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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8 지웅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여섯번째 순서는 SBS 라디오 구경모 프로듀서다.

평생 음악을 듣고 살았는데, 열 곡을 고르는 게 쉽지 않다. 좋아하는 음악이 그렇게도 많았지만, 골라서 타이틀을 붙이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닌가 보다. 열 곡 안에 들어가지 못한 곡들에겐 미안하고, 한편에선 내가 고른 열 곡에 대해서, 확신이 없다. 며칠 후에는 어쩌면, 이 곡은 어쩌자고 여기에 올려놨을까, 그리고 그 곡은 왜 열 곡에 안 넣었을까, 스스로 괴로워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음악을 고르는 것도, 인생을 닮았다.

Paul Anka / Diana

어렸을 땐 아버지의 ‘전축’으로 음악을 들었다. 턴테이블과 앰프, 스피커가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보기 힘든 ‘목제 프레임’ 스테레오였다. 묵직한 그 전축의 가운데 아래쪽에 턴테이블이 들어앉은 구조였는데, 톤 암을 들어올리면 그 옆 조그만 주황색 램프가 따뜻한 빛으로 켜졌던 게 인상적이다. 턴테이블을 위한 공간이 동굴처럼, 전축의 아래쪽에 움푹 들어간, 참 불편한 구조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비슷한 구조의 물건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그 전축으로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으셨다. 클래식이 많았고 최신 가요 음반도 종종 사 들고 오셨는데 팝 음반은 별로 기억에 없다. 그런데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팝송을 즐겨 부르신 걸 보면, 분명 열심히 들으셨겠지.

아버지 친구 분 가족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해서 어딘가 놀러갔을 때, 버스 안에서 아버지가 차내 마이크를 들고 불렀던 곡은 폴 앵카의 다이애나(Diana)였다. I’m so young and you’re so old.. 내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알게 된 ‘팝송’이었다. 아버지의 노래는 나름의 ‘겉멋’이 잔뜩 들어간, 당시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의 발산처럼 느껴졌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좀 멋진 아버지 같기도 하다. 지금은 아버지도 나도 젊지 않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노래 속 폴 앵카만 영원히 열 여섯 살이다.

영화 / Something good

누구에겐가 음악에 대해 열을 올리며 설명한 건 ‘국민’학교 2학년 때가 처음이다. 집에 놀러왔던 친구 창길이에게 <사운드 오브 뮤직> LP를 들려주며 그 얼마 전 봤던 영화 장면들을 ‘눈에 보일 듯이’ 설명해 줬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재주는 없어서, 창길이는 그런 영화와 노래 설명 따위, 별 관심이 없었다. 줄리 앤드류스에게 빠져들었던 내 최초의 ‘덕질’은 그 즈음 시작됐다. 영어로 편지까지 써서 보내고, 사진이 들어있는 답장도 받았지만, 요즘은 그녀의 꿈을 꾸지 않는다. 가끔 <아름다운 당신에게>에서 그녀의 노래를 틀 뿐이다. 꿈꿨던 장면은 ‘Something good’이지만 청취자들은 ‘에델바이스’를 제일 좋아하는 거 같다.

김세환 / 아름다운 사람
내가 기억하는 우리 집 첫 가요 음반의 주인공은 김세환이었다. ‘사랑하는 마음’, ‘길가에 앉아서’, ‘목장길 따라’ 같은 착하기만 한 노래들이 잔뜩 실려 있던 이 1974년 음반에서, 내 귀를 잡아 끈 곡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때까지 듣던 노래들과는 분위기도 달랐고, 가사도 요령부득이었다. 그렇지만 좋았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아주 나중에 알고 보니, 김민기의 노래였다.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 오페라 <라 보엠>
어렸을 때부터 지독하게 많이 들었던 LP다. 아버지의 오페라 취향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물려받은 경우인데, 50년 전부터 한동안 매일같이 집에서 들었으니 지겨울 만도 하건만 여전히 좋아한다. 특히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 ‘내 이름은 미미(Si, mi chiamano Mimi)’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O soave fanciulla)’로 연결되는 1막은 버릴 것이 없다. <아름다운 당신에게> 애청자들은 방송에 <라 보엠>의 아리아들이 너무 많이 나오는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리비아 뉴튼존(Olivia Newtonjohn) / Slow dancing
음반을 처음 산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아바의 Knowing me knowing you, 퀸의 We are the champions 등이 들어있는 ‘불법’ 캄필레이션 LP였는데, 내 돈으로 산 만큼, 열심히 들었고 많이 배웠다. 정식 라이센스 앨범 중 처음 모셔온 분은 올리비아 뉴튼존, 당시 최고 인기의 청춘 스타였다. 나오는 족족, 그녀의 앨범은 다 사들였고 그만큼 열심히 들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곡이 많지 않다. 이 앨범에서는 Slow dancing을 많이 들었다. 꿈 많은 소년 시절이었다.

Fleetwood Mac / You make loving fun
1978년. AFKN TV에서나 그래미 시상식을 볼 수 있던 때였다. 그나마 너무 늦은 시간 생중계라 볼 생각도 못했던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한 마디 하셨다. “플리트우드 맥이 다 타더라.” 42년이 지난 지금 다시 찾아보니, 플리트우드 맥이 받은 건 ‘Album of the year’ 하나뿐이었다. 제일 중요한 상이긴 하지만, 아버지는 왜 ‘다 탔다’고 하셨던 걸까. 4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들어봐도 세련된 사운드, ‘다 탈 만한’ 것만은 사실이다.

알프레도 캄폴리(Alfredo Campoli) / Mendelssohn ‘Violin concerto in e minor’
한 학년 위였던 형이 한창 사춘기를 앓던 시절에 많이 듣던 곡이다. 형이 어느 날, 어떤 놀랄 만한 방정함을 보였던지 아버지는 그러셨다. “네 형이 요즘 멘델스존을 듣더니, 사람이 달라졌다.”
음악이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때부터 오랜 연구와 고민이 시작됐다. 그래서 지금까지 음악을 듣는지도 모르겠고. 얼마 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이 LP를 다시 구입했는데, 아직 턴테이블은 구하지 못했다.

