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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 ‘Endless Summer Vacation'(2023)

평가: 3/5

변신에는 유통기한이 따른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명제에 마일리 사이러스가 내린 결론은 자극이 둔감해질 즘 가면을 바꿔 기한을 갱신하는 방식이었다. 비록 배우자에게 이혼을 요구받고, 하루아침에 산불로 집이 전소한 데다, 준비한 프로젝트가 팬데믹으로 일순간에 무산될지라도 경극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겹친 악재를 헤쳐 나갈 타개책 역시 변신밖에 없다는 듯 더더욱 레트로에 천착하고 록의 격정성에 심취하며 새로운 페르소나인 ‘강인한 인조 심장(Plastic Hearts)’을 빚어내는 데 몰두할 뿐이었다.

3년 만의 복귀작 < Endless Summer Vacation >이 어딘가 이질적인 이유다. 말괄량이 팝스타, 극성 파티 중독자, 레트로 마니아. 수많은 장르 세계를 경유하며 전투적으로 수식어를 해금하던 행보와 달리 그 어떠한 스티커조차 붙이기 힘들 만큼 매끈하고 평범한 본연 자체의 팝을 들고나왔다. 완전한 ‘마일리 사이러스’ 파업이다. 기약 없이 불현듯 시작된 여름휴가, 이제 손끝에서 입력되는 목적지는 불모의 미개척지가 아닌 지친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줄 한적한 휴양지다.

해리 스타일스의 < Harry’s House >의 공동 작업자 키드 하푼과 타일러 존슨을 초빙해 ‘해방’에 대한 단서를 구했다. < Bangerz >의 오랜 조력자 마이크 윌과 현 애인인 음악가 막스 모란도 같은 주변인의 도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친근한 이들과 떠나는 로드트립. 덤덤한 감정선을 고수하는 ‘Flowers’에서 필요한 짐만을 간소하게 싸는 모습이, 잔향의 뿌연 안개 사이 강직한 드럼에 의지하며 전진하는 ‘Jaded’에서 눈물을 겨우 참으며 문을 박차고 나가는 광경이 그려진다. 따스하고 정적인 작풍 아래 낙관적 태도를 암시하는 ‘Rose colored lenses’는 앨범의 주제와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다. 희망을 얻은 주인공이 고속도로로 접어드는 오프닝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오전’과 ‘오후’를 떠올리며 만들었다는 인터뷰 발언처럼, 초반부는 정돈된 사운드를 중심으로 관계에 대한 회고와 자립 의지를 설파하는 작업이다. 이내 그라임스를 닮은 전자적 색채를 포용하며 흥을 돋우는 중간 지점의 ‘Handstand’를 기점으로 작품은 만취 상태의 캠프파이어 현장으로 바뀐다. 몽롱한 신시사이저가 사방에서 흘러나오고 적나라한 비유와 애정 표현이 스스럼없이 오간다. 애시드 하우스를 적극 표방한 댄스 넘버 ‘River’와 역동적인 멜로디 속 범성애 시그널을 교묘히 흘리는 ‘Violet chemistry’는 회한을 흘려보내고 오롯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즐기겠다는 의지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그 이질감에는 무언가 다른 내막이 자리 잡는다. 겉보기에는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을 순수한 힐링 테라피처럼 보이지만, 문득 이 ‘내려놓음’조차 설계가 아닐까 싶을 만큼 인공적으로 주입된 연출과 서사가 원인이다. 차라리 빠르게 분위기를 반전하며 장을 나누는 구간은 이해 가능한 범주다. 다만 자기애와 인생 예찬을 통해 해방을 만끽하던 와중 난데없이 목청을 긁으며 분노하고(‘Muddy feet’) 혹시 내가 길을 잃고 좌초된 건지 의구하다(‘Island’) 마지막으로 강인한 어머니처럼 되고 싶다는 은은한 고백을 표하며(‘Wonder woman’) 급하게 당위를 부여하려는 일련의 전개는 생경함을 낳는다.

