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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Splash of the Year 2022

Splash of the Year : 한 해를 조각내 음악 신의 주목해 볼 사건을 뽑는 이즘 내 연례행사.

명쾌하게 정리하기 힘든 1년이 지나갔다. 코로나19를 딛고 일어난 국내 문화계가 서서히 부활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동시에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음악은 계속되고 삶은 흘러가니까.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한 스플래시와 함께 2022년 가요계를 돌아본다.

배신 또는 오해, 표절 논란
시작은 유희열이었다. ‘생활음악’ 프로젝트로 발표한 ‘아주 사적인 밤’이 류이치 사카모토의 ‘Aqua’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관련 의혹이 빠른 속도로 불거졌다. 그가 작곡한 성시경의 ‘Happy birthday to you’, < 무한도전 > 가요제 프로젝트 곡인 ‘Please don’t go my girl’ 등도 연이어 도마 위에 올랐다. 이후에도 이무진 등 여러 뮤지션에게 표절 의혹이 지속적으로 제기되며 2022년 상반기는 여러모로 시끄러웠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레퍼런스’나 정확하게 판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반론도 곳곳에서 등장했고, 논란을 조회수 삼으려는 각종 유튜브 채널이 다소 억지 프레임을 씌우는 현상도 나타났다. 예술의 특성상 문제를 깔끔하게 종결하긴 힘든 노릇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표절’이라는 키워드가 모두의 의식 속에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드디어 돌아온 페스티벌과 공연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았던 공연 문화가 서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언택트 공연 등 대체 수단이 등장했지만 현장의 맛을 대신할 수는 없는 법. 서울 재즈 페스티벌부터 인천 펜타포트, 부산 록 페스티벌 등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고, 빌리 아일리시와 잭 화이트를 비롯해 여러 굵직한 뮤지션의 공연도 이뤄졌다. 풀리지 않은 규제로 마스크의 답답함은 있었으나 열정과 사랑으로 극복한 순간이었다. 아직은 완전한 정상화를 위한 예열과 시동 단계일 테지만, 억눌렀던 마음만큼 열기도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트렌드의 중심이 된 1990년대
201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1980년대 신스팝과 디스코, 펑크(Funk) 열풍은 2020년대 본격적인 폭발을 통해 국내에도 유입되었다. 변화를 촉발한 것은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팝 펑크(Pop Punk)다. 2021년 블링크 182의 드러머 트래비스 바커를 주축으로 영미권의 머신 건 켈리, 올리비아 로드리고 등이 이끈 장르의 재부흥을 K팝 또한 재빠르게 수용했다.

태연의 ‘Can’t control myself’와 최예나의 ‘Smiley’, 우즈(WOODZ)의 ‘난 너 없이’ 등이 강렬한 기타 사운드와 더불어 이모(Emo) 감성을 일부 벤치마킹한 비주얼을 내세웠다. 정점은 단연 (여자)아이들의 ‘Tomboy’. 앨라니스 모리셋 등 록 여성 뮤지션의 정신을 받아들여 매혹적인 팝 선율, 거침없는 펑크(Punk)의 태도를 모두 끌어안았다. 음원에는 삭제된 욕설까지 함께 소리치던 대학 축제 풍경은 화끈함의 극치였다.

