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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얼룩진 오스카와 ‘축제의 여름’

3월 28일(한국 시각), 배우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가 사회를 보던 코미디언 크리스 록의 따귀를 때린 순간부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간은 멈췄다. 소셜 미디어 타임라인과 언론사 헤드라인이 이 초유의 사태에 깜짝 놀라 사건 경위를 초 단위로 분주히 업데이트하는 동안에 몇몇 사람들은 가장 유명한 영화계 시상식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크리스 록은 윌 스미스의 아내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삭발한 머리를 두고 “< 지 아이 제인2 > 기대한다.”는 질 낮은 농담을 던졌다. 1997년 배우 데미 무어가 네이비 씰 양성 과정에 입교한 여군 대위의 이야기를 위해 삭발을 감행한 영화 < 지 아이 제인 >에 빗대 제이다의 외모를 조롱한 것이다. 제이다는 2018년부터 미국 흑인 여성의 절반 이상이 앓고 있는 자가면역질환, 원형 탈모증 증상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삭발한 상황이었다.

웃고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이었다. 코미디라는 이름으로 오랜 시간 묵인되어 온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결과였다. ‘조크를 가장한 언어폭력’이라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객석의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고, 심지어 윌 스미스도 웃고 있는 사이, 오직 제이다만의 얼굴만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윽고 윌 스미스가 무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크리스 록의 뺨을 때렸다. 아카데미 역사상 유례없는 폭행이 생중계됐다. 시상식이 열리던 돌비 극장의 모두가 사전 기획된 쇼와 돌발 상황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윌 스미스는 “내 아내의 이름을 네 입에 올리지 마”라며 큰 소리로 크리스 록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기억하는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이다. 월요일 아침 시상식 생중계를 지켜보던 나조차 이 기이한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크리스 록의 발언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불쾌한 모독이었다. 그렇다고 시상식에서 폭력을 행사한 윌 스미스의 행동도 멋지지 않았다. ‘맞을 짓 했네’라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맞을 짓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모욕에 폭력으로 응수하는 것만이 최선인가?’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내가 정신을 차린 순간은 크리스 록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베스트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을 발표할 때였다.

힙합 밴드 더 루츠의 드러머 퀘스트러브가 감독한 < 축제의 여름 (… 혹은 중계될 수 없는 혁명) >(이하 < 축제의 여름 >)은 1969년 6월 29일부터 8월 24일까지 뉴욕에서 개최된 ‘할렘 컬처 페스티벌’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다. 가수이자 진행자로 명성이 있었던 진행자 토니 로렌스가 뉴욕시와의 협조를 거쳐 할렘 중심부 마운트 모리스 공원에서 개최한 이 페스티벌은 30만 명 이상이 참가한 대규모 음악 축제였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결과로 흑인들은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을 통해 법적인 인종차별 폐지를 거머쥐었고 이듬해 투표권을 거머쥐었다. 비폭력 노선을 견지한 마틴 루터 킹 목사, 보다 급진적인 운동을 촉구한 사회운동가 맬콤 엑스라는 두 축을 통해 흑인들은 뿌리 깊은 인종차별에 저항했고 흑인으로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며 새로운 세상을 위한 혁명을 꿈꿨다. 그러나 1965년 맬콤 엑스에 이어 1968년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하자 흑인 커뮤니티는 좌절했다. 폭동이 벌어졌고 비폭력주의자와 폭력주의자 간의 간극이 벌어졌다.

< 축제의 여름 >은 고무된 흑인 사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랑스러운 축제였다. 팽팽한 긴장 상태에 놓인 1969년, 뒤숭숭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흑인 문화의 중심지 할렘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사회적 억압, 굴종,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음악, 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모여든 젊음의 현장이 펼쳐졌다. 기획자 토니 로렌스는 영리한 수완을 발휘해 후원사를 끌어모으고 흑표당원을 보안요원으로 고용하며 관중들과 아티스트들을 안심시켰다. 블랙 커뮤니티에 우호적이었던 당시 뉴욕 시장 존 린지까지 페스티벌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그 결과로 스티비 원더, 피프스 디멘션, 비비 킹,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 니나 시몬 등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무대를 빛낼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말자. 이 페스티벌은 시대의 아픔을 춤과 음악으로 그저 망각하고자 했던 자리가 아니었다. 뮤지션들은 미국 전역의 블랙 장르가 교차하는 만남의 장소에서 각자의 선율과 박자, 노래와 연주를 통해 흑인 공동체의 정신을 하나로 묶고 연대를 촉구했다. 인종차별에 침묵하지 않았고 혐오에 순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병자리의 시대(Aquarius)’로 그려지는 꿈과 희망의 나라를 노래하고 ‘행복의 날(Oh Happy Day)’를 합창하며 신의 손길을 간절히 바랐다.

마틴 루터 킹이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그의 앞에 앉아있었던 제시 잭슨 목사의 찬양은 < 축제의 여름 > 속 결정적인 장면이다. 비극의 현장을 담담히 고백하며 장내를 숙연하게 만든 그는 이내 전설적인 가스펠 싱어 마할리아 잭슨과 메이비스 스테이플스의 찬양을 이끈다. 5분에 달하는 마할리아 잭슨의 ‘Precious lord’는 노래의 영역을 넘어선다. 폭력의 1960년대 말 생존 투쟁을 벌였던, 그저 한 명의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고자 했던 모든 흑인 커뮤니티의 한숨과 응어리진 절규, 가슴속 깊은 한을 영혼으로부터 끌어올린 위대한 목소리다.

이 의미 깊은 순간을 5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당시 페스티벌을 촬영한 할 털친(Hal Tulchin)은 40시간 이상의 기록물을 방송사에 넘기고자 했으나 사겠다는 회사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시대의 관심은 그 해 8월 우드스톡 페스티벌에 쏠렸다. 우드스톡이 폭력과 마약, 엄청난 적자의 오명을 지우고 록 문화의 성경으로 모셔지는 동안 할렘 컬처 페스티벌은 오래도록 지하실 구석에 박혀 있었다. 2004년에야 골동품 필름이 발견됐지만 영화 제작이 결정되기까지 또 8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음악사의 위대한 순간이 어렵사리 빛을 보게 됐다.

