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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Wave’ (1967)

평가: 4.5/5

‘Antonio’s song’을 사랑하신 어머니는 “But sing the song“으로 시작되는 후렴구를 곧잘 따라부르셨다. 미국의 재즈 뮤지션 마이클 프랭스가 1977년 발표한 이 곡은 보사노바풍의  세련된 분위기로 국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자주 선곡되었다. 당시엔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에게 바친 헌사라는 곡 정보도 몰랐다.

보사노바(Bossa nova). 포르투갈어로 ‘새로운 감각’을 뜻하는 이 음악은 1950년대 말 브라질 삼바가 미국 쿨 재즈의 감성을 껴안아 탄생했다. 1927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태어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은 브라질의 기타리스트 루이스 본파와 함께 1959년 제12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 흑인 오르페 >의 사운드트랙을 감독했고, 스탄 게츠와 아스트루드 질베르토가 함께한 명반 < Getz/Gilberto >에 ‘Desafinado’와 ‘The girl from Ipanema’를 제공해 보사노바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비틀스의 <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도어즈의 데뷔 앨범 < The Doors > 등 무수한 록 명반이 쏟아졌던 1967년. 불혹에 접어든 남미의 거장은 성숙한 음악 세계로 넉 장의 수작을 쏟아냈다. 프랭크 시나트라와 협업한 명반 < Francis Albert Sinatra & Antonio Carlos Jobim >에서 미국의 스탠더드 곡을 보사노바로 재해석했고 ‘Mas que nada’로 유명한 동향의 후배 세르지오 멘데스와 봄바람처럼 살랑거리는 < Antonio Carlos Jobim & Sergio Mendes >을 내놓았다.

솔로 앨범도 두 장이 나왔다. 조빔의 달콤한 음성을 담은 < A Certain Mr. Jobim >은 전체적으로 덜 정제된 느낌과 일관적 톤을 가져갔다.  2개월 후에 발표한 < Wave >는 전작의 연주와 프로듀싱 측면에서 단점들을 보완해 보사노바의 걸작이 되었다.

진녹색 하늘과 푸른빛 바다를 배경으로 기린이 서 있는 초현실적 화풍의 앨범 커버는 미국 사진작가 피트 터너의 작품이다. 그는 조빔의 수작 < Tide >와 < Stone Flower >에서도 앨범의 첫인상을 책임졌다. 고고한 기린의 형상이 보사노바 영지에 선 거인 조빔과 겹쳐 보인다.

동명의 타이틀곡 ‘Wave’는 앨범의 압축판과 같다. 현악 세션에 라틴 리듬을 곁들인 이 곡은 부드러이 일렁이며 포말을 생성하는 리우 해변의 파도다. < 롤링스톤 >은 이 곡을 역대 최고의 브라질 노래 73위로 선정했고 조니 매시스, 사라 본 등 여러 뮤지션이 이 노래를 재해석했다. 또 다른 대표곡 ‘Triste’는 2분을 넘는 간결한 구성으로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빔의 오랜 파트너인 돔 움 로마오의 퍼커션 연주가 ‘Captain bacardi’에 탄력감을 부여했다.

앨범은 전작 < A Certain Mr. Jobim >과 달리 숙련된 미국의 재즈 연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목관악기 피콜로 3명, 첼로 4명 바이올린엔 무려 13명이 참여하는 등 사운드 편성과 악기 연주에 공들였다.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 론 카터는 마일즈 데이비스와 빌 에반스 등 재즈 거장의 앨범에 참여했고 ‘가장 많은 레코딩을 남긴 베이스 연주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다. 그는 ‘The red blouse’에서 리드미컬한 연주를 선보였다.

루이스 본파, 조앙 질베르토 등 1960년대 초중반 브라질 뮤지션들의 보사노바 작품은 덜 다듬은 원석 같았다. 조빔 또한 그런 시기를 거쳤으나 물오른 작·편곡 능력에 일급 연주자의 참여, 전설적 재즈 앨범을 배출한 밴 갤더 스튜디오의 기술력으로 기술과 예술성이 완벽한 작품을 창조했다. 평단의 찬사와 더불어 빌보드 재즈 앨범 차트 5위의 호성적을 기록했고 명곡 ‘Brazil’이 수록된 < Stone Flower >와 후기작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된다.

