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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이 시대의 한국 R&B/Soul 명곡 10 (2000년대)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도출한 한국어 랩의 가능성과 이태원 클럽 문나이트를 일대로 벌인 춤꾼들의 춤사위. 이는 나아갈 새천년의 국내 대중음악계 주류를 흑인 음악으로 맞바꾸어 놓은 초석과도 같았다. 그 후 21세기를 맞은 2000년대는 말하자면 한국이 흑인 음악에 열광, 열중하던 시기였다. 바다 건너 흑인들의 것인 줄만 알았던 ‘소울’을 한국화한 혼혈, 재미 교포 출신 가수들의 선구적인 활약과 그를 우리 정서에 맞게 녹여낸 ‘소몰이 창법’의 물결까지. 다양한 형태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다. 가창력의 척도가 스크리밍(Screaming) 등 록 기반의 고음에서 알앤비 특유의 정교한 기교, 꺾기로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알앤비/소울은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빌보드 차트에서 목도하듯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는 블랙 뮤직은 그 위세를 그칠 줄 모른다. 비대해진 힙합의 지분으로 이제는 랩과 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싱잉 랩이 새 시대의 창법으로 성행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지났지만, 200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를 빛낸 알앤비/소울 명곡들의 보다 날 것의 감성을 들어보자. 지금의 국내 흑인 음악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추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 – 어제처럼 (2000)
재미교포 가수 제이의 시작이 댄스였다는 사실은 지금 와서는 새삼 믿기 어렵다. 그를 기억하면 언제나 ‘어제처럼~’이 귓가에 맴돌기 때문이다. 1집의 존재감은 그만큼 미미했지만 소울로의 안정적인 노선 변경에 성공한 차기작은 그의 진가를 발휘한 튼실한 앨범이었다. ‘어제처럼’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감성을 제공한다. 알앤비하면 흔히 기교 섞인 목소리나 짙은 감정선을 연상하곤 하지만 ‘어제처럼’은 그와 사뭇 다른 부드럽고 담백한 멜로디와 여린 목소리로 유통기한이 긴 제이만의 소울을 잉태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은 노래는 2000년도 SBS 가요대상 신인가수상 등을 석권하며 그에게 꿈같은 한 해를 선물했다.

박화요비 – 그런 일은 (2000)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이른 때에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등장부터 숙성된 가창력을 자랑하며 박정현과 국내 알앤비 신을 양분한 화요비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당시 그의 나이 고작 19세. 머라이어 캐리의 발라드 ‘My all’에서 따온 앨범 제목이 만용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노래 잘하는 신인’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명하게 들리는 숨소리의 호소력과 천부적인 완급 조절이 캐리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과의 유사성을 차치하고 그가 내뿜는 소리 자체에 귀 기울여 보자. 말할 때 육성에서 알 수 있는 낮은 톤, 여기에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실로 매력적이다. 성숙한 음성과 대비되는 여린 이별 가사가 더해져 더욱 가슴 아린 화요비표 알앤비 발라드.

박정현 – 꿈에 (2002)
솔리드의 김조한과 함께 국내 알앤비 보컬의 선두주자로 통하는 박정현이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알앤비 가수로 결정지어 결부하기를 거부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대 우리나라 알앤비 돌풍의 주역은 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뷔 이래 ‘P.S. I love you’,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멋진 곡을 많이 들려줬다. 하지만 ‘꿈에’만큼 강렬한 곡은 그에게도, 다른 가수에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안긴 극적인 구성의 놀라움이 지금도 유효하다. 공일오비 정석원이 편곡한 몽롱한 국악기 소금 반주를 시작으로 ‘꿈에서 만난 옛 연인’이라는 주제 아래 기쁨과 절망, 잠에서 깬 후의 아련한 감정을 차례대로 연결 짓는 노래는 ‘스토리텔링’의 정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박정현은 이 대담한 서사에 더욱 높은 수준의 입체감을 조각한다. ‘보컬 올림픽’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 약간은 부정확한 발음에서 오는 특유의 느낌과 절마다 창법을 변조해나가는 완급 조절, 막힘 따위 모르는 막강 성량이 결합하여 폭발한다. 작곡가의 상상 그 이상을 실현하는 가수의 놀라운 역량이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Missing you (2003)
대중에게 익숙한 국내 알앤비 명곡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사실상의 알앤비 ‘발라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림과 애절함에 흔들리는 이 우리 정서는 이별 등 연모의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Missing you’는 그 한국적 감수성의 표본이다. 대중의 보편적 가녀림을 파고드는 섬세하고 애절한 노랫말의 주제는 이별을 넘어 ‘사별(死別)’이다.

