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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 인터뷰

서귀포의 해안가를 달리는 길, 직접 선곡한 ‘다시 시작해’는 깐깐한 음악 취향의 여동생을 사로잡았다. 곡에 푹 빠진 동생은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차에서 ‘다시 시작해’를 재생했고, 저녁놀 물들어가는 해안선을 바라보며 각자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음악이 펼친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김광민, 한충완, 한상원과 함께 버클리 음대에서 수학한 유학 1세대 싱어송라이터 정원영은 ‘가버린 날들’과 ‘다시 시작해’, ‘그냥’처럼 세련된 ‘웰메이드 가요’로 마니아를 모았다. 쉼과 석기시대, 사랑과 평화 등 다양한 밴드에서의 경험과 미국 유학의 합작품이었다. 이적, 정재일, 한상원과 함께한 슈퍼그룹 긱스에서 펑키(Funky)한 연주를 들려줬고, 피아노 중심의 솔로 앨범과 정원영 밴드의 풍성한 사운드를 함께 꾸려가고 있다.

최근 정규 2집 < Mr. Moonlight >를 엘피로 발매한 그는 1집 < 가버린 날들 >의 엘피 리이슈와 3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이다. 오랜 시간 교육자로서 후배 뮤지션을 양성하고 그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펼쳐나가는 정원영은 ‘훌륭한 제자들을 만나 음악 인생이 달라졌다’라며 행복감을 표했다.

근황은 어떠한가?
호원대 실용음악 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CJ문화재단의 뮤지션 지원 프로그램인 ‘튠업’도 준비하고 있다. 2022년 1월 1일에 ‘당분간 음악을 하지 말자’고 결심했지만, 이런저런 음악 관련 일이 생겨나 음악 안식년이 불가피하게 틀어졌다.

음악을 접한 계기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냇 킹 콜과 앤디 윌리엄스 같은 아버지 취향의 음반과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클래시컬 뮤직 음반을 자연스레 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직접 음반을 구매하기도 했고 가끔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를 피아노로 치며 놀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3년간 배운 피아노는 체르니 30번에서 멈췄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과 스쿨 밴드를 만들기도 했다.

송홍섭, 배수연과 함께 밴드 석기시대로 활동했다. 석기시대로 음반도 발매했는가?
그렇지 않다. 원래 석기시대는 송창식 선배가 백업밴드로 조직한 거로 알고 있다. 건반 이호준, 드럼 배수연이 있었고 고3 때 이장희 선배가 스카우트한 나도 이 멤버들과 함께 연주했지만, 음반을 발매한 건 아니다.

쉼의 1980년 작 < 어디서든 >은 컬트 명작으로 꼽힌다.
음악을 취미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이장희 선배를 만나고 나서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코드나 화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각종 신시사이저 층위를 분리하는 현 체계와 달리 모든 건반 사운드를 한 번에 녹음했다. 키보드 솔로도 어부지리로 했고 경험 없는 보컬까지 맡았다. 여러 측면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많이 묻어나온 음반이다.

쉼의 기타리스트 김양일과의 만남은?
김양일은 내가 조우한 ‘첫 번째 천재’다. 당시 녹음하던 스튜디오에 서울대학교 밴드가 왔고 김양일 혼자 딥 퍼플의 ‘Burn’의 기타와 건반 드럼을 연주했다. 경악 그 자체였고 이장희가 음반 제안을 했을 때 바로 김양일을 떠올렸다. 그와 동갑인 들국화 최성원과 전인권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이장희는 쉼과 사랑과 평화 두 팀을 제작했다. 이장희와의 대화 끝에 사랑과 평화의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했다. 쉼은 자연스레 해산했다. 베이시스트 배희수는 ‘연안부두’와 ‘그대와 안녕히’의 김트리오로 갔고 김양일은 김태화와 김현식의 세션 연주를 했다.