결국 < Endless Summer Vacation >는 명쾌한 쉼표보다도 느슨하게 이어진 물결표에 가깝다. 모든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쌓아 올린 면면 중 그 어디에도 속하기를 거부했지만, 동시에 관성을 버리지 못한 탓에 이 또한 무수한 가면의 일부로 다가오고 만다. 건재한 퍼포먼스부터 곡의 평균 퀄리티도 대체로 우수하기에 미련이 남는다. 단순 캐릭터뿐만 아니라 설득력 있는 메시지와 완성도라는 부담에서도 과감히 탈피할 수 있는, 해독을 거친 < Bangerz >를 기대한다 해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의 마일리는 보편과 평범에 안주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지 않나.

– 수록곡 –
1. Flowers
2. Jaded
3. Rose colored lenses
4. Thousand miles (Feat. Brandi Carlile)

5. You
6. Handstand
7. River
8. Violet chemistry
9. Muddy feet (Feat. Sia)
10. Wildcard
11. Island
12. Wonder woman
13. Flowers (De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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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 Single Single

마일리 사이러스(Miley Cyrus) ‘Prisoner (Feat. Dua Lipa)’ (2020)

평가: 3/5

디즈니 채널에서 방송된 청소년 시트콤 < 한나 몬타나 >에서 얻은 하이틴 스타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마일리 사이러스의 시도는 점점 격해진다. 파격적인 외모와 패션, 기행을 거쳐 이제는 뮤직비디오에서 예민한 동성애 코드까지 건드린다. 컨트리 가수인 아버지 빌리 레이 사이러스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올리비아 뉴튼 존의 ‘Physical’을 참고한 주요 멜로디 부분에서는 미국 록 밴드 키스가 1983년에 발표한 ‘Lick it up’도 살짝 겹치며 전체적인 사운드는 1980년대 초반의 뉴웨이브/신스팝의 그림자 안에서 유영한다. ‘Prisoner’의 시침, 분침, 그리고 초침 모두는 1980년대로 귀속된다. 두아 리파의 보컬에만 오토튠을 사용한 것과는 달리 마일리 사이러스는 자신의 음색을 거칠게 가져가며 존재감을 조금 더 부각한다. 두아 리파와 협업을 하지만 내 노래라는 것을 강조한 전략이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자신감이 자존감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레트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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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특별 기획 ‘미국’] 5. Intersectionality: 여러겹의 정체성이 교차하는 음악

억압받는 약자에 대한 담론 중에서 페미니즘은 오늘의 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 중 하나다. 그 의미나 정의에 대한 합의는 요원하지만, 일단 사람의 경험이나 정체성을 읽어낼 때 성별에 더 무게를 두고 해석하는 담론은 널리 퍼져있다. 뮤지션들 역시 자아를 음악에 담아내기에, 이들의 작품과 페르소나를 이해할 때도 페미니즘은 유용한 인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의 정체성은 입체적이기에, 성별이라는 단일차원에서 바라보면 반드시 놓치는 부분이 생긴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을 이해하면, 음악에 담긴 이야기들과 이를 둘러싼 논란들의 맥락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미투 운동이 세상을 휩쓴 후,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브랜드를 획득한 인물들이 몇 명 있다. 타임지가 미투 운동을 조명해 ‘침묵을 깬 사람들’을 2017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때 표지에 얼굴을 올린 테일러 스위프트가 그중 하나다. 2013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VMA) 무대에서 로빈 시크(Robin Thicke)와의 무대에서 파격적인 트월킹을 선보이며 전통적인 여성상에 대한 반론을 내놓은 마일리 사이러스 역시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열렬한 페미니스트’라고 인터뷰했다.