1960년대 이후의 미국 재즈, 일본 시부야 계와 시티팝 등 다양한 스타일이 보사노바의 우산 아래 있고 국내에서도 김현철, 조덕배가 보사노바풍의 음악을 보급했다. 브라질 중산 계층의 여유와 낭만을 상징했던 보사노바는 광고와 라운지 음악으로 널리 쓰이며 대중화를 이뤘다. 보사노바의 전 세계적 확산이 조빔의 원하는 바였는지 모르겠으나 재즈와 팝 등 저변이 굳건한 미국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여타 브라질 뮤지션과 차별된다. < Wave >는 보사노바가 순수했던 시절의 마지막 기록이다.

– 수록곡 –
1. Wave
2. The red blouse
3. Look to the sky
4. Batidinha
5. Triste
6. Mojave
7. Dialogo
8. Lamento
9. Antigua
10. Captain bacar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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쉭(Chic) ‘Risque’ (1979)

평가: 4.5/5

밴드 Chic. 이들의 이름이 익숙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들의 영향 아래 노출되지 않은 뮤지션은 거짓 조금 섞어 (거의) 없다. 1970년대 중후반 디스코가 발족한 이후 전 세계가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로 들썩이던 그때, 중심에는 밴드 쉭이 있었다. 평단과 대중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 Risque >를 통해 그룹의 가치와 음악적,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 봤다.

나일 로저스와 버나드 에드워즈
연주자가 밴드의 대표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쉭은 다르다. 그들의 대표곡 ‘Le freak’, ‘Good times’를 꺼내 들었을 때 단박에 ‘아, 이 곡!’ 하며 익숙한 선율을 떠올리겠지만 노래를 부른 보컬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쉭은 명백히 기타의 나일 로저스와 베이스의 버나드 에드워즈의 것이었다. 1996년 에드워즈가 폐렴으로 세상을 뜨기까지 이들의 생명은 계속해서 같이 이어졌다.

1970년대 중반 ‘디스코텍(discotheque, 지금의 클럽)’에서 이름을 딴 ‘디스코’가 세상에 내려앉았다. 반복되는 리듬과 이렇다 할 가사 없이 철저히 즐거움에 초점 맞춘 노래는 종종 가벼웠고 정확히는 가볍게 보였다. 도나 섬머, 비지스 등이 디스코 열풍을 점화했다. 로드 스튜어트는 ‘Da ya think I’m sexy?’로, 롤링 스톤스는 ‘Miss you’로 그 시류에 안착,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디스코에는 시대가 담겨있다. 춤추고 춤추며 잊고자 한 것은 베트남 전쟁의 상흔이다. 1975년 베트남전이 열었던 문을 잠그자 과거를 잊게 하는 밝은 곡들이 쏟아졌다. 그중에서도 쉭은 가장 정치적이었다. 밴드의 원 그룹명이 ‘알라 앤 더 나이프 월딩 펑크스(Allah & the Knife Wielding Punks)’ 즉, ‘알라신과 칼을 휘두르는 펑크족’일 만큼 그들은 뭔가 달랐다.

Good times
이들의 음악에는 은유적인 가사가, 그래서 시대적인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특히 음반의 첫 곡이자 대표곡 ‘Good times’는 당시 미국 경제 침체를 향한 시선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지금은 좋은 시간이며 운명을 바꿀 수 없으니 자이브와 지르박을 춥시다’라는 외침. 여기에는 잔혹하고 동시에 일리 있는 낙관이 넘실거린다.

8분의 러닝타임 동안 단 두 개의 코드만을 오가는 곡은 전작 < C’est Chic >(1978)의 ‘Le freak’ 이후 차트 정상에 오른 유일한 곡이다. 동시에 역사상 가장 많이 샘플링된 노래이기도 하다. 싱글이 공개된 1979년 슈가힐 갱의 ‘Rapper’s delight’에 샘플링된 것을 시작으로 그랜드 마스터 플래시의 ‘Adventures on the wheels of steel’, 블론디의 ‘Rapture’, 퀸의 ‘Another one bites the dust’까지 곡의 잔류가 흐른다.

