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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라디오를 켜봐요] Vol. 5 – 이즘 에디터의 라디오 시그널

전성기는 지났다. 스마트폰의 중심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영상 플랫폼과 OTT 서비스에 더 익숙한 젊은 층에게 ‘라디오’는 세대를 나누는 낡은 매체의 기준처럼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 오늘날에도 라디오는 수많은 팬과 함께 굳건히 존재한다. 매일 꾸준하게 습관처럼 챙겨 듣는 마니아부터 문득 향수에 젖어 다시금 찾아오는 방문객 그리고 그 아날로그적인 특색에 반해 접하기 시작하는 호기심 많은 입문자까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작디작은 전파 속 흘러나올 음악과 이야기를 기다린다.

9년 전, 이즘에서 진행한 [라디오를 켜봐요] 시리즈의 마무리를 짓는다. 특집을 처음 시작할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고 필자마저 전부 다르지만 저마다 라디오를 들으며 자라왔다는 사실만큼은 모두 같다. 저마다 추억과 애정이 꼬깃꼬깃하게 담긴 사연과 함께 이즘 필자들이 기억하는 ‘시그널 송’을 조심스레 소개한다. 자, 지금 이 주파수를 고정하기 바란다.

KBS 2FM 나얼의 음악세계 / 나얼 ‘Love dawn’
KBS 2FM에서 진행된 < 나얼의 음악세계 >를 들은 사람은 분명 흑인 음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전의 알앤비를 묵묵히 틀어주던 나얼의 진행은 흑인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이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새벽엔 좋은 음악이 있었다. 나얼 솔로 정규 1집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Love dawn’은 침전하는 기분을 음악으로 집중시키는 시그널이다. 이 곡의 차분한 사운드를 듣고 있으면 순수함을 향한 그날의 동경이 떠오른다. (김호현)

KBS 2FM 볼륨을 높여요 / 바버렛츠 ‘Summer love’
학업에 집중하리라 마음을 먹기만 하면 주변의 온갖 것들이 흥미롭게 느껴지고는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펜을 집어들 때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KBS 2FM의 < 볼륨을 높여요 > 속 악동뮤지션 수현의 목소리는 애석하게도 매일같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그렇게 들뜨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다가도 수현과 바버렛츠의 ‘Summer love’가 방송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면 나는 손에 쥔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넷의 산뜻한 하모니가 나의 결심을 번번이 무너뜨릴 만큼 달콤했으니까. (이승원)

MBC FM4U 태연의 친한 친구 / 텐시러브(Tensi love) ‘Cake house’
학창 시절 조용한 자습실에서 두근대며 문자 사연을 보내던 기억은 꽤나 강렬하다. 라디오를 처음 접했던 중학생은 당시 소녀시대 태연이 진행하던 MBC FM의 < 친한 친구 >에 사연을 보냈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MP3 이어폰으로 전파를 찾았다. 흘러가는 야간 자율 학습 중에 3부 오프닝 곡 텐시러브의 ‘Cake house’가 흘러나왔고 무료한 시간을 버티게 해준 청취 이후에도 기계음으로 가득한 초창기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자주 흥얼거리곤 했다. 비록 사연은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라디오가 주는 동시성과 생동감은 특별한 경험으로 남았다. (손민현)

KBS 클래식FM 세상의 모든 음악 / 마이크 배트(Mike Batt) ‘Tiger in the night’
모 뮤직바 사장님의 단골 질문은 “< 세상의 모든 음악 > 알아요?”다. 마침 질문받을 당시 늘 듣던 종류 밖의, 클래식, 재즈 외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이 궁금하던 차였다. 덕분에 그 이후 오후 6시면 KBS 클래식FM을 찾았다. 시그널 음악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마이크 배트(Mike Batt)가 작곡하여 로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Tiger in the night’. 하프와 오보에, 클라리넷이 두런두런 모이는 모양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DJ의 변함없는 인사말과 어울린다. 얼마 전, 사장님은 나와는 오래 보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건네왔다. 새삼스러웠다. 같은 주파수로 접어들 때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여러 수단 중에서도 라디오는 밤의 호랑이처럼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다. (신하영)