ELO / Confusion
이른바 ‘빽판’을 사서, 홈이 닳도록 들었다. 그 유명한 ‘Midnight blue’나 ‘Last train to London’보다도 ‘Confusion’과 ’Need her love’가 좋았다. ‘수학의 정석’ 풀며 듣기 좋은 음반이다.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에게서 음반 선물을 받았다. 군대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할 일이라고는 그녀를 만나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뿐. 군에서 회식 때 이 노래를 불렀다가 뻘쭘해졌다. 이렇게 가슴에 품을 노래 하나 없이, 요즘 젊은이들은 군대 생활들을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소니 클라크(Sonny Clarke) / Cool struttin’
1995년 CBS 음악FM이 개국할 때 국내 최초로 재즈 프로그램이 생겼다. <이정식의 0시의 재즈>. 매일 밤 생방송으로 한 시간씩 재즈를 틀었다. 신혼인 PD는 좀 괴로울 수 있는 시간대였지만, 새로운 음악을 방송으로 함께 한다는 것은 즐거웠다.
시그널 음악으로 골랐던 이 곡은 제목 그대로 ‘쿨하게, 뽐내며 걷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재즈 음반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바로 그 재킷이다.

*프로필

지웅 rainystreet@hanmail.net
1991년 CBS 입사. <저녁 스케치> <오정해의 영화음악> <이정식의 0시의 재즈>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등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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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7 배준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일곱번째 순서는 MBC 라디오 배준 프로듀서다.

20년도 전 어느 음악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음악 듣기를 ‘순례자의 여행’에 비유한 적이 있다. 팝송으로 시작된 음악 여행이 클래식, 가요, 재즈, 월드뮤직까지 들락날락, 기웃기웃 대며 흘러갔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과장된 표현이다. 순례자만큼 열정도 소망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끌리는 음악에 귀를 갖다 댔을 뿐인데.

그래도 오늘까지 그 음악들 덕분에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꽤 나이를 먹은 지금 어디로 또 흘러갈지 모르겠다. 클래식 좋아하는 이들은 결국 바하로 회귀할 거라 하고 송가인을 좋아하는 친구 따라 트로트로 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오늘도 어떤 음악이든 좋아하는 것을 듣고 싶을 뿐이다.

The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1984, Vinyl) | Discogs

비틀즈 (Beatles) / I Want To Hold Your Hand

초등학교 5학년. 남미로 이민 간 사촌 형들이 남긴 팝송 대백과 음반 전집과 함께 겨울방학을 보냈다. 팻 분(Pat Boone)도 있고 도리스 데이(Doris Day) 나 패티 페이지(Patti Page)도 있었지만, 가장 강렬하게 다가 온 것은 역시 비틀즈였다. 어린 내가 새로운 팝송의 시대를 권유하는 그들의 손을 뿌리치기는 정말 어려웠다.

The Number Ones: The Beach Boys' “Good Vibrations” - Stereogum

비치 보이스 (Beach Boys) / Good Vibrations

어릴 적 꿈은 반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야자수 해변에 나가 책을 읽으며 비치 보이스를 듣는 것이었다. 잠깐 호주에 살 때 기회가 있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지금도 이 꿈을 꾼다.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 아무리 진지해져도 내게 비치 보이스는 여전히 해변의 소년들이다. 무인도에 음반 한 장만 갖고 가야 된다면 비치 보이스 베스트를 들고 가겠다.

Vladimir Ashkenazy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 1 - WBg UK ...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Vladimir Ashkenazy) /
Tchaikovsky ‘Piano 협주곡 제1번’

중학교 2학년. 어머니는 아버지의 생일날 당시로선 괜찮아 보이는 전축을 선물했다. 클래식에 관심 많던 아버지는 라이선스 음반을 몇 장 사왔다. 그 중의 하나가 이 곡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차이코프스키가 내 어린 영혼을 심히 건드렸다는 것을.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내 팔에 소름이 돋던 것을.

Enrico Macias - L'amour C'est Pour Rien / Ma Patrie (Vinyl) | Discogs

앙리코 마샤스 (Enrico Macias) / L’amour C’est Pour Rien

윤복희의 남편이었던 유주용의 ‘추억의 솔렌자라’를 듣다 이 노래에 입문했다. 뜻도 잘 모르는 샹송을 왜 그렇게 따라 부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내 기억에 70,80년대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노래를 시키거나 부르곤 했다. 대학 써클(동아리)에서는 술만 마시면 장난스레 ‘나무새 뿌리 (어느 후배가 나름 해석했다)’를 부르라고 시켰다. 2000년 대 초반 스위스 몬트뢰 재즈 페스티벌에 갔다가 앙리꼬 마샤스의 콘서트 벽보를 봤다. 그의 사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추억의 뿌리를 더듬었다.

Kim Min Ki - 김민기 (1972, Vinyl) | Discogs

김민기 / 친구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3. 광화문 어딘가에 있던 레코드 가게에선 김민기의 1집 음반을 카세트에 복사해주었다. 그 작은 카세트테이프는 재수로 이어질 때까지의 내 암울한 세계를 더욱 암울하게 해주었다. 걱정하던 아버지는 상여 나가는 소리 같다고 했지만 그 암담하고 검푸르던 세계에서는 하늘로 데려다 주는 소리로 들렸었다. 이 글을 쓰며 그 노래들을 다시 듣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된다.

Zino Francescatti, Edmond De Stoutz, The Zurich Chamber Orchestra ...

지노 프란체스카티 (Zino Francescatti) / Vitali ‘Chaconne’

라디오 피디가 됐다. 한동안 레코드실 이란 곳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그곳에 말로만 듣던, 사진으로만 보던 수입 명반들이 있었으니. 지노 프란체스카티가 연주하는 비탈리의 샤콘느 음반은 듣기 전에 몇 번 쓸어봤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절이라도 할 뻔 했다. 흉내 내기 어려운 그 애절한 연주를 듣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겠지만.

Offramp by Pat Metheny Group on Amazon Music - Amazon.com

팻 메시니 (Pat Metheny) / Au Lait

드디어 팻 메시니의 음악과 만나게 되었다. 80년대 후반, 연출하고 있던 새벽 프로그램에 나온 ‘어떤 날’의 조동익과 이병우는 이 곡을 소개해주었다. 덕분에 DJ와 나는 PMG(팻 메스니 그룹)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이렇게 겸비한 연주자도 드물겠지만, 어디론가 떠나는 기분을 느끼고 싶거나 멍 때리고 싶을 때 이만한 곡이 어디 있겠는가. 그의 음반들을 요가 수업에 쓰는 선생도 만났었다.

