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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Twist And Shout Feature

LP의 화려한 부활 그 아래 불안감

1980년대 오래된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레이첼 조이스의 소설 ‘뮤직 숍’은 시대의 흐름 속 왜 다시 엘피(LP)가 사랑받는지를 명쾌히 요약한다. (엘피는 음반 규격을 의미하는 용어로 아날로그 음반을 통칭하기 위해서는 ‘바이닐’이라 지칭하는 것이 맞다.)

“시디(CD)가 여러모로 편리하긴 하지만 엘피판의 그윽하고 멋스러운 느낌을 따라갈 수는 없어. 다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시디의 유행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거야. 소장 가치가 없으니까.

‘뮤직 숍’의 예언대로 바이닐 판은 시디의 권위를 박탈했다. 지난해 미국에서 LP는 2,754만 장이 팔려나가며 1991년 이후 최다 판매량을 기록했다. 2006년 이후 꾸준한 판매 증가세를 보이더니 1986년 이후 34년 만에 시디 매출을 뛰어넘은 것이다. 피지컬 음반 소비가 나날이 줄어드는 가운데서도 시디 매출이 전년 대비 48%나 감소할 때 LP는 꾸준한 구매 상승률을 보여왔다.

5년 전쯤만 해도 레코드 숍에 들러 바이닐을 구입하는 이들은 이른바 ‘레트로 마니아’들이었다. 벌집 같은 박스 속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수없이 많았을 공간의 이동을 거쳐 도착한 중고 판들 가운데 나만의 보물을 찾아 나서는 ‘디깅(digging)’ 족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관심은 사뭇 다르다. 코로나 19로 한 풀 꺾이기 전 ‘서울 레코드페어’와 같은 레코드 행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고, 지금도 한정반을 구하기 위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고 인터넷 예약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바이닐의 위상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다. 첫째는 감성이다. 바이닐을 통해 음악을 듣는 행위 자체가 MZ세대에게 쿨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민 없이 터치 몇 번이면 평생 들어도 모자랄 수의 노래를 추천받는 스트리밍 시대의 음악 감상은 익숙하고 건조하다. 바이닐 감상은 다르다. 오래도록 판을 고르고, 턴테이블을 세팅하고, 오디오 시스템을 만든 다음 바늘을 올리기까지의 섬세한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한번 ‘뮤직 숍’의 한 구절을 가져온다.

나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음악이 좋아요. 엘피판을 들으려면 제법 번거로운 과정이 있죠. (…) 엘피판은 반드시 손으로 들고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흠집이 나 판이 튀기도 해요. 엘피판은 세심하게 신경 써주어야 깊고 그윽한 음질로 보답하죠. (…) 삶을 축복해 주는 음악을 들으려면 기꺼이 그 정도 수고쯤은 감수해야죠.

과장 좀 보태 신세대 음악 팬들에게 바이닐 감상은 경량화된 형태로만 존재했던 음악 감상을 신성한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새로운 경험이다. 음악을 듣지 않아도 좋다. 세워두기만 하면 인테리어 소품, 인스타그램 계정을 장식할 좋은 도구가 된다. 심미적인 차원에도 타 매체에 앞선다. 제작사들도 이를 파악하여 레코드판에 색을 입힌 컬러 바이닐을 제작하고, 일반 앨범 커버와 다른 감각적인 새로운 디자인을 채택하며 음악 감상 이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보다 ‘어떻게 음악을 듣느냐’가 중요해진 시대에 LP의 강점이다.

두 번째 이유는 래플(raffle)과 리셀 문화다. 복권 혹은 응모권을 의미하던 래플은 선착순 판매 드롭(Drop) 마케팅과 반대되는 추첨식 판매 마케팅이다. 기업들은 고급 운동화 혹은 한정판 패션 아이템 구매의 기회를 응모와 추첨으로 진행하고, 당첨된 소비자들은 제품을 구매한 다음 직접 사용하거나 구매한 물건을 되파는 리셀을 선택한다. 래플 마케팅을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신발 시장에서는 신발과 재테크의 합성어인 ‘슈테크’, ‘스니커 테크’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리셀’ 문화가 일반화되어있다. 

최근 레코드판의 소비 유형도 이와 유사한 흐름을 보인다. 바이닐 레코드를 제작하는 공장의 수가 줄어들며 긴 제작 기간과 한정된 수량의 리스크를 감당해야 했는데 이것이 오히려 ‘품귀 현상’을 불러오며 희소가치를 높였다. 오래전 제작된 데다 보존 상태까지 좋은 제품이 빈티지 숍에서의 상품처럼 비싸게 거래되고, 인기 가수들은 그들의 신보를 한정판으로 제작해 일반 시장에서 구할 수 없는 제품임을 강조한다.

일련의 흐름에 힘입어 한국 엘피 시장은 작지만 탄탄한 구매층을 확보하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2016년 28만 장에 그쳤던 국내 엘피 판매량은 2019년 60만 장까지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에는 2019년 대비 73.1% 성장세를 보였다. 세월의 흐름에 사라진 공장이 다시 문을 열고, 유명 아티스트들부터 케이팝 아이돌까지 한정반부터 일반반까지 다양한 판을 발매하고 있다. 

2,000장 한정 제작된 백예린의 첫 정규 앨범 < Every letter I sent you. > 한정판이 발매와 동시에 품절됐고, 16년 만에 바이닐 판으로 재발매된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판 3천 장이 예약 판매 1분 만에 매진됐다. 이외에도 듀스의 < Deux Forever >, 이승환의 < Fall To Fly >, 김동률의 < 오래된 노래 > 등이 레코드판으로 다시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중고 거래도 만만치 않다. 일례로 유재하의 < 사랑하기 때문에 > 담배 연기 디자인의 초반 엘피는 중고 시장에서 1,000만 원에 거래된다. 아이유의 < 꽃갈피 > 미개봉 한정 LP는 중고가가 무려 200만 원이다. 

