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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Love at first sight! 이즘 필자가 사랑하는 데뷔 앨범

누구에게나, 무슨 일에나 ‘처음’은 존재한다. 그리고 소중하다. 뮤지션도 마찬가지다. 한두 개의 앨범을 남기고 사라져간 원 히트 원더든 꾸준한 커리어를 기록한 아티스트든 세상에 내놓은 첫 작품이 가지는 아우라는 분명 남다르다. 설익은 어색함과 미숙함, 가슴을 가득 채운 열정과 풋풋함, 그리하여 신인만의 패기! 데뷔작만이 지닌 특별한 가치다.

이번 특집에서는 IZM 필자들이 사랑하는 데뷔 앨범을 골랐다. 선정작은 EP나 싱글 대신 보다 온전한 ‘작품 단위’로의 격을 갖춘 정규 음반으로 한정했다. 역사가 인정하는 명반과 개인적인 추억 가운데 무게추는 각 필자의 마음에 맡겼다. 한국인에게 주어지는 세 번의 시작 기회(양력/음력 1월 1일, 3월 2일 신학기) 모두 지나 2023년 달력을 반 가까이 넘겼으나, 이번 특집을 통해 잊고 있던 음반과 재회하거나 새로운 음악을 발견하면서 ‘처음’의 싱그러움을 되찾길 소망한다.

스톤 로지스(The Stone Roses) < The Stone Roses > (1989)

내 얕은 역사 지식과 로큰롤 편애 성향을 결부했을 때 1989년의 유럽은 두 가지 사건으로 요약된다. 첫째는 공산주의 체제의 종말을 알린 베를린 장벽의 붕괴이며, 둘째는 매드체스터의 기수 스톤 로지스의 등장이다. 그만큼 숭배를 갈망하며(‘I wanna be adored’) 세상에 나온 네 청년은 꽤 충격이었다. 영국 전통 기타 팝에 미국에서 건너온 애시드 하우스를 융합한 ‘She bangs the drums’, ‘Waterfall’, ‘Fools gold’는 잠들어 있던 댄스 DNA를 자극했고 존 스콰이어의 카멜레온 기타 연주와 탄탄한 리듬 파트, 그리고 이안 브라운의 무미건조한 보컬이 오차 없이 맞물린 ‘This is the one’, ‘I am a resurrection’은 불붙은 록 스피릿에 기름을 부었다. 록과 댄스의 공존을 모색해 기존 관행을 격파한 진짜 ‘저항 음악가’의 데뷔 앨범. 그렇게 < The Stone Roses >는 시대를 초월한 댄스록 교본으로 맨체스터에 가본 적도 없는 나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김성욱)

리버틴스(The Libertines) < Up The Bracket > (2002)

2001년, 런던은 뉴욕의 스트록스가 < Is This It >으로 가한 일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에 NME 웹진을 비롯한 영국 언론은 술과 마약에 빠진 젊은이들 리버틴스를 대항마로 세운다. < Up The Bracket >은 스트록스의 허세 섞인 뉴욕식 허무주의와 달랐다. 클래시의 과격함과 스미스의 문학성, 킹크스의 간결함 등을 한데 모으고 강렬한 기타 리프와 우아한 멜로디, 단편소설과도 같은 가사로 무장한 채 맹렬하게 질주한다. ‘Time for heroes’는 계급에 의한 절망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고, ‘Death on the stairs’는 삶의 무료함과 불안한 미래에 대해 절규한다. 앨범의 끝은 ‘나는 잘하고 있다’라며 되뇌는 ‘I get along’이 멋지게 장식한다. 모든 것은 영화 < 라이프 오브 브라이언 >의 에릭 아이들처럼 시궁창 속에서도 밝은 면을 보려는 영국의 정서 그 자체였다. 그들의 전성기는 언론의 과도한 부풀리기와 마약중독 등 여러 문제가 겹치며 빠르게 막을 내렸지만, < Up The Bracket >은 개러지 록의 고전이자 길 잃은 청춘들의 친구로 자리 잡았다. 고등학교 시절, 멘토라기보다는 옆에서 같이 푸념하고 욕해주던 동네 형처럼 다가온 소중한 작품이다. (김태훈)

브라이언 맥나이트(Brian McKnight) < Brian McKnight > (1992)

노래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알앤비 과목의 살아있는 교과서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 ‘One last cry’가 수록된 데뷔 앨범 < Brian McKnight >에서 그는 거의 모든 트랙에 직접 작곡으로 참여하며 음악적 역량을 자랑한다. 데뷔 때부터 이미 완벽에 가까운 실력으로 음악 세계를 정립하였기에 브라이언 맥나이트는 앨범을 낼 때마다 자신의 데뷔작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가창의 측면에서도, 작법의 측면에서도 그건 힘든 일이었다. 그의 다른 음반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첫 작품의 완성도가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김호현)

잭 아벨(Zak Abel) < Only When We’re Naked > (2017)

데뷔와 첫 내한이 함께. 영국 현지에서도 이제 막 반응이 오기 시작했던, 먼 나라에서 혼자 품으리라 다짐하며 보고 싶단 마음조차 체념했던 젊은 뮤지션을 한국에서 그렇게 빨리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잭 아벨의 실물 라이브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의 몸에 체화된 그루브가 짧고 강하게 튕기는 탁구공 리듬과 같았다는 것. 유소년 탁구 챔피언 출신인 이 청년에겐 몸으로 한계를 넘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열정과 자신감이 가득했고, 그 기세는 알몸일 때에야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패기 어린 앨범 < Only When We’re Naked >로 표출됐다. 소울에서 영감을 받고 자란 힘찬 건반과 허스키한 목소리가 청춘의 불안과 의구심을 넘어 존재의 자각과 삶의 긍정을 차례대로 외치고 있었다. 숱하게 리플레이했던 트랙이 화자의 신체에서 형상화되는 걸 목격했던 순간. 작품이 완성되고 무대에서 피어나는 걸 지켜봤으니 이토록 강렬한 추억이 또 있을까. (박태임)

넉살 < 작은 것들의 신 > (2016)

한창 힙합에 심취해 있을 때는 동경하는 아티스트의 노랫말을 삶의 지침서로 삼으며 여러 번 곱씹어 보곤 했다. 그럴만한 가사를 발견하지 못해서인지 혹은 머리가 조금 차가워져서인지는 몰라도 그때의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더 잦은 요즘이지만 넉살의 < 작은 것들의 신 >은 여전히 나에게 강력한 울림을 준다. 2016년 하루 종일 학교 안에 갇혀 있으면서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았던 시기에 ‘팔지 않아’는 얕지만 강고한 신념을 심어주었고 ‘밥값’은 위로와 함께 묘한 열정을 주입했다. 이제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듣던 추억까지 안겨준 앨범. 공식적으로 VMC는 해체했지만 딥플로우의 < 양화 >와 함께 그들의 황금기를 열었던 넉살의 데뷔앨범은 아직 내 플레이리스트 안에 살아 숨 쉰다. (백종권)