사랑과 평화의 음반 크레딧에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사랑과 평화에 내부 문제가 생겨 팀이 깨졌다. 기존 멤버들이 나간 상태에서 리더 최이철 선배의 제안으로 밴드에 가입해 1년 정도 활동했다. 앨범 녹음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82년 사랑과평화 < 넋나래 > 음반에 쉼 시절 ‘그대 두손 잡아주’가 최이철 선배 편곡으로 수록되어 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과의 인연은?
제대하고 조용필 선배가 전국투어 세션으로 참여할 것을 제안하셨다. 당시 유학 준비 중이라 활동이 길진 않았다. 대전 공연 종료 후 미국 간다고 말씀드렸다. 1983년 무렵이다.

1989년 한경애 < 눈물 속에 피는 꽃 > 사이드 B에서 김양일과 정원영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84년에 미국으로 떠났고 1990년 귀국했다. 7년간 한 번도 한국에 온 적이 없다. 따라서 그 음반을 알 수 없다. 나중에 음반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으나 당시엔 아무것도 들은 바 없다.

1, 2집에서 ‘가버린 날들’, ‘다시 시작해’ 같은 곡들이 사랑받았다. 당시 음악적 방향성이 궁금하다.
송홍섭 선배가 자신의 음반에 곡을 써주겠냐고 물어왔다. 그 덕에 유학 후 한동안 멈췄던 음악을 재개했다. 박정운과 한영애 선배에게 곡을 줬고 세션으로도 참여했다. 자연스레 독집 제작에도 착수했고 1년 정도 ‘이런 곡 스타일이면 한국에서 발매할 수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만든 게 정규 1집 < 가버린 날들 >이다.’ 버클리 유학 때 만들었던 연주곡들이 한국 가요계 실정과 맞지 않다고 여겨졌다.

왜 가요계 실정과 맞지 않다고 여겼는가?
당시 가요계에 서태지와 신승훈, 김건모가 인기 있었다. 그들과 경쟁하는 게 쉽지 않다고 느꼈지만, 기획 및 준비 단계를 마친 상황이었기에 그대로 1집을 발매했다. 2집과 3집은 개인적 음악 성향과 대중성을 조율했다. 타협점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은 게 2003년에 발표한 4집 < Are You Happy? >이며 개인적으론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버클리 시절 만든 곡은 차후에도 발매되지 않은 건가?
딱 1곡 발매되었다. 정규 3집 < 영미Robinson >의 수록곡 ‘검은 입 속에서 하루’다. 버클리에서 만든 펑키(Funky)하고 리드미컬한 퓨전 재즈풍 곡을 국내 발매를 시대착오로 여겼다. 직접 랩을 한 곡도 있었다.

< 영미Robinson >에서 봄여름가을겨울 김종진과 더불어 이적의 코러스가 있다. 긱스 이전 1997년~1998년부터 교류가 있던 것인가?
삐삐밴드 공연에서 처음 만났다. 그 이후로 음악과 문학(프란츠 카프카) 등 다양한 취향을 공유했다. 서로에게 긍정적 영향을 줬다.

강호정, 이상민, 정재일과 한상원에 이적까지. 긱스는 당대 슈퍼밴드로 유명했다. 어떻게 결성된 것인가?
이상민과 정재일은 이미 서울재즈아카데미에서 신동으로 알려져 있었다. 서울예대에서 강의를 시작한 강호정과 막 2집 < Funky Station >(1998)이 나온 한상원이 두 신동과 연습 중이었다. 마지막 자리에 내가 들어갔다. 원래는 보컬이 세 명이었지만 종래에 이적 단독 보컬로 변경되었다.

수요예술무대 ‘노올자’ 무대를 보면 모든 멤버와 더불어 건반 연주가 화끈하다. 섬세한 이미지와 상반된다.
태생이 밴드다. 어렸을 때부터 레드 제플린 같은 록밴드를 사랑했고 ‘노래한다, 앨범을 낸다’라는 생각보다 ‘밴드를 한다’라는 생각이 더 확고했다. 그렇다 보니 곡을 써도 대부분 밴드 풍이다. 일단 곡을 쓴 후 곡 성향에 따라 정원영 밴드와 독주 중심의 솔로 음반 중 어디에 수록할지 결정한다.

‘짝사랑’과 ‘랄랄라’ 같은 곡들로 사랑받은 긱스 활동은 정규 2집으로 마무리되었다. 긱스에 대한 소회를 공유한다면?
활동 기간에 만족한다. 좋은 친구들과 음반을 두 장이나 냈고 공연도 많이 해 미련이 없다.