안타깝게도 < 축제의 여름 >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치를 인정받는 그 순간마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크리스 록의 저열한 언어폭력과 윌 스미스의 물리적 폭력의 충격에 퀘스트러브의 감동적인 수상 소감의 의미를 조명하는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 축제의 여름 >과 더불어 이 날 아카데미 시상식이 미국 내 블랙 커뮤니티에게 의미 있는 행사였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까운 결과였다. 덴젤 워싱턴이 사무엘 L. 잭슨에게 공로상을 수여했고,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의 주인공은 < 킹 리차드 >의 주연 윌 스미스였다.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자리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폭력이다. 스탠드업 코미디가 지향하는 표현의 자유와 날카로운 풍자라는 핑계 아래 약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며 날카로운 상처를 안기는 언어 폭력, ‘사랑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는 해로운 기사도 아래 행사한 물리적 폭력이 모두 포함된다. 윌 스미스의 폭력이 부적절했던 이유는 크리스 록의 끔찍한 언행을 전세계가 지켜보는 시상식에서 공론화하고, 더는 이런 것을 코미디라 납득할 수 없다고 각인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순간의 폭행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 프렌치 히스토리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역사학자 개리 지로드가 남긴 트윗을 읽어보자.

“크리스 록의 뺨을 때리는 대신 윌 스미스가 이런 수상 소감을 했다고 상상해보세요 : ‘제 아내는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고 이로 인해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제 아내는 아름답고, 강하고, 멋진 사람입니다.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크리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웃음거리로 삼는 건 웃기지도 않고 옳은 일도 아닙니다.”

내가 크리스 록과 윌 스미스의 행동에 대해 두고 한 말 중 후회되는 건 ‘맞을 짓’이라는 표현이다. 윌 스미스의 폭행을 비판했던 나조차도 폭력을 저지를 만한 언행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무심코 내뱉었다는 게 부끄러웠다. 하지만 ‘맞을 만했으니 맞았다’, ‘가족을 건드렸는데 따귀로는 부족했다’, ‘혐오 발언을 막는 데 효과적인 행동이었다’ 등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폭력을 반대하는 내 입장이 세상을 모르는 인간의 속 편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사이다 서사에 통쾌함을 느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보복을 꿈꿔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감정이 아니다. 누군가의 질병을 코미디 소재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응수 방법이 따귀를 때리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맞을 짓’의 긍정은 폭력을 행사하는 이에게 위험한 권력을 쥐여 준다. 강자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폭력은 누구에게나 향할 수 있다. 여성과 사회적 약자를 향해서도 ‘맞을 짓’이라는 논리를 앞세울 수 있게 된다. 강자가 힘을 앞세우는 가운데 피해자와 약자는 주체에서 객체로 격하된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아슬아슬한 스탠드업 코미디 중 분명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말을 ‘해도 되는 말’로 웃어 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다.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투쟁했던 시기의 기록물 < 축제의 여름 >과 오스카 시상식은 우리의 내면 속 익숙해진 폭력의 논리로 얼룩지고 말았다. 누가 옳고 그른지를 다투고, 어떤 이의 폭력이 더 중한지를 저울에 매달기 전에, 지금으로부터 50년이 훨씬 넘은 숭고한 역사를 복원한 < 축제의 여름 >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어 봐야 한다. 나는 폭력을 쓰지 않고도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무례함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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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실감, 절감, 공감] 우상의 몰락

마릴린 맨슨의 음악을 좋아했다. ‘안티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외치며 도발적인 퍼포먼스를 펼치던 하얀 분장의 프론트맨이 세상이 싫었던 사춘기 소년에게는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마이클 무어의 영화 < 볼링 포 콜럼바인 >을 보고 나서는 사회로부터 핍박받는 록스타의 환상까지 더해졌다. < Antichrist Superstar >, < Mechanical Animals >, 1997년 MTV 어워드에서의 ‘The beautiful people’ 라이브, 베스트 앨범 < Lest We Forget > 등등. 많이도 들었다.

안타깝게도 이젠 어디서도 마릴린 맨슨을 좋아했노라 이야기할 수 없다. 현재 그는 추악한 성폭행 범죄 의혹을 받고 있다. 2007년 당시 19세 나이로 맨슨과 교제하던 배우 에반 레이첼 우드가 지난해부터 맨슨의 그루밍과 학대, 성폭력을 폭로하고 있다. ‘Heart shaped-glasses’ 뮤직비디오 촬영 도중 성폭행을 가했고, 하루 152번 이상 전화를 걸었다는 등 집착이 심했다는 주장이다.

일방적인 내용도 아니다. < 왕좌의 게임 >에 출연한 배우 에스미 비앙코 역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마릴린 맨슨에게 성적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맨슨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만 15명이다. 맨슨은 혐의를 부인했지만, 레이블에서 쫓겨났다.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맨슨은 새 친구의 도움을 받아 다시금 대중 앞에 섰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카니예 웨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다 ‘생일이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 래퍼, 악명 높은 강간범 빌 코스비의 무죄를 외치며 관심을 끌고 양극성 장애에 시달리며 망언을 내뱉다 아내 킴 카다시안에게 버림받은 래퍼, 카니예 웨스트였다.

카니예 웨스트는 소문만 무성하던 앨범 < Donda >의 2차 리스닝 파티에 마릴린 맨슨을 초대했다. 시카고 솔져 필드 한가운데 지어진 저택 세트장에서 난간에 기댄 채로 모습을 드러낸 맨슨은 수록곡 ‘Jail pt.2’에 참여한 상황이었다.

맨슨의 옆에는 래퍼 다베이비가 있었다. 2021년 초까지만 해도 메가 히트 싱글 ‘Rockstar’와 두아 리파와의 콜라보레이션 ‘Levitating’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아티스트였던 그는 7월 마이애미의 힙합 페스티벌 공연 도중 “에이즈, 성병에 걸려 2~3주 안에 죽을 일 없는 사람들, 게이, 문란한 여자들 제외하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라 발언하며 장내를 침묵에 빠트렸다.

논란이 된 후에도 다베이비는 소셜 미디어에 실언을 늘어놓고 조롱 격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등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고 엘튼 존, 마돈나, 릴 나스 엑스 등 아티스트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마지못해 사과의 메시지를 내놓았다. 그도 ‘Jail Pt.2’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마릴린 맨슨과 다베이비가 참여한 < Donda >는 ‘인디펜던트’지에게 0점을 받았다. 불공정하다고? ‘인디펜던트’ 지를 제외하고도 카니예 웨스트의 작품에는 문제가 많았다. 2020년부터 작업을 알렸던 앨범은 수차례 발매 연기된 끝에 8월 29일 기습 공개됐고, 그마저도 미완성본이라 두 번의 추후 수정을 거쳐야 했다.