자우림 < Purple Heart > (1997)

이 음반에 세월의 흔적은 없다. 먼지 쌓일 틈 없이 그만큼 오랜 시간 널리 사랑받은 히트곡이 가득하다. 수많은 뮤지션이 리메이크한 청춘 발랄 명곡 ‘일탈’부터 자우림 특유의 비애감이 넘실대는 ‘파애’, ‘안녕 미미’ 그리고 실험적 사운드로 점철된 끝 곡 ‘Violent violet’까지. 앨범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자우림 음악이 놓여 있던 것 마냥 시작부터 내 음악을 맛나게 완성해 낸다. 김윤아 솔로 커리어에 빠져 자우림 흔적을 다시 좇았던 사람으로서 이 데뷔 음반이 가져다준 신선한 즐거움을 잊지 못한다. 데뷔 때부터 밴드 음악색을 정확히, 제대로 내뿜은 작품. 산울림 1집 < 아니 벌써 >처럼 이 앨범엔 세월이 지나도 늙지 않을 근사한 젊은 노래들이 놓여 있다. (박수진)

보스톤(Boston) < Boston > (1976)

싱글 히트곡 ‘More than a feeling’과 ‘Peace of mind’, ‘Foreplay/Long time’, 세 곡만으로도 내 구매력을 자극했다. 고등학교 때 산 보스톤의 데뷔앨범에는 이상하게도 낯선 노래가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AFKN 라디오에서 들어왔던 노래들이 모두 이 한 장에 있는 수록곡이었기 때문이었다. 브래드 델프의 시원하면서 불안하지 않은 고음, 과하지 않은 탐 슐츠의 그루브한 리듬 기타,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프로그레시브의 접근법까지 이 첫 음반은 1970년대 록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 Boston >은 이들의 데뷔음반이자 베스트 모음집이다. (소승근)

유엠씨(UMC) < XSLP > (2005)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듣던, 흔히 잡식성이라 불리는 취향을 자부했던 어린 작가 지망생에게 유독 힙합만큼은 외면하고 싶은 메뉴였다. 거친 이미지는 물론이며 보다 선율에 귀를 기울인 그때의 감상법에 리듬 중심으로 구성된 랩이 두터운 편견의 벽을 뚫고 안착하긴 무리였으니까. 철저히 주류에서 벗어난 문제작 < XSLP >가 마음을 허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라임 없이 플로우로 메시지에 집중한 이야기꾼 유엠씨가 절대적이었다. ‘Shubidubidubdub’과 ‘Media doll part. 2’ 같은 사회 비판도 서슴없지만 ‘가난한 사랑 노래’, ’91’학번 등 청춘을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가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폐부를 찔렀다. 장르란 한정적 분류를 떠나 핵심은 분명 진심이었다. 그것을 증명한 앨범을 접했을 때, 내 인생 또한 명확하게 변곡의 순간을 맞이했다. (손기호)

재지팩트(Jazzyfact) < Lifes Like > (2010)

북악산 자락을 낀 종로의 한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출발한 힙합 그룹 재지팩트는 동년배보다 한발 빠르게 인생을 논했다. 랩으로 장난을 일삼던 동네 학생들은 ‘각자의 새벽’이나 ‘Smoking dreams’를 들으며 동향 선배들의 멋에 감화되었고 철없이 이를 모방하곤 했다. 조용히 삶의 지침을 수정했던 학창 시절의 소중한 경험을 반추하며 이 데뷔작을 재차 뜯어봐도 매력은 여전하다. 프로듀서 시미 트와이스가 ‘Moody’s mood for love’를 비롯해 여러 재즈곡을 샘플링해 꾸민 비트엔 세련미가 넘치고, 그 위에 수놓은 빈지노의 날카로운 언어는 동시대의 청춘에 색채감과 기대감을 부여한다. 젊음을 사용할 줄도 모르던 아이의 취향이 정착할 적당한 공간이었다. (손민현)

웬디 왈드먼(Wendy Waldman) < Love Has Got Me > (1973)

1970년 앤드류 골드, 칼라 보노프(Karla Bonoff)와 함께 포크록 밴드 브린들(Bryndle)의 멤버였던 웬디 왈드먼(Wendy Waldman)은 1973년 < Love Has Got Me >를 통해 솔로로 데뷔했다. 당시 < 롤링 스톤 >지가 ‘올해의 싱어송라이터 데뷔’로 그를 선정한 것은 당연했다. < Love Has Got Me >는 삶에 대한 긍정으로 빛나는 포크 앨범이다. 아침 기차와 해적선이 등장하는 모험이 곡마다 낭만적이며 멕시코 전통음악을 차용한 ‘Gringo en Mexico’, 조지 거쉰 스타일로 빗소리를 청각화한 ‘Waiting for the rain’ 등은 데뷔 앨범 특유의 결의로 찬란하다. 세상이 그를 합당한 환영으로 맞지 않았다는 점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안타깝다. 순수를 기억하고 싶을 때, 좌절된 여행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이 앨범을 꺼내든다. (신하영)

건스 앤 로지스(Guns N’ Roses) < Appetite For Destruction > (1987)

‘Sweet child o’ mine’과 호주 밴드 오스트레일리안 크롤(Australian Crawl)의 ‘Unpublished critic’ 사이 유사점, ‘Rocket queen’ 속 과한 신음 등 퇴색한 감도 없지 않지만 처음 준 충격파는 못 떨쳐낸다. 검은 탑 햇에 깁슨 레스폴을 애무하는 슬래시와 부담스러운 짧은 바지에 뱀춤 추는 액슬 로즈가 그땐 멋져 보였다. 결정적으로 곡이 좋았다. ‘첫 감상에 세 곡 이상 꽂히면 취향 저격’이란 개인적 규칙은 ‘Mr. Brownstone’과 ‘My Michelle’, ‘Think about you’로 한도 초과했다. 가끔 < Appetite For Destruction >같은 음반을 두세 장 더 발매했으면 록 역사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섰을까 봐 의미 없는 상상을 해본다. 시대는 너바나와 얼터너티브를 원했지만 건즈 앤 로지스가 피운 아메리칸 하드록의 마지막 불꽃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염동교)

제이클레프(Jclef) < Flaw, Flaw > (2018)