디지털의 시대 아날로그의 가치가 ‘뉴 노멀’로 자리 잡아가는 광경은 분명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의 바이닐 생산 및 소비 시장이 마냥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우선 비용 문제다. ‘음악에 돈 쓰는 것을 두려워하다니!’라 비판한다면 할 말 없다. 하지만 과거 아날로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담은 판이라면 모를까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된 음원을 마스터링만 한 최근 생산품의 가격이 5~10만 원 사이에서 형성되는 것은 의아하다. 가격이 높으면 그만큼의 품질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내부 구성이 충실한 것도 아니며 판의 만듦새도 좋지 못하다. 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높은 가격을 책정하지만 수요는 넘치고 생산은 제한되어 있으니 질적 검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백예린의 < Every letter I sent you. > 일반반과 이소라의 < 눈썹달 > 한정반의 경우 제작 불량으로 인한 음질 문제가 불거지며 제작사에서 불량판에 대한 교환을 진행해야 했다. 제작 단계부터 마스터링 과정까지의 변수가 상당한데도 가격은 언제나 높다. ‘뮤직 숍’의 주인공이 말하는 ‘깊고 그윽한 음질’을 듣기 위해 턴테이블, 스피커, 기타 장비들을 세팅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엘피 가격은 너무 비싸다. 

리셀이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가 된다. 최근 한국 바이닐 시장에는 한정반만 있을 뿐 일반반이 드물다. 신보나 재발 매반의 경우 굳이 ‘한정’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희소성을 강조한다. 물론 바이닐 수요층의 규모가 확실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생산 및 판매 방식을 진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높은 가격과 어려운 구매 과정만큼 품질도 좋아야 하는데 바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만족스러운 경우가 거의 없다. 심미성을 위해 음질이 떨어지는 컬러 바이닐을 택하고, 몇 가지 추가 구성품을 더한 것으로 높은 가격의 이유를 대신한다. 

그럼에도 대부분 한정반들은 발매와 동시에 품귀 현상을 빚으며 원래 가격의 4~5배 상당으로 중고 거래가 이루어진다. 중고 거래를 위해 판을 구입한 후 비싼 ‘플미(프리미엄)’을 붙여 판매하는 ‘리셀러’들의 횡포에 음악을 듣고 싶은 대중은 기회를 놓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중고반을 구입한다. 백예린, 김동률, 이승환 등이 중고 거래의 횡포를 지적하며 ‘리셀 금지’를 호소했지만 근본적인 마케팅과 생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양심에 호소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유명 레코드 숍 ‘김밥레코즈’는 지난 26일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청하의 < Querencia > 한정반 엘피 발매 소식에 개인 의견을 전개하며 “일반적인 커팅, 일반적인 프레싱, 그리고 특별할 것 없는 패키지인데 가격만 특별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라 주장했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한정반뿐 아니라 일반반, 디럭스 등 다양한 옵션을 제공하여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다. (< Querencia > 엘피는 기본 가격이 114,900원, 할인가 95,800원이다.)

바이닐 시장은 계속 성장할 것이다. 음악이 머천다이즈(MD)화 되는 것을 개탄하는 일부 음악 팬들의 시선도 있지만 음악 감상의 물리적 주 매체를 바이닐로 인식하고 있는 현세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악을 ‘구입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치가 있고, 그 인원의 증가는 늘어나는 판매량과 꺼지지 않는 수요로 증명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 속에서 ‘뮤직 숍’처럼 음악을 소중하게 듣고자 하는 팬들을 위한 자리가 점차 좁아지는 듯한 일말의 불안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바이닐 판을 일부 소수 마니아들의 취향, 시디나 스트리밍과 구분되는 고급 매체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소중히 용돈을 모아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소위 ‘빽판’을 구입해 밤새 턴테이블 위 돌아가는 레코드판을 바라보던 경험의 세대라면, 레트로에 열광하는 신세대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생각을 하는 대신 음악의 신비로운 경험을 보다 손쉽게 제공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음악의 진입장벽은 낮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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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도헌의 Twist And Shout Feature

경이로운 ‘소울’의 음악세계

< 소울(Soul) >이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최고 작품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음악 영화임은 분명하다.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제이미 폭스 분), 태어나지 않은 영혼 22(티나 페이 분)의 하루를 그린 이 작품은 반복되는 일상 속 삶의 가치를 다시 묻고, 모든 것의 근원으로 거슬러올라가 세계 속 개인을 곱씹게 만든다. 그 핵심 가치의 은유 도구가 음악이다. 영화는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영적인 즉흥을 거쳐, 존재 자체로 빛날 수 있는 황홀경을 향해 나아간다.

