >은 2002년 제 44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Dirty mind’와 머디 워터스의 블루스를 재해석한 ‘Rollin’ and tumblin”을 담았고 영국 뮤지션 니틴 소니(Nitin Sawhney)의 다운템포 원곡에 기타를 덧댄 ‘Nadia’는 신비로운 선율로 제프 벡의 21세기 수작이 되었다.

10. So what / < Jeff >(2003)
일렉트로니카 트릴로지의 마지막 편에 해당하는 2003년 작 < Jeff >는 테크노와 기타 인스트루멘탈을 엮었다. 리버풀 출신 빅비트 그룹 아폴로 440(Apollo 440)과 벨기에의 전자 음악 프로젝트 테크노트로닉 소속의 미 원(Me One)을 프로듀서로 영입, 장르의 전문성을 높였다. 벡이 얼터너티브 록 듀어 커브(Curve)의 딘 가르시아(Dean Garcia)와 합작한 ‘So what’은 전자 음향과 기타 연주가 강력한 사운드를 형성했다. 2004년 제46회 그래미에서 최우수 록 인스트루멘탈 퍼포먼스를 수상한 ‘Plan b’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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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닐 피어트. 영혼을 두드린 위대한 드러머

캐나다를 대표하는 록 밴드, 러시(Rush)의 드러머 닐 피어트가 뇌종양 합병증으로 현지 시각 1월 7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 1974년 베이스와 보컬의 게디 리(Geddy Lee), 기타리스트 알렉스 라이프슨(Alex Lifeson)과 함께 합을 맞춘 닐은 로큰롤 역사상 최고로 손꼽히는 드럼 연주와 깊은 철학의 가사로 독보적인 ‘러시 사운드’를 확립했다.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이 건재함에도 팬들은 닐 피어트의 죽음을 곧 러시의 끝으로 이해한다. 그는 드러머들의 드러머, 뮤지션들의 뮤지션이었다.

닐 피어트가 처음부터 러시의 멤버였던 것은 아니다. 1968년 알렉스 라이프슨이 결성한 러시의 오리지널 라인업은 제프 존스(베이스) – 알렉스 라이프슨 – 존 럿지(드럼)였다. 제프 존스는 곧바로 게디 리로 교체되었고, 원래 드럼 스틱을 잡고 있던 존 럿지는 1974년 당뇨병에 시달리며 드럼 스틱을 놓았다. 오디션장에서 닐 피어트를 처음 본 알렉스는 그가 탐탁지 않았지만, 더 후(The Who)의 키스 문과 닮은 연주 스타일을 인정하여 게디 리와 함께 닐을 밴드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러시는 레드 제플린의 아류라 해도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특출 나지 않은 팀이었다. 닐의 합류를 통해 무색무취한 하드 록 밴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동시 탑재하며 단숨에 전설의 반열에 도전하게 됐다. 첫째는 악기의 극한을 끌어내는 ‘연주의 미학’이요, 둘째는 거대한 세계와 소박한 일상을 모두 아우르는 ‘노랫말의 미학’이다.

UNITED STATES – DECEMBER 01: Photo of Neil PEART and RUSH; Neil Peart performing live onstage on All The World’s A Stage tour, (Photo by Fin Costello/Redferns)

18세의 어린 나이에 영국으로 건너가 1년 6개월간 활동하며 기라성 같은 블루스 – 하드록 밴드들의 강력한 연주를 습득한 닐은 합류 후 첫 앨범 1975년 < Fly By Night >부터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1977년 라이브 앨범 < All The World’s A Stage >의 ´Working man / Finding my way’를 들어보자. 불꽃같은 게디 리와 알렉스의 연주 아래 묵직한 킥과 섬세한 하이햇이 단단히 곡을 지탱하며 무아지경의 경지를 향해 질주한다.

1976년 장대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 < 2112 >로 야망을 드러낸 후 이듬해 1977년 < A Farewell To Kings >와 < Hemispheres >는 숨겨둔 재능의 전격 해방이다. 일반 드러머들의 3배에 달하는 드럼 세트에서 튜블러 벨즈, 퍼커션, 윈드차임, 글로켄슈필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리듬을 분해하는 ‘Xanadu’와 재즈적 터치 및 블루스의 셔플 리듬을 두 파트로 쪼개 놓은 ‘Cygnus X-1 Book I: The Voyage’는 의심할 바 없는 천재의 작품이다.

게디 리가 “< Fly By The Night > 앨범보다 녹음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라고 언급한 ‘La villa strangiato’는 러시 연주 미학의 정점. 너바나의 데이브 그롤에게 드럼 스틱을 잡게 한 시기의 작품들이다.