시종일관 흠(flaw)을 탐구하지만 흠잡을 여지가 없다. 벌컥 쏟아내다가도 여유롭게 흘려내는 랩과 보컬, 자극적인 기계음으로 귀를 간지럽히면서도 프로듀싱에는 일말의 느슨함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정형화된 형식을 유연하게 벗어나는 운율 구조와 그 시니컬함 속 짙은 연민까지, 수사마저 짜릿한 충격의 연속이다. 제이클레프(Jclef)와 < Flaw, Flaw >의 이 압도적인 등장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누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은 물론,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재능이 주는 경외감,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했다는 학구적 희열마저 선사했다. 미지의 신대륙에 첫발을 딛는 개척자의 이 설렘, 수많은 음악 팬들이 새로운 얼굴을 그토록 열망하는 이유가 아닐까. (이승원)

칸예 웨스트(Kanye West) < The College Dropout > (2004)

좋은 글을 읽으면 글쓴이가 궁금해지곤 한다. 단순히 ‘글 잘 쓴다’라는 일차원적인 감상을 넘어 ‘이 작가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일까?’ 하는 인간적인 호기심을 유발하는 글이 좋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로 칸예 웨스트와 사랑에 빠진 나는 < The College Dropout >으로 그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대답까지. 평범하지만 날카롭고, 허세 없이 솔직한 비판, 자기 서사의 메시지가 ‘모두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말하며 그와 나를 연결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인간에게 오랜 친구 같은 기분을 느꼈다. 기적처럼. 뛰어난 완성도, 혁신적인 문법, 후대에 끼친 영향력 등 이 앨범이 가지는 가치는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나에게 부차적이다. 그저 ‘Through the wire’를 들으며 생각할 뿐이다. 나는 이 인간을 사랑해, 그리고 영원히 그렇겠지. (이홍현)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 Rage Against The Machine > (1992)

첫 음반의 첫 곡 제목이 ‘Bombtrack’이라니, 반할 수밖에. 불에 타들어 가는 도화선 도입부를 지나면 사운드는 정말로 폭발한다. 앨범 내내, 활동 내내 밴드는 그저 폭발한다. 음악 외에도 이들은 신념, 저항,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지만, 미성년의 아이는 음악밖에 들리지 않았다. 기타, 베이스, 드럼의 단출한 구성에 반복적인 리프와 직관적이면서 뒤틀리는 리듬이 이들의 개성이자, 모든 것. ‘기계’처럼 각 잡힌 완성도가 빠져나올 수 없는 마력을 뽐낸다. < 록, 그 폭발하는 젊음의 미학 >에 제대로 걸맞다! 메탈과 랩이 완벽하게 융합한 퓨전의 이상향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은 이 앨범과 함께 탄생했지만, 나는 이 앨범과 함께 죽을 것을 다짐한다. (임동엽)

저스티스(Justice) < Cross > (2007)

온몸이 압도되는 경험을 한 적 있는가. 일렉트로 하우스의 영원한 바이블, 저스티스의 < Cross >는 마치 천명을 따라 마굿간을 찾아온 동방박사처럼, 그리고 심장을 직격한 제우스의 천벌처럼 불현듯 다가와 자연스레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의 음악 취향과 사고 체계가 이 앨범 한 장에 귀속되어 있다 한들 과언이 아니다. ‘Genesis’가 쏘아 올린 웅장하고도 지저분한 전율이 ‘Let there be light’의 불길한 창조 신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때 한줄기 빛이 내렸고, ‘D.A.N.C.E’와 ‘DVNO’가 MTV와 댄스 플로어 시대의 광채를 완벽히 복원하는 순간 충성을 맹세했다. 지금 당장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면, 이 앨범을 듣는 족족 그때의 그 소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장준환)

티아라(T-ara) < Absolute First Album > (2009)

본격적인 앨범 단위 청취를 넘어 실물 소유에 대한 욕구까지 주입한 티아라의 유일무이한 정규작. 그간 구매의 영역까지 발 들인 이를 만나지 못해 내심 아쉬움을 안고 살던 중 세상 다양한 장르가 뒤섞인 IZM에서 동지 몇몇을 조우했다. 분명 뜻밖이긴 했지만 귀여운 의성어를 앞세운 ‘Bo peep bo peep’의 파급력만 돌이켜 보면 당연한 접점이었다. 개인적으론 ‘처음처럼’, ‘Tic tic toc’, ‘Apple is a’처럼 흥겨움 속에 묘한 아련함을 스며 넣은 트랙에 훨씬 귀가 쏠렸다. 데뷔곡 ‘거짓말’을 만든 조영수의 알앤비와 트로트 질감부터 김도훈, 방시혁의 발라드 감성, 나아가 트렌디한 흥행을 이끈 신사동 호랭이의 펑키(Funky)함까지. 유수 작곡진의 분야별 강점을 ‘댄스’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 묶어낸 덕분에 티아라는 다각적이면서도 독보적인 걸그룹 이미지를 취할 수 있었다. 취향을 잡아가던 청소년기에 꽂힌 결정타 한 방이 시대와 나 모두를 뒤흔들었다. (정다열)

브루노 마스(Bruno Mars) < Doo-Wops & Hooligans > (2010)

MP3와 스트리밍에서 다시 먼 시간을 돌아가 LP로 회귀하기까지, 어디에도 어울리고 찾게 되는 앨범이다. ‘Talking to the moon’, ‘Just the way you are’ 등 개별 트랙도 유명하지만 제목 전면에 내세운 두왑(Doo-Wop) 사운드를 바탕으로 알앤비, 소울 등의 흑인 음악을 조화롭게 빚어내어 전체적으로도 부드럽고 유려하다. 멜로디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허스키한 보컬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 Unorthodox Jukebox >나 < 24K Magic > 등 강렬한 인상의 차기작보다 꾸준히 손길이 가는 이유다. 이 편안함이 < Doo-Wops & Hooligans >를 가끔 추억에서 꺼내보는 음반이 아닌 현재의 음악으로 만든다. (정수민)

위저(Weezer) < Weezer > (1994)