실망이 컸음에도 나는 < Donda >를 동정했다. < Jesus Is King >부터 의아한 행보만 보여준 칸예지만, 호불호를 떠나 지난 20년을 지배한 시대의 아이콘이 정신을 차리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길 바랐다. 지난 1월 13일 사인을 요청한 남성 팬을 때려눕혀 LA 경찰에게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뉴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방탕한 록스타들과 갱스터 래퍼들의 음악이 친숙했던 나는 예술가들의 경거망동에 관대한 편이었다. ‘예술과 인성은 별개’라 믿기도 했고, 대놓고 자랑할 순 없어도 일종의 길티 플레저처럼 아쉬움을 곱씹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그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인내심이 낮아진 것일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물들어버렸나? 아니다. 이것은 배신감이다. 나를 음악의 세계로 인도한 가수의 노래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이 사실은 추악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는 당혹감과 분노다. 마릴린 맨슨, 카니예 웨스트, 다베이비의 음악을 좋아했노라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된 허탈함이다. 오랜 시간 동안 활동을 이어가면서도 논란 없이 만인의 존경을 받는 예술가들이 있다. 우상은 그런 이들에게 어울리는 영예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또 다른 우상이 몰락을 예고하고 있다. 지난해 < The Nearer Fountain, More Pure the Stream Flows >를 발표한 블러, 고릴라즈의 데이먼 알반은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스로 곡을 쓰지 않는다”며 논란을 자초했다. 평가 절하, 여성 간의 비교, 어이없는 변명까지 현대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삼대 금기를 충족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기 기타 히어로에서 백신 반대 운동 투사로 직업을 변경한 에릭 클랩튼은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제약회사들에게 속아 백신을 접종”했노라며 접종자들은 ‘집단 최면 형성’ 이론의 희생자들이라 열변을 토했다. 과거의 유산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더는 애써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지도 않다. 스스로의 권위는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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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IZM 연말 결산 특집 Feature

2020 에디터스 초이스(Editors’ Choice)

이렇게도 조용한 크리스마스 연휴가 있었던가. 연말의 공연 열기로 뜨거워야 할 지금 길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코로나 19, 팬데믹 시기 속에도 이즘은 열의를 다해 2020년의 음악을 기록했다. 대망의 마지막 조각을 공개한다. 이즘 에디터의 취향이 담긴 에디터스 초이스. 주관적이지만, 그렇기에 솔직한 멤버들의 개성 있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나보자.

김도헌’s Choice

에비뉴 비트(Avenue Beat)
‘F2020 Remix’ (Feat. Jessie Reyez) 
바이럴, 틱톡, 스포티파이, 그리고 코로나. Lowkey Fuck 2020.

저드(Jerd) ‘문제아’
정제되지 않은 불온함. 더 많은 문제아들의 등장을 바라며.

코나(KONA) ‘눈치가 없다 (Snail) (Feat. Youra)’
좌우를 굼뜨게 살피는 달팽이 한 마리. 신속히 상하로 요동하는 분노. 자주 보게 될 이름. 

이브 튜머(Yves Tumor)
< Heaven to a Tortured Mind >
얼터너티브 블랙 뮤직. 모타운, 소울, 펑크(Funk), 재즈에 익스페리멘탈 버무린 ‘새 시대를 위한 가스펠(Gospel For A New Century)’.

수(Sault) < Untitled (Black Is) >
2020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한 편의 뮤직 다큐멘터리. 블랙의 정체성을 묻고 블랙을 고양하며 블랙을 어루만지는 현대의 성스러운 부족 의식.

박수진’s Choice

김제형 < 사치 >
내 가치관과 닮은 음반. 유쾌하고 진지하고 쉽고도 확실하다. 포크, 재즈, 뉴잭스윙 등을 신나게 오가는 앨범으로 어떤 곡을 들어도 다 제맛이 살아있다. 올해의 발견, 올해의 수확. 김제형을 찾아라 프로젝트의 선봉장에 서봅니다.

앨리샤 키스(Alicia Keys) ‘Underdog’
청량한 멜로디에 진한 위로가 담긴 가사. 넌 할 수 있다는 힘찬 메시지가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기대고 싶은 노래 기대고 싶은 목소리.

키디비 ‘오히려’
멋지다. 강하다. 키디비! 고난의 끝에서 이 갈지 않고 힘 빼며 풀어낸 자기 고백의 서사. 곡해 없이 알맹이만 봐도 전해지는 마음. 높고 자유롭게 날아올라라 키디비!

김일두 < 꿈 속 꿈 >
20살, 홍대의 한 라이브 클럽에서 흰색 반팔 차림으로 담배를 뻑뻑 피우며 노래하던 그를 기억한다. 그땐 다가갈 수 없는 무섭기만 한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무뚝뚝한 김일두의 목소리에는 관조가 아닌 우직함이 있다. 인생이 묻어 있어 자꾸 찾게 되는 거친 맛. ‘뜨거운 불’ 추천합니다.

선셋 롤러코스터(Sunset Rollercoaster)
< Soft Storm >
나른함과 여유. 재촉하지 않는 선율. 은근히 서려 있는 멜랑꼴리함까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외로움. 밀어낼 수 없는 고독함이랄까. 아 취한다. 천천히 그리고 깊게 음미하게 되는 선셋 롤러코스터만의 무드. 다가와 다가와 줘 베이비.

신현태’s Choice

로라 말링(Laura Marling)
< Song For Our Daughter >
단출한 구성과 멜로디, 노래를 부를 때 특유의 딕션과 호흡. 목소리 톤은 다르지만, 로라 말링은 우리가 사랑하는 ‘캘리포니아의 여왕’ 조니 미첼(Joni Mitchell)과 많이 닮아있다. ‘뉴 조니 미첼’이라는 수사가 아깝지 않은 작품.  

레몬 트윅스(The Lemon Twigs)
< Songs For The General Public > 
슈퍼트램프(Supertramp), 윙스(Wings)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다리오 형제는 근사한 팝을 써낼 줄 아는 듀오다. 앨범의 수록곡인 ‘Live in favor of tomorrow’는 개인적으로 뽑는 올해 최고의 싱글이다. 과거만(?)을 좇는 대디록 마니아들에게 몰표를 받을만하며, 평단의 찬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을 아는 사람이 없다. 

