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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8 조정선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여덟 번째 순서는 MBC 조정선 프로듀서입니다.

성재희 ‘보슬비 오는 거리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인 1965년 무렵이다. 친척들이 집에 모이면, 아이들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유행가를 한 번 불러 보라고 시키거나, 아니면 당시에 유행하던 트위스트를 좀 춰보라고 해서, 흥을 유발시키던 문화 빈곤의 시절이었다. 당시에 즐겨 불렀던 노래가 바로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였으니, 내게는 첫 번째 유행가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할 때마다, 환호의 강도가 꽤 커서, 나조차 어느 순간, 마치 지존인 양 착각하게 됐던 모양이다. 요즘 말하면 미스터트롯의 정동원 어린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명절이 끝나고 친척들에게 받은 돈이 꽤 두둑했던 어느 날, 동네에 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소식이 내 귀에도 들어왔다. 1등상은 바로 ‘금반지!’ 장소는 지금의 중랑구 신내동 어딘가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 때부터 가족과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금반지를 타 오겠다는 나를, “다 사기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며 다들 말렸다. 그것도 실실 웃어가면서. 아마 그 웃음 속에 ‘어리석은 놈’이란 뉘앙스가 들어있어서, 내가 더 떼를 썼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힘으로, 논리로, 당장 주머니에 없던 참가비 문제로(친척에서 받은 돈은 일단 몰수인 시절이었으니), 결국 노래자랑에 나갈 수 없게 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냥 목 놓아 우는 일 뿐이었다. 그 이후에 얼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게는 ‘금반지 사건’이 제일 듣기 싫은 과거가 됐다. 금반지의 ‘금’자만 나와도 내빼기 바빴다.

이 노래는 라디오에서는 거의 들을 수 없고, 가끔 가요무대에서나 나오는데, 당시의 가슴 아픈 추억(?)을 소환한다. KBS라디오악단을 이끌던 김인배 단장이 관악기 주자라서 그런지, 서주와 간주를 장식한 트렘펫 솔로가 멋들어지다.

이미자 ‘섬마을 선생님’
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한 가운데인 1960년에 태어났다. 전쟁 이후에 한 가정에는 최소한 아이가 네댓 명은 있었고, 예닐곱인 경우도 흔했다. 우리 집도 여섯이나 됐으니,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벌이로는 아무래도 가족을 건사하는 게 힘들었을 거다. 그에 대한 단기적인 해결책이라면 아이 중 하나쯤은 친가나 외갓집에 맡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젖먹이나 학교에 입학한 자식을 내려 보낼 수 없었을 터이니, 자연스럽게 6, 7세의 아이가 제격이었을 것이며, 영광스럽게 내가 선발된 거다.

이렇게 해서 1966년 9월 무렵부터 이듬해 2월까지 나는 경기도 용인의 외갓집에서 지냈다. 당시에도 시골에는 아이가 많지 않아서, 나는 꽤 심심하게 보내야 했는데, 그나마 위로가 됐던 게, 외할머니와 함께 듣는 라디오드라마였다.

그 중에서 ‘섬마을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시작과 끝에 나오는 주제곡이 특히 좋았다. “해당화 피고 지는 섬마을에, 철새 따라 찾아온 총각선생님. 열아홉 살 섬 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떠나지 마오”

지난 11월 친구와 동해안 해파랑길 750km를 함께 걸으며, 해당화를 참 많이 봤다. 늦가을이라 꽃은커녕, 야들야들한 잎사귀마저 말라있거나,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홍자색이기는 하나 꽃빛깔이 연하고, 단풍이 짙게 들지 않으니, 장미과의 열등생이지만, 곁에 두기에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었다. 북한 땅 원산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해당화가 특히 유명하다고 하는데,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다.

샤를르 트레네(Charles Trenet) ‘라 메르(La Mer)’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프랑스의 샹송, 이탈리아의 칸초네가, 영미의 팝과 황금비율로 라디오음악 프로그램을 장식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중에서 La Mer(라 메르=바다)라는 샹송은 아련한 심정으로 접했던 음악이다. 특히 이 곡을 작곡하고 부른 아티스트 Charles Trenet(샤를르 트레네)의 오리지널 음반이 아주 오래된 것(1946년)이라, 음질은 필터가 걸린 듯 먹먹했으며(심지어는 찌걱찌걱 축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듯하다), 먼 듯 가깝고 가까운 듯 멀게 들릴 만큼 음량 또한 전혀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묘하게도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고, 저 멀리 해안선 밖의 꿈의 장소로 나를 안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기타 코드나 피아노 코드를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곡을 연주하면서 화성이 계속 바뀌는 것에 불편해하면서도 큰 재미를 느낄지 모른다. F Dm Gm C7 F Dm Gm C7 F A7 Dm C7 F Dm Bb D7 Gm C7 F Dm G G7 C C7 … 정말 쉴 새 없이 새로운 코드를 잡도록 채근하는 이 곡을, 무려 75년 전에 만들어 불렀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La Mer는 1950년대에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가 Beyond The Sea라는 다른 제목의 영어버전으로 여러 가수의 노래로 히트한 바 있다. 바비 다린(Bobby Darin),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조지 벤슨(George Benson)도 리메이크 했으며, 최근에는 로비 월리엄스(Robbie Williams)의 노래가 히트했다.

항해가 자유롭지 못 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해안가에서 바다 저편을 보며 많은 상상을 했을 것이다. “저 바다 건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언젠가 배를 타고 가서 그녀를 만나야지. 그리고 날 거기에 데려다 준 선장에게, 난 더 이상 배를 탈 일이 없으니, 당신만 떠나면 되! 이러고 말 할 거야” 세상에 이렇게 낭만적인 노래가 다 있다니!! 오리지널 샹송가사는 좀 다르겠지만, 나는 샤를르 트레네의 노래를 들으며, 영어가사를 음미하곤 한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버닝 러브(Burning Love)’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2년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에 독수리마크가 선명한 성우전자의 스테레오 전축이 들어왔다. 덩치가 웬만한 장식장 크기는 족히 됐을 전축이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카세트 녹음이 가능한 데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AM와 FM 수신, LP음반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요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조악한 제품이었다.

통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던 큰 형은 음악에 꽤 관심이 있어서, 매일 밤 라디오 다이얼 이곳저곳을 돌리며, 어떤 때는 자못 심각하게 또 다른 때는 낄낄거리며 음악과 진행자의 얘기를 듣곤 했다. 당시에 가장 즐겨 들었던 프로그램은 MBC-FM <박원웅의 밤의 디스크쇼(후에 <박원웅과 함께>로 바뀜)>였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부탁을 하나 하고 외출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Burning Love’를 엽서로 신청해 놨으니, 노래가 나올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녹음을 해 두라는 얘기였다. 물론 노래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불러지기를 원했던 거다. 전축에 동시 녹음기능이 없었던 지라, 마침 집에 있었던 일본제 납작 녹음기를 준비해 놓고, 포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엘비스가 그 날도 <밤에 디스크쇼>에 출연하여 ‘사랑을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형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나는 동작이 굼뜨다는 이유로 두고두고 억울한 원망을 들어야 했다. 이렇게 한동안 이 FM 음악프로그램은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거의 빼놓아서는 안 될 잠자리의 파트너가 되었다.

하지만 Burning Love를 통해 알게 된 <밤의 디스크쇼>가 결정적인 위력을 발휘해준 것은 바로 MBC입사의 계기를 마련해 준 일이 아닌가 한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나는 그저 어지간한 기업의 무역관련 업무나 사무직의 평범한 직장생활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간지에 실린 MBC 공채시험 공고를 봤고, 라디오PD란 직종에 호기심을 느꼈던 거다.

“MBC-FM을 듣고 자랐습니다. 좋은 음악 프로그램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면접시험에서의 당당한 태도가 내게 합격의 영광을 가져줬으니 말이다.  

폴 모리아(Paul Mauriat) ‘Love Is Blue’
지금은 BTS의 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어서 K팝의 기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여러 해 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미국 빌보드차트에서 2위까지 오르며 돌풍을 일으킬 때 문득 프랑스의 악단 지휘자인 폴 모리아를 떠올리게 됐다.