삶이 피곤하면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고 머리를 비우고 싶다. 쉬운 음악이 필요한 순간, 그럴 때 위저의 데뷔 앨범 < Weezer >를 종종 찾게 된다. 멜로디는 직선적으로 착착 감기고, 파워코드 위주의 흥겨운 기타 연주는 다리를 수시로 들썩이게 만든다. 언제 들어도 귀여운 리드 보컬 리버스 쿼모(Rivers Cuomo)의 목소리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No one else’, ‘Buddy Holly’, ‘Holiday’ 류의 명랑한 트랙을 보좌하는 ‘Undone – the sweater song’, ‘Say it ain’t so’, ‘Only in dreams’ 등 살짝 무거운 곡의 존재감도 든든하다. 파란색 배경 앞에 어정쩡한 자세로 선 네 멤버의 모습처럼 음반은 쿨한 록스타보다는 쉽고 친근한 동네 친구에 가깝다. 그래서 정겹고, 사랑스럽다. 객관적으로도 좋은 앨범이지만, 충동적으로 동네 중고 서점을 찾아가 CD를 구매한 날이 알고 보니 발매 25주년이었던 사실은 여기에 각별함을 한 스푼 더한다. (한성현)

정리: 한성현
이미지 편집: 신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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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넉살, 까데호 ‘알지도 못하면서 (???)’ (2022)

평가: 2.5/5

무명 래퍼의 서러움을 그린 < 작은 것들의 신 >, 인기를 얻고 난 후의 혼란스러움을 표현한 < 1Q87 >이 그랬듯 넉살의 음악은 당시에 솔직한 감정을 담고 있다. 펑크(Funk)밴드 까데호가 참여해 기악적 요소를 가미한 ‘알지도 못하면서 (???)’는 같은 기조를 유지한다. 두 장의 완성도 있는 앨범으로 아티스트로서 입지를 굳힘과 동시에 < 쇼미더머니6 >에서의 따뜻한 이미지로 스타 반열에 오른 넉살은 환호와 공격을 동시에 받는 위치에서 느낀 바를 짧은 러닝타임에 담았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직관적 제목이 주제를 밝힌다. ‘Akira’, ‘Nuckle flow’ 등 자신의 대표곡 속 가사를 변형해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앞세운 신곡은 다양한 비유를 들어 브라운관 속 ‘연예인’으로 갇히는 것을 거부한다. 펑크 밴드와의 협업이라는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날카로운 주장을 뒷받침하지만 2분이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호소력을 가지기는 버겁다. 카메라에 비친 모습을 탈피하고자 한 공격적인 이야기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역량을 눌러담은 음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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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 Single Single

쌔끈보이즈(SGBOYZ) ‘궁금해 (Prod. GRAY)’ (2021)

평가: 2.5/5

딩고 프리스타일이 또 한 번 예능적 요소를 가미한 일회성 프로젝트를 내걸었다. 은어를 내세운 이름과 90년대 컨템포러리 알앤비 그룹의 기믹을 모티프 삼은 의도적인 B급 코드의 4인조 힙합 그룹 ‘쌔끈보이즈’가 그렇다. 이는 ‘아마두’와 ‘트로트랩’의 선례에 이어 어느덧 ‘반전 이미지’ 전략이 힙합 신의 주요 셀링 포인트로 정착했음을 말해준다. 래퍼의 이미지 간극을 깊게 조명하여 무해함과 유머러스함을 강조하는 방식은 어느덧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는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레이의 감각적인 비트 메이킹과 박재범의 그루비한 초반 도입은 우수한 합을 보이며 기획 의도의 태생적인 가벼움을 상당수 능가한다. 해학적이다시피 늘어트린 보컬조차 오히려 부담을 줄여 재미와 질적 성취를 일궈낸 셈. 다만 던밀스를 비롯해 차례로 등장하는 로꼬와 넉살 파트는 의아함이 앞선다. 그간 장점으로 평가받은 선명한 딕션은 작풍과 엇갈리는 탓에 내내 감상을 방해하는 요소로 둔갑하기 시작한다. 검증된 랩 실력이나 이들의 매체 적응력과는 별개로 구성원 자체의 특색과 조합을 고려하지 않은 이유다. 결국 모임에 의의를 둘 뿐인 휘발적인 곡은 외적 콘텐츠의 성장을 위한 수단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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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넉살 인터뷰

2017년 < 쇼미더머니 6 >에서 ‘팔지 않아’ 속 ‘우린 우리 자신일 때 더욱 빛나’를 외친 넉살은 그 해 정말 화려하게 빛났다. 2014년 비스메이저 컴퍼니 합류 이후 꾸준히 이름을 알려가던 루키가 2016년 < 작은 것들의 신 >으로 호평받고, 힙합 커뮤니티 힙합플레이야의 라디오 프로그램 ‘황치와 넉치’를 진행하며 인지도를 쌓은 후 최고의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N분의 1’, ‘부르는 게 값이야’, ‘필라멘트’ 등 연타석 안타를 기록하며 힙합 신과 예능계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 후로 우리는 라디오 방송의 목소리로, 유튜브 콘텐츠 등장인물로, TV 예능 프로그램 패널로 어디에서나 넉살을 만날 수 있었다. 딱 하나 드물었던 곳이 음악이었다. 무려 4년 7개월 간의 공백기 동안 새 앨범은 소문만 무성할 뿐 기약이 없었다. 팬들과 리스너들도 애가 탔지만 정말 넉살 본인 역시 혼란스러운 시기 갈피를 잡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긴 시간을 거쳐 신보 < 1Q87 >로 돌아온 넉살을 VMC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여러 고민을 털어낸 듯 밝은 표정으로 우리를 맞은 그는 안정되어 보였다. ‘나 같은 포지션은 없다’는 멀티플레이어의 모습 속에는 시간으로 담금질한, 단단한 자아가 있었다.

4년 7개월 만의 신보다.
공백 기간이 길었지만 준비 기간은 작년 중순부터였으니 작업 기간은 1년 정도다. 그전까지는 ‘해야지…’하고 생각만 하다가 영감이 떠오를 때 작업하자 싶어 기다리고 있었다. 한 3년은 놀았다. 그러다 프로듀서 버기(Buggy)의 비트를 듣고 아이디어를 얻어 ‘Akira’, ‘Bad trip’을 만들었고 앨범의 뼈대를 잡았다. 

맨 처음으로 만든 트랙이 ‘Akira’라고 들었다.
일본 버블 경제 시절 애니메이션은 거의 다 좋아한다. 지브리 초창기 시절 작품도 그렇고. 보통이라면 하이라이트 장면에만 사용될 프레임 구조를 애니메이션 전반에 화려하게 쏟아 넣어 애니메이션이라 믿기 어려운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 요소들 중 < 아키라 >가 으뜸에 있었고, 어느 날 영화처럼 ‘피폐한 미래를 그린 앨범’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영화가 그리는 미래 세계가 2019년인데 당시 작업할 때도 2019년이었으니 묘하게 시기도 맞았다. 아, < 블레이드 러너 >도 앨범에 영향을 줬다. 