KBS 2FM 이기광 가요광장 / 데이비드 포스터(David Foster) ‘Winter games’
노래 듣는 것에 권태를 느낄 때는 라디오로 기분을 환기하곤 한다. 운이 좋으면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을 발견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근황을 듣거나 새로운 정보를 얻기도 한다. < 이기광의 가요광장 >은 점심시간에 편안한 목소리와 트렌디한 선곡으로 라디오로서 역할은 물론 연예계 활동으로 다져온 입담을 통해 재미까지 놓치지 않는다. 하루 중 가장 생기 있는 시간대에 걸맞게 시그널 송은 위대한 작곡가 데이비드 포스터의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주제가 ‘Winter games’를 사용한다. 시카고의 ‘Hard to say I’m sorry’,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 등 그의 수많은 대표곡에 비하면 덜 유명하지만 파워풀한 건반은 태양이 가장 높이 떠 있는 시간에 울려 퍼져 활력을 더한다. (백종권)

SBS 러브FM 정엽의 LP카페 / 정엽 ‘회전목마’
레코드판을 수집하는 입장에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이름이다(DJ와 같은 ‘엽’자를 써서 그런 것도 있지 않을까). 개인 소장 바이닐을 가지고 실제로 공개 방청까지 다녀왔다. 턴테이블을 통해 음악을 틀어준다는 것과 더불어 다양한 라이브 무대가 특징이다. 디제이가 가수인 점을 살려 오프닝 시그널은 정엽의 노래가 SBS 러브FM의 103.5 MHz를 타고 매일 밤 저녁 6시 5분에 흘러나온다. ‘회전목마’라는 제목에 맞춰 놀이공원에서 들릴 법한 도입부 뒤 분위기는 잔잔하게 가라앉으며 진행자의 목소리와 프로그램의 무드에서 일맥상통하는 따스함이 전파를 타고 단번에 퍼진다. 아날로그, 라디오, LP, 음악, 뉴트로, 레트로. 옛것이 현재로 돌아온 지금의 대중문화를 반영해 그 시절의 자글거리는 감성을 간직했다. 오늘도 ‘카페’에 들러 음악 한 모금을 마신다. (임동엽)

KBS 1FM 생생 클래식 / 모차르트(Mozart) ‘The London sketchbook, K.15a’
누군가의 우아함을 사모하다 덩달아 고상해지는 경우가 있다. KBS TV <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 >의 열혈한 애청자인 나는 유려한 말솜씨를 가진 진행자 윤수영 아나운서를 동경하게 됐고 곧 그가 KBS 1FM < 생생 클래식 >의 오랜 MC라는 걸 알게 됐다. 정오를 알리는 이 라디오는 모차르트가 런던에 머물 동안 쓴 스케치 시리즈로서 제목이 없어 a부터 ss번까지 문자로 대신해 부르는 희유곡의 ‘K.15a’를 시그널로 삼았다. 영국의 지휘자 네빌 마리너의 통솔 아래 관현악기가 수다스럽게 빗발치며 한낮의 태양을 환희한다. 가끔 삶을 축복하고 싶을 때 들을 만한 음악이 추가됐다. 타인의 기품, 다정함, 전문성을 닮고 싶어 맞춰 놓은 주파수가 클래식 문외한에게도 취향이란 걸 심어주었다. (박태임)