가지는 다른 곳으로도 뻗어나갔다. 아이브의 ‘After like’는 댄스 음악 장르인 하우스 리듬을 기반 삼았고, 뉴진스의 ‘Attention’과 ‘Cookie’는 비슷한 시기의 힙합과 알앤비 장르를 채택했다. 큰 유행이 된 Y2K 콘셉트를 여러 팀이 전격 채택한 것은 덤. 윤하의 ‘사건이 지평선’이 역주행한 원인도 비슷하다. 일본 애니메이션 오프닝을 연상케 하는 아련한 분위기가 2000년대 초 TV 만화 채널을 추억하는 젊은 층의 향수를 자극한 것이다. 1990년대생의 문화가 차츰 향수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있는 현상을 음악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마인드 셋, 거장의 귀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적어도 음악에서는 그렇다. 베테랑 뮤지션들이 돌아오면서 오랜 세월 쌓은 관록만큼이나 식지 않은 에너지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먼저 꾸준한 바이닐과 시티팝 유행에 힘입어 5월에는 빛과 소금이 26년 만에 새 정규 앨범 < Here We Go >를 발표했다. ‘공유’의 시대를 거슬러 음악을 ‘소유’하려는 자연적인 수요와 맞닿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송골매 또한 ‘열망’ 콘서트로 전국을 누비며 기성세대 못지않게 젊은 세대까지 관객석으로 초대했다. 7월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11월 인천 공연까지 성행하며 곳곳에서 환호성이 이어졌다.

방송 업계에서도 컴백은 이어졌다. KBS의 < 불후의 명곡 >이 2012년 은퇴 선언을 했던 패티김을 초청해 3부에 걸쳐 특집을 꾸렸고, 그 또한 무대에 올랐다. 이미자 또한 TV조선의 러브콜을 받아 데뷔 63주년 기념 특별 공연을 개최했고, MBN의 트로트 프로그램에서는 심수봉을 심사위원으로 캐스팅하기도 했다.

그리고 역시 ‘가왕’은 ‘가왕’. 조용필이 스무 번째 정규 앨범의 예고편으로 신곡 ‘찰나’와 ‘세렝게티처럼’을 선보인 데에 이어 KSPO 돔에서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압도적인 규모의 콘서트를 개최했다. 전혀 늙지 않은 음악으로 돌아온 그, ‘영원한 오빠’ 수식어는 2020년대에도 공고했다. ‘물리적 나이보다 마인드 셋이 중요’해진 오늘날의 새로운 가치를 느껴본다. 어찌 보면 키워드는 ‘귀환’이 아니라 ‘소통’이다.

여성 아이돌 르네상스
엠넷 < 프로듀스 > 시리즈의 성공 이후 여러 그룹이 팀 단위보다는 개별 멤버 위주의 팬덤 구축과 세계화에 힘을 서서히 쏟기 시작했다. 쉽게 읽히지 않는 ‘세계관’과 가끔 난해하기도 한 콘셉트에 여성 아이돌이 예전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기는 힘들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흐름을 깨고 돌아온 2022년 걸그룹 르네상스는 그래서 더욱 반갑다.

‘Love dive’와 ‘After like’를 연속 히트시킨 아이브가 선두 주자로 올라선 가운데 같은 아이즈원 파생 그룹 르세라핌은 데뷔 초 여러 논란을 딛고 ‘Antifragile’을 흥행에 성공시키며 재빠르게 입지를 굳혔다. 남다른 방식으로 첫선을 보인 뉴진스 또한 ‘Attention’과 ‘Hype boy’로 동시에 돌풍을 일으키며 대세 자리를 놓고 전투를 벌였다. 스테이씨의 ‘Run 2 u’, 있지의 ‘Sneakers’, (여자)아이들의 ‘Tomboy’와 ‘Nxde’ 등 신세대 걸그룹의 치열한 각축전으로 바쁜 1년이었다.