젊은 댄스가수와 이미 세상을 떠난 대중음악 연주자가 어떻게 오버랩이 됐는가 하면, 이 둘은 공통되게 고유의 언어와 표현수법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 한 성공을 미국에서 거두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음악이라는 일본식 표현에 어울릴 만큼,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계열의 무드음악으로 멸시 받던 폴 모리아가 어떻게 미국에서 차트 1위(Love Is Blue가 1968년 2월 10일, 빌보드 No.1)에 올랐는가 하면, 그것은 거대 미국시장 진출을 노리고 그들이 정서에 맞추려는 작위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1970년 무렵부터 라디오에서 폴 모리아의 음악을 접해왔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동양적인 선율에다 탐미적인 연주 표현수법이라고 생각하며 감동했다. 그러니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폴 모리아의 음악으로 문을 열었고 문을 닫았을 것이다.

동아방송의 <밤의 플랫폼>에 흘렀던 이사도라(Isadora), 동양방송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에 나왔던 ‘시바 여왕(La Reine De Saba)’, <박원웅과 함께>의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Serenade To Summertime)’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테마송 ‘돌아와요 부산항에’까지 아마 폴 모리아가 없었더라면, 70~80년대 우리나라 라디오 방송은 과연 무엇으로 타이틀 음악을 했을지 의문이다. 물론 그 대표곡이자, 그의 인기에 불을 당긴 것은 Love Is Blue일 거다.

뜬금없이 드는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1970년대 말 무렵에는 웬만한 가정에 전축이 한 대씩 있었다. 당시로 봐서는 획기적인 컬러풀한 색상의 LP전집에서 흘러나오던 폴 모리아의 산뜻한 음악이 실은 거의 해적판이었다는 사실이다. 1975년부터 네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던 폴 모리아는 자신이 한국에서 인기가 그렇게 높았지만, 음반인세는 제대로 받지 못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나는 알았으리라 본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음악이 동양 저 변방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했을 것 같다. 그러니 천길 마다않고 한국을 다녀가지 않았을까.

이문세 ‘파랑새’
1984년 1월, MBC에 라디오PD로 들어와 수습기간을 거쳐 제일 먼저 맡았던 프로그램이 <이종환의 디스크쇼>였다. 입사한지 8개월 밖에 되지 않는 내게, 당시로 봐서는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떨어졌던 건, 실은 프리랜서 DJ로 있던 이종환 선배와 담당PD의 다툼 때문이었다.

이선희가 ‘J에게’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던 1984년 강변가요제 때의 일이다. 결선 전야제로 <디스크쇼>가 공개방송을 가졌는데, 진행방식을 놓고 둘이 크게 다퉜다. 지금 같았으면 둘의 잘잘못을 가려서 한 쪽은 징계, 한 쪽은 속투(續投) 쪽으로 결론이 났으련만, 당시에 FM부장이 내린 결정은 둘은 떼어놓고, 신참PD인 나를 붙이기로 한 거다. 졸지에 입봉을 하게 된 나는, 대선배에게서 일찍 라디오PD로서의 감각을 익히게 됐고, 지금 생각해도 그게 37년 PD생활에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느낀다.

그해 가을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말마다<FM스페셜 이종환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을 만들어 큰 인기를 누렸다. 그 때 자주 나왔던 가수가 이문세였는데, 청중의 반응도 반응이려니와, 마침 그가 옆방(MBC표준FM)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의 별밤지기로 있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섭외가 편해서 자주 출연시켰던 거다.

이종환 선배와 이문세는 티격태격 입씨름으로 화제를 낳았다. “이문세씨가 TV에 못 나오는 이유가 얼굴이 길어 화면에서 위아래로 잘리기 때문이라면서요?” 이러고 시비를 걸면, 이문세는 “이종환 선배는 화면 밖으로 코가 튀어나온다면서요?” 이런 식의 응수다. 당시에는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걸출한 히트곡이 나오기 전이라, 이문세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이종환 선배는 또 한 방 먹이곤 했다. “이문세씨가 또 삐리삐리 파랑새를 부릅니다. 이 노래 밖에는 부를 만한 노래가 없습니다” 참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디온 워윅(Dionne Warwick) ‘A House Is Not A Home’
우리나라에서 가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1980년대부터가 아닌가 한다. 외국에는 결코 쓰지 않을 ‘발라드’라는 장르가 생기면서 가요가 본격적으로 영미의 팝송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런 가요들은 멜로디가 아름답고, 연주 실력이 뒷받침 되면서 음악팬들을 모았지만, 거기에 빠뜨려서는 안 될 게 ‘가사’다. 가요의 장점은 팝과 달리, 들으면 가사가 바로 이해가 된다는 점, 한 편의 시로 내놔도 손색없는 가사들 덕택에 가요는 업그레이드 됐다.

나는 라디오PD가 되기 전에 팝송을 들으면서, 거기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음악을 트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팝송의 가사를 파악하게 됐다. 하기야 뭔 주장을 펼치는 지, 어떤 애틋한 사랑얘기를 담았는지 알아야, 청취자에게 정확히 소개할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몇몇 작사가에게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할 데이비드(Hal David)다. 그가 어딘가에 써놓은 작사 잘 하는 법까지 읽어 봤는데, 나도 한 번 작사가로 나서볼까 슬쩍 유혹도 받아봤다.

가사는 세 가지 요소에 충실하면서 쓰라고 한다. ‘그럴듯함(Believability)’ ‘단순함(Simplicity)’ ‘정서적 충격(Emotional Impact)’가 그것이다. 1964년 Dionne Warwick이 노래한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A House Is Not A Home)은 할 데이비드의 작품 중에서 백미가 되는 가사로 내용이 감동적이다.

“의자는 여전히 의자일 뿐이지요. 거기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더라도. 그러나 의자는 집이 아니지요. 그리고 집은 집이 아니랍니다. 그곳에 당신을 안아줄 사람이 없을 때, 그리고 당신이 굿나잇 키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중략) 그러니 이 집(House)을 집(Home)으로 바꾸어주세요. 제가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면, 제발 거기 있어주세요. 당신이 아직 나를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조이(Joy) ‘Touch By Touch’ 그리고 비틀스(Beatles)의 ‘Yesterday’
1986년 가을 무렵, MBC라디오가 정동에서 여의도로 이사를 오고 얼마 안 있어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회사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란 여론조사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했다. 아마 MBC-FM 개국 15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FM 음악방송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기획했을 것이다.

실은 어느 앙케이트든 대강의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바로 ‘너’)라는 게 있지 않은가 말이다. 팝송 프로그램에서 청취자에게 받는 올타임 리퀘스트 순위가 바로 조사결과일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Beatles의 Yesterday나 Let It Be, Simon And 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나 Sound Of Silence, Queen의 Bohemian Rhapsody, Deep Purple의 Soldier Of Fortune, 그리고 비교적 신곡이라면 마이클 잭슨의 노래들 따위 말이다.

이를 기획한 PD들 모두가 회심의 미소를 띠며 앙케이트지를 수거했는데 다들 크게 놀라고 말았다. 누구도 예상 못 하게 Joy의 Touch By Touch가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이 부른 다른 노래들이 상위를 싹 점한 거다. 다시 한 번 확인하건대 당시의 행사 타이틀은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이었다. 한국인이 ‘최근에 좋아하게 된’이랄지, ‘좋아하는 팝송 신곡’이 아니었단 말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부서 PD들 모두 크게 당황해서 회의에 회의를 거듭한 결과, 궁여지책으로 이렇게 결론을 봤다. 애초에 우리가 기획한 건, ‘한국인의 올타임 리퀘스트곡 베스트’였지만, 이렇게 신곡들이 상위를 차지했으니, 부문을 둘로 나눌 수밖에 없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올드팝> <한국인이 좋아하는 최신팝>으로 분리하자. 이렇게 하고 보니 애초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단숨에 해결은 됐다. 결국 Joy는 Touch By Touch와 Beatles의 Yesterday가 나란히 1위에 올랐다. 이 사건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 더 남긴 셈이다.

