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올해 개설 20주년을 맞아 이즘은 지난해부터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 내 인생의 음악 10곡 >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아홉 번째 순서는 BBS 불교방송의 한지윤 프로듀서입니다.

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음악가와 음악 ‘가’. 나는 후자에 속했다. 음치라고 불리만큼 노래를 잘 부르지도 또 외우지도 못했다. 음계는 물론이고 콩나물만 봐도 머리가 아팠다. 음악점수는 항상 ‘수우미양가’ 중에 ‘가’를 찍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까지 라디오 PD라는 직업을 갖고 음악프로그램을 연출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고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 역시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주제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친구와의 우정, 사랑, 공부, 진로 그리고 부모님과의 갈등. 누구나 겪는 혼란했던 그 시절, 레코드가게 앞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노래를 들었다. 무언가 귀에 쏙 들어오는 내레이션 가사와 음률. 바로 가게에 들어가서 조용필의 8집 앨범 테이프를 샀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주고 산 앨범이 아닌가 싶다.
집에 있던 커다란 라디오 데크에 테이프를 넣고 노래를 들었다. 심지어 이 노래만 계속 이어 듣고 싶어서 공테이프를 사서 복사(불법복제?)한 뒤 계속 틀고, 듣고, 외우고, 따라 불렀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에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사를 다 외운 노래, 심지어 반주 없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되었다. 혼자 감정이입을 하며 노래를 따라 부를 때 머리에 떠오르는 모습은 고민했던 대상들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KBS ‘동물의 왕국’ 영상만이 떠올랐다. 내 인생에서 음악‘가’에서 음악‘양’으로 한 단계 성숙시켰던 노래,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 ‘Pale blue eyes’ 영화 < 접속 > OST
한석규와 전도연 주연의 영화 ‘접속’, 1997년 늦은 여름에 개봉했다. 주말 한 낮, 나는 종로 서울극장 맞은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멀리 창문 밖 극장 간판에 그려진 주연 배우들의 얼굴들을 보며 여자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멜로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유명하다니까, 여자친구가 원하니까 그냥 보러 온 것이다.
영화 속 장면, 심야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하던 한석규PD가 LP로 틀어 준 노래 벨벳(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 감미로운 음악을 듣는 순간 ‘나도 저런 PD하고 싶다’라는 생각은 우연의 일치일까?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는 이런 결심을 했다. ‘나도 멋있는 음악 PD가 되고 싶다, 한석규처럼.’
매년 봄, 가을 개편을 앞두고 데스크에서는 관례처럼 일대일 면담을 통해 “어떤 프로그램을 맡고 싶니?”라고 묻는다. 물론 형식적인 질문이고 절대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포교프로그램 분야를 담당하던 나 역시 형식적인 답변을 한다. “음악프로그램 하고 싶어요” 그리고 5년 뒤 마침내 포교제작팀에서 교양제작팀으로 발령을 받아 처음 음악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희망 사항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나도 한석규처럼 될 수 있겠구나.’
당시 음악 PD로의 꿈을 갖게 해 준 노래, 1960년대 지적이고 감성적인 노래를 불렀던 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Pale blue eyes’. 내 인생의 전환점을 갖게 해준 노래다.