MBC FM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 ‘Love’s theme’
1980년대 중반,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MBC FM에서 방송된 < 임국희의 팝스퍼레이드 >는 나에겐 반 토막 프로그램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1부는 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나운서 출신인 임국희 디제이의 약간 냉정한 진행과 선곡되는 노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원한 현악기로 시작하는 시그널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이 곡은 저음으로 유명한 소울 가수 배리 화이트가 이끌었던 러브 언리미티드 오케스트라(Love Unlimited Orchestra)의 초기 디스코 스타일의 ‘Love’s theme’이다. 내가 주말을 기다렸던 이유 중 하나는 정각 오후 4시에 세련된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였다. (소승근)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 / 타카피 (T.A.-COPY) ‘케세라세라’
새벽 다섯 시. 하루를 온전히 마무리한 퇴근자의 안도와 이른 출근길의 불안과 설렘이 뒤섞이는 지점에 ‘세상을 여는 아침 최현정입니다’가 있었다. 아나운서 최현정은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로 각자가 지닌 선을 이어주며 청취자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생각이 깊어질 무렵. 펑크 밴드 타카피가 부른 2부의 여는 곡 ‘케세라세라’는 직선적이고도 흥겨운 리듬으로 고민에 빠진 이들을 ‘될 대로 돼라’며 응원했고 작곡 학원에 다니고자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초짜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큰 격려가 됐다. 오랜 세월이 지나 잠시 잊고 있었지만 불현듯 떠오른 그때의 온도와 풍경이 여전히 생생하다. (손기호)

CBS FM 한동준의 FM POPS / 어 플록 오브 시걸스(A Flock Of Seagulls) ‘Space age love song’
중학교 시절 처음 접한 CBS 음악FM의 < FM POPS >는 도회적이었다. 디스크자키 김형준의 쿨함은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서늘한 시간과 어울렸고 프로그램이 소개한 레벨 포티투(Level 42)의 ‘Love games’ 덕에 퓨전 재즈와 소피스티-팝에 매혹되었다. 나른한 오후 2시를 유쾌 상쾌로 깨우는 < 한동준의 FM POPS >에 이르기까지 방송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는 같았다. 리버풀 출신 뉴웨이브 밴드 어 플록 오브 시걸스의 ‘A space age love song’은 신시사이저와 각종 소리 효과, 펑키(Funky) 기타의 합세로 가슴을 두드렸다. 제목처럼 공상과학적 사운드스케이프였다. 리드 보컬 마이크 스코어의 헤어스타일을 비롯해 멤버들의 패션도 시각적이었다. (염동교)

MBC FM4U 배철수의 음악캠프 /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Vienna Symphonic Orchestra) ‘(I can’t get no) satisfaction’
나에게 ‘Satisfaction’은 롤링 스톤즈가 아니라 비엔나 심포닉 오케스트라의 곡이다. 당연히 < 배철수의 음악캠프 > 때문이다. 해외 음악을 접하겠다는 일념으로 무턱대고 라디오를 듣게 되면서 ‘Satisfaction’은 내 안에 오프닝 시그널 송으로 먼저 뿌리를 내렸다. 마치 ‘헛, 둘, 셋’처럼 들리는 인트로부터 위트 넘치는 베이스, 현란한 현악 연주가 차례로 날리는 일격에 당하고 나니 나중에 찾아 들은 원곡과는 친해질 수가 없었다. 사실 오케스트라 버전도 2분 30초를 넘어가면 마치 마스크 벗은 맨얼굴을 처음 보는 느낌이다. 배철수 DJ의 “출발합니다!” 없이는 영 어색하다. (한성현)