앨범 흐름을 놓고 보면 첫 트랙 ‘Bad trip’을 통해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느낌인데, 실제 제작기는 ‘Akira’라는 황폐한 미래의 모습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 아키라 >도 1988년에 나온 작품이니까…(웃음). 앨범 시간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현재 내가 느끼는 것 순서로 진행된다. 전염병이 유행하고 인종차별 등 인권 문제가 다양하게 대두되는 우리 사회, 그 속 광기에 휩싸인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목격했다. 그래서 < 아키라 >로부터 출발하게 된 것 같다. 

사회적 시선으로 출발한 작품인 셈인데, 여러 매체나 평단에서는 이 앨범이 넉살의 자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언급이 많더라. 개인적으로 나는 ‘Akira’처럼 사회적인 메시지가 먼저 들어왔는데.
실제로 그런 사회적인 메시지를 많이 녹여내려 했다. 물론 재미있기로는 개인의 서사가 앞선다. 내 기준에서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더욱 공감해주는 부분도 있다. ‘나도 저렇게 느낄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 그런데 또 너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는 싫었다. 여러 요소들을 흥미롭게 넣어보고 싶었다. 이를테면 내 어린 시절 유행 ‘싸이월드’나 < 리썰 웨폰 > 같은 옛날 영화 제목을 랩에 넣는 방법이 있겠다. 내가 자주 접하던 것들을 언급하며 이 앨범은 과거의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인상을 주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크게 담고 있지는 않아도 내 또래 많은 분들이 함께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앨범을 의도했다. 

넉살이라는 한 개인의 서사를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는 듯한 서사라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살아가는 현시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지금 사회는 뭐랄까… ‘광기’가 있다. ‘Akira’의 도입부에도 원작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를 많이 차용했다. 그런 요소들을 사회와 연결하여 가사를 썼고.

그렇게 세상에 나온 작품이 < 1Q87 >이다. 첫째로 1987년도에 태어난 넉살, 둘째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마지막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가 떠올랐다.
말씀해주신 작품들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은 맞지만 < 작은 것들의 신 > 때와 마찬가지로 큰 맥락을 따라서 차용했다. 사실 이번 앨범 제목은 책에서 따오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저번 앨범도 그랬으니까. 주변에서는 막 ‘소설충’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웃음) 원래 제목은 < 1987 >이었다. 그런데 1987이라고 하면 6월 민주 항쟁이 있었던 해고 이를 소재로 한 영화도 있으니 그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딥플로우 형, 회사 사람들과 조금 더 고민해보고 있던 터였는데, 어느 날 문득 샤워를 하다 ‘1Q84’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 1Q87 >의 Q 역시 물음표, 퀘스천 마크의 Q인가.
맞다. 아직 세상을 하나도 모르겠구나 싶은 메인 테마를 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987년도에 태어난,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의 뜻을 담고 싶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책에서 제목을 따오는 걸 피하려고 했으나, 쉽게 쉽게 가려고 해도 장치나 메타포를 계속 넣는 습관 때문인지… 그래도 자연스러워서 이렇게 제목을 지었다.

(트위터 질문) 무라카미 하루키 외 앨범을 작업하며 기억에 남았던 작품이 있나. 
딱 하나가 떠오른다. 넷플릭스에서 < 미드나잇 가스펠 >을 정말 감명 깊게 봤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력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굉장히 철학적이면서도 복잡한 내용인데, 이번 앨범 준비하는 동안 열심히 보면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없다는 걸 느꼈다. 비주얼적인 면, 거기서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여러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내용 이런 것들이 다 섞이니까 정말 죽여줬다. 다들 봤으면 하는데 안 본다. 추천을 해 줘도 안 봐. (웃음) 사실 진입장벽이 조금 높기는 하다. 

자연히 앨범은 ‘1Q84’와의 공통점을 가져간다. 소설 속 양가적인 삶을 사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넉살 역시 지난 4년 7개월 동안 방송 출연과 랩 활동을 병행하며 예능인과 래퍼를 바삐 오갔다. “두 개의 달이 뜬 세계로 빨려 들어가며 이야기가 시작되잖아요. 소설처럼 앨범도 제 삶의 양면성을 잘 담아낸 것 같아요. 우울함과 즐거움. 예능에서는 밝은 모습이고, 음악에서는 어두운 모습이죠.”. < 1Q87 >을 소개하는 넉살의 이야기가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양가적인 삶의 모습을 털어내는 작품이다. 
이 앨범으로 그런 걸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걸 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원래는 오랜만에 내는 작품이니 조금 가볍게 가자 생각이 많았는데,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결국에는 어두운 앨범이 되었다. 딥플로우 형이 해준 조언으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앨범을 내고 나면 네가 조금 개운해지고, 음악을 할 때 부담감이 줄어들 테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그런 이야기를 할 때도 됐다.”는 말들이었다. 그래서 < 작은 것들의 신 >과는 무조건 달라야 한다는 모토가 있었다. 사운드 부분에서 뉘앙스가 겹치지 않게 하려고 곡 선정 시 프로덕션 부분에서 전작과 유사한 부분은 피하고자 했다. ‘신박한 걸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두 축이 된 트랙부터 살펴보자. ’Akira’는 또 독특한 게 드럼은 굉장히 아프로 비트나 펑크(Funk) 느낌이 강하다.
맞다. 펑키(Funky)하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받은 비트와 다르게 리얼 드럼과 베이스로 녹음을 했다. 까데호(Cadejo)의 김다빈이 후반부 다이내믹한 드럼 연주로 리얼한 맛을 살려줬다. 베이스 역시 까데호의 김재호가 맡았다. 초안과 조금 다른, 앨범의 전체적인 느낌에서는 확실히 튀는 인상의 트랙이다.

반대편 ‘Bad trip’ 역시 실험적인 비트가 인상적인데.
그 곡은 초안과 거의 똑같다. 버기(BUGGY)가 처음 들려줬을 때랑 거의 비슷하고, 앨범 후반부에 편곡만 조금 하고 손본 정도다. 그 트랙을 듣고 버기는 역시 천재다 싶었다. 10년에 한 번 꼴로 좋은 비트를 뽑는다 (웃음). 농담이고. 아무튼 그렇게 ‘Bad trip’을 듣고 이건 너무 좋다, 무조건 1번 트랙 감이다 싶어서 가져왔다.

이 곡에서 넉살은 초반 잔잔한 전개와 달리 후반 소리를 지르는 듯, 끓어오르는 듯한 랩을 양면성 있게 풀어낸다. 
‘잔잔하게 했다가 크게 소리 질러야겠다’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다. 그냥 벌스를 쓰고 나니 후렴에는 더 자극적인 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또 ‘Bad trip’이 1번 트랙이니까 < 작은 것들의 신 >과는 랩의 톤도 조금 다르게 하고, 새로운 후렴구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앨범 첫 트랙 치고 실험적인 이유다. 

