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9 한지윤 PD

2021년 올해 개설 20주년을 맞아 이즘은 지난해부터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아홉 번째 순서는 BBS 불교방송의 한지윤 프로듀서입니다.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음악가와 음악 ‘가’. 나는 후자에 속했다. 음치라고 불리만큼 노래를 잘 부르지도 또 외우지도 못했다. 음계는 물론이고 콩나물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음악점수는 항상 ‘수우미양가’ 중에 ‘가’를 찍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까지 라디오 PD라는 직업을 갖고 음악프로그램을 연출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주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친구와의 우정, 사랑, 공부, 진로 그리고 부모님과의 갈등. 누구나 겪는 혼란했던 그 시절, 레코드가게 앞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를 들었다. 무언가 귀에 쏙 들어오는 내레이션 가사와 음률. 바로 가게에 들어가서 조용필의 8집 앨범 테이프를 샀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앨범이 아닌가 싶다.

집에 있던 커다란 라디오 데크에 테이프를 넣고 노래를 들었다. 심지어 이 노래만 계속 이어 듣고 싶어서 공테이프를 사서 복사(불법복제?)한 뒤 계속 틀고, 듣고, 외우고, 따라 불렀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에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사를 다 외운 노래, 심지어 반주 없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혼자 감정이입을 하며 노래를 따라 부를 때 머리에 떠오르는 모습은 고민했던 대상들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KBS ‘동물의 왕국’ 영상만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서 음악‘가’에서 음악‘양’으로 한 단계 성숙시켰던 노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Pale blue eyes’ 영화 < 접속 > OST
한석규와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 1997년 늦은 여름에 개봉했다. 주말 한 낮, 나는 종로 서울극장 맞은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멀리 창문 밖 극장 간판에 그려진 주연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며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로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유명하다니까, 여자친구가 원하니까 그냥 보러 온 것이다.

영화 속 장면, 심야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한석규PD가 LP로 틀어 준 노래 벨벳(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순간 ‘나도 저런 PD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우연의 일치일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이런 결심을 했다. ‘나도 멋있는 음악 PD가 되고 싶다, 한석규처럼.’

매년 봄, 가을 개편을 앞두고 데스크에서는 관례처럼 일대일 면담을 통해 “어떤 프로그램을 맡고 싶니?”라고 묻는다. 물론 형식적인 질문이고 절대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포교프로그램 분야를 담당하던 나 역시 형식적인 답변을 한다. “음악프로그램 하고 싶어요” 그리고 5년 뒤 마침내 포교제작팀에서 교양제작팀으로 발령을 받아 처음 음악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나도 한석규처럼 될 수 있겠구나.’

당시 음악 PD로의 꿈을 갖게 해 준 노래, 1960년대 지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불렀던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Pale blue eyes’. 내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해준 노래다.

당타이손(Dang Thai Son)의 피아노 연주  < 쇼팽의 녹턴 Op.9-1 >
처음으로 교양제작팀으로 발령을 받고 맡게 된 음악프로그램 < 차 한 잔의 선율 >. ‘아차! 클래식 프로그램이네. 그것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프로그램. 내가 망치겠구나’ 먼저 겁부터 났다. 항상 음악점수 ‘가’인 내가 ‘클래식이라니’. 먼저 다가온 단어는 ‘절망’이었다.

선배의 조언을 따라 교보문고로 직행해서 클래식 관련 서적을 잔뜩 사왔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몰랐다.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음반실에 들어가서 구박을 받으면서 클래식 관련 CD를 분류된 종류별로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책상 위 CD 플레이어에 집어넣고 하나씩 들었다. 그냥 무조건 들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독어는 고등학교 때 했던 것이라서 읽을 수는 있는데 그 외는 한 마디로 무식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큐시트에 어떻게 적고 음악적으로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으로 금방 검색해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원고 타이핑용으로 공용으로 쓰는 286컴퓨터 2대가 전부였던 시대였다.

다른 선배들에게 묻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무능해 보일까 봐 겁이 났다. 음악의 흐름과 진행자, 원고, 분위기에 따른 선곡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큐시트 작성하기에 급급했다.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무조건 클래식들을 들었다. 어떻게 발음하고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는 먼저 사전을 찾다가 도저히 안 되면, 예전 진행을 했던 아나운서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갔다.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급급했던 선곡이 이제 나름대로 연출이 가능해졌다. 음반실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클래식 CD장들 사이를 이제는 눈감고 다닐 수 있게 됐다. 더욱 신기했던 일은 관현악이나 협주곡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각각의 악기 소리가 분리되어서 귀에 들렸다. 성악곡 역시 노래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손이 간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타이손(Dang Thai Son)의 피아노 연주곡 < 쇼팽의 녹턴 Op.9-1 >.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피아노곡이 내 마음에 큰 울림이 됐던 것이 이 연주곡이 처음이었다. 녹턴을 다른 사람의 피아노 연주로 들어봤다. 같은 곡이지만 달랐다. ‘아,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 영혼에 따라 곡이 다르게 들리는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곡과 선곡의 흐름에 더욱 집중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타이손의 피아노 연주. 나에게 처음 음감의 세계를 열어준 큰 선물이었다.

김광석 ‘일어나’
1999년 가을. 개편으로 새롭게 맡은 프로그램은 < 살며 생각하며 >다. 청소년 대상으로 상담을 하던 프로그램이지만 기획 의도가 달라졌다. IMF 시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공감하는 프로그램이다.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된 심야프로그램. 컴퓨터가 없던 시대, 문자도 없던 시대. 유일하게 열려 있는 소통 창구는 전화였다.

4개의 전화번호를 열고 시인 김사인씨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7080음악을 중심으로 전화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 참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프로그램이었다.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과 헤어져서 도망 중인 사람들, 큰 병으로 시한부 생명을 이어가며 유일한 낙이 라디오라는 청취자. 수 없이 많이 분들이 사연을 전달해 주고, 또 격려의 전화를 주고, 또 노래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공감하는 시간이다.

신혼 초 젊었던 시기였던 나에게는 남의 얘기 같았지만, 그분들의 마음이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에 전달되어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역할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힘든 심야 생방송이었지만 큰 사명감을 가졌다.

방송국도 IMF를 넘기기 어려웠다. 제작비 축소로 1년 동안 진행된 <살며 생각하며>의 마지막 방송을 5일 앞두고 아쉬움에 모든 코너를 없애고 시작부터 전화 연결을 받았다.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말에 전국에서 전화로 상담 신청이 폭주했다. 4개의 전화번호는 폭주했다. 연결된 청취자 분들마다 한 결 같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격려를 해주셨다.

이 프로그램 때문에 ‘자살 결심을 포기 한 분’, ‘부모님과 화해한 분’, ‘경찰에 자수한 분’, ‘자식을 위해 이혼을 포기한 분’, ‘새롭게 막노동부터 다시 시작한 분’. 셀 수 없는 사연들을 담은 전화벨소리가 하루에 200여 통이나 울렸다.

드디어 금요일, 마지막 방송이었다. 마지막으로 전화 연결된 청취자가 < 살며 생각하며 >를 통해 ‘포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고 새 출발 다짐했다는 사연을 전달하며 신청한 노래다. 바로 김광석의 ‘일어나’        

영화 < 인생은 아름다워 > OST  ‘Life is beautiful / La vita è bella’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주연의 영화 < 인생은 아름다워 >. 1997년 개봉된 이 영화를 한 참 지난 뒤 주말 TV를 통해 보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죽음의 길로 들어서며 웃음을 지었던 그 모습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개편을 통해 새로 맡게 된 프로그램이 < 영화음악실 >이었다. 영화의 전문가도, 또 영화음악에 무지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당시 개편 직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담당 부장에게 출장을 신청했다. 회사의 어려운 사정상 안 될 것 같았는데 쉽게 허락을 받았다.

“PD는 책상에만 있는 직업이 아니야, 자주 콧바람을 쐐야지. 다녀와” 당시 그 선배의 말 한마디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후 내가 부장이 되어서도 항상 후배들 교육할 때 강조했던 대목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 열심히 돌아다닐 때 생기는 것이고 그래야 창의력이 생긴다. 그래야 PD가 되는 거지.