당타이손(Dang Thai Son)의 피아노 연주 < 쇼팽의 녹턴 Op.9-1 >
처음으로 교양제작팀으로 발령을 받고 맡게 된 음악프로그램 < 차 한 잔의 선율 >. ‘아차! 클래식 프로그램이네. 그것도 역사와 전통이 깊은 프로그램. 내가 망치겠구나’ 먼저 겁부터 났다. 항상 음악점수 ‘가’인 내가 ‘클래식이라니’. 먼저 다가온 단어는 ‘절망’이었다.
선배의 조언을 따라 교보문고로 직행해서 클래식 관련 서적을 잔뜩 사왔다. 그리고 보았다. 그리고 몰랐다. 아무리 봐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음반실에 들어가서 구박을 받으면서 클래식 관련 CD를 분류된 종류별로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책상 위 CD 플레이어에 집어넣고 하나씩 들었다. 그냥 무조건 들었다.
문제가 발생했다. 독어는 고등학교 때 했던 것이라서 읽을 수는 있는데 그 외는 한 마디로 무식했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큐시트에 어떻게 적고 음악적으로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면 인터넷으로 금방 검색해서 알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원고 타이핑용으로 공용으로 쓰는 286컴퓨터 2대가 전부였던 시대였다.
다른 선배들에게 묻기에는 자존심이 상했고, 무능해 보일까 봐 겁이 났다. 음악의 흐름과 진행자, 원고, 분위기에 따른 선곡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큐시트 작성하기에 급급했다. 9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까지 무조건 클래식들을 들었다. 어떻게 발음하고 어떻게 소개해야 하는지는 먼저 사전을 찾다가 도저히 안 되면, 예전 진행을 했던 아나운서 선배들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갔다. 이제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급급했던 선곡이 이제 나름대로 연출이 가능해졌다. 음반실에 빼곡하게 꽂혀 있는 클래식 CD장들 사이를 이제는 눈감고 다닐 수 있게 됐다. 더욱 신기했던 일은 관현악이나 협주곡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각각의 악기 소리가 분리되어서 귀에 들렸다. 성악곡 역시 노래 부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손이 간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타이손(Dang Thai Son)의 피아노 연주곡 < 쇼팽의 녹턴 Op.9-1 >.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피아노곡이 내 마음에 큰 울림이 됐던 것이 이 연주곡이 처음이었다. 녹턴을 다른 사람의 피아노 연주로 들어봤다. 같은 곡이지만 달랐다. ‘아, 연주하는 사람의 마음과 감정, 영혼에 따라 곡이 다르게 들리는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곡과 선곡의 흐름에 더욱 집중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베트남의 피아니스트 당타이손의 피아노 연주. 나에게 처음 음감의 세계를 열어준 큰 선물이었다.

김광석 ‘일어나’
1999년 가을. 개편으로 새롭게 맡은 프로그램은 < 살며 생각하며 >다. 청소년 대상으로 상담을 하던 프로그램이지만 기획 의도가 달라졌다. IMF 시대,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함께 공감하는 프로그램이다. 밤 12시부터 새벽 2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된 심야프로그램. 컴퓨터가 없던 시대, 문자도 없던 시대. 유일하게 열려 있는 소통 창구는 전화였다.
4개의 전화번호를 열고 시인 김사인씨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7080음악을 중심으로 전화 상담을 받는 프로그램. 참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프로그램이었다. 사업에 실패해서 가족과 헤어져서 도망 중인 사람들, 큰 병으로 시한부 생명을 이어가며 유일한 낙이 라디오라는 청취자. 수 없이 많이 분들이 사연을 전달해 주고, 또 격려의 전화를 주고, 또 노래를 통해 아픔을 치유하고 공감하는 시간이다.
신혼 초 젊었던 시기였던 나에게는 남의 얘기 같았지만, 그분들의 마음이 전파를 타고 전국 곳곳에 전달되어 아픔을 서로 나눌 수 있는 역할을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힘든 심야 생방송이었지만 큰 사명감을 가졌다.
방송국도 IMF를 넘기기 어려웠다. 제작비 축소로 1년 동안 진행된 <살며 생각하며>의 마지막 방송을 5일 앞두고 아쉬움에 모든 코너를 없애고 시작부터 전화 연결을 받았다.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말에 전국에서 전화로 상담 신청이 폭주했다. 4개의 전화번호는 폭주했다. 연결된 청취자 분들마다 한 결 같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격려를 해주셨다.
이 프로그램 때문에 ‘자살 결심을 포기 한 분’, ‘부모님과 화해한 분’, ‘경찰에 자수한 분’, ‘자식을 위해 이혼을 포기한 분’, ‘새롭게 막노동부터 다시 시작한 분’. 셀 수 없는 사연들을 담은 전화벨소리가 하루에 200여 통이나 울렸다.
드디어 금요일, 마지막 방송이었다. 마지막으로 전화 연결된 청취자가 < 살며 생각하며 >를 통해 ‘포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얻었고 새 출발 다짐했다는 사연을 전달하며 신청한 노래다. 바로 김광석의 ‘일어나’