리듬, 박자, 변화
또 하나 쉭의 강점은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리듬에 있다. 수록곡 ‘My feet keep dancing’을 들어보자. 여성과 남성의 보컬이 교차하며 합을 쌓다가 적소에 등장하는 박수 소리는 곡의 매력을 십분 살린다. 초기 히트곡 ‘Dance, dance, dance (yowsah, yowsah, yowsah)’와 같이 리듬을 부각하는 클랩비트의 등장. 이는 그룹이 쫀득한 리듬과 박자의 뽑아내고자 얼마나 골몰했는지를 증명한다.

앨범의 또 다른 히트곡 ‘My forbidden lover’ 역시 마찬가지. 펑키한 리듬감으로 무장해 작품의 무드를 잇는다. 이렇듯 이즈음 쉭의 음악은 팝 역사상 처음으로 리듬이 노래의 핵심 요소로 자리하는 데 일조했다. 1979년 ‘디스코 파괴의 밤(Disco Demolition Derby)’으로 짧고 강하게 끓어올랐던 디스코 붐이 내리막길로 접어들지만 이들의 음악은 계속해서 영향력을 뽐냈다. ‘랩’과의 조우. 강렬한 리듬감 위에 놓인 빽빽한 가사들은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 흑인 음악 신을 시작으로 점차 세상을 정복했다.

‘디스코’로 연결하다!
나일 로저스와 버나드 에드워즈가 쏘아 올린 축포는 1979년을 ‘디스코의 시대’로 만들었다. 실제로 외국의 한 평론가는 이 음반을 디스코 시대를 정의한 음반으로 뽑기도 한다. 이렇게 등장한 나일 로저스는 이후 데이비드 보위의 ‘Let’s dance’, 듀란듀란의 ‘The reflex’ 등을 프로듀싱하며 음악적 역량을 펼쳤다. 특히 마돈나의 두 번째 정규음반 < Like A Virgin >을 매만지며 그는 ‘디스코풍’ 음악의 매력을 계속해서 사회와 연결했다.

디스코의 흔적은 어디에나 있다. 완연히 주류로 올라온 랩과 힙합에도, 하우스 등의 전자음에도 디스코가 묻어있다. 그러니 쉭을 듣는다는 것은 그 음악의 뿌리를 듣는다는 것과 같다. 오늘날 나일 로저스를 쉭의 멤버보다는 2013년 다프트 펑크와 함께한 ‘Get lucky’로 기억할 가능성이 크다. 아무렴 어쩌랴. 그렇게 디스코는 그리고 쉭, 나일 로저스는 디스코를 이어가고 있다.

– 수록곡 –
1. Good times
2. A warm summernight
3. My feet keep dancing
4. My forbidden lover
5. Can’t stand to love you
6. Will you cry
7. What about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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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예 웨스트(Kanye West) ‘The College Dropout’ (2021)

평가: 5/5

한 시대를 이끌어갈 천재의 등장

대중이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하던 2000년대 초, 카니예 웨스트는 칼을 갈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프로 활동을 시작해 로카펠라의 스태프 프로듀서로서 신생 레이블의 도약을 도모하며 업계의 제일가는 작곡가로 성장한 그이지만, 그 이상을 꿈꿨다. 제이 지의 < The Blueprint >, 앨리샤 키스의 ‘You don’t know my name’ 등 많은 히트작을 낳았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야심은 무대 뒤가 아닌 비트 위, 직접 가사를 뱉는 데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 힙합 신은 카니예 웨스트에게 래퍼 자리를 내어줄 만큼 분위기가 자비롭지 못했다. 거칠고 마초적인 래퍼가 공고하게 주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제이 지가 있었고, 피프티 센트를 비롯한 갱스터 랩이 인기였다. 그에 반해 카니예의 배경을 보자. 대학교수인 어머니와 미술 대학까지 진학한 나름의 학력을 가진 중산층이지 않은가. 안정적인 환경이 래퍼가 되는 데에는 제동을 거는 법이다. 모두가 그에게 비트만 따내려 했지 로커스(Rawkus Records)도, 캐피톨(Capitol Records)도 래퍼로 그를 원하지 않은 이유다.