처음 가보는 영화인들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 곧 영화음악실 담당 PD가 된다는 명분하에 그 속에 끼어든 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느낌이 들었지만 굳굳하게 행사들을 쫒아 다니며 영화를 관람했다. 각 나라의 감독들이 그들의 처지와 상황과 이념, 관점들을 영화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에서 영화음악과 진행자의 줄거리 소개 외에 영상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작가하고 상의 끝에 새로운 코너 구성을 마쳤다. 비디오가게에서 영화를 빌려서 중요 장면들을 플레이했다. 라인을 연결해서 그 영상들의 대화나 효과음, 배경 음악들을 오디오로 저장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비록 무음 때문에 방송사고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해도 스토리를 전달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라디오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시그널 음악을 골랐다. 무언가 기존과 다른 < 영화음악실 >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청취자들께 전달하고 싶었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기존의 시그널 음악을 바꾸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때 선택한 < 영화음악실 > 시그널 음악, 바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OST ‘Life is beautiful’이다.

윤태규 ‘My way’
< 활력충전 2시 4시 >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했다. 침체 된 방송국 프로그램들을 대표하고 청취자들의 문자를 통해 많은 참여를 유도하게 만드는 목표를 가진 전략 프로그램이었다. 과정은 큰 성공이었다. 하루 100개에 불과했던 문자참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1일 2시 생방송 동안 6,400여 개의 청취자 문자참여’를 기록했다. 사장님이 고급 양주 한 병을 스텝들에게 내주면서 회식 때 쓰라고 칭찬도 했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는 법. 새로 취임한 사장의 인사로 인해 보직을 잃은 선배와 술 한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둘이 2차로 노래방을 갔을 때 그 선배가 윤태규의 ‘My way’를 처절하게 불렀다. 평소 나도 좋아서 그냥 틀었던 노래. 하지만 선배의 노래는 비장했다.

그리고 난 뒤 5년이 지나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이 노래를 들었다. 평소 내가 자주 틀었던 노래였지만 이날은 왠지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사 하나하나가 귀에 박혔다. 그리고 예전 그 선배의 노래가 왜 비장했는지 비로써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그 선배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읊조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 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혀 보는 거야’

킹 크림슨  ‘Epitaph’
1969년도에서 1970년대 초까지 세계각처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담은 노래 ‘묘비명’. 1969년에 태어난 나에게 이 노래는 그냥 귀에 익은 올드 팝송에 불과했다. 그냥 지나가다가 레코드가게에서, 혹은 카페에서, 라디오에서, 제목도 모르고 누가 불렀는지도 모르던 팝송이다. 단지 느낌이 비장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이었다.

< 음악의 마을 >을 담당하게 되었다. 팝송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의 신청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시간 신청곡이 올라오는 모니터를 보면서 검색하고, 선곡하고, 흐름을 타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어느 날 바쁘게 생방송을 진행하던 그 순간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Epitaph’이 신청곡으로 올라왔다. 무려 9분에 가까운 노래 길이. 선곡 전 모니터링을 하는 순간 망설여졌다. 귀에 익어서 아는 팝송이고 가사 내용도 이미 알던 내용이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51분40초가 리얼타임인 < 음악의 마을 >. 이 노래를 틀면 마지막 코너는 할 수도 없었고, 후 CM이 나가고 나면 끝 곡은 물론 클로징 멘트도 아슬아슬했다.

이 노래를 신청곡으로 보낸 청취자의 문자 내용은 참 좋았다. 하지만 진행자나 작가나 모두 반대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택의 순간, 나는 “진행 1 스타트”라고 외쳤다. 그리고 흐르는 노래, ‘Epitaph’. 모든 스텝이 ‘뜨악’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 노래는 너무 길어서 잘 안트는데요.” 진행자의 푸념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노래 끝나고 후CM 나간 뒤 시그널 음악으로 ‘쫑’멘트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며 노래를 감상했다.

창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그리곤 이 노래와 어울리는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선택하기 잘했네’. 후회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도 들었다. ‘우리는 왜 항상 프로그램의 끝을 노래로 마무리 하려고 할까?’

김범룡 ‘왜 날’
살다 보면 좋은 시기도 있고, 힘든 시기도 있다. 인생의 굴곡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이나,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나, 누구나 상관없이 항상 찾아온다. 과연 그 순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이겨내고 견뎌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그 단어를 누가 만들었을까?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라디오 PD가 방송을 할 수 없는 순간도 살다 보면 찾아오게 된다. 평생을 몸담고 살아온 곳. 평생을 청취율과 씨름하며, 기획하고, 구성하고, 연출하던 순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과연 그때 어떤 기분이 들까?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따뜻한 봄날, 잔잔히 들려오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진행자의 멘트와 귀에 익은 음악들. 만약 내가 이 프로그램의 PD라면 이 노래 다음에 이 노래를 붙일텐데. 하지만 나는 그 방송국의 PD도 아니고, 또 내가 다니던 방송국에서 더 이상 PD가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강화도로 떠났다. 바람을 쐬기 위해서였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오디오를 통해 저장된 음악들이 흘렀다. 어느 순간 내가 선곡을 했다. 이 노래 다음에 이 노래, 그리고 이 노래 다음에는 이 노래. 직업병처럼 선곡을 하는 나를 친구가 안쓰럽게 쳐다보곤 운전에 집중한다.

나 자신의 이런 모습을 깨달았을 때 선곡하며 들었던 노래가 평소 좋아했던 김범룡의 ‘왜 날’이었다. 예전 스튜디오 출연했던 범룡이 형의 라이브를 듣고 흠뻑 빠졌던 노래다. 라디오 PD가 라디오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선곡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든 시간이 다가와도, 이 또한 지나간다.

애니메이션 < 스노우맨 > OST  ‘Walking in the air’ (피아노 솔로)
영국의 명작 애니메이션 < 스노우맨(The Snowman, 1982년) >.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부드러운 그림체와 함께 흐르는 피아노곡은 따뜻한 감성과 자극하며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나는 우연히 DVD로 < 이웃집 토토로 >를 함께 봤다. 그리곤 큰 감동을 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그를 연구하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만화영화 < 미래소년 코난 >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그 후 진정한 마니아는 아니지만 마니아인 척하며 DVD를 모으고 열렬히 시청했다.

방송 일로 바빠서 아이들과 시간을 갖지 못했던 나는 애니메이션 DVD를 통해 아빠의 역할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좋아서 봤던 측면도 강했다. 그 폭이 늘어나면서 접하게 된 애니메이션 스노우맨. 마침 12월 말 눈이 오던 때였다. 나도 모르게 눈이 충혈 되었고 아이들도 엉엉 울고 있었다.

그렇다. 거친 세상을 살다가 잊고 있었던 내면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순수함의 단지. 그 단지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살짝 열린 것이다. 단지의 뚜껑을 열어준 피아노 연주곡 ‘Walking in the air’. 항상 눈이 오는 날 선곡하는 18번 음악이 되었다.

나라 ‘고고씽씽’
현재 담당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다. 매일 낮 12시15분부터 2시까지 진행되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말을 줄이고 단순하게 소통하는 BGM으로 만들려고 했다. 진행자인 아나운서와 작가와 함께 첫 스텝 회의를 갖던 날, 난 두 사람한테 구박을 받았다.

제작비도 없었고 복잡한 것보다 선곡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만들어보려고 의기가 충만해 있었다. 새로운 구성, 새로운 코너, 그리고 두 사람의 빛나는 눈동자 4개. 난 민망했다. 그리고 나 역시 숟가락을 얹어서 그 대열에 합류했다. 2020년 5월 4일 개편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라디오PD로 살아온 25년의 세월 속에서 이렇게 열정을 갖고 제작 연출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코너 < 우리 동네 사장님 >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을 응원하기 위해 만든 시간이다. 사장님 본인이나 종업원, 지인, 부모님들을 전화로 연결해서 가게를 홍보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리고 연결된 분들의 음성편지를 들으면서 그분들은 물론 진행자, 작가, 엔지니어, 그리고 나까지 대부분 함께 눈물을 글썽인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기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다른 소상공인들 걱정하고 자기를 걱정하는 부모님을 더 걱정한다. 라디오가 가진 공감의 능력과 소통의 힘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음악들을, 그리고 다양한 효과음과 소리들을 들려주면서 청취자와 함께 호흡한다.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 홍보 스팟을 제작하기 위해 우연히 음악을 검색하다가 가수 나라의 ‘고고씽씽’이라는 노래를 접하게 됐다. 2009년에 나온 노래, 그리고 금방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진 노래. 하지만 무엇보다 코로나 19로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께  “힘내세요”라고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다.  