MBC FM4U 푸른밤 종현입니다 / 샤즈(Shazz) ‘Heaven’
자정이 되기 직전 끝난 야간 자율 학습, 지친 하루가 끝나면 기숙사 룸메이트는 MP3로 라디오를 틀었다. 시그널송 샤즈(Shazz)의 ‘Heaven’으로 시작하는 MBC FM4U < 푸른 밤 종현입니다 >. 피아노 선율이 이끄는 포근한 재즈 사운드는 오늘과 내일 사이의 아늑한 공간으로 초대했다. 매일 도착하는 사연들과 그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진중했다. 라디오는 늦은 새벽까지 공부할 때면 적막한 틈을 메웠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기도 했다. 여전히 ‘Heaven’을 들으면 3년 동안 자정을 지켜줬던 DJ의 사려 깊은 말들이 떠오른다. (정수민)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 폴 모리아(Paul Mauriat) ‘Please return to Pusan port’
몇몇 기억은 어렴풋한 흔적으로 시작해 평생을 함께하는 문신이 된다. 어린 시절 차에 타기만 하면 뒷자리로 꾸물꾸물 넘어가 어머니에 기대 누운 채 그 조용한 떨림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졸던 나는 부모님이 즐겨 듣던 라디오 <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의 시끌벅적한 만담을 자장가로 삼곤 했다. 1984년 출항을 알린 이 장수 프로그램의 시그널은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폴 모리아가 첫 내한을 앞두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경음악으로 편곡한 버전이다. 아직도 그 도입부만 들으면 강석과 김혜영의 힘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여러 광경이 산발적으로 떠오른다. 반쯤 감긴 시야 너머로 핸들을 잡고 계신 아버지의 커다란 뒷모습, 앞유리창에 부딪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햇살, 그 사이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수까지. 원곡의 쓸쓸함이나 편곡의 경쾌함보다 내게는 기분 좋은 포근함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장준환)

MBC 표준FM 이윤석, 신지의 싱글벙글쇼 / 코요태 ‘순정’
인생 절반 이상을 < 싱글벙글쇼 >로 써 내려간 강석과 김혜영, 30년 넘는 세월의 호흡을 단숨에 이어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전설을 고스란히 따라갈 수는 없는 법. 진행자를 교체해가며 방향을 잡아간 지 10개월이 지난 2021년 3월 뜻밖의 시그널이 울려 퍼졌다. 우렁찬 말 울음소리와 함께 ‘디스코 타임’을 알리는 코요태의 명곡 ‘순정’, 혼성 콤비의 부활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원곡자인 신지와 개그맨 정준하는 시트콤 < 거침없이 하이킥 >에서 이미 연기로 합을 맞춰본 만큼 재치 넘치는 만담으로 점심시간을 달궜고 20여 년 전 인기곡까지 소환하며 청취자층을 폭넓게 끌어안을 수 있었다. 2022년 9월부터 정준하 대신 동료 이윤석이 신지와 함께하고 있는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은 여전히 그 시절 그리고 오늘날의 순정을 담아 유쾌한 전파를 날리고 있다. (정다열)

MBC 표준FM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 루카 콜롬보(Luca Colombo) ‘Blackbird’
< 조PD의 비틀즈 라디오 >와 함께한 새벽 두 시는 불투명한 미래가 주는 압박에서 잠시나마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야 라디오가 지닌 포근함이 심적 안정을 제공했고 우상으로 삼았던 비틀스의 음악에 집중할 수 있어 더없이 아늑했다. 매일 밤 리버풀 청년들의 위대한 유산을 소개해준 조정선 디제이는 최고의 명사였으며 방송의 문을 연 폴 매카트니의 걸작 ‘Blackbird’는 잠 못 드는 새벽 네 명의 비틀과 나를 이어준 징검다리가 되었다. 원곡과 달리 찌르레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프로그램 시그널은 이탈리아 기타 명인 루카 콜롬보의 핑거스타일 커버 곡을 사용했다. (김성욱)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제프 & 마리아 멀더(Geoff & Maria Muldaur) ‘Brazil’
기타 반주가 한쪽 귀를 어루만지며 시작한다. 휘파람과 함께 모든 세션이 합쳐지면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라는 나긋나긋한 오프닝 멘트가 들린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만드는 음악과 목소리. 테리 길리엄의 영화 < 브라질 >의 삽입곡인 제프 & 마리아 멀더 부부의 ‘Brazil’은 암담한 회색 도시에 내리쬐는 따스한 한 줄기 햇살이 잘 표현된 곡이다. <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 > 또한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바쁘게 살아가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다. 수더분한 말씨로 사연을 읽어주는 ‘아침창 아저씨’ 김창완과 부드러운 포크 ‘Brazil’의 오랜 동행은 20년 넘게 이어져 지금까지도 순조롭다. (김태훈)