폴 사이먼(Paul Simon) ‘Duncan’
내가 대학에 다니던 때는 ‘기타를 못 치는 사람을 간첩’으로 여기던 무서운 시절(?)이었다. 최소한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랄지 버블껌의 ‘연가’, 윤형주의 ‘우리들의 이야기’ 같은 포크송 몇 개는 꿰고 있어야 사람취급(?)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남녀가 유별한 시절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내 겪어온지라, 이성을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도 적었으니, 여학생과 소통하는 기쁨을 누리기에는 통기타만 한 매개거리도 없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니 좀 이른 편이었지만, 형이 치다 팽겨 쳐둔 걸 제대로 된 교본 없이 독학했으니 실력이 그다지 늘지 않았다. 다만 음감이 좋아졌다고 할까? 대중가요의 화성이 별로 복잡한 게 없으니, 어느 곡이라도 악보가 없이 코드만큼은 대충 잡아 칠 수준은 됐다.

그 실력은 대학의 MT에 가서 큰 빛을 발했고, 나는 자주 주목을 받았다. 통기타 잘 치는 아티스트로 내가 꼽는 사람이 바로 폴 사이먼이다. Simon And Garfunkel 시절부터 많은 곡들의 기타 반주를 보노라면, 다양하고 멋진 코드를 접하게 된다. 아름답고 신기한 하이코드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의 노래 중에서 쓰리핑거링(Three Fingering) 주법의 대표곡이 바로 Duncan이다. 팝 차트에 높은 순위에 오르지는 못 했지만, 그가 공연을 통해서 자주 선보였으며, 나도 한 소절 빠지지 않고 다 외우며 기타를 치며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이다.

* MBC라디오 조정선PD
1984년 1월 MBC라디오PD로 입사
<이종환의 디스크쇼> <한경애의 영화음악> <배철수의 음악캠프>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두시의 데이트> 등을 연출했으며 <조PD의 새벽다방> <조PD의 비틀즈라디오> <조PD의 레트로팝스>의 DJ 겸 PD로 활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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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7 민일홍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일곱 번째 순서는 KBS 민일홍 프로듀서입니다.

‘아무 의미 없다’
지금 이 글은 읽는 분들에겐 사실 아무런 의미 없는 리스트입니다.
단지 글을 쓴 저에게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뿐.
SNS 하는 것도 싫어하고 타인의 사생활에도 관심 두지 않는 성격이라서 지극히 개인적인 공개 글쓰기가 많이 민망합니다. 그렇지만 관계성을 중시하는 직업상 뿌리칠 수 없는 분의 부탁으로 부끄러운 글을 올립니다.

[빌보드 키드의 인생 BGM] 

Daniel Boone ‘Beautiful Sunday’
국민학교때 처음 들은 팝송이자 뜻도 모르고 가사를 외우게 된 팝송이다. 당시에 룸메이트로 한 방에 같이 지냈던 대학생 형이 날마다 이 곡을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외우게 된 노래. 이후 형성된 나의 음악 취향과는 사뭇 다르지만, 또래에 비해 이른 나이에 팝을 접하게 해준 첫사랑 같은 곡이다. 그렇지. 원래 첫사랑은 뭣 모르고 하는 거니까.

조용필 ‘단발머리’
일찌감치 팝을 접한 나는, 청소년 시절 ‘가요는 왠지 구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렸기에 가능했던 어린 생각이지만, 그럼에도 당시 그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레코딩 기술과 사운드 메이킹 때문이었다. 80년대의 가요와 팝은 그야말로 명확히 인지되는 벽이 존재했다. 조금만 민감한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팝과 가요 사이의 넘사벽! 당시에 그런 편견을 깨 준 첫 번째 음악이 내게는 조용필의 ‘단발머리’였다.

Chuck Mangione ‘Children of sanchez’
7-80년대의 학교에선 가을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로 매스게임이나 군무 혹은 집단체조 등을 선보였다. 아마도 군사정권의 영향이라 생각되는데, 나의 국민학교 6학년 운동회 하이라이트는 전교생 집단 곤봉체조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전교생을 대표해 무대 단상에서 시범을 보이는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이 바로 나였다. 그해 여름, 나는 전교 집체시간 때마다 땡볕 아래서 긴장 속에 곤봉을 돌려대야 했다. 손에는 굳은살이 배겼고, 귀에는 집단 곤봉체조의 배경음악인 ‘CHILDREN OF SANCHEZ’가 박혔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뇌리에 처음 기록된 재즈 음악이었다.    

Michael Jackson ‘P.Y.T’
MICHAEL JACKSON의 <THRILLER>는 내가 내 돈 주고 처음으로 산 앨범(TAPE)이자, 중학교 시절 AFKN의 ‘AMERICAN TOP40’, ‘SOLID GOLD’, ‘SOUL TRAIN’ 등을 듣고 보며 빌보드 차트를 외우는 빌보드 키드로 성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앨범이다. 그땐 정말 P.Y.T.(PRETTY YOUNG THING)였는데… 그 빌보드 키드는 어느새 반백의 나이가 돼 그 시절의 추억을 제대로 구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빌보드키드의 아침 선택! 매일 아침 7시 KBS 2라디오 <김태훈의 프리웨이>”)을 만들고 있다.

이승환 ‘텅빈 마음’
몸은 성인이지만 아직 소년의 감성을 지니고 있었던 대학교 1학년 시절, 절친으로부터 생일 선물로 받은 이승환의 1집 앨범(LP)은 그 시절 나의 감성과 잘 맞았다. 비록 유행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지만, 누구나 기저에 깔려있는 감성은 그 사람의 특성을 나타내기에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두주불사할지언정 가무는 않는 성향임에도 노래 부를 기회가 되면 유일하게 부르는 노래가 대부분 이승환의 곡이고, 그중에 가장 애창하는 노래가 바로 이승환 데뷔앨범의 타이틀인 ‘텅빈 마음’이다.  

Eric Marienthal ‘Kid’s stuff’
뮤지션 김현철과는 2001년 방송으로 만났다. 매일 자정에 생방송으로 <김현철의 뮤직플러스>(KBS 2FM)를 1년여 함께 했다. 김현철은 국내의 뮤지션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아티스트다. 나 역시 그와 함께 심야 프로그램을 하면서 음악 프로그램 PD로서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 흡사 빠른 볼만 던지던 국내 정통파 투수가 빅리그에서 변화구로 완급조절을 체득한 경우라 할까? 구체적으로 퓨전과 MOR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사실 젊은 시절엔 이런 스타일의 음악보다는 스트레이트하고 선명한 음악들을 좋아하는게 일반적이니까)

ERIC MARIENTHAL의 “KID’S STUFF”는 당시 프로그램의 시그널 뮤직으로 김현철이 직접 고른 곡이다. 그래선지 누가 들어도 뮤지션 김현철을 떠올리게 하는 연주곡이다. 그리고 내게는 그 시절 심야 프로그램을 만들며 느꼈던 즐거움과 보람을 일깨우는 정겨운 음악이기도 하다.  

Nirvana ‘Smells like teen spirit’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는 계획이 있는 아들에 감탄하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 계획이 없는 무책임한 인간으로 표현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봤을 땐 정말 ‘아버지의 계획 없음’이 기성세대의 무능처럼 보였다. 하지만 두 번째 영화를 봤을 때, 그 ‘무계획의 계획’은 본능에 기반한 경험적 통찰로 읽혔다. NIRVANA의 이 곡은 말도 안되는 가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헤드뱅잉 했던 내 젊은 날의 송가였다. 하지만 반백의 나이엔 ‘무계획의 계획’처럼 불완전한 가사 자체로 의미가 이해되는 곡이자 기타 전주만으로 내 안의 ‘청년 DNA’가 살아있는지 아닌지를 확인시켜주는 노래다.

Oasis ‘Don’t look back in anger’
사람간의 관계에서 누군가와 취향과 취미가 같다는 것 매우 중요하다. 공감하고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적으론 취향과 취미가 같은 부부를 보면 부럽다. 물론 그런 부부가 많진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와 아내는 선호하는 영화도 다르고 음악적 취향도 다르다. 대표적으로 아내는 락 음악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우리 부부도 OASIS의 “DON’T LOOK BACK IN ANGER”가 흘러나오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 목소리로 후렴구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새삼 부부의 연대감(?)을 느낀다.  