 < 인사이드 아웃 >에 이어 다시 메가폰을 잡은 감독 피트 닥터는 유년기 음악을 가르쳤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더블 베이스를 연주한 아마추어 재즈 뮤지션이었다. 자연히 재즈의 팬으로 자란 그는 제작 회의 중 우연히 누군가가 언급한 허비 행콕의 온라인 마스터클래스 영상을 시청한 후 주인공 조의 직업을 결정했다. 영상 속에서 허비 행콕은 투어 중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합동 공연을 회상하는데, 워낙 큰 무대에 긴장한 나머지 연주 중 그만 음을 틀려버렸음에도 마일스가 곧바로 흐름을 이어 즉흥으로 연주를 진행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거장의 유연한 대처 일화는 삶의 지향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 주제로 이어졌다. 조 가드너는 재즈 뮤지션이었던 아버지를 동경하며 음악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 집안의 반대와 경제적 사정에 부딪쳐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친다. 학교 밴드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조는 어린 시절 그를 매료시킨 클럽에서 밴드의 일원으로 공연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조 가드너의 아이디어, 악기, 연주, 노래가 될 아티스트로 < 소울 > 제작진은 1986년생 재즈 뮤지션 존 바티스트(Jon Batiste)를 낙점했다. 존은 젊은 나이에도 그래미 어워드 3회 노미네이트 된 실력자이며 현재 ‘더 애틀랜틱’과 뉴욕 할렘 재즈 박물관의 음악 디렉터, 미국 CBS의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 쇼 음악 감독을 맡은 대세 뮤지션이다. “영적인 장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며 조화롭고 멜로디가 살아있는, 리듬감 있는 음악”을 생각하며 존은 재즈를 기반으로 한 알앤비, 소울, 클래식 사운드트랙을 자유로이 선보였다. 

고전과 현실을 오가는 활기찬 연주가 ‘누구도 걷다가 멈추지 않는 도시’ 뉴욕의 조 가드너를 숨 쉬게 한다. 극 초반부터 화려한 연주로 재즈 클럽에서의 오디션과 들뜬 마음을 표현하더니, 중후반부부터는 ‘뉴욕 영화’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만큼 도시의 소음과 일상의 사물과 함께 일상의 경이로움을 발굴하는 데 앞장선다.

pixar soul 이미지 검색결과

허비 행콕부터 테리 린 캐링턴, 퀘스트러브 등 신을 이끄는 다양한 뮤지션들이 자문을 더하며 고전에 대한 경의도 잊지 않았다. 데이브 브루벡 쿼텟의 ‘Blue rondo a la turk’, 월터 노리스의 ‘Space maker’, 듀크 피어슨의 ‘Cristo Redentor’ 등 과거의 명곡이 사운드트랙 곳곳에서 변주된다.

“우리 밴드의 음악 연령대는 95세부터 19세까지다!”. 존 바티스트의 자랑스러운 선언대로 < 소울 >의 음악은 세대 무관이다. 올드 재즈 팬부터 신세대 베드룸 알앤비 싱어송라이터까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아지경의 세계 속 자유로이 발걸음을 옮기는 연주의 즐거움과 쾌감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자연스레 옮기는 것은 덤.

1963년 커티스 메이필드가 작곡한 임프레션스의 고전 ‘It’s all right’ 역시 존의 손 끝에서 극의 마지막을 잔잔하게 빛낸다. 정말로 ‘손 끝’이다. 실제로 영화 속 조의 연주 장면은 존의 실황을 촬영해 모션 캡처로 옮긴 결과물이니까.

그토록 바라던 재즈 밴드의 일원이 된 조. 벅찬 감정에 발 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다가 그만 하수구에 빠져 ‘태어나기 전 세상’으로 가고 만다.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을 닮은 형이상학적 존재 ‘관리자’들과 무한한 영혼들이 신비로운 풍경을 이루는 이 곳에서 음악의 문법도 빠르게 전환된다. 리얼 세션 재즈에서 영롱하고 광활한 앰비언트가 장엄한 소리의 안개를 펼친다. 

이 세계의 설계자들이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다. 음악 팬들에게는 나인 인치 네일스로 유명한 이름이다. 1994년 우드스탁 페스티벌에서 온 몸에 진흙을 뒤집어쓰고 인간의 음울과 고통을 절규하듯 토해내던 인더스트리얼 밴드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던지 이들의 참여 소식은 영화 개봉 전부터 화제였다. 정작 트렌트 레즈너는 “픽사만큼 애니메이션을 잘 만드는 곳은 없다”며 반가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21세기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는 나인 인치 네일스보다 사운드트랙 작곡가로 더욱 유명하다. < 소셜 네트워크 >, < 나를 찾아줘 >, < 버드 박스 >, < 맹크 >까지 유수의 영화 사운드트랙을 담당했고 특히 2010년 < 소셜 네트워크 >로는 2010년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검증된 아티스트다. 그럼에도 < 소울 >은 듀오의 첫 애니메이션 작업이고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과는 꽤 거리가 있는 전자 음악을 선보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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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바티스트가 즉흥의 붓질이라면 트렌트와 애티커스는 아티스트의 캔버스 같은 존재다. 장대한 가상공간 곳곳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듀오의 음악은 야심 가득하면서도 포근하며 천진한 디즈니의 성격에 정확히 부합한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부터 가상 악기, 사운드 합성을 통해 제작한 소리는 < 인사이드 아웃 >의 감정, < 토이 스토리 >의 포근한 무생물 세계와 닮았으면서도 분명히 구분된다. 사후세계 ‘머나먼 저 세상’부터 어린 영혼들을 교육하는 ‘유 세미나’까지 유연하게 찰랑이는 청각의 물결이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영화처럼 두 ‘음악 관리자’ 들의 연주도 자유로이 교차된다. 하이라이트는 가상 세계 관리자 테리(레이첼 하우스 분)가 존과 22를 뉴욕으로부터 가상 세계로 영혼을 데려갈 때다. 재즈 밴드 연주가 왜곡된 사운드 벽을 거쳐 긴박한 앰비언트 파편으로 제시되는 부분이 긴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충돌의 순간을 그린다. 친절하게도 트렌트 레즈너는 곧이어 온화한 피아노 뉴에이지로 긴장을 낮추며, 존 바티스트가 바통을 이어 화려한 고전의 세계를 전개한다. 아름다운 앙상블, 화려한 하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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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한 사운드트랙 덕에 < 소울 > 은 한 편의 영화임과 동시에 영화의 형태로 비유된 음악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은 곧 삶과 동의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 거대한 ‘불꽃’ 같은 순간을 바라며 삶을 무의미하다 비관할 수 있지만, 관리자 제리(리처드 아이오아이 분)의 말처럼 “불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고 우리에게 하여금 새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음악, 그 몰입의 과정 속 선물처럼 내려오는 아름다운 순간, 그것이 곧 삶일지니. 훌륭한 작품의 드넓은 저편에 경이로운 음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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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Twist And Shout Feature