MBC FM4U 4시엔 윤도현입니다 / 윤도현밴드(YB) ‘오늘은’
윤도현의 목소리는 멋지고 입담도 화려하다. 하지만 < 4시엔 윤도현입니다 >를 처음 들었을 때 무엇보다 내가 반긴 건 시그널 송 ‘오늘은’이었다. 11년 전 중학교 시절 처음 듣고 자유분방한 가사에 반한 ‘오늘은’.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데가 있는 이 노래를 하교 후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4시에 들었는데 11년이 지난 지금 똑같은 시간, 우연히 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4시엔 윤도현입니다 >에서는 노래가 보컬 없이 반주만 나온다. 그래서 열심히 대본을 준비했을 윤도현 디제이와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프로그램이 시작할 때면 오프닝 멘트는 깡그리 무시하고 왕왕대는 기타 연주에 맞춰 그저 이 노래의 벌스(Verse)를 읊조리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YB의 곡도 ‘오늘은’이지만 윤도현도 가장 아끼는 곡이 ‘오늘은’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묘한 유대감이 든다. (이홍현)

정리 : 장준환
이미지 편집 : 백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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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한국 R&B/Soul 명곡 10 (2000년대)

1990년대 서태지와 아이들이 도출한 한국어 랩의 가능성과 이태원 클럽 문나이트를 일대로 벌인 춤꾼들의 춤사위. 이는 나아갈 새천년의 국내 대중음악계 주류를 흑인 음악으로 맞바꾸어 놓은 초석과도 같았다. 그 후 21세기를 맞은 2000년대는 말하자면 한국이 흑인 음악에 열광, 열중하던 시기였다. 바다 건너 흑인들의 것인 줄만 알았던 ‘소울’을 한국화한 혼혈, 재미 교포 출신 가수들의 선구적인 활약과 그를 우리 정서에 맞게 녹여낸 ‘소몰이 창법’의 물결까지. 다양한 형태의 히트곡들이 줄을 이었다. 가창력의 척도가 스크리밍(Screaming) 등 록 기반의 고음에서 알앤비 특유의 정교한 기교, 꺾기로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알앤비/소울은 현대의 젊은 세대에게도 익숙하다. 빌보드 차트에서 목도하듯 세계 음악 시장을 주름잡는 블랙 뮤직은 그 위세를 그칠 줄 모른다. 비대해진 힙합의 지분으로 이제는 랩과 노래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싱잉 랩이 새 시대의 창법으로 성행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돌아볼 필요가 있겠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시간이 지났지만, 2000년대 국내 대중음악계를 빛낸 알앤비/소울 명곡들의 보다 날 것의 감성을 들어보자. 지금의 국내 흑인 음악 트렌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추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이 – 어제처럼 (2000)
재미교포 가수 제이의 시작이 댄스였다는 사실은 지금 와서는 새삼 믿기 어렵다. 그를 기억하면 언제나 ‘어제처럼~’이 귓가에 맴돌기 때문이다. 1집의 존재감은 그만큼 미미했지만 소울로의 안정적인 노선 변경에 성공한 차기작은 그의 진가를 발휘한 튼실한 앨범이었다. ‘어제처럼’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는 감성을 제공한다. 알앤비하면 흔히 기교 섞인 목소리나 짙은 감정선을 연상하곤 하지만 ‘어제처럼’은 그와 사뭇 다른 부드럽고 담백한 멜로디와 여린 목소리로 유통기한이 긴 제이만의 소울을 잉태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은 노래는 2000년도 SBS 가요대상 신인가수상 등을 석권하며 그에게 꿈같은 한 해를 선물했다.