1990년대 말인 정통 펑크라기보다는 하이브리드 성향이 강했다. 음악적 아이디는 어떻게 모았나?
곡은 각자 써왔다. 일반적으론 몇 차례 합주를 통해 편곡 방향성이 나왔고, ‘Tripping now…’나 ‘탈주’, ‘새’처럼 프로그래밍을 고민해봐야 하는 곡들은 강호정과 정재일이 미디로 작업했다.

솔로 피아노 연주 음반과 정원영 밴드의 이원화는 계속되는가?
그렇다. 밴드 편성의 공연을 좋아한다. 올해로 1집이 나온 지 30년이 되었고 그에 관련한 공연을 몇 차례 할 것 같다. 그 공연들은 정원영 밴드의 포맷으로 갈 계획이다.

2015년 인터뷰에선 본인의 음악을 록으로 규정했다. 근원적 음악 취향 혹은 태도 측면에서 그러한가?
록, 퓨전 재즈라기보다 그냥 하고 싶은 음악을 한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버클리에서 수학한 화성학적 요소를 곡에 투영하다 보니 자연스레 재즈적 텍스쳐가 묻어났다. 퓨전 재즈의 이미지가 형성된 것도 거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취향은 영미권 퓨전 재즈보다 상기한 레드 제플린같은 클래식 록에 가깝다. 허비 핸콕이나 데이비드 보위 같은 거장도 1980년대엔 뉴웨이브 풍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한 시대적 맥락을 이해하지만 신시사이저 기반의 음향을 선호하지 않는다. 영향력이 긴 조류라고 보긴 어렵다.

특히 좋아하는 건반 사운드가 있는가? KBS 가요톱10 무대의 ‘다시 시작해’에서 카시오 키타를 들고 나왔고, ‘Rockit’의 허비 핸콕이 연상되었다.
대부분 좋아한다. 1970~80년대 소울/펑크(Funk) 음악에 요긴하게 쓰였던 클라비넷과 허비 핸콕과 도어즈 레이 만자렉이 즐겨 사용했던 펜더 로즈, 미니무그 등 대부분 좋아한다. 가요톱10 무대에선 음악방송에서 노래하는 것에 익숙치 않아서 악기 하나라도 들고 싶었다. 방송사에 요청해서 받은게 키타였다.

일레인을 비롯해 후배와 협업이 잦다.
계획에 없던 학교에 들어가게 되어 많은 좋은 재능을 만났다. 지금 정원영밴드도 가르쳤던 학생들과 함께하고 있다. 장기하와 이적, 김동률이 세션을 구할 때 제자들을 추천했다. 전문 연주인이 아니다보니 합을 맞추는 데 있어 미숙하지만 일정 시간이 수반된다면 외려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 수 있을거라고 설득했다. 호윤, 양시온, 밴드 메이트의 기타리스트 임헌일이 그런 케이스다.

다작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꾸준하게 음악을 했다. 그래서 원래 음악을 계획적으로 하는 편인가?
어렸을 때부터 곡 쓰는걸 참 좋아했고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에게 늘 ‘이런 곡을 이런 식으로 해보면 어떨까요?’ 제안했다. 지금도 일정 곡이 모이면 녹음 일정을 잡는다.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현시점에서 앨범 제작이 비용적으로 만만치 않지만 그저 음악 작업을 좋아하기에 꾸준히 음반을 내는 것이다.

삼십년간 음악 만드는 과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 같다.
최근 앨범 작업을 위해 미디를 배웠다. 1990년대에는 송홍섭 선배의 AKAI 마스터 키보드로 작업했고 그 사이 많은 발전을 거쳐 현재의 DAW 프로그램에 이르게 되었다. DAW 중 하나인 로직을 배웠다. 라이브 연주로 녹음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미디로 작업한 리듬 트랙 위에 선율을 얹고 싶었다. 그 전까진 대부분 실제 악기로 편곡했다.