영화 < 인생은 아름다워 > OST ‘Life is beautiful / La vita è bella’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주연의 영화 < 인생은 아름다워 >. 1997년 개봉된 이 영화를 한 참 지난 뒤 주말 TV를 통해 보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죽음의 길로 들어서며 웃음을 지었던 그 모습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개편을 통해 새로 맡게 된 프로그램이 < 영화음악실 >이었다. 영화의 전문가도, 또 영화음악에 무지했던 나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당시 개편 직전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담당 부장에게 출장을 신청했다. 회사의 어려운 사정상 안 될 것 같았는데 쉽게 허락을 받았다.
“PD는 책상에만 있는 직업이 아니야, 자주 콧바람을 쐐야지. 다녀와” 당시 그 선배의 말 한마디는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 후 내가 부장이 되어서도 항상 후배들 교육할 때 강조했던 대목이다. 세상을 보는 관점,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 사물을 관찰하는 안목. 열심히 돌아다닐 때 생기는 것이고 그래야 창의력이 생긴다. 그래야 PD가 되는 거지.
처음 가보는 영화인들의 축제, 부산국제영화제. 곧 영화음악실 담당 PD가 된다는 명분하에 그 속에 끼어든 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느낌이 들었지만 굳굳하게 행사들을 쫒아 다니며 영화를 관람했다. 각 나라의 감독들이 그들의 처지와 상황과 이념, 관점들을 영화로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라디오에서 영화음악과 진행자의 줄거리 소개 외에 영상을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작가하고 상의 끝에 새로운 코너 구성을 마쳤다. 비디오가게에서 영화를 빌려서 중요 장면들을 플레이했다. 라인을 연결해서 그 영상들의 대화나 효과음, 배경 음악들을 오디오로 저장했다. 그리고 영화의 한 장면을 소개하며 비록 무음 때문에 방송사고에 가깝게 느껴진다고 해도 스토리를 전달했다. 비록 볼 수는 없지만 라디오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시그널 음악을 골랐다. 무언가 기존과 다른 < 영화음악실 >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청취자들께 전달하고 싶었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기존의 시그널 음악을 바꾸는 모험을 시도했다. 그때 선택한 < 영화음악실 > 시그널 음악, 바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OST ‘Life is beautiful’이다.

윤태규 ‘My way’
< 활력충전 2시 4시 >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했다. 침체 된 방송국 프로그램들을 대표하고 청취자들의 문자를 통해 많은 참여를 유도하게 만드는 목표를 가진 전략 프로그램이었다. 과정은 큰 성공이었다. 하루 100개에 불과했던 문자참여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시작한 지 5개월 만에 ‘1일 2시 생방송 동안 6,400여 개의 청취자 문자참여’를 기록했다. 사장님이 고급 양주 한 병을 스텝들에게 내주면서 회식 때 쓰라고 칭찬도 했다.
양(陽)이 있으면 음(陰)이 있는 법. 새로 취임한 사장의 인사로 인해 보직을 잃은 선배와 술 한 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둘이 2차로 노래방을 갔을 때 그 선배가 윤태규의 ‘My way’를 처절하게 불렀다. 평소 나도 좋아서 그냥 틀었던 노래. 하지만 선배의 노래는 비장했다.
그리고 난 뒤 5년이 지나 어느 날,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이 노래를 들었다. 평소 내가 자주 틀었던 노래였지만 이날은 왠지 특별하게 다가왔다. 가사 하나하나가 귀에 박혔다. 그리고 예전 그 선배의 노래가 왜 비장했는지 비로써 이해가 됐다. 나 역시 그 선배와 비슷한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읊조렸다.
‘누구나 한 번쯤은 넘어질 수 있어, 이제 와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어
내가 가야 하는 이 길에, 지쳐 쓰러지는 날까지, 일어나 한 번 더 부딪혀 보는 거야’