Rage Against The Machine ‘Wake up’
가장 급진적인 좌파밴드 RATM. 어쩌면 무모하게 보여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솔직하게 뿜어내는 그들의 에너지엔 순수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RATM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시스템에 길들어져 있는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내일이 없는 듯 외치는 펑크락 밴드와는 또 다른 차원의 분노가 그들의 음악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생긴 나만의 스트레스 퇴치법이 있다. 드라이브를 하면서 RATM의 노래를 듣는 거다. 그러면 꾹꾹 눌려있던 부끄러운 자아가 스멀스멀 기도를 타고 올라온다. 목에 굵게 스크래치(?)를 내면서.  

The Beatles ‘The long and winding road’
개인적으로 3대 멜로디 메이커로 엘튼 존과 폴 매카트니, 버트 바카락을 손꼽는다. 그들이 뽑아낸 멜로디는 정말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 그 자체다. 비틀즈 시절 폴 매카트니와 존 레논은 공동저작으로 크레딧을 올렸지만 팬들은 대개 안다. 어떤 곡이 누구의 작품인지. “THE LONG AND WINDING ROAD”는 비틀즈의 노래 중 멜로디 메이커로서 폴 매카트니의 능력이 십분발휘된 곡이라 생각한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YESTERDAY’를 보면 에드 시런과 주인공이 즉흥곡 배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부르는데 ‘훌륭한 멜로디가 주는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내가 눈을 감는 마지막 날, 지난 생이 주마등처럼 스칠 때 흐르는 배경음악이 있다면 아마도 나는 이 곡을 떠올릴 것 같다.  

* 민일홍 PD
KBS RADIO PD (1997년 입사)
– 現 KBS 2라디오 <김태훈의 프리웨이> 연출
–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 <슈퍼주니어의 키스더라디오>, <김현철의 뮤직플러스>, <윤도현의 뮤직쇼>, <사랑하기 좋은날 이금희입니다> 등 프로그램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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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5 김은수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다섯 번째 순서는 CPBC 가톨릭 평화방송 김은수 프로듀서입니다.

아시다시피 덧대는 데는 그 닥 용기가 필요 없다. 대신, 걸러 내거나 포기하는 데는 그 몇 배의 용기가 필요하다. ‘열곡이면 충분하지’ 했음에도, 선곡리스트를 지웠다 썼다 를 반복하면서 어느새 페이지가 너덜너덜해졌다. 다행히 ‘인생’ 이라는 화두를 앞머리에 두자니 구성에 갈등은 없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매순간이 성장과 노화의 리듬뿐 아니라, 미련과 회한의 채에 걸러져, 되돌아보니 다시금 아쉬움과 그리움이 한 겹 더 쌓이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됐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 PD들의 주옥과 같은 선곡과 해설을 통해 ‘이즘’ 독자 분들께는 다분히 지적욕구가 충족되었으리라 보고, 오늘은 그야말로 개인사를 관통하는 음악들을 나열하면서 한두 번 고개를 끄덕여준다면 진심 행복할 것 같다. 어차피 음악의 운명은 감성의 공명과 그로인한 쾌감(?)을 함께 나누는 일이므로…

장기하와 얼굴들 ‘마냥 걷는다’
‘마냥’이라는 부사를 노래제목에 붙였다. 남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내 시선에 집중하면서 음악을 해보겠다는 당당한 고집이 느껴졌다. 일단 ‘싸구려 커피’가 날린 신선한 펀치 뒤에 이어진 수록곡들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한 호흡으로 빠져들게 했다. 직업 상, 새로운 음반을 접하면 숙제하듯 요리조리 분석하고 해부하는 작업이 우선이건만, 이 음반은 물 흐르듯 한 번에 들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장기하의 최근 에세이집 [상관없지 않은가?]에서 보여주듯, 작고 시시한 사물일지라도 그의 깊고 집요한 사색의 흐름을 타고 흡인력을 놓치지 않는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좋았던 그 사람의 사진 한 장 손에 쥐고 마냥 걷는’단다. 연주는 더 압권이다. 무반주로 시작되는 노랫말에 귀를 세우다보면 비로소 시작되는 1분 30여초 동안의 장중한 간주와 후주는 무방비로 황홀경에 빠져들게 한다.

1980년대 일본의 Electronic Pop을 대표하는 밴드 [Yellow Music Orchestra]와 이기팝, 우리의 십센치와 이날치로 이어지는 실험적이고 고집스런 음악들이 주는 매력을 장기하는 이 한 장의 앨범에 넘치도록 싣고 있다.

The Animals ‘House of The Rising Sun’
-내가 초등학생 때 서울로 유학 간 오빠는 알토란같은 수업료를 빼돌려 밴드를 결성하고 음악활동을 하다 결국 부모에게 들켜 고향으로 강제 소환된 무렵, 우리 자매들을 앉혀놓고 기타반주에 불러주던 곡이자 내가 최초로 접한 팝송이다. 어린 마음에 제목자체에 희망을 걸었던 노래였건만, 실제 내용은 반전이다. 햇살이 가득한 따스하고 아늑한 가정이 아니라, 꿈을 가진 소년의 희망도 저버리게 만드는 회색빛 우울한 집… 그 집으로 돌아가는 남자의 쓸쓸한 회한이 묻어나는 노랫말을 알고 나니, 오르간 솔로보다 기타연주가 더욱 슬프고 아프게 느껴지는 명곡이다. 더욱이 지금은 가고 없는 오빠의 연주들이 이 노래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긴 여운을 남기고 있기 때문도 하다.

-이 노래는 이후, 동네에 이따금씩 들어오던 천막극장의 개구멍을 넘나들며 영화에 빠지고, 박원웅과 황인용, 이종환, 김광한, 장유진, 김세원…으로 이어지는 음악프로그램들에 빠져 내가 라디오키즈로 성장한 자양분이 되 주기도 하였다.

송창식 ‘창밖에는 비오고요’
-오로지 운동장 조회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들어간 고등학교 방송반. 뜨거운 햇살아래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연설에 지쳐 한 두 명의 친구들이 픽픽 쓰러지던 시절, 마이크 점검을 끝내놓고 시원한 방송반에서 뒹굴거릴 때, 송창식의 이 앨범은 뭔지 모를 위안과 기쁨을 더해주었다. 더구나 세시봉의 뮤즈, 윤여정을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심플한 노랫말의 이곡을 비롯해 비오는 날 들으면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상아의 노래, 꽃보다 귀한 여인, 비의 나그네..등 연가 풍 곡들로 이어져 사춘기 감성을 마구 흔들어 댔다.

-불법이긴 했지만, 당시 나름 곱씹고 곱씹었던 곡들을 모아 읍내 레코드가게에 가서 나만의 컨필레이션 음반(조악스런 카세트 테잎이긴 했지만)을 만들 때 늘 빠지지 않던 애장곡이기도 하다.

한 대수 ‘물 좀 주소’
-방송반에 이어 그 혜택의 단맛을 잊지 못하고 들어간 대학 음악감상실 ‘미네징거’
그곳은 소위 음악 골통(^^)들의 집합소였다. 지금도 ‘명연주 명음반’ DJ로 활동 중인 정만섭을 비롯, 용산에서 알아주는 방송 장비의 대가인 선배와 종종 음악칼럼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는 음악매니아들이 학과 수업을 제치고 늘 감상실을 들락거리며 식구처럼 지냈던 시기였으니… 한 대수의 익살스런 표정의 앨범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시기. 미소년 같기만 하던 동기가 선배들과의 신고식자리에서 불러재낀 노래가 바로 이곡이었고 다들 이 느닷없는 반전에 뒤집어졌던 기억이 있다.