지난 인터뷰에서 스틸리 댄과 에릭 클랩튼,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추천했다. 2023년 시점에서 청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음악은?
최근에 재즈 피아니스트 브레드 멜다우가 < Your Mother Should Know >라는 음반을 발매했다. 데이비드 보위의 ‘Life on mars?’ 제외하곤 모두 비틀스의 음악을 커버했다. 타이틀 곡을 비롯 ‘Baby’s in black’과 ‘She said she said’ 등 비교적 덜 알려진 고른 점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멜다우의 커다란 팬은 아니지만 이번 음반과 라디오헤드의 ‘Exit music’과 폴 사이먼의 ‘Still crazy after all the years’ 리메이크가 인상적이었다. 기본적으로 유러피언/클래시컬 뮤직의 어프로치를 가져가지만 인터뷰에서 재즈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적 뿌리를 인정하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역시 비틀스다. 브래드 멜다우의 신보를 통해 다시금 비틀스의 위대함을 인식했다. 잡다한 부가 요소를 걷어낸 채 멜로디와 코드의 직관적 아름다움을 품은 곡들 말이다. 음악인들에게 메세지를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비틀스를 깊게 연구한 것 같다.
굉장히 많이 들었다. 이찬영이란 친구가 있는데 그를 만난 게 음악 인생의 전환점이다. 그 친구 덕에 굉장히 다양한 음악을 들었다. 어렸을 적 내가 그보다 음반 구매도 먼저 시작했고 더 다채로운 음악적 지식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실상은 그 친구가 한참 위였다. 음악을 접하는 환경이 그 친구 쪽이 훨씬 나았다. 그가 직접 원판을 구해준 적도 많고 비틀스의 명작에서 건반을 연주했던 빌리 프레스턴과 폴 사이먼의 ‘Run that body down’ 같은 좋은 곡들을 녹음해 주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그에게 바치는 곡이 < Table Setters >에 수록된 2018년 곡 ‘친구에게’다.

며칠 전에 정규 2집 < Mr. Moonlight >의 엘피 발매가 이뤄졌다.
아직 실물로 보지 못했다. 음악 평론가 정원석 씨로부터 2집의 엘피 발매 제안이 왔다. 어느 레이블에서 1집 리이슈 제안도 와서 가을쯤 낼 것 같다. 개인적으론 4집 < Are You Happy? >를 엘피로 발매하고 싶다.

최근 십여년간 시티팝 조류가 거셌다. 정원영 솔로 초기작은 일본 시티팝 보단 영미권 퓨전 재즈에 가까워 보이나 누군가 자신의 작품에 시티팝 호칭을 붙인다면?
퓨전 재즈와 시티 팝. 다 이름붙이기 나름인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어렸을 때부터 음악 취향은 록에 가까웠고 퓨전 재즈 곡들은 비교적 나중에 접했다. 따라서 음악을 만들 때 그런 스타일을 염두해두고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Dugout’, < Table Setters >, < 우중간 밀어치기 > 등 야구 내용이 많다. ‘도레미송’에 “내일 선발투수 누구”란 구절도 나온다.
유학할 때 농구랑 소프트 볼을 했다. 보스턴에 있다보니 보스턴 레드삭스와 보스턴 셀틱스를 응원했다. 야구 광팬이다 보니 음악 소재로 자주 쓰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재즈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 조니 미첼, 허비 핸콕과 함께한 사진을 봤다.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매년 주는 명예박사학위의 2022년 학위 수여자가 조니 미첼이었다. 그 행사에 초청받았고 조니 미첼 옆에 웨인 쇼터도 있었다. 축하 파티 자리에 에스페란자 스팔딩과 다이앤 리브스도 있었지만, 마음은 온통 웨인 쇼터에게 향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위대한 작곡가예요”라고 말했고 웨인 쇼터도 “고맙다”고 답했다.

웨인 쇼터의 음악엔 무척 어려운 코드와 화성이 있지만 직관적으로 아름답다. 마일즈 데이비스의 1968년 앨범 < Nefertiti > 속 웨인 쇼터의 곡들은 혁명적이다. 마일즈는 ‘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길래 이런 혁신적인 곡을 쓰냐’라고 얘기했었고 녹음실에서 웨인 쇼터의 작곡 노트를 뺏어서 ‘우리 이거 녹음하자’란 식으로 작업하곤 했다고 한다.