킹 크림슨 ‘Epitaph’
1969년도에서 1970년대 초까지 세계각처에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아픔을 담은 노래 ‘묘비명’. 1969년에 태어난 나에게 이 노래는 그냥 귀에 익은 올드 팝송에 불과했다. 그냥 지나가다가 레코드가게에서, 혹은 카페에서, 라디오에서, 제목도 모르고 누가 불렀는지도 모르던 팝송이다. 단지 느낌이 비장하고 웅장하다는 느낌이었다.
< 음악의 마을 >을 담당하게 되었다. 팝송으로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청취자들의 신청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시간 신청곡이 올라오는 모니터를 보면서 검색하고, 선곡하고, 흐름을 타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어느 날 바쁘게 생방송을 진행하던 그 순간 킹 크림슨(King Crimson)의 ‘Epitaph’이 신청곡으로 올라왔다. 무려 9분에 가까운 노래 길이. 선곡 전 모니터링을 하는 순간 망설여졌다. 귀에 익어서 아는 팝송이고 가사 내용도 이미 알던 내용이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51분40초가 리얼타임인 < 음악의 마을 >. 이 노래를 틀면 마지막 코너는 할 수도 없었고, 후 CM이 나가고 나면 끝 곡은 물론 클로징 멘트도 아슬아슬했다.
이 노래를 신청곡으로 보낸 청취자의 문자 내용은 참 좋았다. 하지만 진행자나 작가나 모두 반대의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선택의 순간, 나는 “진행 1 스타트”라고 외쳤다. 그리고 흐르는 노래, ‘Epitaph’. 모든 스텝이 ‘뜨악’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 노래는 너무 길어서 잘 안트는데요.” 진행자의 푸념 어린 목소리도 들렸다. “노래 끝나고 후CM 나간 뒤 시그널 음악으로 ‘쫑’멘트 부탁드려요”라고 말하며 노래를 감상했다.
창밖의 풍경이 들어왔다. 그리곤 이 노래와 어울리는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선택하기 잘했네’. 후회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의문도 들었다. ‘우리는 왜 항상 프로그램의 끝을 노래로 마무리 하려고 할까?’

김범룡 ‘왜 날’
살다 보면 좋은 시기도 있고, 힘든 시기도 있다. 인생의 굴곡은 라디오 방송을 듣는 사람이나, 라디오 방송을 만드는 사람이나, 누구나 상관없이 항상 찾아온다. 과연 그 순간을 어떻게 현명하게 이겨내고 견뎌내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달라질 뿐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 그 단어를 누가 만들었을까? 힘들고 어려운 순간을 이겨내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아닐까 싶다.
라디오 PD가 방송을 할 수 없는 순간도 살다 보면 찾아오게 된다. 평생을 몸담고 살아온 곳. 평생을 청취율과 씨름하며, 기획하고, 구성하고, 연출하던 순간들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과연 그때 어떤 기분이 들까?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 따뜻한 봄날, 잔잔히 들려오는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진행자의 멘트와 귀에 익은 음악들. 만약 내가 이 프로그램의 PD라면 이 노래 다음에 이 노래를 붙일텐데. 하지만 나는 그 방송국의 PD도 아니고, 또 내가 다니던 방송국에서 더 이상 PD가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강화도로 떠났다. 바람을 쐬기 위해서였다.
블루투스로 연결된 오디오를 통해 저장된 음악들이 흘렀다. 어느 순간 내가 선곡을 했다. 이 노래 다음에 이 노래, 그리고 이 노래 다음에는 이 노래. 직업병처럼 선곡을 하는 나를 친구가 안쓰럽게 쳐다보곤 운전에 집중한다.
나 자신의 이런 모습을 깨달았을 때 선곡하며 들었던 노래가 평소 좋아했던 김범룡의 ‘왜 날’이었다. 예전 스튜디오 출연했던 범룡이 형의 라이브를 듣고 흠뻑 빠졌던 노래다. 라디오 PD가 라디오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선곡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아무리 힘든 시간이 다가와도, 이 또한 지나간다.