실제로 앨범 전반부의 ‘Am I a slave’, ‘Bad trip’, ‘Won’에서는 실험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Akira’나 ‘Bad trip’을 제치고 선공개된 ‘Am I a slave’도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4년 7개월 만에 앨범을 내는데 ‘넉살은 과연 어떤 노래를 가져왔을까?’ 하며 궁금해할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고 싶었다. ‘Akira’를 선공개하면 앨범이 대충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었을 테고, 거미가 피처링한 ‘너와 나’, 드비타와 함께한 ‘추락’을 먼저 풀면 ‘넉살 또 돈 벌려고 하네. 변했네’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랑 ‘Am I a slave’를 먼저 공개하자는 가닥이 잡혔다. ‘넉살이 이런 걸 해? 이상한 거 하네?’하는, 반전을 주고 싶었다. 

시작부터 < 쇼미더머니 >로 출발하는 ‘Am I a slave’의 메시지가 강렬하다. 
돈을 번다고 문제가 다 사라지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정말 돈을 벌고 유명해지고 싶었고, 그걸 얻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또 예전의 내 삶,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하지 않았던 자유로운 삶은 사라졌다.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 쇼미더머니 >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후 힘든 점은 없었나.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본 건 사실 < 쇼미더머니 > 한 철이었다. 그때는 지나다니기만 해도 사람들이 몰릴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그런 점이 불편하다기보다는 개인적인 시간이 너무도 부족해져서 고민이었다. 일 많은 건 당연히 너무 감사하고 좋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놀기도 좋아하고 게으른 사람인데, 스케줄이 늘어나니 나 자신을 돌보고 생각하는 걸 짬 내서 할 겨를도 없었고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밸런스가 어느 정도 잡혔지만 당시엔 균형을 잡지 못해 힘들었다. ‘난 술도 먹고 놀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도 가져야 하는데 방송도 해야 하네?’ 같은 고민들.

그래서 ‘나’ 같은 트랙이 나왔을 테다.
한 2~3년 전쯤 공황 장애에 시달릴 때가 있었다. 맨 정신에 가위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못 움직이겠고, 시야가 엄청 좁아지고. 갑자기 막 강도가 들 것 같고, 전쟁이 날 것 같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공포가 생기며 패닉 상태에 빠진다. 그런 내 모습을 돌아보며 진솔한 나의 이야기, 나를 괴롭혔던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풀어낸 곡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은 ‘나는 복잡한 사람 / 가끔 미쳐버려 내게 술을 주지 마’였다. 이 한 문장이 지난 공백기 동안 넉살이 품어왔던 고민을 대변하는 듯하다.
나랑 같이 술을 먹었던 많은 멤버들은 이해를 할 거다. ‘쟤 술 주지 마, 쟤 술 주면 이상한 얘기 계속해’ 항상 그런다. 그 부분이 딱 정확히 나인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방송에서 비치는 모습은 되게 밝고 유머러스하고, 진중하면서도 가벼운 매력이 있는 털털한… 그런 이미지 아닌가. 그런데 사실 저는 굉장히 복잡한 사람이다. 당연히 어두운 면이 있기에 방송에서의 밝은 면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편적으로만 나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일단 처음부터 짜증이 나는 거다. 나는 복잡한 사람이니까. 

‘상처’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감정인가. 
그렇다. 예를 들면 기분 안 좋은데 주변에서 막 ‘넉살아 너 재미있잖아 웃기잖아’ 그러면 좀 열 받지 않나. “나라고 맨날 웃냐. 힘드니까 말 좀 시키지 마.” 그런 진절머리 나는 감정이 곡에 담겨있다.

그 감정이 전체적으로 앨범의 조소하는 듯한, 냉소적이면서도 관조적인 느낌으로 연결된다.
‘좀 짜증 나게 하지 마라 이 똥파리 같은 놈들아!’ 이런 느낌이다. 이 감정이 < 작은 것들의 신 >과 < 1Q87 >을 다른 작품으로 만든 핵심이다. < 작은 것들의 신 >은 회사 입사 등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하나씩 실마리가 풀려나가던 시절의 이야기라 밝고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다. 비록 애매한 부분도 있고 냉소하는 부분도 있지만 결국 열심히 하면 우리의 기도가 다 이뤄질 거라는 긍정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 1Q87 >은 애당초 그런 희망적인 메시지가 없고, 아예 추락으로부터 출발한다. 작업에 임하는 태도나 감정부터가 많이 달랐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나도 내가 조소하는 그 사회 속 일원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거다. ‘개인 시간을 가지려면 일을 안 하면 되지 않나.’, ‘일하는 것도 내가 선택한 건데 왜 그렇게 질질 짜니’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나. 나도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서 ‘짜증 나면 다 벗어던지고 가면 되지’라는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나도 세상이라는 톱니바퀴 속 하나의 톱니고, 돈을 벌기 위해 움직이는 똑같은 인간이니까… 그런 부분에서 ‘나’는 참 복잡한 트랙이다. 

(인스타그램 질문) 그 ‘나’의 복잡함이 지금은 풀린 상태인가? 
풀리지 않았다. 곡도 그렇고 앨범 자체가 다 두루뭉술하다. ‘너와 나’조차도 사랑이 최고라 말하지만 여전히 사랑을 갈구하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나 확실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곡은 ‘추락’이다. 정말 우울하지 않고서야 추락보다는 비행이라 느끼고 싶고, 떨어지기보다는 날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감정을 담고 싶었다.

(인스타그램 질문) ’ 너와 나’에 대해 궁금하다. 첫 시작부터 나를 위한 노래를 쓴 건지, 아니면 사랑 노래를 쓰다 나에 대한 사랑 노래를 쓰게 되신 건지.
복잡한데, 두 개 다 맞는 것 같다. 처음에 ‘내 셀피 속에 너와 나’라는 가사가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아’라는 가사로 넘어간다. 이후부터는 3인칭의 나를 바라보는 너, 그리고 너를 바라보는 1인칭의 나 등 복잡하게 전개가 된다. 대신 듣는 분들에게는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지게끔 하고 싶었다. 주제는 사랑이지만 남녀의 사랑으로 출발해 나 자신에 대한 사랑, 인류애적인 메시지까지 폭넓게 다뤄보고 싶었다. 마냥 사랑 노래로 들리지 않는 것도 여러 장치를 많이 넣어서일 것이다.