선배들도 만만치 않았다. 레드벨벳이 ‘Feel my rhythm’으로 클래식 샘플링 트렌드를 이끌며 여전한 저력을 보여준 한편 블랙핑크는 미국과 영국 앨범 차트 1위에 모두 올라 글로벌 시장 점령을 이어 나갔다. 트와이스의 나연은 숏폼 플랫폼에서 안무 챌린지를 적극 활용해 첫 솔로 싱글 ‘Pop!’을 화려하게 터뜨렸다. ‘Forever 1’으로 15주년을 풍성하게 기념했던 소녀시대와 7년 만에 다시 모인 카라까지, 신예들과 익숙한 이름의 공존에 2022년 K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이에 반해 타겟층이 일반 대중에서 구매력이 높은 팬덤으로 많이 기울어진 남성 아이돌은 상대적으로 싱글 차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각종 콘텐츠의 범람으로 소비자층이 세분화됨에 따라 ‘국민가수’나 ‘국민가요’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고, 애초에 보이그룹의 목표가 공연이나 음반으로 옮겨간 지도 오래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보이그룹의 목소리가 예전처럼 거리에서 울려 퍼지던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꺾이지 않는 장기 지배, 힙합 정권 40년
얼마 전, 요즘 초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이 걸그룹 안무를 따라 한다면 남학생들은 지코의 ‘새삥’ 챌린지에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국내 음악 시장에서 힙합이 이제 하나의 별종이 아니라 굳건한 주요 장르가 되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올해 무려 열한 번째 시즌을 방영 중인 < 쇼미더머니 >와 여러 밴드가 나선 경연 프로그램 < 그레이트 서울 인베이전 >의 시청률 차이만 봐도 명확하다. 해외 못지않게 국내에서도 주도권은 힙합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처음 알려진 이후로 서태지와 아이들을 타고 본격 유입을 겪은 힙합/알앤비는 40여 년 동안 꾸준히 자리를 넓히며 세력을 키웠다. 비오의 ‘Love me’, 빅 나티의 ‘정이라고 하자’, 그리고 크러쉬의 ‘Rush hour’ 등 차트에는 아직도 여러 히트곡이 포진해 있다. 록 페스티벌의 부활 사이 함께 돌아온 대구 힙합 페스티벌까지, 어느덧 익숙해진 힙합 강국의 면모다.

BTS 병역 논란
엄밀히 말하면 ‘가요’계 사건은 아니지만, 방탄소년단의 병역 문제가 올 한 해 계속해서 화두에 올랐다. 국위선양의 공로를 높게 사 병역 면제를 논하는 입장과 형평성을 거론하며 반대하는 측의 논쟁이 활발히 벌어지며 일반 대중에게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유승준과 MC몽 등 남성 뮤지션의 입대 문제로 여러 차례 논란을 겪었기에 어쩔 수 없이 떠오른 문제였다.

사안은 결국 방탄소년단의 입대로 끝을 맺었다. 맏형인 진이 12월 13일 최전방인 연천 지역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것. 같은 날 솔로곡의 가사가 도마 위에 올랐던 멤버 슈가는 어깨 수술을 근거로 공익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멤버들의 계획은 아직 미정이나 그룹 활동의 중단 이후 여러 멤버가 솔로 음반을 발표하면서 개인 커리어를 확장해가는 중이다.

다른 예술/체육 분야의 병역 특례와 엮이며 제도 자체의 존폐 여부까지 나왔던 주제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풀리지 않는 숙제를 끄집어냈다. 성별과 세대 갈등까지 연결되는 두 글자, ‘군대’. 그러나 병역이 아직까지 ‘의무’인 국가에서 이를 일종의 ‘형벌’의 차원으로 보는 시선도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다. < 100분 토론 > 임진모 평론가의 말처럼, ‘대중에게서 기억되고,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이 가장 큰 특혜’ 아닐까.

사각지대 속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아티스트 착취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최근 뉴스에서 떠오른 헤드라인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먼저 11인조 보이그룹 오메가엑스의 갑질 피해 소식이었다. 소속사 대표에게 멤버들이 폭행당했다는 사실이 해외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졌고, 이후 온갖 피해 내역에 대해 직접 입을 열었다. 성희롱부터 시작해 코로나19 감염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무대를 섰다는 사실, 온갖 폭언과 협박 내역이 밝혀졌다.