Paul Desmond - Take Ten | Releases | Discogs

폴 데즈먼드 (Paul Desmond) / Take Ten

폴 데즈먼드는 재즈사에 길이 남을 히트 곡 ‘Take Five’를 작곡했지만, 같이 연주하던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의 그늘에 가려진 편이다. ‘Take Five’의 속편 같은 이 음반은 내게 쿨 재즈를 가르치고 빠져들게 해줬다. 평생을 특유의 지성과 유머감각으로 살아간 폴. 그는 내 인생관을 음악으로 표현해준다. 힘 빼고 살자!

The Red Garland Quintet Featuring John Coltrane And Donald Byrd ...

레드 갈랜드 (Red Garland) / Soul Junction

쿨 재즈만큼이나 좋아하는 장르는 하드 밥(Hard Bop) 재즈이다. 1950년대는 쿨 재즈와 하드 밥이 공존하며 재즈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하드 밥에는 명곡이 넘쳐나는데 왠지 이 곡을 좋아한다. 연주시간은 15분이나 되지만 늘 짧은 드라마 하나를 본 느낌이다. 영혼의 교차로. 레드 갈랜드 (피아노), 존 콜트레인 (테너 색소폰), 도날드 버드 (트럼펫)의 영혼이 교차되는 그 길.

Prelude In E Minor/Gerry Mulligan(게리 멀리건) - 벅스

제리 멀리건 (Gerry Mulligan) / Prelude in E minor

인생의 음악만큼이나 인생 영화가 된 밥 라펠슨 (Bob Rafelson) 감독의 <잃어버린 전주곡>(Five Easy Pieces)’. 영화에서 잭 니콜슨이 연주하던 쇼팽의 전주곡 E 단조. 그 곡이 너무나 치고 싶어 서른 넘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나갔더랬다. 몇 달 끝에 도입부만 치다 말았고 대신 피아노 치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쿨 재즈의 전설로 남은 바리톤 색소폰 주자 제리 멀리건. 위로가 필요한 밤이면 음반 < Night Lights >를 꺼내 잃어버린 전주곡을 듣는다.

(고르고 보니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로 인생의 음악이 정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읽는 분들의 이해를 구합니다.)

■ 프로필

배준 | cooljazzpd@naver.com

1984년 MBC 라디오에 입사해 2019년 정년퇴직. <가요 응접실>, <젊음의 음악캠프>, <김현철의 디스크쇼>, <윤상의 음악살롱>, <배철수의 음악캠프>등을 연출했다. 현재는 <서인의 새벽다방> 재즈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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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6 구경모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여섯번째 순서는 SBS 라디오 구경모 프로듀서다.

내 인생의 음악 10곡이라…. 중학교때부터 용돈만 생기면 빽판 사러 다닌 이래, 직업을 음악 듣는 라디오PD로 지내오면서 수많은 음악을 들었지만 막상 10곡이라…. 좋은 노래를 추천하는 것도 좋겠지만, 다른 분들께서 충분히 소개해 주실 거 같고, 글 주제가 ‘내 인생의 음악 10곡’이니 만큼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도 어떨까 한다.

김광석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오래전 김광석을 라디오 DJ로 캐스팅했다. 당시 무명의 가수를 나름 골든 타임인 밤 10시 프로에 기용하고자 했을 때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드러눕고 별 짓 다해서 관철했다.

매일 생방송을 하면서 같이 노래를 틀고, 듣고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광석아 이 노래 좋지 않냐?’, ‘와 좋네요’ ‘니 가 리메이크하면 어떨까?’ 이런 대화 끝에 나온 노래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이고 앨범 < 다시 부르기 >다. 라디오 생방송을 마치고 앨범녹음실까지 같이 가서 말동무가 되었다. ‘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 ‘와 가사 유치하다’ , ’그죠? 하하하 히히히” 이렇게 농담을 주고 받던 노래가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이다. 아직도 내 마음속에 있는 김광석을 이제는 잊어야 될텐데…

강산에 ‘…라구요’

김광석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같이 라디오방송을 하는 동안 12시 방송이 끝나면  홍대 앞에 있던 ‘Sus4’라는 카페에 자주 갔다.(없어진지 오래 됐다)  지하에 있던 작고 허름한 그 카페에는 일반 손님들은 별로 없고, 많은 아마추어 음악인들이 모여 간혹 자신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김광석은 항상 그 곳에서 그들의 노래를 들어주었고 그들의 술값을 계산했다.

하루는 한 무명 가수가 김광석에게 물었다. ‘노래가사에 18번 이란 표현을 써도 될까요?’, ‘에이 그냥 써, 요즘 세상에 그 정도 표현은….’, ‘그렇죠 형?’ , ‘그래 그래 그냥 써 써’. 가요 사전 심의가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명곡은 당당히 살아남았다.

한동준 ‘너를 사랑해’

예전에는 라디오 공개 방송이 참 많았다. 특히 인터넷, 모바일 시대 이전에는 가수를 보거나 라이브를 들을 수 있는 곳이 다양한 라디오 공개방송이었다. 당시 한동준의 ‘너를 사랑해’가 빅 히트를 쳤고 나는 고심 끝에 한 대형 공개방송에서 오프닝으로 ‘너를 사랑해’ 를 선정했다. 한동준이 물었다. ‘형 이 곡은 발라드 인데, 오프닝곡으로 어울릴까? 객석이 썰렁해지는 거 아닐까?’

나는 강행했고, 풀밴드와 당시 잘나가던 ‘여행스케치’ 를 코러스로 같이 세웠다. (여행스케치에게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행히 공연장에 무대막이 있어서 좀 더 세심한 연출이 가능했다. 무대막이 내려간 상태에서 잔잔한 전주를 시작하면서 막을 올리자 관객들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발라드로 공연의 오프닝을 이렇게 성공적으로 연출한 적은 그 이후 없다. 지금도 한동준을 만나면 그때 이야기를 한다. ‘나 그때 눈물났어 형.’, ‘다 곡이 좋아 그런거야.’.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94년, 일본 도쿄FM의 일본인 친구 PD가 갑자기 연락이 왔다. 스티비 원더 가 아시아 투어를 하는데, 서울 공연을 갑자기 하게 되었다고 도와달라 했다. 시간이 너무 촉박 한지라 잠실 주경기장을 어렵게 섭외하고 공연을 우여곡절 끝에 치루게 되었는데, 내국인을 위한 홍보를 거의 못해 관객이 너무 적었다. USO를 통한 홍보로 외국인들만 겨우 관객으로 왔다.