-이후 다큐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할 때, 이 노래는 새벽녘 원고 탈고 때마다 어김없이 틀어대던 내 애청곡(18번)이 되었다. 걸걸한 탁주 한 사발 같은 음색과 자유로운 영혼을 자켓 사진 한 장에 담아낸 한대수… 지난 해 미국으로 다시 떠나기 전, 김도향 선생과의 인연으로 마지막 출연을 평화방송에 허락해준 고마움 때문일까? 70나이에도 꽃무늬 셔츠와 장발이 잘 어울리는 아름다움 때문일까? 제아무리 야속한 시간이라도 이 20대 청년의 음악적 패기를 영원히 앗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추신: 전주 없이 영혼을 흔들어대는 네 음절 ‘물 좀 주소~’ 는, 우리 가요 사에 남을 가장 강력한 첫 소절이 아닐까 싶다.^^

한영애 ‘루씰’
-93년의 여름. 한영애의 ‘아.우.성 콘서트’를 보러 간 당시 나는 만삭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오겠다며 발버둥치는 태아에게 ‘엄마가 이 공연 놓치면 널 미워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아가야, 나오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주라.’ 겨우 달래며 달려간 여의도 63빌딩 공연장은 한여름의 습기와 열기로 가득 찼고, 간신히 구석진 입석을 차지 한 채 곡마다 열광하는 나를 결국은 한영애도 알아봤다. 관객들이 일제히 나를 보고 미쳤다? 는 박수를 보냈지만 나의 쾌감은 그녀의 흐드러진 블루지 창법의 ‘루씰’로 절정을 이루었다. 전설의 블루스 뮤지션 B.B.King의 기타 애칭라고 하지만 내게 루씰은 그냥 한영애다.
‘루씰~ 알고 있나, 너의 노래는 영혼 속에 가리워진 빛을 찾게 하는 믿음…’

-몇 해 전, 임진각DMZ평화콘서트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고, 나의 루씰이 건재함도 보았고, 무엇보다 주변 소음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코뿔소의 모습을 한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음에 행복했다.

장국영 ‘Boulevard of Broken Dream’
-‘가사는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운명’이라고 했던가… 나의 입을 떠나 타인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회귀하는 노랫말들…장국영이 부르는 이 노래는 마치 본인의 생을 예고하듯 처절하고 음울하게 다가온다.

그를 만난 건 그가 죽기 전 내한 해 묵었던 강남의 한 고급호텔 스위트룸 접견실. 영화음악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였는데, 매우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인터뷰에 응해 주었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특히 그도 나도 함께 좋아한 배우, 게리 올드만에 대해 얘기할 때는 친구처럼 반가워하기도 했다. 마치 배틀하듯 게리 올드만의 명장면들을 주고받을 때는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사라졌다. 남은 건 노래 제목처럼 ‘슬픔의 거리 꿈이 깨진 거리를 홀로 걸으며 지독한 외로움을 토해 낸’ 그의 절규뿐이다.

-늘어지듯 흐느적거리는 섹소폰 전주에 이은 장국영의 블루지한 굵은 음색은 마치, 시리디 시린 새벽을 연상시킨다. 오랜만에 유튜브에 올려 진 이 곡을 다시 찾아 들었다. B.G 영상은 양조위와 열연한 [해피투게더]를 올려놓았는데, 극 중 오열하는 장국영의 모습이 왜 그토록 아프게 다가오는지….

Sting ‘I love her, but She loves someone else’
-음악프로그램 PD로 30년을 살았다. 중간 중간 교양과 선교, 다큐물을 넘나들었지만, FM은 결국 음악을 빼고는 그 어떤 프로그램도 제작할 수없는 매체다. 머리가 제일 맑아지는 순간도 음악을 모니터링 할 때고, 당연 나의 보물 제1호 역시 열권에 달하는 음악노트들이다. 컴퓨터로 작성할 수도 있겠지만 마치 누군가의 글을 받아쓰는 것 같아,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직접 기록하는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해왔다. Sting은 이 노트들에서 가장 많이 기록된 아티스트다. 장르는 물론,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달란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예술가이자 철학자라고 할까?

언뜻 그는 연애지상주의자 연 가사를 쓴다. ‘바람 든 무’ 같은 호소력 짙은 음색도 낭만을 덧칠한다. 하지만 그는 힘들고 난해한 가사를 쓰는 뮤지션 중의 한 사람이다. 전통적인 가톨릭 가정교육의 영향도 있겠지만, 자기 주도적 멘탈이 매우 강한 뮤지션이기도 하다. 이 노래 역시, 모호한 삼각관계를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어머니와 그녀의 신앙, 신과의 관계를 풀어내고 있다. 멜로디는 매우 서정적이고, 가사를 무시하고 들으면 위험한 사랑에 빠져버릴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팅은 속삭인다. ‘난 수도자 영성을 존중하는 아티스트…’ 라고.

-2005년. 올림픽 경기장에서 Sting 공연을 보았다. 잔디밭이었지만, 직접 공연 장비를 챙겨 온 스팅의 고집스러운 열정이 주변의 소음을 모두 잠식해 버렸다.

신해철 ‘아버지와 나 Part Ⅰ’
-음악을 좋아하면 당연 오디오에도 집중하게 되지만, 음반 녹음을 담당한 엔지니어를 보고 구입 결정을 하는 친구도 있다. 그의 방은 오디오장비로 도배됐음은 물론이다. 쫌 유난 아닌가? 하는 물음에 그 친구 왈,
‘마리아 칼라스가 언제 내 앞에서 이렇게 나만을 위한 공연을 해 주겠나?’ 깨갱… 거친 호흡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간절함을 이해하게 되었고, 신해철의 이 곡을 들으며 나 또한 그 거칠고도 살아있는 호흡을 체감 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훅~~ 연기를 내뿜더니, 그가 내 앞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백을 읊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 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나의 아버지도 가고 없다. 아버지와 오빠는 살아생전 몇 마디쯤으로 서로의 마음을 나눴을까? 그럼에도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버티다 오빠가 달려와 눈빛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눈을 감았다. 신해철의 고백이 가슴을 후벼낸 ‘아버지와 나 Part 1′ 과, 아기울음소리로 시작과 끝을 엮은 Part 2.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그가 되어주고 싶다…’고 진정 화해와 사랑을 고백하는 Part 3까지… 유려한 문장과 진중한 반성, 굵직한 철학을 버무린 한 편의 완벽한 서사다.

피오나 애플 ‘I love you to love me’
-이 곡은 아무 전제 없이 그냥 한 번 들어보시라. 그러면 그녀에게 쏟아지는 찬사들에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될 것이다. 가능하면 그녀의 4집 앨범 중, ‘Every Single Night’까지 듣고 나면 그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이 경이로워질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 개성을 분출해내는 괴팍한 천사.
강렬하고 급진적인 고요의 독백!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
그녀의 컴백에 전율이 흐른다, 여전히 강렬하다.
목소리 음역은 콘트랄토이며, 음악적 스타일은 재즈, 얼터너티브 록, 바로크 팝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조용필 ‘창밖의 여자’
-마지막 한곡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음악사에 남을 명곡, 가수 중에 가수, 이미 전설이 된 아티스트…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명명되는 인물이 선명해졌다.

-고등학교 2학년, 한창 지적 사치에 탐닉하던 여고생에게 나비넥타이를 하고 헤어스타일은 빵~한 청년. 게다가 발라드인지 트로트인지 알 수 없는 장르들이 뒤섞인 음반이 한눈에 들어 올 리 만무였는데, 그야말로 조용필은 음악으로 세상 모든 선입견들을 멋지게 파괴시켜버렸고 ‘위대한 탄생’을 알렸다.

-수많은 수식어와 수많은 사람들의 경탄을 집약해준 두 사람의 글을 인용하며, 조용필에 대한 나의 사랑, 영웅에 대한 나의 경애심을 갈무리하고자 한다.

‘조용필은 대중성을 비켜가지 않으면서도 음악적 혁신을 게을리 한 적이 없다.
훗날 대중음악 역사는 그를 위해 별도의 장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 주엽 지음. [이 한 줄의 가사] 중)

‘우리나라 가수 중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가수 한 명만을 꼽는다면,
단연 조용필이다’

(가수 송창식)

*김은수 PD
-1990년 가톨릭평화방송(CPBC) 입사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PBC 영화음악’등 다수 음악프로그램 제작
-영화중심 음악프로그램 ‘새날이 오는 길목에서’ 제작,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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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1 김우석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한 번째 순서는 KBS 라디오 김우석 프로듀서입니다.