다양성과 장수의 목적 아래 SM이 내놓은 이들의 시작은 비주얼부터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성숙한 느낌의 곡만큼은 어른 취향 가까워 심심할지라도 긴 수명을 보냈다. 만화 속 소울메이트처럼 외형적으로도 잘 어울리는 환희와 브라이언은 이 노래에서 각각 터프한 흉성과 맑은 미성의 매끈한 조화로 모범적인 듀오의 콤비 플레이를 전시했다.

휘성 – With me (2003)
휘성은 풋내가 없는 신인이었다. 서태지, 신승훈의 상찬을 등에 업고 등장한 괴물 신예에게 1집 발라드 ‘…안 되나요…’는 공전의 히트를 안겼지만 가수는 그 이상을 넘봤다. 차기작 < It’s Real >에서 마음껏 발산한 원숙미야말로 ‘진짜 자신’을 선언한 예술가적 발로였다. 이 중심에는 지금의 휘성을 있게 한 ‘With me’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미디엄 템포 장르를 멋들어지게 구현했다. 전작에 비해 강해진 장르적 색채에도 리드미컬한 드럼 타격이 주도하는 어반한 분위기는 대중에 가닿기에 충분했다. 신선함을 익숙함으로 맞바꾸는 작곡가 김도훈의 완연한 멜로디 라인에 묵직한 톤으로 능란하게 박자를 타는 휘성의 자신감 넘치는 활약은 거부할 수 없는 성공 공식이었다. 음반 판매량 40만 장을 넘기는 가공할 만한 위세를 누렸다.

빅마마 – 체념 (2003)
여타 멤버의 가창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더라도 노래 잘하는 가수 한두 명만 중심을 잡아줘도 그 팀은 실력파 그룹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네 명이라면? 요즘 시쳇말로 ‘사기캐’다. YG 엔터테인먼트와 알앤비 전문 레이블 엠보트(M-Boat)의 의기투합이 발굴한 빅마마가 그렇다. 당시 가요계 립싱크 행태를 꼬집은 ‘Break away’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등장은 비주얼 가수에게 응수하는 ‘가창력 그룹’의 도발적인 한 방이었다.

이영현이 홀로 작사, 작곡, 노래한 솔로곡 ‘체념’이 팀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 이별 경험을 토대로 작사한 노랫말과 선 굵은 선율이 이영현 특유의 카랑한 고음을 타고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다. 양현석과 엠보트 대표 박경진은 ’10년이 지나도 듣기 좋을 곡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팀을 꾸렸다던데, 이들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했다. 벌써 18년째 애청, 애창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소토 유니온 – Think about’ chu (2003)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소중한 활약이었다. 국내 흑인 음악 신의 선구자이자 보석과도 같던 팀 아소토 유니온의 빛나는 합동은 아프리카 부족 제사 의식용 북 ‘아소토’를 발췌한 그룹명처럼 원시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연주를 들려줬다. 드렁큰 타이거가 주도하던 크루 무브먼트의 밴드로서 이들이 보여준 것은 흑인 음악 원류에 관한 치밀한 탐구. 포화 상태에 있던 유사 블랙 뮤직들 사이에서 진정한 ‘검은 맛’이 무엇인지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연주곡과 영어 곡의 큰 비중 속 ‘Think about’ chu’의 우리말 가사가 빛난다. 짙은 호흡을 섞어 허스키한 톤을 구사하는 김반장의 보컬이 소울 본연의 필(Feel)을 적극 구현하면서도 그 중심에 또렷이 생동하는 노랫말은 소울과 한국어의 반가운 악수를 보는 듯하다. 귀에 착 감기는 베이스 그루브와 서정성을 가미한 전자피아노의 끈적거림을 매끈하게 마감질한 사운드는 리마스터의 필요성에 반기를 든다. 2003년도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나왔다.