남산의 한 호텔 한 층을 다 빌려 스티비 원더와 일주일 이상을 같이 지냈는데, 밤에 덩치 큰 스티비 매니저가 나를 찾는다. 가지고 다니던 건반이 고장 났는데 테크니션이 수리할 장비가 필요하다 했다. 나는 아는 악기사 사장을 한밤에 깨워 해결해 줬다.

스티비는 고마워하며 자기방에서 고친 건반을 치며 좋아했다. 나는 이때다 싶어 부탁했다. ‘이번 공연에서 앵콜로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 를 불러달라’. 원래는 이 곡이 셋리스트에 없었다. 한국 팬들은 이 노래를 너무 좋아한다. 꼭 불러 달라 라는 부탁에 스티비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공연 당일 스티비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날 관객은 대부분 외국인 들이었다.

엑스 재팬(X-Japan) ‘Endless Rain’

내가 라디오PD 신입 때는 J-Pop이 대세였다. 국내에 많은 가수들이 J-Pop의 영향을 받았고, 표절도 많이 했다. 당시 인터넷 이전 시절이고, 일본음악 CD도 국내 수입도 불가하던 시절이라 자주 도쿄에 CD를 사러 갔다.

하라주쿠에 있던 타워레코드를 가면 중고CD를 팔았다. 순위 1위부터 10위까지 대략 샀다. 그리고는 혹시 공연이 있으면 보고(당시에는 도쿄 아레나공연장이 생기기 전이어서 부도칸이 제일 큰 공연장 이었다. 여기에서 당시 젊은 이글스공연을 봤다) 이케부쿠로의 전자상가를 구경하고 돌아오곤 했다.

하루는 도쿄FM의 친구가 X-Japan의 타이지 사와다랑 친한데 한번 만나 볼 거냐고 한다. 타이지 사와다! 서태지가 존경해서 이름을 태지라고 지었다는 전설적인 베이시스트이다. 당연히 고맙다고 하고 롯본기 어느 술집에서 늦게 만났다. 이미 그때는 타이지는 X-japan을 탈퇴하고 자신의 밴드를 만든 시기였다.

난 일본의 젊은 천재 아티스트와의 만남을 기대했지만 그는 이미 나랑 만나기전부터 취해있었다. 동행한 그의 부인이 영어가 능통해 대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타이지가 맨정신 이였어도 영어를 못해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을 거라고 위안을 삼으며, 그들이 챙겨준 ‘굿즈’(당시에 국내에는 굿즈의 개념이 없었다)만 잔뜩 받고 헤어졌다.

하하 ‘키 작은 꼬마 이야기’

하하와 만난 건 그가 <논스톱>에 출연한 이후 비호감으로 인기가 추락했을 때다. 첫만남에서 낮술을 먹어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솔직함과 진정성이 느껴졌다. 반대를 무릅쓰고 디제이로 캐스팅했다.

그는 라디오를 하면서 그의 밑바닥까지 모든걸 보여주었다. 사람이 이렇게 솔직하게 자신을 이야기하면 누구나 공감하기 마련이다.  방송하면서 ‘죽지 않아’ 라고 하도 외쳐서 ‘죽지 않아 송’까지 만들었다. ‘죽지 않아’라는 메시지는 당시 사회의 ‘을’을 대변했고 풀 죽은 청년들을 위로했다.

하하는 수없이 자신의 라디오를 통해 울고 웃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 바로 ‘키 작은 꼬마 이야기’이다. 나는 지금도 사회의 ‘을’과 힘 빠진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 노래이다. 하하는 디제이를 할 때 자신을 하하라 부르지 않고 ‘하동훈’이라는 본명을 사용했다. 그만큼 솔직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사람이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질 때, 그때 그 사람이 가장 강할 때가 아닐까?

바비 킴 ‘고래의 꿈’

다 아는 사실이지만 라디오PD는 가요제작자와 누구보다 밀접하다. 친한 제작자 후배가 심혈을 기울여 데모곡을 가져왔다. ‘형 어때요?’ , ‘좋네 하지만…’, ‘그래요? 고쳐 올게요…’.

그 이후 그 제작자는 나에게 약 20번정도 그 데모곡을 고쳐 왔다. 그런 경우는 처음 봤다. 예전에는 신곡이 나오거나, 나오기 직전 많은 제작자들이 PD들에게 모니터를 부탁했다. 이미 출시된 노래는 그냥 좋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고(수정할 수 없으니) 출시 전인 경우에 솔직한 의견을 주면, 실제로 그 의견을 반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 제작자는 내 의견을 따라 한 두번도 아니고 거의 20번에 가까이 수정을 했다.

명곡 ‘고래의 꿈’은 바비 킴의 영감이 만든 훌륭한 작품이지만, 이런 집념의 제작자 없이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10곡을 채울려면 아래의 3곡이 더 있지만 지면 관계상 아래곡의 에피소드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룰라 ‘날개잃은 천사’

팻 메스니(Pat Matheny) ‘Question & Answer’과 ‘Soul Cowboy’

신중현 ‘아름다운 강산’

이렇게 쓰다 보니 내 자랑(?) 만 늘어 놓은 것 같아 송구하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기록도 어딘가에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내 인생의 음악10곡’이 아닌가? ㅎ 임진모선배가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라 믿는다.

구경모 SBS FM PD

BBS <김광석의 밤의 창가에서>, SBS <하하의 텐텐클럽>,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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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5 김홍철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다섯번째 순서는 KBS 라디오 김홍철 프로듀서다.

시작하며..

임진모 선배님이 인생 열 곡을 달라고 하신다. 응? 인생?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내 인.생.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은 것 같다. 딱히 돌아볼 뭐가 없어서 그랬을 거다. 50대 중반의 나이이니 인생이란 단어가 그리 어색할 것도 없을 터인데 워낙 찌질한 삶을 살아온 터라 부담스럽긴 하다. 그저.. Everything happens to me의 가사처럼 좀 모질란 라디오PD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던 노래들을 인생시간 순으로 추려본다.