고고씽씽 노래를 불러요 고고씽씽 흥겨운 멜로디
고고씽씽 근심걱정 날려버리고
고고씽씽 하하하하하 고고씽씽 힘들땐 웃어요
고고씽씽 다함께 떠나요

*프로필
한지윤PD (BBS 불교방송)
現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 담당PD, < 활력충전 2시4시 >, < 트로트 전성시대 >, < 108가요 >, < 뮤직펀치 >, < 다시 듣고 싶은 노래 >, < 음악의 마을 >, < 영화음악실 >, < 살며 생각하며 >, < 차 한 잔의 선율 > 등등

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8 조정선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여덟 번째 순서는 MBC 조정선 프로듀서입니다.

성재희 ‘보슬비 오는 거리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1965년 무렵이다. 친척들이 집에 모이면, 아이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유행가를 한 번 불러 보라고 시키거나, 아니면 당시에 유행하던 트위스트를 좀 춰보라고 해서, 흥을 유발시키던 문화 빈곤의 시절이었다. 당시에 즐겨 불렀던 노래가 바로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였으니, 내게는 첫 번째 유행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할 때마다, 환호의 강도가 꽤 커서, 나조차 어느 순간, 마치 지존인 양 착각하게 됐던 모양이다. 요즘 말하면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어린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명절이 끝나고 친척들에게 받은 돈이 꽤 두둑했던 어느 날, 동네에 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내 귀에도 들어왔다. 1등상은 바로 ‘금반지!’ 장소는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어딘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 가족과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금반지를 타 오겠다는 나를, “다 사기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며 다들 말렸다. 그것도 실실 웃어가면서. 아마 그 웃음 속에 ‘어리석은 놈’이란 뉘앙스가 들어있어서, 내가 더 떼를 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힘으로, 논리로, 당장 주머니에 없던 참가비 문제로(친척에서 받은 돈은 일단 몰수인 시절이었으니), 결국 노래자랑에 나갈 수 없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냥 목 놓아 우는 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얼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게는 ‘금반지 사건’이 제일 듣기 싫은 과거가 됐다. 금반지의 ‘금’자만 나와도 내빼기 바빴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고, 가끔 가요무대에서나 나오는데, 당시의 가슴 아픈 추억(?)을 소환한다. KBS라디오악단을 이끌던 김인배 단장이 관악기 주자라서 그런지, 서주와 간주를 장식한 트렘펫 솔로가 멋들어지다.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한 가운데인 1960년에 태어났다. 전쟁 이후에 한 가정에는 최소한 아이가 네댓 명은 있었고, 예닐곱인 경우도 흔했다. 우리 집도 여섯이나 됐으니,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벌이로는 아무래도 가족을 건사하는 게 힘들었을 거다. 그에 대한 단기적인 해결책이라면 아이 중 하나쯤은 친가나 외갓집에 맡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젖먹이나 학교에 입학한 자식을 내려 보낼 수 없었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6, 7세의 아이가 제격이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내가 선발된 거다.

이렇게 해서 1966년 9월 무렵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나는 경기도 용인의 외갓집에서 지냈다. 당시에도 시골에는 아이가 많지 않아서, 나는 꽤 심심하게 보내야 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게, 외할머니와 함께 듣는 라디오드라마였다.

그 중에서 ‘섬마을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주제곡이 특히 좋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지난 11월 친구와 동해안 해파랑길 750km를 함께 걸으며, 해당화를 참 많이 봤다. 늦가을이라 꽃은커녕, 야들야들한 잎사귀마저 말라있거나,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홍자색이기는 하나 꽃빛깔이 연하고, 단풍이 짙게 들지 않으니, 장미과의 열등생이지만, 곁에 두기에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북한 땅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당화가 특히 유명하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샤를르 트레네(Charles Trenet) ‘라 메르(La Mer)’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가, 영미의 팝과 황금비율로 라디오음악 프로그램을 장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 La Mer(라 메르=바다)라는 샹송은 아련한 심정으로 접했던 음악이다. 특히 이 곡을 작곡하고 부른 아티스트 Charles Trenet(샤를르 트레네)의 오리지널 음반이 아주 오래된 것(1946년)이라, 음질은 필터가 걸린 듯 먹먹했으며(심지어는 찌걱찌걱 축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게 들릴 만큼 음량 또한 전혀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도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고, 저 멀리 해안선 밖의 꿈의 장소로 나를 안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기타 코드나 피아노 코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곡을 연주하면서 화성이 계속 바뀌는 것에 불편해하면서도 큰 재미를 느낄지 모른다. F Dm Gm C7 F Dm Gm C7 F A7 Dm C7 F Dm Bb D7 Gm C7 F Dm G G7 C C7 … 정말 쉴 새 없이 새로운 코드를 잡도록 채근하는 이 곡을, 무려 75년 전에 만들어 불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La Mer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Beyond The Sea라는 다른 제목의 영어버전으로 여러 가수의 노래로 히트한 바 있다. 바비 다린(Bobby Darin),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조지 벤슨(George Benson)도 리메이크 했으며, 최근에는 로비 월리엄스(Robbie Williams)의 노래가 히트했다.

항해가 자유롭지 못 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바다 저편을 보며 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저 바다 건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언젠가 배를 타고 가서 그녀를 만나야지. 그리고 날 거기에 데려다 준 선장에게, 난 더 이상 배를 탈 일이 없으니, 당신만 떠나면 되! 이러고 말 할 거야” 세상에 이렇게 낭만적인 노래가 다 있다니!! 오리지널 샹송가사는 좀 다르겠지만, 나는 샤를르 트레네의 노래를 들으며, 영어가사를 음미하곤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버닝 러브(Burning Love)’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 독수리마크가 선명한 성우전자의 스테레오 전축이 들어왔다. 덩치가 웬만한 장식장 크기는 족히 됐을 전축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카세트 녹음이 가능한 데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AM와 FM 수신, LP음반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요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악한 제품이었다.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던 큰 형은 음악에 꽤 관심이 있어서, 매일 밤 라디오 다이얼 이곳저곳을 돌리며, 어떤 때는 자못 심각하게 또 다른 때는 낄낄거리며 음악과 진행자의 얘기를 듣곤 했다. 당시에 가장 즐겨 들었던 프로그램은 MBC-FM <박원웅의 밤의 디스크쇼(후에 <박원웅과 함께>로 바뀜)>였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부탁을 하나 하고 외출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Burning Love’를 엽서로 신청해 놨으니, 노래가 나올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녹음을 해 두라는 얘기였다. 물론 노래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불러지기를 원했던 거다. 전축에 동시 녹음기능이 없었던 지라, 마침 집에 있었던 일본제 납작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포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엘비스가 그 날도 <밤에 디스크쇼>에 출연하여 ‘사랑을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나는 동작이 굼뜨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억울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이 FM 음악프로그램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거의 빼놓아서는 안 될 잠자리의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Burning Love를 통해 알게 된 <밤의 디스크쇼>가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해준 것은 바로 MBC입사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일이 아닌가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나는 그저 어지간한 기업의 무역관련 업무나 사무직의 평범한 직장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간지에 실린 MBC 공채시험 공고를 봤고, 라디오PD란 직종에 호기심을 느꼈던 거다.

“MBC-FM을 듣고 자랐습니다. 좋은 음악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면접시험에서의 당당한 태도가 내게 합격의 영광을 가져줬으니 말이다.  

폴 모리아(Paul Mauriat) ‘Love Is Blue’
지금은 BTS의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어서 K팝의 기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해 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2위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킬 때 문득 프랑스의 악단 지휘자인 폴 모리아를 떠올리게 됐다.

젊은 댄스가수와 이미 세상을 떠난 대중음악 연주자가 어떻게 오버랩이 됐는가 하면, 이 둘은 공통되게 고유의 언어와 표현수법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 한 성공을 미국에서 거두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음악이라는 일본식 표현에 어울릴 만큼,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무드음악으로 멸시 받던 폴 모리아가 어떻게 미국에서 차트 1위(Love Is Blue가 1968년 2월 10일, 빌보드 No.1)에 올랐는가 하면, 그것은 거대 미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그들이 정서에 맞추려는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70년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폴 모리아의 음악을 접해왔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동양적인 선율에다 탐미적인 연주 표현수법이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러니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폴 모리아의 음악으로 문을 열었고 문을 닫았을 것이다.