신예의 도전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인 로커펠라와 그 수장 데이먼 대시의 역할이 중추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 이 데뷔작의 제작은 결정적인 한 사건에 기인한다. 2002년 가을, 카니예 웨스트는 늦은 새벽 작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마주 오는 차량과 정면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거의 그를 죽일 뻔한 사고로 턱과 다리에 심한 골절을 입고 입원 신세를 졌다. 본의 아니게 맞이한 시간과 자유. 스물다섯 열정 많은 청년은 이를 인생의 ‘터닝 포인트’쯤으로 여긴 듯하다. 사고 후 2주 만에 선공개 싱글 ‘Through the wire’ 작업에 나섰고, 이는 힙합 역사를 영원히 뒤바꾸어 놓을 앨범의 신호탄이 됐다.

< The College Dropout >의 파급력은 여러모로 막강했다. 우선, ‘칩멍크 소울(chipmunk soul)’ 프로덕션을 대중화하는 데에 기여한 앨범이다. 칩멍크 소울이란 알앤비&소울 보컬을 샘플링해 음정과 속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고 해체, 재배열을 거쳐 비트에 녹여내는 작법을 말한다. 저스트 블레이즈와 함께 제이 지의 < Blueprint >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그의 이 주특기가 본작에서야말로 제대로 꽃피었다는 게 중론이다. 1990년대 중반 우탱 클랜의 프로듀서 르자가 방법을 제시했다면 카니예는 그걸 일정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수록곡 열두 곡에 사용된 열네 개의 샘플에서 공동작곡 두 곡을 제외하면 모두 셀프 프로듀싱. 래퍼로서의 출사표이지만, 이를 아우르는 프로듀로서의 압도적인 역량이 우선이다.

진가는 당시 힙합 신의 주된 내용을 크게 벗어난 랩에서도 두드러졌다. 16세기 삽화 책에 영감받은 배경에 앙증맞은 곰 인형으로 마감질한 커버와 줄무늬 폴로 셔츠를 빼입고 나온 외형처럼 앨범은 곧 힙합 관습의 타파를 의미했다. 향락과 폭력성의 철저한 배제! 그는 여기서 ‘갭 매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Spaceship’) 평범한 대학 중퇴생 신분을 감추지 않는다. 그 보통의 시선을 당당히 드러내며 인종, 교육, 종교 등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담았다. 이는 나아가 후대 힙합이 포용하는 캐릭터성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졸업식에 쓸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선생님의 부탁 ‘Intro’를 돈벌이에 찌든 또래의 넋두리 ‘We don’t care’로 맞받아치는 순간 작품에 대한 예고는 끝난 것이다. 예사롭지만 이 뼛속까지 삐딱한 젊은이의 날 선 비판과 유머는 로린 힐 ‘Mystery of iniquity’를 흥겹게 가져온 ‘All falls down’에서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를 꼬집고, ‘Two words’에서는 사랑도 브레이크도 없는 무자비한 조국(‘United States, no love, no brakes’)을 쥐어뜯는다. ‘모두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지만 부자들이 가장 자존감이 낮’고 ‘마약 거래로 백인들만 주머니를 두둑이 채우’는(‘All falls down’) 사회는 청년의 눈에 그저 조롱거리에 불과하다.

결정타는 ‘Jesus walks’다. ‘예수만 빼고 다 이야기해도 된대'(‘They say you can rap about anything except for Jesus’)라 미디어의 획일화를 비판하고 종교적 가치관을 축약하는 곡이다. 총과 마약으로 득실대던 힙합 신에 신실한 찬송가다. 그는 아무래도 ‘쿨’해 보이는 것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었던 듯하다. ‘Never let me down’에서 민권 운동 시대를 싸운 선조를 향해 경의를 표하고, 매우 유기적인 배치로 학력주의를 비꼰 여섯 개의 스킷 트랙으로 이 모든 전개가 실제로 대학을 중퇴한 그의 시간적 배경을 뒤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Family business’가 따뜻한 가족 이야기로 화자와 청자 사이의 묘한 유대감을 만드는 것은 덤이다.