‘내 여자라니까’로 데뷔해 한때 ‘국민 남동생’이라는 수식어를 얻었던 이승기 또한 소속사 후크 엔터테인먼트에게서 음원 수익을 전혀 정산받지 못한 사실이 언론에 드러났다. ‘적자 가수’라는 비하 발언을 했던 대표는 현재 수익 횡령 의혹까지 불거졌다. 상황이 채 식기도 전에 이번에는 한창 여러 방송에서 활약 중인 가수 츄가 소속 그룹 이달의 소녀에서 강제로 퇴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큰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중립적인 언어로 계약 해지 사실을 밝혔던 여러 선례에 비하면 ‘제명’과 같은 언어를 사용한 블록베리 엔터테인먼트의 글은 다소 악의적으로 보인다. 소속사의 입장문이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반박되며 나머지 이달의 소녀 멤버들이 계약 해지 소송에 들어갔다는 소문도 퍼진 사이, 1월로 예정된 그룹의 컴백 소식이 갑작스레 공개되어 혼란을 야기했다.

한때 범람했던 가요계 계약 문제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지만 음악과 뮤지션이 돈의 논리에 의해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착잡함을 안긴다. 정녕 음악이 순수한 존재로 남을 수는 없을까, 바란다면 너무 비현실적인 것일까. 다가오는 2023년에는 조금 더 깨끗하고 공정한 음악 산업 소식이 많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이미지 편집: 정다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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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Red Velvet) ‘The ReVe Festival 2022 – Feel My Rhythm'(2022)

평가: 2.5/5

2019년 말 < ‘The ReVe Festival’ Finale >의 성공 이후 자체 이슈로 홍역을 치른 레드벨벳은 지난 해 < Queendom >으로 정면 돌파를 감행한다. 허나 재도약의 발판으로 꺼내든 카드는 팀의 존속 여부에 대한 불안을 잠재우는 데 그칠 뿐 왕관 탈환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독특한 콘셉트와 실험적인 사운드가 결핍된 평범한 왕국은 다채롭게 쌓아 올린 디스코그래피 속 미미한 존재감만을 남겼다.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한번 페스티벌을 개최한 이들은 풍부한 상상력을 안고 과거의 영광을 꿈꾼다. 먼지 쌓인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관객을 반기는 건 EDM 트랩 비트 위로 흐르는 클래식 선율. ‘G 선상의 아리아’를 차용한 ‘Feel my rhythm’은 수백 년 전 명화들을 오마주한 뮤직비디오까지 선보이며 시공간을 넘나든다.

바흐의 원곡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타이틀 곡 전면에 내세운 시도는 상반된 시각을 낳는다. 우선 무난한 작법의 틀 안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분투했음은 분명하다. 동시에 나머지 요소들을 전부 빨아들이는 블랙홀로도 작용한다. 곡을 관통하는 파격 샘플링 앞에 촘촘히 쌓아 올린 하모니는 잠시 이목을 끌다가도 다시금 주도권을 내주고 만다.

축제의 실상은 뜨거운 오뉴월의 정열보다 푸르른 봄의 피크닉에 가깝다. 색소폰 터치가 돋보이는 댄스 팝 넘버 ‘Rainbow halo’는 신록의 계절을, AOR(Adult-oriented rock)풍의 ‘Bamboleo’는 광활한 평원을 그려낸다. 다소 건조하게 다가오는 알앤비 넘버 ‘Beg for me’와 ‘Good, bad, ugly’ 역시 동일한 계절감을 벗어나지 않고 일관성을 갖춘다.

‘In my dreams’는 페스티벌의 대미를 수려하게 장식한다. 음역대의 높낮이를 부드럽게 매만진 목소리의 조화가 공간감을 형성하고 꿈결처럼 포근한 여운을 남긴다. 새롭게 제시한 낯선 세계의 대한 거리감은 고유한 보컬 시너지로 일부 상쇄된다.