테임 임팔라(Tame Impala) < The Slow Rush > 
견고함과 치밀함을 놓친 적이 없다. 등장과 현재까지 이토록 다양한 장르를 접목할 수 있는 아티스트가 다시금 출현했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하지만 이 시대 록 패밀리 최후의 보루라는 생각마저 들어 마음이 짠해진다. 

두아 리파(Dua Lipa)
< Club Future Nostaligia >  
나는 평생 록에 수절해온 해드뱅어다. 하지만 두아 리파는 상상속의 댄스 플로어에 올라가 디스코를 추는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 Future Nostalgia >와 < Club Future Nostalgia >라는 이 연타로 록에 대한 지조를 지킬 수가 없게 한 것이다. 록 음악은 망했다.

데프톤스(Deftones) < Ohms >  
세기말 함께 트랜드를 함께 이끌던 동료 밴드들은 다들 어디로 갔나. 다 망해서 이젠 없다. 어렵사리 목숨 부지하고 있더라도 대부분 산송장과도 같은 신세다. 모두가 데프톤스 같았다면 어땠을까. 꾸준하게 잘하는 것을 오래도록 지속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숭고한 과업인지 보여주는 베테랑.  

임동엽’s Choice

브루스 혼스비(Bruce Hornsby)
< Non-Secure Connection >
몽환적이고 두터운 본 이베어식 터치와 브루스 혼스비의 간결한 사운드에 2020년을 구원받았다.

머쉬베놈 ‘보자보자’
시작은 밈(Meme)이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오방신과 ‘허송세월말어라’
앨범 커버부터 악기들의 톤, 보컬까지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지만 이 맛깔나는 개성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청하 ‘Dream of you (With R3HAB)’
듣는 순간 벗어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인트로부터 각 절을 지나 후렴에 다다를 때까지 매력으로 똘똘 뭉쳤다.

오지 오스본(Ozzy Osbourne)
< Ordinary Man >
록은 죽었지만, 그는 죽지 않았다.

임선희’s Choice

5 세컨즈 오브 썸머(5 Seconds of Summer)
< Calm >
‘Youngblood’에 차분함 한 스푼 추가. 틴 에이지 감성에서 벗어나 살짝 내보이던 노련함이 마침내 자리를 잡았다. 올 한 해 내 플레이리스트를 점령한 앨범.

뉴 호프 클럽(New Hope Club) < New Hope Club >
하루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산뜻한 멜로디와 발칙한 가사.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 ‘Willow’
두툼한 카디건의 온기가 버드나무 잎을 타고 잔잔하게 흐른다. 바람에 따라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 기둥 안에는 ‘But I come back stronger than a ‘90s trend(난 어떤 유행보다 더 강렬하게 돌아왔지)’와 같은 포부가 단단하게 서려 있다.

엔시티 드림(NCT Dream)
‘무대로 (Déjà Vu; 舞代路)’
반짝이는 에너지 가득한 청춘! 그리고 7드림이면 말 다 한 거 아닌가요.

최유리 < 동그라미 >
‘모질고 거친’ 사람의 마음을 매끈하게 다듬어 줄 노래. 때로는 건조한 위로가 더 마음을 일렁이게 하니까.

장준환’s Choice

이권형 < 터무니없는 스텝 >
여러 현의 물감으로 자욱하게 풀어낸 초현실의 세계.

그림자 공동체 < 동요 / 할시온의 관 >
서정성의 풀을 얇게 펴 바른 찬연하고도 덧없는 숨결.

원오트릭스 포인트 네버(Oneohtrix Point Never)
< Magic Oneohtrix Point Never >
라디오 속 뿌연 주파수 너머, 시간의 패러독스를 포착하다.

댄 디콘(Dan Deacon) < Mystic Familiar >
13년 전, LCD 사운드시스템에게서 받은 감동의 재림! 총명한 빛을 내며 밀려오는 전자음의 파도.

100 겍스(100 gecs)
‘hand crushed by a mallet (Remix) (Feat. Fall Out Boy & Craig Owens & Nicole Dollanganger)’
온갖 기행과 우스갯소리로 뒤범벅된 기성 팝에 대한 종말 선언.

황선업’s Choice

옥상달빛 ‘어른처럼 생겼네’
유난히 힘들었던 2020년. 꾹꾹 담아뒀던 내 속마음을 대신 이야기해주는 노래.

에이비티비(ABTB) ‘nightmare’
연주, 노래, 구성 등 어느 하나 나무데 것 없는 7분 49초의 완벽한 하드록 대서사시. ‘이런 곡을 만들어 낸 삶은 그래도 나름 성공한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드비타(DeVita) < CRÈME >
과거의 것도 지금의 것도 이 둘을 섞은 것도 전부 잘한다. 단연 올해의 신인. 근데 왜 아무도 언급을 안하는거야.

스트록스(The Strokes)
‘Brooklyn Bridge to Chorus’
이토록 섹시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나. 키보드 위에 기타가 얹혀지는 순간 소름이 쫙.

미레이(milet) < eyes >
일본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분기점이 될 작품. 일본음악 얕보지 마라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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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Feature

IZM 에디터들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영화’

여름은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의 계절이지만 2020년 여름은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나갔다. 그놈의 코로나 19 바이러스 때문에 야외활동과 모임에 제약을 받는 현재의 팬데믹 상황을 슬기롭게 보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다. 다시 보고 싶은 영화나 아쉽게 못 보고 지나간 영화도 시간을 내서 본다면 일상이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 음식 중에서 하나만 뽑아달라는 것이다. 참으로 몰상식하고 잔인한 부탁이지만 동시에 행복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즘 필진에게 심리적 고통을 주기 위해 내 인생의 영화와 영화음악(오리지널 스코어)을 선정해서 공개한다. 그것도 딱 하나만. (소승근)

좌상부터 시계 방향-네트워크/죠스/포레스트 검프/어벤져스: 엔드게임/그녀/리틀 미스 선샤인

김도헌 – < 네트워크 > (1976)

음악도 부족한데 영화까지 추천하려니 얕은 식견을 드러낼까 조심스럽다. “< 겨울왕국 >으로 두 편 써!”라는 모 에디터의 추천도 있었지만 나를 오래 봐온 사람들은 “쟤는 또 엘사, 안나 얘기하네….”라며 식상해 할 것이 분명. < 겨울왕국 >은 노래 영역으로 넘기고, 이번에는 비평의 시선 대신 온전히 취미로만 하고 있는 영화 별점 애플리케이션에 2천 개 리뷰를 등록한,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대로 영화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텔레비전은 진실이 아냐!” “세상은 비즈니스지!”. 중3 때 우연히 보게 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6년 작 < 네트워크 >는 매스미디어의 잔혹한 현실을 가감없이 풍자하는 영화다. 시청률 압박에 시달리며 해고 통보를 받은 노년의 앵커가 광기에 휩싸이고, 그 폭주가 인기를 끌자 방송국은 그 분노를 아이템 삼아 인기 토크쇼를 론칭한다.