동아방송의 <밤의 플랫폼>에 흘렀던 이사도라(Isadora),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나왔던 ‘시바 여왕(La Reine De Saba)’, <박원웅과 함께>의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Serenade To Summertime)’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테마송 ‘돌아와요 부산항에’까지 아마 폴 모리아가 없었더라면, 70~80년대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은 과연 무엇으로 타이틀 음악을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그 대표곡이자, 그의 인기에 불을 당긴 것은 Love Is Blue일 거다.

뜬금없이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1970년대 말 무렵에는 웬만한 가정에 전축이 한 대씩 있었다. 당시로 봐서는 획기적인 컬러풀한 색상의 LP전집에서 흘러나오던 폴 모리아의 산뜻한 음악이 실은 거의 해적판이었다는 사실이다. 1975년부터 네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던 폴 모리아는 자신이 한국에서 인기가 그렇게 높았지만, 음반인세는 제대로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알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음악이 동양 저 변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을 것 같다. 그러니 천길 마다않고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을까.

이문세 ‘파랑새’
1984년 1월, MBC에 라디오PD로 들어와 수습기간을 거쳐 제일 먼저 맡았던 프로그램이 <이종환의 디스크쇼>였다. 입사한지 8개월 밖에 되지 않는 내게, 당시로 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떨어졌던 건, 실은 프리랜서 DJ로 있던 이종환 선배와 담당PD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선희가 ‘J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던 1984년 강변가요제 때의 일이다. 결선 전야제로 <디스크쇼>가 공개방송을 가졌는데, 진행방식을 놓고 둘이 크게 다퉜다. 지금 같았으면 둘의 잘잘못을 가려서 한 쪽은 징계, 한 쪽은 속투(續投) 쪽으로 결론이 났으련만, 당시에 FM부장이 내린 결정은 둘은 떼어놓고, 신참PD인 나를 붙이기로 한 거다. 졸지에 입봉을 하게 된 나는, 대선배에게서 일찍 라디오PD로서의 감각을 익히게 됐고, 지금 생각해도 그게 37년 PD생활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느낀다.

그해 가을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말마다<FM스페셜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때 자주 나왔던 가수가 이문세였는데, 청중의 반응도 반응이려니와, 마침 그가 옆방(MBC표준FM)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섭외가 편해서 자주 출연시켰던 거다.

이종환 선배와 이문세는 티격태격 입씨름으로 화제를 낳았다. “이문세씨가 TV에 못 나오는 이유가 얼굴이 길어 화면에서 위아래로 잘리기 때문이라면서요?” 이러고 시비를 걸면, 이문세는 “이종환 선배는 화면 밖으로 코가 튀어나온다면서요?” 이런 식의 응수다. 당시에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걸출한 히트곡이 나오기 전이라, 이문세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이종환 선배는 또 한 방 먹이곤 했다. “이문세씨가 또 삐리삐리 파랑새를 부릅니다. 이 노래 밖에는 부를 만한 노래가 없습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A House Is Not A Home’
우리나라에서 가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1980년대부터가 아닌가 한다. 외국에는 결코 쓰지 않을 ‘발라드’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가요가 본격적으로 영미의 팝송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가요들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연주 실력이 뒷받침 되면서 음악팬들을 모았지만, 거기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게 ‘가사’다. 가요의 장점은 팝과 달리, 들으면 가사가 바로 이해가 된다는 점, 한 편의 시로 내놔도 손색없는 가사들 덕택에 가요는 업그레이드 됐다.

나는 라디오PD가 되기 전에 팝송을 들으면서,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음악을 트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팝송의 가사를 파악하게 됐다. 하기야 뭔 주장을 펼치는 지, 어떤 애틋한 사랑얘기를 담았는지 알아야, 청취자에게 정확히 소개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몇몇 작사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할 데이비드(Hal David)다. 그가 어딘가에 써놓은 작사 잘 하는 법까지 읽어 봤는데, 나도 한 번 작사가로 나서볼까 슬쩍 유혹도 받아봤다.

가사는 세 가지 요소에 충실하면서 쓰라고 한다. ‘그럴듯함(Believability)’ ‘단순함(Simplicity)’ ‘정서적 충격(Emotional Impact)’가 그것이다. 1964년 Dionne Warwick이 노래한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A House Is Not A Home)은 할 데이비드의 작품 중에서 백미가 되는 가사로 내용이 감동적이다.

“의자는 여전히 의자일 뿐이지요. 거기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더라도. 그러나 의자는 집이 아니지요. 그리고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 그곳에 당신을 안아줄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당신이 굿나잇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중략) 그러니 이 집(House)을 집(Home)으로 바꾸어주세요. 제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제발 거기 있어주세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조이(Joy) ‘Touch By Touch’ 그리고 비틀스(Beatles)의 ‘Yesterday’
1986년 가을 무렵, MBC라디오가 정동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있어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회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란 여론조사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아마 MBC-FM 개국 15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FM 음악방송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했을 것이다.

실은 어느 앙케이트든 대강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바로 ‘너’)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팝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받는 올타임 리퀘스트 순위가 바로 조사결과일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Beatles의 Yesterday나 Let It Be, Simon And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Sound Of Silence, Queen의 Bohemian Rhapsody,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비교적 신곡이라면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 따위 말이다.

이를 기획한 PD들 모두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앙케이트지를 수거했는데 다들 크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 못 하게 Joy의 Touch By Touch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부른 다른 노래들이 상위를 싹 점한 거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당시의 행사 타이틀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었다. 한국인이 ‘최근에 좋아하게 된’이랄지, ‘좋아하는 팝송 신곡’이 아니었단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부서 PD들 모두 크게 당황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결론을 봤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한 건, ‘한국인의 올타임 리퀘스트곡 베스트’였지만, 이렇게 신곡들이 상위를 차지했으니, 부문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올드팝> <한국인이 좋아하는 최신팝>으로 분리하자. 이렇게 하고 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단숨에 해결은 됐다. 결국 Joy는 Touch By Touch와 Beatles의 Yesterday가 나란히 1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더 남긴 셈이다.

폴 사이먼(Paul Simon) ‘Duncan’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는 ‘기타를 못 치는 사람을 간첩’으로 여기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최소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랄지 버블껌의 ‘연가’,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같은 포크송 몇 개는 꿰고 있어야 사람취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내 겪어온지라, 이성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적었으니, 여학생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통기타만 한 매개거리도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니 좀 이른 편이었지만, 형이 치다 팽겨 쳐둔 걸 제대로 된 교본 없이 독학했으니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았다. 다만 음감이 좋아졌다고 할까? 대중가요의 화성이 별로 복잡한 게 없으니, 어느 곡이라도 악보가 없이 코드만큼은 대충 잡아 칠 수준은 됐다.

그 실력은 대학의 MT에 가서 큰 빛을 발했고, 나는 자주 주목을 받았다. 통기타 잘 치는 아티스트로 내가 꼽는 사람이 바로 폴 사이먼이다. Simon And Garfunkel 시절부터 많은 곡들의 기타 반주를 보노라면, 다양하고 멋진 코드를 접하게 된다. 아름답고 신기한 하이코드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의 노래 중에서 쓰리핑거링(Three Fingering) 주법의 대표곡이 바로 Duncan이다. 팝 차트에 높은 순위에 오르지는 못 했지만, 그가 공연을 통해서 자주 선보였으며, 나도 한 소절 빠지지 않고 다 외우며 기타를 치며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이다.

* MBC라디오 조정선PD
1984년 1월 MBC라디오PD로 입사
<이종환의 디스크쇼> <한경애의 영화음악> <배철수의 음악캠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두시의 데이트> 등을 연출했으며 <조PD의 새벽다방> <조PD의 비틀즈라디오> <조PD의 레트로팝스>의 DJ 겸 PD로 활약했다.

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7 민일홍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일곱 번째 순서는 KBS 민일홍 프로듀서입니다.

‘아무 의미 없다’
지금 이 글은 읽는 분들에겐 사실 아무런 의미 없는 리스트입니다.
단지 글을 쓴 저에게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
SNS 하는 것도 싫어하고 타인의 사생활에도 관심 두지 않는 성격이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공개 글쓰기가 많이 민망합니다. 그렇지만 관계성을 중시하는 직업상 뿌리칠 수 없는 분의 부탁으로 부끄러운 글을 올립니다.