박화요비 – 그런 일은 (2000)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재능 있는 아티스트는 때로 놀라울 정도로 이른 때에 두각을 나타내곤 한다. 등장부터 숙성된 가창력을 자랑하며 박정현과 국내 알앤비 신을 양분한 화요비이지만 이 노래를 부를 당시 그의 나이 고작 19세. 머라이어 캐리의 발라드 ‘My all’에서 따온 앨범 제목이 만용으로 보이지 않는 진짜 ‘노래 잘하는 신인’의 출현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를 ‘한국의 머라이어 캐리’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선명하게 들리는 숨소리의 호소력과 천부적인 완급 조절이 캐리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설과의 유사성을 차치하고 그가 내뿜는 소리 자체에 귀 기울여 보자. 말할 때 육성에서 알 수 있는 낮은 톤, 여기에 자연스럽게 갈라지는 허스키한 보이스가 실로 매력적이다. 성숙한 음성과 대비되는 여린 이별 가사가 더해져 더욱 가슴 아린 화요비표 알앤비 발라드.

박정현 – 꿈에 (2002)
솔리드의 김조한과 함께 국내 알앤비 보컬의 선두주자로 통하는 박정현이다. 여러 장르를 좋아하는 그는 자신을 알앤비 가수로 결정지어 결부하기를 거부하지만, 누가 뭐래도 당대 우리나라 알앤비 돌풍의 주역은 그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뷔 이래 ‘P.S. I love you’, ‘You mean everything to me’ 등 멋진 곡을 많이 들려줬다. 하지만 ‘꿈에’만큼 강렬한 곡은 그에게도, 다른 가수에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많은 이들에게 안긴 극적인 구성의 놀라움이 지금도 유효하다. 공일오비 정석원이 편곡한 몽롱한 국악기 소금 반주를 시작으로 ‘꿈에서 만난 옛 연인’이라는 주제 아래 기쁨과 절망, 잠에서 깬 후의 아련한 감정을 차례대로 연결 짓는 노래는 ‘스토리텔링’의 정석이 무엇인지 깨닫게 한다. 박정현은 이 대담한 서사에 더욱 높은 수준의 입체감을 조각한다. ‘보컬 올림픽’이란 말도 나왔을 정도. 약간은 부정확한 발음에서 오는 특유의 느낌과 절마다 창법을 변조해나가는 완급 조절, 막힘 따위 모르는 막강 성량이 결합하여 폭발한다. 작곡가의 상상 그 이상을 실현하는 가수의 놀라운 역량이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 – Missing you (2003)
대중에게 익숙한 국내 알앤비 명곡을 살펴보면 대부분 사랑을 주제로 한 사실상의 알앤비 ‘발라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림과 애절함에 흔들리는 이 우리 정서는 이별 등 연모의 감정에 유독 취약하다. ‘Missing you’는 그 한국적 감수성의 표본이다. 대중의 보편적 가녀림을 파고드는 섬세하고 애절한 노랫말의 주제는 이별을 넘어 ‘사별(死別)’이다.

다양성과 장수의 목적 아래 SM이 내놓은 이들의 시작은 비주얼부터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성숙한 느낌의 곡만큼은 어른 취향 가까워 심심할지라도 긴 수명을 보냈다. 만화 속 소울메이트처럼 외형적으로도 잘 어울리는 환희와 브라이언은 이 노래에서 각각 터프한 흉성과 맑은 미성의 매끈한 조화로 모범적인 듀오의 콤비 플레이를 전시했다.

휘성 – With me (2003)
휘성은 풋내가 없는 신인이었다. 서태지, 신승훈의 상찬을 등에 업고 등장한 괴물 신예에게 1집 발라드 ‘…안 되나요…’는 공전의 히트를 안겼지만 가수는 그 이상을 넘봤다. 차기작 < It’s Real >에서 마음껏 발산한 원숙미야말로 ‘진짜 자신’을 선언한 예술가적 발로였다. 이 중심에는 지금의 휘성을 있게 한 ‘With me’가 있었다.