애니메이션 < 스노우맨 > OST ‘Walking in the air’ (피아노 솔로)
영국의 명작 애니메이션 < 스노우맨(The Snowman, 1982년) >. 어린이를 위한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와 함께 부드러운 그림체와 함께 흐르는 피아노곡은 따뜻한 감성과 자극하며 저절로 눈물이 나온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던 나는 우연히 DVD로 < 이웃집 토토로 >를 함께 봤다. 그리곤 큰 감동을 받았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그를 연구하다 보니 내가 어렸을 때 가장 좋아했던 만화영화 < 미래소년 코난 > 역시 그의 작품이었다. 그 후 진정한 마니아는 아니지만 마니아인 척하며 DVD를 모으고 열렬히 시청했다.
방송 일로 바빠서 아이들과 시간을 갖지 못했던 나는 애니메이션 DVD를 통해 아빠의 역할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좋아서 봤던 측면도 강했다. 그 폭이 늘어나면서 접하게 된 애니메이션 스노우맨. 마침 12월 말 눈이 오던 때였다. 나도 모르게 눈이 충혈 되었고 아이들도 엉엉 울고 있었다.
그렇다. 거친 세상을 살다가 잊고 있었던 내면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순수함의 단지. 그 단지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살짝 열린 것이다. 단지의 뚜껑을 열어준 피아노 연주곡 ‘Walking in the air’. 항상 눈이 오는 날 선곡하는 18번 음악이 되었다.

나라 ‘고고씽씽’
현재 담당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다. 매일 낮 12시15분부터 2시까지 진행되는 생방송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말을 줄이고 단순하게 소통하는 BGM으로 만들려고 했다. 진행자인 아나운서와 작가와 함께 첫 스텝 회의를 갖던 날, 난 두 사람한테 구박을 받았다.
제작비도 없었고 복잡한 것보다 선곡으로 승부를 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무언가 만들어보려고 의기가 충만해 있었다. 새로운 구성, 새로운 코너, 그리고 두 사람의 빛나는 눈동자 4개. 난 민망했다. 그리고 나 역시 숟가락을 얹어서 그 대열에 합류했다. 2020년 5월 4일 개편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라디오PD로 살아온 25년의 세월 속에서 이렇게 열정을 갖고 제작 연출해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특히 매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코너 < 우리 동네 사장님 >은 코로나19로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이나 자영업을 하는 분들을 응원하기 위해 만든 시간이다. 사장님 본인이나 종업원, 지인, 부모님들을 전화로 연결해서 가게를 홍보하고 어려움을 나누는 시간이다. 그리고 연결된 분들의 음성편지를 들으면서 그분들은 물론 진행자, 작가, 엔지니어, 그리고 나까지 대부분 함께 눈물을 글썽인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시기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다른 소상공인들 걱정하고 자기를 걱정하는 부모님을 더 걱정한다. 라디오가 가진 공감의 능력과 소통의 힘이 가장 빛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음악들을, 그리고 다양한 효과음과 소리들을 들려주면서 청취자와 함께 호흡한다.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 홍보 스팟을 제작하기 위해 우연히 음악을 검색하다가 가수 나라의 ‘고고씽씽’이라는 노래를 접하게 됐다. 2009년에 나온 노래, 그리고 금방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진 노래. 하지만 무엇보다 코로나 19로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께 “힘내세요”라고 들려드리고 싶은 노래다.
고고씽씽 노래를 불러요 고고씽씽 흥겨운 멜로디
고고씽씽 근심걱정 날려버리고
고고씽씽 하하하하하 고고씽씽 힘들땐 웃어요
고고씽씽 다함께 떠나요
*프로필
한지윤PD (BBS 불교방송)
現 < 이효주의 싱싱라디오 > 담당PD, < 활력충전 2시4시 >, < 트로트 전성시대 >, < 108가요 >, < 뮤직펀치 >, < 다시 듣고 싶은 노래 >, < 음악의 마을 >, < 영화음악실 >, < 살며 생각하며 >, < 차 한 잔의 선율 >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