그러나 이 걸작의 가치는 단 한 순간, ‘Through the wire’를 거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교통사고 일화를 세밀하게 풀어놓는 노래 속 그의 랩은 실제로 ‘턱에 철사를 단’ 채 녹음해 발음마저 어눌하다. 놀라운 수준의 입체감, 실재감이다. 샤카 칸의 히트곡 ‘Through the fire’를 샘플링해 치밀하게 피치와 위치를 매만진 비트는 힙합 역사상 가장 멋진 칩멍크 프로덕션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비극을 승리로 맞바꾸는 챔피언'(‘But I’m a champion, so I turned tragedy to triumph’)의 자세로 음악을 향한 열의를 강변하고 있는 이 데뷔곡을 카니예 커리어 사상 최고의 싱글이라 칭하고 싶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올랐고 히트 싱글 ‘Slow jamz'(1위), ‘All falls down'(7위), ‘Jesus walks'(13위)를 배출했으며 판매고는 400만 장을 넘겼다. 평단의 호응은 그 이상이었다. < 스핀 >과 < NME > 등 다수 매체가 입을 모아 음반을 그해 베스트 앨범 리스트에 상위권으로 안착시켰고 그래미는 최우수 랩 앨범과 최우수 랩 노래 등 3개 부문 상을 안겼다. 롤링스톤이 작년 개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장’에서는 74위에 오르며 후대에 끼친 파급력을 인정받았다. ‘All falls down’에 피쳐링한 실리나 존슨과 로카펠라 A&R 키암보 조슈아(Kyambo Joshua)는 ‘제이 콜과 켄드릭 라마 등 리리시즘 래퍼에게 큰 영향을 준 클래식’이라 평가했다.

극적인 인생 서사나 거친 자기과시 없이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자기에 대한 기록과 사회 참여, 눈앞에 펼친 현재의 담담하고도 날카로운 저술. < The College Dropout >은 힙합 신에서 관습에 섣불리 매몰되거나 음악적 자아와 실제 자아가 충돌해 ‘가짜’가 되고 마는 뮤지션이 범람할수록 그 위력이 거대해질 앨범이다. 확실한 주무기, 선구적인 문법으로 옹골차게 메꾼 히트 넘버만으로도 마냥 즐겁고 또 놀랍다. 21세기 힙합을 선도할 천재는 이토록 영민하고도 화려한 등장으로 그가 일으킬 파장을 예고했다.

– 수록곡 –
1. Intro (Skit)
2. We don’t care 
3. Graduation day
4. All falls down (Feat. Syleena Johnson) 
5. I’ll fly away
6. Spaceship (Feat. GLC, Consequence) 
7. Jesus walks 
8. Never let me down (Feat. Jay-Z, J. Ivy) 
9. Get em high (Feat. Talib Kweli, Common)
10. Workout plan (Skit)
11. The new workout plan
12. Slow jamz (Feat. Twista, Jamie Foxx) 
13. Breathe in breathe out (Feat. Ludacris)
14. School spirit (Skit 1)
15. School spirit
16. School spirit (Skit 2) 
17. Lil Jimmy (Skit)
18. Two words (Feat. Mos Def, Freeway, The Boys Choir of Harlem) 
19. Through the wire 
20. Family business 
21. Last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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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탈리카 ‘Master Of Puppets’ (1986)