BTS ‘다이너마이트’ 정상 데뷔의 의미

BTS(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발매 첫 주 빌보드 핫 100 (이하 싱글 차트) 1위로 데뷔했다. 그룹 최초의 1위 곡일 뿐 아니라 한국 가수 최초의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 기록이며 아시아로 범위를 넓히면 무려 57년 전 1963년 일본 가수 사카모토 큐의 ‘스키야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시아계 아티스트를 포함해도 아시아계 아티스트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의 ‘Like A G6’가 추가될 뿐이다.

‘On’을 4위,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8위, ‘IDOL’을 11위에 올렸으나 정상과는 거리가 있었던 방탄소년단은 거듭된 노크 끝에 염원하던 기록을 거머쥐게 됐다.

한국 아티스트의 종전 빌보드 차트 최고 기록은 2012년 빌보드 싱글 차트 7주 연속 2위를 기록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하지만 ‘강남스타일’의 히트와 ‘다이너마이트’의 히트는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한다.

2012년 당시에도 ‘강남스타일’의 대성공은 케이팝의 세계화처럼 묘사됐다. 그러나 ‘강남스타일’의 히트는 개인의 성공이었다. ‘강남스타일’은 해외 히트를 고려하지 않은 로컬 콘텐츠였고 어떤 철저한 기획이나 전략보다는 싸이와 유건형의 오래된 공식인 ‘즐기기 좋은 파티 튠’을 기초로 했다. 큰 고민 없는 콘텐츠가 즐겁게 소비되며 말춤과 유튜브, 셀 수 없이 많은 패러디와 함께 세계를 휩쓸었다.

비교하자면 댄스와 파티로 히트한 로스 델 리오의 ‘마카레나(Macarena)’, 바우어의 ‘할렘 셰이크(Harlem Shake)’와 유사한 경우다. 그러나 BTS의 빌보드 싱글차트 넘버원은 시스템의 성공이다. 일각에서는 ‘다이너마이트’ 가사 전체가 영어라는 점에서 이 곡을 케이팝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나 오히려 그 논쟁 지점이야말로 케이팝의 승리를 증명한다.  

“미국 프로듀서에게 받은 노래를 영어로 부른다면 그것은 이미 K팝이 아니다”라는 빅히트엔터테인먼트 방시혁 대표의 발언이 무색하게도 ‘다이너마이트’는 철저히 미국 시장을 겨냥한 소속사의 전략 하에 만들어졌다. 

장르적으로는 최근 몇 년간 다프트 펑크, 브루노 마스, 도자 캣, 해리 스타일스 등이 활약하며 팝의 유행 코드로 돌아온 디스코를 채택했고, 뮤직비디오 속엔 미국 LA 베니스 비치(Venice Beach) 농구 코트, 랜디스 도넛(Randy’s Donut)등의 장소가 등장한다. 곡은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과 인종 갈등으로 침체된 미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에너지 넘치고 밝다.

여기에 ‘다이너마이트’의 작곡가는 방탄소년단 멤버들이나 그들과 오래 호흡을 맞춰온 피독(Pdogg)이 아닌 데비드 스튜어트(David Stewart)와 제시카 아곰바르(Jessica Agombar)다. 영어 가사는 결정적이다. 가사 내용이 매끄럽다고 보긴 어려우나 당장 접근성부터 라디오 플레이까지 훨씬 친숙한 콘텐츠다.

음악 평론지 <롤링 스톤>과 인터뷰한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BTS의 미국 유통을 담당하는 콜롬비아 레코즈와의 대화를 돌아보며 “그들(BTS)은 영어 곡을 찾고 있었다(They were looking for an English single)”라 언급하기도 했다.

현재 케이팝의 가장 보편적인 작업 방식으로 세계 각지 해외 작곡가들로부터 다양한 데모 곡들을 모아 엄선하여 한국어 가사와 가창을 덧입히는 ‘송캠프’ 시스템을 들 수 있다. 이 작법을 통해 케이팝은 내수용으로 기획되면서도 글로벌 시장에도 어필할 수 있는 ‘무국적성’을 얻었다. 로컬로 소비되었으나 자연스레 글로벌의 가능성을 품고 적용하기 쉬운 콘텐츠가 된 것이다. ‘학교 시리즈’로 출발해 월드스타가 된 BTS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이너마이트’의 1위는 긴 시간 동안 무수한 결과물을 통해 노하우와 작곡 시스템, 현지 팬덤을 축적해온 케이팝 시장이 이제 마음먹고 글로벌 히트를 겨냥하면 꿈만 같던 성과도 거머쥘 수 있음을 선언한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보아 등 미국 시장 개척을 꿈꿨던 2010년대 초 케이팝 선배 그룹들 역시 영어 가사, 트렌디한 곡으로 무장했으나 당시 그들의 기반은 한국 혹은 아시아 및 라틴 아메리카 등 제3세계에 국한되어 있었다.