[빌보드 키드의 인생 BGM] 

Daniel Boone ‘Beautiful Sunday’
국민학교때 처음 들은 팝송이자 뜻도 모르고 가사를 외우게 된 팝송이다. 당시에 룸메이트로 한 방에 같이 지냈던 대학생 형이 날마다 이 곡을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외우게 된 노래. 이후 형성된 나의 음악 취향과는 사뭇 다르지만, 또래에 비해 이른 나이에 팝을 접하게 해준 첫사랑 같은 곡이다. 그렇지. 원래 첫사랑은 뭣 모르고 하는 거니까.

조용필 ‘단발머리’
일찌감치 팝을 접한 나는, 청소년 시절 ‘가요는 왠지 구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기에 가능했던 어린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레코딩 기술과 사운드 메이킹 때문이었다. 80년대의 가요와 팝은 그야말로 명확히 인지되는 벽이 존재했다. 조금만 민감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팝과 가요 사이의 넘사벽! 당시에 그런 편견을 깨 준 첫 번째 음악이 내게는 조용필의 ‘단발머리’였다.

Chuck Mangione ‘Children of sanchez’
7-80년대의 학교에선 가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로 매스게임이나 군무 혹은 집단체조 등을 선보였다. 아마도 군사정권의 영향이라 생각되는데, 나의 국민학교 6학년 운동회 하이라이트는 전교생 집단 곤봉체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교생을 대표해 무대 단상에서 시범을 보이는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그해 여름, 나는 전교 집체시간 때마다 땡볕 아래서 긴장 속에 곤봉을 돌려대야 했다. 손에는 굳은살이 배겼고, 귀에는 집단 곤봉체조의 배경음악인 ‘CHILDREN OF SANCHEZ’가 박혔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뇌리에 처음 기록된 재즈 음악이었다.    

Michael Jackson ‘P.Y.T’
MICHAEL JACKSON의 <THRILLER>는 내가 내 돈 주고 처음으로 산 앨범(TAPE)이자, 중학교 시절 AFKN의 ‘AMERICAN TOP40’, ‘SOLID GOLD’, ‘SOUL TRAIN’ 등을 듣고 보며 빌보드 차트를 외우는 빌보드 키드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앨범이다. 그땐 정말 P.Y.T.(PRETTY YOUNG THING)였는데… 그 빌보드 키드는 어느새 반백의 나이가 돼 그 시절의 추억을 제대로 구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빌보드키드의 아침 선택! 매일 아침 7시 KBS 2라디오 <김태훈의 프리웨이>”)을 만들고 있다.

이승환 ‘텅빈 마음’
몸은 성인이지만 아직 소년의 감성을 지니고 있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절친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이승환의 1집 앨범(LP)은 그 시절 나의 감성과 잘 맞았다. 비록 유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지만, 누구나 기저에 깔려있는 감성은 그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기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두주불사할지언정 가무는 않는 성향임에도 노래 부를 기회가 되면 유일하게 부르는 노래가 대부분 이승환의 곡이고, 그중에 가장 애창하는 노래가 바로 이승환 데뷔앨범의 타이틀인 ‘텅빈 마음’이다.  

Eric Marienthal ‘Kid’s stuff’
뮤지션 김현철과는 2001년 방송으로 만났다. 매일 자정에 생방송으로 <김현철의 뮤직플러스>(KBS 2FM)를 1년여 함께 했다. 김현철은 국내의 뮤지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아티스트다. 나 역시 그와 함께 심야 프로그램을 하면서 음악 프로그램 PD로서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흡사 빠른 볼만 던지던 국내 정통파 투수가 빅리그에서 변화구로 완급조절을 체득한 경우라 할까? 구체적으로 퓨전과 MOR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사실 젊은 시절엔 이런 스타일의 음악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선명한 음악들을 좋아하는게 일반적이니까)

ERIC MARIENTHAL의 “KID’S STUFF”는 당시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김현철이 직접 고른 곡이다. 그래선지 누가 들어도 뮤지션 김현철을 떠올리게 하는 연주곡이다. 그리고 내게는 그 시절 심야 프로그램을 만들며 느꼈던 즐거움과 보람을 일깨우는 정겨운 음악이기도 하다.  

Nirvana ‘Smells like teen spirit’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는 계획이 있는 아들에 감탄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 계획이 없는 무책임한 인간으로 표현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정말 ‘아버지의 계획 없음’이 기성세대의 무능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를 봤을 때, 그 ‘무계획의 계획’은 본능에 기반한 경험적 통찰로 읽혔다. NIRVANA의 이 곡은 말도 안되는 가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헤드뱅잉 했던 내 젊은 날의 송가였다. 하지만 반백의 나이엔 ‘무계획의 계획’처럼 불완전한 가사 자체로 의미가 이해되는 곡이자 기타 전주만으로 내 안의 ‘청년 DNA’가 살아있는지 아닌지를 확인시켜주는 노래다.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
사람간의 관계에서 누군가와 취향과 취미가 같다는 것 매우 중요하다.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론 취향과 취미가 같은 부부를 보면 부럽다. 물론 그런 부부가 많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와 아내는 선호하는 영화도 다르고 음악적 취향도 다르다. 대표적으로 아내는 락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우리 부부도 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가 흘러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목소리로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새삼 부부의 연대감(?)을 느낀다.  

Rage Against The Machine ‘Wake up’
가장 급진적인 좌파밴드 RATM. 어쩌면 무모하게 보여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솔직하게 뿜어내는 그들의 에너지엔 순수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RATM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시스템에 길들어져 있는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내일이 없는 듯 외치는 펑크락 밴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분노가 그들의 음악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생긴 나만의 스트레스 퇴치법이 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RATM의 노래를 듣는 거다. 그러면 꾹꾹 눌려있던 부끄러운 자아가 스멀스멀 기도를 타고 올라온다. 목에 굵게 스크래치(?)를 내면서.  

The Beatles ‘The long and winding road’
개인적으로 3대 멜로디 메이커로 엘튼 존과 폴 매카트니, 버트 바카락을 손꼽는다. 그들이 뽑아낸 멜로디는 정말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비틀즈 시절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공동저작으로 크레딧을 올렸지만 팬들은 대개 안다. 어떤 곡이 누구의 작품인지.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비틀즈의 노래 중 멜로디 메이커로서 폴 매카트니의 능력이 십분발휘된 곡이라 생각한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YESTERDAY’를 보면 에드 시런과 주인공이 즉흥곡 배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부르는데 ‘훌륭한 멜로디가 주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눈을 감는 마지막 날,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스칠 때 흐르는 배경음악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이 곡을 떠올릴 것 같다.  

* 민일홍 PD
KBS RADIO PD (1997년 입사)
– 現 KBS 2라디오 <김태훈의 프리웨이> 연출
–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슈퍼주니어의 키스더라디오>, <김현철의 뮤직플러스>, <윤도현의 뮤직쇼>, <사랑하기 좋은날 이금희입니다> 등 프로그램 연출

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6 서병석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여섯 번째 순서는 CBS 서병석 프로듀서입니다.

글쓰기는 로고스의 영역이라 굳게 믿는 내게 파토스가 비정상적으로 큰 난 글쓰기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여겨왔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그렇기에 늘 두렵기도 하다. 그치만 지난 주 야심한 밤, 임진모 선생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내 인생의 음악 열곡을 골라달라고..

원래의 나였다면 무슨 이유를 들어서라도 완곡히 거절했겠지만 그날따라 유난히 선생님의 부탁은 마치 꼴레오네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과도 같은 느낌이었고 난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보다 자세한 연유는 지면관계상 과감히 생략키로 한다. 아무튼 정리하다보니 부끄러운 일기장 같이 돼버리고 말았다. 널리 양해하고 봐주시기 바란다.