더 깊고, 더 아름다운 영화가 많지만 < 네트워크 >의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은 지금까지 삶의 태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너무도 화가 나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라 외치는 피터 핀치의 열연은 언제 봐도 소름이 돋는다. 끝없이 의심하고 분노하라.

박수진 – < 미스 리틀 선샤인 > (2006)

현실은 퍽퍽해도 위트.. 위트, 위트만은 잃지 말자고 다짐하는 편이다. 그렇지 않나. 힘들 때 힘든 생각 하면 더 힘들다. 그런 면에서 내게 영화는 늘 밝아야 한다. 아프게 슬프고 힘들게 아픈 것들을 되도록 보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편향된 취향과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나는 떳떳하다. 삶의 애환을 멋지게 에둘러 그럼에도 행복은 현실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들. 멋지게 짜릿하고 우아하다.

< 미스 리틀 선샤인 >은 내게 그런 작품이다. 20살 무렵 우연히 본 뒤에 이후 적어도 10번은 넘게 돌려봤다. 집안의 통통한 막내딸 올리브가 미인 대회를 나가게 되고 이 과정에 자격지심 가득한 아빠, 마약에 중독된 할아버지, 게이 삼촌을 비롯해 엄마와 오빠까지 동참한다. 우여곡절이 끊이지 않고 사회 속 루저로 보이는 캐릭터들을 계속해서 무너지고 부딪힌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이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선보이는 그 어떤 말 할 수 없는 불건전(?) 댄스의 한바탕은 그 호오에 상관없이 값진 쾌감을 던져준다. 인생의 고단함. 유쾌 앞에 무릎 꿇다!

소승근 – < 죠스 > (1975)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 장면이 궁금해서 < 죠스 >를 보고 싶었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영화를 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텔레비전에서 < 죠스 >가 방송됐을 때 그 소원을 풀었지만 미완의 경험이었다. 보고 싶었고 궁금했던 장면들은 여지없이 가위질당했고 심지어 방송국은 시간 관계상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내용을 극악무도하게 잘라냈다. 결국 나중에 비디오 대여점에서 < 죠스 >를 빌려서 다시 감상했을 때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발견했다.

물을 두려워하는 경찰 서장이 상어를 잡으러 바다로 떠나기 전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어린 아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심란해하는 아빠를 본 꼬마는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이를 눈치챈 아빠는 아들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한다.

“뽀뽀해 줄래?”
“왜요?”
“네 뽀뽀가 필요하니까”

지금 초등학생인 딸이 유치원에 다닐 때 이 상황을 부탁했더니 딸아이는 억지로 들어주긴 했다. 이제 뽀뽀만 해주면 된다. 나는 최대한 자상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딸에게 “아빠한테 뽀뽀해 줄래?”라고 말했더니 딸은 단호하게 외쳤다.

“싫어! 냄새나!”

< 죠스 >는 내 인생의 영화다.

손기호 – < 그녀 > (2013)

오랜 짝사랑으로 지쳐있을 때 견뎌보고자 늦은 시간 홀로 영화관에서 보게 된 < 그녀 >는 어떤 위로도 전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실체 없는 컴퓨터 운영체제와 대필 작가의 이야기에 집중할 때 나는 주인공 테오도르가 타인을 대신해 감정을 전달해주며 느꼈을 고독에 공감했다.

진심이 필요한 상황에 대한 회피로 자신을 가두게 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드러낸 ‘사만다’가 사라지고 맞이하게 된 공허 혹은 두려움. 나는 엔딩을 멍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고 무기력한 그때가 기억나 아직도 < 그녀 >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도망치고 있다.

신현태 – < 포레스트 검프 > (1994)

2차 세계대전 이후 초강대국으로 우뚝 선 미국의 1950년대부터 주인공인 포레스트는 주요한 사건을 어슷하게 스쳐 지나간다. 근데 이게 참 웃긴다. 그의 이름은 KKK 단원이었던 포레스트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고, 다리가 불편해 관절 보행기를 찬 그의 어리숙한 춤을 보던 잘생긴 청년 손님은 TV에 출연해 포레스트 검프의 춤을 따라 추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설정이다. 잘생긴 투숙객은 바로 엘비스 프레슬(Elvis Presley)리다. 그 밖에도 베트남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와 존 레논(John Lennon)에게 ‘Imagine’ 가사에 힌트를 주기도 한다. 또한 케네디의 암살, 닉슨의 워터게이트 등 20세기 미국의 정치, 경제의 주요 사건들을 영화에서는 희화와 풍자로 녹여냈다.

모든 사건과 상황들에서 포레스트 검프는 늘 진지하지만, 그의 우직함과 우연한 활약에 나는 끊임없이 폭소했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음악에 있었다. 50년대부터 70년대를 아우르는 미국 대중음악의 명곡들이 작품 전반 요소요소 흘러나온다. 비단 한두 장면을 꼽을 것이 아니고 흘러나오는 모든 곡의 배치는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이 많은 사건은 포레스트 검프를 중심으로 흘러가지고 독립된 다양한 이야기는 보는 이를 어렵지 않게 사로잡는다. 영화 < 포레스트 검프 >는 미국 근대사와 대중음악사가 녹아있는 명랑하고 경쾌한 희극(喜劇)이다.

이홍현 – < 인사이드 아웃 > (2015)

나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사람이다. MBTI 성향도 감정 기복 심한 ENFP다. 이런 성격 덕에 작은 기쁨도 배로 느낄 수 있어 좋을 때도 있지만 사소한 일에 예민하게 스트레스 받아 괴로울 때도 많다. 아마 내 안의 ‘기쁨이’와 ‘슬픔이‘는 다른 사람들의 그것보다 두 배 정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산만한 머릿속. < 인사이드 아웃 >은 그런 나에게 더없이 흥미로운 영화였다.