BTS는 그들의 노력으로 세계에 확보된 케이팝 마니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거침없는 상승세를 이어갔고 ‘다이너마이트’로 미국 내 팬덤을 총결집하여 기록을 세웠다.

‘강남스타일’은 모두가 따라 부른 노래였다. 남녀노소, 인종, 국적 가릴 것 없이 ‘오빤 강남스타일’을 외치고 말춤을 췄다. 반면 ‘다이너마이트’는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랐으나 아직까지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곡이라 확언하기는 어렵다. 이는 BTS의 성공 동력 및 대중이 차트를 바라보는 시선이 기존 해석과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 음악 산업에 ‘팬덤 중심 소비’의 힘을 과시한 대표 사례로 남을 전망이다.

케이팝 그룹의 히트는 팬덤 중심의 소비에 기초한다. 가요계에서 어떤 아이돌 그룹이 컴백하면 그 팀의 팬덤 역시 분주해진다. 이들은 음원 발매와 동시에 스트리밍을 집중해 차트 정상을 노리는 ‘스밍 총공(스트리밍 총 공격)’, 앨범 사전 예약 구매, 음악 프로그램 문자 투표 등 다양한 형태의 소비 전략으로 지지하는 가수에게 가시적인 성과를 안겨준다. 때문에 팬덤의 규모 및 조직은 그 케이팝 그룹의 인기 척도를 보여준다.

BTS의 1위 기록 역시 그들의 굳건한 팬덤 아미(A.R.M.Y) 중심 소비 결과다. 일찍이 싱글 공개 전부터 이들은 SNS를 통해 조직적으로 ‘다이너마이트’의 빌보드 히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공유해왔다. ‘다이너마이트 서바이벌 키트(Dynamite Survival Kit)’를 작성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위한 스트리밍 방법을 공유한 ‘BTS 온 빌보드(BTS on Billboard)’ 계정, 돈이 없어 스트리밍을 하지 못하는 팬들을 위해 크라우드펀딩을 운영한 ‘펀즈 포 방탄(fundsforbangtan)’ 계정 등 그 방법도 기상천외하다.

성원은 어마어마한 수치로 증명된다. 음원 공개 첫날 777만 회 스트리밍을 기록하며 올해 최고 기록을 세운 ‘다이너마이트’는 9월 첫주 차 빌보드 차트에서 첫 주 총 3,390만 회 스트리밍 횟수와 총 26만 5천 건의 음원 다운로드 건수로 정상에 올랐다.

한국 가수 최초로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Spotify) ‘글로벌 톱 50’ 차트 1위에 올랐고 유튜브 조회수 역시 하루 만에 1억 뷰를 넘겼다. 음원 다운로드의 경우 2017년 스트리밍 업체에 음원을 제공하지 않았던 팝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Look What You Made Me Do’ 이후 최고 기록이다.

관건은 ‘라디오 에어플레이’ 차트다. 음원 판매량 및 스트리밍, 유튜브 조회수와 더불어 빌보드 차트 집계를 이루는 3대 축이다. 지금까지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곡은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주로 선곡되지 못해 차트에서 부진하여 첫 주 좋은 성과를 거두고도 큰 폭의 하락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역시 팬덤의 적극적인 참여가 동원되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2016년부터 팬들은 ‘BTSX50스테이트(BTSX50states)’라는 계정을 만들어 미국 각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BTS의 음악을 알리고 요청하는 자체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해온 바 있다. 그럼에도 성과가 높지 못했는데, 이번 ‘다이너마이트’의 경우 미국 콜롬비아 레코드의 홍보 총괄 인원들까지 미리 방송국에 사전 홍보를 진행하여 에어플레이 차트에서도 최고 기록인 30위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순위를 유지하여 ‘다이너마이트’가 다음 주 빌보드 차트에서도 유의미한 성과를 기록한다면 그때부터 BTS의 노래가 미국 내에 안정적으로,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이너마이트’ 성공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 번째는 차트에 대한 인식이 ‘히트곡의 상징’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 일반 대중에게는 ‘관심의 척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기존 국내 팬덤과 같은 열성적인 BTS 팬덤이 미국에서도 상당수의 거대한 규모로 자리 잡아 빌보드 차트에 영향을 미칠 정도까지 성장했다는 점이다.

과거 빌보드 싱글 차트는 말 그대로 미국을 대표하는 히트곡 모음이었다. 음악 애호가들은 매주 빌보드 잡지를 뒤지고 순위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흐름을 확인했고, 차트 관련 기록을 줄줄이 외우고 확인하는 것은 음악 지식의 척도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중음악이 스트리밍 중심으로 완전히 개편된 2010년대 중후반부터 빌보드 차트는 과거만큼 전세대를 아우르지 못한다. 나날이 축소되는 음반 판매량은 이제 집계 대상에서도 제외됐고 그 자리는 스트리밍, 유튜브 조회 등 신세대의 새로운 소비 방식이 메꿨다. 이제 빌보드 차트는 ‘유행가’, ‘인기곡’보다는 아티스트의 유명세, 인터넷 상 유행, 팬덤의 조직적인 소비를 통해 보이는 흐름으로 해석해야 한다.

팬들은 차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기뻐합니다. 그들은 음악 업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 누가 인기 있는지 알기 위해, 그리고 새로운 아티스트 및 음악적 발견에 도움을 얻기 위해 빌보드 차트를 확인합니다.

– 실비오 피에트로롱고(Silvio Pietroluongo), 빌보드 부사장 –

현재 유명 팝 스타들도 상품, 콘서트 티켓에 앨범을 끼워 파는 ‘번들’을 적극 활용하고 SNS 상 홍보를 가속화하며 그들의 팬덤을 독려하고 있다. 물론 이는 기존의 정상적인 소비 행태와 거리가 있다. 이에 과도한 쏠림현상을 막기 위해 빌보드는 지난 7월 번들 판매 집계를 제한하고 엄격화하는 개편안을 제시했지만, 이런 팬덤 및 집단 단위 소비가 하나의 흐름이 되어버린 것을 부정할 순 없다.