KBS 라디오PD로 입사 이후 처음 단독으로 맡은 프로그램은 오전 11시부터 1시간 동안 방송되던 < 세계의 유행음악 >이었다. 주로 프랑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남미, 아프리카, 중국 등 아시아 음악까지, 영어로 부르지 않은 해외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과거의 명곡들보다는 당시 현지에서 인기 순위에 오르고 있던 음악들을 빠르게 입수하여 소개하곤 했는데, 유럽 음악계의 계보를 익히는 등 음악적 안목을 키울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평생의 배필을 만나 해로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내 인생의 프로그램’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내 인생 음악 10곡은 이 프로그램에서 집중적으로 소개했던 음악들로 채워보기로 했다. 선택의 기준은 당시 음악 경향을 보여줄 수 있는 대표성과 지금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을 만한 대중성이다. 선곡을 하다 보니 마치 1시간 동안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구성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되도록 소개 글을 읽으신 후, 해당 곡을 들어보시고 다음 소개 글로 넘어가시기 바란다. 만일 시간 여유가 있으셔서 소개 글 속에 언급된 모든 곡들을 찾아 들어보시면 전체적 흐름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될 것이다.

오프닝 시그널 : New Trolls ‘Concerto Grosso (Anna Oxa – Live con I New Trolls)’(1990)

1989년, 아트록 그룹 뉴 트롤즈(New Trolls)는 이탈리아 가수 안나 옥사(Anna Oxa)와 라이브 공연을 하며 그녀의 히트 곡들을 멋지게 반주해줬다. 물론 그들 자신의 곡들도 연주했는데, 그 유명한 콘체르토 그로소(Concerto Grosso) 1번(per 1)과 2번(per 2)의 알레그로와 비바체 등 빠른 테마들만 4분 정도로 압축해서 메들리로 들려준다. 각각 다른 음반에 수록된 원곡들을 모두 감상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이 라이브 버전은 이런 시간적 제약을 간단하게 극복해 준다. 진정한 팬서비스란 이런 거다.

프랑스와즈 아르디(Françoise Hardy) ‘Message personnel’(1973)

우리나라에 ‘Comment te dire adieu’(어떻게 안녕이라고 말할까)라는 노래로 잘 알려진 프랑스와즈 아르디는 이미 1960년대부터 스타덤에 올라 있었는데, 1970년대에 미셸 베르제(Michel Berger)라는 젊은 작곡가를 만나면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특이하게도 이 노래의 주인공은 가수의 목소리가 아니라 반주 음악이다. 

불안함에 떨며 사랑을 고백하는 주인공의 메시지를 가수는 낭송과 노래로 차분하게 전달하고 있는 반면, 화자의 감정선은 배후의 악기들이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에는 문장을 맺지 못하고 목소리마저 끊어진 후, 격렬한 드럼 연주가 감정의 폭발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는 듯하다.

프랑스 갈(France Gall) ‘La declaration d’amour’(1974)

프랑스 갈은 샹송계의 엘리트였다. 1965년, 만17세에 불과한 그녀는 ‘Poupée de cire, poupée de son’(꿈꾸는 샹송 인형)이라는 노래로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아르디의 성공을 지켜보던 프랑스 갈은 미셸 베르제에게 자신에게도 노래를 써주길 간곡히 부탁한다. 1974년, 베르제는 프랑스 갈과 작업을 시작했는데,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은 음악적 성과를 넘어서 2년 뒤 부부의 연을 맺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2년 베르제는 심장마비로 향년 44세의 삶을 마감한다. 이후 프랑스 갈도 암 투병을 하는 와중에 딸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등 불행을 겪다가 지난 2018년에 세상을 등졌다. 샹송 인형이여, 하늘나라에서 동갑내기 남편과 다시 만나 부디 행복하시길……

장 자크 골드만과 시리마(Jean-Jacques Goldman and Sirima) ‘La-bas’(1987)

장 자크 골드만은 록(Rock)적인 경향이 매우 강한 가수 겸 송라이터이다. 1987년에 듀엣 곡을 하나 써 놓았는데 같이 부를 여가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 시내의 지하철역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던 시리마(Sirima)를 전격적으로 발탁하여 ‘La-bas’(그곳에)라는 노래를 녹음한다. 스리랑카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리마는 매우 청아하고 아련한 목소리로 노래에 기여했고, 이 싱글은 전 세계적으로 50만장 이상 팔린 히트곡이 된다.

하지만 완벽해 보였던 신데렐라 스토리는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1989년 시리마는 자신이 직접 쓴 곡들로 채워진 솔로 앨범을 내놓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녀의 성공을 질투한 애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25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이로 인해 주인 없는 앨범은 표류하고 시리마의 목소리는 이 노래에 전설처럼 남아있게 된다. 이후 골드만은 셀린 디온을 비롯한 유수의 가수들과 이 노래를 불렀는데, 내 의견으로는 누구도 시리마의 보컬을 넘어서지 못했다. ‘La-bas’는 특이하게도 모든 악기의 소리가 사라진 후 드럼만 홀로 남아 곡을 마무리하는데, 마치 힘차게 뛰던 심장이 갑자기 멎는 것 같은 쓸쓸한 느낌을 준다.

로랑 불지(Laurent Voulzy) ‘My song of you’(1987)

로랑 불지 역시 미국 팝음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티스트지만, 이 사람은 앞서 소개한 작곡가들보다 훨씬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작풍을 보여준다. 이 노래는 제목이 영어이고 노래 중간에 영어 가사가 약간 나와서 이 리스트에서는 반칙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전통적인 샹송에 가까운 노래이다. 

로랑 불지의 최대 히트곡은 1984년에 발표한 ‘Belle-Île-en-Mer, Marie Galante’(아름다운 섬, 마리 갈랑트)인데 우리나라 광고에 쓰여서 멜로디를 기억할 분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내 선택은 프랑스에서도 별로 히트하지 못한 곡 ‘My song of you’이다. 로랑 불지는 아름다운 곡조를 잘 만들고 몽환적인 편곡을 즐기는 송라이터인데 다작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발표한 작품 수가 좀 적어서 아쉽다. 하지만 이런 음악이 시대를 넘어 살아남기엔 유리한가 보다. 1948년생인데 아직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삼판(Sampan) 프로젝트 ‘Dernier matin d’Asie’(1987)

1984년 영국의 밴드 에이드 프로젝트의 ‘Do they know it’s Christmas?’, 1985년에 이어진 유에스에이 포 아프리카(USA for Africa)의 ‘We are the world’, 그리고 같은 해에 열린 영국-미국 합동 공연인 라이브 에이드까지, 1980년대 중반은 전 세계의 팝 아티스트들에게 새로운 소명을 요구하는 시기였다. 프랑스 아티스트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5년 < Chanteurs sans frontières >(국경 없는 가수들)이라는 프로젝트를 발족하여 ‘Éthiopie’라는 노래를 발표한 바 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7년,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반도를 탈출한 보트피플이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자 프랑스의 가수들은 다시 한 번 자선 프로젝트를 시도한다.

작은 배를 의미하는 삼판(Sampa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 그룹이 발표한 노래는 ‘Dernier matin d’Asie’(아시아의 마지막 아침)이라는 제목이었다. 아마도 프랑스 사람 입장에서 아시아란 과거 식민지를 구축했던 인도차이나반도가 전부였던 모양이다. 다소 제국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프로젝트지만 그래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만든 노래이니 한 번 들어보자. 이 프로젝트에는 당시 신인 급의 젊은 아티스트들도 대거 참여했는데, 특이하게도 노장급에 속하는 제인 버킨(Jane Birkin)이 첫 번째 마디를 불렀고, 장 자크 골드만이 간주에서 기타 솔로를 연주해 줬다. 프로젝트 성격상 애잔함과 웅장함이 공존하는 ‘프랑스판 위 아 더 월드’라고 할 만하다.