대표곡으로 손꼽히는 ‘The spirit of radio’와 ‘Tom sawyer’, ‘Limelight’에서도 닐 피어트의 연주는 확실히 동시대 드러머들과 다르다. 더 섬세하게 리듬을 쪼개고 더 정확하게 타격한다. 변화무쌍한 ‘Yyz’를 주도하는 것도 닐의 드럼이다. 존 보넘의 파워에 테크닉을 더하고 코지 파웰의 묵직함에 아름다움을 더한 인물이 닐 피어트다.

이런 경향은 닐이 1992년부터 프레디 그루버의 지도 아래 버디 리치, 진 크루파 등 위대한 재즈 드러머들의 연주에 감명받아 드럼 스틱 잡는 법을 매치드 그립에서 레귤러 그립으로 바꾸면서 더욱 선명해진다. 초심으로 돌아간 닐 피어트는 1994년과 1997년 버디 리치를 추모하는 < Burning for Buddy > 앨범을 발표하며 또 한 번의 진화를 멋지게 선언했다. 4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드럼 최강자’의 지위를 놓지 않았던 이유다.

‘노랫말의 미학’에서도 탁월했다. 1960년대나 지금이나 드러머가 밴드의 노랫말과 세계관을 설계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 닐 피어트는 그 어려운 일을 해왔다. 그것도 아주 깊고 넓으며, 독창적인 작법으로 해냈다. 가사를 쓰는데 큰 흥미가 없던 게디 리와 알렉스 라이프슨을 대체하여, 닐 피어트는 방대한 배경 지식과 문학적인 표현의 노랫말로 밴드의 메인 작사가 자리를 꿰찼다. 닐이 있었기에 단순 하드 록 밴드였던 러시는 프로그레시브 록 / 메탈을 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즐겼던 닐 피어트는 러시 합류 후 흥미로운 주제로 록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영국 체류 시 만났던 소설가이자 철학가인 아인 랜드(Ayn Rand)의 객관주의(Objectism) 사상이 큰 영향을 줬다. < Fly By The Night >의 ‘Anthem’과 20분에 달하는 SF송 ‘2112’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닐은 실험적인 소리와 대곡 지향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이 필요로 하는, 선명한 세계관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가사는 지적인 팬층과 일반 대중의 기호를 모두 자극한다. 공상과학소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미래를 그리는 그의 이야기는 40년이 지난 지금도 흥미롭다. ‘2112’와 비견할 수 있는 ‘Cygnus X-1 Book’이 대표적인 곡. 1편 ‘The voyage’로는 블랙홀에 끌어당겨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상세히 묘사하고 이어지는 ‘Hemisphers’에선 인간 좌뇌와 우뇌의 대결을 다룬다. 불사의 공간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주인공의 서사시 ‘Xanadu’ 또한 러시의 대곡 리스트를 장식한다.

동시에 닐은 블루 컬러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일상을 포착하여 그들로 하여금 러시의 노래를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했다. 라디오로 음악을 들었던 음악 팬들에게 즉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The spirit of radio’, 미국인들의 자동차 찬양을 정확히 포착한 ‘Red barchetta’, 소외받는 왕따들을 위한 ‘Subdivisions’ 등이 모두 닐 피어트의 작품이다. 러시의 ‘보편성’에 반한 충성스러운 팬들은 커리어 내내 평론가들에게 공격받고 방송국에서 외면당하던 밴드를 전폭 지지하며 팀을 지탱했다.

세계적으로 25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린 러시는 멤버 전원이 캐나다 훈장 2급 (OC)를 수여받았으며 2013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다. 그러나 팀의 승승장구와 달리 닐 피어트의 삶엔 비극이 많았다. 1996년 교통사고로 19살 딸을 잃었고 2년 후 폐암 투병 중이던 아내도 세상을 떠났다. 큰 충격을 받은 닐 피어트는 러시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여행을 떠나 북중미 대륙을 오토바이로 88,000km 횡단하여 ‘고스트 라이더’라는 책을 발표하며 심신을 위로했다.

2015년부터는 발목과 어깨 통증 악화로 음악 은퇴를 선언한 상태였다. 2018년엔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뇌종양을 선고받았다. 치료가 불가능한 악성 교모세포종이었다. 1년 반을 고통스럽게 버텼으나 기적은 없었다.

‘로큰롤의 진정한 거인'(데이브 그롤), ‘신의 손을 가진 사나이'(테일러 호킨스)라는 후배들의 헌사와 함께, 닐 피어트와 러시의 질주가 마무리됐다. 그는 영혼을 두드린 위대한 드러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