레드벨벳은 야심 차게 승부수를 띄웠다. 3년 전 끝맺었던 놀이공원 테마를 다시 끌어오되 서양 고전의 풍경을 바탕 삼아 설계도를 그려 새 방법론과 지속가능성 사이 절충안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양날의 검이 되어 개성을 도려낸 접붙이기는 내실보다도 단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할 근사한 간판에 목적이 있는지 의문점을 남긴다. 카니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멤버들의 자체 콘텐츠가 주최 측의 부푼 홍보 전략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

-수록곡-
1. Feel my rhythm
2. Rainbow halo 
3. Beg for me
4. Bamboleo
5. Good, bad, ugly
6. In my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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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aespa) ‘Savage’ (2021)

평가: 3.5/5

차세대 SMP의 이상향

SM 엔터테인먼트의 역사는 실재하는 우주의 변천사와 평행을 달린다. 수많은 스타들이 탄생하고 소멸했지만 그들의 파편은 지금까지도 가요계를 수놓고 있다. 허공에 흩뿌려진 유산은 팽창의 자양분이 되어 2020년 마침내 일원화된 신세계 SMCU(SM Culture Universe)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선배들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태어난 거대 세계관의 주인공이 바로 걸그룹 에스파다.

팀 이름부터 방향성은 명확했다. 인간 멤버들이 자신의 데이터에 기반한 아바타 ‘아이(æ)’를 만나 경험하게 될 메타버스 스토리. 미래 기술과 음악의 접목이란 사실만으로 등장 전부터 이목이 쏠렸다. 낯익은 이미지로 점철된 데뷔곡 ‘Black mamba’가 그 기대에 미치진 못했으나 올해 손목을 꺾는 디귿 춤과 쫀득한 발음을 곁들인 ‘Next level’이 인기를 끌며 에스파는 단숨에 대세로 우뚝 섰다. 산업 간의 융합으로 호기심을 자아내긴 했지만 가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힌 건 결국 음악이었다.

유행의 본질을 파악하고 돌아온 이들의 음조는 더욱 맹렬해졌다. 강렬한 비트와 찢어 늘인 신시사이저 그리고 극적인 고음 애드리브까지, ‘Savage’의 기틀은 보아와 동방신기가 프로듀서 유영진과 함께 주도했던 2000년대 중반 SMP다. 물론 그 시절에만 충실한 것은 아니다. 후렴구는 엔시티 127의 대표곡 ‘Cherry bomb’처럼 짧은 호흡으로 받아치며 중독성을 배가하고, 브릿지는 엑소의 알앤비 발라드 ‘What is love’를 들여와 보컬 기량을 발산한다. 더불어 둔탁한 타격의 틈엔 영국 일렉트로닉 레이블 PC 뮤직의 시그니처 샘플들을 분절시켜 입체감을 높인다. 기획사의 노하우를 집약하고 하이퍼 팝까지 이식한 K팝 트랙은 혁신적 관점으로 시대를 매끈하게 앞서간다.

뒤이은 ‘I’ll make you cry’까지 야성적인 자세로 일관한 데 비해 후반부는 톤을 낮추며 캐주얼한 면모를 드러낸다. 몽롱한 멜로디의 ‘자각몽’은 이달의 소녀나 레드벨벳의 드림 팝이 스치고, 자존감이 충만한 ‘Yeppi yeppi’는 있지의 ‘달라달라’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긴다. 비교적 친숙한 질감이 자칫 독보적인 매력에 대한 반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채로운 전자음과 목소리의 블렌딩은 음악적 친밀감을 제고하며 타이틀곡의 접근법이 낯선 이들마저 새로운 차원으로 빨아들인다.