리카르도 폴리(Riccardo Fogli) ‘Storie di tutti i giorni’(1982)

이제 이탈리아로 넘어가 보자. 이탈리아에서는 산 레모 가요제가 매년 열리는데, 이탈리아의 대중음악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로서 예전에는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가요제였다. 1950년대엔 도메니코 모두뇨(Domenico Modugno)가 부른 ‘Nel blu dipinto di blu’가 볼라레(Volare)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고, 1960년대엔 질리올라 칭케티(Gigliola Cinquetti)의 ‘Non ho l’età’, 1970년대에는 나다(Nada)가 부른 ‘Il cuore è uno zingaro’(국내에서 ‘마음은 집시’로 번안한 그 노래)가 크게 히트한 바 있다.

1980년대로 들어서면서 산 레모 가요제에 출품되는 노래들의 성격이 크게 변화하는데, 전통적인 칸소네의 성격보다는 팝록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 1982년 가요제에서 ‘Storie di tutti i giorni’(모든 날들의 이야기)로 우승한 리카르도 폴리는 유명한 그룹 이 푸(I Pooh)의 창단멤버였다. 그룹의 전성기였던 1973년에 이미 솔로로 전향한 폴리는 수많은 히트곡을 내놓았고, 이 노래는 그의 가장 큰 히트곡 중의 하나이다. 우아하고 화사한 멜로디를 록적인 비트가 감싸고 있는 세련된 편곡은 이후 등장하는 이탈리아 대중음악의 이정표 같은 역할을 했다.

파우스토 레알리(Fausto Leali) ‘Io amo’(1987)

이탈리아 칸소네를 듣다보면 허스키 보이스를 가진 남자 가수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성악의 나라 이탈리아 남자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탁하다니! 이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러던 중에 파우스토 레알리라는 가수의 이력을 알게 되면서 비밀이 어느 정도는 풀린 것 같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비틀스 등 유명한 팝음악을 번안해 부르면서 음악계에 데뷔한 레알리는 자신의 탁성을 소울 충만한 목소리로 승화시키면서 평단으로부터 일 네그로 비앙코(Il negro bianco, 검은 목소리의 백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그가 발표한 1968년 앨범의 타이틀이기도 했다.

이 걸걸한 목소리의 사나이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이탈리아에 일단의 유사한 흐름이 생겨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파우스토 레알리는 1989년에 Ti lascerò(그대를 떠나려오)라는 노래를 대형 여가수 안나 옥사(Anna Oxa)와 듀엣으로 불러 산 레모 가요제 우승을 거머쥔 바 있다. ‘Io amo’(사랑합니다) 역시 1987년 가요제 출전곡인데 4위에 그쳤다. 어딘가 모르게 클래시컬한 분위기의 이 곡을 들으면 바흐가 연상된다. 필자 맘대로 부제를 붙인다면 ‘허스키 보이스를 위한 아리아’ 정도 될까?

마르코 마시니(Marco Masini) ‘Perché lo fai’(1991)

이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파우스토 레알리가 허스키 보이스의 끝판왕인줄 알았다. 이탈리안 허스키의 최강자 마르코 마시니는 1991년 ‘Perché lo fai’(왜 그러셨나요)로 스타덤에 오른다. 필자가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에는 막 데뷔한 신인이었는데, 벌써 30주년 기념 앨범이 나온 중견 가수가 되어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비 오는 날 감정의 카타르시스가 필요하다면 이 노래를 추천한다. 임재범의 ‘고해’와 비교 감상해도 좋을 듯하다.

알레안드로 발디, 프란체스카 알로타(Aleandro Baldi, Francesca Alotta) ‘Non amarmi’(1992

산 레모 가요제는 기성부문과 신인부문을 분리해서 경연을 펼치고 시상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따라서 매년 가요제에서는 기성 부문 우승자와 신인 부문 우승자를 따로 뽑게 되는데, 별도의 언급 없이 우승이라 하면 기성 부문을 의미한다. ‘Non amarmi’(나를 사랑하지 마세요)는 1992년 신인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한 곡이다. 알레안드로 발디라는 시각장애인 가수가 곡을 써서 여가수 프란체스카 알로타와 듀엣으로 부른 곡이다. 이 두 사람은 신인이라고 믿을 수 없는 놀라운 가창력을 보여주는데, 여기서 신인은 가요제의 첫 출전을 의미하는 것이지 음악 경력 자체가 전무한 신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노래는 1999년에 미국 라틴팝 가수인 제니퍼 로페스와 마크 앤서니가 ‘No me ames’라는 제목으로 스페인어 버전을 다시 불러, 빌보드 라틴 음악 차트에서 빅 히트를 기록했다. 알레안드로 발디는 2년 뒤인 1994년에 ‘Passerà’(지나가리라)라는 곡으로 기성 부문에 출전해서 우승을 차지한다. 바로 그 해에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가 신인 부문에서 우승하며 혜성같이 등장하는데, 그때 보첼리가 부른 곡은 ‘Il mare calmo della sera’(고요한 저녁 바다)였다. 지금 들어도 모두 영롱하게 빛나는 곡들이다.

에도아르도 벤나토, 지안나 난니니(Edoardo Bennato, Gianna Nannini) ‘Un’estate italiana’(1990)

아카데미 주제가상 3관왕에 빛나는 조르지오 모로더(Giorgio Moroder)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주제곡인 ‘손에 손잡고’를 작곡했다. 코리아나가 부른 이 노래는 대중적인 멜로디에 웅장한 편곡으로 커다란 행사에 최적화된 멋진 곡이었지만 당시 혈기왕성하던 시절의 필자에게는 너무 격식을 차린 편곡이어서 자유분방한 맛이 좀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개막식에서 조르지오 모로더는 또 한 곡의 스포츠 행사를 위한 곡을 내놓는데 ‘Un’estate italiana’(이탈리아의 여름)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손에 손잡고’와 유사한 멜로디를 사용하면서도 축구라는 스포츠의 역동성과 열기를 잘 표현한 하드 록 성격이 강한 곡이었다.

개막식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메고 노래하던 두 로커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서도 각 경기를 중계하기 전과 하이라이트 방송 전에 반드시 이 곡을 틀어줬기 때문에, 필자는 이 노래를 듣기위해 거의 모든 경기를 시청했고, 월드컵이 끝날 즈음에는 자신도 모르게 ‘노티 마지케(Notti magiche)’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정도였다. 음악 때문에 새벽 시간까지 축구 경기를 기다려 본 것은 처음이었다. 노래 가사처럼 ‘마법 같은 밤들’이었다.

엔딩 시그널 : Giorgio Moroder ‘Hello Mr. W.A.M. (Finale)’(1980)

엔딩 시그널 곡 역시 조르지오 모로더에게 맡겼다. 모로더는 모두 3개의 아카데미 영화상 트로피를 가지고 있는데, 1978년 Midnight Express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1983년 영화 Flashdance 주제곡 Flashdance…What a Feeling, 그리고 1986년 영화 Top Gun 주제곡 Take my breath away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하지만 필자가 뽑은 모로더 최고의 영화음악은 리차드 기어 주연의 American Gigolo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Blondie의 Call me인데, 짧게 편집된 싱글 버전과는 달리 앨범에 수록된 노래의 길이는 무려 8분이다. 게다가 Call me의 테마를 변주해서 연주곡으로 만든 Night drive라는 곡도 수록돼 있어서 감상의 재미가 쏠쏠하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 역시 연주곡인데 Wolfgang Amadeus Mozart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을 편곡했다. 처음엔 모차르트 원곡의 템포와 유사하게 시작한다. 테마가 한 순배(?) 돈 이후에 템포는 Call me와 Night drive처럼 긴박하게 바뀐다. 음악은 한 번의 브레이크를 밟은 후에 다시 디스코 리듬으로 바뀐 뒤, 군더더기 없는 엔딩으로 끝난다. 이 얼마나 우아하고 멋진 편곡인가!