팝스타의 반열이 아니더라도,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은 8년 만에 내놓은 새 앨범 < Fetch The Bolt Cutters >에서 모두 ‘절단기를 들고 와’서 직접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내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는 2019년 발매한 후 그 내용이 ‘부드러운 페미니즘'(soft feminism)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말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어떤 사람이나 발언이 ‘페미니스트’인지에 대한 대략적인 이미지는 이미 대중문화 속에 퍼져있다. 예컨대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 ‘걸크러쉬’에서 조금 진화한 여성의 모습이다. 테일러 스위프트, 마일리 사이러스, 피오나 애플, 라나 델 레이 같은 뮤지션들이 페미니스트 아이콘으로 조명받는 이유 역시 이들이 그 이미지에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들은 여성성 이외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모두 포크 음악과 관련 있는 백인이라는 점이다.

이들 여성의 목소리가 의미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이들이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반화하기엔 너무 많은 맥락이 지워진다. 예를 들어, 마일리 사이러스가 트월킹을 하면서 내놓은 ‘얌전하지 않은 여성’의 이미지는, 영미권에서 백인 여성들이 항상 가정적이고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받아온 역사의 연장선이다. 반면 이세벨 스테레오타입(Jezebel stereotype), 옐로우 피버(yellow fever) 등의 시선으로 언제나 극한의 성적 대상화를 당해온 흑인이나 동양계 여성의 경험을 마일리 사이러스가 제대로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라나 델 레이가 ‘부드러운 페미니즘’을 옹호했을 때 논란이 일어난 것 역시 그가 이런 맥락을 무시하는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 Norman Fucking Rockwell! >이 학대를 미화한다는 비판에 대해 그는 비욘세, 도자 캣(Doja Cat), 카밀라 카베요 등 유색인종 뮤지션들을 언급하며 이들이 ‘섹시’를 앞세워 차트 1위를 했고, 자신도 13년간 여성의 입장에 대해 노래해 왔는데 왜 자기만 욕을 먹어야 하냐는 반응이었다. 정체성의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대해 무감각한 언사다.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사실 법조계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다. 그 계기는 1976년 자동차 제조사 제너럴 모터스(GM)가 흑인 여성에게 채용상 불이익을 준 일인데, 흑인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법도 이를 막을 만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GM이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별을 바라볼 때 모든 흑인, 모든 여성이 그룹별로 같은 방식으로 차별받는다고 생각한다면, 흑인 여성을 포함한 유색인종 여성의 경험들은 지워질 수밖에 없다. 형태주의에서 말하는, 전체는 그 부분의 합 이상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페미니즘이 있기에, 모든 여성 뮤지션의 메시지가 저마다 의미 있다.

인종이나 사회, 경제적 배경 등을 고려하고 여성 뮤지션들의 음악을 보면 다채로운 페미니즘을 볼 수 있다. ‘Run the world (Girls)’가 흑인이자 걸어 다니는 대기업인 비욘세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곡이 실제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과연 정말 세상을 주도하는 것은 여성인가, 아니면 비욘세인가?). 미츠키(Mitski)가 강렬한 기타 톤을 앞세워 외롭다고 소리치는 모습 역시 동양인 여성들은 얌전하고 가부장에게 복종하는 이미지가 있기에 훨씬 강렬하게 다가온다. 성 소수자자 Z세대인 킹 프린세스(King Princess)가 부르는 사랑 노래는 화자의 입장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뻔하게 들린다.

‘페미니스트 뮤지션’의 전형으로 다시 돌아와 보면, 이 단어의 실체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오히려 여성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접근법일 수도 있겠다. 여성성 하나로 정의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여성성 하나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당연히 많은 부분이 지워진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논리를 전개했지만, 상호교차성은 정체성 그 자체에 대한 인식의 틀이다. 그 어떤 개인도 절대적인 약자, 혹은 강자일 수 없다. 이분법을 벗어나 음악에 담긴 사람을 온전히 직시했을 때 그의 이야기가 더 또렷하게 들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