상업적 팝 메탈을 강타한 후련한 탱크 사운드

“그때 사람들이 들었던 음악은 스틱스나 REO 스피드웨건, 뭐 그런 것들이었어. 우리가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대부분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전에 못 들어본 거잖아?’라고들 했지. 왜 그랬겠어? 이런 음악은 안 팔린다고 메이저 레코드사들이 내지 않으니까 접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라스 울리히(Lars Ulrich)와 메탈리카는 야들야들한 록과 메탈이 판치던 당시 음악계의 풍토를 ‘능멸’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선 엄청난 볼륨의 폭발음이라야 했다. 그들은 80년대 메탈의 새 물결 이른바 NWOBHM에 기초해 70년대 펑크의 파괴력과 연주의 단순한 배킹(backing) 요소를 흡수한 새로운 틀의 음악을 주조해냈다. ‘세게 때린다’는 뜻의 스래시 메탈(thrash metal)이었다. 라스 울리히는 자신들의 83년 첫 앨범 <싹 죽여버려>(Kill’em All)를 ‘스래시 메탈 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앨범’이라고 자랑했다.

Fans Vote "Master of Puppets" Best Metallica Song in Band-Endorsed Poll |  Consequence of Sound

<마스터 오브 퍼피츠>는 본 조비의 ‘팝메탈의 흥행대작’ <슬리퍼리 웬 웨트>가 나온 85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결과는 뻔해 보였지만 팬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좋았다. 미국 차트 29위, 영국에선 41위에 오르는 준히트를 기록했다. 팝 메탈과 같은 ‘투우장의 황소’가 아닌 ‘전시의 탱크’ 사운드를 열망하고 있는 메탈 마니아들이 보낸 성원이었다.

메탈리카는 이 앨범의 스래시 탱크 사운드로 얼마 후 록과 메탈 음악계 최고 반열에 올랐다. 사실 84년 발표한 그들의 전작 <번개를 타라>(Ride The Lightning)에서 과격한 스래시는 이미 형식미가 구현된 바 있다. 그런데 <마스터 오브 퍼피츠> 앨범이 그것보다 우대되는 이유는 스래시 메탈의 원시성에 ‘예술성’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앨범의 수록 곡들에는 스래시의 전형적인 폭음(爆音)이 질펀하다. 그러나 그 단계에 그치지 않고 파괴적 사운드에 ‘대오정렬’을 꾀하고 질서 있는 곡조를 확립함으로써 전무후무한 ‘아트 메탈’을 창조해낸 것이다.

이 음반은 LP 시절 국내에서는 불행히도 ‘정신요양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home, sanitarium) ‘처분할 영웅들'(Disposable heroes) ‘데미지 주식회사'(Damage Inc) 등 3곡이 금지 판정을 받아 팬들의 불만을 샀다. 누락된 곡을 대신해 영국 록 그룹 버지(Budge)의 ‘브리드팬'(Breedfan)과 모터헤드의 ‘왕자'(The Prince)가 메탈리카 버전으로 실렸다.

Metallica Archives | RVA Mag

라스 울리히는 앨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메탈리카에게는 어쩔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곡을 짧게 하려고 무진 노력을 해도 도무지 짧은 곡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곡의 스타일이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보자면 1집이나 2집에 비해 더욱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라고 할 대곡 지향적 구성은 물론이고 ‘주름진’ 스래시가 약간 다림질된 듯 펴졌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최고의 스피드를 자랑하는 첫곡 ‘배터리'(Battery)는 커크 해밋(Kirk Hammett)과 제임스 헤트필드(James Hatfield)의 공격적인 기타 피킹과 라스 울리히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드러밍이 압권이다. 이 곡은 동시에 메탈리카 공연문화의 핵을 이루는 ‘헤드뱅잉’ 열풍을 몰고왔다(98년 4월 내한 공연 당시 이 곡이 앙코르되었을 때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는 ‘헤드뱅어’들에 의해 공연장의 다수 의자가 부서졌다)

타이틀 곡 ‘마스트 오브 퍼피츠’는 메탈리카 최고의 걸작이라고 할만큼 기승전결이 뚜렷했다. 제임스 헤트필드의 ‘보컬 카리스마’를 확인할 수 있는 이 곡은 ‘스래시의 찬가’로 꼽힌다. ‘정신요양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멤버들이 일컫는 ‘메탈리카식 발라드’의 미학이 꽃을 피우는 곡으로 자신은 멀쩡하다고 여기지만 주위에서는 정신병자로 인식해 병원에 갇히게 된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뤘다.