내가 본 최고의 영상물이었다. 인간의 감각을 총괄하는 장치 뇌를 기저 삼아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현상을 표현하는데, 그 내용이 기가 막힌다. 작품 전반에 깔린 공감 가는 유머에 생각 없이 웃다가도 ‘붙잡지 못한 유년 시절의 기억’ 빙봉의 희생을 지날 때면 가슴 한편에 무거운 돌이 내려앉았다. 예고 없이 찾아온 쓸쓸함이 마음의 굴곡으로 이어져 무감정의 상태로 전락하는 어린 소녀 라일리의 지독한 ‘인생 첫 슬픔’ 과정에 덩달아 코끝이 찡해졌다. 

영화의 모든 102분이 소중하지만 마지막 10분을 가장 사랑한다. ‘울어도 돼, 슬플 때는 마음껏 슬퍼해도 돼’. 누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그 눈물의 가치를 슬픔이가 멋지게 전하기에. 희로애락에 따른 감정의 지각변동으로 성장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앞으로도 나와 평생 함께할 영화는 이뿐이지 않을까 싶다.

임동엽 – < 어벤져스: 엔드게임 > (2019)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스타일도 좋아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을 고른 것은 아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한 차례 경험했으며, 윗세대에게는 ‘스타워즈 시리즈’가 그러했을 영화와의 우정이 그 답이다. 유년기보다 기억이 온전했던 청소년 시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의 영화 속 세계관)’에 발을 들인 뒤로 실현 불가능한 상상을 11년 동안이나 현실처럼 누리고 살았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장면에서나 터지던 눈물샘이 처음으로 거대 상업 영화인 < 어벤져스: 엔드 게임 >에서 폭발했다. 긴 세월의 추억이라는 감성적인 선택과 특별한 경험으로 좋아하는 영화의 기준을 잡았다. 사실 단 하나를 고르는 특집에서 이 영화를 골랐다는 것은 반칙이다. 20편이 넘는 기록이 단 한편에 담겼으니까. 이즘, 어셈블!

초콜릿 천국 / 상-큐브, 하-괴물

임선희 – < 초콜릿 천국 > (1971)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점이 있다면 초콜릿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부끄럽지만 아직까지도 초콜릿 바를 살 때마다 혹시 모를 황금 티켓을 상상하며 포장을 천천히 뜯는 습관이 있다. 달큰한 향기를 풍기는 오프닝 장면부터 뭐든 먹을 수 있는 공장, 지붕을 뚫고 날아가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환상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특히 윌리 웡카가 부르는 ‘Pure imagination’의 멜로디는 기분 좋은 날이면 절로 흥얼거릴 정도로 머릿속에서 반짝거린다.

2005년 개봉한 팀 버튼의 작품도 인상적이지만 조금은 광기가 서린 아날로그 감성의 1971년 작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어른이 되면 초콜릿을 쌓아 두고 먹겠다는 ‘나만의 로망’ 그 자체이니까. 용돈을 모아서 혹은 부모님을 졸라 초콜릿을 고르며 기뻐하던, 황금 티켓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던, 초콜릿 하나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다.

장준환 – < 큐브 > (1997)

우선 이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를 초등학생 때 봤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부모님께는 죄송하다) 그렇기에 < 큐브 >는 내 인생을 빛낸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 일상생활을 뒤흔들어 놓은 충격적인 분기점에 가깝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난 뒤 여파부터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혈흔이 낭자하고 하드코어한 상상력의 결정체를 직접 두 눈으로 마주하고 큐브에 갇히는 악몽을 얼마나 꿨는지 모르겠다.

어린이는 모든 걸 스펀지처럼 흡수한다는 말이 있던가. 영화는 끝났어도 정체불명의 암호와 폐쇄된 기계 장치의 퍼즐 요소는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었고, 이후로도 미궁과 수수께끼 장르를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 그때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현재의 나는 ‘카이지’의 애독자이자 ‘레이튼’ 게임의 컬렉터이며 방 탈출 카페의 지독한 마니아가 되어버렸다. 이래서 유년기에는 행복하고 좋은 것만 보고 자라야 한다.

정민재 – < 괴물 > (2006)

어릴 때부터 공룡과 괴수 영화를 좋아했다. < 쥬라기 공원 > 시리즈는 물론, < 티라노의 발톱 >, < 용가리 >마저 사랑했던 내게 봉준호 감독의 < 괴물 >은 제목만으로 설레는 영화였다. 손꼽아 기다린 개봉일에 영화를 보며 가슴이 두근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대낮 한강에 괴물이 나오다니! 나는 한동안 원효대교를 지날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괴물의 그림자를 찾곤 했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 괴물 >은 성인이 되어서도 생각이 났다. 볼 때마다 새로웠다. 어려서는 괴물 그 자체만 보였다면, 어느 순간부턴 괴물 같은 우리 사회가 보였다. 책임을 회피하고 서로를 탓하기 바쁜 어른이 보였고, 허망하게 희생된 우리네 이웃이 눈에 밟혔다. 인간의 오만으로 태어난 괴물은 불쌍하기까지 했다. 나는 아직도 가끔 현서의 마지막 모습이, 먼저 가라며 손짓하던 희봉이, 소동이 끝나고 새 가족이 된 강두와 세주의 저녁상이 떠오른다. < 괴물 > 같은 괴수 영화는 단연코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 / 상-이터널 선샤인 하-태풍태양 / 문라이트

정연경 – < 고양이를 부탁해 > (2001)

태희: 난 그냥 계속 돌아다니고 싶어. 계속 배를 타고 그 어디서도 멈추지 않고, 물처럼 흘러 다니면서 사는 거야

혜주: 야, 그럼 난 강 옆에 아주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을 테니까 지나가다 들러,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스무 살이 된 후부터 지금까지 매년 12월이 되면 이 영화를 본다. 영화의 주인공은 혜주, 태희, 지영 그리고 비류와 온조 자매. 고등학생 시절 ‘절친’이었던 네 사람은 갓 성년이 되어 각자 다른 태도로 삶에 임한다. 부딪치고 깨지며 좌절하는,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던 이들의 청춘을 보며 어쩌면 난 자기 위로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답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그저 넷의 선택을 먼발치서 지켜볼 뿐. 내 인생도 여전히 선택의 연속이다.