음악 외의 콘텐츠도 흡인력을 강화한다. 어린이 만화에 나올 법한 ‘ænergy’의 대사나 ‘Savage’ 뮤직비디오 속 2D 애니메이션은 키치한 즐길 거리다. 막연한 연출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훗날을 위한 면밀한 설계로 짐작된다. 현실의 ‘나’와 가상의 또 다른 자아 ‘아이’는 익명에 가려진 시스템의 양면이고 둘 사이를 갈라 놓으려는 빌런 ‘블랙 맘바’는 딥페이크를 비롯한 기술 범죄의 초상이다. 허구의 이야기 속 투쟁은 디지털 사회의 실태고 이를 조영하는 비주류 매체는 유머 섞인 지적질을 날린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서브컬처의 상승으로 근래 보기 드문 아이돌식 풍자를 완성했다.

팬데믹을 기점으로 메타버스는 점점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여전히 흐릿하다. 엉성한 3D 모델링과 각종 표절 논란만 봐도 생소한 개념은 그저 키워드 마케팅에 불과해 보인다. 그럼에도 네 명의 소녀와 네 개의 홀로그램이 그려갈 문화 행보는 근시안적 태도의 불손함을 상쇄한다. 탄탄한 가창력과 과거의 질료로 구축한 세련된 사운드 그리고 다각적인 고발과 비판의 메시지. < Savage >는 미디어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며 가장 이상적인 SMP를 주조했다. 시대가 공증할 수 있는 ‘Iconic’한 존재, 선구자의 발걸음에 신세기의 성패가 달렸다.

– 수록곡 –
1. ænergy
2. Savage
3. I’ll make you cry
4. Yeppi yeppi
5. Iconic

6. 자각몽 (Lucid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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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벨벳 ‘Queendom’ (2021)

평가: 2.5/5

오랜 기다림이었다. 레드벨벳은 2019년 연말 ‘Psycho’로 최고의 히트곡을 만들어냈으나 거듭된 난항을 겪으며 1년 8개월이라는 긴 공백을 보냈다. 하지만 본디 그들의 계절이라 할 수 있는 여름을 복귀 시점으로 택하며 ‘빨간 맛’, ‘Power up’, ‘음파음파’로 이어져 왔던 흥행 가도를 잇고자 한다. < Queendom >은 어느덧 데뷔 7주년을 맞은 레드벨벳의 컴백을 화려하게 알리는 축제의 의미를 표현함과 동시에 타이틀곡을 중심으로 여름의 향취를 품으며 익숙한 반가움을 더했다.

‘레드’와 ‘벨벳’으로 구분되는 변화무쌍한 콘셉트와 독특한 사운드의 흐름이 지금까지의 레드벨벳을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다면 ‘Queendom’은 철저하게 곡이 함의하는 메시지와 감성에 초점을 둔다. ‘다시 한번 시작해볼까’ 같은 식의 가사는 현재의 레드벨벳이 맞이한 국면과 동일한 맥락을 취하며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다. 웬디의 시원한 고음 코러스를 필두로 멤버들의 하모니가 벅차오르는 감성을 더하며 곡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만든다.

가사에 담긴 의미와 음악의 매력적인 요인은 별개로 작용한다. 늦여름과 어울리는 무난한 댄스 팝 장르의 곡이지만 레드벨벳이 7년간 시도해 온 다채로운 사운드와 과감한 실험들과는 가장 동떨어져 있다. 그룹 특유의 청량함과 ‘Ladida-do Ba-badida’라는 주문을 외는 캐치한 후렴구로 강조점을 두었지만 모호한 콘셉트의 곡과 시너지를 이루지 않고, 멜로디 전반에 깔린 밋밋한 인상 또한 상쇄시키지 못한다.

유니크한 콘셉트와 그에 적합한 수록곡들로 탄탄한 유기성을 구현했던 기존 앨범들에 반해 이번 앨범의 수록곡들은 무난한 만듦새를 취했으나 인상적인 트랙이 부재하다. 저물어가는 여름날의 잔상을 흩뿌린 발라드 ‘다시, 여름’과 톡톡 튀는 신시사이저 리듬이 돋보인 ‘Knock on wood’는 그룹의 익숙한 스타일과 맞닿아 있어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에스닉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다이내믹한 변주를 그린 ‘Pose’, 아이린과 슬기의 유닛을 떠올리게 하며 매혹을 떨군 ‘Better be’만이 임팩트를 남기며 아쉬움을 달랜다.