#충격

산울림 /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충격이었다. 이게 뭐지? 무슨 노래가 이러냐? 1978년.. 중학교 2학년이었을 거다. 이 앨범은 대중가요의 이미지를 단박에 걷어 차버렸다. 기타 퍼즈음이 잔뜩 들어간 ‘아니 벌써’도 신기한 노래였지만 특히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는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뭔가 하기 싫은 듯.. 어설픈 듯.. 6분이 넘게 흥얼흥얼 읊조리는 김창완의 목소리는 무심한 가사(사랑 노래인지, 계절 노래인지,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와 어우러져 사춘기 소년의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 이후로 나는 산울림의 신보를 손꼽아 기다리며 동네 판(LP)가게를 매일 들르는 ‘판가게 죽돌이’가 되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둘째 김창훈의 베이스 연주를 참 좋아한다. 그의 베이스는 단단하고 리드미컬 하다. 산울림에게 특유의 록음악 색깔을 칠해 주었다.

벗님들 / 또 만났네

산울림이 주었던 충격 만큼은 아니지만 사춘기 소년의 마음속에 종을 울린 또 하난의 앨범은 벗님들 1집이다. 그 중에서도 ‘또 만났네’. 타이틀곡은 ‘그런 마음이었어’였지만 나는 이 곡이 더 좋았다. 시작부터 다짜고짜 들이대는 세련된 화음이라니. 가요의 화음이라면 아주 어릴적의 ‘봉봉사중창단’이나 ‘금과은’만 기억하던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적인 음악이었다. 난생 처음듣는 경쾌한 화음이 뭔가 고급진 팝의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들의 음악은 나름 펑키(funky)하다. 산울림과는 다른 종류의 그루브가 있다. 이치현의 기타연주는 지금 들어도 일품이다. 앞으로 선뜻 나서지 않고 간질 간질 봄바람 같은 연주가 흥을 돋운다.

가사 내용도 중3 사춘기 소년의 맘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 만났네 어제 본 그 아가씨. 미소짓네 주고받은 말 없어도. 사귀어보고 싶은 마음 하늘만 한데 왜 이렇게 말 못 하고 눈치만 보나..”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나 이상우의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으로 이어지는 유쾌한 사랑 노래이다.

#설렘

올리비아 뉴튼 존(Olivia Newton-John) / Come on over

내 인생엔 두 분의 올리비아 누님이 계신다. Newton-John 누님과 하세(Olivia Hussey) 누님이 바로 그분들이시다. 아.. 두 분 만큼은 아니어도 실비(Sylvie Vartan) 누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긴 하다.

각설하고.. 이 곡에는 감히 인생이란 단어를 붙여도 좋다. 팝음악사에 획을 긋지 않았어도.. 명반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어도.. 나에게는 인생음악이다. 55년 살아오면서 내게 가장 큰 설렘을 준 음악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이유는? 없다. 말할 필요 없다. 그냥 두근두근 설렜고 무조건 최고였다. 자켓 사진 속의 푸른 물과 파란 눈동자.. 늦가을의 새벽 안개 같은 신비로운 목소리.. Come on over. 듣고 있으면 왈칵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노래였다. 같은 앨범의 Greenleaves, Blue eyes crying in the rain도 나를 한 없는 감상으로 이끌어 잠 못 이루게 하곤 했다. 이후로 나는 군 위문공연에서 여 가수의 무대위로 뛰쳐 올라가는 군바리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질풍노도

유라이아 힙(Uriah Heep) / July morning

1980년 고1 때였을 거다. 형이 모아 놓은 ‘빽판(해적판)’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듣게 되었다. 당시에 친구들과 음악 얘기를 할 때면 ‘먹어주는 한 방’이 필요했는데 그건 바로 “니들 유라이어힙의 줄라이모닝이라고 들어는 봤냐?”였다. 맘껏 잘난 척 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곡이다. 일단 10분이 넘는 길이로 먹고 들어간다. 도입부의 압도적인 키보드 사운드를 들려주면서 ‘어때? 니들과는 수준이 좀 다르지?‘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여유있게 바라볼 수 있었다.

떠오르는 순간부터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7월의 태양과 같은 노래. 감히 클래식으로 치자면 Richard Strauss의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일출‘ 도입부나 생상스의 오르간교향곡 4악장에 비견할 수 있다 하겠다(오바 아이가?). 아무튼 나는 Uriah Heep의 July Morning과 Look at yourself, Easy Living 등을 들으며 반항기 가득한 10대 후반의 에너지를 분출했던 것 같다.

#떨림

스탄 게츠 & 주앙 지우베르투(Stan Getz & João Gilberto) / Corcovado

연애할 때.. 차가 있고 없고는 많은 유의미한 차이를 만든다. 1990년의 여름밤.. 서울대공원 미술관 올라가는 길이었던가. 세워둔 차 밖은 캄캄했고 계기판의 불빛만 아른거렸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고 차안은 조용했으며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야릇한 긴장감.. 뭔가 해야하는 순간이 아니던가.

그녀(그 때의 그녀는 지금의 나의 아내가 되었다)가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뭘 꺼낸다. “이거 듣자. 이거 되게 좋아” 카세트테입이다. ’응? 뭐 이런건.. 나중에 들어도 되는데..‘ 내키지 않았지만 주섬주섬 카세트를 꽂았다. 철컥.. 윙~ 테입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Quiet nights and quiet star.. quiet chords from my guitar..” 서툰 영어 발음의 여성보컬이 차안을 가득 채우고.. 우리의 떨림을 달래주었다. 고요한 밤.. 고요한 별.. 내 기타의 고요한 울림. 내 인생의 사랑노래는 바로 그 순간의 Corcovado.

#가을.. 알싸함과 청명함

음악프로그램을 하는 라디오 PD에게 고마운게 몇 가지 있다. 시간대로는 밤이요 날씨로는 비이고 계절로는 가을이다. 한 마디로 음악이 ’들리는‘ 조건들이다. 다음 두 곡은 1993년 라디오PD가 된 후 초창기에 ’눈이 부시게‘ 높푸른 하늘의 가을 아침에 종종 선곡표에 올렸던 노래이다.