* 김우석 PD (marshall@kbs.co.kr)

1991년 KBS 입사, < 세계의 유행음악 >, < 김광한의 팝스다이얼891 >, < 손범수의 팝스팝스 >, < 조규찬의 팝스팝스 >, < 윤상의 0시의 스튜디오 >, < 최은경의 FM대행진 >, < 성세정의 0시의 스튜디오 >, < 이무영의 팝스월드 >, < 유열의 음악앨범 >, < 탁재훈의 뮤직쇼 >, < 김장훈의 뮤직쇼 >, < 진양혜의 음악공감 >, < 0시의 음악여행 박철입니다 >, < 매일 그대와 주병진입니다 > 등 제작. 현재는 KBS3라디오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프로그램 <출발! 멋진 인생, 이지연입니다> 제작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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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10곡 특집 Feature

라디오 PD들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 #10 주승규 PD

내년 개설 20주년을 앞두고 이즘은 특집 기획의 일환으로 라디오 방송 프로듀서 20인의 ‘내 인생의 음악 10곡’ 편을 연재 중입니다. 라디오는 음악과 동의어라는 편집진의 판단에 따라 기획한 시리즈로 모처럼 방송 프로듀서들이 전해주는 신선한 미학적 시선에 독자 분들이 좋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의 라디오국에서 음악 프로를 관장하며 15년 이상의 이력을 가진 20인 PD의 ‘인생 곡 톱10’입니다. 열 번째 순서는 MBC 라디오 주승규 프로듀서입니다.

김정호 ‘하얀 나비’

– 무언가를 진짜로 좋아한다는 것
여인의 아버지가 젊은이에게 이렇게 묻는다. 자네는 내 딸이 어디가 그리 좋은가?
볼이 불그스레해진 젊은이는 망설이다가 이렇게 입을 뗀다. 그냥…그냥 다 좋습니다.

1970년대 초 그야말로 혜성같이 나타나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짧은 생을 마감한 가수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 매료되었고 어린 나도 그의 팬이 되었다. 아끼고 아껴 몇 달 치의 용돈을 모아 드디어 그의 음반을 질렀고 그것은 내 생에 첫 LP가 되었다.

무언가를 진짜로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유 없이 좋은 것, 그냥 좋아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음악이든 간에 말이다.

애니멀스(Animals)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통기타와 팝송
1970년대는 우리나라에서도 통기타가 붐이었다. 당시 조금 ‘논다’ 하는 젊은이라면 통기타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했기에 공부는 뒷전이요 통기타에 심취한 자녀들 때문에 각 가정마다 분노의 아버지들의 ‘통기타 파손 사건’이 줄을 이었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그 와중에 살아남은 한 대의 기타가 있었고 아버지가 안 계신 틈을 타 숨죽여 연습했던 곡이 바로 우리말 제목으로 ‘해 뜨는 집’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 이었다. 코드도 비교적 평이했고 주법도 단순하여 초보자들의 연습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던 까닭이다. 나에게 기타라는 악기를 알게 해준 곡이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Black dog’

– 제목이 무슨 상관이랴
1970년대의 팝송 이야기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백판’ (해적음반) 이야기다. 불법 음반인데다 음질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흡족치는 않았으나 팝송에 목마른 젊은이들에게는 그나마도 아쉬운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고 생각한다.

집에도 형이 애지중지하던 백판이 몇 장 있었는데 요즘으로 말하자면 편집음반인 셈이다. 딥 퍼플(Deep Purple)의 ‘Highway star’,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Superstition’, 산타나(Santana)의 ‘Black magic woman’ 등등 기라성 같은 곡들이 담겨있었는데 그중 특히 나의 눈길을 끌었던 곡이 하나 있었다. 음반 편집자의 섬세함이라고 할까 그 자상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사연인즉 이렇다.

팝송의 원제목 옆에는 친절하게도 한자로 된 번안 제목이 이렇게 별도로 표시되어 있었다.

LED ZEPPELIN, BLACK DOG (黑犬)

존 덴버(John Denver) ‘Annie’s song’

– 인수봉에서 만난 한 줄기 바람
익히 알고 있는 대상이라도 특별한 상황에서 만나게 될 때 전혀 다른 존재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북한산 인수봉을 등반하다 보면 암벽 곳곳에 꽃다운 나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젊은 클라이머들을 위한 추모 동판을 만나게 된다. 아마 나의 첫 번째 산행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가까스로 오른 정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맞은편 백운대를 바라보는데 아들을 잃었을 법 한 어머니가 향을 피우며 두 손을 모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 졌다. 그때 산 정상을 가득 메운 한 곡의 음악, 그리고 그때 산 정상 한줄기 맑은 바람이 아직도 느껴지는 듯하다.

이글스(Eagles) ‘Hotel California’

– 무스탕 라디오의 추억
믿기 어렵겠지만 어제 라디오 인기 팝송 프로그램을 듣지 않았다면 친구들 사이 이야기에 낄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어제 무슨 프로그램에서 무슨 음악을 들었다는 것이 주요 화제일 정도로 중 고등학교 학생들의 세계에선 팝음악, 팝음악 프로그램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를 듣기 위한 FM라디오가 인기였는데 학생들 사이에선 나만의 FM라디오 갖기가 하나의 로망이었다.

방과 후 친구들과 함께 온 종로를 뒤져 마침내 최신형 “무스탕 라디오”를 손에 넣게 된 날,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새롭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검은 색 무전기 스타일 포스 가득한 무스탕 라디오의 스위치를 켠 순간 거기서 퍼져 나온 그 음악이란…

다이어 스트레이츠(Dire Straits) ‘Sultans of swing’

– 라디오에 신청곡 보내 보셨나요?
요즘이야 그렇지 않지만 엽서가 라디오 청취자들의 주된 프로그램 참여방법이던 시절이 있었다.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고 신청곡이 방송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경우 즐겨하던 프로그램에 엽서를 보내고 어느 때처럼 라디오에 귀 기울이다가 나의 이름이, 나의 사연이, 나의 신청곡이 방송되던 순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 순간의 느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음악을 스스로 찾아 듣는 것과 방송으로 신청하여 듣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이라 믿는다. 혹 아직도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한번쯤 시도해 보시기를 권한다.

조지 윈스턴(George Winston) ‘Thanksgiving’

케니 로긴스(Kenny Loggins) ‘The more we try’

– 나의 라디오PD의 절반은 여기에서 배웠다입사 후 맡았던 첫 단독 프로그램은 당시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 이수만의 팝스투나잇 >이었다. 1년 남짓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라디오 방송 사상 최초의, 그러나 이제는 식상해져 버릴 정도로 전형이 되어버린 타이틀 멘트를 생략한 오프닝, 당시로선 파격적인 디지털 음원의 도입, 그리고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연스럽고 새로운 진행방식으로 이른바 DJ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바꾼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DJ의 음악에 대한 선구안도 탁월해서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사랑을 받게 된 음악들도 여럿 있었는데 가장 기억나는 음악을 꼽는다면 프로그램 클로징 음악으로 사용했던 것이 위 두 곡이다. 나의 라디오PD의 절반은 여기에서 배웠다.

모차르트, 교향곡 제25번 (영화 아마데우스)

– 음악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오프닝 장면에 절묘하게 사용된 교향곡 25번을 비롯하여, 영화 곳곳에서 기존의 모차르트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함에도 마치 이 장면을 위하여 만든 음악인 듯 정교한 방식의 연출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음악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 영화, 그리고 음악…

영화 < 정복자 펠레 >의 테마

–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늑한 앞날이 보장될 수도 있을 농장의 수습감독 직을 마다하고 가난과 부조리의 땅을 떠나기로 결심한 소년, 그는 눈 덮인 벌판에서 늙은 아버지와 포옹하며 작별 한다. 농장으로 되돌아가던 아버지는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고 그 사이 소년의 눈 덮인 덮인 대지 위, 작은 점이 되어 조그맣게 멀어져 간다. 그리고 화면을 가득 메우는 영화의 엔딩음악

삶이 시시하게 느껴질 때마다 이 영화를 꺼내 본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특히 그의 표현 중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라는 표현이 특히 인상 깊었는데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그 의미를 충분히 공감하시리라 믿는다.

가끔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음악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그럴 땐 이 영화를 떠올려 보곤 한다.

우리는 음악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연출
MBC < 이수만의 팝스 투나잇 >, <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 < 영시의 데이트 >, < 별이 빛나는 밤에 >, < 정오의 희망곡 >, < FM 모닝쇼 >,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