당시 유행하던 미디엄 템포 장르를 멋들어지게 구현했다. 전작에 비해 강해진 장르적 색채에도 리드미컬한 드럼 타격이 주도하는 어반한 분위기는 대중에 가닿기에 충분했다. 신선함을 익숙함으로 맞바꾸는 작곡가 김도훈의 완연한 멜로디 라인에 묵직한 톤으로 능란하게 박자를 타는 휘성의 자신감 넘치는 활약은 거부할 수 없는 성공 공식이었다. 음반 판매량 40만 장을 넘기는 가공할 만한 위세를 누렸다.

빅마마 – 체념 (2003)
여타 멤버의 가창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더라도 노래 잘하는 가수 한두 명만 중심을 잡아줘도 그 팀은 실력파 그룹으로 인식이 가능하다. 그런데 네 명이라면? 요즘 시쳇말로 ‘사기캐’다. YG 엔터테인먼트와 알앤비 전문 레이블 엠보트(M-Boat)의 의기투합이 발굴한 빅마마가 그렇다. 당시 가요계 립싱크 행태를 꼬집은 ‘Break away’ 뮤직비디오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등장은 비주얼 가수에게 응수하는 ‘가창력 그룹’의 도발적인 한 방이었다.

이영현이 홀로 작사, 작곡, 노래한 솔로곡 ‘체념’이 팀의 디스코그라피에서 가장 오랜 시간 지지를 받고 있다. 실제 이별 경험을 토대로 작사한 노랫말과 선 굵은 선율이 이영현 특유의 카랑한 고음을 타고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다. 양현석과 엠보트 대표 박경진은 ’10년이 지나도 듣기 좋을 곡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팀을 꾸렸다던데, 이들을 한참이나 과소평가했다. 벌써 18년째 애청, 애창되고 있으니 말이다.

아소토 유니온 – Think about’ chu (2003)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소중한 활약이었다. 국내 흑인 음악 신의 선구자이자 보석과도 같던 팀 아소토 유니온의 빛나는 합동은 아프리카 부족 제사 의식용 북 ‘아소토’를 발췌한 그룹명처럼 원시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연주를 들려줬다. 드렁큰 타이거가 주도하던 크루 무브먼트의 밴드로서 이들이 보여준 것은 흑인 음악 원류에 관한 치밀한 탐구. 포화 상태에 있던 유사 블랙 뮤직들 사이에서 진정한 ‘검은 맛’이 무엇인지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연주곡과 영어 곡의 큰 비중 속 ‘Think about’ chu’의 우리말 가사가 빛난다. 짙은 호흡을 섞어 허스키한 톤을 구사하는 김반장의 보컬이 소울 본연의 필(Feel)을 적극 구현하면서도 그 중심에 또렷이 생동하는 노랫말은 소울과 한국어의 반가운 악수를 보는 듯하다. 귀에 착 감기는 베이스 그루브와 서정성을 가미한 전자피아노의 끈적거림을 매끈하게 마감질한 사운드는 리마스터의 필요성에 반기를 든다. 2003년도 우리나라에 이런 노래가 나왔다.

나얼 – 귀로 (2005)
브라운 아이즈로 점화한 미디엄 템포 붐과 브라운 아이드 소울로 완성한 갈색 하모니의 정수. 결과물로 보여준 영향력도 지대하지만 이렇게 한 장르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준 아티스트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 같은 우물을 파는 뚝심이야말로 나얼이 국내 알앤비/소울의 대명사가 된 원동력이다. 2005년 발매한 < Back To The Soul Flight >는 옛 명곡을 소울로 재해석한 소울에 바치는 그의 러브레터였다.