챕터 투(Chapter Two) / Only love can break your heart

눈이 시린다. 스웨덴 듀오 Chapter Two가 부른 이곡을 들으면 그런 느낌이 든다. 시리도록 아름답고 시리도록 슬픈 노래. Johan Norberg의 기타와 어우러지는 Nils Landgren의 트럼본과 목소리는 따뜻하지만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북구의 사랑노래는 알싸한 가을하늘 만큼 퍼렇다.

이브 뒤떼이 & 엔조 엔조(Yves Duteil & Enzo Enzo) / Au Parc Monceau

몽소공원에서. 프랑스.. 빠리(파리가 아니라 빠리..라고 읽어줘야 느낌이 산다).. 그리고 몽소공원. 이름만으로도 낭만이고 사랑이다. 맑은 가을날의 햇살 속에 잔디밭을 뛰노는 아이들과 산책하는 어른들과 벤치의 연인들. 청명한 하늘을 닮은 엔조 엔조의 목소리와 편안한 햇살같은 이브 뒤떼이의 음색을 들으며 걷는 가을날의 몽소공원. 코로나가 끝나야 갈 수 있겠지.

#밤과 술.. 찌질남의 절대고독

쳇 베이커(Chet Baker) / Everything happens to me

남자는 여자에게 채였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래 난 원래 되는 일이 없었어. 골프 예약하면 비오고.. 친구 불러 파티하면 이웃이 시끄럽다고 항의하고.. 아 맞다! 나 홍역에도 걸린 적 있다구. 그리고 딱 한 번 사랑에 빠졌는데.. 이것도 채여버렸어 엉엉~.’.

좀 과장해서 살 붙이면 노래 내용이 이렇다. 머피의 법칙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고독한 찌질남의 넋두리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쳇 베이커의 달관한 듯 읊조리는 목소리로 부르니 심오한 인생이 느껴진다. 있어 보인다. 술 한 잔 먹고 밤에 들으면 울컥하고 올라온다. 쳇 베이커니까. 술 없이 쳇 베이커를 듣는다는건 너무 잔인한 일이다. 오늘 밤도 핑계 김에 한 잔!

그리고.. 이 노래를 들으면 임희구님의 시가 생각난다.

-소주 한 병이 공짜-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중략)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 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단순함에 대하여

시릴 에메 & 디에고 퍼규레도 (Cyrille Aimee & Diego Figueiredo) / Just the two of us

단순함, 미니멀리즘이 주목받는 시대이다. 그래서 하는 일이 1일1버. 하루에 하나씩 버린다. 옷도 버리고 책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이렇게 단순한 삶을 추구하다 보면 사고는 오히려 깊어져서 무소유 같은 철학적 깨달음 비스무리한 것에라도 가까이 가야 하는데.. 나는 그냥 사고 자체가 단순해져 버렸다.

하루끼가 그랬던가? 중년 이후 두 가지 말만 기억하면 잘 살 수 있다고. 그건 “그래서 뭐?!” “다 그런거지 뭐” 이 두 가지다. 하루끼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실례겠지만 사실 이게 하루끼가 말해서 위트있어 보이는 거지 “아 어쩌라고?!!” “배째!” 같은 중년의 단순 뻔뻔함 외에 다름 아니지 않나? 딱 내가 바라는 바다. 복잡한 건 개나 줘버리고 단순하게 살고 싶다.

음악도 그렇다. 예쁜 목소리에 악기 하나. 딱 좋다. Cyrille Aimee의 매력적인 보컬과 Figueiredo의 기타. 모자람이 없다. 뭐가 더 들어오면 이 맛이 아닐 것 같다. 감각적 색감의 자켓 사진까지 노래의 맛을 더해준다. Grover Washington Jr.와 Bill Withers의 명연주를 어디 근본도 없는 애들한테 갖다 대냐고 버럭하실 분들에게 한마디 하자면.. “그래서.. 뭐?!”

#시간에 대하여

닉 케이브 앤 더 배드 시즈(Nick Cave & Bad Seeds) / Into my arms

어머니는 현재를 사신다. 점심때 뵈었는데.. 저녁에 전화 드리면 “요즘 왜 이리 뜸하냐” 하신다. 식사 중에 바로 직전에 드신 음식을 기억하지 못하시고 “내가 언제 만두를 먹었다 그래?”하시며 역정을 내시기도 한다. 지금 어머니는 매 순간 현재만을 사신다. 그런데.. 내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 정말 좋아하신다. 환하게 웃으시며 당시를 기억하신다. 어머니는.. 지금 과거의 한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때로 가고 싶으실까. 과거를 현재로 소환할 수 있으면 그 또한 현재가 된다. 아주 행복한.

Into my arms. 영화 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집을 방문하는 장면에 흐르는 음악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Nick Cave의 심오하고 처절한 사랑노래. 인간은 시간과 죽음을 거스르지 못하나 사랑을 통해서 평화를 얻고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얘기일까. Into my arms, oh Lord, into my arms.

#마치며

마지막 곡은 비워놓고 싶었다. 내 인생의 진짜 마지막 순간에 채워 넣어야 할 곡이 무엇일지.. 아직은.. 모르기 때문이다.

■ 프로필

김홍철 | kimpd33@naver.com

여러 직장을 전전한 후 1993년 1월 KBS 라디오 PD로 입사했다.

<차태현의 FM인기가요>, <박수홍 박경림의 FM인기가요>, <안재욱 차태현의 미스터라디오>, <당신의 아침 박은영입니다> 등을 만들어 연출했고 ‘KBS Cool FM’의 어울리지 않는 관리자 노릇을 잠깐 할 때 <김승우 장항준의 미스터라디오>를 기획했다.

현재는 ‘KBS 클래식FM’에서 고전음악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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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4 남태정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마련한다. 이즘 필자들과 독자들의 글을 공개하면서 이즘 편집진은 음악과 동의어라고 할 라디오 방송의 PD들이 갖는 미학적 시선과 경험을 들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이 뽑은 ‘인생 곡 톱10’을 순차적으로 공개한다. 네번째 순서는 MBC 라디오 남태정 프로듀서다.