미드템포로 시작되어 점점 속도감을 붙여 가는 ‘처분할 영웅들’은 전쟁터에 끌려간 한 소년에 대한 스토리이며 ‘나병환자의 메시아'(Leper messiah) 역시 사회에대한 항변으로 텔레비전이 주도하는 주류의 폭압적 문화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긴장감과 서정성이 동거하는 곡 ‘오리온'(Orion)에서 베이스주자 클리프 버튼(Cliff Burton)은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무겁고 차분한 진행 속에서 절정의 테크닉을 과시하고 있다. 그는 86년 투어도중 버스 전복사고로 사망했고 그 자리에 제이슨 뉴스테드(Jason Newsted)가 들어왔다.

이 앨범은 메탈리카를 메탈을 넘어 록 전체의 신화적인 존재로 비상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룹은 스래시의 틀에 자신들이 함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 때 스래시의 창조자라는 자부심을 피력했던 라스 울리히는 이 음반을 만들고 난 후 스래시란 말은 이제 그룹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확실히 우린 스피드 에너지 그리고 혐오감 제공이란 측면에서 스래시의 원조였다. 하지만 항상 우린 그러한 한정된 틀을 넘어서 왔다. 메탈리카는 항상 진보한다.”

진정한 메탈 음악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로 만든 그룹명과 달리 그들은 90년 거의 ‘메탈 발라드집’을 방불케 한 앨범 <메탈리카>에 이어 5년 공백을 깨고 발표한 <로드>(Load)로는 당시의 록 조류인 얼터너티브 록 리프를 과감히 수용, 스래시 마니아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나중에는 “현재 바하 브람스를 비롯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고싶은 바대로 음악을 하는 자유를 위해 팬들의 스래시 소아병(小兒病)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팬들이 자신들로부터 스래시만을 원하게 만든 이 작품을 과감하게 역사 속에 안치(安置)시켜버렸다. 이 앨범을 만든 후 진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메탈리카가 조정한 목표는 바로 ‘<마스터 오브 퍼피츠>로부터의 해방’이었다. (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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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이센스 ‘The Anecdote’ 5년 후

E SENS

5년 전을 돌이켜보면 한국 힙합은 양적으로 팽창해나가고 있었으나 내부에서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래퍼들을 방송의 도구로 사용한다는 싸늘한 시선으로 출발한 엠넷의 < 쇼미더머니 >는 예상과 달리 빠르게 힙합 신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 과정에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한 일리네어 레코즈, 스윙스 등은 한국에서 상상할 수 없던 ‘힙합 슈퍼스타’의 칭호를 거머쥐었고, 아티스트들은 엔터테인먼트의 달콤한 유혹과 방송 권력에 굴하지 않겠다는 지조의 두 갈래 길에 섰다. 

후자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나 대개는 전자가 승리했다. 2000년대 언더그라운드에서 “수백 배로 증대된 시장에서 힙합 앨범의 판매고는 팔백억에 달해”(화나, ‘그날이 오면’ 중)라 염원하던 래퍼들은 미디어의 수혜 아래 힙합을 유행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들 역시 열악한 환경에서 가사를 쓰고 텅 빈 공연장에서 랩을 뱉으며 치열하게 내일을 향해 싸워가던 이들이었다. 진정성의 가치, 음악에 대한 열의의 잣대 모두 모호하게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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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쯤 이센스는 오래 몸담았던 소속사 아메바컬처로부터 독립해 솔로 앨범을 준비했다. 그는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2000년대 초부터 활동을 시작한 경력자이자 언더그라운드의 기대주를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슈퍼 루키였고, 동료 사이먼 도미닉(Simon Dominic)과 함께한 슈프림팀(Supreme Team) 활동을 통해 잠시나마 언더그라운드 출신 대중음악 스타로 인기도 끌었다. 그러나 그는 2013년 ‘컨트롤 대란’이라 불리는 거대한 논쟁 속 ‘메이저 래퍼가 신의 4분의 3을 채웠네. 한국 힙합은 반죽음.’이라 선언하며 홀연히 주류를 떠났다. 