차트에서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장르 힙합, 라틴 팝 역시 미국 내 굳건한 블랙, 히스패닉 커뮤니티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 이제 케이팝 역시 무시할 수 없는 규모를 구축했다. 인종을 아우르고 조직적인 결집과 행동으로 무장하여 성소수자, 다인종 등 비주류의 목소리를 담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의미한 성과를 내고 있다.

미국 시장, 더 나아가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올해 들어 국내에서 소비되던 케이팝이 수출되는 과정에서 블랙페이스, 종교, 인종주의 등 차별과 관련된 논쟁이 숱하게 목격됐다. 철저한 팬덤 기반의 소비 시스템이고 그 지지자들은 소수자들인 경우가 대부분인 케이팝이기에 지금까지 한국에서 둔감하게 생각했던 문제라도 향후 기획에선 신중을 가해야 한다.

글로벌 성공의 빛 아래 가려진 케이팝 내부의 열악한 인권 현실과 육성 시스템, 낙후된 환경도 공론화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특히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BTS의 성공과 동시에 현재 엠넷과 함께 진행 중인 오디션 프로그램 <아이랜드>로 받은 비판, 슈가의 ‘어떻게 생각해’를 두고 둘러싼 논란을 새겨야 한다.

BTS의 ‘다이너마이트’ 빌보드 넘버원은 향후 케이팝 시장의 이정표로 자리할 사건이다. 이 성과를 발판 삼아 신 전체가 보다 정교하고 입체적인 방법으로 세계의 흐름과 발맞추는 명민한 전략이 요구된다. ‘한국 최초의 빌보드 넘버원’이 단순 사건에 그치지 않고 더욱 그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정정합니다]
7번째 문단의 ‘뮤직비디오 촬영’ 부분에서 ‘~미국에서 촬영됐다’는 잘못된 내용이 있었습니다. ‘다이너마이트’의 뮤직비디오는 미국 LA 베니스 비치에서 촬영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정하여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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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Twist And Shout Feature

싹쓰리의 불길한 독점 선언

MBC 예능 프로그램 < 놀면 뭐하니? >의 프로젝트 그룹 이름이 한 시청자의 의견 ‘싹쓰리’로 결정된 것은 불길한 신호였다. 그 뜻대로 싹쓰리의 음악은 올해 여름을 완전히 지배했다. 7월 11일 듀스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여름 안에서’, 4주 연속 가온차트 디지털 차트, 스트리밍 차트 1위에 올라있는 ‘다시 여기 바닷가’가 8월 말로 향해가는 현재도 각종 음원 차트 상위권에 올라있다. 

끝이 아니다. 후속 싱글 ’그 여름을 틀어줘’ 역시 인기 절정이고 멤버들의 개인 곡 ‘듀리쥬와’, ‘Linda’, ‘신난다’ 까지 차트 상위권에서 연전연승 중이다. 기세를 이어 이효리, 엄정화, 제시, 화사로 구성된 여성 그룹 ‘환불원정대’를 예고하는 내용까지 방송을 탔다. 8월 21일 방탄소년단이 신곡 ‘Dynamite’로 돌아오기 전까지 가요계 그 누구도 싹쓰리의 아성에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부 관계자들은 싹쓰리의 성공에서 음악계의 위기를 토로한다. 하지만 재미로 만든 기획, 음원 수익을 모두 기부하는 선한 영향력, 자연스러운 선택이라며 일련의 주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그런데 싹쓰리는 잘되지 않기가 더 어려운 기획이다. 대중의 선택은 맞으나 그 과정이 자연스럽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 최정상 엔터테이너 유재석, < 효리네 민박 >, < 캠핑클럽 > 등 예능 프로그램으로 ‘제주댁’으로의 이미지를 굳힌 이효리, 음악으로도 영화로도 연전연패하다 유튜브에서 ‘깡’이 유행하며 기사회생한 비가 모였다. 멤버들은 유명 댄스팀 나나스쿨에게 안무를 전수받고 BTS의 주요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온 룸펜스(최용석)이 ‘다시 여기 바닷가’의 감독을 맡는다. 이 과정이 매주 시청자들과 유튜브 영상 클립을 통해 끊임없이 전달된다. 그 목적은 명확히 실패 없는 데뷔를 겨냥하고 있다. 

< 놀면 뭐하니? >의 김태호 PD는 이미 <무한도전> 시절 가요제, ‘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요다)’ 특집을 성공시키며 예능의 음악 침투가 성공적인 전략임을 입증한 바 있다. 싹쓰리 전에도 이 프로그램은 세종문화회관을 통째로 빌린 ‘방구석 콘서트’를 열었고 트로트 신인 가수 ‘유산슬’을 화제로 만들었다. 뉴미디어의 선전에 밀려 2년 연속 수천억 대 적자에 시달리는 방송국에게 김태호 PD의 음악 기획, 차트 독점은 회심의 한 수이며 그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장 간편하고도 안전한 방법이다. 

싹쓰리 기획이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현 주류 문화 소비층의 성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다시 여기 바닷가’와 싹쓰리의 성공은 곧 음악계의 실패를 뜻한다. 첫 번째는 노래로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져서고, 두 번째는 그 ‘재미로 만든 기획’조차 인기곡 자리에서 밀어낼 수 없는 가요계의 허약한 현실 때문이다. 