얼마 전 대대적으로 집 정리를 했다. 한때 욕망과 허세를 대변하던, 많은 음반과 만화책은 아이들 책에 자리를 내주고, 방 한 켠의 보잘 것 없는 종이 박스 속에 밀려난 지 오래. 이제는 그곳에 자리한 짐마저도 버거워, 나의 삶 한 켠을 또 비워내기 위하여 먼지 쌓인 상자를 열게 되었다.

뚜껑을 열자 이들과 함께 잠들어 있던 지난 시절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버릴 것’, ‘살릴 것’으로 구분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기준은 음반과 책들에 스며든 추억이 되어버린 터,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향할 것과 누런 종이 상자 속에 다시 넣어둬야 할 것의 갈림길에서 추억이 짙게 묻어 있기에 일단 함께하기로 결심한 몇 곡을 소개한다.

파이어 Inc (Fire Inc) / Tonight Is What It Means To Be Young

월터 힐(Walter Hill) 감독의 영화 ‘스트리트 어브 파이어(Streets Of Fire)’는 악당으로부터 납치된 공주를 왕자가 구출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를 변용한 현대판 서부 활극이다. 팝스타 다이안 레인(Diane Lane)이 악당 윌렘 대포(Willen Dafoe)에게 납치당하고, 그녀의 전 남자친구였던 마이클 파레(Michael Pare)가 다이안 레인을 구출한다는 스토리와 거기에 멋진 음악들이 더해져 MTV식 ‘Rock And Roll Fable’이 완성된다.

화려한 곡 구성을 내세우는 프로듀서 짐 스타인먼(Jim Steinman)이 참여한 영화 오프닝과 엔딩 음악은 이야기 전개의 ‘기’, ‘결’에 부합한다. 대중적으로는 오프닝 곡 ‘Nowhere Fast’가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당시 10대 초입을 지난 나의 감성을 사로잡은 음악은 영화의 엔딩에 흐르던 ‘Tonight Is What It Means To Be Young’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떠나는 남자주인공을 안타깝게 보내야만 했던 심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온갖 현란한 자극들이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지금 이 시대에, 이곡은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자극으로 나의 마음을 여전히 뒤흔들고 있다.

아하(A-Ha) / Take On Me

역사에는 영상 음악의 시대가 1980년 MTV의 개국과 함께 등장한 버글스(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부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내게 있어 영상 음악 시대의 시작은 A-Ha의 ‘Take On Me’와 만난 순간부터이다. 아마 ‘쇼 비디오 자키’와 같은 오락 프로그램의 엔딩 크레딧에 흐를 때 접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음악은 그저 카세트 테이프를 사서 듣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실사와 만화를 뒤섞은 ‘런어웨이’ 이야기는 만화와 음악을 좋아했던 나의 취향을, 그야말로 저격하고 말았다. 물론, 세련된 멜로디와 사운드, 맑으면서도 힘 있는 보컬까지 가세한 음악만으로도 시대를 관통하는 명작이다. 자유자재로 영상을 찍고 쉽게 편집하는 시대에 이제는 어설프게 느껴질지 모르나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찾고, 수많은 커버 버전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 음악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

조용필 / 단발머리

PD가 되기 전과 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취향을 설명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 영화 어때?’ ‘진짜 재밌어.’ ‘그 음악 어때?’ ‘죽여주지!’ 이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호불호 정도로 취향을 이야기하던 것에서 ‘아, 그 영화는 미장센이 어쩌고저쩌고……’, ‘그 곡의 베이스 라인과 사운드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나름의 근거들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이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나한테 조용필의 음악에 대해 물어온다면?

그냥 좋다. 어려서 들었을 때도 좋았는데, 나이 들어 들으니 더 좋다. ‘단발머리’는 어렸을 때 동네 오락실에서나 들릴 법한 ‘뿅~뿅~뿅~’ 사운드가 재미있고 신기하게 느껴져 오래 전부터 나의 애창곡이자 애청곡이었다.

2년 전, 조용필 50주년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여러 뮤지션들과 평론가들을 통해 이 곡이 얼마나 훌륭한지 객관적인 근거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생전에 조용필의 팬이셨던 어머니와, 그리고 항창 트와이스에 빠져 있는 초등학생 딸아이도 흥얼거릴 정도로 시대를 아우르는 음악적 접점이 되고 있다는 데서 이 곡의 위대함을 절감한다.

데프 레파드(Def Leppard) / Hysteria

 픽션에서는 개연성이 떨어져 보이는 뻔한 감동이 현실이 되면 그 감동은 어떤 드라마나 영화보다 커진다. 데프 레파드(Def Leppard)의 드러머 릭 앨런(Rick Allen)은 3집 앨범 ‘Pyromania’의 성공 후 팔이 절단될 정도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어느 누가 봐도 밴드의 비참한 결말을 예측할 수밖에 없던 상황, 그러나 앨런이 남은 두 다리와 남은 한 팔로 4집 앨범 ‘Hysteria’에서 위대한 드러머로 부활한다.

위기와 절망의 순간을 극복한 릭 앨런과,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그를 기다리며 지지했던 동료들의 우정은 음악의 감동을 배가한다. 뛰어난 음악과 함께 감동적인 스토리가 합해져 이 앨범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팝스타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비슷한 시기에 발매한 앨범, ‘Bad’의 판매고를 훌쩍 뛰어 넘는 기록까지 세웠다.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 ‘Hysteria’는 3년에 걸친 그들의 인고의 시간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이 무거워진다고 느끼는 이 때, 그들의 음악과 음악 이야기는 여전히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 준다.

오사나(Osanna) / Canzona(There Will Be Time)

 8,90년대 10대 시절을 보낸 팝 음악 애호가들에게 프로그레시브 음악, 아트락은 거쳐갈 수 밖에 없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영화팬들이 헐리우드 오락 영화에 열광하던 시절 소위 유럽 예술영화, 독립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자극을 얻는 것처럼, 영미권의 팝음악이 지배했던 시절의 유럽, 특히 이태리 아트락을 통해 음악의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뉴 트롤스(New Trolls), Latte E Miele(라떼 에 밀레) 등 수많은 이태리 아트락 가운데 처음으로 구매했던 아트락 음반이 Osanna의 ‘Milano Calibro 9’였다. 당시에는 라디오 방송에도 많이 소개되지 않아 그저 유명 평론가의 추천에 의지해 구입한 음반이 기대치와 달라 본전이 생각나던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 음반의 ‘Canzona’ 만큼은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들었으니, 이미 금전적인 가치를 넘어 선 셈이다.