반면 앨범의 후반부는 소위 말하는 예전 붐뱁, 올드 스쿨 비트들로 채워져 있다. ‘연희동 Badass’ 같은.
사실 그런 걸 절대 안 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제 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웃음)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그 비트에 랩을 쓰고 있었다. 그게 일루이드 할러(ILLUID HALLER)가 보낸 트랙 중 고르다가 ‘이거는 하면 안 된다’ 싶어서 치워뒀었는데, 다른 곡을 작업하다 우연히 비트를 들으니 바로 후렴이 나오더라. 

실제로 ‘브라더’와 더불어 이 곡은 넉살의 ‘짜증’을 중화하는 해방구처럼 느껴지는 트랙이다.
맞다. ‘연희동 Badass’는 랩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나의 자신감, 그리고 성공한 후 금의환향한 내 모습을 최대한 담으려 했다. ‘브라더’도 마찬가지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우울한 일도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축하할 일이 더 많았다고 생각하는데, 앨범 열두 트랙 중 몇 트랙만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으니 ‘해방구’ 같은 느낌의 곡이 됐다. 

실제로도 나고 자란 연희동 친구들, 비스메이저 동료들로부터 많은 힘을 얻는 것으로 보인다.
나의 성장 과정, 성공기를 모두 곁에서 지켜본 친구들이 연희동 친구들이다. 그 친구들과는 자주 만나서 같이 게임도 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그리고 회사 동료들의 영향도 크다. 딥플로우 형 만나서 회사 소속으로 활동한 지도 꽤 됐고, 던밀스와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재미있는 콘텐츠도 많이 하고 있다.

인터뷰 내내 넉살은 환한 웃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예능과 음악 투 트랙의 커리어를 유지해온 넉살에겐 현실적 고민과 아티스트로의 이상 사이의 조율이 강제되었다. “재작년 가을쯤엔 정말 큰일 났다 싶었어요. 다 그만두고 어디 숨어야 하나, 왜 이렇게 힘들까. 방송에도 적응이 돼서 긴장이 풀리고, 피처링을 해도 하나도 마음에 안 들고, 술 마셔도 다운되고… 그런 시기였죠.”.

방황하는 와중 그의 길이 되어준 것은 시간, 그리고 음악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회복을 하다 보니 웃긴 게, 감정이라는 게 내가 회복하고 싶어서 회복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냥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지”고, 내가 나 자신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되는 거였어요.”. 힐링을 ‘음악으로 했다’라는 이야기도 강조했다. “결국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으로 자신감을 찾게 되더라고요.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도 많이 갖고, 기분도 좋아졌어요.”라 말하는 넉살의 이야기가 진실하게 다가왔다. 

올해는 유독 과거를 돌아보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힙합 앨범이 많이 나왔다. 
듣고 보니 그렇네. 레디의 < 500000 >도 그렇고 JJK의 < 지옥의 아침은 천사가 깨운다 >도 그랬고… 이제 그런 자전적인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쇼미더머니 > 시기를 거친 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동료들에게 어떤 전체적인 비슷한 무드가 느껴진다. 코로나 때문에 공연이 없었던 것도 관련 있어 보인다. 공연, 페스티벌이 많은 시기였다면 보다 신나는 분위기의 음악이 많지 나오지 않았을까. 차분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기인 것 같다.

넉살도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정말 많은 것이 변했을 텐데.
사실 나는 힙합을 처음 할 때 망할 줄 알았다. (웃음) 외부에서 보기에 힙합 신에 있는 사람들은 다 갱스터, 깡패, 마약하고 진짜 싸우고 때리고… 그런 곳인 줄 알았다. 물론 오해였지. 그냥 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구나. 내가 알던 미국에서 총질하고 그런 게 아니구나… (웃음) 그때는 돈 벌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 쇼미더머니 >가 나오며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올라가고, 자본도 유입되면서 나도 혜택을 봤다. 내가 방송을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현재 한국 힙합 신에서 넉살은 어떤 포지션을 점하고 있다고 보나.
나 같은 포지션은 없는 것 같다. 작년 코드 쿤스트와 허클베리 피가 ‘마이크 스웨거’에서 축구 게임 ‘위닝 일레븐’ 대회를 했을 때 내가 특별 캐스터로 나가서 한준희 해설위원과 중계를 한 적이 있었다. 거의 축구 해설하듯이 신나게 중계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상구 형이 “너 같은 애는 처음 봤다”는 거다. 라디오를 진행하다가 방송도 하고, 유튜브 콘텐츠도 찍고 랩도 하는데 이제 축구 해설까지 잘하는, 그런 애는 처음 본다고… 그러면서 “네가 가는 길이 항상 처음이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해라. 그리고 그만두고 싶을 때는 그만둬라.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니니.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는 조언을 해줬다. 

멀티플레이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나도 나를 정의하기 쉽지 않다. 방송을 하는 래퍼, 래퍼 겸 방송인. 그런 건 제가 하고 있는 거니까 당연한 거고. 애매하다면 애매하고 독보적이라면 독보적인, 그런 멀티플레이어로 나를 정의하고 싶다. 계보는 있는 것 같다. 염따 형도 한번 그쪽에 발을 담궜고, 데프콘 형도 계시고, 슬리피 형도 그렇게 활동을 하고 있고. 그런데 그중에서 < 1Q87 >처럼 이상하고 어두운 앨범을 내면서 방송에서는 밝은, 그런 이중인격자 같은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웃음) 나는 둘 다 재밌다.  

딥플로우와의 IZM 인터뷰에서도 ‘변절’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일부의 그런 이야기가 신경 쓰이진 않은지.
당연히 신경은 쓰인다. 그런데 뭐 대수롭지 않게 업신여기고 넘긴다. ‘변절자다’, ‘예능이나 해라’ 이런 이야기에 대해 앨범을 내면서 밸런스를 맞춰 놓은 것 같다. 그리고 의외의 소득도 있다. 유튜브 ‘딩고’에서 진행한 ‘딩고 킬링 벌스’ 영상 조회수가 예상보다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놀랐는데, 댓글 란에 이런 댓글이 있었다. “< 놀라운 토요일 >에서 넉살님 팬이라 우연히 영상을 봤는데, 이런 분이셨군요?”.