현인 ‘신라의 달밤’
누구나 그렇듯 어린 시절 아버지란 존재는 ‘슈퍼히어로’다. 내게도 역시 그랬다. 하기 싫은 숙제를 슬며시 떠넘기면 고된 일을 마치고 나서도 늘 말없이 완벽히 해주시던 맥가이버였고, 늘 이곳 저곳 아프시면서도 병원 한 번 가지 않으신 ‘아이언 맨’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하셔서 부르시던 ‘신라의 달밤’을 일곱 살의 난 뚫어지게 쳐다봤던 거 같다. (물론 그 곡의 제목이 신라의 달밤이었고, 독특한 그 창법의 원작자가 현인 선생님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지만) 현인 선생님 못지 않았던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때문이기도 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날 처음으로 영웅이 아닌 인간 아버지의 고된 모습이 뇌리에 박혔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충혈된 눈, 벌건 볼, 그리고 웃고는 계시지만 슬퍼보이던 얼굴 표정까지…

초인종이 달린 집에 살고 싶다는 소박한? 철부지 꼬맹이의 말 한 마디에 아버지는 악착같이 일을 하셨고 고됨이 쌓일수록 아버지의 노래가 더 빈번해졌고 그의 바이브레이션이 더 깊어졌음을 훗날에야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제야 그의 노래가 아주 조금씩 이해가 되는 나이가 됐다. 아주 조금씩…

이문세 ‘사랑이 지나가면’
초등학생 시절, 수줍음 많았던 내게 최고의 친구는 라디오였다. 누나와 한 방에서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 쓰면 친구를 맞이할 거룩한 의식은 끝. 이윽고 지직 거리는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Merci cherie! <별이 빛나는 밤에>는 그렇게 매일 밤 날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문세 아저씨가 가수라는 건 알았지만 감히 그의 음반을 살 수 없었던 차에 누나를 좋아했던 형이 누나에게 그의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를 선물해줬던 기억이 또렷이 난다. 그리고 이내 그 테이프는 내 소유가 됐었다. 그 안에는 이문세의 최고 명반 4집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이별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은희씨의 목소리에 매료됐었고, 깊은 밤을 날아서를 들으며 춤을 추곤했다. (당시에 초등생인 내겐 춤을 추기 충분한 리듬이었다. 심지어 그 앨범에 들어가 있던 ‘어허야 둥기둥기’까지 사랑했었다.

그리고 ‘사랑이 지나가면’은 숫기 없던 내가 벌칙과 장기자랑 그 중간 성격의 교실무대에 나가 노래를 부르게 해준 곡이었다. 노랠 부르고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흘린 기억도 난다. 그리고 담임 샘께서는 조그만 게 뭘 안다고 우냐고 핀잔을 줬던 기억도. ㅋㅋ

Wham ‘Last christmas’
조지마이클이 앤드류 리즐리와 결별후 ‘Faith’로 전 세계를 휩쓸 즈음, 난 뒤늦게 팝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그 첫 번째 안내자는 Wham이었다. 88년 코리아나의 Hand in hand (언제나 시대를 앞서갔던 조르지오 모로도 형님 존경합니다) 가 길보드 차트를 평정하고, 같은 반 친구들은 모두가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을 떼창하고 있을 때 난 과감히 Last christmas를 꺼내들었고, 이내 모두가 전주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평생의 업이 되었지만 대중들에게 노래를 고르고 소개하는 기쁨을 알게 해준 인생 최초의 노래였다.

The Beatles ‘In my life’
지금은 사라져버린 수많은 것들 중 제일 아쉬운 건 작은 레코드숍이다. 중학교 진학 후 용돈을 아끼고 쪼개가며 몇 달을 모은 뒤 달려간 곳은 레코드 가게였다. 하지만 난 늘 결정장애였고 그런 날 늘 도와줬던 건 안경을 쓰고 트리트먼트가 잘 된 장발을 휘날렸던 주인 아저씨였다. (그렇다고 존 레논을 닮진 않았었다::)

친분을 쌓아가던 어느 날 아저씨가 뭐니 뭐니 해도 이들의 음악은 필청이라며 강추한 뮤지션이 있었다. 그동안 수없이 명성은 전해 들었으나 내겐 철기 시대 유물로만 느껴졌던 그들의 음악! 내가 결국 사기를 주저하자 그가 선뜻 ‘공짜’로 내주었던 음반은 다름 아닌 비틀즈의 베스트 앨범이었다. 그땐 그런 낭만?이 있었다.

이후 난 비틀즈의 음반 한 장 한 장을 역순으로 사기 시작했고 그리고 러버 소울 앨범에 당도했다. 그중 내 귀와 마음과 영혼을 잡아끈 건 ‘In my life’!! 특히 조지 마틴이 만들어낸 하프시코드 음색의 피아노 솔로는 들을 때마다 뭉클해진다. 마치 사라져버린 레코드 가게의 낭만이 소멸하지 않고 살아 숨쉬는 기분이랄까?


이 부분을 빼면 이 곡의 위대함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방송에서 이 노래를 플레이 할 때면 반드시 그 부분은 빠지지 않도록 유독 러닝 타임에 신경을 쓴다.

휘트니 휴스턴 ‘Saving all my love for you’
그녀의 데뷔 싱글을 들었을 때 그 전율을 잊지 못한다. 수 많은 디바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디바 그 이상이었다. 누군가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The voice라는 별명이 적확하다. 여린 동시에 당찬 모습을 보여주며 Home이란 곡을 불렀던 첫무대부터 미국의 국가가 이토록 감동적일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 준 역대급 슈퍼볼 무대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목소리만으로 울림을 전달해줬고 매번 기대 이상의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녀의 역사적 첫 서울 콘서트를 잊지 못한다. 이미 약물의 후유증으로 특유의 고음도, 호흡도 모두 망가졌었고 주위 관객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도 하고, 야유를 쏟아내기도 했다. 그리고 끝끝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I will always love you’를 불렀던 그녀의 시련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렇게 내 청춘의 한 페이지도 막을 내리는 거 같이 황량하고 쓸쓸했지만 사실 그녀의 마지막 일 것만 같았던 목소리를 라이브로 듣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지금도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무심코 꺼내드는 앨범에는 반드시 그녀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

New kids on the block ‘Please don’t go girl’
뉴키즈 온 더 블록은 누나의 영향이 매우 컸다. 누님께서 하루 종일 그들의 음악을 틀고 뮤직 비디오를 교과서 삼아 열청했으니 나 역시 자의반 타의반 입가에 맴도는 중독성 음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달이 났다. 누님께서 땡땡이를 치고 역사적인 뉴키즈의 서울 공연으로 향했던 것이다. 난 누님의 사랑과 열정을 위해 부모님이 눈치 채시지 못하도록 철저 함구했다.

그날 밤, 9시 뉴스에선 공연진행 미숙으로 인해 사건 사고가 터졌다고 난리였다. 아버지는 모든 게 다 부모 잘못이라고 욕을 해대셨고, 어머님께서는 곁에서 적극 추임새를 넣으셨다. 뜻하지 않게 자아비판을 하게 된 아버님 때문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었다. 누나가 새벽이 넘어서도 오지 않자 아버지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독서실로 향하셨고 누나의 부재를 눈으로 확인 한 후 분노 게이지를 최대치로 끌어 올리셨다. 결국 난 이실직고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걱정으로 온 가족이 뜬 눈으로 누나를 기다렸다. 드디어 새벽 2시경 누나가 등장했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 후 실신했고 의무대에 있다 깨어나 무사 귀환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나의 읍소 작전은 실패했고 집안엔 밤새도록 곡소리가 울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뉴키즈 온더 블록 쿠션을 들고 온 누님! 난 지금도 모든 면에서 누님의 열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무한궤도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박정희 보디가드가 세운 중고등학교, 군복을 입은 교련 선생님이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군사주의 색체가 짙게 깔린 학풍에서 음악은 탈출구였다. 특히 작사 작곡을 능수능란히 해내는 싱어송 라이터 친구가 전학을 오게 되면서 무한궤도와 공일오비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 녀석과 함께 음악을 한답시고 펜을 끄적이고, 음을 흥얼거리며 놀았다. 음악 활동을 반대하시는 부모님께 허락을 맡기 위해 그 녀석의 집으로 가기도 하는 등, 돌이켜보면 조금은 오글거리는 드라마 장면도 연출하기도 했었다. (하림아~ 아니 현우야 얼른 새 앨범 내자^^)

현우는 또 다시 전학을 갔지만 난 다른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고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드디어 첫 무대에 올랐다. 곡명은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결과는?