< Queendom >은 약 2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레드벨벳을 그리워했을 대중에게 반갑게 다가가는 음반으로서는 성공적이나 어떠한 콘셉트를 소화하더라도 늘 주체적인 개성을 발휘하던 그룹의 기량이 충분히 발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음악에 대한 기대감을 상실케 한다. 모두가 자신의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앞세워 힘찬 응원가의 분위기를 형성했지만 정작 앨범의 주인공이어야 할 이들의 정체성은 흐릿하다. 무던한 완성도와 안전함을 추구한 작품은 레드벨벳이 공고히 쌓아온 독특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사운드를 모두 담기 벅차다.

– 수록곡 –
1. Queendom
2. Pose
3. Knock on wood
4. Better be
5. Pushin’ n pullin’
6. 다시, 여름 (Hello, suns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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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KPOP Album

조이 ‘안녕’ (2021)

평가: 3.5/5

레드벨벳의 활동 공백기가 길어지는 사이 슬기와 아이린이 유닛을 선보였고 메인보컬 웬디의 독립 활동에 이어 조이가 솔로 앨범을 발표했다. 신곡을 발매했던 다른 멤버들과 달리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에 인기를 끌었던 노래들을 재해석한 이 음반에는 박혜경의 ‘안녕’, 해이의 ‘Je t’aime’, 애즈원의 ‘Day by day’를 포함한 모두 6곡이 수록되어 있다. 데뷔 후 드라마 <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 >를 통해 발표한 더 클래식의 ‘여우야’와 < 슬기로운 의사생활 > 삽입곡인 베이시스 원곡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등 옛 향수를 부르는 곡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던 경험에 기반해 리메이크 앨범을 기획했다.  

이 결과물은 세계적으로 레트로 음악이 유행하는 흐름과 아티스트의 음악적 성향을 잘 파악했다. 조이의 청아한 음색과 어울리는 곡의 선택과 원곡의 발매 시기를 반영해 각기 다른 하이틴 감성을 콘셉트화한 에스엠 엔터테인먼트의 기획력이 돋보인다. 원곡 가수의 부드러운 보컬과 조이의 투명한 목소리가 비슷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장점이 두드러진다.

켄지, 모노트리의 황현, 박문치 등 정상급 작곡가들이 참여해 원곡을 해치지 않고 사랑스러운 조이의 감성을 가미한 편곡은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다. 희망찬 가사와 시원한 가창으로 사랑받았던 박혜경의 ‘안녕’은 모던 록의 느낌이 강했지만 새로운 버전의 ‘안녕’은 경쾌한 브라스 연주가 더해져 청량한 분위기의 여름노래로 재탄생했다. 2001년에 해이가 부른 ‘Je t’aime’를 리메이크한 버전은 조이의 상큼한 이미지와 가장 어울린다. 오리지널의 싱그러움은 유지하되 피아노 연주와 스트링 선율을 얹어 사랑에 빠진 소녀의 설렘을 이야기하는 가사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잡아냈다.  

< 안녕 >은 케이팝의 시작점인 1990년대와 2000년대의 노래를 좋아하고 감정 전달력이 강점인 조이의 취향과 역량을 반영한 음반이다. 성량이 풍부하진 않지만 기교 없이 담백하게 부르는 보컬로 섬세한 표현력을 필요로 하는 추억의 노래를 무리 없이 소화한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아닌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작품.

– 수록곡 –
1. 안녕
2. Je t’aime
3. Day by day

4. 좋을텐데 (Feat.폴킴)
5. Happy birthday to you
6. 그럴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