< 놀면 뭐하니 >는 방송을 통해 린다G(이효리)’, ‘유두래곤’, ‘비룡(비)’가 뮤지션들과 함께 작사와 작곡, 프로듀싱 과정에 참여하는 장면을 보여주지만 냉정히 그 곡들은 완성도가 높지 않다. 숱하게 리메이크된 듀스의 ‘여름 안에서’ 리메이크부터 전혀 새로운 부분이 없다. 이상순이 곡을 만들고 지코가 노랫말에 참여한 ‘다시 여기 바닷가’에서 세 멤버들은 젊은 감각의 가사와 복고적인 멜로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1990년대 가요를 ‘연기’하고 있다. 베테랑들의 모임이라 칭하기엔 그만한 관록도 실력도 없다. 

신우상의 원곡을 개성 없이 리메이크한 ‘두리쥬와’에서 유두래곤과 S.B.N(광희)의 보컬 역시 전혀 감흥을 주지 못한다. 코드 쿤스트의 감각적인 비트와 신예 가수 드비타(DeVita)의 백그라운드 보컬 위 린다의 가창은 윤미래의 힘 있는 랩과 비교되어 더욱 맥이 빠진다. 비룡의 ‘신난다’ 정도가 그나마 들어볼 만한 트랙이나 게스트로 참여한 마마무의 존재가 곡의 주인공을 압도한다. 

이런 노래들이 예능 프로그램과 유명세에 힘입어 차트를 지배하는 동안 가요계 어떤 노래도 이들의 상승세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박문치, 블루, 기린 등의 아티스트들이 방송의 수혜를 입었고 실제로도 ‘Downtown baby’ 같은 곡은 살아남았지만 대다수가 잠깐 언급되는 데서 그쳤다. 

싹쓰리에 싹 쓸려버린 가요계의 현실은 어둡다. 이들의 기획에 새로움이나 혁신, 음악에 대한 고민은 없다. 노스탤지어 유행을 포착해 말 그대로 재미와 시청률을 목표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과거 문법과 방송이 2020년 음악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미 음악은 새로운 무언가를 내놓을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코로나 시대 고민 없고 밝은 콘텐츠가 인기라 해도 흥미 이면의 진지한 고민까지 희석해서는 곤란하다. 음악계는 ‘올여름을 싹 쓸어버리겠다’며 등장한 싹쓰리와 < 놀면 뭐하니? >의 선언에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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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헌의 Twist And Shout Feature

실시간 차트 시대를 돌아보며

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2020년 7월 6일부로 음원 서비스 멜론의 ‘실시간 차트’는 ‘24Hits’라는 새 이름으로 운영된다.

한 시간 단위로 차트 추이를 업데이트하며 순위를 표기하던 지금까지의 방식을 폐기하고, 24시간 동안 이용량 중 스트리밍 40%와 다운로드 60%를 반영해 순위 표기 없이 인기곡을 소개하겠다는 취지다. 또한 이용자 개인의 청취 습관을 기반으로 인기곡을 나열하는 ‘My 24Hits’라는 차트를 추가 공개하며 음원 ‘개인화’ 흐름에 동참하는 모습도 보였다.

멜론이 실시간 차트를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신력 있는 차트 없이 침체되어가던 가요계에서 멜론의 실시간 차트 서비스는 음악을 소비하는 방식 자체를 새로이 규정했다. 2004년 SK텔레콤 산하 사업으로 출발한 멜론은 2010년에 이미 유료 가입자 120만 명을 확보한 상황이었고, 디지털 음원 시장의 절대 강자로 입지를 굳히게 되자 자연스레 뉴 노멀(New-Normal)의 권력을 쥐게 됐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가 열렸다.


 100위권 외 음악은 음악이 아니었다.

멜론차트>멜론 TOP 100>실시간>멜론

돌이켜보면 이보다도 편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던 시대가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실시간 차트 위 ‘전체 재생’을 누르기만 하면 당대 제일 유행하는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이용권을 구매하지 않아도 불법 파일 공유 사이트에는 ‘멜론 ㅁ월 ㅁ주차 차트 100위’ 파일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용권 가격이 저렴했음은 물론이다.

유튜브가 활성화된 이후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멜론둥이’, ‘멜론총각’ 같은 유명 유튜버들이 1시간 이상의 공짜 플레이리스트를 업로드한다. 개인에게도, 배경음악을 찾는 업장에게도 제격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에 음악은 딱 100곡만 존재하게 됐다. 발매와 동시에 차트에 진입하지 못하면 그 곡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망각의 쓰레기 더미’처럼 영영 잊혀갔다. 이용자층이 많지 않았을 때는 잠잠했지만 실시간 차트가 한국 유행가의 척도가 된 후에는 모두가 차트 진입에 사활을 걸었다. 베테랑 가수 휘성의 2014년 곡 ‘돈 벌어야 돼’ 속 가사가 정확히 그 시대를 기록한다. ‘연두 과일나무 정상에 한번 걸려야 돼 / Music makes me cry…

간혹 ‘빙봉의 로켓 수레’처럼 망각의 틈에서 솟아오르는 노래도 있었다. 미디어의 영향도 있었고 기타 이슈도 있었지만 이 고난의 서사에 대중은 ‘역주행’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플랫폼도 이를 부추겼다. ‘차트 밖 1위’라는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 100위권 안으로 진입한 노래를 친히 구제하며,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노래들에 고난의 서사를 부여했다. 100위 안에 들지 못하는 노래는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수많은 노래 중 딱 100곡 만을 강요받았다. 

부추기기

GD-SUPPORTERS trên Twitter: "현재 멜론 차트 #LOSER vs #BAEABE ...