우리 학교는 당시 수학여행만 가면 장기자랑과 여장 남자 대회를 동시에 열었는데, 난 장기자랑 출전 선수였다. 하지만 여장남자 대회에 반대표로 나갈 예정인 친구가 복통이 일어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두 대회 모두 출전하게 됐다. 그렇게 본 캐릭터와 부 캐릭터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장기자랑에선 장려상을 받았고 여장남자 대회에서 무려 대상을 받게 됐다.:::

이후 가수로서의 꿈을 고이 접었다.

김현철 ‘동네’
적어도 내겐 김현철의 1집은 유재하와 이문세 / 이영훈 콤비의 완벽한 결합 진화체 그 자체였다. 모던하면서도 친근한, 마치 카라멜 마키아또와 청국장의 조화랄까? 팝과 가요의 절묘한 조합에 대한 정답이라고 외치는 듯 한 천재 뮤지션의 데뷔 앨범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라디오 피디가 되길 꿈꾸기 시작했고 직접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리고 십 수년이 흐르고 드디어 방송국에서 그를 만났다. 난 어린 시절 동경한 천재를 만나서 영광입니다란 촌스런 멘트를 날렸고 그는 매우 수줍어 했다. 동네에서 한 소녀를 사랑한 소년의 모습 그대로^^

Mark knopfler ‘The long road’
초창기 수능 세대라 수험생 시절 유독 예민해져 있었다. 결국 불면증까지 오게 됐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 때 심야 시간 라디오 프로그램들은 작은 위안이었다. 당시엔 심야 시간에 유독 방송사들 마다 영화음악 프로그램들이 존재했다.

그 중 새벽에 방송됐던 한 영화음악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 마크 노플러의 연주가 일품인 Long road는 듣는 시간대마다 다른 느낌을 안겨다주는 묘한 매력의 곡 이었다. 특히 새벽시간에 듣는 롱 로드는 그야말로 몽환적이었고, 어느덧 날 기나 긴 길이 펼쳐진 꿈나라로 인도했다. 물론 프로그램의 명 게스트, 정성일 평론가의 현학적 평론도 불면증 치유에 한 몫 했지만:: 온갖 번뇌로 오늘도 잠 못 이루는 이들에게 Long road를 강추한다.^^

Guns & roses ‘November rain’
으레 그렇듯 남자 하면 락 아니던가! 나 역시 남중, 남고 틈바구니 속에서 랍 해포드가 몇 옥타브까지 올라간다느니, 랜디 로즈와 지미 핸드릭스, 지미 페이지, 슬래쉬 중 누가 최고의 기타리스트냐를 두고 유치한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리고 하드록과 사이키델릭 그룹들을 거쳐 액슬 로즈의 음악과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그의 거친 쇳소리는 마음 속 스트레스 조각들을 긁어내주는 포크레인 같았다.(그의 딱 달라붙는 패션은 지금도 적응 불가지만..ㅋㅋ)

특히 그들의 9분에 달하는 대곡, November rain! 후반부 그랜드 피아노의 등장과 그 위에서 광기 어린 연주를 펼쳐내는 슬래쉬와 엑슬로즈의 클라이 맥스는 폭풍 간지 그 자체였다. 더군다나 11월생이었던 나의 사춘기 시절 공식 생일 축하곡이기도 했다. 그리고 별밤 잼 콘서트부터 노사연 주병진의 라디오 공개방송까지 섭렸했던, 자칭 라디오 키드이면서도 사연은 한 번도 보내진 않았던 내가 처음으로 사연과 신청곡을 보내고 소개까지 된 곡이 바로 ’11월의 비’였다.
고마워요 배철수 형님^^~~

*서병석 PD
2005년 CBS 입사
다수의 시사와 음악 프로그램 연출
현재 CBS 98.1 Mhz <유지수의 해피송> 연출

Categories
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5 김은수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다섯 번째 순서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김은수 프로듀서입니다.

아시다시피 덧대는 데는 그 닥 용기가 필요 없다. 대신, 걸러 내거나 포기하는 데는 그 몇 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열곡이면 충분하지’ 했음에도, 선곡리스트를 지웠다 썼다 를 반복하면서 어느새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 ‘인생’ 이라는 화두를 앞머리에 두자니 구성에 갈등은 없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매순간이 성장과 노화의 리듬뿐 아니라, 미련과 회한의 채에 걸러져, 되돌아보니 다시금 아쉬움과 그리움이 한 겹 더 쌓이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됐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 PD들의 주옥과 같은 선곡과 해설을 통해 ‘이즘’ 독자 분들께는 다분히 지적욕구가 충족되었으리라 보고, 오늘은 그야말로 개인사를 관통하는 음악들을 나열하면서 한두 번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진심 행복할 것 같다. 어차피 음악의 운명은 감성의 공명과 그로인한 쾌감(?)을 함께 나누는 일이므로…

장기하와 얼굴들 ‘마냥 걷는다’
‘마냥’이라는 부사를 노래제목에 붙였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 시선에 집중하면서 음악을 해보겠다는 당당한 고집이 느껴졌다. 일단 ‘싸구려 커피’가 날린 신선한 펀치 뒤에 이어진 수록곡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한 호흡으로 빠져들게 했다. 직업 상, 새로운 음반을 접하면 숙제하듯 요리조리 분석하고 해부하는 작업이 우선이건만, 이 음반은 물 흐르듯 한 번에 들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장기하의 최근 에세이집 [상관없지 않은가?]에서 보여주듯, 작고 시시한 사물일지라도 그의 깊고 집요한 사색의 흐름을 타고 흡인력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좋았던 그 사람의 사진 한 장 손에 쥐고 마냥 걷는’단다. 연주는 더 압권이다. 무반주로 시작되는 노랫말에 귀를 세우다보면 비로소 시작되는 1분 30여초 동안의 장중한 간주와 후주는 무방비로 황홀경에 빠져들게 한다.

1980년대 일본의 Electronic Pop을 대표하는 밴드 [Yellow Music Orchestra]와 이기팝, 우리의 십센치와 이날치로 이어지는 실험적이고 고집스런 음악들이 주는 매력을 장기하는 이 한 장의 앨범에 넘치도록 싣고 있다.

The Animals ‘House of The Rising Sun’
-내가 초등학생 때 서울로 유학 간 오빠는 알토란같은 수업료를 빼돌려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활동을 하다 결국 부모에게 들켜 고향으로 강제 소환된 무렵, 우리 자매들을 앉혀놓고 기타반주에 불러주던 곡이자 내가 최초로 접한 팝송이다. 어린 마음에 제목자체에 희망을 걸었던 노래였건만, 실제 내용은 반전이다. 햇살이 가득한 따스하고 아늑한 가정이 아니라, 꿈을 가진 소년의 희망도 저버리게 만드는 회색빛 우울한 집… 그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쓸쓸한 회한이 묻어나는 노랫말을 알고 나니, 오르간 솔로보다 기타연주가 더욱 슬프고 아프게 느껴지는 명곡이다. 더욱이 지금은 가고 없는 오빠의 연주들이 이 노래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긴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도 하다.

-이 노래는 이후, 동네에 이따금씩 들어오던 천막극장의 개구멍을 넘나들며 영화에 빠지고, 박원웅과 황인용, 이종환, 김광한, 장유진, 김세원…으로 이어지는 음악프로그램들에 빠져 내가 라디오키즈로 성장한 자양분이 되 주기도 하였다.

송창식 ‘창밖에는 비오고요’
-오로지 운동장 조회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들어간 고등학교 방송반. 뜨거운 햇살아래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연설에 지쳐 한 두 명의 친구들이 픽픽 쓰러지던 시절, 마이크 점검을 끝내놓고 시원한 방송반에서 뒹굴거릴 때, 송창식의 이 앨범은 뭔지 모를 위안과 기쁨을 더해주었다. 더구나 세시봉의 뮤즈, 윤여정을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심플한 노랫말의 이곡을 비롯해 비오는 날 들으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상아의 노래, 꽃보다 귀한 여인, 비의 나그네..등 연가 풍 곡들로 이어져 사춘기 감성을 마구 흔들어 댔다.

-불법이긴 했지만, 당시 나름 곱씹고 곱씹었던 곡들을 모아 읍내 레코드가게에 가서 나만의 컨필레이션 음반(조악스런 카세트 테잎이긴 했지만)을 만들 때 늘 빠지지 않던 애장곡이기도 하다.