비스츠 앤 네이티브스, 바나(BANA)가 만들어지고 < The Anecdote >에 대한 이야기가 꾸준히 흘러나왔다. ‘I’m good’ 등 선공개 싱글부터 “한국의 < Illmatic >”이라는 딥플로우 및 관계자들의 극찬까지 앨범은 발매 전부터 범상치 않은 작품으로 예고되었다. ‘힙합 신 혹은 랩 게임에서 벗어난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아티스트의 고백은 앞서 ‘컨트롤 디스전’으로 불거진 메이저와 마이너의 충돌, 빠르게 상업화되어가는 시장에 상처 받은 팬들의 심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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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Anecdote >는 정말로 이방인의 기록이었다. 덴마크 프로듀서 다니엘 ‘오비’ 클라인(Daniel ‘Obi’ Klein)이 담당한 1990년대 이스트코스트 스타일의 비트 위에 창작가의 단편을 가감 없이 거칠게 고백해나갔다. 이미 랩으로는 적수가 없었지만 이 앨범에서 이센스의 랩은 특히 야수와 같았다. 단호하면서도 유연하게 본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풀어냈다. ’Writer’s block’의 고통부터 ‘삐끗’과 ‘Tick tock’의 비판 의식, ‘A-g-e’의 철학까지 앨범은 이센스, 인간 강민호의 일화를 통해 견고한 서사를 형성했다. 

특히 ‘The anecdote’의 회고로부터 ‘Back in time’의 성장기를 연결해 정체성을 결정짓는 이센스의 문법은 새로운 유형의 거리두기였다. ‘The anecdote’를 지배하는 비애와 향수가 그때까지 비주류, 언더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감정이었다면 ‘Back in time’의 담담한 고백은 주류가 아니더라도, 독립의 길을 걷더라도 단단한 자아로 결론지어질 수 있다는 묘한 자신감이 담겨있었다. 이 자전적인 회고야말로 앨범의 가장 주요한 저항의 메시지, 세상에 치켜든 가운뎃손가락이었다. 

여기에 한국 가요 역사상 최초의 ‘옥중 앨범’이라는 타이틀이 앨범을 수작에서 명반으로 끌어올렸다. 2014년 말 발매 예정이었던 작품은 이센스가 두 번째 대마초 흡연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으며 이듬해인 2015년 8월 27일 뒤늦게 공개됐다. 아티스트의 사회적 패배는 독립, 저항, 관조, 비관 등 연전연패하던 언더그라운드의 감정을 증폭한 제일의 요소였다. 앨범에 쏟아진 찬사와 상업적 성과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아티스트의 현실은 미디어 아래 주목받고 그 세를 키워가던 힙합 신의 이면과 정확히 일치했다.

이센스의 메시지는 뭇 대중을 관통하는 보편의 경험이 아니었지만 빠른 주류화와 상업화에 반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교시 같은 작품이 됐다. 그의 저항은 “양분 없는 황량한 땅”에 비료를 뿌리고 나름의 건강한 땅을 확보하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확보한 영역에서 젊은 아티스트들은 더욱 과격하고 진솔한 메시지를 풀어놓았고 베테랑들은 자극을 통해 본인을 돌아볼 수 있었다. < The Anecdote >는 < 쇼미더머니 >와 엔터테인먼트와 균형을 이루는 일종의 대안 공간이자 구심점이 되었다. 이방인의 언어, 실패의 언어로도 성공이 가능함을 증명했다. 

발매 5주년을 맞은 < The Anecdote >를 돌아보며 현재의 시장을 바라본다. 방송과 뉴미디어의 지원 아래 성공한 래퍼들과 아티스트들은 더 이상 상업성이라는 굴레에 자신의 음악을 희생할 필요가 없다. 양적으로 성장한 한국 힙합 신은 대중의 관심과 구매력을 확보했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적인 채널을 형성해 목소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던져 담대한 질문을 던지고 흐름을 바꿀만한 결정적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수작은 많으나 명작은 드물다. 유행은 잠시지만 이름을 남기려면 기성에 덤벼야 한다. 이센스 ‘일화’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