조니 미첼 이야기가 나왔으니 2007년 곡 ‘Bad dreams’를 권하고 싶다. 한동안 음악을 안 하다가 내놓은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멋지다. 인간 문명의 역효과를 다룬 곡으로, 미첼에게 직접 노랫말에 관해 물어봤고 ‘Bad dreams are good in the great plan(나쁜 꿈도 좋아 커다란 계획 아래에서는)’이란 문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 방향성이 좋든 나쁘든 간에 어딘가 정상에 오른 사람들의 시각인 것 같아서 인상적이었다.

조니 미첼과 웨인 쇼터의 음악을 조금 더 소개해준다면?
우선 < Nefertiti > 음반의 ‘Fall’을 들고 싶다. 앨범 단위로는 브라질 음악가 밀톤 나시멘토와 함께한 < Native Dancer >(1975)다. ‘Ana maria’는 웨인의 부인 아나 마리아 쇼터에 관한 이야기다. 예전에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하다 폭발한 사건이 있었고 그 비행기에 아나 마리아가 있었다.

잠시 델로니어스 몽크를 언급했다. 그의 연주를 선호하는 건가?
몽크 음반을 틀어놓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약간 축축한 곰팡내도 나는 것 같고. 마커스 로버츠, 설리번 포트너, 베니 그린도 좋아한다. 허비 핸콕과 키스 자렛의 영향력이야 두말할 나위 없다. 해리 코닉 주니어는 백인임에도 흑인 특유의 스윙감을 지녓다. 리듬앤블루스 피아니스트 제임스 부커와 브랜포드/윈튼 마살리스의 아버지 엘리스 마살리스에게 사사했고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흑인과 어울린 덕분이다.

교육자 정원영과 아티스트 정원영은 무엇이 다른가?
학교에 안 갔다면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고 다른 음악을 했을 것이며 생활도 엉망진창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버클리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 재즈 거장 정성조 선배로부터 예대 교수 제의가 왔다. 아무 계획에 없던 일이라 처음엔 거절했지만, 부모님의 조언으로 결국 승낙했다. 교육자를 안 했으면 음악은 좀 더 자유로워졌을 것이다. 다만 훌륭한 제자들과 음악을 할 수 있는 건 축복이다.

음악 이외의 취미가 있다면?
초등학생 때부터 7~8년간 피아노를 배웠는데 진도가 지지부진했다. 피아노가 치기 싫어 외려 딴짓을 많이 했다. 극동극장을 비롯한 동네 극장에서 영화를 무척 많이 봤다.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친구와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정도였으니까.

버클리 유학 시절 보스턴에서도 영화감상이 취미였다. 주말엔 굉장히 개성적인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곤 했는데 존 워터스의 < 핑크 플라밍고 >(1972)나 틴토 브라스의 < 칼리굴라 >(1991)같은 작품을 봤다. 상영시간표를 꼼꼼히 챙겼고 한국에서 못 봤던 영화들도 비디오 가게에서 대여해 봤다. 김광민이 보스턴에 오자마자 세르지오 레오네의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를 보러 갔다.

음악계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음악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금도 음악 듣는게 가장 큰 취미며 행복이다.

인터뷰 : 염동교, 임동엽, 장준환, 정다열, 손민현, 김성욱
정리 : 염동교
사진 : 임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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긱스(Geeks) ‘Heartbreak hotel (Feat. DeVita)’ (2020)

평가: 2.5/5

듀오와 어울리는 보컬을 뽑아내는 능력은 여전하다. 드비타의 힘을 덜어낸 목소리가 멜로디에 녹아 들어가 나른한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데, 긱스의 래핑이 주인 자리를 든든히 차지하고 있어 좋은 균형감을 보여준다. 독창성과 가깝지는 않더라도 청량한 대중 친화적 노래를 주조하여 이들이 건재하다는 것을 알린다. 다만 릴보이의 플로우가 기시감이 든다는 점과 여름에 좀 더 어울리는 사운드 톤으로 인해 돌파구가 되기는 부족하다. 간결한 멜로디 라인으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곡임은 확실하다.