정효범 – < 이터널 선샤인 > (2004)

우선 인생 영화 하나를 정하는 일은 참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럴수록 단순해야 하는 법. 올해 자주 꺼내 들었던 영화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니 < 이터널 선샤인 >이었다. 연애도 어려운 이 시국에 괜히 마음이 복잡해서 꺼낸 건 ‘절대’ 아니다.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이별이 주는 고통을 지우기 위해 기억을 삭제해버린 남녀가 재회하는 신이다. 우리가 다시 만나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게 되더라도 ‘괜찮다’ 말하는 바로 그 부분. 워낙 유명해 영화를 안 봤더라도 어디선가 접한 적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와 연인이 되면 사실 다른 점을 더 많이 목격하게 된다. 공통점이 많아 시작한 연애이지만, 결국은 차이점 때문에 끝을 맺는다. 감정의 보증 기간은 서로 달라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내 세상에서 상대를 지워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다시 이어지는 사랑, 유지되는 인연은 서로를 온전히 마주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는 걸 알려준 영화다. 연인이 있거나, 없더라도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분에게 추천한다.

조지현 – < 500일의 썸머 > (2009)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와’라는 노랫말이 있듯이 이별도 가끔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와는 너무 달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대와 끝끝내 이별하고 마는 것은 꽤 잔혹하다.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영원한 사랑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남녀 주인공이 수많은 위기를 함께 견디고 결국엔 평생을 함께한다는 이야기보다, 절체절명의 위기 끝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오히려 위로된다. 마치 < 500일의 썸머 >처럼!

결국 여름은 가고 가을이 왔다. 톰은 썸머와 헤어지고 어텀을 만났다. 헤어짐에 죽을 것 같다가도 새로운 사랑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사랑을 해본 이들은 썸머가, 해보지 않은 이들은 톰이 이해된다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톰도 썸머도 모두가 짠하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어쩔 도리가 없는 불가항력적 인간이 된다.

한동윤 – < 태풍태양 > (2005)

초등학교 시절 만화 < 날아라 슈퍼보드 > 덕에 아이들 사이에서 스케이트보드가 인기를 끌었다. 동네 아이들이 하나둘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나도 갖고 싶다는 욕망이 점점 커졌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한테 떼를 부려 기어코 스케이트보드를 장만했다. 머리에는 날렵하게 보드를 타는 장면이 자리했으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운동신경이 떨어지는 나에게 스케이트보드는 엉덩방아를 잘 찧기 위한 보조 기구일 뿐이었다. 몇 번 타다가 집 어딘가에 처박아 뒀다.

그때의 미련이 남았던 걸까? 성인이 된 후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럽고, 멋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해 볼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다치는 것이 너무 두려웠던 탓이다. 나와 달리 그들은 목표로 삼은 기술이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이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니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다. 어그레시브 인라인 스케이팅을 소재로 한 < 태풍태양 >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청춘을 그린다. 이 영화로 어린 시절부터 이어지는 아쉬움을 달랜다.

황선업 – < 다크 나이트 > (2008)

개인적으론 내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킨 작품에 감명을 많이 받는 편이다. 무신론과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심어 준 리처드 도킨슨의 < 만들어진 신 >을 인생서적으로 꼽는 맥락과 동일하게, < 다크 나이트 > 또한 히어로 무비의 클리셰를 깨부수고 전혀 다른 타입의 해석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영화다.

끝내는 배우의 자의식까지 침식해 갔던 희대의 악당 조커에 맞서 싸우는 배트맨의 모습은, 내가 여태껏 봐왔던 영웅의 화려한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선과 악 사이에서 갈등하며, 거대한 힘 앞에선 나약하기까지 했다. 영광과 칭송을 포기함으로써 고담시티를 지켜내는 결말은 특히 인상적.

시민들의 환호나 여주인공과의 달콤한 키스 같은 여유 대신, ‘인간’으로서의 영웅을 재조명하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생각과 철학으로 완성된 새로운 ‘배트맨’과 새로운 ‘히어로 무비’. 늘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만 보이는 세계가 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나에게 < 다크 나이트 >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황인호 – < 문라이트 > (2016)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심정으로, 영화를 자주 보지는 않는 편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주제에 까탈스러워서, 취향에 맞지 않는 영화를 보면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깝다. 대신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면 세계관이 바뀔 정도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데, < 문라이트 >를 보고 딱 그랬다.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고, 내가 살아갈 일이 없을 인생을 살아간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삶과 고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며 서사를 이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세상이 한층 다채로워진 기분이다.

주인공은 빈민가에서 마약을 팔고, 흑인 남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성 지향성에 대해 고뇌한다. 개인이 어쩔 도리가 없는 요인들에 의해 정체성을 부여받고, 이를 수행하며 느끼는 감정들이 보인다. 특수한 이야기에서 보편성이 흘러나온다.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억눌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서글픔이 선명히 보일 것이다. 나와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사람과도 영혼이 공명할 수 있음을 느끼게 해준, 아름다운 영화다. 전체를 관통하는 은은한 푸른 빛과 파도 소리는 아직도 강렬한 이미지로 뇌리에 박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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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실시간 차트 시대를 돌아보며

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20년 7월 6일부로 음원 서비스 멜론의 ‘실시간 차트’는 ‘24Hits’라는 새 이름으로 운영된다.

한 시간 단위로 차트 추이를 업데이트하며 순위를 표기하던 지금까지의 방식을 폐기하고, 24시간 동안 이용량 중 스트리밍 40%와 다운로드 60%를 반영해 순위 표기 없이 인기곡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이용자 개인의 청취 습관을 기반으로 인기곡을 나열하는 ‘My 24Hits’라는 차트를 추가 공개하며 음원 ‘개인화’ 흐름에 동참하는 모습도 보였다.

멜론이 실시간 차트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차트 없이 침체되어가던 가요계에서 멜론의 실시간 차트 서비스는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새로이 규정했다. 2004년 SK텔레콤 산하 사업으로 출발한 멜론은 2010년에 이미 유료 가입자 120만 명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디지털 음원 시장의 절대 강자로 입지를 굳히게 되자 자연스레 뉴 노멀(New-Normal)의 권력을 쥐게 됐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열렸다.


 100위권 외 음악은 음악이 아니었다.

멜론차트>멜론 TOP 100>실시간>멜론

돌이켜보면 이보다도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대가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실시간 차트 위 ‘전체 재생’을 누르기만 하면 당대 제일 유행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이용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불법 파일 공유 사이트에는 ‘멜론 ㅁ월 ㅁ주차 차트 100위’ 파일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용권 가격이 저렴했음은 물론이다.