그런 게 재미있으면서도 좋다. ‘방송에서의 생명력도 랩과 연결이 되는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두 개를 동시에 다 잘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듣는 분들께서 판단해주시기 바란다. 예능에서 웃기면 변절자, 랩 할 때는 예능 하는 래퍼… 이런 목소리는 파도 파도 끝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든 좋으니, 변절자든 뭐든 우선 앨범을 들어주시고 얘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1Q84’ 소설의 주인공들은 1984년에 살지만 1Q84년이라는 평행세계를 오간다. < 1Q87 >도 그런 느낌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1987년에 태어난 인간 이준영과 1Q87년에서 랩을 하고 있는 넉살이라는 캐릭터가 있는. 앨범에서 두 개의 캐릭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여 들으면 좋을까. 
나의 닉네임과 가면은 넉살인데 이야기는 이준영의 것이니 재미있다. ‘거울’ 같은 트랙이 딱 그런 것 같다. 이준영으로 넉살에게 하는 말 같은 느낌이다. ‘우리 다시는 슬프지 말자’ 같은 메시지는 넉살이 이준영에게 해주는 것 같고. 그러니까 한없이 밝은 쪽은 넉살, 한없이 어두운 쪽은 이준영이 아닐까. 앨범은 정확히 이준영과 넉살 중 반반이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전개보다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알 수 없는 감정의 소리를 가사에 담은 경우가 많다. 이중적인 자아를 뜯어 해석하기보단, 그냥 이렇게 나온 결과물 자체를 즐겨주시면 좋겠다. 비빔밥 같은 거다. 다 섞어서 입 안에 넣으면 또 새로운 맛이 날 테니까. 

(트위터 질문) 2집이 나온 지금 거울을 보면 어떤 느낌을 받나. 
늙었구나. 얼굴이 많이 썩었네. (웃음) 요즘에는 거울을 보면 시간이 보인다. 나이 들어간다는 건 신기하다. 과거 콘텐츠 속 내 모습을 보다 거울을 보면 내가 시간 위를 걸어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다. 그렇다고 ‘막 어떡해’ 이런 감정은 아니다. 그냥 신기하다. 20대 때 공연하던 사진들을 봐도 마찬가지다. 분명 다 똑같은 것 같은데 시간은 흘렀구나, 이런 생각이다.

인터뷰 : 김도헌, 이홍현
사진 : 김도헌
정리 : 김도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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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살 ‘1Q87’ (2020)

평가: 3.5/5

< 작은 것들의 신 >과 < 쇼미더머니 > 이후 넉살의 자아는 여러 방면으로 갈라졌다. 방송에 출연해 유쾌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선 예능인 넉살, 1987년 연희동에서 태어난 인간 이준영, 4년 7개월의 공백 기간을 가졌던 래퍼 넉살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분열되기도 합쳐지기도 했다. 넉살은 이 다면의 삶과 경험을 그와 꼭 닮은 소설 ‘1Q84’로부터 가져온 아이디어와 결합한다.

긍정적인 태도와 희망을 품고 있던 데뷔작과 달리 신보의 기저 무드는 어둡다. 현재의 자신을 격렬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 빠트리는 ‘Bad trip’으로 넉살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프로듀서 버기(Buggy)가 주조한 거친 베이스의 왜곡 속 악에 받친 듯 톤을 교차하는 데서 결코 그의 공백기가 평온하지 않았음을 짐작한다. 그 과정에서 ‘Am I a slave’처럼 ‘쇼미더머니’ 출연 이후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와 힘겨웠던 과거를 교차하여 현실을 돌아보기도, 음울의 최대치인 ‘나’ 같은 트랙에서 끝없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 보기도 한다. 

넉살은 혐오, 광기, 편견, 질병에 병들어가는 현대 사회에도 검은 퀘스쳔 마크를 띄운다. ‘Bad trip’과 함께 앨범의 뼈대를 형성하는 ‘Akira’의 염세적인 태도가 대표적이다. 아프로비트의 리듬감으로 펑키(Funky)하게 다듬어낸 이 트랙에서 넉살은 ‘모두가 미쳐가고 있어’를 외치고 훅을 담당한 개코는 ‘그냥 출근이나 할래요’라며 붉은 오토바이를 타고 무채색의 도시를 질주한다. 

그렇기에 앨범은 ‘1Q84’와 더불어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1984’와도 가까워진다. 다만 그 정서는 과격한 비판보다 우원재와 오디가 참여한 ‘Won’ 속 ‘대충 살고 싶어 나 좀 내버려두어’의 조소와 가깝고 어떻게든 새로운 하루를 살아나가는 현대인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다.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부에서 시스템의 일원임을 인정하는 휴머니즘적 태도다. 이것이 넉살의 새 작품이 어두울지언정 음울하지 않고, 용이한 접근성과 사유의 조각을 같이 제공할 수 있는 으뜸의 요인이다.

앨범 중반부터 후반까지 잔잔한 테마 아래 진행되는 인간 이준영의 고백으로부터 그 인간적인 터치와 활기를 찾을 수 있다. 클래식한 붐뱁 스타일 비트 위 삶의 공간, 일상의 궤적을 그리는 ‘연희동 Badass’에서의 넉살은 악동의 타이틀 아래 여느 때보다 자유로이 랩을 뱉고, 이어지는 비스메이저 동료들과의 ’브라더’에서 형제애를 과시하며 세간의 시선과 개인적 고민을 떨쳐버리고 희망을 품는다. 코드 쿤스트의 차분한 비트 위 사랑의 다양한 의미를 고민하는 ‘너와 나’, 자전적인 메시지의 ‘거울’을 거쳐 마지막 트랙 ‘추락’의 흐름 역시 넉살 개인은 물론 그의 삶을 듣는 이들에게 허무함 대신 새로운 의미를 고민하게 만드는 구성이다. 

복잡다단한 지난날들의 경험과 느낌, 심경을 고백하는 자전적인 작품이다. ‘말론 브란도’, ‘리썰 웨폰’, ‘갈릴레오’ 등 독특한 개인의 기호를 메시지에 대거 활용하고 톤을 넘나들면서도 또렷하고 날 선 랩 스킬이 기본을 탄탄하게 잡고 있어 ‘뮤지션 넉살’의 정체성을 다시금 각인하는 의미도 있다. 

비록 그 하고픈 말이 일관되어있다는 느낌은 약하고 완결된 서사는 아니지만 오히려 그것이 결국 털고 일어서야 할 시간의 한 페이지였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 1Q87 >은 모노 톤의 물음표로부터 출발하여 굳은 느낌표로 각인된다. 여느 확장 속에도 굳게 중심에 위치할 정체성, 넉살이 결코 ‘팔지 않아’라 외칠 소중한 자산 말이다.

– 수록곡 –
1. Bad trip
2. Am I a slave
3. Won (Feat. 우원재 & ODEE)
4. Akira (Feat. 개코)
5. Crack kids (Interlude)
6. Dance class
7. 연희동 Badass
8. 브라더 (Feat. Don Mills & Los)
9. 나
10. 거울 (Feat. 화지)
11. 너와 나 (Feat. 거미)
12. 추락 (Feat. DeVi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