윤상과 티란티노 감독처럼 음악의 마니아라면 들어봤음직한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영화 음악의 거장, 루이 바칼로프(Louis Enrique Bavalov)와 콜라보도 더욱 이 음악을 가치 있게 한다.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 / Childhood Memories

음악을 듣다보면 ‘내 맘대로 3대 음반’을 버릇처럼 꼽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3대 록 앨범, 3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음반, 3대 가요 명반 등. 이런 의미에서 애장하는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Ennio Morricone)의 3대 음반을 고르자면 영화 ‘미션(Mission)’,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그리고 바로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Once Upon A Time In America)’이다. 거친 팬풀루트 도입부가 인상적인 ‘Childhood Memories’는 당시 광고와 방송용 배경 음악으로도 사용되었던 엔니오 모리코네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개봉 당시에는 2시간 가까운 잔인한 가위질로 영화와 그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대학 입학 후 4시간 버전으로 다시 봤을 때, 현대 미국의 대서사시인 영화의 맥락이 연결되면서 영화에 함께 음악은 새로운 생명력을 얻게 되었고, 비로소 나만의 최고의 음반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참고로 나만의 엔네오 모리코네 3대 음반에 아깝게 탈락한 음반은 브라이언 드 팔마(Brian De Palma) 감독의 영화 ‘언터쳐블(The Untouchables)’ OST 음반이다.

김현철 / 동네

뮤지션 김현철을 생각하면 취권의 성룡이 떠오른다. 허허실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모습에서 그가 한때 강호를 평정했던 무림의 고수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다. 조용필이 속세와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음악계의 ‘도인’이라면, 김현철은 자전거와 술을 좋아하는, 언제 어디서나 마주칠 법한 동네 아저씨마냥 우리의 곁에 함께 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함께 한 술자리에서 긴장의 끈을 놓고 있다가 문득 화제가 ‘음악’이 되었을 때, 취기를 꿰뚫는 그의 날카로운 분석을 마주할 때면 경외심마저 들곤 한다.

‘동네’는 그가 무려 20살에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곡이다. 그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적 소재와 형식미를 조화롭게 갖춘 곡으로, 20대 김현철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만나기만 하면 ‘술 한잔’ 약속부터 잡는 그의 칼이 이제는 세월의 무게에 무뎌지지 않았을까 싶었던 적도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한 음반 ‘돛’을 통해, 그가 사람 좋은 웃음 속에 여전히 음악의 칼날을 노련하게 벼려오고 있는, 이 바닥의 고수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차게 & 아스카(Chage & Aska) ‘On your mark’

‘미래소년 코난’, ‘루팡 3세’ ‘천공의 성 나퓨타’ 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On Your Mark’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단편 작품으로 동명의 타이틀곡을 당시 일본의 국민 듀오 차게 앤 아스카(Chage And Asak)가 불러 화제를 모았다. 2000년 한일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열린 공연에서도 애니메이션과 함께 소개되었다. 과거의 아픔을 같이하고 함께 미래로 나아가자는 메시지를 통해 한일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차게 앤 아스카는 여러 가지 구설수에 휘말리며 해체되었고,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의 음악,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한국의 팬들이 있고, 이제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일본인도 그에 못지않게 많아졌다. 어쩌면 지금의 경색된 한일관계는 서로의 문화를 더 적극적으로 나누고 소통하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듯하다.

그랜트 리 버팔로(Grant Lee Buffalo) / Rock of ages

소위 펄 잼(Pearl Jam), 너바나(Nirvana) 등의 시애틀 그런지와 그린 데이(Green Day), 오프스피링(Offspring) 등의 네오 펑크가 대세이던 90년대 중반, 잠시 미국에 머물렀던 순간 우연히 접하게 된 밴드 그랜트 리 버팔로(Grant Lee Buffalo)의 두 번째 앨범 ‘Might Joe Moon’의 마지막 트랙이다. 국내 라이센스 음반으로 발매되지 않았고, 인터넷 정보 검색이 본격적이지 않을 때라 아무런 사전 지식이나 편견 없이 음악 그 자체를 감상할 수 있었던 곡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빌보드 등 차트 중심의 음악이 주도하고 있지만, 그것의 바깥 세계에도 좋은 음악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음악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 음반만큼은 첫 만남에 이유도 모른 채 끌렸다. 아마도 돌이켜 보건데, 리드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고 있는 그랜트 리 필립스(Grant Lee Phillips)가 때로는 읖조리 듯, 때로는 토해내듯 하는 노래와 기타 연주가 청춘의 허허로움을 대변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승환 / 변해가는 그대

이승환의 음반과 공연은, 그 당시에  해낼 수 있는 최고치를 이뤄내고야 만다. 20세기 말미에 발표된 이승환의 라이브 앨범 ‘무적전설’은 음반으로 접하는 음악과 공연으로 체험하는 음악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그중 ‘변해가는 그대’는 라이브 실황은 현장감을 극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곡을 만든 유희열이 라이브용 편곡에도 참여하였으며, 공연에서 자신이 가진 것 이상의 에너지를 충분히 쏟아내고야 말도록 러닝 타임도 원곡의 두 배로 늘렸다. 공연의 엔딩곡으로 그롤링까지 해가며 가수가 지닌 모든 힘을 소진해야만 부를 수 있는 곡이기에 몇 회를 제외하고는 이후 공연에서 불리지 않았다. 

2019년 12월 1일,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무적전설’의 마지막은 ‘변해가는 그대’였다.  한동안 공연장에서 이 노래를 들을 수 없었던 팬들에게 이승환은 더 풍부하고 깊어진 에너지를 발산해 냈고, 그의 오래된 팬들은 무대를 불사르는 투혼에 눈물과 환호성으로 답했다. 이승환은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가 할 수 있는 최고를 이루고야마는, 이 시대의 전설이다.

■ 프로필

남태정 | stevenam@naver.com

1996년 MBC 라디오국에 입사해 그간 < 유희열의 All That Music >, < 이소라의 FM음악도시 >, < 오늘 아침 이문세입니다 >, < 푸른밤 종현입니다 > 등을 연출했고, 2019년에는 U2의 내한공연을 유치했다.

현재는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