오직 100등까지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시스템 안에서 경쟁은 과열됐다. 2010년대 중반까지 ‘차트 줄 세우기’는 일상이었다. 음원 공개되는 자정만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아이돌 팬덤들이 ‘총공’이라는 이름 아래 전쟁을 벌였다. 

‘숨밍(숨 쉬듯이 스트리밍)’이라는 새 시대의 언어 아래 팬들은 가족, 친구들의 휴대전화를 빌려 스트리밍 앱을 켜고 자신이 응원하는 그룹의 노래를 들었다. 그렇게 달성한 차트 1위, 그 아래 차례대로 늘어진 노래들은 결국 우리가 승리했다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멜론은 실시간 차트의 경쟁을 부추겼다. 5분 단위로 실시간 차트 변동 추이를 생중계하고 24시간 누적 이용자 수를 전시하며 인기 순위를 마치 거대한 경마장으로 만들었다. ‘경합’, ‘차트 지붕킥’ 등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며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성토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100위 권 안에만 들면, 상위권에만 안착하면 보장되고 확장되는 성공 앞에선 공염불이었다. 오히려 왜곡된 시스템에서 비판받는 이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주체가 아니라 팬들과 이용자들이었다.

음원 사재기가 가져온 최후의 날

음원 사재기: 왜 내가 모르는 가수가 1위를 하는거지? - BBC News 코리아

자연히 어두운 손길이 다가왔다. 이미 2013년부터 음원 사재기, 차트 조작에 대한 논란이 꾸준히 제기됐다.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까지 돈을 챙긴 브로커들이 유령 계정을 생성하고 대포폰을 사들여 ‘작업장’을 차려놓고 차트 진입을 사고 판다는 제보였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페이스북 페이지, 유튜브 채널 등을 활용한 ‘바이럴 마케팅’이 극성이었다. 발표한 지 몇 개월이 지난,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 가수의 노래가 아이돌 그룹 및 유명 가수들을 제치고 갑작스레 반등하며 차트 상위권에 안착했다. 

논란의 중심이 된 아티스트들, ‘마케팅 업체’라 주장하는 소속사들, 멜론을 운영하는 카카오 M, 문화체육관광부 모두 음원 사재기 의혹을 부정하거나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해당 음원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음원 사재기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답변이 최선이었다.

100위권 진입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하던 팬덤도, 공정을 화두로 삼고 있는 대중도 분노했다. 그리고 이들 ‘기계 픽(음원 사재기 논란에 휩싸인 곡들의 멸칭)’은 공고할 것 같았던 실시간 차트의 근간을 뿌리부터 흔들기 시작했다. 차트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신뢰를 잃어버린 플랫폼들은 결국 대규모 개편을 택했다. 2010년대 말부터 디지털 시장의 패권을 유튜브로 빼앗긴 것 역시 버틸 힘을 잃게 했다. 2019년 1월 네이버 바이브가 실시간 차트를 일간 차트로 변경해 제공한 후 실시간 차트 폐지를 선언한 SK텔레콤의 FLO가 뒤를 이었다. 바이브는 이용자 중심의 새 정산 방식(VPS)까지 발표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했다. 결국 가장 큰 지분을 쥐고 있던 멜론 역시 ‘실시간 차트’의 간판을 바꿔 달았다. 

‘개인화’, ‘공정’ 외치기 전에

그러나 정말 이게 변화일까. 개혁을 선언하며 새로 만들어진 차트들 역시 예전 실시간 차트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24Hits 차트만 보더라도 노래 제목 옆 번호만 없어졌을 뿐 한 시간 단위로 순위를 업데이트하고 나열하는 것은 그대로다. 최상위권의 변동폭은 여전히 좁고, 인기 가수들을 제외한 음악인들에게 100위권 진입은 더욱 어려워졌다.

물론 개편 후 특정 곡이 급격한 성장세를 보인다거나 오래도록 차트에 머무르는 빈도가 줄어드는 등의 긍정적인 모습도 목격된다. 하지만 팬덤은 여전히 ‘숨듣’, ‘총공’을 종용하고 각종 차트 분석 사이트들에선 여전히 ‘지붕킥’, ‘종합 이용자수’, ‘추이 그래프’ 등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된다. 여기에 개인화나 큐레이션은 없다.

스트리밍이 절대적인 국내 청취 시장에서 음원 다운로드 비중을 60%나 반영하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사재기와 줄 세우기에 대한 우려가 생긴다. 사재기 의혹과 아티스트 수익 배분 문제 어느 하나 시원하게 해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개운치 않은 지표다.

개인화를 외치며 난세를 타개하고자 하는 한국 스트리밍 음악 세계지만 언제나 그들의 세계는 100곡이 기준이다. 사재기 논란이 대적으로 점화되지 않았다면, 유튜브, 스포티파이 등 해외 플랫폼의 기세가 거세지 않았다면 애초에 변화를 시도했을지조차 회의적이다. 셀 수 없이 매년 많은 이들이 공신력 있는 대표 차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하지만 ‘실시간 차트’ 생태계에선 공정보다 수익이 먼저기에 가능성이 없다. 

공정한 음악, 정당한 차트를 외치기 앞서 플랫폼들은 실시간 차트를 생태계 표준으로 만들어버린 도의적 책임부터 지녀야 한다. 실시간 차트의 시대를 살며 음악은 경마장의 말, 사업 아이템, 수익 모델에 더 가까워졌다. 저작권료 횡령 등 그간의 범죄까지 언급하자면 그 해악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대중은 진정한 변화, 공정한 순위를 바란다. 눈 가리고 아웅 앞엔 도태만이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