한 대수 ‘물 좀 주소’
-방송반에 이어 그 혜택의 단맛을 잊지 못하고 들어간 대학 음악감상실 ‘미네징거’
그곳은 소위 음악 골통(^^)들의 집합소였다. 지금도 ‘명연주 명음반’ DJ로 활동 중인 정만섭을 비롯, 용산에서 알아주는 방송 장비의 대가인 선배와 종종 음악칼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음악매니아들이 학과 수업을 제치고 늘 감상실을 들락거리며 식구처럼 지냈던 시기였으니… 한 대수의 익살스런 표정의 앨범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시기. 미소년 같기만 하던 동기가 선배들과의 신고식자리에서 불러재낀 노래가 바로 이곡이었고 다들 이 느닷없는 반전에 뒤집어졌던 기억이 있다.

-이후 다큐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할 때, 이 노래는 새벽녘 원고 탈고 때마다 어김없이 틀어대던 내 애청곡(18번)이 되었다. 걸걸한 탁주 한 사발 같은 음색과 자유로운 영혼을 자켓 사진 한 장에 담아낸 한대수… 지난 해 미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 김도향 선생과의 인연으로 마지막 출연을 평화방송에 허락해준 고마움 때문일까? 70나이에도 꽃무늬 셔츠와 장발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 때문일까? 제아무리 야속한 시간이라도 이 20대 청년의 음악적 패기를 영원히 앗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추신: 전주 없이 영혼을 흔들어대는 네 음절 ‘물 좀 주소~’ 는, 우리 가요 사에 남을 가장 강력한 첫 소절이 아닐까 싶다.^^

한영애 ‘루씰’
-93년의 여름. 한영애의 ‘아.우.성 콘서트’를 보러 간 당시 나는 만삭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며 발버둥치는 태아에게 ‘엄마가 이 공연 놓치면 널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아가야, 나오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주라.’ 겨우 달래며 달려간 여의도 63빌딩 공연장은 한여름의 습기와 열기로 가득 찼고, 간신히 구석진 입석을 차지 한 채 곡마다 열광하는 나를 결국은 한영애도 알아봤다. 관객들이 일제히 나를 보고 미쳤다? 는 박수를 보냈지만 나의 쾌감은 그녀의 흐드러진 블루지 창법의 ‘루씰’로 절정을 이루었다. 전설의 블루스 뮤지션 B.B.King의 기타 애칭라고 하지만 내게 루씰은 그냥 한영애다.
‘루씰~ 알고 있나, 너의 노래는 영혼 속에 가리워진 빛을 찾게 하는 믿음…’

-몇 해 전, 임진각DMZ평화콘서트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고, 나의 루씰이 건재함도 보았고, 무엇보다 주변 소음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코뿔소의 모습을 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행복했다.

장국영 ‘Boulevard of Broken Dream’
-‘가사는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라고 했던가… 나의 입을 떠나 타인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회귀하는 노랫말들…장국영이 부르는 이 노래는 마치 본인의 생을 예고하듯 처절하고 음울하게 다가온다.

그를 만난 건 그가 죽기 전 내한 해 묵었던 강남의 한 고급호텔 스위트룸 접견실. 영화음악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였는데, 매우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었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특히 그도 나도 함께 좋아한 배우, 게리 올드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친구처럼 반가워하기도 했다. 마치 배틀하듯 게리 올드만의 명장면들을 주고받을 때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사라졌다. 남은 건 노래 제목처럼 ‘슬픔의 거리 꿈이 깨진 거리를 홀로 걸으며 지독한 외로움을 토해 낸’ 그의 절규뿐이다.

-늘어지듯 흐느적거리는 섹소폰 전주에 이은 장국영의 블루지한 굵은 음색은 마치, 시리디 시린 새벽을 연상시킨다. 오랜만에 유튜브에 올려 진 이 곡을 다시 찾아 들었다. B.G 영상은 양조위와 열연한 [해피투게더]를 올려놓았는데, 극 중 오열하는 장국영의 모습이 왜 그토록 아프게 다가오는지….

Sting ‘I love her, but She loves someone else’
-음악프로그램 PD로 30년을 살았다. 중간 중간 교양과 선교, 다큐물을 넘나들었지만, FM은 결국 음악을 빼고는 그 어떤 프로그램도 제작할 수없는 매체다. 머리가 제일 맑아지는 순간도 음악을 모니터링 할 때고, 당연 나의 보물 제1호 역시 열권에 달하는 음악노트들이다. 컴퓨터로 작성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글을 받아쓰는 것 같아,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직접 기록하는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해왔다. Sting은 이 노트들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아티스트다. 장르는 물론,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달란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예술가이자 철학자라고 할까?

언뜻 그는 연애지상주의자 연 가사를 쓴다. ‘바람 든 무’ 같은 호소력 짙은 음색도 낭만을 덧칠한다. 하지만 그는 힘들고 난해한 가사를 쓰는 뮤지션 중의 한 사람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자기 주도적 멘탈이 매우 강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이 노래 역시, 모호한 삼각관계를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어머니와 그녀의 신앙, 신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있다. 멜로디는 매우 서정적이고, 가사를 무시하고 들으면 위험한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팅은 속삭인다. ‘난 수도자 영성을 존중하는 아티스트…’ 라고.

-2005년. 올림픽 경기장에서 Sting 공연을 보았다. 잔디밭이었지만, 직접 공연 장비를 챙겨 온 스팅의 고집스러운 열정이 주변의 소음을 모두 잠식해 버렸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Part Ⅰ’
-음악을 좋아하면 당연 오디오에도 집중하게 되지만, 음반 녹음을 담당한 엔지니어를 보고 구입 결정을 하는 친구도 있다. 그의 방은 오디오장비로 도배됐음은 물론이다. 쫌 유난 아닌가? 하는 물음에 그 친구 왈,
‘마리아 칼라스가 언제 내 앞에서 이렇게 나만을 위한 공연을 해 주겠나?’ 깨갱… 거친 호흡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신해철의 이 곡을 들으며 나 또한 그 거칠고도 살아있는 호흡을 체감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훅~~ 연기를 내뿜더니, 그가 내 앞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백을 읊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나의 아버지도 가고 없다. 아버지와 오빠는 살아생전 몇 마디쯤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눴을까? 그럼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버티다 오빠가 달려와 눈빛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눈을 감았다. 신해철의 고백이 가슴을 후벼낸 ‘아버지와 나 Part 1′ 과, 아기울음소리로 시작과 끝을 엮은 Part 2.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그가 되어주고 싶다…’고 진정 화해와 사랑을 고백하는 Part 3까지… 유려한 문장과 진중한 반성, 굵직한 철학을 버무린 한 편의 완벽한 서사다.

피오나 애플 ‘I love you to love me’
-이 곡은 아무 전제 없이 그냥 한 번 들어보시라. 그러면 그녀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에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그녀의 4집 앨범 중, ‘Every Single Night’까지 듣고 나면 그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이 경이로워질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 개성을 분출해내는 괴팍한 천사.
강렬하고 급진적인 고요의 독백!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
그녀의 컴백에 전율이 흐른다, 여전히 강렬하다.
목소리 음역은 콘트랄토이며, 음악적 스타일은 재즈, 얼터너티브 록, 바로크 팝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조용필 ‘창밖의 여자’
-마지막 한곡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음악사에 남을 명곡, 가수 중에 가수, 이미 전설이 된 아티스트…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명명되는 인물이 선명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한창 지적 사치에 탐닉하던 여고생에게 나비넥타이를 하고 헤어스타일은 빵~한 청년. 게다가 발라드인지 트로트인지 알 수 없는 장르들이 뒤섞인 음반이 한눈에 들어 올 리 만무였는데, 그야말로 조용필은 음악으로 세상 모든 선입견들을 멋지게 파괴시켜버렸고 ‘위대한 탄생’을 알렸다.

-수많은 수식어와 수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집약해준 두 사람의 글을 인용하며, 조용필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웅에 대한 나의 경애심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조용필은 대중성을 비켜가지 않으면서도 음악적 혁신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훗날 대중음악 역사는 그를 위해 별도의 장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주엽 지음. [이 한 줄의 가사] 중)

‘우리나라 가수 중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 한 명만을 꼽는다면,
단연 조용필이다’

(가수 송창식)

*김은수 PD
-1990년 가톨릭평화방송(CPBC) 입사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PBC 영화음악’등 다수 음악프로그램 제작
-영화중심 음악프로그램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제작,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