나얼 – 귀로 (2005)
브라운 아이즈로 점화한 미디엄 템포 붐과 브라운 아이드 소울로 완성한 갈색 하모니의 정수. 결과물로 보여준 영향력도 지대하지만 이렇게 한 장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 아티스트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같은 우물을 파는 뚝심이야말로 나얼이 국내 알앤비/소울의 대명사가 된 원동력이다. 2005년 발매한 < Back To The Soul Flight >는 옛 명곡을 소울로 재해석한 소울에 바치는 그의 러브레터였다.

중독적이다 못해 최면적인 도입부 피아노 반주에 기절하고 나면 소울 도인(道人)의 경지를 탐하는 나얼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을 머금은 듯 애잔하고, 탁월한 공명감의 두성이 아름답다. 흉내 의지를 꺾는 화려한 애드리브를 정밀하게 스케치해낼 때면 이게 우리나라 가수가 맞나 싶다. 심지어 이는 1989년 박선주의 원곡을 여자 키 그대로 부른 것이다. 나얼은 독보적인 노래꾼이다.

BMK – 꽃피는 봄이 오면 (2005)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등 1960년대 소울 거장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원시의 소울은 흑인의 민권 회복과 자긍심 표출을 위한 분출구와 같았으며 이들의 보컬은 필히 웅변적인 힘, 우렁찬 스태미너를 특징으로 한다. BMK의 스피커가 터질 듯 묵직하고 강력한 목소리와 비교해보자. 그들처럼 차별에 대한 격노나 한을 노래하지는 않아도, 무자비한 성량만큼은 그것의 전형과 쏙 빼닮았다. 과연 ‘소울 국모’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절절함도 여기서 온다. 산뜻한 봄날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버린 감정의 파고를 노래하는 이 곡은 간주도 없이 빽빽하게 채운 보컬이 굵직한 멜로디를 뽑아내고 이내 극단의 감정을 토해내는 후렴부로 치닫는다. ‘찰나 같아 찬란했던 그 봄날’처럼 이별의 심정을 지독하리만치 아름답게 대변하는 노랫말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알고 있던 봄의 계절감을 잊게 할 만큼 애틋하다. 소개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히트곡이 많지 않은 그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 하나만으로 계절만 되면 소환되는 스테디셀러의 주인공이 됐다.

윤미래 – What’s up! Mr. good stuff (2007)
전략은 중도, 무기는 실력. 윤미래는 날고 기는 신의 강자들 사이에서 잔학한 쌍칼 검법의 가능성을 창출한 독보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대중과 장르 애호가를 모두 사로잡기 위한 랩, 노래의 현란한 휘날림과 속속 발매한 발라드 히트 넘버들로 양 분야 모두의 정상급 인정을 확보한 그였다. 그러한 완벽에 가까운 이도류의 특성을 압축하고 블랙 뮤직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위상을 철저하게 굳힌 작품이 < t 3 Yoonmirae >다.

수록곡 ‘What’s up! Mr. good stuff’는 리얼하다. 인트로의 거친 드럼에서 예고하듯 호쾌한 펑크(Funk) 그 팔딱거리는 참맛을 별다른 효과 없이 기타, 브라스 등 화끈한 세션의 합연만으로 전달한다. 역동적인 박수 소리와 브릿지 내레이션은 입체감 이상의 현장감을 부른다. 자유롭게 그루브를 타고 흐르는 윤미래의 보컬을 따라 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노래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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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얼 ‘서로를 위한 것’ (2020)

평가: 3/5

따스한 전자 피아노와 1980, 90년대 알앤비에 뿌리내리고 있는 얼개. 곡을 구성하는 재료가 그간의 나얼 음악과 다르지 않다. 아티스트가 고수하는 이 레트로는 익히 들어오긴 했어도 정교한 완성도만 뒷받침되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유효할 법한 문법. ‘같은 시간 속의 너’, ‘기억의 빈자리’에 이어 보다 초연한 노랫말로 ‘이별 3부작’을 완성하는 이 노래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쉽고 멜로디 감도가 높다. 후렴에서 그의 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Gone’이 겹쳐가기는 하나, 고풍스러운 사운드 디자인과 브릿지(Bridge)와 3절을 제외하면 과한 고음을 자제한 여유로운 곡조는 편하게 챙겨 듣기 좋을 흡인력을 담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