유튜브가 활성화된 이후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멜론둥이’, ‘멜론총각’ 같은 유명 유튜버들이 1시간 이상의 공짜 플레이리스트를 업로드한다. 개인에게도, 배경음악을 찾는 업장에게도 제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에 음악은 딱 100곡만 존재하게 됐다. 발매와 동시에 차트에 진입하지 못하면 그 곡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망각의 쓰레기 더미’처럼 영영 잊혀갔다. 이용자층이 많지 않았을 때는 잠잠했지만 실시간 차트가 한국 유행가의 척도가 된 후에는 모두가 차트 진입에 사활을 걸었다. 베테랑 가수 휘성의 2014년 곡 ‘돈 벌어야 돼’ 속 가사가 정확히 그 시대를 기록한다. ‘연두 과일나무 정상에 한번 걸려야 돼 / Music makes me cry…

간혹 ‘빙봉의 로켓 수레’처럼 망각의 틈에서 솟아오르는 노래도 있었다. 미디어의 영향도 있었고 기타 이슈도 있었지만 이 고난의 서사에 대중은 ‘역주행’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플랫폼도 이를 부추겼다. ‘차트 밖 1위’라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 100위권 안으로 진입한 노래를 친히 구제하며,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노래들에 고난의 서사를 부여했다.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노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노래 중 딱 100곡 만을 강요받았다. 

부추기기

GD-SUPPORTERS trên Twitter: "현재 멜론 차트 #LOSER vs #BAEABE ...

오직 100등까지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경쟁은 과열됐다. 2010년대 중반까지 ‘차트 줄 세우기’는 일상이었다. 음원 공개되는 자정만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돌 팬덤들이 ‘총공’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벌였다. 

‘숨밍(숨 쉬듯이 스트리밍)’이라는 새 시대의 언어 아래 팬들은 가족, 친구들의 휴대전화를 빌려 스트리밍 앱을 켜고 자신이 응원하는 그룹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달성한 차트 1위, 그 아래 차례대로 늘어진 노래들은 결국 우리가 승리했다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멜론은 실시간 차트의 경쟁을 부추겼다. 5분 단위로 실시간 차트 변동 추이를 생중계하고 24시간 누적 이용자 수를 전시하며 인기 순위를 마치 거대한 경마장으로 만들었다. ‘경합’, ‘차트 지붕킥’ 등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며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성토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100위 권 안에만 들면, 상위권에만 안착하면 보장되고 확장되는 성공 앞에선 공염불이었다. 오히려 왜곡된 시스템에서 비판받는 이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주체가 아니라 팬들과 이용자들이었다.

음원 사재기가 가져온 최후의 날

음원 사재기: 왜 내가 모르는 가수가 1위를 하는거지? - BBC News 코리아

자연히 어두운 손길이 다가왔다. 이미 2013년부터 음원 사재기, 차트 조작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됐다.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까지 돈을 챙긴 브로커들이 유령 계정을 생성하고 대포폰을 사들여 ‘작업장’을 차려놓고 차트 진입을 사고 판다는 제보였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페이스북 페이지, 유튜브 채널 등을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이 극성이었다. 발표한 지 몇 개월이 지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가수의 노래가 아이돌 그룹 및 유명 가수들을 제치고 갑작스레 반등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논란의 중심이 된 아티스트들, ‘마케팅 업체’라 주장하는 소속사들, 멜론을 운영하는 카카오 M, 문화체육관광부 모두 음원 사재기 의혹을 부정하거나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해당 음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음원 사재기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최선이었다.

100위권 진입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던 팬덤도,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는 대중도 분노했다. 그리고 이들 ‘기계 픽(음원 사재기 논란에 휩싸인 곡들의 멸칭)’은 공고할 것 같았던 실시간 차트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차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뢰를 잃어버린 플랫폼들은 결국 대규모 개편을 택했다. 2010년대 말부터 디지털 시장의 패권을 유튜브로 빼앗긴 것 역시 버틸 힘을 잃게 했다. 2019년 1월 네이버 바이브가 실시간 차트를 일간 차트로 변경해 제공한 후 실시간 차트 폐지를 선언한 SK텔레콤의 FLO가 뒤를 이었다. 바이브는 이용자 중심의 새 정산 방식(VPS)까지 발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했다. 결국 가장 큰 지분을 쥐고 있던 멜론 역시 ‘실시간 차트’의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개인화’, ‘공정’ 외치기 전에

그러나 정말 이게 변화일까. 개혁을 선언하며 새로 만들어진 차트들 역시 예전 실시간 차트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24Hits 차트만 보더라도 노래 제목 옆 번호만 없어졌을 뿐 한 시간 단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고 나열하는 것은 그대로다. 최상위권의 변동폭은 여전히 좁고, 인기 가수들을 제외한 음악인들에게 100위권 진입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개편 후 특정 곡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다거나 오래도록 차트에 머무르는 빈도가 줄어드는 등의 긍정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하지만 팬덤은 여전히 ‘숨듣’, ‘총공’을 종용하고 각종 차트 분석 사이트들에선 여전히 ‘지붕킥’, ‘종합 이용자수’, ‘추이 그래프’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된다. 여기에 개인화나 큐레이션은 없다.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국내 청취 시장에서 음원 다운로드 비중을 60%나 반영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사재기와 줄 세우기에 대한 우려가 생긴다. 사재기 의혹과 아티스트 수익 배분 문제 어느 하나 시원하게 해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운치 않은 지표다.

개인화를 외치며 난세를 타개하고자 하는 한국 스트리밍 음악 세계지만 언제나 그들의 세계는 100곡이 기준이다. 사재기 논란이 대적으로 점화되지 않았다면,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해외 플랫폼의 기세가 거세지 않았다면 애초에 변화를 시도했을지조차 회의적이다. 셀 수 없이 매년 많은 이들이 공신력 있는 대표 차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지만 ‘실시간 차트’ 생태계에선 공정보다 수익이 먼저기에 가능성이 없다. 

공정한 음악, 정당한 차트를 외치기 앞서 플랫폼들은 실시간 차트를 생태계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도의적 책임부터 지녀야 한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를 살며 음악은 경마장의 말, 사업 아이템, 수익 모델에 더 가까워졌다. 저작권료 횡령 등 그간의 범죄까지 언급하자면 그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중은 진정한 변화, 공정한 순위를 바란다. 눈 가리고 아웅 앞엔 도태만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