중독적이다 못해 최면적인 도입부 피아노 반주에 기절하고 나면 소울 도인(道人)의 경지를 탐하는 나얼의 목소리가 들린다. 눈물을 머금은 듯 애잔하고, 탁월한 공명감의 두성이 아름답다. 흉내 의지를 꺾는 화려한 애드리브를 정밀하게 스케치해낼 때면 이게 우리나라 가수가 맞나 싶다. 심지어 이는 1989년 박선주의 원곡을 여자 키 그대로 부른 것이다. 나얼은 독보적인 노래꾼이다.

BMK – 꽃피는 봄이 오면 (2005)
제임스 브라운, 아레사 프랭클린 등 1960년대 소울 거장들의 육성을 들어보자. 원시의 소울은 흑인의 민권 회복과 자긍심 표출을 위한 분출구와 같았으며 이들의 보컬은 필히 웅변적인 힘, 우렁찬 스태미너를 특징으로 한다. BMK의 스피커가 터질 듯 묵직하고 강력한 목소리와 비교해보자. 그들처럼 차별에 대한 격노나 한을 노래하지는 않아도, 무자비한 성량만큼은 그것의 전형과 쏙 빼닮았다. 과연 ‘소울 국모’다.

‘꽃피는 봄이 오면’의 절절함도 여기서 온다. 산뜻한 봄날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버린 감정의 파고를 노래하는 이 곡은 간주도 없이 빽빽하게 채운 보컬이 굵직한 멜로디를 뽑아내고 이내 극단의 감정을 토해내는 후렴부로 치닫는다. ‘찰나 같아 찬란했던 그 봄날’처럼 이별의 심정을 지독하리만치 아름답게 대변하는 노랫말은 또 어떠한가. 우리가 알고 있던 봄의 계절감을 잊게 할 만큼 애틋하다. 소개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히트곡이 많지 않은 그이지만, ‘꽃피는 봄이 오면’ 하나만으로 계절만 되면 소환되는 스테디셀러의 주인공이 됐다.

윤미래 – What’s up! Mr. good stuff (2007)
전략은 중도, 무기는 실력. 윤미래는 날고 기는 신의 강자들 사이에서 잔학한 쌍칼 검법의 가능성을 창출한 독보적인 멀티 플레이어다. 대중과 장르 애호가를 모두 사로잡기 위한 랩, 노래의 현란한 휘날림과 속속 발매한 발라드 히트 넘버들로 양 분야 모두의 정상급 인정을 확보한 그였다. 그러한 완벽에 가까운 이도류의 특성을 압축하고 블랙 뮤직 스페셜리스트로서의 위상을 철저하게 굳힌 작품이 < t 3 Yoonmirae >다.

수록곡 ‘What’s up! Mr. good stuff’는 리얼하다. 인트로의 거친 드럼에서 예고하듯 호쾌한 펑크(Funk) 그 팔딱거리는 참맛을 별다른 효과 없이 기타, 브라스 등 화끈한 세션의 합연만으로 전달한다. 역동적인 박수 소리와 브릿지 내레이션은 입체감 이상의 현장감을 부른다. 자유롭게 그루브를 타고 흐르는 윤미래의 보컬을 따라 춤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한국 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노래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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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얼 ‘서로를 위한 것’ (2020)

평가: 3/5

따스한 전자 피아노와 1980, 90년대 알앤비에 뿌리내리고 있는 얼개. 곡을 구성하는 재료가 그간의 나얼 음악과 다르지 않다. 아티스트가 고수하는 이 레트로는 익히 들어오긴 했어도 정교한 완성도만 뒷받침되면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유효할 법한 문법. ‘같은 시간 속의 너’, ‘기억의 빈자리’에 이어 보다 초연한 노랫말로 ‘이별 3부작’을 완성하는 이 노래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쉽고 멜로디 감도가 높다. 후렴에서 그의 팀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Gone’이 겹쳐가기는 하나, 고풍스러운 사운드 디자인과 브릿지(Bridge)와 3절을 제외하면 과한 고음을 자제한 여유로운 곡조는 편하게 챙겨 듣기 좋을 흡인력을 담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